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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가해 2월21일 (녹) 연중 제6주간 금요일
[수도회] 믿음과 실천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제1독서 : 야고 2, 14 - 24. 26
† 복음 : 마르 8, 34 - 9, 1
★ 야고보서는 실천이 없는 믿음은 소용없다고 가르친다. 곤란한 형편에
놓인 형제에게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말로만 위로하려한다면 이는
실천 없는 믿음이며 죽은 믿음이다. 믿음은 실천으로 완전해지기 때문이다
(제1독서).
★ 예수님께서 제자 직분의 길을 가르쳐 주신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자신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수님과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오히려 목숨을 구할 것이다(복음). 예수님께서 제자
직분의 길을 가르쳐 주신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자신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수님과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오히려 목숨을
구할 것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제자의 길을 걷는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오늘날의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낯선 성찰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천주교 신자, 곧 그리스도인이라는 자의식을 갖는 것과 제자의
길이 일치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소리 없이 자리 잡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세 없이도 충분히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점점 많아진 것이 어쩌면 오늘날 교회가 겪는
여러 갈등과 문제의 뿌리인지도 모릅니다.
신자 수가 늘어난 만큼 주님의 참된 제자의 길을 걷는 이들의 수가 늘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여러 가지 체험을 통해서 실감합니다. 복음이
요구하는 가치관과 규범을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를 판단할 때 도외시하는
것을 ‘정교분리’라는 이름으로 당연하게 생각하는 신자들이 많은 것도 한
예입니다. 이 점은 분명 우리의 신앙이 놓인 위기의 심각한 표징일 것입니다.
예수님과 교회의 가르침 중에서 마음에 드는 부분만 감탄하고 좋아하되,
전적인 헌신과 조건 없는 마음으로 제자의 길을 걷는 것을 무시하는 모습이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일찍이 이러한 병폐를 비판한
사람이 덴마크의 철학자 키르케고르입니다. 그의 다음 말은 오늘의 우리도
경청할 가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감탄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분을
따르는 ‘제자’를 부르러 오셨으며, 그분을 따른다는 것은 바로 그분의 삶을
따라 사는 것을 뜻한다.”
오늘의 제1독서를 통하여 우리 신앙이 마주하고 있는 고민이 교회의
초창기부터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우리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제자의 길을 걷는, 실천하는 믿음을 살아갈 때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지닐 자격이 있음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사랑의 십자가 |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2월21일 연중 6주간 금요일 (마르 8,34-9,1)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마르 8,34-9,1
사랑의 십자가
우리는 살아가면서 흔하게 십자가를 봅니다. 성당이나 교회의 수많은 십자가를
볼 수 있고,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다니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의미를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사실 십자가는 고대 로마인들이 범죄자들을 처형할 때 사용하던 도구였습니다.
사람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은 고대 세계에서 가장 고통스럽고 치욕적인
형태의 잔인한 형벌이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생각하면 사랑보다는 고통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처형되고 난 이후
십자가는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신성하고 중요한 상징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건 이후 십자가는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를 위해
기꺼이 당신 자신을 희생제물로 내놓으심으로써 인간에게 속죄와 구원을
가져다 주셨다는 의미를 상징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십자가는 어리석은 것이었지만(1코린 1,23. 갈라5,11)
하느님께서는 패배처럼 보이는 것에서 승리를, 허약한 것처럼 보이는 것에서
활기 넘치는 힘을 드러내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이들은
십자가에 담긴 우리를 위한 사랑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멸망할 자에게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1코린 1,18)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십자가에 담긴 구원의 능력을 알았기에 자발적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고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었습니다. 바오로는 말합니다.
“나에게 이로웠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필리3,7-9) .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갈라2,20).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
(갈라6,14). 이제부터 인생의 주인은 ‘나’가 아니라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8,34)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십자가는 선물이요,
은총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억지로 질질 끌고 갈 것이 아니라 차라리
짊어지는 것이 가볍습니다”(성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자기 것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버린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담을 그릇을 준비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빈자리가 없으면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받아들일 수 없는 법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받아들이려면 먼저 빈자리를 마련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성직자 수도자들은 결혼을 하지 않습니다. 온전한 봉헌을 위해서 입니다.
