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위를 부르심 -
☆ 2014년 가해 3월9일 (자) 사순 제1주일
[수도회] 광야, 유혹, 말씀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제1독서 : 창세 2. 7 - 9 ; 3, 1 - 7
† 제2독서 : 로마 5, 12 - 19(또는 5, 12. 17 - 19)
† 복음 : 마태 4, 1 - 11
오늘 전례
▦ 오늘은 사순 제1주일입니다. 원조들의 불순종으로 세상에 죄와 죽음이
들어왔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이 이루어졌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이 생명의 은총이 우리 안에 있음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이 거룩한 미사에
정성껏 참여하며 죄를 멀리하는 새로운 삶을 다짐합시다.
★ 창세기는 사람의 창조와 원조들의 죄에 대하여 알려 준다. 여자는 뱀의
유혹에 빠져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 열매를 따 먹고 남편에게도 준다. 죽지
않으려거든 먹지도 만지지도 말라고 하느님께서 이르셨던 그 열매이다. 아담과
하와는 알몸임을 깨닫고 자기들의 몸을 가린다(제1독서).
★ 바오로 사도는 죄가 한 사람을 통하여 세상에 들어왔고 또한 그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왔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하여 은혜가
충만히 내리고 모두가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는다(제2독서).
★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신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빵에
대한 유혹, 하느님을 떠보려는 유혹, 세상의 권세에 대한 유혹을 모두
물리치시자 악마는 떠나간다(복음).
◈ 오늘의 묵상
소비 사회를 사는 즐거움의 하나를 말하자면 무엇보다 선택의 폭이 넓다는
것이겠습니다. 여행지를 선택하는 데나 상품을 사는 데 요즘처럼 선택의
여지가 많은 적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엄청난 선택의 폭은 처음에는
행복감을 주지만 자칫하면 오히려 삶을 망칠 수 있다는 것이 이른바 '선택의
역설'입니다. '행복'을 다룬 최근의 여러 책을 보면, 이러한 현상을 주의 깊게
관찰한 뒤 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겪는 커다란 어려움과 불만족의 큰 이유를
설명하곤 합니다.
스위스 출신의 유명한 경영인이자 문학가인 롤프 도벨리는 그의 책 『스마트한
생각들』에서 과거와 현재를 이렇게 비교합니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요구르트는 세 종류, 텔레비전 채널은 세 개, 교회는
두 군데, 치즈는 두 종류(신선하거나 혹은 부드럽거나), 생선은 송어 한 종류,
전화기는 스위스 우편국에서 연결해 주는 한 종류가 전부였다. 다이얼이
부착된 검은 전화 상자는 전화를 할 때 외에는 쓸 수 있는 기능이 없었으며,
그 당시에는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휴대 전화 가게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수많은 종류의 휴대 전화 모델들과 전화 요금제라는 홍수에
빠져 익사할 지경이다."
선택의 역설 앞에서 우리가 만나는 어려움은 이중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먼저 너무 많다 보니 선택 자체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선택한 뒤에도 그것이
최상의 선택이었는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이 선택한
것에 기웃거리며 선망과 질시, 또는 우월감 같은 건강하지 못한 감정에
시달리게 됩니다. 결국 다양한 상품들 속에서 사람들은 삶의 자연스러운
기쁨보다는 신경증을 얻을 뿐입니다. 선택의 역설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해
보면, 결국 삶의 본질적인 것에 뿌리내릴 때 비로소 그 외의 다양한 것들을
행복한 삶을 위하여 지혜롭게 선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의, 유혹을 이기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 마음속에
늘 간직할 필요가 있습니다. 소비 사회 속에서 신기루 같은 이루 셀 수조차
없이 많고 끊임없이 증식되는 욕망의 대상에 마음을 빼앗겨서는 결코 행복과
기쁨을 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범을 보여 주셨듯이, 가장 중요한 기준인 주님과 복음에
뿌리내린 삶을 먼저 선택하도록 애써야 하겠습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유혹을 이기는 방법|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3월9일 사순 1주일(마태4,1-11)
<예수님께서는 사십 일을 단식하시고 유혹을 받으신다.>
+ 마태 4,1-11
유혹을 물리치는 길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죽기까지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셨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에게 부활의 희망을 안겨 주셨습니다. 주님은 아버지의
뜻 안에 머무는 동안 악마의 유혹을 받으셨고 그 유혹을 물리침으로써
우리에게 악의 유혹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이 시간
유혹에 관해 묵상하는 가운데 악을 지배할 수 있는 주님의 힘과 능력을
입으시길 기원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아무 근심걱정이 없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어떤
유혹도 없이 평온한 상태로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다면 모두가 행복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는 우리는 근심걱정이 없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도 악의 유혹을 받으셨고 더군다나 악의세력이 뜻을
이루지 못하자 “다음기회를 노리며”(루카4,13) 그분에게서 물러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도 이러한 어려움이 생겼는데 하물며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유혹들이 있고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겠습니까? 그러므로 근심 걱정이
없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어떠한 유혹과 시련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키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실 근심과 곤란이 없으면 자만하는 마음, 남을
업신여기는 마음, 사치한 마음이 생기는 법입니다. 따라서 근심과
곤란으로서 마음의 회초리를 삼아 살아갈 수 있는 삶의 지혜를 갖추어야
하겠습니다.
아우구스띠노 성인은 “이 지상의 순례생활에는 유혹이 없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진보는 유혹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유혹을 당하지 않고는 아무도
자신을 완전히 알지 못합니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유혹을
받지 않을 만큼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거룩하고 완전하게 살려는
사람일수록 더 큰 유혹을 받게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악의세력은 거룩함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유혹에서 지면 보통 사람이고, 이기면 그야말로 큰
사람이 됩니다. 여러분 모두가 큰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솝의 우화 중 "파리와 좀나비" 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봄날 달콤한
향기를 찾아온 배고픈 파리가 꿀단지에 앉아 꿀을 핥아먹기 시작했습니다.
