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짜타 못의 치유 -
☆ 2014년 가해 4월2일 (자) 사순 제4주간 수요일
[수원] 오늘도 일하게 하는 힘 -
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 연구담당 전삼용 요셉 신부
† 제1독서 : 이사 49, 8 - 15
† 복음 : 요한 5, 17 - 30
★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구원의 역사를 상기시킨다.
은혜의 때에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응답하셨고, 구원의 날에
도우셨던 것이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주신 당신의 권한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그대로 하는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자는, 그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제1독서의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 사랑의 역사를 기억하도록 거듭
촉구합니다. 곧, 하느님은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고 도와주시며 응답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호소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당신이 하느님 아버지를 사랑하는 길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십니다. 이로써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자기 자신의 뜻이 아니라 그분의 뜻을 실천하는 데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몸소 보여 주십니다. 이제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굽어보시고 베푸신 사랑과,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인간이 주님께 응답하는
사랑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환하게 드러났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정작 지금 여기에서 그분의 사랑을 실감하지 못하는 가운데
내 의지를 그분에 대한 사랑으로 드릴 용기가 없으니 답답한 심정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그분의 사랑을 멀찌감치 바라볼 뿐, 정작 그분과 나 사이에는
사랑의 대화 대신 무거운 침묵만이 존재한다고 실망합니다. 그러나 그
침묵이 차가운 단절만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 신부는 『열린 손으로』라는 책에서 침묵의 다른 얼굴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멀리 있는 집에서 오는 빛으로 보름달이 환한, 그런 밤이 있듯이, 텅 빈
교회 뜰에 참새들이 시끄럽게 재잘거리는 평화롭고 아스라한 침묵도 있다.
그때 내 가슴은 기쁨으로 노래하고 혼자가 아님을 느낀다. …… 그러하여
나는 내가 되고 너는 네가 된다. 그때 우리는 서로를 겁내지 않고 평화와
침묵을 선물한 천사에게 우리의 모든 말을 내맡긴다."
주님의 사랑은 저 멀리 있고 우리의 사랑은 아직 연약할 뿐이어서, 그분과
나 사이에는 한밤중의 침묵만이 흐른다고 느끼는 순간이 우리 삶에 자주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 침묵이 이미 따뜻한 사랑에 물들고 있음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주님을 첫자리에 모셔라.|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4월2일 사순 제4주간 수요일 (요한 5,17-30)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 요한 5,17-30
주님을 첫 자리에 모셔라.
예수님의 관심사는 사람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사람을 살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안에 충실히 머물렀고 그래서 사람에게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선언하시고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38-40).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그대로 따르는 사람은 결국 하느님을 만나게 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따라서 일상을 살아가면서
해야 할 일은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 나의 계획과
집착, 이기심과 낡은 생활 방식을 고쳐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일을 계획하고
실천 하여야 하겠습니다. 발에 꼭 맞는 신발이 편안하듯 우리가 주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매일이 편안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가운데 아버지와 하나 되었듯이 우리도 예수님의 뜻을
행하는 가운데 주님과 하나 되기를 희망합니다.
공자께서도 “일흔이 되었을 때 하고 싶은 마음을 쫓아 그대로 하되 법도를
어기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결국 당신의 뜻이 하늘의 뜻과 온전히 일치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까? 물론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마음껏 해도 부끄러움이 없는 일입니까? 인간적인
욕심이 들어가지 않았다면 주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아우구스띠노 성인은 “우선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원하는 바를
하십시오.” 하고 말하였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주님을 먼저 사랑하고 그분의
사랑으로 원하는 바를 마음껏 한다면 부끄러움이 있을 리 없습니다. 혹 해서는
안 될 일을 한 것이 있고, 가지 말아야 할 길을 걸었다 해도 우리 마음을 둘
곳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역경에 처해 있을 때 ‘하느님, 찬미 받으소서.’
