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활 -
☆ 2014년 가해 4월21일 (백) 부활 팔일 축제 내 월요일
[수원] 책임을 피할 수 없다면 판단도 피하지 마라 -
수원 교구 복음화국 전 삼용 요셉 신부
† 제1독서 : 사도 2, 14. 22 - 33
† 복음 : 마태 28, 8 - 15
★ 베드로 사도의 오순절 설교이다. 베드로 사도가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하여
열정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구약에 예언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예수님에게서 완성되었다(제1독서).
★ 천사에게서 주님의 부활 소식을 전하라고 명령받은 여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다가오셔서 "평안하냐?" 하시며 먼저 말씀하신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제자들에게 갈릴래아로 갈 것을 전하도록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여인들이 예수님을 그리워하며 그분의 무덤으로 발길을 옮긴 것은 주간
첫날이 밝아 올 무렵이었습니다. 거기서 뜻밖에 천사를 만나 주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 벅찬 마음으로 제자들에게 달려가던 그들에게 갑자기 예수님께서
마주 오시어 이렇게 인사하십니다. "평안하냐?"
예수님의 이 부활 아침 인사가 제 마음에 잔잔하게 퍼집니다. 그 편안함과
감미로움이 문득 제 안에서 성토요일 아침의 분위기를 다시 불러일으켰습니다.
성토요일의 아침은 흔히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처럼 여겨지곤 합니다.
주님 수난 성금요일의 극적인 주님 수난 예식 뒤 부활 성야까지는 고요함만이
자리하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교회의 전승으로는 이때 예수님께서 저승에
내리시어 구원을 기다리는 이들을 위하여 천국 문을 여셨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그 위대한 일을 하시는 동안 지상에는 침묵의 시간만이 흘렀다는
것에 그저 놀랄 때가 더러 있습니다.
더 의아했던 것은 조용한 성토요일 아침 제 마음에는 슬픔과 착잡함,
허탈함보다는 오히려 은은한 평화가 생겨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묵상하며 마음이 격렬하게 움직인 것이 바로 전날인데도
말입니다. 성주간을 수도원에서 피정하며 지낸 적이 몇 차례 있었는데 그럴
때면 이러한 기분이 더욱 생생했습니다. 성토요일 아침, 수도원 마당과 주변
들판을 싱그러운 아침 공기를 마시며 몇 시간이고 걸으며 느꼈던 가벼운
마음과 해방감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성토요일은
'상중'(喪中)의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짐을 다 지고 가신
그 구원 사건의 은총을 고요함 속에서 실감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부활을 무덤의 문을 열어젖히는 '알렐루야!'의 웅장한 합창 소리로
기다립니다. 그러나 이미 부활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은 조용한 이른
아침, 우리 마음에 찾아온 이유 없는 평화의 향기에서 시작합니다.
"평안하냐?"라고 물으시는 참으로 일상적이고 별스럽지 않은 예수님의 이
인사말이 우리의 마음을 울리듯이 말입니다. 아마도 부활의 은총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우리의 삶 어딘가에서 은은하게 퍼지고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속지 않는 지혜를 가져라|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4월21일 부활 팔일 축일 내 월요일(마태28,8-15)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 마태 28,8-15
속지 않는 지혜를
돈은 사람을 사고 음모를 꾸밉니다. 헛소문이 전해집니다. 시기와 질투가
사람을 죽입니다. 돈과 속임수가 손을 잡고서 거짓을 퍼뜨리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합니다. 여객선 ‘세월호’침몰사건으로 희생자 가족들은 가슴이
타들어 가는데 참사조차 돈벌이로 이용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고위
공직자는 기념사진촬영으로 직위를 잃었습니다. 물질에 지배당한
어리석음에서 자유로울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무능한 정부에 대한 불신과
분노, 위험에 직면에서 자기를 먼저 챙긴 선장과 선원들의 도덕적 해이, 국가
위기관리시스템의 초라한 현주소, 2010년 천안함 사건이후 구조함을 만들어
위기에 대비한다고 1,590억 원이나 들여 구축한 ‘통영함’이 빈껍데기라니
허탈 합니다.모든 이가 무력감과 심리적 공황상태에 빠져있습니다. 국가가
국민을 속여도 우리는 결코 속지 않는 지혜를 가지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며 하느님 앞에 당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수석 사제들은 원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한 끝에 군사들에게 많은 돈을 주면서
말하였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 갔다’ 하여라. 이 소식이 총독의 귀에 들어가더라도, 우리가 그를
설득하여 너희가 걱정할 필요가 없게 해 주겠다.”(마태28,13) 경비병들은
돈을 받고 시킨 대로 하였습니다. 돈이 좋긴 좋은가 봅니다.
