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룩한 변모 -
☆ 2014년 가해 3월16일 (자) 사순 제2주일
[수도회] 신비가로 불림 받은 우리들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제1독서 : 창세 12, 1 - 4ㄱ
† 제2독서 : 2티모 1, 8ㄴ - 10
† 복음 : 마태 17, 1 - 9
오늘 전례
▦ 이제 우리는 사순 시기의 두 번째 주일을 맞았습니다. 우리가 약속한
회개의 삶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다시금 점검할 때입니다. 아집과
욕심과 오만의 껍질을 벗어 던지고 주님의 복음의 초대에 순수한 마음으로
다가가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를 새로운 삶으로 초대하시는
주님께 감사드리며 이 미사에 마음 모아 참여합시다.
★ 주님께서는 아브람을 부르시어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당신께서 보여 주실 땅으로 가라고 이르신다. 그리고 그가 큰 민족의
시조가 될 것이며 복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신다(제1독서).
★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보낸 둘째 서간에서 하느님의 힘을 믿고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라고 권고한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으로
생명과 불멸의 길을 환히 보여 주셨다고 강조한다(제2독서).
★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그의 동생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을 때 해처럼 빛나는 모습으로 변하신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를 나눈다. 이를 본 베드로는 초막을 지어
함께 머무르고 싶다고 예수님께 말씀드린다(복음).
◈ 오늘의 묵상
20세기의 위대한 작가로 꼽히는 독일의 토마스 만은 그의 기념비적인
만년의 대작 『요셉과 그 형제들』을 이러한 인상적인 구절로 시작합니다.
"깊은 과거의 우물로. 우물은 우물이되 너무 깊어서 바닥을 모른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 장편 소설은 인간의 비밀과 종교성의 본모습을 그
심연까지 '두레박'을 내려서 파헤쳐 보고자 하는 야심적인 노력의
열매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이 되는 이야기는 야곱과 요셉 그리고 그의
형제들에 관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장대한 이야기를 아브라함에 대한 사색에서 시작합니다. 작가는
연민과 감탄이 교차하는 시선으로 하느님께서 내리신 '떠나라는 명령'과
'약속하신 축복'이 아브라함의 인생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 살펴봅니다.
그리고 이렇게 결론짓습니다. "오히려 이때의 신의 언약을 올바로 옮긴다면
어느 나라 말로 하든, 대강 이런 뜻이 될 것이다. '그것이 네 운명이
될지어다.' 이 운명이 하나의 축복을 뜻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아브라함이 약속받은 축복은 그와 하느님이 이제 뗄 수
없는 운명 공동체가 되었다는 사실에서 살펴보지 않으면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작가의 견해는 본질에 깊이 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주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 영광의 자리에
머무르는 축복이 필연적으로 수난의 길을 걸어야 하는 것을 포함한다는
사실을 베드로는 전 생애를 통하여 깨달았습니다. 주님께서 내 운명이라는
확신이야말로 아브라함 이래로 모든 신앙인이 받은 축복의 본질임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주님 안에서 우리의 운명을 발견하리라고
다짐해야겠습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내가 변해야 합니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3월16일 사순 2주일(마태17,1-9)
<예수님의 얼굴은 해처럼 빛났다.>
+ 마태 17,1-9
내가 변해야 합니다.
사랑합니다. 주님 안에서 행복하셨습니까? 지난주간에 큰 기쁜 소식이
알려졌습니다. 교황님의 한국 방문 소식입니다. 교황님의 한국 방문을
환영하며 한반도의 평화와 가난하고 고통을 받는 이들에게 특별한 희망이
주어지기를 기도합니다. 한국을 방문하시는데 청주교구 꽃동네도 오십니다.
가장 힘들고 소외받은 사람이 버림받은 어린이 장애인이기에 이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주시고자 오십니다. 교황님의 한국방문이 믿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믿지 않는 이들에게도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시간이 되기를
다함께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신앙의 삶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자비 덕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 손을 잡아주시고, 이끌어 주시며 우리를 다시
일어서게 해 주십니다.”우리가 잘못을 범하고 죄를 짓더라도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고 믿을 때까지 기다려 주십니다”(토마스
아퀴나스). 우리와 항상 동행하시는 주님을 생각하면서 삶의 쇄신을
이뤄야 하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필리피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미래의 희망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내달리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하늘로
부르시어 주시는 상을 얻으려고, 그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내가 이미 여러분에게 자주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데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끝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 이 세상 것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구세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킬 수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런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필리3,13-15.19-21).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위로와 희망을 얻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위로와 희망을 줍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면 과거를 하느님의 자비에
맡길 수 있고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영광스러운 미래를 희망하며 오늘을
최선에 최선을 다하여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을 온전히 믿고 따르면 구원이
우리의 것이요, 영광스러운 변모가 나의 것입니다.