꿀맛에 끌린 파리는, 처음에는 언저리를 돌면서 꿀을 먹다가 드디어 꿀단지
속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마침내, 꿀단지 속에 빠진 파리는 날개가
꿀투성이가 되어 날아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때 좀나비 한 마리가
날아와 꿀 속에 파묻혀 꼼짝을 못하는 파리에게 핀잔을 주었습니다. "이
어리석은 파리야! 너는 꿀 속에 빠질 만큼 욕심이 많았더냐? 욕심이
지나쳤군!" 빈정대는 좀나비 앞에서 파리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저녁이
되어 등불이 하나씩 켜지기 시작했습니다. 좀나비는 환히 비치는 등불
주위를 빙글 빙글 돌면서 등불 가까이 다가가다가 그만 불에 타고
말았습니다. 꿀 속에 파묻혀 이 장면을 본 파리가 말했습니다. " 너도
어리석은 놈이로구나, 타 죽을 만큼 불장난을 좋아하다니!"
"먹이"에 욕심내던 파리도, "불빛" 을 찾아 헤매던 좀나비도 결국은
죽었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영적인 삶에서 떠나도록, 우리를 유혹하는
많은 손길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일시적인 쾌락과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파리와 좀나비와 같은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파리가 꿀단지에 빠져 죽으면서 행복했을까요? 좀나비가 불에 타죽으면서도
행복했을까요? 술꾼이 양조장 술독에 빠져 익사하면 죽으면서도 행복할까요?
수전노가 돈다발에 깔려 죽으면 행복할까요?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 사랑이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 2, 15-17).“그러니 자녀 여러분,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그래야 그분께서 나타나실 때에 우리가 확신을 가질 수 있고,
그분의 재림 때에 그분 앞에서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1요한 2,28).
‘나쁜 일은 멈추고 좋은 일만 해야 합니다.’‘하느님 앞에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말아야 합니다.’누구나 다 아는 얘기지만 실천하기는 너무도 어려운
일입니다.
유혹은 달콤하고 매력적이기 때문에 끊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유혹은 언제나
그야말로 ‘유혹적’입니다. 그래서 단호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유혹자와 자주
접하게 되면 유혹에 둔감하게 되고 결국은 넘어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대한 굳건한 믿음과 충성심’으로 유혹의 기회를 끊어버려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겪은 첫째 유혹은 생계문제 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입니다. (쓰리고의 문제입니다. 먹고 ,마시고 즐기고)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고 성경에 기록 되어 있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도와주려면 무엇보다도
돈이 필요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의 말씀대로
“사람들이 기아로 죽어가는 것은 하느님께서 그들을 돌보시지 않아서가
아니라 바로 여러분과 내가 너그럽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손 안에 있는 그 사랑을 나누어 주는 도구가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분명,
빵이 중요하지만 빵보다 사랑이 중요합니다. 물질적인 것 위에 영적인 것이
있습니다.
두 번째 유혹은 명성(명예)에 대한 유혹입니다. 악마는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운 다음 성경의 ‘천사들이 너를 보호하고 받쳐 주리라.’하는
말씀을 들먹이며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여기에서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루카4,9). 하고 말하였습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도 살수
있다는 것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하느님의 능력인 기적을 남용하라’는
요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하신 말씀이 성경에 있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남의 눈에 띠고 인정을
받으며 찬사를 받고 싶어 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에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일상의 십자가는 남몰래 지기를 싫어합니다. 그러므로 생색내기의 유혹에서
벗어나기를 기도해야겠습니다.
세 번째 유혹은 권력에 대한 유혹입니다. 사탄을 경배하면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는 성경말씀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사실
상대방을 더 많이 지배하고픈 마음,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면 불의와
타협하고도 싶은 마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순교자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많은 성인 성녀들이 하느님을 따르기 위해 세상의
부귀영화를 버렸습니다. 박해 시절에 그들이 세상과 타협했다면 목숨을
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래서 모두를
얻었습니다. 우리도 지상의 조그마한 유익함 때문에 하느님을 버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정치에 발을 디뎠던 분이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정치를 하려니 “얼굴에 철판을 깔아야 하고,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해야 하며
소신이 없어야 하더라.” 만약 우리가 불의와 타협한다면 그것이 사탄을
경배하는 일이 된다는 것을 잊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유혹을 물리치는 길을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히브2,18) 그러나 그 길을 따르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부, 권력, 명예의 3가지 유혹을 보았는데 결국 예수님께서는 모든 유혹을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물리쳤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의 말씀으로 무장하는 것입니다.
에페소서 6,10. 17절을 보면 “주님 안에서 그분의 강한 힘을 받아
굳세어 지십시오. 악마의 간계에 맞설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히
무장하십시오.” “구원의 투구를 받아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말씀에
충만하여, 성령의 칼로 무장되어, 괘락과 욕망을 향한 유혹을 물리치고,
진리를 떠나가지 않는 승리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모든 유혹에서 자유로워지려면 성경을 읽으십시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어떤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 눈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이러한 하느님께
우리는 셈을 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히브4,12) 따라서 말씀에 나를
비추어 새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통해 유혹을 극복한 인물을 보면 구약의 요셉은 경호대장 보디발의
집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마침 집안에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때
보디발의 부인은 요셉의 옷을 붙잡고 침실로 같이 가자고 꾀었습니다.
요셉은 옷을 그의 손에 잡힌 채 뿌리치고 밖으로 뛰쳐나갔습니다.
(창세 39,11-12)
다윗은 자기를 시기하여 죽이려고 하는 사울을 오히려 죽임으로써 원수
갚을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알리는 아비새를 타이르며 말했습니다.
“그렇게 해치워서는 안 된다. 누가 감히 야훼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어른에게 손을 대고 죄를 받지 않겠느냐?”(1사무 26,8-9) 하며 유혹을
물리쳤습니다.
그러나 유혹에 떨어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뱀과 여인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습니다.(창세3,1-7) 그리고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다가 그만 소금 기둥이 되었습니다.(창세19,26)
에사오는 떡과 불콩죽을 받아 먹은 후 야곱에게 장자의 상속권을 팔아
먹었습니다. 아론은 금으로 신상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 제단을 만들고
축제를 올렸습니다.
