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다. -
☆ 2014년 가해 3월30일 (자) 사순 제4주일
[수원] 우리가 태경 소경임을 고백할 떄 -
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 연구담당 전삼용 요셉 신부
† 제1독서 : 1사무 16, 1ㄱㄹㅁㅂ. 6 - 7. 10 - 13ㄴ
† 제2독서 : 에페 5, 8 - 14
† 복음 : 요한 9, 1 - 41(또는 9,1.6-9.13-17.34-38)
오늘 전례
▦ 오늘은 사순 제4주일입니다. 교회는 오늘 전례에서 부활의 기쁨을 미리
맛보는 기회를 갖습니다. 입당송에 나오는 '즐거워하여라, 예루살렘아.'라는
성경 말씀에 그 정신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이 기쁨은 희생과 극기를
실천하며 주님의 수난의 길에 기꺼이 함께하려는 이들만이 느낄 수 있는
기쁨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하여 사순 시기에 요구되는 우리 신앙인의
자세를 더욱 새롭게 하도록 합시다.
★ 주님께서는 사무엘에게 이사이의 아들 가운데 하나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명하신다. 주님이 원하신 이는 다윗이었다.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붓자
주님의 영이 그에게 내려 줄곧 머물렀다(제1독서).
★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의 신자들에게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라고 권고한다.
빛의 열매는 선과 의로움과 진실이다(제2독서).
★ 예수님께서는 길을 가시다가 만난 눈먼 사람을 치유해 주신다. 안식일에
이 일이 이루어졌기에 바리사이들은 집요하게 그를 추궁하며 예수님을
죄인으로 여기라고 요구한다. 이를 거부하다가 쫓겨난 그를 다시 만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사람의 아들이심을, 곧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생명을
나누어 받을 수 있게 하려고 하늘에서 오신 분이심을 드러내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사순 시기가 깊어 가는 사순 제4주일을 '장미 주일'로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요즈음은 보기 드물지만 이날 사제가 자색이 아닌 장미색 제의를 입고 전례를
거행한 데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희생과 단식, 보속 등을 엄격히 지키는 이
사순 시기에 부활의 기쁨을 미리 맛보게 하며 위로하는 '장밋빛 주일'을
보내는 것은 낯설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기쁨이
무엇인지를 알고 느끼는 것의 중요성을 알기에 오늘의 이 거룩한 전례가
더욱더 감사할 따름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을 지닌 사람의 특징을 올바르고
합당한 일에서 기쁨을 느낄 줄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사순 시기가
신앙인으로서 필요한 덕을 키우고 수양하는 때라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디에서 어떤 방식으로 기쁨을 느끼는지 잘 살펴볼 일입니다. 기쁨이 그저
걱정거리가 없어진 상태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시작할 때
체험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사순 시기의 전례를 통하여 조금씩 깨달을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자신의 삶에서 '변화의 표징'들이 구체적으로 드러날
때 느끼는 기쁨이야말로 사순 시기를 뜻있게 보내는 이들의 특권일 것입니다.
그런데 문득 발견하는 것은, 이러한 기쁨을 얻고자 노력하지만 이 기쁨은 자기
자신이 완성하고 누리는 기쁨이 아니라, 주님의 성령으로 완성되도록
'내어놓는' 기쁨이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자신을 미완성의 존재로 인정하는
것이 신앙의 참기쁨을 느낄 수 있는 중요한 전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리처드 세넷이라는 사회학자는 『장인』이라는 책에서, 훌륭한 장인은
역설적으로 '완벽 주의'를 피할 줄 알아야 한다고 지적하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완벽 주의와 씨름하다 보면 나 자신을 의심하는 일을 해 보이려는
꼴이 되고 만다. 이 지경에 이르면 제작자의 정신 상태는 지금 만드는 물건이
해야 할 일보다도 제작자 본인의 역량을 보여 주겠다는 쪽으로 더 쏠리게
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빛 속의 삶으로 초대하십니다. 그러한 삶에는
장애와 오류와 박해가 생기지만 마침내 빛을 따르고 빛에 개방된 삶입니다.
그 빛이 온전히 자신을 비추고 채운다는 사실이야말로 우리가 느껴야 하고
또한 느낄 수 있는 기쁨의 본질일 것입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주님 사랑에 눈떠야|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3월30일 사순 제4주일(요한 9,1-41)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이 가서 씻고 앞을 보게 되어 돌아왔다.>
+ 요한 9,1-41<또는 9,1.6-9.13-17.34-38>
주님 사랑에 눈떠야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자녀들의 바람을 들어 주십니다. 이시간 주님의 사랑에 눈 뜨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자가 되게 하려는 것’(요한 9,39)이었습니다. 무슨 얘기냐 하면, 스스로
눈이 잘 보인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바로 잘 볼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오히려
눈이 가려서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육신의
눈은 멀쩡히 뜨고 있지만 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야말로 눈뜬장님입니다.