그래서 존경도 받습니다. 그들은 부모, 형제 친척은 물론 부와 명예를 버리고
주님을 따른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외적인 것 못지않게 자기 자신을 얼마나
버리고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혼자 산다는 핑계로 자기중심적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예수님중심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철저히
자기 울타리를 만드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익숙해져 있는 나의 낡은 삶의 양식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믿음이 약한
탓입니다. 나를 비우지 않고는 결코 주님께서 거처하실 곳이 없다는 것을
안다면 십자가를 기꺼이 져야 합니다. 때로는 하고 싶어도 하지 말아야 하고,
때로는 하기 싫어도 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내 안에 건설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십자가
급하게 출력해야 하는 문서가 있었는데, 프린터에 문제가 있는지 아무런
반응이 되지 않습니다. 알고 보니 잉크가 없다는 표시등이 켜져 있더군요.
미리 구입해 놓은 잉크가 없어서, 인터넷 쇼핑몰에 들어갔습니다. 네 종류의
잉크를 구입해야 하는데, 그 가격이 13만원이나 합니다. 구입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사용한지 벌써 6년이나 된 이 프린터의 지금 현재 가격이 궁금해서
찾아보았지요. 그리고 그 가격을 확인한 순간 갈등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프린터의 가격이 정품잉크 포함해서
12만원이었습니다. 잉크만 사는 데는 13만원, 프린터와 잉크 함께 살 때는
12만원이라는 말도 안 되는 계산법이 어디 있습니까?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세상 안에는 이런 식의 말도 안 되는 계산법이
종종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내 기준의 계산법이 반드시 맞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계산법도 있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는 식의 내 이익이 우선인 계산법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이런 계산법이 정답일 수 없겠지요.
사실 예수님의 계산법 역시 보통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든 것입니다.
십자가의 신비를 그 누가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라야 한다고 하지요. 죽음과 연결될 수도 있는
고통의 십자가를 버려야 할 짐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십자가를
기쁘게 짊어 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가득 담겨 있는 주님의 계산법, 겉으로는 이해하기 힘들어도 사랑의
관점으로는 반드시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이 계산법을 우리
역시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이라는
구원의 길이 이 계산법의 결과로 내게 다가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40대 대통령이었던 로널드 레이건 (Ronald Reagan)은 말년에
치매를 앓았지요. 그런데 그의 아내 낸시는 남편이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옆에서 돌보았다고 합니다. 의사소통이 불가능하고 과거의 기억을 나눌
수도 없으며 어떤 일도 함께 할 수 없지만, 그녀는 남편이 치매를 앓기
전이나 후나 한결 같았습니다. 어떻게 한결 같을 수 있냐는 질문에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냥 받아들이면 됩니다. 아침에 일어나 하루가 시작됐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상대방에게 다가서면 됩니다. 그저 사랑하면 되지요.”
낸시는 남편의 치매를 받아들였습니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지요. 그러나
사랑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변함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반드시 지키라고 했던 ‘십자가’를 받아들이기란 정말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이 가득 담겨 있음을 기억하면서 그냥 받아들이면 됩니다.
각종 거부할 이유를 찾기보다는 그냥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랑을 간직하면
됩니다. 그때 주님의 말씀처럼 목숨을 구할 수 있는 길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얼굴에서 빛이 나는 사람은 주변의 시선을 모으고, 마음에서 빛이 나는 사람은
주변을 밝힙니다(손정은).
레이건 전 대통령과 그의 부인 낸시 여사입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이라는 그림을 아십니까? 그의 후원자였던
루도비코 스포르차 공의 요청으로 밀라노에 있는 산타마리아 델레그라치에
수도원 안에 있는 서당의 식당 벽화로 그린 그림이지요. 이 그림을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자그마치 7년 동안 그렸다고 합니다. 7년이라는 시간이 어떻게
짧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이 그림을 그리기위해 쏟아 부은 돈 역시 엄청났습니다. 많은 돈을
들여서 예수님과 열 두 제자의 모델을 직접 구했고, 처음에 예수님 같았던
모델이 타락해서 6년 뒤에는 유다처럼 변했다는 사연으로 유명하지요. 그림
안에 포도주를 그리기 위해 예수님 당시 생산된 포도주를 구하러 다니기도
했으니까 얼마나 정성을 기울였는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림 하나를 위해 쏟아 부은 이 정성과 노력. 그래서 가장 위대한 작품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내 자신의 정성과 노력을 생각해보세요.