다윗은 어느날 궁전 옥상을 거닐다가 목욕을 하고 있는 한 여인을 보게
되었고 결국 그 여인을 불러다가 정을 통하고 돌려보냈습니다
(2사무 11,2-4). 다윗은 유혹을 이긴 사람이기도 하지만 유혹에 넘어간
사람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이렇습니다. 선한 일을 하고 좋은 결심을 해도
한 순간에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혹을 한번 이겼다고 해서 방심할
일이 아닙니다. 베드로 사도는 말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대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굳건히 하여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1베드5,8).
가리옷 유다는 적신 빵을 예수님으로부터 받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유다에게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하고
이르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유다는 빵을 받고 바로 밖으로 나갔습니다. 때는 밤이었습니다.
(요한 13,25) 그리고 마침내는 예수님을 팔아 넘겼습니다.
그렇다면 유혹에 넘어가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자만해서 그렇습니다.
이사야서 47,10에서는 “네가 실컷 나쁜 짓을 하면서도 ‘나를 감시할 눈이
없다.’하고 자신만만이구나. 너는 지혜로운 체, 세상일을 다 아는 체하며
‘이 세상에 나 밖에 없다.’고하다가 제 꾀에 넘어가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뱃속까지 환히 들여 다 보시는 하느님께서 보고 계신데 하느님을
의식하지 못한 탓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자기 욕심에 끌려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사람이
자기 욕심에 끌려서 유혹을 당하고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가져 옵니다.”(야고 1,14-15) 더
많이 소유하고 지배하고자 하는 욕심이 우리를 병들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유혹을 이겼듯이 성경을 읽음으로써 굳건해 져야
하고, 무엇보다도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함께
기도하기를 청한 다음 겟세마니 동산에 오르시어 “내 마음이 너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남아서 깨어 있어라. 부탁하고 조금 더
나아가 엎드려 기도하셨습니다”(마르14,36). “기도를 마치시고 세 제자에게
돌아와 보시니 제자들은 자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너희는 나와
함께 단 한 시간도 깨어있을 수 없단 말이냐?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말을 듣지 않는구나!”하시며 한탄
하셨습니다(마태26,40-41).
이성과 육이 따로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나는 내가 하는 일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 한 법칙을 발견합니다. 내가 좋은 것을 하기를 바라는데도 악이
바로 내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내적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로마7,15.21)
주님의 기도에서도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하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새사람이 되라고 권고합니다. “옛 생활을 청산하고 정욕에
말려들어 썩어져 가는 낡은 인간성을 벗어 버리고 마음과 생각이 새롭게
되어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새 사람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새 사람은
올바르고 거룩한 진리의 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에페4,21-24)
하느님의 말씀과 함께하면 유혹은 은총입니다. 자신을 확실히 볼 수 있는
기회이고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풍성하게 내렸으니 말입니다. 유혹이
없기를 기대하지 말고 유혹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쌓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가슴에 안고 사시는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2독서 보면,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로마5,18).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유혹에 넘어감으로써 이 세상과 인류에게 죄와
죽음을 돌아오게 하였다면, 새 아담이신 예수님께서는 유혹을 이겨냄으로써
온 세상을 구원의 길로 이끄시는 사명을 시작하셨습니다. 주님의 도움으로
유혹을 이겨내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유혹을 이겨내게 하는 도구로
쓰임 받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여우 잡는 법
여우란 놈이 단 것을 그리 좋아한답니다. 특히나 곶감을 좋아한답니다. 옛
사람들이 그러한 여우의 식탐을 이용해서, 덫이나 올무 따위로는 어림도
없을 만치 조심성 많고 약아빠진 그놈들을 손쉽게 잡는 방법이 있었다는데,
여우가 잘 다니는 길목 어귀쯤에 있는 단단한 나뭇가지에, 곶감을 매달아
놓은 질긴 명주실을 묶어두고는, 그냥 나 몰라라 하고 두어 둔답니다.
곶감을 발견한 여우란 놈은 아무래도 그 매어놓은 형태가 수상스럽지만,
달디 단 곶감의 유혹을 뿌리칠 재간은 없고, 제 딴엔 온갖 잔머리를 굴려가며
조심조심 잘라 먹는다나 어쩐다나. 다음번엔 곶감을 조금 더 높이 달아놓는데
여전히 의심 많은 여우는 한 입에 덥썩 베어 물지 못하고, 누가 여우
아니랄까봐 조심조심......
그렇게 조금씩 높이 달기를 계속하다 여우가 완전히 의심을 풀게 될 즈음,
달아놓은 곶감의 높이를 여우의 키 보다 높게, 그러니까 풀쩍 뛰어오르지
않고는 먹을 수 없는 높이에 달아 놓는답니다. 이번엔 곶감 속에 낚시바늘을
꿰어놓고 말입니다.
여우란 놈은 지금껏 아무 탈 없이 달고 맛있는 곶감을 먹어 온 터라, 별 생각
없이 폴짝 뛰어 한입에 삼키는 순간, 그만 낚시바늘에 걸려 대롱대롱 매달릴
수밖에 없는거죠.
사탄의 네 가지 말
서양의 속담에 의하면 마귀가 네 가지 말로 사람을 죄에 떨어지게 한답니다.
첫째. ‘누구나 다 하는 일인데 뭘’ 둘째. ‘대수롭지 않은데 뭘’(이까짓 일이야).
셋째. ‘딱 이번 한번 만이야!’ 네 번째. 아직 앞날이 많으니까. 유혹은 이렇게
평범하게 생각하는 가운데 다가옵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성경의 말씀을 앞세워서 이겨내십니다.
2014년 가해 3월9일 사순 제1주일
<예수님께서는 사십 일을 단식하시고 유혹을 받으신다.>
+ 마태 4,1-11
신앙적으로 아주 열심인 자매님이 계셨습니다. 매일 미사에 참석했고,
기도생활을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으셨지요. 또한 희생과 봉사에 있어서도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실천하시는 모든 신앙인들에게 모범적인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자매님께서 수도원에서 피정을 하고 계셨습니다. 피정에
임하면서 주님의 사랑에 대해서 더욱 더 많이 느끼게 되었고,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더 좋으신 주님과 함께 하겠다는 두터운 다짐을 할 수 있었던
은총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바로 그 순간, 마귀가 유혹을 이렇게 유혹합니다.
