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린이 -
☆ 2014년 가해 3월2일 (녹) 연중 제8주일
[수도회] 행복의 길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제1독서 : 이사 49. 14 - 15
† 제2독서 : 1코린 4, 1 - 5
† 복음 : 마태 6, 24 - 34
오늘 전례
▦ 오늘 제1독서는 감동적인 표현으로 하느님의 자비를 상기시킵니다. 세상에서
들려오는 소식들은 우리를 불안하고 초조하게 하며 자신을 지키는 일이 시급하다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우리는 이웃과 친교를 나누며 개방하는
태도보다는 자신만의 안위를 돌보는 데 급급해집니다. 우리를 결코 잊지 않으시는
주님의 사랑을 떠올리며 이웃에 대한 사랑에 지치지 않기를 청합시다.
★ 이사야서의 오늘 말씀은 주님의 자비를 전해 준다. 제 젖먹이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없는 여인들처럼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결코 잊지 않으신다
(제1독서).
★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의 신자들에게 복음 선포자들을 그리스도의 시종이자
하느님 신비의 관리인으로 여겨야 한다고 강조한다. 주님께서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이다(제2독서).
★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기에 세상살이에 필요한 것에만 심려해서는
안 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일상에 필요한 것들을 아신다.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먼저 찾아야 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 말씀은 우리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근본적인 선택을 분명히 바라보게
합니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는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말씀은 세상 삶의 가치를 무시한 채 현세에 대한
관심을 끊고 영혼만을 돌보라는 잘못된 영성이나 이원론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종교적 가르침과 세상살이 사이의 채워질 수 없는 간격을 새삼 확인하게 하는
불가능한 이상도 아닙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라는 예수님의 간곡한 초대입니다. 우리가 단지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살아 있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깊은 염려와
사랑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삶의 변화는 올바른 삶의 우선순위를
가졌을 때 가능하다고 선언하십니다.
우리의 사고방식과 삶의 방식을 살펴보면 예수님의 이 말씀이 얼마나 정곡을 찌르며
'현실적'인지를 헤아릴 수 있습니다. 재물을 '섬기지' 말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분부는
우리 모두에게, 곧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오만한 부자에게도, 실의와 분노로 가득 찬
궁핍한 이들에게도 절실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자유롭게 해 주시려는, 말
그대로의 '기쁜 소식'입니다.
이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고 실천하는 삶의 변화를 위해서는 복잡한 설명이 필요하지
않으며, 오늘 복음에 분명하게 밝혀져 있습니다. 곧, 세상살이에 대한 심려 이전에
주님께서 보여 주시는 삶의 가치인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정의를 추구하는 데 힘을
쏟는다면 지상의 것들을 온전하게 선용할 수 있는 지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삶의 기술'이며, 세상살이를 제대로 아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송두리째 맡기십시오. |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3월2일 연중 제8주일
<내 일을 걱정하지 마라.>
마태 6,24-34
송두리째 맡기십시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의 생각보다 크고
깊은 사랑입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한 사랑입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그 큰 사랑이 우리의 모든
근심걱정을 거두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부자는 잠을 오그리고 잘까요? 아니면 두 다리를 펴고 잘까요? 도둑들이 들어올까
긴장해서 제대로 못 잔답니다. 가난한 사람은 어떻게 잘까요? 내일은 어떻게
먹고살까? 근심하느라고 웅크리고 잔답니다. 새우잠을 잡니다.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근심, 걱정에 빠져 삽니다. 밤잠을 설칠 만큼 심각한 것도 있고,
순간적으로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도 있습니다. 그런 걱정거리들 중의 어느
것이 진짜일까요?
이런 것을 연구한 어느 미국 대학의 심리학 팀이 있습니다. 그 조사결과를 보면
사람들의 걱정거리 중 40%가 실제로 절대 일어나지 않는 것들이었습니다. 공연한
걱정을 그 만큼 많이 한다는 것입니다. 걱정거리 중의 30%는 이미 과거에 있었던
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와서 걱정한다고 되는 일들이 아닙니다.
이를테면 쓸데없는 걱정거리들입니다.
22%는 사소한 걱정인데 병에 관한 걱정거리가 10%입니다. 그중엔 실제는
걸리지 않을 병에 관한 것도 많습니다. 진짜로 걱정할만한 것은 8%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8% 중에서도 정말로 머리를 싸매고 걱정할만한
것은 별로 없다는 결론입니다. 4%는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것들에 관한 것입니다.
정작 4%만이 우리가 대처할 수 있는 것들이랍니다. 결국 우리는 아무리 걱정해야
소용도 없는 일들에 대해 걱정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면 쓸데없는 걱정들을
가지고 괴로워하고 있습니다(느리게 사는 즐거움. 어니J 젤린스키). 그렇다면
96%가 쓸데없는 공연한 걱정입니다. “걱정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네!”
(티벳속담)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근심걱정에서 자유로워지시기 바랍니다.
한 젊은이가 근심걱정에 싸여 영성이 깊은 신부님께 말했습니다. 신부님! 제게
걱정 없는 곳을 가르쳐 주십시오. 저는 그런 곳에 가서 살고 싶습니다. 그러자
신부님께서 말했습니다. “바로 이 넘어가 공동묘지입니다. 거기가면 근심, 걱정도
눈물도 없습니다. 문제가 없는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뿐입니다.”