하고 한 번 기도드리는 것이 좋은 일을 당했을 때 수없이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것보다 더 값집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의 생각에 우리를 일치시키고,
그분의 기도에 우리의 기도를 일치시키고, 그분의 행위에 우리의 행위를
일치시키고, 그분의 생명에 우리의 생명을 일치시킵시다.” 주님과 하나 되는
기쁨과 행복이 넘쳐 나길 기도드립니다. “당신이 저에게 바라시는 일이
무엇인지 알려 주십시오. 저는 저의 뜻을 버리고 당신의 뜻에 저의 뜻을
맞추겠습니다”(성 알퐁소). 사랑합니다.
가시나무 새 - 하덕규-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이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람들로
당신이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수 없는 어둠
당신에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바람만 불면 그 매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은 쉴 곳 없네.
@ 내 안에 내가 너무 많으면,
이미 내 안에 계신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내 안에 계신 주님께 손을 내밀어야 하겠습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열린 마음, 겸손한 마음으로
2014년 가해 4월2일 사순 제4주간 수요일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 요한 5,17-30
어제 우연히 온라인 동창모임 어플리케이션을 통해서 초등학교 동창들을
온라인 공간 안에서 만날 수 있었습니다. 반갑기도 하고, 30년도 훨씬 넘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동창들이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하기도 하더군요. 그래서
동창들의 개인 프로필을 보면서 누구인지를 계속해서 떠올려 보았습니다.
솔직히 그곳에 등록되어 있는 백 여 명 중에서 알 것만 같은 사람은 몇 되지
않더군요. 또한 올려 있는 사진을 보면서는 ‘왜 이렇게 늙었어? 완전히 아저씨,
아줌마네.’라는 말이 저절로 나옵니다(하긴 이 친구들도 저를 보면서 늙었다고
말하겠지요?).
여러분들은 초등학생 때에 지금의 자기 모습을 구체적으로 상상하신 적이
있습니까?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아 경제적인 문제에 고민도 하고, 또한 자녀
교육 문제로 인해 힘들 것을 상상이나 하셨습니까? 어렸을 때, 부모님께
무조건 효도하겠다는 마음은 어디로 갔을까요?
저 역시 제가 이렇게 가톨릭 신부로 살아가리라 상상도 못했었지요. 예쁜
여우같은 아내 만나서 귀여운 토끼 같은 자식들을 낳아 행복하게 살 것이라는
막연한 미래를 어렵지 않게 이룰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현재, 어렸을 때의 꿈은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저의 상황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상상은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특히 우리의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인해, 상상한대로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어쩌면 완전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는 것처럼 교만과 착각을
휘두르면서 사는 것은 왜 일까요?
미래를 알 수 없는 우리, 그렇기 때문에 겸손의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내가 중심이 아니라, 주님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사람들, 특히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은 심한 적의를
표현합니다. 그들에게 어떤 피해를 준 것도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전해 주셨고, 놀라운 표징을 통해 구원이 가까이 왔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예수님의 표징은 물론이고 하느님의
사랑도 보지 못합니다. 안식일 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하느님의
사람이 아닌 죄인으로 취급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안식일이라고 해서 하느님께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실까요?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안식일에도 쉬지 않고 우리를 지켜
주시고 계십니다. 이렇게 쉬지 않고 일하시는 하느님이시기에 그 아드님 역시
쉬지 않고 일하신다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표징을 보려하지 않았기에 어떤 분인지를 알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에 대해 잘못 이해하기 있기에 안식일 법이 전부인 것처럼
착각합니다. 자신의 생각에만 갇혀 있다 보니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유다인들과 마찬가지로 내 생각에 갇혀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열린 마음, 겸손한 마음으로 쉬지 않고 우리 곁에서
지켜주시는 주님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칭찬은 무한히 나누고 베풀 수 있는 최대의 선물이자, 마음의 꽃다발이다
(성연미).
주님을 느끼고 체험하는 방법은?
지금은 폐지된 텔레비전 프로그램 중에 ‘가족 오락관’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이 한창 인기가 있을 때 ‘이구동성’이라는 코너가 그 중심에
있었지요. 이 게임은 상대팀원 4명이 동시에 한 글자씩 말하는 소리를 듣고
어떤 단어인지를 맞추는 것입니다. 동시에 말을 하다 보니 말이 섞여서 어떤
말인지를 알아듣기 힘듭니다.