친구 둘이 집으로 돌아가는 산길 이었습니다
갑자기 곰이 나타났습니다.
둘이서 곰을 피하여 도망치는데 나무 한 그루가 보였습니다.
곰은 아직 친구들을 따라오지 못하였고
서로 받쳐주면 올라갈 수 있는 나무였습니다.
나무를 잘 타는 친구가 먼저 나무를 타고서 올라갔습니다.
나무를 잘 타지 못하는 친구는 겁에 질려 ‘곰은 죽은 짐승은 먹지 않은다’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떠 올리며 그저 죽은 척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무를
타고 올라간 친구가 아래를 보니 죽은 척 하는 친구에게 곰이 쿵쿵 다가와
흠흠 냄새를 맡았습니다. 얼마 후 곰이 돌아가고 나무에 올라간 친구가
내려와 말했습니다.
- 야, 곰이 너한테 뭐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더라. 뭐라고 하든?
- 응, 위급할 때 혼자 도망치는 놈하고는 친구하지 말래.
우리말에도 “친구는 어려울 때 알아본다.”는 말이 있습니다. 서로 깊은
우정을 가진 사람인지는 시련을 앞에 두면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뢰와
사랑이 깊은 친구관계는 어려울 때 빛을 발하는 법입니다.
이것은 신앙인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예기치
않은 어려움에 직면할 때가 있습니다. 이때 하느님께 대한 신앙체험이
있는 사람은 시련이 은총의 시기요, 위기를 기회로 만들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대한 체험이 없고 건성으로 신앙생활을 한 사람은 시련에 그대로
쓰러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냉담을 하기도 합니다. 좋은 체험을 갖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은총이고 복입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제자들에게 좋은 체험을 만들어주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산에 오르시어 당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앞서 희망을 주고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한 것입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지키기를
바라셨습니다. 특히 하느님 아버지께 순명하느라 무기력해질 모습,
십자가형 앞에 우리 인간과 똑같이 두려워할 모습 앞에서도 제자들이
믿음을 잃지 않고 사흗날에 다시 살아나신다는 희망을 간직하고 강건하기를
당부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곧 다가올 아들의 십자가 앞에서 제자들이 당혹해하지 말고
두려워도 하지 말고 당당하게 맞설 힘과 용기를 지니도록 힘을 주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빛나는 모습은 예수님의 고유 모습입니다. 다만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했을 뿐입니다. 요한복음 8장12절에 보면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하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또한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마태5,14-16). 그리고 창세기 1장 26절.27절에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모습대로 사람을 만들어”….. “당신의 모습을 닮은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도 역시 영광스러운
모습을 지닌 것입니다.“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마태17,2).고 하였는데 이제 해처럼 빛나야 할 사람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의 삶이 해처럼 빛나서 주님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도록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하도록 하십시오”(로마12,2). 쉽지 않지만 이 선택의 여정에서 하느님을
분명하게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삶은 빛나게 되고 주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같이 거울을 보고
얼굴을 가꾸며 몸단장을 하듯 영혼의 상태를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에 비추어
점검하고 부족함을 채워야 하겠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고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고 거기서 머물고자 하였습니다.
초막은 하느님께서 거처 하시는 곳을 말합니다. 좋은 것을 보면 그것을
소유하고 싶고 아름다운 것을 보면 그곳에 오래도록 머물고 싶은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너무 쉽게 얻으려고 하는 것이 문제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초막을 지으려면, 내 맘대로 짓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마음에 드는 초막을 지어야 합니다. 내 생각에 주님께서 맞춰주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과 마음에 나를 맞춰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그만한 희생이 필요합니다. 자기의 취미나 하고 싶은 것, 돈 되는 것, 세상의
것을 버리는 용기가 요구됩니다.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잃어버리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허황된 초막은 헐어버려야 합니다. 수고와 땀,
사랑과 정성이 깃든 초막이 필요합니다.
어떤 이들은 큰 믿음의 소유자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또 다른 이들은 기도를
잘하는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기도는 기도하면서 배우게 되고 더 깊은 기도를 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노력하지 않고 쉽게 얻으려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들은바
대로 행해야 큰 믿음을 간직할 수 있고 믿음의 열매를 맛볼 수 있게 되며
확신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더 큰 믿음으로 나가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에
따르는 행동, 실천이 부족합니다.
