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서속으로 -
☆ 2014년 가해 2월2일 (녹) 연중 제7주일
[수도회] 성인(聖人)이 되는 길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제1독서 : 레위 19, 1 - 2. 17 - 18
† 제2독서 : 1코린 3, 16 - 23
† 복음 : 마태 5, 38 - 48
오늘 전례
▦ 예로부터 진정한 종교인은 거룩함과 완전함을 추구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거룩하고 완전한 길로 나아가는 것은 중요한 목적입니다.
그러나 거룩함과 완전함은 외적인 경건함에서가 아니라 이웃에 대한 사랑,
더 나아가서 못살게 굴며 해롭게 하는 원수 같은 자에 대한 사랑과 자비로
드러난다는 것을 오늘의 미사 독서에서 듣게 됩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이웃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고 자비로운 마음을 갖는 데 과연 얼마나
충실했는지 성찰하며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 주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 하느님께서 그러하시듯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이르신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제1독서).
★ 이 세상의 지혜는 하느님께는 어리석음일 따름이다. 복음 선포자는
신자들을 위해 존재하며, 신자들 모두는 하느님의 것인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제2독서).
★ 예수님께서는 고대법의 근간인 ‘동태 복수법’을 폐기하신다. 그 대신에
원수마저도 사랑하라고 가르치신다. 이것이 불의한 이에게도 비를 내려
주시는 아버지 하느님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는 길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제1독서에서 우리는 레위기의 유명한 말씀을 듣습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르신 말씀입니다. “나, 주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복음에서도 우리는 산상 설교에서 내리신
예수님의 명령의 요약이라 할 수 있는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실 놀랍기 그지없는 아찔한 말씀입니다. ‘인간이 어떻게 하느님처럼 거룩하게
되겠는가? 인간이 어떻게 하느님처럼 완전하게 되겠는가?’ 하며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레위기에서 이 거룩하라는 명령이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로 요약되는 이웃 사랑의 계명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에 여기서 거룩함이란 우리에게 멀리 있는
신비스러운 체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고 함께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이웃에 대한 구체적인 사랑의 계명을 실천할 때 도달할 수 있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한편 복음에 나오는 완전해지라는 명령에 앞서 예수님께서는 원수에 대한
사랑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이로써 이웃 사랑의 명령은 더 넓게 확장됩니다.
이 구절과 구조상 병행하고 있는 루카 복음의 말씀을 들어 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분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이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6,35-36).
결국 완전함이란 흠 없는 완벽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불의한 이에게도
비를 내려 주시는 하늘의 아버지의 자녀가 되고자 하는, 그분을 닮아 자비로운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가르침이야말로 우리가 세상의 그 어떤
기준과도 바꿀 수 없는, 주님께서 직접 우리에게 주신 생명의 길입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모두를 내어 놓는 사랑|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2월23일 연중 제7주일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 마태 5,38-48
모두를 내어 놓는 사랑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허물과
잘못, 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 사랑의 절정은 당신의 외아들을 우리에게 보내 주신
것이고, 아드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의 죽음까지도 받아들이셨습니다. 이
시간 그 큰 사랑에 머물 수 있기를 희망하며 우리도 주 하느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은총이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배은망덕”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를 사랑해
주십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없이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위해
당신의 외아들을 내 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당신 목숨을 담보할 만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도 그
사랑을 살아야 합니다. 용서하는 사랑, 내어놓는 사랑을 살아야 합니다.
그 큰 사랑을 받으면서도 우리의 마음은 왜 그리 좁은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커졌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면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고 있습니다.”(루카23,34).하시며
먼저 당신을 못 박는 이들을 용서하시고, 아버지 하느님께 간구하셨습니다.
그리고 “숨을 거두실 때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23,46).
하셨습니다. 첫 순교자 스테파노는 사람들이 자기를 성 밖으로 몰아내고
돌을 던질 때에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고,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7,60).
하고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스테파노는 주님께서 보여주신 대로 죽기까지 사랑을 살았습니다. 주님께서
용서하신 것처럼 스테파노도 반대자들을 용서하였습니다. 이 용서는
그리스도교의 본질적 요소입니다. 우리 모두가 반드시 얻어야 할 구원은
바로 하느님의 용서입니다. 하느님의 용서가 없으면 우리가 무슨 선행,
무슨 공로로 하느님 앞에 나설 수 있겠습니까?
얼마 전 경주 마우나 리조트 체육관 천정이 무너지면서 10명의 사망자와
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는데 그 중에는 박주현 라파엘라학생도 있었습니다.
장례미사가 거행된 후 라파엘라 학생의 아버지는 눈물을 삼키며 말씀
하셨습니다. “리조트 관계자, 직원 여러분, 슬퍼하지 마십시오. 우리 아이가
그렇게 다니고 싶었던 학교의 학생, 직원들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우리 딸은
다 용서할 겁니다. 우리 애는 길을 잘 찾지 못해요. 너무 울면 애가 더 길을
못 찾을 것 같아요. 그래서 참는 거예요. 여러분도 울지 마세요.”