저 역시 맞춰보려고 노력했지만 도저히 맞출 수가 없네요. 모두 똑같은 한
글자를 말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출연한 연예인들은
그 답을 잘 맞추는 편입니다. 어떻게 맞출까 했는데 두 눈을 크게 뜨고
상대방의 입모양을 살펴보더군요. 소리만으로는 도저히 맞출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입모양도 보고 또 소리를 듣는 등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답을 맞추는
모습처럼, 우리도 주님을 알아보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해야 합니다.
단순히 주님께서 내게 직접 말씀하시고, 직접 당신의 몸을 드러내시길
원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만나는 이웃들을 통해서 주님을 느끼고, 내가
실천하는 사랑을 통해 주님의 사랑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하나 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었을까요? 이 정도면 되었다는
안일한 마음으로 주님을 느끼지도 또 체험하지도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 인천 교구 성소 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지금이 바로 그때다.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4월2일 사순 제4주간 수요일 이사49,8-15 요한5,17-30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 요한 5,17-30
지금이 바로 그때다.
오늘 이사야서 마지막 부분 말씀이 큰 위로가 됩니다.
-그런데 시온은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하고
말하였지.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모두 나를 버려도 주님은 나를 버리지 않습니다.
모두 나를 잊어도 주님은 나를 잊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잊었지 주님은 우리를 잊지 않습니다.
행여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는다 하더라도 주님은 우리를 잊지 않습니다.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말씀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바로 이런 주님이 우리를 살게 하는 힘이요 희망입니다. 그러니 '살기위하여'
주님을 기억해야 하고, 지금 여기서 우리의 영원한 도반인 주님과 함께 새로
시작해야 합니다.
지금이 바로 은혜의 때요 구원의 날입니다. 주님과 함께 할 때 배고프지도
않고 목마르지도 않으며, 열풍도 우리를 해치지 못합니다. 우리를 가엾이
여기시는 분께서 우리를 이끄시며 샘터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하느님 중심에 확고히 믿음의 뿌리 내려야 온갖 유혹이나 착각의
환상에서 자유롭습니다. 이사야의 하느님 체험은 얼마나 풍요로운지요. 이런
주님께 자발적 응답이 찬미와 감사입니다.
영혼을 살리고 주님과 깊은 일치를 이뤄주는 것은 찬미와 감사의 삶입니다.
그러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경에 개의치 않고 항구히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시편 성무일도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하늘아, 환성을 올려라.
땅아 기뻐뛰어라.
산들아, 기뻐 소리쳐라.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당신의 가련한 이들을 가엾이 여기셨다.“
우리만의 찬미가 아니라 피조물과 함께 하는 우주적 찬미에 대한 응답이
주님의 위로와 치유입니다. 끊임없는 주님 찬미가 우리를 위로하고 치유하며,
정화하고 성화하여 주님과의 일치를 깊이 합니다.
삶의 질은 주님과의 일치의 정도에 달려 있습니다.
이런 주님과의 일치의 모범이 예수님이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당신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보여 주신다.“
아버지와의 깊은 일치의 모범을 보여주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물론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어 우리에게도 당신께서 하시는 일을
보여주십니다. .
눈 만 열리면 하느님 하시는 일을 깨닫습니다. 세상이 유지되는 것도, 내가
여기 살 수 있음도 하느님께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주님을 체험하고
깨닫는 자는 비상한 일을 추구하거나 이벤트를 만들지도 않습니다.
일상성을 존중하며 거기서 침묵 중에 일하시는 하느님을 만납니다.
어제 읽은 신문 컬럼 한 대목이 생각납니다.
"돈이 많아지면 일상성이 파괴되는 경우가 더 많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건 자극뿐이라 그렇다. 일상성을 돈으로 살 수는 없다.