사순절을 맞아 판공문제지를 나눠 드렸는데 풀어보신 분도 있고, 그렇지
않으신 분도 있습니다. 매일 성경을 읽고 성체조배를 하며 아침저녁기도를
빠뜨리지 않고 하시는 분이 계신가 하면, 일주일이 되도록 성경 한 줄도 안
읽고 기도를 소홀히 하신 분도 계십니다. 누가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알면서도 행하지 못하니 열매가 없습니다.
복음을 보면 베드로가 주님과 함께 머물기를 희망하며 초막 셋을 지어
드리겠다는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고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태17,5)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의 말을 들어라.”는 말씀을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이제는 황홀경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초막 셋을 지어 천국 같은 그곳에서 천년만년 살고 싶어 했습니다. 안주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데리고 산에서 내려옵니다.
현실로 돌아와서 거기서 희망을 갖고 살아가기를 바라셨습니다. 이는 미사
안에서 기도하고 영성체하며 기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그
정신을 살아가라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행동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 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마태17,9). 명령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 부활의 영광의 신비를 깨닫기 전까지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을 착각하거나 잘못 해석하는 것을 막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은 세속적인 권력의 영광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
드러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겪으심으로써 영광스럽게
부활하시어 우리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입이 가벼운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말에는 진실성이 없습니다. 요즘
세상에는 여러 체험을 자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도의 체험, 이상한
현상이나 꿈을 과장하고 떠벌립니다. 거기에는 겸손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말에 쉽게 휘둘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혹 그가 진정으로 하느님을
체험했다면 말이 아니라 삶이 변화되었을 것입니다. 이러저러한 현상이나
사건 안에서 진중하게 하느님의 뜻을 헤아릴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성당에는 매주 목요일 성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11시 미사에 이어
성체를 현시하고 침묵 속에 기도하며 성체강복으로 마칩니다. “교회는
성체성사로 삽니다.” 그래서 성체께 대한 존경과 사랑, 신심이 더해지기를
희망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당신이 살아 계시다는
표징을 가끔 보여 주셨습니다.(2013년 5월 30일, 8월1일, 9월12일,
10월12일,11월14일, 11월28일. 그리고 2014년 1월16일, 2월20일,
2월27일, 3월13일) 저는 ‘표징을 요구하지 마라. 말씀 안에 머물러라’고
강조하는데도 주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때에 보여 주십니다. 많은
이들이 체험을 하였습니다. 그 체험이 전부는 아니지만 성체께 대한 믿음을
더하라는 메시지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체험한 사람은 더 자주 준비된
마음으로 미사참례와 영성체, 성체조배를 하며 나눔의 신비를 살아야 할
것입니다. 체험을 했다는 것은 변화된 삶의 모습을 통해 확인됩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제발 말하지 마라!, 먼저 말씀대로 행하라.’
고 당부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삶이 더 큰 언어입니다. 주님의
얼굴이 해처럼 빛났듯이 이제 우리의 모습이 빛나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으로서 주님의 영광을 빛나게 하는 한 주간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미사참례를 더 자주 하시고, 성경도 더 자주 읽으며
그 안에서 위로와 희망을 얻고 문제의 해답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의 뜻대로 살기 위하여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하는지를 일깨워주시기를 청합니다. “이제 주님, 제가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저의 희망은 오직 당신께 있습니다.”(시편39,8)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나의 앎과 판단에 다시금 생각합니다.
요리학원에서 요리를 배워 온 아내가 남편을 위해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도와줄 것이 없나 하고 주방에 들어가서는 아내가 음식
준비하는 모습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모습이 하나 있는
것입니다. 글쎄 햄을 오븐에 집어넣기 전에 한쪽 끝을 주의 깊게 잘라내는
것이었죠. 그래서 “끝부분을 왜 잘라내? 나는 끝부분이 맛있던데.”라고
물었지요. 이에 아내는 “요리선생님께서 그렇게 하셨거든. 더 좋은 맛을
내기 위해서 이렇게 하는 것 아닐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아내 역시
약간의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다음날, 아내는 요리선생님에게 끝부분을 잘라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별 것 아니라는 듯이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이 큰 햄을 온전히 넣을 수 있을 만큼 커다란 프라이팬이 없어서요.”
맛을 위해서 햄의 끝부분을 잘라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프라이팬의
크기가 작아서 잘라낸 것뿐이었지요. 하지만 아내는 그것이 요리의 가장
중요한 절차인 것처럼 생각해서 철저하게 지켰던 것입니다.
지키지 않아도 되는 별 것 아닌 것을 잘 모르기 때문에 무조건 따라하는
이 모습을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안에 많이 담겨 있음을 깨닫습니다.