혹시 아무런 정성도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다 얻으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 인천교구 성소 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기타] “정말 잘 살아야 한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가끔은 자신의 죽음 앞에 서 보십시오.'
2014년 가해 2월21일 연중 제6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마르코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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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다는 것. 이처럼 명확한 진실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쉽게 잊고 살아가는 진실이기도 합니다.
아니 생각하고 싶지 않은 진실일지도 모릅니다.
내 안에 어떤 갈등이나 미련으로 혼란을 느낄 때, 혹은 욕망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낄 때, 저는 의도적으로 죽음 앞에 선 자신을 보려고 합니다.
가장 솔직한 내 삶과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바라보는 죽음에 대한 시각은 보통 둘로 나누어집니다.
언젠가는 자신에게도 찾아온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자신하고는 상관없는
듯이 살아가거나 도망가려는 태도가 그 하나일 것이고, 두렵지만 받아들이고
그 찾아올 시간을 준비하려는 태도가 또 다른 하나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후자의 태도를 취해야 함은 지극히 당연한 태도일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런 것만 같지는 않습니다.
가끔 답답한 말을 하는 이들을 만나곤 합니다.
“죽을 때가 가까워지면 그 때 회개하겠습니다. 진실한 회개가 있으면 용서해
주시는 분이 하느님이 아니십니까?”
이런 이들이 잊고 있는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죽음은 도둑처럼 예고 없이 찾아온다는 것과, 또 하나는, 평상시의
우리 마음이 마지막 선택을 하게 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 동안 참 많은 신자들의 임종을 지켜보며 느끼는 것은 단 한가지입니다.
“정말 잘 살아야 한다!” 잘 죽기 위해서는 정말 잘 사는 수밖에는 없다는
내면의 소리를 항상 듣게 됩니다.
우리는 영원한 삶이라는 그분의 약속을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약속에는
조건이 있음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조건이 무엇인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조건을 채우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난 후, 그분의 자비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수도회] 길동무 같은 십자가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2월21일 연중 제6주간 금요일
마르 8,34-9,1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길동무 같은 십자가>
제게 지워지는 가장 큰 십자가가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아무래도 제게
있어 가장 큰 십자가는 제게 과중한, 동시에 과분한, 그래서 몹시 부담스러운,
그래서 늘 도망가고 싶은 ‘직책’이었습니다.
꽤나 이른 나이부터 제게 그 부담스런 ‘직책’이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직책이란 것이 형제들의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고, 또 앞장서서 모범을 보여야
하고, 공동체를 이끌어야 하는 부담스러운 것이었기에, 또 옷에 잘 맞지 않는
옷같이 불편했기에, 늘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도망가려고 하면 할수록, 단호하게 거절하고 사양할수록 더
제게 맡겨지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많은데, 하고 싶은 사람들도
많은데 굳이 하기 싫다는 사람에게 계속 일을 맡기는 장상들이 밉기도 하고
이해하기 힘들 때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요즘 와서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지워주시는
신비의 십자가였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 직책을 통해서 더 많이 봉사하고, 그
책책을 통해서 더 많이 사랑하고, 그 직책을 통해서 형제적 친교를 위해 더 깊이
투신하라는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고부터는 마음이 많이 편해졌습니다.
십자가라는 것, 참으로 묘합니다. 피하려고 하면 피하려 할수록 더 크게
다가옵니다. 도망가려고 하면 할수록 더 집요하게 쫓아옵니다.