결국 갈등한다는 것은, 근심한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가 되기도 합니다.
오늘 성경에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그야말로
‘쓰리고’에 대해 “아무 걱정도 하지 말라.”는 말은 마땅히 그리고 먼저 걱정할
것을 걱정하라는 말입니다.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을, 걱정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을 걱정하지 말라는 얘깁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은 곧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자를 의롭게 여시십니다(로마4,5.) 그리고 하느님을 믿는 것은 그분 뜻에 복종하는
것입니다(마태21,28-32.) ‘먹고’, ‘마시고’, ‘입고’하는 것을 우습게 여기지도 말
것이며, 그런 것에 마음을 빼앗겨 정작 해야 할 일을 놓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마음의 근심이 있는 것은 주님께 대한 신뢰가 그만큼 없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몸이 아파 누워있는 것도 마음 괴롭지만, 할 일 없어 누워 있는 것도 마음
괴롭습니다. 희망 없이 삶을 사는 것도 답답하지만, 희망만 가지고 노력하지
않고 사는 것도 답답합니다. 매사 최선에 최선을 다하면서 주님의 뜻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방황하지 말고, 세상에 안주하지도 말며 하느님의 품 안에 안길
때까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걸으신 순례길을 흔들림 없이 걸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여러분의 모든 걱정을 그분께 내맡기십시오. 그분께서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1베드5,7).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맡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줄 것입니다”(필리4,6).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11,28-29)
하느님나라를 찾는 일이 나무라면 먹고 입는 일은 열매입니다. 나무가 좋으면
절로 좋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니 거꾸로 살지 말아야 합니다. 시편에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네 근심을 주님께 맡겨라. 그분께서 너를 붙들어 주시리라.
의인이 흔들림을 결코 내버려 두지 않으시리라”(시편55,23).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시편37,5) 결정적으로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이 산란해 지는 이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요한14,1).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에 고통을 겪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기도하십시오. 즐거운 사람이 있습니까? 찬양 노래를 부르십시오.
여러분 가운데에 앓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교회의 원로들을
부르십시오....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 남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병이 낫게 될 것입니다. 의인의 간절한 기도는 큰 힘을 냅니다”
(야고5,13-17). 기도하는 가운데 하느님 앞에서 근심 걱정의 원인을 정리해
보십시오. 성당에 오셔서 주님 앞에 근심 걱정을 펼쳐놓고 기도하십시오 ..
그러면 그분에게서 답을 얻게 될 것입니다.
1). 문제의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2). 내가 구체적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이며, 할 수 없는 것들은 무엇인지
구분해야 합니다.
3). 그리고 할 수 없는 것들은 하느님의 선하심에 의지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분을 믿고 그분께 맡기고 그분의 능력에 힘입어 받아들이는
가운데 자유와 평화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믿음이 있으면 근심에서 자유롭습니다.
근심과 믿음은 반비례합니다. 근심이 커지면 믿음이 작아지고 믿음이 커지면
근심이 작아집니다. 사실 노를 젓는 사람은 배를 흔들 시간이 없습니다. 또한
잔잔한 바다에서는 능란한 선원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어려움과 시련은 우리를
더 강하게 합니다. 동전은 작지만 그것을 우리 눈에 갖다 대면 태양을 볼 수
없듯이 아무리 작은 근심이라도 거기에 사로잡히면 우리는 태양이신 하느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가지고 맡기십시오. 맡긴다는 의미를 아시죠?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방법입니다. 온전히 맡기고 의탁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바다에 나를 내던지는
것입니다. 진인사 대천명! 최선에 최선을 다하고 나머지는 하늘의 처분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가끔 우리는 시련과 역경에 봉착했을 때 하느님은 어디 계시냐? 고
항변합니다. 어디계십니까?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불가마 속에 넣으실
때 하느님께서도 그들과 함께 그 안에 계십니다.” “우리는 불가마속을 지나온
뒤에야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불순물이 있었는지 깨닫게 됩니다.” 시련을 통해서
하느님의 품 안에 있었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더
노력해야 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실패했다면 그는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노력을 포기한 것일 뿐입니다. 믿는 이에게 실패는 늦추어진 성공일 뿐입니다.
저는 아버지의 죽음 앞에 울지도 못했습니다. 아니 울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께서
울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을 믿다가 하느님께 돌아갔는데 울긴 왜 우느냐?”
하셨습니다. 인간적인 이별 앞에 고통스럽고 슬펐지만 가슴에 담았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를 보내드리며 주님께 맡겨 드려야 했습니다. 그동안 함께 했던
시간과 가르침에 감사하며 주님의 사랑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시길 바라는
기도밖에는 다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다른 방법이 있을까요? 있다면
가르쳐 주십시오. 하느님을 원망해야 하나요?