참으로 용서는 사랑의 고귀한 표현입니다. 용서는 우리사회가 인간다운
사회가 되기 위하여 꼭 필요합니다. 각박한 사회, 미움과 분열의 골이
깊어가는 이 시대에 용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지역, 계층간, 부모와
자식간, 부부간, 형제간 등 상처 난 곳곳에 이해와 양보의 덕이 필요합니다.
그 뿌리에는 용서가 있습니다. 용서는 예수님의 마음이요,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시는’ 주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닮아야 합니다. 상대에 따라서 달라지거나 있다가 없다가 한다면 그것은
주님께서 사랑한 그 사랑이 아닙니다. “국물이 뜨거울 땐 국물 속의 기름이
잘 나타나지 않듯이 사랑이 뜨거울 땐 상대편의 단점이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국물이 식을 땐 국물 속의 기름이 떠오르듯이 사랑이 식을 땐 상대편의
단점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어떤 이에게 부족함이 보이거들랑 ‘지금은
사랑할 때’라는 사실을 일깨우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마태5,46).
변함없는 사랑, 아픔을 주는 사람까지도 포용하고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신 방법은 사랑할 수 있는 한 끝까지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끝까지 사랑할 수 있기를 갈망해야 하겠습니다.
예수의 데레사 성녀는 “오직 사랑만이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하고 말합니다. 그리고 “삶이 끝날 때 우리는 사랑으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십자가의 성요한). 사랑하는 마음을 지니면 모든
것이 선하게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 시간, 부디 더 많이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왕, 다윗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시기 질투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시기하여 창을 이용하여 죽이려고 하였지만 두 번이나 몸을 피할 수 있었고,
주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셨으므로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사울은 필리스티아인들의 손을 이용하여 다윗을 죽이려고 사위로 삼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점점 더 다윗을 두려워하게 되어 평생 그와
원수가 되었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기로 작정하지만 사울의 아들 요나탄은 다윗을 무척
좋아하였기 때문에 다윗을 감싸주고 다윗이 죽을 고비를 넘깁니다.
그러던 어느날 사울이 동굴 안에서 뒤를 보고 있었습니다. 다윗에게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역전의 기회가 왔습니다. 그러나 겉옷 자락을 자른
후에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인 나의 주군에게
손을 대는 그런 짓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어쨌든 그분은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가 아니시냐?”(1사무24,7) 다윗은 사울을 살려 주었습니다.
이 사연을 안 사울은 “네가 나보다 의로운 사람이다. 내가 너를 나쁘게
대하였는데도, 너는 나를 좋게 대하였으니 말이다. 주님께서 나를 네 손에
넘겨 주셨는데도 너는 나를 죽이지 않았으니 네가 얼마나 나에게 잘해
주었는지 오늘 보여준 것이다. 누가 자기 원수를 찾아 놓고 무사히 제 갈
길로 돌려보내겠느냐? ..이제야 나는 너야말로 반드시 임금이 될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스라엘 왕국은 너의 손에서 일어설
것이다”(1사무24,19-21).
그래놓고 다시 사울은 이스라엘에서 뽑은 부하 삼천 명을 데리고 다윗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사울은 진지 한가운데에서 자고, 그의 주변에는
군사들이 야영하고 있었습니다. 역으로 사울이 죽을 수 있는 처지가
되었지만 기름부음받은이에게 손을 대지 못하게 하고 머리맡에 있는
창과 물병을 가지고 나오게 하였습니다. 결국 사울은 다윗에게 “내가
잘못했다”고 선언합니다. 다시는 해를 끼치지 않겠다. 내가 정말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다고 고백합니다. 사울은 자기의 시기 질투, 욕심을 버리지
못하였고 다윗은 끝까지 원수를 사랑하였습니다. 끝까지 하느님의 뜻을
선택하였습니다.
우리도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새겨듣고, 알게 모르게 상처를
주고 아프게 하였던 이들에게 용서를 청하고 또 사랑해야 합니다. 또한
잘못에 대해 용서를 청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해줄 뜻을 품으십시오.”
(로마12,17)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콜로3,13). 베드로 첫째편지 3장9절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악을 악으로 갚거나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말고 오히려 축복해
주십시오. 바로 이렇게 하라고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복을 상속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만큼 우리도 그 사랑으로 이웃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면 할수록 하느님의 목소리가 들리고 하느님의 모습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보이지 않던 이웃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김인호). 하느님의 사랑은 이웃사랑을 통해 드러나게 되는 법입니다.
혹 나를 아프게 하고 상처를 준 사람이 있다면 더 많이 사랑해 주지
못했음을 용서 청하고 자비를 간구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는 은혜를 청했으면 좋겠습니다. 미움과 증오,
시기질투의 마음을 버리고 서로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용서하십시오.
사랑에 사랑을 더할 수 있는 은혜를 간구합니다. 사랑합니다.
그래도 사랑하라.