“너 지금, 피정을 끝내고 집으로 가면 내가 네 아들을 서울대에 합격시켜줄게.”
이 자매님은 “피정을 제대로 마치지 말고 집에 가라고? 아들이 서울대 가는
것도 좋지만, 주님을 체험하는 것이 더 좋아. 또 본인의 노력 없이 서울대
들어가는 것은 옳지 않아. 그래서 나는 피정을 끝낼 수 없어.”라고 유혹을
이겨냈습니다. 이에 마귀가 다시 유혹합니다.
“너 지금, 피정을 끝내고 집으로 가면 내가 강남의 제일 크고 화려한 아파트를
줄게.”
이번에도 자매님은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이 꼭 좋은 것은 아냐. 나는 피정을
통해서 주님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어.
나는 피정을 끝낼 수 없어.”라고 대답하며 유혹을 이겨냈습니다. 그런데 마귀가
무엇이라고 자매님께 속삭이자, 얼른 서둘러서 짐을 싸들고 수도원을 나왔다고
합니다. 마귀가 무엇이라고 유혹했을까요? 마귀는 이렇게 유혹했답니다.
“네가 정 피정을 마치지 않겠다면, 너에게 준다고 했던 것을 네가 싫어하는
옆집 준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특히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이 잘 될 것이라는 유혹을
이겨낼 수 없었던 것이지요.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 아니었을까요?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안에는 너무나도 많은 유혹들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 유혹에 대해 우리들은 어떻게 이겨내고 있을까요?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것처럼, 주님께서 직접 유혹에 자기 자신을
내맡기십니다. 당신께서 이겨내신 방법으로 우리 역시 유혹을 이기라고
말이지요. 돌을 빵으로 만들라는 유혹, 높은 곳에서 뛰어 내리라는 유혹,
악마에게 절하라는 유혹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유혹을 따르면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고, 천사가 지켜줄 것이고, 세상의 모든 것을 주겠다는
것이었지요. 어쩌면 우리들이 많이 겪는 유혹입니다. 지금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들에 대한 유혹들, 하느님을 직접 체험하고자 하는 유혹들, 또한
악마와 타협해서라도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고자 하는 유혹들이지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이 유혹을 어떻게 이겨내셨습니까? 성경의 말씀을
앞세워서 이겨내십니다. 우리 역시 성경의 말씀으로 무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힘만으로는 쉽게 넘어갈 수밖에 없는 유혹들이기에, 주님과 철저히
함께 해야 악마를 내 곁에서 떠나보낼 수 있습니다. 악마와 함께 해서는
안 됩니다. 대신 언제나 주님과 함께 하는, 참 행복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영혼에서 우러나오는 일을 할 때는 마음속에 기쁨의 강물이 흐른다(루미).
인천 연수동성당 사목회 임원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했던 용유도성당입니다.
무엇이 중요한가?
언젠가 책을 보다가 펭귄에 관해 이제까지 알지 못했던 사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글쎄 펭귄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돌멩이라고 하네요.
돌멩이로 보금자리를 만들고, 반짝이는 딱정벌레의 등껍질로 조명을 삼아
인테리어한 집은 수컷 펭귄이 암컷을 유혹할 수 있는 최상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돌멩이를 제일 중요한 것으로 생각한다고 합니다.
펭귄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돌멩이. 그런데 여러분들은 이 돌멩이를
소중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누구도 길에서 흔하게 접할 수 있는 돌멩이를
소중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뭘 그런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지?’라고
말씀하시겠지요.
사람들이 소중하고 말하는 돈이나 귀금속들도 그렇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전지전능하신 주님께서는 돈이나 귀금속 등 물질적인 것들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고 있는 사람들을 행해서 이러지 않으실까요?
‘어차피 죽으면 가지고 오지도 못할 것을 뭘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하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까요? 곧 없어지고 말 것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영원한 것을 찾아 나서는 지혜로운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서울] 사순 제1주일
2014년 가해 3월9일
<예수님께서는 사십 일을 단식하시고 유혹을 받으신다.>
+ 마태 4,1-11
오늘은 사순 제1주일입니다.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는 ‘유혹’입니다.
그리고 그 유혹을 이겨내는 방법입니다. 악의 세력이 사람들을 유혹하는
방법이 3가지 있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다음에 하지!’입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다음에 하지’라는 이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후회의 눈물을 흘리곤
합니다. 부부 싸움을 한 후에 퇴근해서 먼저 미안해라고 말하기로 했는데 막상
집에 와서는 그 말을 못하는 경우를 봅니다. 한마디 했으면 쉽게 풀릴 냉랭한
분위기는 그 한마디 말을 못하고 다음에 하자고 마음을 먹으면서 1주일 1달을
가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습관을 고치겠다고 하지만 ‘다음에
하지’라는 이 유혹 때문에 3살 버릇이 80살까지 가기도 합니다. 아직 기회가
있다고, 아직 시간이 있다고 그래서 다음에 하자고 미루는 사이에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기도 하고, 하늘로 가는 기차는 떠나기도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다른 사람도 다 그러는데!’입니다. 예전에 광화문에서 종로 경찰서
쪽으로 가는데 빨간불에 앞의 차가 멈추지 않고 가기에 저도 따라 간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경찰은 앞의 차는 잡지 않고 제 차만 잡더군요. 그래서 왜
앞의 차는 잡지 않고 제 차만 잡느냐고 하니까 경찰이 이렇게 이야기 하더군요.
‘제 맘입니다. 면허증 주세요.’ 아무 말도 못하고 범칙금을 물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세상 사람들도 다 그렇게 적당히 법을 어기고,
양심을 속이고,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니까 나도 그래도 된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그러나 정말 우리가 닮아야 하는 분이 있다면 하느님을 위해 희생하고
목숨까지 바치는 사람들을 닮아야 할 것입니다. 이웃을 위해서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누는 사람, 10년 째 몸져 누워있는 아내를 지극 정성으로 돌보는
남편,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성당의 화장실을 깨끗하게 치우고 성체조배를
하고 가는 형제를 닮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따르고 닮아야 하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여야 하겠습니다.