유행이라는 이유로 따르고, 남들과 다르게 살면 힘들다는 이유로 따라하고
있지 않나요? 하지만 참으로 안다면 그저 남을 쫓는 모습이 아닌, 자기
주관에 맞춰서 자신 있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가깝고 사랑의 관계에 있는 제자 세
명, 즉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높은 산에 오르십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때 제자들의
으뜸이라 할 수 있는 베드로는 이런 말을 하지요.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맛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이는 부적절한 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언자이지만 주님의 종일뿐인
모세와 엘리야를 높으신 주님과 감히 동등하게 여기는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아직 주님께서 어떤 분인지를 완전히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모세와 엘리야이기에 주님과 거의
동급이라 생각했겠지요. 하지만 모세와 엘리야 역시 예수님의 초막을
준비해서 바쳐야 할 사람입니다.
또한 여기에 머물러 지내면 좋겠다는 것 역시 잘못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영광스러운 분이시지만, 스스로 받아 이겨 내셔야할 수난과
죽음이 아직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잘못된 앎을 가지고 행동할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주님의 말씀을 듣고 따라야 할 것을 명령하는 것입니다.
나의 앎과 판단에 다시금 생각합니다. 세상의 기준, 그리고 나의 편협한
판단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주님의 뜻에 맞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순시기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픔 없이 성장할 수 없고, 실패 없이 열매를 수확할 수 없다. 과정이야말로
모든 것이며 결과는 그것 위에 나붙는 제목에 지나지 않는다(김후열).
기다림이라는 지혜
한 꼬마가 길을 가다 수박밭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먹음직한 큰 수박을
가리키며 농부에게 물었지요.
“아저씨 저 큰 수박은 얼마예요?”
“응. 10,000원이란다.”
“그런데 저는 5,000원밖에 없어요.”
그러자 농부가 작은 수박을 가리키면서, “그러면 이 작은 수박을
가져가거라.”라고 말합니다. 이에 아이는 5,000원을 건네면서 이렇게
말하네요.
“좋아요 이 수박으로 할게요. 대신 넝쿨째 놓아두세요. 한 달 후에 가지러
올게요.”
인터넷에서 본 글입니다. ‘정말로 이랬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이 글만으로는 아이의 큰 지혜를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지혜란
어떤 것인지 깨닫게 됩니다. 바로 ‘기다림’입니다. 기다림은 미래를 준비하는
커다란 힘이고, 우리 모두는 미래를 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미래를 기다리지 못하고, 현재의 상황에 좌절하고 포기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은 것 같습니다. 너무나 힘들고 어렵기 때문이겠지만,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를 과감하게 포기하는 것은 지혜롭지 않은 사람의 결론이었습니다.
미래를 잘 기다리고 준비하는 사람은 지금 현재를 열심히 잘 사는
사람입니다. 물론 우리의 나약한 마음에 어렵고 힘들겠지만, 주님께서 늘
함께 해주신다는 것을 굳게 믿으면서 다시 한 번 용기를 내시길 바랍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신비가로 불림 받은 우리들 -신비, 말씀, 복-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3월16일 사순 제2주일
창세12,1-4ㄱ 2티모1,8ㄴ-10 마태17,1-9
<예수님의 얼굴은 해처럼 빛났다.>
+ 마태 17,1-9
신비가로 불림 받은 우리들 -신비, 말씀, 복-
인스턴트 시대, 소모품 시대입니다.
급기야는 사람도 인스탄트가, 소모품이 되어가고 있는 느낌입니다.
얼마 전 오래 된 노트북을 새 것으로 바꿀 때 버려지는 옛 노트북을 보면서
오래되면 노트북만 아니라 사람도 쓸모가 없으면 소모품처럼 취급될 수
있겠구나 하는 섬찟한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래서 스펙을 쌓으며 자신을
업그레이드 시키기에 전력을 다하는 현대인들입니다. 장년, 노년은 물론이고
젊은 이들조차 소모품처럼 되어가는 잉여의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출산율이 낮다고 걱정하지만 일자리의 부족으로 날로 늘어가는 잉여의
사람들이요 날로 초라해지는 사람들입니다.
얼마전의 체험도 잊지 못합니다. 서툰 컴퓨터 솜씨로 강론을 거의
완성했다가 잘 못 누른 까닭에 순식간에 원고가 흔적 없이 날라갔습니다.
저장해두지 않았기에 도저히 복구할 길이 없었습니다.
순간 온 몸이 후들후들 떨렸습니다.
참 위태한 디지털 문명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아, 하느님 앞에 이렇게 우리도 저장 되지 않고 흔적 없이 사라질 수도
있겠고 이게 심판이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 또 못마땅한 인간관계라면
이렇게 깨끗이 지울 수 있는 사람도 될 수 있겠구나 생각도 들었습니다.