사람들은 불합리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비논리적이나,
그래도 사랑하라..
당신이 선한 일을 하면
이기적인 동기에서 하는 것이라고
비난받을 것이다.
그래도 좋은 일을 하라.
당신이 성실하면 거짓된 친구들과
참된 적을 만날 것이다.
그래도 성실하라.
당신이 선한 일을 하면
내 일은 잊혀 질 것이다.
그래도 선을 행하라.
당신이 정직하고 솔직하면
상처받을 것이다.
그래도 정직하고 솔직하라.
당신이 여러 해 동안 만든 것이
하룻밤에 무너질지도 모른다.
그래도 만들라.
사람들은 도움이 필요하면서도
도와주면 공격할지 모른다.
그래도 도와줘라.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주면
당신은 발길로 채일 것이다.
그래도 가진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주어라 -마더 데레사 -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받으려고 하기 때문에
2014년 가해 2월23일 연중 제7주일
어렸을 때 친구와 싸웠던 기억 하나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별 것도 아닌데 왜 그 당시에는 억울해서 어쩔 줄을 몰랐지요. 그 싸움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제가 어디를 가다가 한 친구를 툭 치게 된 것입니다. 친구는 “왜 때려!”
하면서 인상을 썼고, 저는 “내가 너를 일부러 때리려고 한 것은 아니고,
한눈팔다가 너와 부딪힌 거야. 미안해.”라고 말했지요. 하지만 이 친구는
억울하다면서 자기도 한 대 저를 때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서로
공평하다는 것이지요.
저 역시 그래야 공평할 것 같아서, “그래, 한 대 때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싸움이 난 것입니다. 저는 그저 실수로 지나가다가 툭
건드린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이 친구는 있는 힘껏 저를 때렸거든요. 저는
“왜 이렇게 세게 때려!”라고 항의를 했고, 불공평하다는 생각에 다시 이
친구를 세게 때렸습니다. 이렇게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공평하다는 것은 어느 쪽으로도 기울어지지 않는 정확함이지요. 그런데
위의 경우 어떻게 해야 공평할 수 있었을까요? ‘남의 떡이 더 크게 보인다.’
는 속담도 있는 것처럼, 눈에 보이는 물건의 정확한 나눔조차 쉽지 않습니다.
하물며 내 마음이 받은 상처의 크기에 따라 누가 더 큰 아픔을 겪었는가를
공평하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자기의 기준만을 앞세우기에 내가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힘들어 보일 뿐입니다.
이렇게 세상의 기준으로는 공평함을 따지기가 정말로 어렵습니다. 이 점을
기억하면서 오늘 복음의 시작에 나오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율법을
생각해보십시오. 이는 사람이 자신의 지체를 잃을까 두려워하는 한, 상대에게
악한 행실을 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는 율법입니다. 공평하고
합리적인 율법처럼 보이지요. 그러나 이 율법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악이
나왔는지 모릅니다. 자신의 입장에서는 공평하다는 생각과 행동이
상대방에게는 또 하나의 억울함을 전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악이
계속해서 반복될 수밖에 없었지요.
예수님의 입장은 내가 받은 것을 그대로 돌려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대신 사랑으로 더욱 더 많은 것을 상대에게 되돌려 주는 것이었습니다.
오른뺨을 치면 다른 뺨마저 돌려 대고,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 겉옷까지
내주고, 천 걸음을 가자는 사람에게 이천 걸음까지도 가주는,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이를 위해 기도하는 진정한 사랑의 실천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야 악이 끝나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받으려고 하기 때문에 항상 공평함을 따집니다.
그런데 사람에게 보상을 받을 생각보다, 언젠가 하느님께서 보상해주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완전한 사랑을 하시는 하느님을 닮아 우리 역시 완전한
사람이 되어갈 때, 하느님의 큰 보상을 받아 진정한 주님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사랑만이 겨울을 이기고 봄을 기다릴 중 안다(김 남주).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을 수 있을까요?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마태오 복음 강해')
강론을 준비하다가 다음의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나는 과연 몇 번째의
계단에 서 있을까요? 아직도 계단에 올라서지 못하고, 계단 밑에서
불공평하다고 외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리스도께서는 사랑하라고만 이르시지 않고 기도하라고도 하십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께서 많은 계단을 올라가시어, 우리를 덕의 최정점에
올려놓으셨다는 것을 아시겠습니까?
처음부터 하나씩 세어 봅시다. 불의로 시작하지 않는 것이 첫 계단입니다.
그렇게 시작한 사람이 자기가 당한 대로 되갚지 않는 것이 둘째 계단입니다.
셋째 계단은 우리에게 해를 입히는 자에게 똑같은 식으로 대하지 않고
평정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억울한 고통도 기꺼이 당하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악행자가 빼앗고자 하는 것보다 더 많이 주는 것입니다. 여섯째는
우리에게 잘못하는 이를 미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일곱째는 그런 이를
사랑하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여덟째는 그런 이에게 선을 베풀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아홉째는 원수를 위해 하느님께 간청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얼마나 향상되었는지 확실히 아시겠지요? 따라서
그 상 또한 영광스럽습니다.