그가 참으로 볼 수 있으려면 먼저 눈이 멀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9장을 보면 사울의 회심에 관한 이야기가 적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던 다르소사람 사울이 길을 떠나 다마스쿠스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그의 둘레를 비췄습니다. 사울은
땅에 엎어졌습니다. 그리고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는
소리를 들었고 사울은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자 그분께서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하셨습니다.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였는데 그동안 그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하나니아스의 안수를
받고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일어나 세례를 받은 다음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렸습니다. 스스로 세상을
바로 본다고 자부하는 바리사이였지만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뵙기 위해서
먼저 그 눈이 멀어야 했습니다. 그는 주님의 빛을 받아 비로소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2독서의 말씀대로 사울은 ‘한 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잠시 눈을 감고 “무엇이 주님 마음에 드는 것인지 가려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선과 의로움과 진실”의 열매를 맺었으면 좋겠습니다.
선은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의 양심을 지키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있어
선하신 하느님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
(마르10,18). 의로움은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과 용서로 인간을 구원하시는 의로우시고 올곧으신
분이십니다”(신명32,4). 진실은 자신에게 솔직한 것입니다.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입니다. 잘못, 허물을 인정하고 용서를 청하는 것입니다. 탈출기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우신 하느님이다.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며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풀고 죄악과
악행과 잘못을 용서한다”(탈출34,6-7). 용서하시는 주 하느님 앞에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해야 하겠습니다.
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그릇에는 아무 것도 담지 못하는 법입니다. 선입견이
있으면 다른 사람이나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자기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장점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은 자기가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만을 확신하고 고집함으로써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눈은 있어도 동자가 없는
사람” 다시 말하면 눈은 있으나 ‘정확한 안목과 식견으로 분별’해내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아는 것이 병’이었습니다. 우리도 같은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자기 안에 갇혀 있는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의 틀을 깨뜨려야 합니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삼중고의 인생을 산 미국의 헬렌
켈러(1880- 88세의 일기로 세상을 마감. 태어난지 19개월 만에 고열로 눈,
귀, 말을 잃었지만 ‘설리번’이라는 가정교사를 만나 장애를 극복하고 세상에
많은 영향을 미침)는 ‘세상에서 가장 큰 비극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라는
질문을 받고 대답했습니다. “나는 처음에 눈이 멀어 보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비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조금 더 성장하여 깨달은 것은 눈을
가지고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눈을 가지고도
하느님을 보지 못하고 자신의 참 모습과 미래도 보지 못하는 인생, 성경은
이런 사람을 영적인 소경이라고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비극은 하느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나는 눈과 귀와 혀를 빼앗겼지만 내 영혼을 잃지 않았기에
그 모든 것을 가진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나의 역경에 대해서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역경 때문에 나 자신, 나의 일, 그리고 나의 하느님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생 여정에서 시련과 역경, 예기치 않은 많은
일들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야 말로 하느님을 만나게 되는
기회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눈먼 사람에게 땅에 침을 뱉고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명하시어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한 말씀으로 눈을 뜨게 할 수 있지만 진흙을 발라주는 구체적
행동을 통해 사랑의 표현을 드러내셨습니다. 문제가 있는 곳에서 기적이
일어났고 주님의 능력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시련도 바로 이런 자리가
될 수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눈먼 사람이 주님의 말씀에 순명하여
실로암에 가서 씻었듯이 우리도 주님의 말씀을 믿고 영혼의 때를 씻음으로써
자비의 주님, 용서하시는 사랑의 하느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흔히 눈을 3가지로 구별하기도 합니다. 내가 나를 바라보는 눈, 남이 나를
바라보는 눈, 하느님께서 바라보는 눈입니다. 우리는 어느 눈을 의식해야
합니까? 하느님의 눈을 의식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눈은 어디에나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는 “주님의 눈은 어디에나 계시어 악인도 선인도
살피신다.”(잠언15,3) “주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궁전에 계시고 주님의
옥좌는 하늘에 있어 그분 눈은 살피시고 그분 눈동자는 사람들을
가려내신다.”(시편34,16) “네 눈은 네 몸의 등불이다. 네 눈이 맑을 때에는
온 몸도 환하고, 성하지 못할 때에는 몸도 어둡다.”(루카11,34)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1독서를 보면, 주 하느님께서는 사무엘에게 이사이의 아들 가운데
하나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명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신 사람은
다윗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처음에는 엘리압을 보고 임금이 될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겉모습이나 키
큰 것만 보아서는 안 된다. 나는 이미 그를 배척하였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사무엘
상 16,6-9). 그리하여 사무엘은 주님의 비추임을 받아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고 영이 그에게 줄곧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은 하느님의 눈에 들기 보다는 사람의 눈에
들기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외면하고 세상 것에 줄을 섭니다.
그렇지만 믿는 이들은 크신 사랑으로, 자비 가득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시는
주님을 바라봐야 하고 마침내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세상의 헛된 암흑을
멀리하고 깨끗한 눈으로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누려야 합니다.
성 아우구스띠노는 호소합니다. “형제들이여, 세상을 두고 기뻐하지 말고
주님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죄 안에서 기뻐하지 말고 진리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허영의 꽃을 두고 기뻐하지 말고 영원의 희망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이 어디에 있든 얼마나 오래 살든 간에
주님께서 가까이 계시니 아무 걱정도 하십시오.”