요즘 인터넷 중독, 스마트폰 중독에 대해 말이 많습니다. 정말 깨어살지
않으면 문명의 이기도 사람을 망가트리는 사탄이 될 수 있습니다.
디지털 문명의 거부가 아니라 지혜로운 활용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디지털 문명의 시대에 존엄한 품위의 참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을
소개합니다. 오늘 말씀 묵상 중 발견된 세 열쇠말(키워드), 신비, 말씀,
복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첫째, 신비가가 되십시오.
삶의 스승과 전통이, 신비(神?)와 시(詩)가 사라져 가는 시대입니다.
삶의 스승과 전통이 사라지면 조야하고 왜소한 사람만 남고, 신비와 시가
사라지면 영혼도 시들어 죽습니다. 역설적으로 삶의 스승과 전통이, 신비와
시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시대임을 깨닫습니다.
성서의 예언자들은 예외 없이 신비가이자 시인이었습니다.
시편을 끊임없이 노래함으로 영혼을 살리고 신비가로 만들어 주는
시편성무일도가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비상한 신비가가 아니라 평범한 신비가입니다.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자체가 이미 신비가로 운명지어진 인간임을 깨닫게 합니다.
신비감각을 잃으면 그대로 야수나 사탄이 되든 지 영혼 없는 기계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온통 신비 속에 살아가는 우리들이요 신비감각이 살아있을 때
찬미와 감사의 삶에 기도요, 풍요로운 내적 삶입니다.
오늘 1독서의 아브라함이나 2독서의 바오로, 복음의 예수님 모두가
신비가입니다. 아니 성경이나 교회의 모든 성인들이 하느님과 깊은 친교를
누렸던 신비가들이였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우리 모두 신비가로 불림
받았음을 선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행실이 아니라 당신의 목적과 은총에 따라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히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하느님의 뜻과 은총에 따라 거룩하게 사는 이들이 신비가입니다.
진정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신비체험의 은총입니다.
오늘 사순 제2주일
주님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물론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에게
신비체험을 선사하십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는 미사보다 건전한
신비체험은 없습니다. 십자가의 도상에서 적절한 때에 당신의 빛나는,
거룩한 변모를 체험시킴으로 우리를 정화, 성화시키는 주님이십니다.
이런 신비체험의 선물인 분별의 지혜가 되어 세상 것들의 중독에 빠지지
않게 합니다. 존엄한 품위의 참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 신비체험의
은총은 필수입니다.
둘째, 말씀의 사람이 되십시오. 막연한 신비가가 아닙니다.
말씀이 사람이 신비가입니다. 말씀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현존입니다.
말씀은 내 발에 등불이요 내 앞길을 비추는 빛입니다. 말씀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는 신비가는 바로 침묵의 사람이자 기도의 사람입니다.
1독서의 신비가 아브라함은 침묵의 기도 중에 주님의 축복의 말씀을
듣습니다. 말씀의 사람은 순종의 사람이요 믿음의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주님의 명령에 지체하거나 집착함 없이 길을 떠난 아브라함의 순종의 믿음이
참 아름답고 장엄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의 변모를 체험한 베드로의 반응도 좋은 묵상감입니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엉겁결에 선의에서 나온 반응이 분명하지만 마음 깊이에는 신비체험에의
집착이 있습니다.
아무리 하느님의 집인 여기 수도원 피정이 좋아도 내내 피정집에서 살
수는 없습니다. 조금 지나면 결국 그 자리가 그 자리입니다.
신비체험은 순전히 은총의 선물이요, 집착은 금물입니다. 주님 부활의
영광을 앞당겨 체험시킴으로 십자가의 길을 힘차게 갈 수 있도록 의도하신
주님의 의도를 잠시 망각한 베드로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베드로를 깨우치시는 하늘 아버지의 말씀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중심 말씀입니다. 신비체험은 반짝 체험일뿐 우리가
살아가야 할 여정은 막막한 일상의 광야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광야여정에 오른 아브라함처럼 베드로 역시
신비체험에 집착하지 말고 십자가의 길에 충실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은 주님의 변모신비체험을 통해 바오로의
다음 고백에 깊이 공감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폐지하시고,
복음으로 생명과 불멸을 환히 보여주셨습니다.“
바오로나 베드로뿐 아니라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님의 변모를 체험한
우리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이런 신비체험이 성령의 기쁨으로, 영적갈망의
기쁨으로 거룩한 부활 축일을 기디리며 사순시기를 보내게 합니다.
참 의미심장한 것이 분도규칙에 기쁨이란 말이 단 두 번, '제49장 사순절을
지킴에 대하여'라는 장에서만 나온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순광야 여정,
참 좋은 주님 말씀의 인도하에 성령의 기쁨으로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셋째, 복된 존재가 되십시오.