- 인천교구 성소 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기타] 용서하라 하십니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마음은 좋은 것을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자신을 위해서 용서하십시오.'
2014년 가해 2월23일 연중 제7주일 복음묵상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태오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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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고자 한다면 이렇게 살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사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이렇게 살 수 있는 사람들이 과연 있을까요?
성인이 되셨던 분들께서는 이렇게 사셨을까요? 인간적으로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일까요?
나름대로 묵상을 해봅니다.
열거된 말씀들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뺨을 친 사람, 재판을 건 사람,
강요하는 사람, 달라하고 꾸어달라고 하는 사람, 원수, 박해하는 사람.
이들은 하나같이 반갑거나 좋아할 수 없는 사람들 혹은 피곤하게 하는
상대들이라는 것입니다.
좋아하지 않는 것을 넘어서 미워할 수 있는 대상들을 말씀하십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용서하라는 말씀이 아닐까요?
그 동안 용서에 대한 묵상은 적지 않게 나누었습니다.
뺨을 맞으면 화가 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당한 만큼 되돌려 주는 것을 넘어
그 이상의 것으로 앙갚음 하는 것이 세상의 논리이고 우리의 심리일지도
모릅니다. 그러지 못하면 바보 소리를 듣게 되지요.
그런데 그래서 얻어지는 것이 무엇일까요? 인류의 역사가 항상 경험했던
가장 바보 같은 짓거리가 미움의 악순환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용서하라 하십니다. 너희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용서하라 하십니다. 모두 지나갈 터이니 미워하는데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위해 살라고 하십니다.
증오가 또 다른 증오를 만들어내듯이, 용서도 또 다른 용서를 낳게 되어
있습니다. 어쩌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악들이 그 힘을 잃게 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은 용서하는 마음이 퍼져나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하여, 예수님께서 당신의 마지막 삶을 십자가 위에서 보여주신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너희를 늘 용서하시는 것처럼, 너희도 용서하라고,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십니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수도회] 너무나 사소한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2월23일 연중 제7주일 - 마태 5장 38-42절
“누가 네 오른 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지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주어라.”
<너무나 사소한>
1969년 7월 남미의 두 국가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 사이에 그 유명하고도
기가 차지도 않아 웃음까지 다 나오는 전쟁이 벌어지는 데, 이른바 ‘축구전쟁’
입니다. 제9회 멕시코월드컵대회 본선출전 티켓을 놓고 최종 예선을 치루는
과정에서 벌어진 전쟁인데, 원정응원을 온 온두라스인들이 엘살바도르의
텃세판정에 항의하다 두들겨 맞고 쫓겨나고 맙니다.
구타 소식은 단숨에 온두라스 전역으로 퍼졌고, 흥분한 온두라스 국민은
그날 밤 보복에 나섭니다. 엘살바도르인의 집을 습격해 방화와 약탈을
저질렀고 거리를 휩쓸고 다니며 엘살바도르사람만 만나면 무자비한 린치를
가했습니다.
엘살바도르 국가수반은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라며 온두라스에
선전포고를 합니다. 야포와 전차, 전투기를 앞세운 엘살바드로 군대는
온두라스를 무차별 공격하게 됩니다. 단 5일 만에 항복을 받아내 전쟁이
막을 내리지만 양국에서 2천명이 넘는 귀중한 생명이 희생되었습니다.
물론 양국 사이에 오랜 갈등이 있었지만, 축구로 인해 전쟁을 벌였다는 것,
너무나 웃기는 일이 아닌가요? 축구라는 것, 경기를 통해 즐기라고, 서로
스트레스를 풀라고, 스포츠맨십을 발휘하며 서로 우정을 쌓아가라고 시작된
운동인데, 적당 선에서 끝냈어야지 목숨까지 걸다보니 그 결과가 전쟁이요,
죽음인 것입니다.
우리가 맺어나가는 이웃들과의 관계 역시 비슷한 양상을 보이기도 합니다.
이웃은 왜 존재하며, 왜 우리에게 다가옵니까? 서로 도와주라고, 서로 더불어
행복하게 지내라고, 서로를 통해 성장하라고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선물이
이웃들이 아닌가요?
그러나 때로 너무나 사소한 문제로 인해 그 관계가 ‘와르르’ 허물어집니다.
허물어지는 원인이 뭔가 생각해보면 ‘축구전쟁’처럼 너무나 웃기는 것일 때가
많습니다.
스쳐지나가는 작은 말 한 마디, 누군가가 퍼뜨린 근거 없는 소문, 작은 오해,
서로간의 관점 차이, 너무나 사소하고 세세한 문제로 인해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사실 눈 한번 찔끔 감으면, 귀 한번 꼭 막으면, 모르는 채 한번 하면, 심호흡
크게 한번 하고 나면 순식간에 다 날아갈 깃털 같은 것들입니다.