어떤이는 우리의 눈을 육안(肉眼), 뇌안(腦眼), 심안(心眼), 혜안(靈眼)으로
구별하기도 합니다. 육안으로만 보는 사람은 모든 것을 작기 욕구의 수단으로
바라볼 것이고, 뇌안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생각하고 따지는데 필요한 내용을
먼저 취할 것이며 심안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현실의 의미와 가치를 찾게 될
것입니다. 혜안(영안)이란 앞을 내다보는 눈입니다. 그는 참된 진리를 보게
될 것입니다. 영안은 신앙의 눈입니다.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진리를 보기
위해서는 영적인 눈을 가져야 합니다. 영적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꿰뚫어 볼 수 있고 하느님의 모습과 사랑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하느님께로부터 받을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알게 되기를
기원하였습니다(에페1,18).
1961년 4월12일 인류 최초로 우주선을 타고 108분간 지구를 일주한 옛
소련의 ‘가가린’ 우주비행사는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본 감상을 말하던 중
“지구는 푸른 빛입니다. 그런데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아무 곳에서도 신은
보이지 않았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몇 달 뒤인 8월6일 ‘티토프’는 하루 동안
지구궤도를 비행했습니다. 그도 “지구를 몇 바퀴 돌았지만 하느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해인 1962년 2월 미국의 ‘글렌’
중령이 미국인 최초로 우주비행에 성공한 뒤 말했습니다. “우주는 정말
찬란했습니다. 그러한 우주와 지구가 같은 자연법칙으로 운행되어서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을 볼 때 과연 하느님은 살아 계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영적인 눈이 뜨인 사람과 닫힌 사람의 차이입니다.
그러므로 영의 눈을 떠야 합니다.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는 ‘영적맹인’이 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지난 주 수요일 시각장애를 가진 분들이 성지 순례를 오셨습니다. 전국
순례를 다니는데 이제 제주만 가시면 된답니다. 너무 기뻐하셨습니다.
봉사자의 도움을 받으면서 전국의 200여 곳을 순례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그렇지만 그들은 세상 것을 택하지 않고 하느님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들은 육안이 없어서 불행하지 않고 영안이 뜨여
기뻐합니다.
우리는 이미 세례성사를 통하여 주님께서 마음의 눈을 넘어 영의 눈을 뜨게
해 주셨음에도 세상 것의 욕심으로 영의 눈을 자꾸 가리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온전히 깨달아 눈이 뜨이고, 날마다
맑은 눈을 가지고 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무엇이 주님의 마음에 드는
것인지 가려내는 지혜를 청하며..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우리의 모습을 반성하게 됩니다.
2014년 가해 3월30일 사순 제4주일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이 가서 씻고 앞을 보게 되어 돌아왔다.>
+ 요한 9,1-41<또는 9,1.6-9.13-17.34-38>
몇 년 전인가 한 여대생이 방송에 나와서 남자의 작은 키를 가지고
‘루저(Loser)’라고 말해서 큰 이슈가 되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글쎄 최소한
180센티미터는 되어야 한다는 말이었는데, 한국 남자의 평균 신장이
173센티미터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저를 포함해서 너무나도 많은 사람이
‘루저(Loser)’로 살 수밖에 없겠네요. 몇 명의 여대생들이 말한 말들도 참으로
뜻밖입니다.
‘키 작은 남자가 폭력을 쓰는 남자보다 싫다.’
‘다 좋아도 키가 작으면 오만정이 떨어진다.’
‘첫눈에 반했다고 하더라도 일어나는 순간, 나만한 키라면 상황 종료다. 나는
싫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젊은 여성이라는 것이지요. 세상을
체험하고 좀 더 알아가면서 사람들은 키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육신의 키보다 마음의 키가 더욱 더 커야 함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겉으로 보이는 것들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외모, 재산,
사회적 지위 등등. 물론 필요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요. 그렇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걸을 만큼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들이 내 생명을 지켜주고,
더불어서 영원한 생명이라는 선물을 주님으로부터 얻을 수 있도록 해주지
않기 때문이지요. 대신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주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이야말로 진정으로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눈먼 사람을 예수님께서 먼저 보십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한 처음에
창조하실 때 그러하셨던 것처럼 흙을 이용해서 그의 눈을 열어 주시지요.
그럼으로 인해 시력을 회복시키는 추가 창조 활동을 수행하셨음을
보여주십니다. 또한 이 치유가 샘이 아니라 당신에게 왔음을 모든 이가
알도록 물 대신 당신의 침을 이용하십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완성됨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치유 자체를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안식일 규정을 어긴 것만을 내세우면서 기적의 위대함이 가리게 합니다. 즉,
눈 먼 이가 눈을 떠서 세상을 바라보지만, 율법에 의해 눈 먼 이가 세상에
확연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 바리사이들의 집요한 심문에도 불구하고 담대하게
믿음을 고백하는 치유 받은 남자의 모습입니다. 그는 심지어 회당에서
쫓겨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율법이라는 가치보다 더 중요한
주님께 대한 믿음을 증거했기에 그는 사람의 아들을 직접 보고 경배할 수
있는 커다란 은총을 얻게 됩니다.
우리의 모습을 반성하게 됩니다. 영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는
마음의 눈이 멀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주님을 통해서만 마음의 눈이
환하게 열릴 수 있음을 기억하면서,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키워나가야
할 것입니다.
특별한 기회를 기다리지 마라. 평범한 기회를 잡아서 위대한 것으로
만들라(양창순).