“속상하게 느끼는 것만큼 속상한 일도 없습니다.” 미리 걱정한다고 생길 걱정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미리 준비해야 하겠지만 걱정에 끌려 다니는 일은
없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말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변해도 좋습니다. 주 하느님,
당신 안에 뿌리내리면!” 주님 안에 뿌리내려서 세상의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인생에 있어 중요한 것은 음식도 돈도 아니고, 하느님 나라에
속하는 것, 그분과 영원히 살기 위하여 그분의 뜻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돌보시는 주님을 믿고 의탁하며 사는 것입니다. 마무리 하겠습니다. 모든 근심
걱정을 송두리째 하느님께 맡기십시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돌보십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걱정은 모두 잊고
2014년 가해 3월2일 연중 제8주일
<내 일을 걱정하지 마라.>
마태 6,24-34
어제는 강화에 있는 인천 신학교에서 직수여식이 있었습니다. 성직선발예식과
착의식, 독서직, 시종직을 신학생들이 받았지요. 그런데 이 신학생들을 보면서 참
시간이 빠르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제가 본당신부일 때, 막 신학교에 들어갔던
신학생이 벌써 부제품을 앞둔 대학원 2학년이 되어 시종직을 받았습니다. 또한
성소국장에 부임해서 처음으로 신학교에 입학시켰던 학생들은 4학년이 되어 어제
독서직을 받았네요.
이렇게 빨리 가는 시간의 흐름 안에서 더욱 더 바쁘게 살아야 할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 인생의 목표가 과연 바쁘게 사는 것일까요? 사실 바쁨이라는 것은 절대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주변에서 소위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을 보면,
한가한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또 하나의 특징은 걱정 역시 끊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너무 바빠서 걱정이고, 반대로 한가해지면 한가해서 불안하다고
걱정합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너도나도 다 바쁜 것 같습니다. 길거리를 봐도 서둘러 걷지 않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요. 심지어 초등학생들도 ‘바쁘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삽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불안한 마음을 벗어 버리고, 편안하고 안정적인 삶을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산을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하루를 투자해서 산을 오릅니다. 그런데 아무리
좋아한다고 해도 바쁘다는 마음을 가지고 산을 오를 수 있을까요? 온갖 종류의
걱정거리들을 저 멀리 두고 산에 올라야 기쁨의 미소를 지을 수가 있습니다. 또
걱정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약간 떨어져서 바라보는
시간이 있어야 문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어 더 잘 해결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부족함과 나약함으로 언제나 불안한 마음을 안고 살고 있는 우리들을 향해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커다란 용기를 불어 넣어주십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그런데 이 말씀에 앞서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라고 하시지요. 믿음이 약하기
때문에 걱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믿음이 없어서
세상일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을 안고 산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찾고 또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 나갈 때, 전도서에 나와 있듯이 우리가
걱정하는 모든 세상 일 모두가 얼마나 헛되고 부질없는 지를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의 이사야 예언자가 말씀하시듯, 주님께서는 우리들을 절대로 잊지
않으십니다. 이에 용기를 가지고 힘차게 하느님 뜻에 맞게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걱정은 모두 잊고 말이지요.
감사하는 마음에는 생명력이 있다. 무럭무럭 자라기도 하고 때로는 결실을 맺기도
하니 말이다(퀴스 텐마허).
여유 있는 삶
자전거를 탈 때 페달을 힘차게 밟으면 밟을수록 속도가 올라갑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페달을 밟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힘이 들어서 도저히 앞으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페달을 밟지 않고 그냥 있어도 될 때가 있습니다. 특히
내리막에서는 굳이 페달을 밟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저절로 앞으로 내려가니까요.
우리의 삶도 어쩌면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요? 앞으로 계속 가야한다면서 페달을
쉬지 않고 밟으면 금세 지치는 것처럼, 때로는 쉬기도 하고 때로는 즐기는 시간도
필요한 것입니다. 내리막에서도 페달을 밟는 어리석은 사람처럼, 잠시도 쉬지 않고
일만 해야 잘 사는 것처럼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여유 있는 삶을 많은 이들이 꿈꾸고 있으며, 먼 훗날에 내가 누릴 시간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노는 것도 힘이 있어야 한다고 하지요. 먼 훗날 꼬부랑 노인이
되어서 과연 내가 하고 싶은 취미활동을 누리면서 여유를 즐길 수 있을까요?
여유는 어떤 특별한 시간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우리가 가지고
누려야 할 시간입니다. 이러한 여유가 우리의 삶을 더욱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으며, 특히 주님과 나의 관계를 더 깊이 바라볼 수 있는 혜안을 얻을 수 있게
할 것입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서울] 연중 제8주일
2014년 가해 3월2일
<내 일을 걱정하지 마라.>
마태 6,24-34
사제들은 주교님의 명을 받아서 정해진 임지로 가게 됩니다. 전임 신부님과
인수인계를 하고, 새로운 곳에서 사목을 합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저
자신을 돌아보면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인수인계를 하면서 쉬는
교우들을 위한 방안을 찾거나, 지역의 가난한 이들, 병든 이들에 대한 배려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을 할 수 있습니다. 청소년들에게 신앙 안에서 비전을
제시하고, 삼사십 대의 직장인들에게 신앙의 기쁨을 줄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기도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고 스스로 기도하는 모범을 보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인수인계를 하면서 가끔씩 다른 것들에
관심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본당에 부채는 없는지, 주일헌금과 교무금은 얼마나
되는지, 신자들의 숫자는 많은지, 아파트는 얼마나 되는지, 사는 곳은 어떤
동네인지를 살필 때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재물과
하느님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 저들의 꽃을 보아라, 하늘을 나는 새를 보아라!