우리 모두가 주님의 복 덩어리, 복된 존재들입니다.
하느님의 기쁨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목적과
은총에 따라 우리를 부르셨다는 자체가 복된 존재임을 드러냅니다.
이 축복의 은총은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고 이제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환히
드러났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신비가가, 말씀의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되어 살 때 말 그대로 복된 존재들입니다.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은 그대로 우리에게도 이루어집니다.
"나는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 너에게 축복하는 이들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이들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리겠다.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아브라함에 대한 하느님의 전적 신뢰와 사랑을 깨닫게 합니다.
참 복된 사람 아브라함입니다. 흡사 예수님을 향한 하느님의 축복 말씀
같기도 합니다. 예수님 자체가 하느님의 축복이요 예수님을 통해 모든
사람들이 복을 받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예수님뿐 아니라 우리 역시
하느님의 복된 존재들이요 축복의 통로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한 주님과의 일치가 이를 확연히 깨닫게 합니다.
주님의 복된 존재로, 주님의 축복의 통로로 세상에 파견되는 우리들입니다.
사순 제2주일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디지털 시대에 존엄한 품위의 참 사람으로 살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첫째, 신비가로 사는 것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님의 신비변모체험의 은총이 우리를 신비가로
만들어 줍니다.
둘째, 말씀의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침묵 중에 말씀을 경청하고 순종의 믿음으로 살 때 비로소 말씀의
사람입니다.
셋째, 복된 존재로 사는 것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한 주님과의 일치가 우리를 복된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거룩하고 신비로운 당신을 닮은 모습으로 변모시켜주십니다.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 [수도회] 영적 감각/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인끌레멘스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사순 제2주일(2014년 3월 16일) : 영적 감각
<예수님의 얼굴은 해처럼 빛났다.>
+ 마태 17,1-9
다섯 가지 감각 신경은 우리 자신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물질 세계를
연결시켜 줍니다. 보고 듣고 맛보고 맡고 만지면서 우리 주위 세상을 더욱
깊이 알아가지요. 우리 신앙인은 여기에다 다른 감각 하나를 더 지니고
있습니다.
바로 영감, 영적인 감각, 내적인 감각이라는 것입니다.
오감으로 알 수 없는 또 다른 세상을 깨닫게 합니다. 오늘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의 영적인 감각이 그들을 다른 차원의 세상을 느끼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늘 같은 분이셨지만 그들의 영적 감각이 열려 주님의 신적인
모습을 직관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변하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감각이
고양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요. 영적 세계를 맛보면 우리의 현실 삶은
늘 그대로 있지만 그 깊이와 넓이가 변합니다.
평범함 안에서 비범함을, 일상 안에서 신비를, 찰나 안에서 영원함을,
무의미 안에서 영적 의미을 봅니다.
우리의 내적인 자아가 변합니다. 오늘도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일상에 지치고 무뎌진 우리의 영적 감각을 깨워주소서. 당신의 얼굴을
그리워하나이다.”
-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인끌레멘스신부님 복음단상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산에서 내려와야 하는 이유
2014년 가해 3월16일 사순 제2주일
< 예수님의 얼굴은 해처럼 빛났다. >
복음: 마태오 17,1-9
< 산에서 내려와야 하는 이유 >
오늘 복음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이 나옵니다. 바로 당신이 높은 산에서
변모하신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그것을 본 제자들에게 절대로
말해서는 안 된다고 당부하시는 것입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선포하여 당신을 믿게 해야 하는 것이 복음 선포인데 복음 선포를 하지
말라고 하시는 장면인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베드로는 그 곳에서 영광 속에 머물기를 원하지만 예수님은
베드로의 말을 완전히 무시하시고 산에서 내려오십니다. 산은 기도하는
장소요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인데 왜 하느님의 만남을 포기하게 세상으로
내려와야 하는 것일까요?
어제 밤에 가슴 아픈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와 같은 본당 출신 후배 신부님의
어머니가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먼저 하늘나라로 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고 경위를 듣다보니 이상한 점이 있었습니다. 손녀 아기를 안고
뒷좌석에 타고 계셨는데 어머니만 큰 사고를 당하고 운전하신 분과 아기는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문상을 가서 주위 분들의
설명을 듣고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가드레일을 받기는 하였지만 사실 사고는 그렇게 큰 것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운전자나 아기가 아무런 외상도 입지 않을 정도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뒤에서 아기를 안고 있었던 어머니는 사고를 순간 직감하고는
아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당신은 사고로 인해 오는 충격에 아무런 방어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손을 쓸 수 없으니 어머니는 앞으로 튕겨져 나갔고
그렇게 머리에 큰 상처를 입게 된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
순간 당신이 품에 안고 있었던 아기를 살리기 위해 당신 목숨을 던지는
결단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분은 한 아기의 할머니로서의 역할을
목숨을 바쳐가면서까지 성취하셨습니다.