세 번째는 ‘나는 안 돼!’입니다. 베드로 사도도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반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절망을 버렸고 희망을 가졌기 때문에
회개 할 수 있었고, 다시금 주님의 커다란 사랑을 받아 교회의 큰 별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희망을 버렸고 절망을 가졌기 때문에 구원의
빛을 볼 수 없었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악의 세력은 ‘나는 안 돼!’라는
유혹으로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합니다. 자녀를 키울 때도 그렇습니다.
‘너는 안 돼!’라는 말을 들은 아이는 매사에 자신감이 없고, 움츠러들며
패배의식을 갖고 성장합니다.
그러나 ‘너는 잘 할 수 있어, 잘 될 거야’라는 말을 들은 아이는 실패와
좌절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다시 일어서는 것을 봅니다.
중국에서는 원숭이를 쉽게 잡는 법이 있다고 합니다. “입구가 좁은 항아리
안에 원숭이가 좋아하는 과일을 듬뿍 놓아둡니다. 그리고 그 항아리를 땅에
묻습니다. 그러면 원숭이는 자기가 좋아하는 과일 냄새를 맡고 나무에서
내려와 그 항아리를 보고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다음 그 항아리 안으로
손을 넣어서 과일을 움켜잡습니다. 이제는 사람이 와도 원숭이는 과일을
놓지 못하고 그렇게 사람에게 잡힌다고 합니다.”
사람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원숭이처럼 그렇게 쉽게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존재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을 조금만 돌아보면
너무나 쉽게 유혹에 넘어가 자신은 물론 남에게까지 피해를 주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아담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뱀의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카인은
자신만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야 한다는 교만이라는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다윗은 욕정이라는 유혹에 빠져서 충실한 부하 ‘우리야’를 죽음에 이르게
했습니다. 아담은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창조하신 사람입니다.
카인은 이제 사람인 아담과 하와가 낳은 자식입니다.
다윗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기름부음 받은 왕입니다.
성서의 말씀을 보면 훌륭한 학식이나 능력으로는 유혹을 이길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만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유혹을 이길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할 때 우리는 물질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할 때 우리는 교만이라는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할 때 우리는 권력이라는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사순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주님께 의지하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우리 삶의 유혹을 이겨내고 주님의 충실한 자녀가 되도록
노력해야 되겠습니다.
- 서울 대 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도회] 광야, 유혹, 말씀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3월9일 사순 제1주일
창세2,7-9;3,1-7 로마5,12-19 마태4,1-11
<예수님께서는 사십 일을 단식하시고 유혹을 받으신다.>
+ 마태 4,1-11
광야, 유혹, 말씀
디지털 시대입니다. 자연은 점차 사라지고 인위가 위세를 떨치는 첨단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자연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인간은 자연이기 때문입니다.
인위의 디지털 시대일수록 유혹은 많습니다.
가장 힘든 것이 다양한 중독현상일 것입니다. 자연을 떠난 업보입니다.
특히 요즘의 젊은이들에게 가장 흔한 중독은 스마트폰일 것입니다.
도저히 스마트폰을 떠나선 살 수 없는 젊은 이들 같습니다.전철을 타고
다니다보면 온통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사람들입니다.
흡사 생각 없는 사람들, 영혼 없는 사람들 같이 보이기도 합니다.
극단적 사고는 금물입니다. 인위와 자연, 디지털과 아날로고의 조화가
필수입니다. 깨어 사는 영성훈련이 참으로 필요한 시대입니다.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비법을 소개합니다.
첫째, 광야를 확보하는 것입니다.
광야의 고독과 침묵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광야는 어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삶의 자리가 광야입니다.
광야여정의 인생을 살아가는우리들입니다.
특히 사순시기는 광야인생여정을 압축합니다.
옛 구도자들은 하느님을 찾아 광야의 사막을 찾았습니다.
하느님을 만나고 악마와 싸우러 광야를 찾았습니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바로 여기 광야가 하느님을 만나고 악마와 싸워야 하는 곳입니다.
사막을 사막으로 받아 들일 때 바로 거기가 낙원입니다.지금 여기의
광야를 떠나선 구원도 없습니다. 흔히 수도원의 앞문은
세상에 열려있고 뒷문은 광야에 열려 있어야 한다 하는 데 수도원뿐
아니라 모든 믿는 이들에게 해당되는 영적 진리입니다.
고독과 침묵의 광야에서 정화되고 단단해지는 영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공생활에 앞서 본격적인 광야체험을 합니다.마치 우리의
사순시기를 압축한 듯 합니다.
주님은 광야에서 사십일을 밤낮으로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주목할 것은 성령의 인도입니다. 성령은 광야여정의 든든한 보호자임을
깨닫습니다. 광야여정의 사순시기, 늘 깨어 성령께 활짝 마음을 열고
살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둘째, 유혹은 인간 현실입니다.
광야에 유혹은 필연입니다. 유혹 없는 광야 세상은 없습니다.
유혹에 싸여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창세기의 하와와 아담은 악마의 유혹에 빠져 은총을 잃었지만 복음의
예수님은 악마와의 영적전투에서 승리했습니다. 견물생심입니다.악마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습니다. 여자가 뱀에
속삭입니다만 실은 내면에서 자기를 유혹하는 악마의 소리입니다.
생각 없는, 영혼 없는 사람들은 필히 내면에서 속삭이는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기 마련입니다. 내면이 허약하면 헛것이 보이는 것 역시 잠재의식
안에 잠재되어 있는 악마의 발호입니다.
복음의 예수님 역시 사십 일을 단식하신 뒤 몹시 시장하신 중에 유혹자의
유혹을 받습니다. 악마는 유혹자입니다. 우리가 누구를 유혹할 때 우리는
본의 아니게 악마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유혹되지 않으면 악마는
무력합니다.
극한 상황 중에 예수님의 내면에 떠오르는 유혹자의 소리입니다.
셋째, 말씀이 생명입니다.
말씀은 인간의 본질입니다. 말씀은 하느님의 현존입니다.
말씀은 생명의 빛입니다.
중심이 약할 때 악마의 유혹입니다.