그것들도 다 하느님께서는 살피시고 먹이신다. 그러니 여러분은 어디에 갈
것인가를 걱정하지 말고,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여라.”
일본에는 ‘코이’라고 불리는 관상용 물고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코이’라는
물고기는 다른 물고기와는 다르게 자기가 사는 장소에 따라서 크기가 달라지는
아주 특이한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조그마한 어항에 살 때에는 5~8Cm의
크기로, 조금 큰 수족관에 살 때에는 15~25Cm의 크기로 부쩍 성장합니다.
마지막으로 커다란 연못이나 강물에서 살게 되면 그 크기가 90~120Cm까지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가 사는 환경에 따라서 자신의 몸이 맞추어 사는 ‘코이’라는 물고기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쩌면 우리들도 내 환경에 맞춰서 내 몸을 맞추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내 마음의 크기가 크면 클수록 내 자신 역시 더욱 더 크게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정말로 마음의 크기가 큰 사람은 어떠합니까?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다 포용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보다는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합니다.
스토아학파인 에픽테토스는 이렇게 말했지요.
“인간의 가치는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사랑받았느냐가 아니라,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사랑을 베풀었는가에 결정된다.”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인간의 가치를 높이는 사람이고, 이러한 사람이 바로 자기
마음의 크기를 더욱 더 키워서 세상에 주님을 알리는 큰 인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조그마한 틀 속에 가두어 놓고만 있습니다.
‘나는 이 정도밖에 할 수 없다.’라는 식의 부정적인 마음으로 인해 할 수 있는 것도
하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결혼을 앞둔 남자와 여자가 있었습니다. 남자는 여자를 위해서 아파트를 준비했고,
여자는 그 아파트에서 살아갈 살림살이를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여자의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를 했고, 몸이 아파서 병원에 입원을 해야 했습니다. 여자는 결혼
비용으로 준비한 것들을 아버지를 위해서 써야했고, 살림살이를 장만할 수
없었습니다. 남자는 여자에게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사실 나도 아파트가
없습니다. 둘은 할 수 없이 작은 월세 방에서 아무것도 없이 결혼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여자의 아버지는 병세가 호전되었고, 사업도 재기에
성공하였습니다. 이제 여자는 다시 살림살이를 마련할 여유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남자가 아파트가 없는 것이 생각났고, 자신은 불행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불평을 어머니에게 이야기 했더니, 어머니가 이제는 말 할
때가 되었다고 하시면서 말을 합니다. ‘사실 아버지의 빚은 남자가 아파트를
팔아서 갚았고, 남자의 월급에서 아버지의 병원비를 지급했다.’ 여자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부모님을 위해서 도움을 준 남자가 생각났고,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아파트를 내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내어 주셨습니다.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셨고, 목숨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정말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다만 주님께 감사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 서울 대 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기타] 내일 걱정은 내일하십시오./글:최인각 신부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3월2일 연중 제8주일
<내 일을 걱정하지 마라.>
마태 6,24-34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라고 말씀하시며, 무엇을 중요시하며, 무엇에 충실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려주십니다.
무엇을 먹고 마실까 하는 걱정보다는 목숨이, 무엇을 입을 것인지에 대한
고민보다는 몸의 보호가 더 중요함을 예수님께서는 알려주시며, 그 어떤 것보다
귀한 것은 '우리'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늘의 새들은 씨를 뿌리거나 거두거나 곳간에 모아들이지 않아도, 그들을 소중히
여겨 먹여주시고, 오늘 서 있다가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까지 입히시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이며 당신을 닮은 자녀인 '우리'를 얼마나 잘
입히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귀하게 여기시고 걱정하고
계시는데, 왜 옷 걱정이나 음식 걱정을 하느냐?'라고 강하게 반문하시며, 아버지께
믿음을 두고,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걱정하는
이들에게,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라고 강하게 말씀하시면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보살펴주시는지, 예수님께서
아주 구체적으로 쉽게 설명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기본 핵심의 첫 번째는, 우리를 돌보시고 사랑하시는
하느님 아버지를 깨닫고 그분께 의탁하며,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말고 평화로이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핵심은 '무엇을 먹고 마시며 입을까?' 걱정하는 대신, '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오늘 행동양식과 걱정이
바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내가 가난한 이에게 무엇을 먹여주고, 마시게
해주며, 입혀줄지 '오늘' 걱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하기보다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무엇인가 하려고 할 때, 그곳에서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전 세계에서 하루에 10만 명 이상이, 그리고 5초마다 어린아이 1명이 굶어 죽는다고
합니다. 어느 가난한 나라에서는 짐승들조차도 먹지 않는 흙을 구워서 끼니를
때운다고 합니다. 더 비참한 것은 전 세계에서 '굶어 죽는 소'는 없지만, 굶어 죽는
사람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비극적인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웃을 돌아보지 않는 '천민자본주의(재물지상주의)'에서
온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데 이를 신앙의 관점으로 보면, 하느님 나라의 원리나
참다운 의로움을 실천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봅니다.