우리는 뉴스에서 인면수심(人面獸心), 즉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으나
짐승의 마음을 지닌’ 사람들의 사건을 어렵지 않게 접하게 됩니다. 아기를
낳고는 아기를 무책임하게 버리기도 하고, 심지어는 죽음에 이르게까지
만들기도 합니다. 이런 일을 하였다면 부모라고 불릴 자격이 있을까요?
육체만 낳아주었다고 해서 부모가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녀는
태어나서도 부모의 사랑과 관심을 계속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계속
부모로 남고 싶다면 자신이 낳은 아기가 독립할 수 있을 때까지 온전히
성장할 수 있도록 보살펴 주어야합니다. ‘부모’가 되기 위해서는 낳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부모로서 해야 하는 마땅한 의무를 실천해야만’
참으로 부모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당신의 아드님으로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장면이 두 번 나옵니다. 즉 세례 받으실 때와 오늘 타볼산에서 변모하실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하십니다. 이 두 사건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어째서 이 두 사건에서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참으로 당신
아들로 선포하는 계기가 되었을까요?
부모가 부모가 되기 위해 해야 하는 일을 ‘부모의 소명’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세례 받으실 때와 오늘 변모하실 때, 바로 ‘하느님
아드님으로서의 소명’이 드러나는 장면일 것입니다.
세례란 바로 ‘옛 자신을 물속에 죽이고,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례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으로 올라가시며,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이 불이 이미
타올랐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이 일을
다 겪어낼 때까지는 내 마음이 얼마나 괴로울지 모른다.”(루카 12,49-50)
라고 말씀하신 것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세례는 당신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온 세상에 성령의 불을 뿌려주시고
당신은 다시 부활하시어 새롭게 태어나신다는 뜻입니다. 즉 요르단강에서의
세례는 앞으로 당신이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부활하실 참다운 세례의 표징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이 서른이 되었을 때
이제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사시겠다는 결심을 당신 세례를 통해
보여주셨고, 아버지께서는 하늘을 열어 성령을 내려주심으로 아버지로서의
당신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로 새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물론 동시에 아드님의로서의 인류구원 소명도
함께 받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니코데모에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니코데모는 이미 늙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나느냐고 반문합니다.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올 수야 없지 않느냐며 따집니다. 그 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요한 3,5-6)
즉 육적으로는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지만 영적으로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만 참으로 하느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새로 태어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사람은 어떻게 태어납니까? 바로 난자와 정자가
만나서 태어납니다. 그런데 난자는 그 자체로 한 일생을 산다는 것을
아십니까? 즉 ‘난모세포 -> 여포-> 난자 -> 황체 -> 백체’ 순으로 아기로
태어나서 늙어서 죽는 일생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 삶이 송두리째
변화되는 때가 있습니다. 바로 정자를 받아들일 때입니다. 그러면 새로운
생명체로 새로 태어나 수천 배는 오래살 수 있는 죽지 않는 생명을 가지게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도 세례 때 성령을 받아서 새로운 생명,
즉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재탄생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 또한 몸만
태어난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면 그분과
하나가 되어 새로운 존재인 하느님의 자녀로 재탄생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는 세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난자가 정자를 받아들인다고 바로 새로운 생명이 되는 것일까요?
이렇게 수정되었다고 하더라도 많은 수가 착상되지 못하고 배란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받아들였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그분의 뜻을 완수해 내야 하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요르단강의
세례에서 머무시지 않고 바로 참다운 세례인 당신의 죽음과 부활의 삶을
살아가신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복음은 세례의 연속을 나타내줍니다.
즉 세례 때 받은 하느님 자녀로서의 소명을 이어가기를 결심하는 장면인
것입니다.