악마의 유혹에 최상의 무기는 하느님의 말씀뿐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말씀 사랑입니다.하느님을 믿고 사랑할 때 일체의 기적을 바라지 않습니다.
기적을 바랄 때 바로 악마의 유혹이 시작됩니다.
하와와 아담은 악마의 유혹에 빠졌지만 예수님은 유혹을 물리쳤습니다.
예수님께 악마의 유혹은 참으로 유치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악마의 유혹을 물리친 세 말씀은 여전히 우리에게도 소중합니다.
세상에 악마의 유혹에 하느님의 말씀보다 더 좋은 무기는 없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영혼을 튼튼히 합니다.
영혼이 말씀으로 충만할 때 탐식의 유혹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성경에 이렇게도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모든 기적의 욕구는 믿음 부족을 반영합니다. 진정 주님을 믿고 사랑하는
자들은 일체의 하느님을 시험하는 행위는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까지 일체 하느님을 시험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악마를 패퇴시킨 말씀이 통쾌하기 짝이 없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악마의 유혹을 모두 하느님의 말씀으로 물리쳤습니다.
얼마나 성경의 말씀과 하나된 예수님의 삶인지 깨닫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경배할 분은, 섬길분은 하느님 한 분뿐입니다.
평생 하느님만 경배하고 섬기는 하느님 중심의 삶에 항구할 때 악마의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승리가 고맙습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처럼 악마의 유혹을 이길
수 있는 희망을 지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예수님이 계시기에 살
맛이, 살 희망이 생깁니다. 바오로는 감격하여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아담은 장차 오실 분의 예형입니다. 사실 그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하느님의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은혜로운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충만히 내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선물로 우리 역시 악마의 유혹을 물리칠 힘을
얻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당신 말씀으로 우리를 무장시켜 광야세상에
파견하시어 온갖 유혹을 이기고 승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 [수도회] 물러가라, 사탄아!!! /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인끌레멘스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3월9일 사순 제1주일
<예수님께서는 사십 일을 단식하시고 유혹을 받으신다.>
+ 마태 4,1-11
물러가라, 사탄아!!!
인디언의 속담 하나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말을 타고 달리다 내 영혼이
잘 따라오는지 돌아보기 위해 말을 잠깐 멈춘다”고요.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숨 가쁘게 어디론가 향하고 있습니다. 잠시 멈추어 서서 자문해
봅니다. 나는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내가 가고자 하는 곳은
어디인가? 내가 진정으로 그리워하는 것은 무엇인가? 멈추어서야 내가
달려온 길을 다시 돌아볼 수 있고 내가 가고자 하는 길도 잘 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도 멈추십니다. 세례를 받으신 후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서 40일 동안 멈춰서 당신이 앞으로 가야할 길을 준비하십니다.
여기 있는 우리도 예수님처럼 멈추어 서서 우리가 달려온 길과 앞으로
가고자 하는 길, 그리고 이 길을... 가고 있는 나 자신을 봐야합니다.
사순시기는 ‘영적인 멈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광야’는 진정한 나의
모습을 정나라하게 꾸밈없이 보여주는 ‘계시의 장소’입니다.
우리 내면 안에서 빛과 어둠이 늘 공존하고 있습니다. 우리한테는 분명
어둠에서 빛을 향해, 죄에서 구원을 향해, 속박에서 자유와 해방을 향해
걸어가고자 하는 열정과 열망이 있습니다. 이러한 열정과 열망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현실은 어둠의 세력에 힘들어 하고 고통받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유혹을 참으로 많고 있습니다. 유혹에 빠져 넘어지고 깨지고
상처를 입고 있습니다. 유혹에 빠지면 빠질수록 우린 점점 우리 삶의 참된
본질과 목적, 그리고 여기에서 오는 참된 기쁨이라는 선물을 잃어버립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셨지만 아담의 아들인 참 인간이 되신 분입니다. 우리
인간의 현실을 당신 것으로 삼으시기 위해서 악의 세력과 대면하셔야
했습니다. 예수님도 우리처럼 악마의 유혹을 받으십니다. 돈으로 대표되는
물질에 대한 유혹, 하느님을 내 마음대로 조종하고자 하는 유혹, 권세와
명예를 갖고자 하는 유혹을 받으십니다. 참 사람이셨던 예수님도 이러한
달콤한 유혹에 분명 흔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단호히
명령하십니다. “물러가라, 사탄아!”
교회의 무수한 성인들은 악마와 맞서 싸웠습니다. 이집트의 안토니오
성인, 우리가 따르고 있는 베네딕도 성인, 프란치스코 성인, 그리고 근대에
와서는 1968년에 선종하신 카푸친 프란치코회 오상의 비오 신부님도
끊임없이 악마와 싸웠고 물리쳤습니다. 우스개말로 마귀가 제일 많은
곳은 다름아닌 수도원 담벼락이라고 합니다. 수도원은 하느님만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사탄은 반대자, 적대자입니다.
하느님의 길을 걷는 이들의 적대자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라면 사탄은 가만 있지를 못합니다. 아주 교묘한 방식으로 유혹의
손길을 뻐칩니다. 사람을 통해서나 어떤 사건들을 통해서 혼란에
빠뜨려, 우리 삶의 근본 목표인 하느님에 대하여 실망하고 기쁨을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예를 들어, 비오 신부님이 교황청으로부터 온 한 신부한테 모함을 받아
신자들한테 미사나 고해성사를 하지 못하도록 직무 정지를 당했습니다.
이 때문에 비오 신부는 슬픔과 비탄과 내적 혼란에 빠집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은 자신을 모함한 그 신부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악마의 이간질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습니다. 비오
신부님은 그 신부를 미워하지 않고 침묵 가운데 더욱 기도에 매달렸습니다.
다양한 방식으로 악마의 유혹을 많이 받고 있습니까? 그러나 실망하거나
절망하지 마십시오. 악마는 거룩한 길을 가려고 하는 사람에게만
접근합니다.
유혹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 따르고자
하는 사람이라는 또 다른 증거입니다. 그래서 한편으로 유혹 때문에
고통과 고민과 실망이 우리를 짓누르지만, 참 신앙인이라면 우리는
참으로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더욱 강하게 합니다. 우리를
더욱 겸손하게 만듭니다. 우리를 더욱 기도에 열중하도록 만듭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이러한 신비를 깨닫게 됩니다. 악의 유혹도 우리 자신이
하느님만을 더욱 갈망하게 하는 도구임을 깨닫게 됩니다.