그래서 십자가 앞에서는 차라리 날 잡아 잡수세요, 하고 두 손 두 발 다 드는
것이 오히려 낫습니다. 마음 크게 먹고, 그러려니 하고, 그냥 십자가를 껴안는
자세가 더 필요합니다. 있는 그대로, 주어지는 그대로 십자가와 더불어 함께
살아가려는 관대한 마음이 요구됩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누구에게나 끊임없이 다가오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 때로 정말 수용하기 힘듭니다. 때로 너무나 억울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정말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내 십자가만 무거운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할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이 땅에 발붙이고 살아가는 그
누구에게나 십자가는 필수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십자가 없이 살아가는
사람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 십자가는 내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목숨 붙어있는 한 끝까지 따라다니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렇다면 그 십자가 바꾸려하지 말고, 떨쳐버리려 하지 말고, 몸부림치지 말고,
그저 친구처럼, 길동무처럼, 연인처럼 여기며 그렇게 살아갈 일입니다. 그렇게
마음먹게 될 때 신기한 일이 한 가지 생깁니다. 그렇게 무겁게 느껴지던 십자가가
가벼워지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나를 짓누르던 십자가가 편한 멍에로 변화되는
기적이 생겨납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부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수도회] 믿음과 실천 -하느님의 벗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2월21일 연중 제6주간 금요일
야고2,14-24.26 마르8,34-9,1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마르 8,34-9,1
믿음과 실천 -하느님의 벗-
오늘은 ‘믿음과 실천’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오늘 1독서 야고보서를
보면 ‘믿음’과 ‘실천’이란 말이 각각 12회, 11회 나옵니다.
요한 사도가 ‘사랑’을 강조했다면 바오로 사도는 ‘믿음’을 강조했고
여기에 야고보 사도는 믿음에 더해 ‘실천’을 강조합니다. 실천이 없는 믿음의
공허함을 한없이 강조합니다.
사실 사랑이, 믿음이 공허한 것은 행함의 실천이 빠졌기 때문입니다.
사랑 역시 명사가 아닌 동사이듯 믿음 역시 명사가 아닌 동사입니다.
바로 실천하는 믿음의 모범이 아브라함입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사악을 제단에 바칠 때에 실천으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닙니까? 그대도 보다시피, 믿음이 그의 실천과 함께 작용하였고,
실천으로 그의 믿음이 완전하게 된 것입니다. 하여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믿으니, 하느님께서 그것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느님의 벗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실천으로 입증되는 믿음이요, 실천으로 완전해 지는 믿음입니다.
아브라함뿐 아니라 성경의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그랬고, 주변에서 감동을
주는 무수한 믿음의 형제들의 삶이 그러합니다.
믿음과 실천이 하나 될 때 비로소 하느님의 벗이요 삶의 허무나 무의미의
어둠이 끼어들지 못하는 참으로 영육으로 건강한 삶입니다.
사람은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의롭게 됩니다.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 바로 이런
믿음과 실천이 일치 된 삶을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한 말씀으로 요약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바로 실천으로 입증되는 믿음의 길, 구원의 길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군중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라는 대목에서
주님의 위의 명령이 믿는 모든 이들에게 보편적으로 해당되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 모두가
실천의 동사입니다. 이런 실천의 동사 없는 믿음은 말 그대로 죽은 믿음입니다.
영어 주석의 마지막 간명한 한 말씀이 통쾌합니다.
“There is no other way”(거기에 다른 길은 없다).
실천하는 믿음의 모범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주님을 따랐던 모든 성인들이 이 길을 통해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수도자는 물론 믿는 모든 이들 역시 이 길 말고는 구원의 길은 없습니다.
삶이 공허하고 허무한 것은, 무의미한 것은
바로 이 십자가의 길에서 벗어났기 때문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랑도, 믿음도 추상이 아닌 동사의 현실입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실천으로 표현되는 사랑이요 믿음입니다.
이 길에 항구할 때 비로소 하느님의 벗이요 수행자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이 십자가의 길에 항구할 수 있는 사랑과 믿음을 주십니다.
"행복하여라, 주님 계명을 큰 낙으로 삼는 이!"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 [서울] 사람의 목숨을 세상 걸로만 본다면 비인간
2014년 가해 2월21일 연중 제6주간 금요일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마르 8,34-9,1
사람의 목숨을 세상 걸로만 본다면 비인간
신앙생활이란 두 생명이 사람에게 있다고 믿어 이에 맞게 사는 거지요.
하나는 생물학적 생명이고 또 하나는 비물질적 생명인 혼(精神)입니다.
사람에게서 정신을 빼면, 정신 나갔다. 즉 사람 아니라는 뜻. 맞지요?
육체의 숨이 끊기면 물질계와 연결은 끊기지만 주체인 혼은 그대로입니다.
이에 인간의 가치운운, 역사 진실 문화의 차원을 논하게 되는 거지요.