그러나 빈 무덤의 부활사건을 덮을 수는 없었습니다. 진실은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마태28,10)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기쁨과 두려움을 안고 그곳으로 달려간 사람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끝가지 지켜본 여인들이
그분의 부활을 맨 먼저 목격한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권력과 돈으로 무덤을
덮으려 하였지만, 무덤은 덮을 수 있어도 살아 나오신 주님을 가릴 수는
없었습니다. 돈과 권력이 사람을 움직일 수는 있어도 결코 예수님의 부활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사랑과 정의가 살아있고, 사랑의 희생은 반드시 승리한다는
진리를 일깨워줍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흩어졌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그들을 “내 형제들” 이라고 말씀하시며 그들과의 관계의 끈을 여전히
놓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에 대한 주님의 사랑은 여전한데 늘 우리가 주님을
외면하였습니다. 이제 다시 약속된 갈릴래아로 가는 사람은 주님을 만나게
되고 관계를 새롭게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죄악의 어둠을 밝게
비추시고 새로 나게 하시어 어려운 환경과 처지 안에서도 진실하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위안과 희망이 되어주십니다. 주님께서는 다시 살아나셨고. 우리도
반드시 다시 살아날 것이기에 매일 매순간이 한 점 부끄럼이 없는 거룩함으로
지켜져야 하겠습니다.
성 끌레멘스는 “우리를 죽음으로 이끄는 헛된 수고들, 즉, 불화와 질투심을
버리고 예수그리스도의 자비하심과 선하심을 간절히 청하십시오. 우리의
모든 생각, 불화, 질투, 탐욕까지도 그분의 십자가 앞에 굴복시키며 오로지
십자가의 사랑과 자비를 청하십시오. 반드시 부활의 은총을 얻어 누릴
것입니다.” 하고 권고하였습니다. 결국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구체적인
믿음의 생활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머리가 아니라 삶입니다. 주님의 자비와
사랑에 의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새롭게 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순간의 만족을 위해
2014년 가해 4월21일 부활 팔일 축제내 월요일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 마태 28,8-15
‘석유왕’이라고 불리는 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 1839~1937)는
미국 역사상 최고 부자로 꼽히는 인물입니다. 그의 자서전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록펠러가 시골의 아주 작은 호텔에서 며칠을 묵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호텔은
비상이 걸렸지요. 미국의 가장 큰 부자가 시골의 자그마한 호텔을 이용한다고
하니 얼마나 영광스럽고 또 조심스러웠겠습니까? 그래서 일 잘하고 성실한
청년을 특별히 그의 옆에 붙여서 잘 모시게 했지요. 이 청년은 정말로 열심히
록펠러가 전혀 불편함을 갖지 않도록 일했습니다. 드디어 호텔을 떠나는 날,
록펠러는 자신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한 청년에게 고맙다는 말과 함께
보통의 미국인들이 주는 팁을 주었습니다. 이 팁을 받고 청년이 뒤에서 이렇게
불평합니다.
“아니, 세계적인 재벌이 쩨쩨하게 요게 뭐냐?”
그런데 이 불평을 록펠러가 듣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돌아와 청년에게
말하지요.