유혹을 받고 있는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명령하십니다.
“물러가라, 사탄아!!!”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인끌레멘스신부님 복음단상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확신(Conviction)
2014년 가해 3월9일 사순 제1주일
< 예수님께서는 사십 일을 단식하시고 유혹을 받으신다. >
복음 : 마태오 4,1-11
영화 ‘컨빅션(Conviction: 확신)’은 ‘케니’ 오빠와 그의 여동생 ‘베티 앤’의
기적 같은 감동 실화를 영화한 것입니다.
케니와 베티는 전혀 자신들을 신경써주지 않는 어머니 밑에서 자랍니다.
그런 가정이다 보니 남의 물건도 훔치고 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가기도
하며 지나치게 개구지게 자라게 됩니다. 그러나 둘의 우애는 너무나
깊어서 케니는 여동생 베티를 지켜주기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감옥에도 가끔 다녀오는 평탄치 않은 삶을 살아갑니다.
어느 날 둘이 사는 동네 근처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집니다. 한 여인이 매우
처참하게 살해됩니다. 전과기록이 있고 얼굴에 상처가 나 있다는 이유로
경찰관은 나무를 자르고 있는 케니를 긴급체포합니다. 그러나 어떠한
증거도 나오지 않자 그를 다시 풀어줍니다.
2년 뒤 아버지 장례식 날 갑자기 경찰이 들이닥쳐 케니를 살인죄로 다시
체포해갑니다. 이번에는 수많은 증거들이 발견됩니다. 그가 사용하던 피
묻은 칼이 증거물로 제시되고, 특히 케니와 사귀었던 한 여성이 그가
살인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하고, 또 그의 아내가 2년 전 피가
묻은 옷을 입고 와서 한 사람을 죽이고 왔다고 자신에게 말했다고
증언하고, 살인자의 피가 ‘O’형인데 케니의 피도 ‘O’형이기 때문에 재판은
‘무기징역’으로 판결이 나고 맙니다.
그러나 이 판결을 믿지 않는 유일한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의
동생 ‘베티’입니다. 베티는 그의 오빠가 결백하다고 ‘확신’합니다. 그는
오빠를 빼내기 위해 항소하고 갖은 노력을 다 하지만 별반 도움이 되지
못하고 그렇게 몇 년이 흐릅니다. 그러면서 케니는 평생을 감옥에서
썩을 수 없다며 자살시도까지 하게 됩니다.
베티는 이렇게는 안 되겠다 싶어 자신이 직접 변호사가 되려고 준비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돈과 시간이 소비되면서 가정은 편치 못하게
됩니다. 남편은 다른 여자가 생겨 별거하게 되고, 그녀의 두 아들도
자신들에게 신경써주지 못하는 엄마를 원망하며 아빠에게 가려 합니다.
베티는 자신과 오빠를 신경써주지 않았던 그 밉던 엄마의 모습이
자신에게서도 비춰지는 것을 보고 포기하고 가정을 돌볼까 고민을 하게
됩니다. 더군다나 늦은 나이에 공부하려다보니 따라가기가 너무 힘들어 ‘
학사경고’까지 받아 변호사가 되기는 힘들어 보입니다. 그리고 그를
믿어주던 친구까지 ‘오빠가 진짜 범인이었으면 어떻게 하겠느냐?’며
그녀의 노력이 허사로 돌아갈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암울한 상황에서도 오빠가 살인자가 아니라는 그녀의
‘확신(conviction)’은 확고부동 하였습니다. 그 확신이 거의 포기하기
직전까지 갔던 그녀에게 다시 일어설 힘을 주었습니다. 아무 죄 없이
감옥에서 평생을 살아야 하는 오빠 생각에 멈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그녀는 오랜 시간 고생한 끝에 변호사가 되게 됩니다.
변호사가 되고 난 그 때는 이제 시대가 변해서 혈액의 ‘DNA’ 검사란
것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베티는 오빠의 혈액으로 DNA 검사를 하면
되겠다 싶어 증거물 보관소에 문의했지만 증거물은 이미 폐기되었다는
답장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그 없다는 증거물을 끈기
있게 찾아냈고 오빠의 DNA가 칼에 묻어있던 혈흔에서 추출한 DNA와
일치하지 않음을 밝혀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찰과 검찰은
증인들의 진술이 있으니 직접 살인은 하지 않았을지라도 공범일수
있지 않겠느냐며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베티는 그가 살인했다는 것을 들었다는 케니의 옛 애인과 전 부인을
찾아갔지만 그들은 위증죄로 감옥에 가게 될까봐 진실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또 아주 오랜 설득 끝에 그들이 경찰의 위협으로
위증을 하게 되었다는 서명을 받아내기에 이릅니다. 그렇게 포기하지
않는 강인함으로 밀어붙여 재판을 뒤집어 18년 만에 오빠를 감옥에서
빼내게 됩니다.
그리고 2009년 7월 장장 8년간의 재판 끝에 정부와 전 경관으로부터
340만 달러의 합의금을 받게 됩니다. 그녀는 1989년부터 지금까지
242명을 DNA 검사를 통해 결백을 입증해 주었고, 그중 17명은
사형수였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오빠가 무죄임을 확신하였기 때문에
끝까지 갈 수 있었고 또 수많은 누명을 쓴 이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생명까지도 구해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따르면 예수님께서 성령의 인도로 광야로 나가 악마로부터
유혹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왜 성령께서는 유혹받는 곳으로 예수님을
데려갔을까요? 예수님은 이제 막 공생활을 시작하시려는 때였습니다.