자유의 핵심을 간단하게 정의하면 일상성의 복원이다. 우리의 정치와 정책
그리고 우리 스스로의 인식은 너무 이벤트적이고 기념비적이다.
하지만 일상의 영역에선 무언가를 하지 않는 결정이 가장 잘한 결정이다.“
결국 심심해서 좋은 사회라는 것입니다. 새삼 평상심이 도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일하시는 방법이 이러합니다. 사람들과는 달리 하느님은 일상성을
존중하시며 침묵 중에 드러나지 않게 일하십니다.
예수님의 다음 말씀도 의미심장합니다.
흡사 살아있으나 때로 죽은 삶을 사는 우리를 향한 말씀 같습니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진정 주님 앞에 깨어있는 자들에게는 지금이 바로 그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은혜와 구원의 때요, 찬미와 감사의 때요, 일상성을 복원해야 할 때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잠에서 깨어나,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어나, 생명 충만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 [기타] 아름답게 살아야 합니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제발 남을 위해 선을 행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2014년4월2일 수요일 복음묵상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 (요한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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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회의 오랜 전통 교리 중 하나인 상선벌악(賞善罰惡)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선을 행하며 선하게 산
사람들은 현세가 아닌 후세에서 하느님으로부터 그에 상응하는 상을
받는다는 것이고, 악을 행한 사람들은 벌을 받는다는 교리입니다.
이 교리는 성서의 말씀을 통해서 그 근거를 찾고 있는데, 그 중 몇 개를
소개하면, “보라, 내가 곧 간다. 나의 상도 가져가서 각 사람에게 자기의
행실대로 갚아 주겠다.”(묵시록22,12),
“악인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마태오 25,46), 그리고 오늘 소개된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요한5,29)
등이 있습니다. 그 외에도 이러한 상선벌악의 개념은 성서에 전반적으로
흐르고 있는 정신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선벌악에 대한 실현은 현세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약속된 하느님 나라의 입구에서 이루어진다고 성서는 가르치고 있습니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 들이라고 하겠다.”(마태오13,30), “모든 민족들이
사람의 아들 앞으로 모일 터인데,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마태오25,32)
이러한 전통 교리에 대해서 부정할 신자들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말씀에 대해 그리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지 못하며 살아갑니다.
늘 눈앞의 현실에 모든 마음을 빼앗기고 삽니다. 억울함을 반드시 그 자리에서
풀고 싶어하고, 이러한 감정은 곧 분노와 미움으로 이어집니다.
내 손으로 쥐고 있는 것에 모든 가치와 의미를 두고, 손으로부터 내려놓으려
하지 않습니다.
전체를 보려 하기보다는 부분적이고 순간적인 것에 자신을 걸려고 합니다.
결국 부정적인 본능에 묶인 모습을 보이고 맙니다.
물론 우리 눈앞의 현실에 집중하고 잘 살 수 있는 길을 찾아야만 합니다.
잘못된 것, 불의한 것은 바로 잡으려 싸우며, 올바른 세상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내 손에 쥐고 있는 것들에 대한 가치를 생각하며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순간 순간을 소중하게 여겨야만 합니다.
하지만, 이런 우리의 모든 삶의 태도 이전에, 우리의 삶의 방향을 잡는 기준이
되어야 하고, 난관에 대한 극복의 힘이 되어야 하며, 희망의 보루가 되어야
하는 것은 ‘선한 마음으로 선하게 살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희망은 늘 조각날 수밖에 없고 허무하게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비록 자주 넘어지는 삶을 산다고 하더라도, 부수어지지 않는 희망 안에서
자신을 늘 추스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바로 이 희망이 죽음을 넘어선
희망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또다시 똑 같은 결론이 떨어집니다. 아름답게 살아야 합니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오늘도 일하게 하는 힘
2014년 가해 4월2일 사순 제4주간 수요일
<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
복음 : 요한 5,17-30
< 오늘도 일하게 하는 힘 >
어느 모로 보나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런 그녀가 감추고
싶은 비밀 하나! 그것은 눈썹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녀가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여자는 늘 짙은 화장으로 눈썹을 그리고 다녔지만 언제
지워질지 몰라 마음이 편칠 않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거울을 봐야만 했습니다.