인간관계 안에서 자주 체험하는 일입니다. 가끔씩 내 쪽에서 크게 한번
물러서서 크게 한번 양보하면 그렇게 치열하게 대립각을 세우고 달려들던
상대방도 이편에서 먼저 보여준 의외의 모습에 움찔하고 놀랍니다. 그리고
그쪽도 크게 한 걸음 물러섭니다. 그 순간 양쪽 다 그 동안 아무 것도 아닌
것에 이렇게 우리가 목숨을 걸고 있었구나, 하며 후회하면서 원상태로
복귀합니다.
이렇게 인간관계 안에서 끝도 없는 대치상태, 그로 인한 고통의 원인의
출발점은 너무나 사소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인간 조건을 잘 파악하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습관적으로 크게 양보하고, 크게 물러서며, 바보처럼
살아갈 것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누가 네 오른 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지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주어라.”
-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부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수도회] 성인(聖人)이 되는 길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2월23일 연중 제7주일
레위19,1-2.17-18 1코린3,16-23 마태5,38-48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 마태 5,38-48
성인(聖人)이 되는 길
오늘 말씀 묵상 중 떠오른 주제는 ‘성인’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 모두 너나할 것 없이 성인이 되라 불림 받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유일한 성소는 거룩한 사람,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비상한 성인이 아니라 본래의 ‘참 나’가 되는 평범한 성인입니다.
바로 이게 우리 삶의 유일한 목표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간절한 소망도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레위기의 말씀만으로는 부족하신 지, 주님은 마태복음을 통해서 거푸
말씀하십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두 말씀 다 ‘되어야 한다.’라고 명령조로 말씀하십니다.
거룩한 사람이나 완전한 사람이나 내용은 똑같습니다.
바로 하느님을 닮은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닮을수록 성인이 됩니다. 삶은 선물이자 과제입니다.
우리 모두 하느님의 선물로 세상에 주어졌고 평생과제가 부여되었으니
바로 성인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성인이 되는 길’에 대한 묵상 나눔입니다.
첫째, 기도를 통해 성인이 됩니다.
성인치고 기도하지 않은 분은 하나도 없습니다. 성인의 우선적 특징은
기도입니다. 성인들에게 기도는 호흡처럼 거의 자연스런 현실이었습니다.
어제 무심코 오늘 1독서 레위기를 읽는 순간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라는 서두의 평범한 대목이 저에겐 전혀 새롭게 와 닿았습니다.
‘모세는 늘 주님과 대화의 기도를 했던 분이구나.
모세의 삶에 주어는 주님이시구나. 모세는 참으로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분이었구나.’하는 깨달음이 새롭게 와 닿았습니다.
우리는 모세처럼 주님과 친숙한 대화의 기도를 하지 못하고
주님을 잊고 지내는 적은 얼마나 많은지요.
하여 삶이 그리도 맛이 없고, 고달프고, 공허한 것입니다.
기도해야 성인이요 기도와 함께 가는 믿음입니다.
기도 없이 인생광야 살아가기에 삶이 날로 거칠어지고 사나와 지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성인이지만 기도하지 않으면 괴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통해 기도의 소명은 더욱 분명해집니다.
코린토 교회 신자들뿐 아니라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 자를 파멸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바오로를 통한 주님 말씀이 참 은혜롭습니다.
얼마나 거룩하고 존엄한 품위의 우리들인지요.
우리 자신이 살아있는 주님의 성체요, 살아있는 주님의 성전입니다.
주님의 성체이자 성전인 거룩한 나를 함부로 취급하는 것도
하느님을 모독하는 대죄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살아있는 성전이니 이 거룩한 성전을 늘
빛으로 채우기 위해 말씀과 성체를 모셔야 하고 기도를 바쳐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을 때 우리의 성전도 생명의 빛을 잃고 서서히 퇴락해 갈
것입니다.
둘째, 희망을 통해 성인이 됩니다.
살기위해 기도해야 하듯 살기위해 희망해야 합니다.
희망하는 이들이 성인입니다. 성인의 되는 길은 희망의 길입니다.
희망을, 꿈을 잃어 서서히 무너져가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의 희망은, 꿈은 무엇입니까?
끝까지 희망을, 꿈을 키워가는 이들은 얼마나 될까요?
예전 초등학교 동창이 수도원에 방문해
무심코 던진 말에 공감하면서 가슴이 써늘해 짐을 느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죽음 하나뿐입니다.”
이제 보이는 희망은 다 바닥났고 죽음만 남았다는 것입니다.
죽음은 희망일까요 절망일까요. 아마 절망에 가까울 것입니다.
진정 믿는 이들이라면 ‘이제 남은 것은 하느님 하나뿐입니다.’라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하느님이 희망일 때 죽음도 비로소 희망이 될 수 있습니다.
언젠가 사라져버릴 환상 같은 세상 희망들입니다. 살아갈수록 갈 곳도 가고
싶은 곳도, 만날 사람도 만나고 싶은 사람도, 머물 곳도 사라져 갑니다.