모세가 나타난 이유는 모세도 80살이 되었을 때 불붙은 떨기나무를 통해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목숨을 걸고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탈출시켰습니다. 이 소명을 완수하지 못했다면 결코 지금 우리가 공경하는
모세가 되지는 못했을 것이고, 하느님도 그렇게 여겨주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엘리야 또한 예언자로서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게 하였습니다. 그의
예언자로서의 소명은 이 세상에 성령의 불을 내려오게 하여 온갖 우상과
싸워 이겨 이 세상을 정화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예언자가
예루살렘 아닌 곳에서 죽을 수 있느냐?”라고 하시며 마치 엘리야가 목숨을
걸고 바알 예언자들과 싸웠던 것처럼 당신은 이 세상과 싸우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해야 하심을 결심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말은 얼마나 이런 상황과 맞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당신의
소명을 위해 내려가서 목숨을 바쳐 아버지의 뜻을 실행해야 하시는데,
베드로는 그냥 천막을 짓고 여기에 머물자고 하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주저 없이 세상으로 내려오시면서 베드로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십자가의 죽음을 성취하시기 전까지는 온전한
하느님의 아드님이라 선포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직은
완전히 소명을 성취하지 못했기 때문에 완전한 하느님의 아드님이 되신
것이 아닌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온전히 키워냈을 때야만 온전한 부모로
불릴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도 당신 소명을 온전히 성취한 이후에 당신이
누구이신지 선포되기를 원하시는 것이고, 또한 우리도 그렇게 본받아
세례만 받았다고 하느님의 자녀가 아니라, 십자가의 실을 끝까지 걸어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냈을 때야만 온전한 하느님의 자녀라고 인정해 주실
것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구원받았습니까?”라고 물어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승전을 통과하기까지 누가 구원받았다고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당신 소명을 죽음으로써 이루어내실 때까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로 불림을 받기를 원치 않으셨다면, 우리 또한 지금 “구원받았습니다.”
라고 말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죽음에 이르렀을 때,
하느님께서 인정해 주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결승점을 향해
달리는 노력을 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라고 하신 그
순간까지, 우리 또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가는 과정’에 있는 것입니다.
타볼산에서 내려와야 하는 이유는, 아직 아들을 통한 아버지의 뜻이 온전히
성취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산에 올라 기도하면 에너지는
얻어야겠지만, 거기서 얻은 힘으로 그분의 소명을 온전히 성취할 때까지는
그 산에서 머물러 있으려고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 홈페이지: http://www.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 연구 담당 전삼용 요셉 신부 -
◈ [기타]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우리의 선택이 옳다면 옳음의 힘을 믿어야 합니다.'
2014년3월16일 사순 제 2주일 복음묵상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마태오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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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거할 수 없는 엄청난 힘이나 신비를 만나게 되면 일차적으로 우리는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베드로,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를 목격했고,
그에 대한 그들의 반응은 두려움이었음을 오늘 복음은 전하고 있다.
우리 역시 같은 상황에 놓여진다면 십중팔구는 같은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두려움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뉘어진다.
하나는 ‘옳은 힘’에 대한 두려움이고, 또 하나는 ‘옳지 못한 힘’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리고 두 가지 모두 우리의 힘을 넘어서는 강함에 대한
우리의 약함에서 나오는 두려움이다.
그런데 우리의 삶을 살펴보면, 옳은 힘보다는 옳지 못한 힘에 두려움을
느끼는 경우가 보통인 듯 하다. 물론 그 이유는 간단하리라.
옳은 힘은 강요나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다.
옳지 못한 힘은 늘 강요나 폭력을 통해서 자신의 힘을 표현한다.
너무도 많은 옳지 못한 힘을 만나게 된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신다.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
옳은 힘에는 그분의 사랑을 믿으며 두려움을 떨치고, 그분께서 내미신
손을 잡고 일어서야 한다. 옳지 못한 힘에는 우리가 선택한 선의 힘에
신뢰를 두고,
가장 큰 힘이 지켜주신다는 믿음을 갖고 두려움을 이겨내며 일어서야 한다.
결코 자신의 힘을 과신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만 옳은 힘에 의탁할 수 있는 마음이 허락되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옳지 못한 힘을 이겨낼 수 있는 참된 용기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우리의 선택이 옳기를 바란다.
그리고 우리의 선택이 옳다고 한다면, 옳음의 힘을 믿어야만 한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서울] 이런 소리에 특별히 귀 기우려야지요.
2014년 가해 3월14일 사순 제2주일
<예수님의 얼굴은 해처럼 빛났다.>
+ 마태 17,1-9
이런 소리에 특별히 귀 기우려야지요.
귀로 몸으로 마음으로 눈으로 들을 소리들이 상당히 많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소리는 의미를 갖고 있겠지요. 그저 소리일 뿐만은 아니라는 거지요.
왜 소리가 나는 지, 어떤 상태라든지, 그 소리에 대해 어찌 해야 할지 등.
사람들이 말하는 소리, 나에 대해 누구에 대해 무엇에 대해, 다 들리지요.
그러니 모든 소리와 함께 사는 세상임을 알며 기왕이면 깊게 살아야지요.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 마음 속 깊은 곳의 소리에 특별히 귀 기우려야지요.
“베드로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었다.
그리고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마태오 17,5)”
-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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