마침내 두 사람의 사랑이 결실을 맺던 날, 여자는 행복했지만 불안했습니다.
식이 끝날 때까지 눈썹에 온 신경을 곧추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결혼식은
무사히 끝났습니다.
그날 이후 여자는 언제나 남편보다 먼저 일어나 눈썹을 그렸습니다. 혹시라도
눈썹이 없다는 걸 남편이 알게 되면 실망할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었습니다.
청소를 하거나 빨래를 하다가도 땀이 나면 눈썹은 지워졌고 여자는 그때마다
다시 그렸습니다.
“음... 찌개 맛있는데. 당신 음식 솜씬 정말 최고야!”
남편은 아내의 눈썹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3년이란 세월이 흐른 어느 날, 불행이 여자를 찾아왔습니다. 승승장구
번창하던 남편 사업이 망해서 하루아침에 거리로 나앉게 된 것입니다. 부부는
짐을 꾸려 달동네 판자촌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두 평 남짓 찌그러진
단칸방이었습니다. 하늘이 내려앉고 땅이 꺼질 일이었지만 한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부부는 기운을 추스르고 새 일을 찾았습니다. 맨 처음 하게
된 일이 연탄배달이었습니다. 남편은 끌고 아내는 밀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얼굴에 연탄 검뎅이가 묻어도, 땀이 흘러도 닦을 수가
없었습니다. 눈썹이 없는 게 들통 날까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때 남편이 손수레를 세우고 아내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수건으로
아내의 얼굴을 닦아 주기 시작했습니다. 지워질까 걱정하는 눈썹 부분은
조금도 건드리지 않은 채 말입니다.
[TV동화 행복한 세상 1, 눈썹 그리는 여자]
유학하면서 힘이 떨어져 그냥 쉬고만 싶어졌을 때 ‘어떻게 하면 열심히 공부할
수 있는 힘이 생길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답은 명확했습니다. 내가
나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해 일하는 것인데, 그분이 나를 위해 얼마나 힘들게
일하셨는지를 알게 된다면 내가 하는 노력은 아무 것도 아니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내가 누군가를 위해 일하는데 그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면 그 분을 위해 하는 나의 노력은 힘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위의 이야기에서 아내는 남편과 함께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연탄배달을 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남편이 자신이 부끄러워하고
감추려고 하던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아픔을 감싸주며 살아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아내는 지금까지의 노력이나 앞으로 살아갈 힘도 동시에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아버지께서 그렇게 고생하시는데 내가 어떻게 쉴
수 있겠느냐?’란 뜻입니다. 이 말씀 안에도 아버지께 대한 사랑이 깊이
배어있습니다.
‘워낭소리’에서 최 노인은 수명을 훨씬 넘긴 소를 매일 끌고 나가서 일을
시킵니다. 그러나 사실 최 노인 또한 일해야 할 연세가 훨씬 지난 분입니다.
아마도 소만 시키고 최 노인은 일하지 않았다면 그 소도 힘이 덜 났을
것입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을 알고 또한 자신과 함께 일하기 위해
매일아침 자신을 끌고 나가주는 최 노인의 마음을 알기에 평균 수명보다 두
배를 더 산 나이 많은 소였지만 자신의 최선을 다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누구에게 일을 시키기 위해서는 그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 일을 시키는
사람을 사랑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힘이 덜 들고 창의적으로 일을 해
줍니다. 그런데 나를 사랑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그 사람을 위해
나를 바쳐야 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아마도 부모가 자신을 위해 고생하는
것을 알면 알수록 부모가 원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더 노력할 것입니다.