그러나 '오늘'의 굶주림을 채워주고, 입을 것을 전해주고, 아픈 곳을 감싸주며, 함께
살아가는 보이지 않는 천사들이 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은 집 없고 희망 없는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바보의 삶을 사셨고, 이 태석 신부님은 전쟁과 가뭄의
기아에서 굶주리며 아파 죽어가는 이들을 위해 젊음을 살라 바치셨습니다. 그리고
주교회의 산하 '한국 카리타스'를 비롯하여 많은 단체와 개인들은 크고 작은 정성을
모아, 가난하고 고통 받고 소외된 이들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예수님의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감동을 주시는 분들이야말로, 내일의 삶을 주님께 의탁하고 현재 죽어가는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맛보게 해주려고 자신을 바치시는
분들임을 고백합니다. 그러한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큰절 올리며, 이태석
신부님의 '묵상'이라는 노래를 불러 드리고 싶습니다.
"십자가 앞에 꿇어 주께 물었네. /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이들, 총부리 앞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이들을, 왜, 당신은 보고만 있냐고 / 눈물을 흘리면서 주께
물었네. / 세상엔 죄인들과 닫힌 감옥이 있어야만 하고, 인간은 고통 속에서
번민해야 하느냐고 / 조용한 침묵 속에서 주 말씀 하셨지 / 사랑, 사랑, 사랑, 오직
서로 사랑하라고 / 난 영원히 기도하리라. 세계 평화 위해 난 사랑하리라. 내 모든
것 바쳐."
- 최인각 신부 -
◈ [수도회] 행복의 길 - -주님의 세 가르침-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3월2일 연중 제8주일
이사49,14-15 1코린4,1-5 마태6,24-34
<내 일을 걱정하지 마라.>
마태 6,24-34
행복의 길 -주님의 세 가르침-
디지털 시대임을 통감합니다.
요즘 며칠 간 강론들과 편지들을 정리하면서 깨달은 사실입니다.
글씨는 마음의 거울이라 합니다.
글씨마다 정성과 사랑이 가득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수 십 년간 모아 온 친필로 쓴 강론들과 손으로 써 보내 준 무수한 편지들이
새삼 귀하게 여겨져 다시 고이 보관해 두었습니다. 이미 오랜 전 세상을 떠나
신 어머님의 자식 걱정에 무수히 보내셨던 편지들을 보면서 오랜 동안 회한에
잠기기도 했습니다. 사랑했던, 그리웠던 이들은 떠났어도 편지들을 그대로
남아 있어 이 분들을 생각할 수 있으니 이게 시공을 넘어 ‘영원한 사랑’의
체험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2003년부터는 거의 친필로 쓴 강론 원고가 없다는 것과 친필로
쓴 편지들이 거의 없다는 사실입니다. 강론은 전부 컴퓨터 좌판에 쳐 출력해
내고 편지들은 거의 이메일이나 핸드폰의 통화, 문자 메시지로 대체되었기
때문입니다.
‘아, 나도 디지털 문화에 흡수되어 살고 있구나.’ 깨닫습니다.
문제는 여유와 깊이가, 살아있는 만남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편리한
디지털 시대인데 삶은 더욱 바빠지고 피상적이 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내면은 황폐화되고 급기야 영혼까지 잃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문제의 관건은 하느님 중심을 회복하는 것이요 하느님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중심으로 한 삶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명실 공히 하느님이 삶의 중심이 될 때 삶은 깊어져 행복한 삶입니다.
디지털 시대일수록 하느님 찾기는 더욱 치열해야 하고 기도와 말씀의 탐구도
열렬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주님의 세 말씀에 따른 ‘행복의 길’에 대한 묵상 나눔입니다.
첫째, “나는 결코 너를 잊지 않는다.”
이사야서를 통한 주님의 말씀이 오늘 백미입니다.
‘나는 언제나 너를 사랑한다.’라는 주님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 누가 뭐래도
주님만은 끝까지 나에 대한 믿음, 사랑,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는 고백입니다.
이사야서의 짧은 말씀이 감동적이라 그대로 인용합니다.
-시온은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하고 말하였지.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49,14-15).
주님의 마음이 그대로 전달되는, 주님의 육성을 듣는 느낌입니다.
어머니가 자식을 잊을 수 있어도, 또 우리가 주님을 잊을 수 있어도 주님만은
결코 우리를 잊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주님의 마음을 체험할 때 더욱 견고해지는 하느님 중심의 삶이요
하느님 중심에 깊이 뿌리내릴수록 더욱 깊어지는 주님 향한 우리의 믿음, 사랑,
희망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우리에 대한 사랑으로 늘 깨어 우리를 지켜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제가 두려움 중에 있는 분들에게 가장 많이 써드리는 처방전 말씀입니다.
제 여섯째 숙부가 임종을 앞두고 한 주간 꼭 붙잡고 사신 말씀입니다.
“두려워 마라. 내가 너의 곁에 있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너의 하느님이다.
내가 너의 힘이 되어 준다. 내가 도와준다.
정의의 오른팔로 너를 붙들어 준다.”(이사41,10).
경우에 따라서는 ‘정의의 오른팔로’는 ‘사랑의 오른팔로’ 슬며시 바꾸기도 합니다.
참 많은 분들이 위로와 힘을 받는 주님의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둘째,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미리 심판하지 마라.”
자신은 물론 남을 심판하지 않을 때 마음의 평화입니다.