성소후원회의 도보순례가 있었습니다. 참석하신 모든 분 수고하셨습니다.
이기적인 삶
소위 이기적인 삶이란 어떤 삶일까요? 그냥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대로 내
삶을 사는 것일까요? 많은 이들이 이렇게 사는 사람을 가리켜서 이기적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맞다고 생각하는 대로 자기 삶을 사는 것은
절대로 이기적이지 않습니다. 만약 자기 삶을 살지 못하게 한다면 그것은
자유를 억압하는 행동이기 때문이지요.
이기적인 삶은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대로 남에게 살도록 요구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취향을 강요하고, 나의 자존심이 제일인 것처럼 드러내고, 자신의
기쁨에 맞추어 살도록 요구하는 사람이 바로 이기적인 사람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바리사이들이 그 이기심을 보여주지요. 자기는 맞고
남은 틀리다는 이기심에 그들은 예수님의 기적은 제쳐두고 단순히 자신들을
드러낼 수 있는 율법의 준수만을 내세우는 것입니다. 그들의 이런 이기심은
예수님의 그 어떤 놀라운 기적도 별 것 아닌 것으로 무시할 수 있는 힘(?)을
갖게 합니다.
남들을 나에게만 맞추게 하려는 이기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러한 사람의 공통점.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찾을 수 없습니다.
- 인천 교구 성소 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믿음의 여정 -깨어남, 일어남, 비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요셉 수도원)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3월30일 사순 제4주일
사무 상16,1ㄱㄹㅁㅂ.6-7.10-13ㄴ 에페5,8-14 요한9,1-41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이 가서 씻고 앞을 보게 되어 돌아왔다.>
+ 요한 9,1-41<또는 9,1.6-9.13-17.34-38>
믿음의 여정 -깨어남, 일어남, 비춤-
사순 제4주일은 일명 장미주일로 부활의 기쁨을 앞당겨 누리는 날입니다.
이미 만개(滿開)한 개나리, 진달래, 목련 꽃들이 부활의 기쁨을 앞당겨
노래하고 있습니다. 사순시기는 우울하고 어둡게 지내는 고행의 시기가
아니라 성령의 기쁨, 갈망의 기쁨으로 주님 부활을 기다리는 시기입니다. .
이미 저는 오늘 강론을 3주전 서울주보에 기고하여 '생명의 말씀'란에 '개안의
여정'이란 주제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와 달리 오늘 저는 '믿음의 여정'이란
주제로 묵상을 나눕니다. 오늘 묵상은 2독서 말미의 다음 말씀에서
착안했습니다. 사순 제4주일을 맞는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잠자는 사람아, 깨어나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를 비추어 주시리라.“
첫째, "깨어나라"입니다.
믿음의 여정, 첫 단계는 잠에서 깨어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를 향해 '잠자는 사람아, 깨어나라.'말씀하십니다.
잠에서 깨어남 역시 은총이자 수행의 노력입니다.
사실 깨어있지 않고 잠들어 있는 영혼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살아있다 하여
다 살아있는게 아니라 잠에서 깨어날 때 비로소 살아있는 것입니다.
깨어있음의 빛이요, 깨어있음의 기쁨이요, 깨어있음의 생명입니다.
잠에서 깨어나 불러주신 삶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오늘 1독서의 엘리압이 아닌 다윗의 선택과정이 흡사 잠에서 깨어남을
상징하는 듯 합니다. "겉모습이나 키 큰 것만 보아서는 안된다.
나는 이미 그를 배척하였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
영혼이 잠에서 깨어날 때, 은총으로 깨어있을 때 선입견, 편견에서 벗어난
주님의 뜻에 따른 올바른 분별입니다. 주님은 사무엘을 통해 당신 마음에
드는 다윗을 선택하십니다.
"바로 이 아이다. 일어나 이 아이에게 기름을 부어라.“
그러자 주님의 영이 다윗에게 들이닥쳐 그날부터 줄곡 그에게 머물렀다
합니다. 주님의 부르심의 은총으로 완전히 영적 잠에서 깨어나 성령 안에서
새 사명을 부여 받아 새 인생을 살게 된 다윗입니다.
다윗뿐만 아니라 우리 역시 세례성사를 통한 부르심에 의해 잠에서 깨어나
성령 안에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어제 읽은 다산 정약용의 유배일기 중 한 대목이 생각납니다.
"나는 지금 구덩이에 빠졌다. 하지만 평지려니 하고 지낸다.
이런 평상심이 가능한 것은 오로지 독서(읽기)의 힘이다.
책을 읽으며 허물어지는 마음을 하루하루 다잡는다.“
평상심(平常心)이 도(道)입니다. 우리로 하면 성독(lectio divina)과 더불어
끊임없이 규칙적으로 바치는 미사와 성무일도가 허물어지는 마음을 하루하루
다잡게 하며 깨어있는 삶을 살게 합니다. 이런 규칙적이고 항구적인
영적수행이 없으면 영혼은 무너져 깊은 잠에 빠져들게 되니 이보다 큰 재앙은
없습니다.
둘째, "일어나라'입니다.