부모를 사랑하면 그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려는 마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사랑을 아시기에 오늘도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을 포기하시지 않으셨던 것처럼, 우리도 오늘도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매달려 계시는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그분을 위한 일을 멈추지 말아야겠습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담당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사순 제4주간 수요일
2014년 가해 4월2일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 요한 5,17-30
지난 월요일에는 동창신부님들 모임이 있었습니다. 동창들과의 만남은 솔직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꾸미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좋습니다. 계산을 하지
않아서 좋습니다. 함께 나눌 추억이 있어서 좋습니다. 함께 모여서 무슨
큰일을 하지 않지만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고 식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동창들을 만나면 영양제를 먹는 것처럼 기운이 나고, 한 달을
살 수 있는 힘과 용기가 생깁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분이십니다. 우리들의 죄가 진흥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게 해 주시고, 우리의 허물이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처럼 하얗게 만들어
주십니다. 잘못한 아들이 뉘우치고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시면서 그 아들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사랑이 넘치시는 분이십니다. 병원사목을 하는 동창도, 도시빈민
사목을 하는 동창도, 교구청에서 일하는 동창도, 본당 사목을 하는 동창도,
몸이 아파서 휴양을 하는 동창도 모두가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같은
못자리에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같은 꿈을 꾸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선하시고
자비로우신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선하고 자비로운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십니다. 사람을 죽이거나 벌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품어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 돌아오기만 한다면,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청하기만 한다면 아무런 조건 없이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같은 마음’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품어주는 사랑입니다. 나에게 잘 해주는 사람에게만 베푸는 사랑은
세상 사람들도 할 수 있습니다. 갚을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빌려주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하느님의 마음은 세상 사람들의
마음과는 달랐습니다. 하느님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은 ‘사랑’의 마음입니다.
이 사랑이 생명을 살리고, 이 사랑이 희망을 주고, 이 사랑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도회] 왕짜증 /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인끌레멘스신부님 복음단상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사순 제4주간 수요일(2014년 가해 4월 2일) : 왕짜증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 요한 5,17-30
살기 많이 힘드시죠? 실망으로 무너질 때가 많으시죠?
살면 살수록 신앙 생활하기는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어떤 분이 이런 하소연을 보내왔습니다. “매일 미사를 하고 묵주기도를 해도
돌아서면 또 그 자리. 안 하니 못한 삶. 짜증 폭발하는 아침.
” 이 실망의 한탄은 이스라엘 백성의 소리와 다를 바 없는 듯 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어버리셨다”(이사 49,14).
실망은 그만큼 기대를 많이 했다는 증거이지요.
기대는 개인적 욕구의 다른 형태입니다.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 나의 욕구도
나의 바람도 내려놓을 때 실망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예수님은 당신의 의지를 온전히 내려놓으셨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
예수님 개인과 당신의 의지는 없었습니다. 온전히 하느님 아버지의 뜻만이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참 희망이 꽃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의지에 우리 자신의 바람을 어떻게 하면 녹일 수
있을까요? 하느님을 그냥 온 맘으로 느끼면 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을 젖먹이 딸린 엄마로(이사 49,15) 그리고 예수님은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로 소개하십니다(요한 5,18). 아이가 엄마와 아빠가
옆에 있으면 마냥 평화로운 것처럼 편안히 하느님을 느끼면 됩니다.
하느님은 나의 엄마로 나보다 더 가까이 계시다, 나의 아빠로 나보다 먼저
길을 마련하신다는 깊은 신뢰가 필요합니다. 이러한 의식적인 자각을 하면
어떠한 욕심도, 조바심도, 짜증도 있을 자리가 없습니다. 헛된 기대와
과욕에서 벗어나 참 희망의 눈으로 내 삶과 이웃을 편안히 바라보게 됩니다.
이제 편안하세요?
-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인영균끌레멘스신부님 복음단상 -
◈ [서울] 친구를 보면 사람을 알듯
2014년 가해 4월2일 사순 제4주간 수요일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 요한 5,17-30
친구를 보면 사람을 알듯
사람이 최소한 사람과 어울려야 하는데 그리 못하면서 좋다고들 합니다.
‘우리아가, 애들’ 그렇게 강아지를 부르는 게 많이 안쓰럽게 보이더군요.
사랑과 정열과 애정을 인간보다 동물에게 쏟으면 큰 사람 되진 못할걸요?