일체의 심판이나 판단은 유보하는 것입니다.
필요이상의 자학도 자책도, 후회도 하지 마십시오.
주님만이 우리를 심판하실 수 있습니다.
하느님 중심에 뿌리내릴수록 이런 양심의 확신은 더욱 강화됩니다.
다음 바오로의 말씀을 내 확신으로 삼는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심판을 받든지 세상 법정에 심판을 받든지, 나에게는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나도 나 자신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나는 잘못이 없음을 압니다. …나를 심판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미리 심판하지 마십시오.
그분께서 어둠 속에 숨겨진 것을 밝히시고 마음 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누가 뭐래도 하느님 앞에서 더도 덜도 아니 나일뿐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떳떳하다면 사람들의 심판에 연연해하지 않습니다.
나는 물론이고 사람들의 심판은 얼마나 불완전한지요.
대부분 착각과 오해, 환상에 기인한 심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모든 심판이나
판단은 하느님께 맡겨 보류하고 내 삶의 자리에 충실 하는 것입니다.
심판하려는 유혹이 들 때 ‘네가 뭔데.’ ‘너나 잘 해.’라는 돌직구의 표현을 상기하면
자제될 수 있을 것입니다. 남이나 나를 심판하는 것은 하느님의 권리를 침해하는
월권의 대죄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다음 바오로의 말씀처럼 심판하지 않는 사랑, 다 봐도 못 본채 하는 사랑, 다 알아도
모르는 채 하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이런 사랑이면 때가 되면 모든 것을 저절로 해결됩니다. 캐고 따지고 밝히고
추궁하고 심판하여 상대방을 만신창이로 만드는 것은 전혀 사랑이 아닙니다.
하여 성 베네딕도 역시 그의 규칙에서 ‘형제들의 약점을 지극한 인내로 참아
견디는’ 형제애를 촉구합니다..
셋째, “걱정하지 마라.”
하느님과 재물을 섬길 때 끊임없는 갈등에 걱정과 불안입니다.
하느님을 섬길수록 마음의 평화와 안정입니다.
걱정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불안도 두려움도 마찬가지입니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걱정, 불안, 두려움의 상태가 바로 지옥입니다.
하느님을 믿을 때 걱정도 불안도 두려움도 사라집니다. 믿음은 빛입니다.
하느님 믿음의 빛 앞에 흔적 없이 사라져 가는 걱정, 불안, 두려움의
어둠들입니다. 참 어리석고 어두워 환상의 불필요한 짐을 지고 사는 이들,
하느님 걱정을 대신하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믿음이 약해 소모되는 에너지는 얼마나 많은지요.
오늘 복음은 온통 ‘걱정하지 마라.’는 말씀으로 가득합니다.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주님의 은혜로운 현실을 잘 보지 못해,
주님의 은혜로운 말씀을 잘 듣지 못해 걱정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잘 보고 잘 듣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느님만을 찾을 때 굳건해 지는 믿음이요 사라져가는 걱정들입니다.
그러니 믿음의 사람들은 하루하루 삽니다.
내일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요,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믿음에서 나오는 분별력의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영적고공비행이란 말을 들어보셨는지요?
수평적 비교에서 벗어난 수직적 자아초월을 통한 내적 자유를 일컫는 말입니다.
하느님 사랑을 결코 잊지 않을 때, 자신이나 남을 심판하지 않을 때, 매사
걱정하지 않을 때 비로 영적고공비행으로 인한 자아초월의 내적 자유를
누립니다.
바로 이게 참 행복의 비결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의 온갖 근심걱정을 몰아내시고
당신 향한 믿음과 사랑, 희망으로 우리를 충만케 하십니다. “은혜를 베푸신 주님께
노래하리이다. 지극히 높으신 주님 이름 찬양하리이다.” (시편13,6참조).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 [수도회] 하느님의 걱정 /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인끌레멘스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3월2일 연중 제8주일
<내 일을 걱정하지 마라.>
마태 6,24-34
하느님의 걱정
수도원 옆 본당에서 사목할 때 아주 작은 평수의 아파트에 홀로 사시는 치매에 걸린
안나 할머니가 계셨죠. 말씀을 아주 감칠 맛나게 하시는 분이라서 봉성체 갈 때마다
웃음꽃이 피었습니다.
하루는 할머니가 아주 진지하게 당신 걱정을 털어놓는 것이었습니다. 탈랜트
이순재 씨가 와서 자꾸 자신한테 보험을 들라고 해서 걱정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연유를 자세히 들어보니 이순재 씨가 출연하는 유선방송의 노인 보험 광고
때문이였지요.
우리의 미래는 불투명하기에 불안하기만 합니다. 이 걱정 때문에 우리는 보험을
듭니다. 아무리 많은 보험에 들어도 걱정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사실 돈 쓸 일만 많아서 어떻게 살아갈 지 너무 불안하고 걱정스럽습니다.
이 두려움은 어디서 오는걸까요?
우리 삶이라는 틀안에 갇혀 있기에 시야가 좁아지고 앝아져 있어서 그런 것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삶의 좁디 좁은 시각의 틀을 넘어 더 큰 힘을 보도록
초대하십니다. 새와 들꽃 안에서 숨쉬는 자연의 생명력을 침묵 가운데 바라다
볼 때 놀라운 신비를 느낍니다. 사실 이 신비는 하느님의 걱정에 공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늘 걱정하십니다.