결국 우리가 찾아 머물 안식처는 하느님의 집인 성전뿐이며,
우리가 만날 분도 하느님의 집에 계신 주님뿐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만이
유일한 희망이라는 이야기이며 이를 실감나게 확인하는 미사시간입니다.
하여 우리는 끊임없이 시편성무일도를 통해 우리의 영원한 희망이신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립니다. 하느님 빠진 인간이 아무것도 아닌 허무라면 하느님과
함께하는 인간은 모두인 충만 입니다. 바로 이점을 바오로 사도는 2독서
말미에서 감동적으로 고백합니다. 그대로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인간을 두고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 모든 것이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바오로도 아폴로도 케파도, 세상도
생명도 죽음도, 현재도 미래도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우리 내면의 어둠을 말끔히 거둬주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하느님 희망의
빛이 허무와 절망의 어둠을 몰아내고 생명과 빛으로 충만케 합니다.
셋째, 사랑을 통해 성인이 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을 통해 하느님을 닮아 성인이 됩니다.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은 전혀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구체적으로 사랑을 통해 성취되는 거룩한 삶입니다.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결론이 의미심장합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나는 주님이다.”
바로 1독서의 결론이자 거룩한 사람이 되는 길은 사랑뿐임을 말해줍니다.
‘나는 주님이다.’ 마치 말씀을 확인하듯 주님 친히 직인을 찍는 모습 같습니다.
사랑 말고 거룩함에 이르는 다른 길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사랑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그대로 대변하는 예수님이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의 전권을 지닌 주님의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다음 말씀입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말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이런 주님 가르쳐 주신 사랑만이 보복의 악순환을 피하면서 악의 세력을
무력화(無力化)시킵니다. 보복의 악순환으로 우리를 유혹하는 악마들이요,
이런 악마들의 세력을 무력화시키는 데는 비폭력적 사랑의 저항이 최고입니다.
오늘 복음이 절정이자 핵심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신다.”
이처럼 공평무사(公平無私),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신 하느님의 마음을,
하느님의 사랑을 닮으라는 말씀입니다. 죽을 때까지 평생 이런 하느님의
사랑을 향해 업그레이드 되어갈 때 성인이요 완전한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평생과제가 완전한 사람, 거룩한 사람, 자비로운
사람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평생과제의 사랑
실천에 항구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태5,48).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 [서울] 높고 넓고 깊게 계산하기
2014년 가해 2월23일 연중 제7주일
높고 넓고 깊게 계산하기
계산은 정확히 하라고 합니다만 물질적 원리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정확하게’가 비인간적이거나 말만 공정하다는 비합리일 때가 많습니다.
계약의 내용이 약육강식, 목숨이나 무력 때문일 경우가 많다는 거지요,
물리적 정확 보다 심리적 정확, 인격적 정확은 무시당하기 십상입니다.
예수님은 형제적 가족적 사랑과 영적 계산을 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집단이기주의나 개인주의를 버리고 높고 넓고 깊게 계산하라는 거지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마태오 5,38~39)”
-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인영균끌레멘스 신부님 복음단상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삶의 여정의 변증법
2014년 가해 2월23일 연중 제7주일
<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
복음 : 마태오 5,38-48
< 삶의 여정의 변증법 >
마이크 매킨타이어란 이름의 평범한 사람이 어느 날 자신의 고향인
캘리포니아 타호 시에서 출발하여 뉴올리언즈로 차를 몰고 가고
있었습니다. 사막 한가운데쯤 지나는데 한 젊은이가 도로 옆에 서서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있었습니다. 그의 차가 어디쯤에서 휘발유가
떨어졌는지 한 손에는 휘발유가 가득 담긴 플라스틱 통을 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휘발유통으로 운전자들의 동정을 사서 차를 세우게 하려는
속임수인지 몰라 그냥 지나쳤습니다. 전에 그런 식으로 차를 세워서 목에
칼을 들이대고 금품을 빼앗아가는 사례가 많다는 것을 들어서 더욱 세워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참을 가서도 사막 한가운데 서 있던 그 청년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브레이크에 발을 올려놓을 생각도 하지 않고
액셀 페달을 밟고 있었던 자신의 모습도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리고 이
흉흉하게 변해버린 세상과 함께 자신도 그렇게 모르는 사람에게는 적대적인
사람이 되어가는 모습 때문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마이크는 진정 이 세상이 그렇게 도처에 강탈범들이 즐비한 세상인가를
알아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동쪽에서 서쪽까지 횡단 무전여행을
해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돈은 아얘 처음부터 지니지도 않고, 중도에 누가
주어도 받지도 않고, 그저 종이에 행선지를 ‘미국’이라고만 쓰고 매일 만나는
낯선 사람들에 의해 먹고, 자고, 차를 타며 미국을 횡단할 수 있었을까요?