공생활이란 인간 구원을 위한 본격적인 발걸음을 의미합니다. 그 때
유혹을 받도록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선 사탄의 유혹은 ‘삼구(三仇)’, 즉 전통적인 가르침에 따라, 마귀
(교만), 육신(성욕), 세상(돈)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벗어나는 유혹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보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고 하는 것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천사들이
와서 떠받쳐 줄 것이 아니냐?’며 ‘교만’을 유혹하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이나 된 듯이 행동하는 것이 곧 교만입니다. 또 돌을 빵이 되게
해 보라는 것은 ‘육신’을 유혹하는 것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식욕과
성욕은 비례한다고 정의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절하면 세상의
온갖 영화를 주겠다고 하는 것은 ‘세상의 영화’, 즉 이 세상의 것들에
집착하도록 유혹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이 유혹에 넘어갔었지만 예수님은 넘어가지 않으셨습니다.
유혹을 이기시고 죄를 짓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죄를 짓지
않는 것 이상으로 이 유혹을 받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령께서
이 유혹을 받도록 하신 것은 곧,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반드시 죄를 짓지
않으려는 마음을 포기하지 말아야 함을 가르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베티도 케니를 구하기 위해 노력할 즈음, 여러 문제들이 발생하여 그녀의
발을 잡았었습니다. 만약 그 유혹들에 자신을 포기하고 말았다면 케니
뿐만 아니라 미래에 그녀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누군가를 위해 좋은 일을 하기
위해서라면, 즉 이웃을 사랑하여 좋은 것을 주려면 먼저 죄를 이길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인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도 죄에 조금이라도 당신을 내어주셨다면 우리 구원은 모두
허사가 되었을 것입니다. 누군가를 위해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먼저 죄에 떨어지지 않는 것을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러기 위해서는 영화 제목처럼, ‘확신’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내가 포기하면 오빠는 죽는다.’
‘내가 죄에 떨어지면 수많은 사람이 죽는다.’
비록 자신의 눈에는 이것이 보이지 않을 수 있으나 예수님께서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라고 하셨다면,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만으로도
죄를 이길 수 있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먼저
깨끗하게 자신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요즘 ‘폼페이’란 영화가 개봉하고 있습니다. 폼페이는 예수님 시대 때의
도시였지만 매우 부자였고 매우 타락했었으며 또한 매우 교만한
도시였습니다. 참으로 상징적인 것은 그 찬란했던 도시가 순식간에
소돔과 고모라처럼 망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살던 사람들도 평균 수명이 40이 안 되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당시 수도관까지 갖춘 발달된 도시였지만 그 연결부위가
납으로 되어있었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납중독으로 오래 살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죄를 지으면 내 주위
사람들이 그 죄의 악영향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은총은 나를 통해
나가는데 내 안에 죄가 있으면 그것이 쓸려 나가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독이 된다는 것입니다. 성모님이 죄가 있으셨다면 예수님도 그 죄를
받으실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을 사랑한다면 먼저 내
자신 안에 죄가 없도록 유혹에 떨어지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나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이웃사랑의 시작이자 마침일 수 있습니다. 이 확신이 끝까지 우리를
포기하지 않는 힘을 줄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 홈페이지: http://www.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 연구 담당 전삼용 요셉 신부 -
◈ [기타] 어떻게 유혹을 이겨낼 수 있을까요?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가장 슬픈 유혹은 알면서도 넘어지는 유혹입니다.'
2014년 가해 3월9일 사순 제1주일 복음묵상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시어,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마태오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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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다양한 유혹들 속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시대입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유혹에 노출되어 살아가야 하는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유혹을 받으셨음을 오늘 복음은 전합니다. 사명의 길을
나서기 전에 성령에 이끌리어 들어가셨던 광야라는 공간에서 유혹을
받으십니다.
악마는 악마로서의 역할에 충실한 존재입니다. 옳은 길을 가고자 하는
세력이 있으면 쓰러뜨려야 하는 것이 악마의 존재 이유입니다.
유혹은 어떤 상황에서도 존재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선과 악에 대한
선택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유혹의 특징은 달콤하고 자극적입니다.
일차적이고 본능적인 것을 건드립니다.
특히 우리의 약한 부분을 통해서 다가옵니다. 우리가 욕망의 존재임을
인정하는 한, 유혹은 항상 우리 곁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유혹을 이겨낼 수 있을까요?
첫째, 기도입니다.
이기게 해달라고 청해야 합니다. 신앙인에게 기도가 끊어지면 절대로
악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께서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 마지막 부분을 상기해야 합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둘째, 복음정신과 교회의 가르침에서 나오는 도덕관입니다.
유혹은 유혹이라는 것을 아는 이들에게 가장 약합니다. 유혹의 실체를
식별할 수 없다면 유혹인지조차 모르고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항상 나를 움직이게 하려는 이 상황이 복음정신에 부합한 것이지,
교회의 가르침에 합당한 것인지를 식별하려는 노력이 요구됩니다.
셋째, 죄의 끝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유혹의 결과는 죄일 것이고, 그 죄의 끝은 아름다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지은 죄가 가져다 준 아픔과 상처를 생생하게 기억해야만 합니다.
기억할 수 있을 때 자기싸움이 가능한 힘이 주어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복음묵상에서, 가장 무서운 유혹은 유혹인지조차 모르는 유혹이라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장 슬픈 유혹은 알면서도 넘어지는
유혹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유혹에 강한 사람은 없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악마는 우리보다 강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악의 손길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하느님이 손길도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삶이라는 광야에서 그분의
도움이 없으면 쓰러지고 만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사는 것이 신앙입니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서울] 명상이나 숙고로 인생길을
2014년 가해 3월9일 사순 제1주일
<예수님께서는 사십 일을 단식하시고 유혹을 받으신다.>
+ 마태 4,1-11
명상이나 숙고로 인생길을
유혹이라는 것에 별로 신경 안 쓰고 그대로 따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유혹을 자신의 생각이나 욕심정도로 쉽게 융화시켜 버리니 걱정입니다.
그래요 어떤 면으로는 부정적 측면은 생각하기 싫다는 뜻도 있겠지요.
내 마음과 내 머리와 내 상황의 3자 대화가 부족한 시대 같습니다. 허나,
이런 대화를 하며 명상이나 숙고로 인생길을 찾아 전진해야 되지 않나요?
그래야 사탄과 그의 유혹은 걸러지고 하느님의 뜻은 내 안에서 피어나겠고요.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마태오 4,10)”
- 서울 대 교구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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