영혼과 육체가 결합된 사람 목숨을 물질로만 보는 사람, 인간이 아니지요.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마르코 8,35~36)”
-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 [인천]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2014년 가해 2월21일 연중 제6주간 금요일
(마르코 복음 8장 34 ~ 9장 1절)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본당을 이동한지 한 달 정도 되었는데요. 이동하기 전이나 얼마 안 되었을 때
저를 소개하는 몇몇 분들이(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 분들이) ‘정말 좋은 신부님이
가신다..’ 는 소개를 해 주셨던 거 같습니다. 과한 칭찬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은근히 기분이 좋았고, ‘새로 가는 본당에 있는 복잡한 문제나 일도 내가 가면
술술 해결 될 거야..’ 하는 교만한 생각이 있었던 거 같은데요.
막상 한 달이 지나고 이러저러한 문제를 대면하다 보니 쉽지 않겠다.. 는 생각도
들고, 한계도 느끼고,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많이 됩니다. 아이들도
그렇고, 작업해야 할 일들도 그렇고, 오래 동안 문제가 되어온 일들도 그렇고,
신자 분들의 마음도 그런데요.
어제 저녁부터는 그냥 답답하고 외면하고 피하고 싶은 마음만 있더라고요.
왜 그런지 한참을 고민하고 생각해 보았는데요. 오늘 오전에 복음을 읽으면서
그것이 무엇인지 조금 감을 잡은 거 같습니다. 앞부분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먼저 자신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거 같다.. 는 생각이 듭니다. 제 마음
속에 알게 모르게 ‘이러저러한 일을 했던 신부야..’ 하는 마음이 있어서 신자들이
저를 그 수준에서 바라봐 주길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던 거 같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거랑 비슷할지 모르겠습니다. 예전에 모금 강론을 하러 다닐
때 미사 전과 후에 신자들의 시선이나 표정이 달랐습니다. 꼭 그런 건 아니지만
팔 물건을 준비할 때는 ‘또 물건 팔러 왔네...’ 하는 시선이었지만, 미사하고
강론을 듣고 나면 하나라도 더 사주고 싶은 그런 모습이 있었던 거 같은데요.
지금 제 모습은 마치 강론도 하지 않고 강론 한 이후에 시선을 기대하는 거
같다.. 는 생각이 듭니다.
또 제가 처음 전 본당에 갔을 때 말도 없는 신부가 뭘 할 수 있을까.. 하는
시선이 있었는데, 3년이 지난 뒤에는 신자들의 시선이 달랐거든요. 그런데
지금 저는 마치 3년 살고 난 이후에 시선을 새로운 신자들에게 기대하고 있는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제 앞에 있는 신자들은 새로운 분들이고 제 과거의 일들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던 분들인데 그걸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거 같습니다. 그래서 먼저
지난 일들, ‘잘 했다..’ 고 착각하는 일들까지도 모두 내려놓고 버리는 일이
우선 저에게 필요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아마도 그걸 내려놓지
못했던 것이 저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은근히 거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기초적인 작업들을 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조금 있어서
그런 가 봅니다.
신자들을 찾아뵙고 한참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것이나, 아이들에게 더
적극적으로 다가가야 하는 일들, 그리고 작업을 하나하나 만들어 내기 위해서
발로 뛰어야 하고, 갈등과 분열과 상처를 어루만지기 위해 부단히 기도하고
모아들이고자 하는 일들을 건너뛰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기 위해서는 그 고생스러운 일들을 건너뛰어서는 안 된다... 공동체를
일구기 위해서는 다 내려놓고 고생할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고 말씀하시는
거 같습니다.
오늘 하루,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 또 져야 할 십자가는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수녀님이 전에 유치원 원장으로 30년이나 일하셨다고 한다.
그걸 알고 나니 수녀님의 행동이 조금 이해가 되었다. 늘 음식을 챙겨주시고
잘라서 접시에 얹어 주시는 모습들이 그랬는데.. 어제도 점심을 먹으면서
회장님도 챙기시고, 나도 챙기시고, 사무장님도 챙기셨다.
그걸 보고 내가 수녀님께 이런 이야기를 드렸다.
“수녀님, 대부 성당을 이름을 고쳐야 할 거 같아요. 대부 유치원으로요~^^:”
- 인천교구 밤송이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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