“이보게! 자네가 정당한 팁을 받으면 당당한 호텔 직원이지만 내가 자네에게
팁을 더 많이 주면 자네는 구제 받는 거지가 되는 거야. 나는 자네를 거지로
대할 수 없어서 그렇게 주었네.”
사실 록펠러는 이 청년이 정직하고 진실해 보여서 회장 비서실로 특채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팁이 적다고 불평하는 모습에 그 마음을 곧바로 접을 수밖에
없었지요. 청년의 욕심이 진짜로 커다란 복을 걷어찬 것입니다.
사실 욕심이 우리에게 다가올 복을 걷어찰 때가 종종 있습니다. 더 큰 복을
보지 못하고 순간의 만족만을 위하는 속 좁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마 대표적인 예가 거액 복권이 아닐까요? 아마 거액
복권에 당첨된 사람들의 미래는 대부분이 불행한 삶으로 마무리 된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계속해서 복권에 당첨되기를 간절하게
원하고 있지요. 순간만 만족할 수 있으면 그만이라는 생각 때문이며, 나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착각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런데 순간의 만족만을 위해 진리를 감추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은 군사들에게 많은 돈을 주면서
시체를 훔쳐 갔다고 말하라고 하지요. 또한 이 돈을 받은 경비병들은 시키는
대로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감추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 그들은 순간의 만족만을
위해 주님의 기쁜 소식을 감추는 커다란 죄를 범하게 됩니다. 과연 그러한
노력들이 과연 그들에게 무엇을 가져다주었을까요?
순간의 만족을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하는 어리석음을 가져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영원한 행복을 얻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하는 참다운 지혜를
간직해야 할 것입니다. 이 영원한 행복은 주님의 말씀과 그 뜻을 철저히
따르는 데에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삶이 삐걱거리는 건, 그 잔뼈들이 조금씩 어긋나는 건, 아마도 다시 맞춰지기
위해(황경신).
산에 오르는 방법
중국 역사서의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제나라의 위왕이 여러 대신들과 함께 길을 가다 어느 산 밑에 도착했지요.
위왕은 한참 산봉우리를 바라보다가 대신들을 둘러보며 말했습니다.
“누가 나를 저 산봉우리에 올릴 수 있겠느냐? 너희들 가운데 그런 재주를 가진
자가 있으면 큰 상을 내리겠다.”
위왕의 말을 들은 신하들은 난처하기 짝이 없었지요. 어떻게 왕을 산봉우리로
올릴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신하들은 서로 얼굴만 쳐다볼 뿐이었습니다.
그러자 위왕은 신하들 사이에 있는 손빈을 지목하며 물었습니다. 손빈은
난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지요.
“저는 임금님을 산 밑에서 산봉우리로 올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임금님이
만약 산봉우리에 계신다면 산 밑으로 내릴 수 있습니다.”
“그게 정말이냐?”
위왕은 ‘손빈이 아래에서 위로 오릴 수는 없다고 하면서 어떻게 위에서 아래로
내릴 수 있다는 말이지?’하는 의구심이 들면서도 그 방법이 너무 궁금해서
산봉우리로 향해 걸어갔지요. 한참을 걸어 드디어 왕과 신하들이 모두
산봉우리에 이르자 손빈은 임금의 앞으로 나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습니다.
“임금님, 저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는 이미 전하를 산봉우리로
올려놓았습니다.”
그제야 위왕은 손빈이 자신을 깨우쳐 주기 위해 지혜를 발휘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산봉우리를 단번에 오를 방법이 있을까요? 단 한 가지밖에
없지요. 부지런히 걸어 오르는 방법밖에는....
우리들은 저절로 모든 것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그 방법은
없습니다. 내가 지금 당장 실천하고 행동하는 것뿐....
- 인천 교구 성소 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기타]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2014년 4월 21일 월요일 한 줄 복음묵상
"두려워하지 마라." (마태28,10)
---
우리가 진정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면,
필요 없는 수많은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If we know what we must truly be afraid of
then we will be free from all those unnecessary fears.