그는 그렇게 미국을 횡단하고 그 이야기를 책으로 썼으며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으로는 낯선 사람들을 의심하고
두려워하지만 그러면서도 친절을 베푸는 많은 사람을 항상 만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병원에 가는 길이면서도 자신보다는 길거리에 서 있는 이 사람을
위해 희생했던 나이든 여성도 만났고, 비가 퍼부을 때 예전에 강도에게
돈을 빼앗겼던 경험이 있으면서도 비 맞고 길에 서 있는 이 사람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또 한 번 속는 셈치고 도와준 트럭운전사, 이 사람에게
야영장소를 찾아주기 위해 저녁나절 한 시간이 넘게 차를 몰고 다녔던
중년 부부, 가난하지만 자신이 가진 이것저것 먹을 것을 나누어 주던
수많은 사람들,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식사를 대접했던 사람들까지 수없이
많은 사랑에 그는 감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01가지, 가장 위대한 종교는 친절]
본래 마이크 매킨타이어란 인물은 매우 친절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라면서 세상 사람들을 모두 믿었다가는 커다란 손해를 입을 수
있다는 것을 이론과 경험으로 배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미국을
횡단하면서 그래도 세상은 믿을만한 사람이 많다는 것을 다시 느끼게 된
것입니다. 결국 본래 어린아이 때의 마음으로 돌아온 것이기는 하지만
중간에 그와 반대되는 생각을 했다가 다시 친절한 사람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이런 것이 철학에서 이야기하는 그 어려운 단어, ‘변증법’이 아닐까 싶습니다.
변증법은 ‘정반합’의 원리로서 처음엔 이견이 없다가 나중엔 서로 반대되는
의견이 생기고 그 다음엔 서로 반대되는 의견이 통합되어 새로운 하나의
원리가 나온다는 뜻입니다.
변증법은 본래 소크라테스의 대화 방법으로써, 참 진리를 찾기 위해서는
그 진리를 알고 있는 사람이 오류를 지닌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서만 그
진리가 참다운 진리임을 밝히 드러낼 수 있다는 생각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이것을 헤겔이라는 철학자가 존재론적인 변증법으로 발전시켰고, 막스가
유물론적 변증법을 주장하여 계급간의 변증법적 갈등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사회로 발전해간다는 역사적 인식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저는 매우 복잡해 보이는 이 원리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변증법의 기초, 즉 ‘정(正)=> 반(反) => 합(合)’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사람은 엄마의 태아에서 ‘남-녀’의 구별이 없이 잉태됩니다.
이것이 ‘정(正)’입니다. 그러나 반대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정체성을
온전히 인식할 수 없는 ‘한 몸’인 것입니다. 남자가 여자를 알지 못하면
자신이 어떻게 참다운 남자인지 알 수 없는 것처럼, 교회의 진리도 수많은
이단들과 맞서며 그 정체성을 찾아온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가 지나면 ‘남-녀’의 구별이 생기기 시작하는데 ‘테스토스테론’이란
호르몬이 분비되는 태아는 남성의 몸을 지니게 되고 그 호르몬이 분비되지
않은 태아는 그냥 여자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남녀 칠세 부동석’이란 말이
있기는 하지만, 이는 사람이 만들어진 두 달 후부터만 해당되는 말인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는 이제 서로 구별되며 각기 다른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서로 반대됨을 알아차리게 되는 ‘반(反)’인
것입니다.
그리고는 다시 남자와 여자가 합(合)해지게 되는 때가 있는데, 이는 태아에서
서로 구별이 없을 때의 하나인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 합(合)은 서로의
차이를 아는 것이 바탕이 됩니다. 그리고 이 합일은 더 큰 생명력을 발휘하게
되는데 그 에너지를 통해 새로운 또 다른 생명이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잘은 모르지만 핵융합에서 나오는 에너지도 이 정반합의 변증법으로 설명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모세의 삶에서도 이런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모세는 처음에 이스라엘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파라오의 집에서 자랍니다. 이는 무엇이 선인지 무엇이
악인지 구별하지 못하는 ‘정’의 단계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집트로부터, 또
이스라엘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함을 알고 살에 이집트를 탈출하여 또 년
동안 이방인으로 살아갑니다. 자신을 키워준 파라오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까지 모세에게는 하나가 될 수 없는 상대인 것입니다. 이런 년간의 ‘반’의
과정을 넘어서도록 하느님은 모세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악인 파라오에서
선인 이스라엘을 구해오라고 그를 파견하십니다. 물론 그는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반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별할 줄은 알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악은 버리고 선과 하나가 되게 됩니다. 예수님도 모세처럼
우리에게서 악을 몰아내고 우리와 한 몸을 이루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 생명력으로 지금도 수많은 이들을 악을 떨쳐내고
그리스도와 성체성혈을 통해 새로 태어나 그분과 한 몸을 이루어 가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무조건 사랑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에게 올 피해가 두렵기 때문에 분별하지 않고
모든 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려고 한다면 아직은 ‘정’의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북한에서 태어났는데 그 정권이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를 따져보려고 하지도 않고 무작정 그 안에 머무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만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아직 유아기에 머물렀다고
보아도 될 것입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원수’처럼 미워진다는 것은 이미 ‘반’의 단계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에 머물러 있어서만은 안 되고 ‘합일’하는 단계까지
가야만 온전한 완성과 에너지와 새로운 탄생이 이루어 질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무작정 감싸 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감싸 안으면
내 마음이 그 가시에 찔림을 아주 잘 알면서도 감싸 안고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을 때 완전해 진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고정원 씨는 자신의 가족을 죽인 원수가 유영철임을 명확히
알았고 그를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합일의 과정을 힘겹게 이루어 냈습니다.