우주 만물 가운데서도 특별히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걱정하신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걱정하는 마음에 우리의 온갖 걱정과 불안과 두려움을 봉헌하면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마치 눈이 녹듯이 사라집니다.
선하신 하느님을 참으로 믿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늘 전전긍긍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기도해야 할 것은 이것밖에 없습니다. “주님, 당신이 우리를 걱정하신다는
놀라운 신비를 굳건히 믿게 하소서. 그런 신앙을 더해 주소서.”
-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인끌레멘스신부님 복음단상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내 마음의 제대 위에서는 누구를 위해 제물이 바쳐지는가?
2014년 가해 3월2일 연중 제8주일
<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
복음 : 마태오 6,24-34
< 내 마음의 제대 위에서는 누구를 위해 제물이 바쳐지는가? >
성지순례 다녀오면서 비행기에서 박중훈이 처음으로 감독한 ‘톱스타’란 영화를
보았습니다. 오늘 복음과 관련이 깊어 오늘도 영화 이야기로 시작해봅니다.
주인공 엄태웅은 톱스타 김민준의 메니저입니다. 나이는 한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지만 엄태웅에게 김민준의 의미는 삶의 의미이자 구세주이고 전부인 인물입니다.
왜냐하면 엄태웅도 연기를 해 보고 싶은 야망이 있는데 자신에게 기회를 줄 인물은
톱스타 김민준 뿐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기회가 찾아옵니다. 김민준이 음주운전을 하다가 오토바이를 탄 사람을
가볍게 치게 됩니다. 그러나 톱스타인 까닭에 내리지 못하고 뺑소니를 하게 됩니다.
엄태웅은 스스로 나서서 자신이 이 모든 것을 뒤집어쓰겠다고 합니다. 이에
김민준은 엄태웅에게 기회를 주어 자신이 출연중인 드라마에 엄태웅을 넣어주고
연기 연습까지 시켜주며 엄태웅을 키워줍니다. 드라마는 대박이 났고 엄태웅도
덩달아 인기가 치솟았습니다. 엄태웅은 처음으로 느껴보는 인기에 감동하고 자신을
키워준 김민준에게 감사하게 됩니다.
이것을 계기고 엄태웅은 김민준의 인기를 넘어서게 됩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인 것입니다. 엄태웅은 더 이상 김민준의 메니저였다는 이야기를 듣기를 원치
않습니다. 더구나 김민준의 여자까지도 좋아해서 빼앗으려 합니다. 이에 김민준도
엄태웅에게 화를 내고 둘의 사이는 아주 안 좋게 흘러가게 됩니다. 엄태웅은 여러
사람들을 이용해 김민준의 옛 잘못을 들추어내어 그를 스타반열에서 끌어내립니다.
김민준은 모든 것을 잃고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됩니다.
엄태웅은 이것도 모자라 김민준이 출연하려고 했던 영화를 자신이 직접 돈을
투자하여 주인공을 맡으려합니다. 김민준보다 연기도 못하고 김민준이 키워주었고
또 김민준 없이는 하나도 할 줄 모른다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 김민준 없이도
잘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열등감이 여전히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전 재산을 투자하다보니 매우 예민해지고 이젠 이 영화를 성공시키기
위해 사람들을 다그치게 됩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영화도 대박을 치게 되고
비로소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톱스타가 되게 된 엄태웅, 그러나 그의 곁에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김민준을 끌어내리기 위해 안 좋은 소문을 함께
퍼뜨렸던 사람들에 의해 시달리게 됩니다. 그의 약점을 아는 이들은 그를
괴롭히지만 더 이상 자신을 도와줄 사람은 주위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게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을 술기운에 차로 받았고 그렇게 살인미수로 그의 인기 또한 허망하게
사라지게 됩니다.
저는 이 영화에서 엄태웅의 약점을 이용하여 자신의 성공을 노리던 한 사람이
엄태웅에게 한 대사가 머리에서 잊혀지지 않습니다.
“싸움에서 지는 사람은 약한 사람이 아니다. 잃을 게 많은 사람이 지는 거야.”
잃을 게 많은 사람의 마음 안에는 항상 무엇이 있겠습니까? 바로 ‘걱정’이 있습니다.
‘두려움’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걱정하는 사람은 두 주인을 섬기는 사람이라고 정의하십니다. 두 주인을 섬기는
사람이란 ‘우상’을 섬기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성당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제대’인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 안에도 각자의
‘제단’이 있습니다. 제대 위에서 일어나는 일은 바로 제물을 바치는 일입니다. 모든
관계는 상대에게 제물을 바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주는 것’이고 그렇게 자신을
바치는 행위가 일어나는 장소가 바로 마음이고 제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우상을 섬기는지 하느님을 섬기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나의 제단 위에서
누구에게 제물이 바쳐지는가를 생각해보면 됩니다.