我らがまさに何を恐れるべきかが分かっているならば、要らない?多くの
恐れから自由になるんでしょう。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책임을 피할 수 없다면 판단도 피하지 마라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4월21일 부활 팔일 축제 내 월요일
< 이 말이 오늘날까지도 유다인들 사이에 퍼져있다>
복음 : 마르코 28,8-15
<책임을 피할 수 없다면 판단도 피하지 마라>
저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학교에서는 ‘진화론’을 가르치고 그것을
정설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바보가 됩니다. 진화론이란 인간은 아주 오래전에
작은 생물체에서 시작하여 지금의 우리 모습으로 장구한 세월동안 진화해
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근거로 새인지 포유류인지 구분이 안가는
박쥐처럼 생긴 화석, 크로마뇽인 등과 같은 인간 전 단계의 화석들이
제시되었습니다. 이때 그리스도교를 믿는 아이들은 매우 큰 혼란에 빠집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진화론을 믿으면서도, ‘그래도 하느님은 계시다’라고 스스로
힘겹게 위안을 삼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관심이 있으면 진화론은 오히려 창조론보다 훨씬 비과학적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가장 큰 몇 가지만 그 근거로 제시하겠습니다.
그 중 하나는 무생물에서 어떻게 생명체가 생겨날 수 있는지 누구도 증명해
내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암모니아가 번개를 맞아 박테리아가
탄생했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지만 어떤 누구도 무생물을 생명체로 만드는데
성공한 사람이 없습니다. 생명을 주시는 분은 생명 자체이신 하느님이십니다.
바위나 철을 들고 아무리 기다려보십시오. 거기서 생명체가 나오지는
않습니다.
그 다음엔 그 진화과정이 전혀 화석으로 발견되고 있지 못하다는 점입니다.
원숭이에서 인간으로 진화하는 뼈들이 발견되었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몇 개
되지도 않고 또 몇 조각 되지도 않는 것들로 상상해서 끼워 맞춘 것입니다.
사실 지금도 그런 원숭이와 비슷한 두개골을 지닌 인간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진화는 창조와 마찬가지로 과학적 근거가 없는 믿음을
요구하는 것이란 뜻입니다. 인간이 된 시간보다 원숭이에서 인간으로
진화하는 과정이 훨씬 오래 걸렸을 것인데 단 하나도 변화과정에 있는 온전한
뼈나 화석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고 이는 원숭이에서 인간 사이뿐만
아니라 모든 종에 걸쳐 마찬가지입니다. 진화라고 치면 결과는 있는데 과정은
없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열역학 제2법칙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열역학 제2법칙은 일명 엔트로피 법칙이라고도 하는데 세상 모든 것은
열이나 에너지, 혹은 질서와 같은 것들을 잃어가면서 그로인해 발생하는
무질서하고 쓸모없는 쓰레기, 곧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흐른다는
법칙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주전자에 찬물을 집어넣으면 저절로 끓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끓는 물이 있으면 식어가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모래 위에서 시계가 발견되었다면 그 모래들이 모여져서 시계가 되었다고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건물이 있으면 그 복잡한 것에서 더욱 무질서하게
무너져가는 것이 세상 이치라는 것입니다. 소문도 많은 사람을 거칠수록 그
진실에서 멀어져갑니다. 그런데 어떻게 생물은 제 스스로 더욱 복잡한 형태로
끊임없이 이어져서 누구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복잡한 인간이
탄생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요? 만약 진화가 되었더라도 끊임없이
누군가가 더 복잡하게 만들기 위해 손을 쓰지 않았다면 박테리아에서 인간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야기가 조금 길어졌습니다. 본래 진화론이 옳은지, 창조론이 옳은지의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닙니다. 하고자 하는 말은 ‘학교에서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에 내가 진화론을 믿는 것에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누가 어떤 말을 하던 선택의 책임은 내가 져야만 하는
것인데, 우리 교육은 가르치는 대로만 따라야하고 그에 반대되는 생각을 안
하는 그런 사람에게만 점수를 잘 준다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번 세월호 사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장의 말을 잘 따랐던 학생들만
빠져나오지 못했고, 그 말을 듣지 않은 많은 어른들은 살았습니다. 선생님들과
아이들이 거의 80%가 나오지 못했던 것은 그들이 너무 말을 잘 들었기
때문입니다. 어찌 보면 우리 교육이 나 스스로 죽음이 임박할 때까지도 스스로
판단해 행동할 수 없는 사람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교육은 무엇 하나도 스스로 판단하여 세상과
맞설 수 있는 사람이 나오지 못하게 만듭니다. 예수님은 “내가 세상을 이겼다.”