믿음의 여정 둘째 단계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태생 소경은 주님을 만남으로 눈을 뜨니 흡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어남을 상징하는 듯 합니다. 새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어남도 은총이자 노력임을 깨닫습니다.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우리는 낮 동안에 해야 한다. 이제 밤이 올 터인데 그때에는 아무도
일하지 못한다.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
주님의 말씀이 은혜롭습니다. 세상의 빛이신 주님을 만날 때 태생 소경처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어나 주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파견된 이'를
뜻하는, 예수님을 상징하는 실로암 샘물에 씻고 앞을 보게 된 태생 소경은
그대로 부활체험을 한 것입니다. 전 주일 복음의 '야곱의 우물'가에서 주님을
만나 구원 받은 사마리아 여인과 흡사합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현존을
상징하는 '야곱의 우물', '실로암 샘'같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어나 부활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넘어지는 게 죄가 아니라 일어나지 않는 게 죄요,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 게
죄입니다. 잠에서 깨어나,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어나, 늘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우리 믿음의 여정입니다.
어제 '걷기 예찬'이란 글 중 한 대목입니다. "다비드 르 브로틍은 홀로 걷는
고독을 가장 즐긴다. '고독만큼 함께하기 좋은 동반자는 없다.'는 소로의
말처럼 고독하면서도 가득한 느낌이 드는 걷기이기 때문이다.“
잠에서 깨어나 '읽기'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어나 '걷기'가 좋은 짝을
이룹니다. 생각과 영혼을 빼앗기기 쉬운 디지털 시대에, 이처럼 '읽기'와
'걷기'의 수행에 항구함은 우리 믿음의 여정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셋째, "비추어라'입니다.
믿음의 셋째 여정은 주변을 밝히는 빛으로 사는 것입니다.
세상의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비추시기에 빛으로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은 세상의 빛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습니다.
오늘 태생 소경은 주님을 만남으로 영안이 활짝 열려 고백합니다.
"주님, 저는 믿습니다.“
주님을 발견하고 주님께 믿음을 고백함으로 완전히 주님의 빛이 되어 살게
된 태생 소경이요,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한 우리들입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바오로를 통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빛의 열매는 선과 의로움과 진실입니다.
무엇이 주님 마음에 드는 것이지 가려내십시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어둠의
일에 가담하지 말고 오히려 밖으로 들어내십시오. 밖으로 드러나는 것은
모두 빛으로 밝혀집니다. 밝혀진 것은 모두 빛입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비추십니다.
그러니 주변을 비추면서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사순 제4주일, 믿음의 여정 중에 있는 우리 모두를 향해 주님의 말씀하십니다.
1.잠자는 사람아, 깨어나라.
2.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어나라.
3.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비추시니, 비추어라.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깨어 일어나 세상을 비추는 빛의
자녀로 살게 하십니다. "주님, 은총의 빛으로 저희 마음을 밝혀 주시어,
저희가 언제나 주님의 뜻에 맞는 것을 생각하며,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 [기타] 마음의 장애는 치유될 수 있습니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몸은 결국 장애를 갖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의 장애는 치유될 수
있습니다.'
2014년 가해 3월30일 사순 제4주일 복음묵상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 (요한 9,2)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 된 것이다.”(요한 9,3)
---.
[하나]
장애(障碍)를 가지고 태어난 이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가볍지 않습니다.
어려서도 주위에서 만나게 되는 장애를 가진 이들을 보면 장애를 허락하신
하느님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엄마한테 들은 하느님은 항상 사랑이라고 하셨기 때문이었지요.
요즘의 나이가 되어서도 장애를 가진 이들을 보면 여전히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어렸을 때 바라보는 그들에 대한 마음하고 지금의 마음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이 정해놓은 정상이라는 울타리에 들어있는 사지 멀쩡한
이들보다, 장애를 가진 이들이 오히려 하느님 나라에 어울리는 마음과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복음에서 말하는 마음이 가난한 이들이었고, 순수한 웃음과 눈물을
보이는 이들이었고, 타인에게 의도적으로 아픔을 줄 수 없는 이들이며,
자신의 장애를 받아들이고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이들이었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죄는 건강하다고 스스로 믿고 있는 이들이 만들어놓은 경우가
대부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삶의 유한성을 생각할 때, 어쩌면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맑은 영혼들은
하느님께서 죄지을 기회조차 허락하시지 않은 축복받은 영혼들 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 된 것이다.”(요한 9,3)
[둘]
장애(障碍)의 의미를 우리 모두는 알고 있습니다.
사전적 의미는 ‘신체나 정신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분명 장애는 불편과 곤란을 초래합니다.
여기서 잠시 ‘영성적 장애’에 대해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넓은 의미로 마음의 장애라는 표현을 써도 될 듯 합니다.
서글픈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우리 모두는 마음의 장애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옳다고 생각하는데 그 옳음을 실천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옳지 못한 일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거부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이는 마음의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의 장애는 우리가 살아오면서 경험한 죄의 결과로 보아도 됩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죄가 가져다 준 상처라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입니다.
그 장애를 치유 받는 길은 장애를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이 됩니다.
깨끗하게 인정하고 그 장애와 싸우는 삶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복음적 삶임을 믿습니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우리가 태생소경임을 고백할 때
2014년 가해 3월30일 사순 제4주일
<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 >
복음 : 요한 9,1-41
< 우리가 태생소경임을 고백할 때 >
알파치노가 주연한 명작 중 하나, ‘여인의 향기’란 영화 내용입니다.