최소한 사람에게 최대한 하느님께 사랑 정열 애정을 쏟아야 사람다울걸요?
친구를 보면 사람을 알듯 하느님을 보면 그 종교가 어떤 교회인지 알고요.
하느님을 보면 예수님을 알듯 예수님을 보면 신앙인도 알 수 있다는 거지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요한 5,24)”
- 서울 대 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인천] 사랑의 일은 언제 어디서나 계속 되어야 합니다.
2014년 가해 4월2일 사순 제4주간 수요일(요한 복음 5장 17~30절)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 요한 5,17-30
오늘 복음 서두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그 말씀에 대한
해석이 이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창조사업을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기
때문에 우리도 쉬는 거지만, 하느님께서 세상을 돌보고 사랑하는 일도 멈춘
것은 아니다. 그 일을 멈춘다면 세상은 지속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도 안식일이지만 사랑의 일을 멈추지 않으셨다는 건데요.
그 이야기를 보면서 ‘아버지께서 여태 사랑의 일을 하고 계신데도, 나는
그러지 못하고 멈춘 적은 없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세 가지가
떠올랐는데요.
첫 번째는 가족에게 돌아왔을 때 사랑의 일을 멈추는 거 같습니다. 신자들과
함께 있을 때는 그분들에게 인사하고, 다가가고, 관심도 가지고, 질문하고
듣는 일을 적극적으로 하려고 의지적인 노력을 많이 하는데요.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어서인지 집에 오면 아무 말도 안 합니다. 가족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도, 대화를 시작하는 것도 하지 않으려고 하는데요.
그러다보니 한 번은 공소 축성식을 하는 것도 가족들이 주보를 보고
아셨습니다. 너무 얘기를 안 해서 그런 일이 있었던 거 같은데요. 주님을 닮기
위해서는 집에 와서도 작은 사랑의 일, 곧 관심을 가지고 대화하는 일을 계속
해야 할 거 같습니다.
두 번째는 성당을 벗어나 일상생활을 할 때입니다. 성당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나면 마음을 닫고, 무관심 모드로 지내는 모습이 저에게 많더라고요.
예를 들면 머리 자르는 미용사 분과 한 마디도 안 하고, 물건을 살 때도 딱
필요한 말만 합니다. 지하철을 타고 갈 때도 주변 사람들에게 관심이 전혀
없습니다.
그게 편해서인지도 모르겠고, 괜히 마음 쓰면 귀찮고, 어차피 지나갈 일이고
잠깐 보는 건데.. 하면서 소홀히 여기는 거 같은데요. 주님을 닮은 모습은..
성당 테두리를 벗어난 일상의 자리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할 기회를 찾는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세 번째는 미운 사람을 볼 때입니다. 예전 본당에서 개인적으로 미워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감사할 줄도 모르는 거 같고, 얄밉게
행동하는 거 같아서 그랬는데요. 미움이 쌓이다보니 말도 안 하고, 인사도 안
하려고 딴 청을 피웠던 거 같습니다. 미운 사람이 있을 때 사랑하기를
멈췄는데요.
그 일도 주님이 바라시는 일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를 위한
화살기도라도 마음속으로 바칠 수 있어야, 아버지가 계속 사랑하시는 것처럼
나도 사랑의 일을 멈추지 않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일이 언젠가 작은
기적을 만들어 내는 걸 보게 되기도 하고요.
각자의 삶의 자리를 들여다보면, 사랑을 멈춘 시간과 장소가 있을 텐데요.
일은 쉬더라도 사랑은 언제 어디서나 쉬지 않고 계속 할 수 있도록 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할머니가 연세가 많으신데 최근에 감기 때문에 밥도 못 드시고 앓으셨다.
그래서 요양원에 계신 할머님을 찾아뵈었는데, 엄마 말로는 ‘살이 쏙
빠지셨다..’ 고 한다.
그런데 옆에 간병 하시는 분 말로는 2kg 빠지셨다고.. ^^;
- 밤송이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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