엄태웅은 처음에 김민준을 위해 자신을 바쳤습니다. 그랬더니 김민준과 사이가
좋아져서 김민준으로부터 모든 것을 받게 됩니다. 그렇게 걱정할 것도 없이 인기를
얻어갑니다. 그러나 더 이상 김민준을 위해 희생할 생각을 하지 않고 그의
여자까지도 빼앗으려 합니다. 그의 주인은 이제 ‘인기’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물론
가장 큰 우상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이제 누구에게도 제물을 주기를 원치 않고
다른 이들이 자신을 위해 제물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누구에게도 제물이 바쳐지지 않고 오직 자신을 위해서만 에너지를 쏟는 사람의
마음은 온통 ‘걱정과 두려움’으로 쌓여있습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잃기를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모든 것을 잃는 시작이었던 것입니다. 스스로
얻으려고 하면 이 세상에서 걱정만을 얻고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유대인의 교훈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산골에 삼 형제가 살았는데,
그들에게는 신기한 보화가 하나씩 있었습니다. 첫째에게는 멀리 보는 ‘망원경’이
있었고, 둘째에게는 하늘을 나는 ‘양탄자’가 있었고, 셋째에게는 모든 병을 낫게
하는 ‘사과 한 개’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나라 왕의 외동딸이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왕은 ‘누구든지
내 딸의 병을 고치는 자를 사위로 삼고,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방을 붙였습니다.
그 방을 첫째가 가진 망원경으로 멀리서 보고, 둘째가 가진 양탄자를 타고 와서,
셋째가 가진 사과를 먹여 공주를 살려냈습니다. 세 사람이 다 공을 세워서 왕은
누구를 사위로 삼을지 고민하다가 ‘망원경과 양탄자는 그대로 있지만 사과는 더
이상 없으니까 셋째가 가장 큰 희생을 했다.’고 여기고 셋째를 사위로 삼았다고
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온갖 좋은 것이 온다고 믿는다면 하느님과의 관계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관계를 위해서는 자신을 바치는 희생이 따라야합니다.
부모님을 공경해야 하는 당연한 이유는 그분들이 그만큼 나를 위해 희생하시며
사랑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희생이 바쳐지는 곳이 바로 마음입니다.
마음이 곧 제대입니다. 제대가 곧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의 관계를 위해
당신 자신의 뜻을 십자가 위에 불살라 바쳤습니다. 그렇게 아버지로부터 영광을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시간, 에너지, 제물, 모든 것을 진정 하느님을 위해 바치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 자신을 위해 바치고 있습니까? 아니면 재물이나 명예, 쾌락 등을 위해
나의 에너지를 소진하고 있습니까?
만약 살아가면서 걱정이나 두려움이 조금이라도 든다면 그것은 하느님께 충분한
제물을 드리지 못해서 스스로 불안해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느님만이 나에게
모든 것을 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주인이십니다. 나의 제대가 그분께 드리는
제물로 불이 결코 꺼지지 않게 합시다. 그러면 마음의 평화와 기쁨이 저절로 내
안에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 홈페이지: http://www.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 연구 담당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욕망 스톱! 걱정 끝!
2014년 가해 3월2일 연중 제8주일
<내 일을 걱정하지 마라.>
마태 6,24-34
욕망 스톱! 걱정 끝!
욕심을 채우기 위해 우선 걱정이란 에너지가 타며 검은 연기를 냅니다.
특히 남을 이기려는 욕심의 걱정 에너지는 정열 목숨 시간까지 태우지요.
물욕의 걱정이 파괴라는 걱정거리를 세상에 만든다는 것 알아야 합니다.
지구의 속과 겉을 파헤쳐 훼손시키며 물욕의 폭팔적 진행이 개발이라니요.
결국 지구의 종말을 재촉하는 과오의 대작전이 무섭게 전진만 하네요.
욕망 스톱! 걱정 끝! 자연, 평화, 이웃사랑으로 원래 사람 돼야하는데!
“그리고 너희는 왜 옷 걱정을 하느냐?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아라. 그것들은 애쓰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마태오 6,28)”
-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 [기타]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우리가 그분의 사랑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앙은 거짓입니다.'
2014년 가해 3월2일 연중 제8주일 복음묵상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마태오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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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하십니다.
두 주인이란 하느님과 재물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말씀의 뜻은 간단합니다. 결국 영원한 생명에 도움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항상
식별하면서 선택하라는 말씀이십니다.
무엇을 먹고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 하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떻게 먹을 것, 입을 것 걱정하지 않고 살 수가 있겠습니까?
어떻게 모든 걱정을 털어버리고 어떻게 이 삶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살아가기 위한 조건을 무시할 수 없는 이상,
각자의 삶이 다할 때까지 걱정하지 않고 살 수는 없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걱정하지 않고 살 수 없다는 것을 잘 아셨습니다.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마태오6,34)
그리고 그분께서도 걱정하시면서 사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이 비켜 갈 수 없는 것이라서 제가 마셔야 한다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마태오 26,42)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걱정해야만 하는 것’을 걱정하라는 말씀이십니다.
결코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되는 일 때문에 걱정하라는 말씀이십니다.
우리가 지금 걱정하는 내용들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뒤돌아보라는 말씀이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삶에 있어서 무엇이 더 중요하고 가치가 있는지를 식별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의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항상 기억하고, 부딪히는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라는 말씀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사야서를 통해서 당신의 사랑을 고백하십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이사야49,15)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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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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