찰리는 하버드 대학을 목표로 예비학교에 다니는 장학생이며 모범학생입니다.
그는 학비를 마련할 생각으로 아르바이트를 구하게 되고 한 노인의 말동무가
돼 달라는 일을 소개받습니다.
그러던 중 밤에 친구와 교정을 걷다가 학교 교장 선생님과 그 차에 페인트
세례를 준비하는 아이들을 목격합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교장 선생님은
학교 아이들이 다 보는 앞에서 페인트를 뒤집어쓰는 큰 창피를 당하고, 찰리를
불러 하버드 대학에 보내줄 테니 누군지 말하라고 회유하고, 누가 그런 짓을
꾸몄는지 말하지 않으면 그를 퇴학시키겠다고 위협도합니다. 그러나 찰리는
우정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말을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우선 이 일을 뒤로 하고 그는 아르바이트를 위해 퇴역장교인 슬레이드를
만나게 되고, 그와 추수감사절을 보내야 하는 일을 시작하게 됩니다.
슬레이드는 퇴역장교로 맹인입니다. 그는 지적인 외모와 다르게 매우 괴팍한
성격을 가지고 있어 조카들이 무서워하며 말동무도 없이 항상 혼자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 그는 갑자기 찰리를 데리고 가족이 여행을 갈 동안 뉴욕으로
가자고 합니다.
슬레이드가 처음부터 계획했던 것은 비행기 등석에 최고급 호텔인 월도프
아스토리아에 투숙하고, 최고급 식당인 오크 룸에서 식사하는 등 돈을 물
쓰듯 하며 며칠을 보내고, 떨어져 사는 친형을 갑작스럽게 찾아가 놀래준
다음, 아름다운 여자와 하룻밤을 보내고, 페라리를 한 번 몰아본 다음,
감쪽같이 자살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찰리와 슬레이드는 한 식당에 자리 잡게 되고, 슬레이드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아름다운 여인에게서 나는 비누 향을 맡고는 그 여자에게 다가가 말을
걸고 탱고를 추게 됩니다. 다음날에 찰리와 슬레이드는 페라리를
시승하였으며, 찰리의 도움 하에 슬레이드는 차를 운전하며 속도감을
맛봅니다. 다시 호텔로 돌아가고 슬레이드는 찰리에게 시가를 사오라는
심부름을 시켜 밖으로 나가게 합니다. 그러나 무언가 낌새를 눈치 챈 찰리가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을 때는 슬레이드는 군복을 단정하게 입고 권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쏘려고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찰리는 그를 저지하며
말합니다.
“당신에게는 인생이 있잖아요?”
“인생? 무슨 인생? 나에게는 어둠뿐이란 말이야!”
“하지만 당신처럼 멋지게 탱고를 출 수 있고 스포츠카를 잘 모는 사람은 본
일이 없단 말이에요.”
그렇습니다. 서로 부족한 것이 있습니다. 영화가 의도한 매력입니다. 다 끝난
것 같아도 남이 갖기 있지 않은 부러운 것을 내가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서로가 부족한 면을 메워준다면 그것이 곧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두 사람은 리무진으로 뉴잉글랜드에 돌아갔으며, 찰리가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교장 선생의 모욕 사건에 대한 징계위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교장선생은
찰리에게 범인이 누구인지 말을 해보라고 하였으나 찰리는 끝내 누구인지
밝히지 않았고, 교장 선생은 징계 위원회에 찰리의 퇴학을 권고하겠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교장선생의 이러한 행동은 슬레이드의 반발을 불러왔으며
찰리를 변호하는 일장 연설을 하게 됩니다. 이 자리에서 슬레이드는 모여 있는
모두에게 “난 판사가 아니기 때문에 찰리의 침묵이 옳은지 그른지는
모릅니다만, 이것 하나만은 말할 수 있습니다. 찰리는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
남을 팔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을 합니다. 징계위원회는 결국 찰리에게는
더 이상 답변할 필요가 없다는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전교생들의 열광적인
환호 속에 찰리와 슬레이드는 강당을 떠납니다. 찰리에게 슬레이드는 그렇게
빈 공간을 메워준 것입니다. 그리고 슬레이드는 다시 한 번 여인의 향기를
기막히게 알아맞히고 멋지게 탱고를 가르쳐주며 인생을 즐기게 됩니다.
이 영화는 우리 각자에게 빈 곳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목숨을
버릴 일은 아니란 것입니다. 빈 곳이 있는 것이 당연하고 누군가가 그것을
메워주면 그것이 살아갈 힘을 준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태생 소경의 눈을 만들어주십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태어난 것은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일’이 무엇일까요? 하느님의 일이라면 그 한
사람만을 위한 일이 아니라, 우리 각자 모두의 구원과 관련된 일일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그렇게 눈이 없이 태어났다는 말입니다. 즉 우리 모두가
완성되지 않은 채 태어나서 하느님을 만나 우리 눈을 채우지 않으면 온전한
인간으로 살 수 없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교부들은 이렇게 그분을 만나
우리 빈 공간이 채워지는 것을 ‘세례’로 보고 있고, 그 세례를 통해 우리
새로운 눈으로 보고 믿는 그리스도를 증언하도록 파견되는 장소가 바로
‘실로암(보냄을 받았다)’인 것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
즉,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을 닮았는데, 바로 단수인 사람과 복수인 남자와
여자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와 비슷하게’라고
하시며 당신이 본성이 곧 ‘관계’임을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본성은 ‘사랑’
이신데, 사랑은 혼자서는 할 수 없기에, 인간도 남자와 여자가 하나가 되어야
온전히 완전해 지듯이, 당신과 관계 맺지 못하면 온전한 인간이 될 수 없는
모습으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태생소경에게 눈을 만들어주십니다.