그리고 유영철을 자신의 양자로 삼음으로써 이 세상에 사랑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사실은 예수님조차도 이 세상이 좋아서 온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도 이 세상을 ‘이겼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겼다는 말은 싸우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알고 봤더니
이 세상을 당신 품에 품기 위해서 싸우셨던 것입니다. 모든 싸움이 결국
이 ‘합일’을 목적으로 하지 않으면 완전하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나라가 로마의 압제에 있고 카이사르가 이스라엘의 적이고 원수임을
알지만 그래도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라고 하시며 그에게 세금을
낼 것을 말씀하셨다면 예수님은 ‘합’의 단계에 있기 때문에 완전한 것입니다.
저는 요즘 성당에서나 가정 내에서 정치 이야기로 서로 갈라지는 것을
많이 봅니다. 누구는 좌파, 누구는 우파, 또 누구는 진보, 누구는 보수,
또 누구는 경상도, 누구는 전라도, 또 심지어는 젊은 사람들과 나이든
사람들과도 나뉘는 모습입니다. 오랜만에 가족이 모여서 대화하다가
서로 상대가 자신과는 반대되는 입장임을 알고 말다툼을 하기도 하고,
신부님이 강론하실 때 그냥 일어나 나가기도 합니다. 누구나 자신의
옳음을 주장하지만, ‘원수를 사랑하라.’, 즉 ‘서로 반하는 것이 하나가
되어야 함’을 생각하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는 너무도 서로
갈라져 있기만 하고 하나가 되려는 시도는 부족한 것 같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누가 대통령이 되고 정권을 잡는다고 해도 우리나라의 발전은
기대하기 힘들다고 봅니다. 우리는 이렇게 서로 갈라지게 만들려는
세력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혈연, 지연, 옳고 그름의 차이 등을 극복하고
서로 반대되는 생각을 지닌 사람들을 껴안아야 하는 것이 완전해 지는
길임을 깊이 인식할 때에야 통일도 앞당겨 질 것입니다. 우리끼리도
하나가 되지 못하는데 통일을 어떻게 이야기 할 수 있겠습니까?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은 먼데 있는 대단한 이론이 아닙니다. 바로 그래야만
온전해 질 수 있음을 깊이 깨닫고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품어 안으려고
노력할 때 세상을 평화롭고 행복하게 할 새로운 에너지가 샘솟게 될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 홈페이지: http://www.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 국 부국장 기획 연구 담당 전삼용 요셉 신부 -
◈ 넉넉한 대인배 /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인끌레멘스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2월23일 연중 제7주일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 마태 5,38-48
넉넉한 대인배
점점 편협하고 옹졸해짐을 느낍니다. 내 편한 것만 찾는 데 열심입니다.
손을 펴야하는데 자꾸 움켜지기만 잘 합니다.
하나를 주면 하나 혹은 그 이상을 받아야 직성이 풀립니다.
조금도 손해를 안보려 합니다. “난 이렇게 하는데 넌 왜 안 하니?” 하고 원망과
분노가 불쑥불쑥 고개를 자꾸 내밉니다.
주님은 정말 넉넉한 대인배이십니다. 이분을 믿는 우리도 넉넉한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모든 것을 다 아시고 모든 것을 다 갖고 계신 분이 우리 안에
계신데 무엇이 아쉬울까요, 무엇이 부족할까요? 넉넉하게 줍시다. 쿨하게 줍시다.
우린 주님 덕분에 넉넉한 사람들이기에 주면 줄수록, 나누면 나눌수록 더 넉넉한
것을 체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상 내 것이 빼앗긴다고 느낄 때 고통스럽죠,
많이 아프죠. 비굴하게 굴복하고 패배하는 것처럼 보이지요.
이때 참으로 넉넉한 분께 대한 믿음과 신뢰의 힘이 필요하지요.
원망과 분노를 내려놓고 이 아픔을 주님의 십자가에 봉헌한다면 이 세상을
구원하는 멋진 도구가 되죠. 주님께서 나의 아픔을, 나의 상처를 당신 십자가의
도구로 쓰시겠다는데 어찌 마다하겠습니까. 쿨하게 드리지요.
그러면 이 아픔은 세상과 나 자신을 구원합니다.
-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인끌레멘스 신부님 복음단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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