그 눈은 더 이상 몸과 떨어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눈으로서만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 소경은 예수님을 받아들임으로써 이렇게 완전해 진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은 사정이 다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소경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은 이미 그 눈에 무언가 들어가 있다는
것입니다. 비어있어야만 하는 그 눈을 다른 것으로 채워 넣은 것입니다. 세상
것으로 채워 넣은 것입니다. 세상 것이 나의 속으로 들어와 오래 머무르면 더
이상 떼어낼 수 없는 나 자신이 됩니다.
정말 안타까운 사연 중에 선풍기 아줌마가 있습니다. 그분은 성형을 잘못하여
그 성분이 얼굴에 퍼졌습니다. 그 기름들을 빼내면 좋겠지만 그것들이 살과
하나가 되어서 살을 도려내지 않으면 그것들을 빼낼 수 없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돈을 그 눈에 넣었다면 돈이 내 눈이 되고 생명이
됩니다. 그리고 돈을 다 잃게 되면 더 이상 살 수 없게 되어 목숨을 끊게도
되는 것입니다. 돈과 하나가 된 것입니다. 나중에 그것들이 나와 뗄 수 없는
하나가 된다면 우리는 그것들과 함께 멸망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것들이
나와 하나가 되어가는 지는, 만약 돈을 잃어보던가, 누군가가 나를 험담하는
소리를 듣던가, 성적이 많이 떨어졌을 때 내가 그것 때문에 흔들린다면 어느
정도는 내 안에 채워져서 나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완전히 고착되어버리기 이전에 우리는 그것들을 성령의 칼로 도려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이 세상 것을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난자가 다른 것이 아닌 정자를 만나야만
사람이 되어서 생명을 연장할 수 있듯이, 눈이 없으면 진흙으로 눈을 만들어
줄 수 있는 창조자이신 유일하신 분, 그 분을 만나야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진흙으로 새 눈을 창조하시며, 당신만이 우리 빈 곳을 채워줄
수 있는 우리 창조주이심을 밝히셨습니다.
또한 오늘 태생소경은 예수님을 받아들여 예수님을 증언한 유일하게 눈을
지닌 사람이 되었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들은 모두 진정한 소경이 되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본다고 하면서도 눈을 지니지 못한 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
그들은 세상 것으로 자신의 눈을 채워버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눈을 만들어
주신 그 사람은 예수님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세상의 눈을 지닌 이들은 세상
것만 이야기합니다. 우리도 만인 앞에서 그리스도를 당당하게 증언하지
못하면 아직은 완성되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눈이 보인다고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눈이 보이면 그분께서 새로운 눈을 넣어주실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겸손 되게 우리 자신도 태생소경이며 당신의 창조가 필요함을 가슴
깊이 느끼며 예수님의 자비를 청해야겠습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담당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사순 제4주일
2014년 가해 3월30일 사순 제4주일
<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 >
복음 : 요한 9,1-41
3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주님의 수난과 십자가를 생각하며 사순시기를 잘
지내야 하겠습니다. 예전에 50년 동안 함께 살았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스피드 퀴즈’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할머니가 맞추어야 할 문제는
‘천생연분’이었습니다.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할멈
우리들의 만남은 무엇이지?’ 그러자 할머니가 말씀하셨습니다. ‘웬수’ 그러자
할아버지가 말씀하십니다. ‘네 글자로 하면 멀까?’ 그러자 할머니가
말씀하십니다. ‘평생웬수’ 할아버지는 천생연분이라고 생각했지만 할머니는
웬수라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평생 할머니 속을 썩여 드리던 할아버지가
목에 사래가 들려서 숨을 쉴 수 없었습니다. 할머니가 119를 불렀고, 병원에
도착했지만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운명하셨습니다.’
할아버지는 아직 약간의 기운이 남아서 할머니께 말씀하셨습니다. ‘나 아직
안 죽었어!’ 그러자 할머니가 이렇게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평생 말을 듣지
않더니, 의사 말도 듣지를 않네! 의사 선생님이 죽었다고 하잖아!’
눈이 있지만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은 마음이 삐뚤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잣대로 보려하기 때문에 현실을 왜곡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날 때부터 소경인 사람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람이 소경이 된 것은 조상의 탓도 아니고, 본인의 탓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위한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사람이 아픈 것도, 장애인이
되는 것도 모두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같은
사물을 보면서도 전혀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오랜 동안 앞을 보지 못한 소경이 눈을 뜬 것은 축하할 일입니다.
가족들에게도 기쁜 소식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파 인들은 소경이 눈을 뜬
것이 신학적으로 합당한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고 있습니다. 유명한 독화살의
비유와 같습니다. 사람이 독화살을 맞았으면 먼저 치료를 해야 합니다. 사람을
살려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화살이 어디에서 날아왔는지, 어떤
사람이 쏘았는지를 먼저 따집니다. 왜 화살을 쏘았는지를 생각하는 동안에
화살에 맞은 사람은 독이 온 몸에 퍼져서 죽을 수 있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을 묵상해봅니다.
“너희는 사람들의 외모와 능력, 사람들의 겉모습만 보지만, 야훼께서는
사람들의 속마음을 보신다.” 마치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자신만의 城에
갇혀서, 다른 이들의 생각을 보지 못하고, 편견과 독단과 아집과 이기심으로
세상을 바라본 것은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그런 나 자신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몸이 있어도 참된 행동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그러기에 오늘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참으로 볼 수 있는 “心眼”을
요구하십니다. 참으로 들을 수 있는 “智慧”를 요구하십니다. 눈을 들어 세상을
봅니다. 참으로 보지 못하고, 참으로 듣지 못해서 눈과 귀가 있으면서도
그릇된 곳으로 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겉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여,
욕하고, 비난하고, 침을 뱉으며, 인격을 무시합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보는 사람은 보지
못하게 하고, 보지 못하는 사람은 보게 하려고 왔다.” 진실을 애써 외면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거짓과 가식과
허영에서 벗어나 참된 진리를 보도록 요청하십니다. 그리고 이제 참된 세상을
보도록 인도하십니다. 누구나 함께 할 수 있는 세상을 보도록 인도하십니다.
희망과 평화 진실과 사랑이 한데 어울려, 참된 빛을 볼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십니다.
아름다운 꽃을 보기 전에, 저 땅 속에서 쉼 없이 양분과 물을 찾고 있는 뿌리를
볼 수 있다면 깨끗한 거리를 보기 전에, 새벽부터 일어나 청소하는
환경미화원을 볼 수 있다면 일등에게 찬사와 축하를 보내기 전에 꼴등에게
위로와 격려를 먼저 할 수 있다면 용서받기를 원하기 전에, 먼저 용서를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어둠에서 벗어나 이미 빛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천국이란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원하는 모든 일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곳이 아닙니다.
천국이란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는 곳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있는 곳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곳이 천국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 천국입니다.
참회와 절제, 자선의 사순시기도 벌써 반이 훌쩍 지나버렸습니다. 난 과연
무엇을 보고 있는지, 난 과연 무엇을 보기 싫어하는지 곰곰이 생각하면서 남은
사순시기를 지냈으면 합니다.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도회] 빛 /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인끌레멘스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사순 제4주일(2014년 3월 30일) : 빛
언제부턴가 작은 글자가 잘 안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원래 근시여서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안경을 썼어도 책을 보는데는 아무 지장이 없었는데 말입니다.
공동체에서 성가대를 하기 때문에 노래를 부를 때 특히 애를 먹습니다.
코 끝까지 안경을 내려 써야 보일 둥 말 둥 합니다. 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매일 느낍니다.
오늘 예수님은 태어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만나십니다.
진흙으로 그 사람의 눈에 바르시고는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실로암’은 ‘파견된 이’라는 뜻이라고 요한 복음사가는 친절하게 가르쳐
줍니다.
‘파견된 사람’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어둠 속에서 신음하는 이 세상에 빛으로
파견하신 예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눈먼 이는 실로암 못에서 눈을 씻고
난생 처음 빛을 봅니다.
세상의 빛이신 분을 만나 빛을 볼 수 있는 눈을 떠 빛을 봅니다.
어둠 속에 살던 사람이 빛 속에서 빛을 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례의 신비를 봅니다. 새로운 실로암 못인 세례의 물로 씻긴
우리는 우리 내면에 세상의 빛이신 분을 모시고 있고 이제 빛을 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 주위가 아무리 어두워도 우리 안에 빛이 계시기에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빛을 느낍시다.
빛을 느끼지 못한다면 눈먼 이처럼 빛이신 분께 마음을 모아 청합시다.
“주님, 그분이 누구이십니까? 제가 그분을 믿을 수 있도록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면 빛이신 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는 이미 보았다. 너와 말하는 사람이 바로 그다.”
-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인영균끌레멘스신부님 복음단상 -
◈ [서울] 자연과 함께 있는 초자연의 실체
2014년 가해 3월30일 사순 제4주일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이 가서 씻고 앞을 보게 되어 돌아왔다.>
+ 요한 9,1-41<또는 9,1.6-9.13-17.34-38>
자연과 함께 있는 초자연의 실체
하느님이 정말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아느냐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자연계 안에서 사람은 마치 무한한 능력소지자인 듯 설치며 살기 때문입니다.
이런 한계 내에서 못 벗어나면서도 한계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거든요?
그러나 자연계의 한계가 무너질 경우 무서움 공포를 왜 느끼는 건가요?
살다 죽으면 모든 게 끝이 아니고 삶의 책임이라는 것이 남고 이어지데요.
생사문제 무한함 등에서 자연과 함께 있는 초자연의 실체를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는 사람이 바로 그다.’(요한 9,37)”
- 서울 대 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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