라고 하셨는데도 말입니다. 학교에서 가르쳐도 스스로 아니라고 판단이 되면
그것을 인정해주고 오히려 칭찬해주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다 지도자들은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들에게 돈을 주면서
예수님을 제자들이 훔쳐갔다고 말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르치는
것들을 대부분의 유다인들이 믿었고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경비병들은 돈을 받고 시킨 대로 하였다. 그리하여 이 말이 오늘날까지도
유다인들 사이에 퍼져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던 이 모든 유다인들은 그들이
지도자들에게 속아서 그렇게 믿게 된 것이기 때문에 책임이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결국 그들의 죽음에 대해서는 누구 하나 책임져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부활에 대해 증언하는 사람도 비록 소수이기는 하였지만
없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그 반대 경우도 생각해보고 면밀히
검토해서 ‘내가’ 선택해 믿어야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겼다고 하셨다면, 세상은 예수님의 뜻과 반대로
나아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세상이 가르치는 것을 그대로
따르면 잘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아이들 때서부터라도 세상의 가르침과
당당하게 맞설 수 있는 교육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아이들을 살리는
길입니다. 세상이 가르치는 대로 잘 적응하는 아이들이 아닌, 항상 ‘왜?’라는
물음을 던지며 스스로 판단해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갈 수 있는 그런 아이들을
만들 수 있는 교육제도로 바뀌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램입니다.
오산 성당 홈페이지: http://cafe.daum.net/ca-osan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 담당 전삼용 요셉신부 -
◈ [서울] 자녀가 세상을 떠나면 결국 괴로운 어머니
2014년 가해 4월21일 부활 팔일 축제 내 월요일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 마태 28,8-15
자녀가 세상을 떠나면 결국 괴로운 어머니
사랑하는 자녀를 저세상으로 보낸 후 괴로워하는 어머님들을 봅니다.
죽음이라는 사고의 마무리를 아무리 잘 해도 되살아나게는 못합니다.
자녀를 가슴에 묻고 그의 영혼을 생각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성모님도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예수님을 세상에서 결국 떠내 보냈습니다.
부활하셨지만 더 이상 그전처럼 보고 말하고 먹고 입히고를 못했습니다.
인간 예수를 가슴에 안고 결국 믿음만을 갖고 평생 홀로 사신 겁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마태오 28,10)”
- 서울 대 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수도회] 안녕들 하십니까? 부활 팔일 축제 내 월요일[단상]
2014년 가해 4월21일 부활 팔일 축제내 월요일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 마태 28,8-15
안녕들 하십니까?
“안녕들 하십니까?” 얼마 전까지 우리 사회를 뒤흔들던 화두였지요.
오늘 다시 우리한테 화두로 다가옵니다. 이 화두를 던지는 분은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무덤에서 천사들한테 부활하신 예수님을 갈릴래아에서 만나게 될 것이라는
전갈을 받은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또 다른 마리아 두 여인에게 예수님이
먼저 “평안하냐?”고 인사말을 건네십니다.
그리스어로는 χαίρω(카이로: Chairo) 동사입니다.
이 동사는 기뻐하다, 반갑다, 평안하다, 안녕하다는 뜻으로 번역할 수 있지요.
과연 우리는 기쁩니까?
안녕합니까?
누구를 만났을 때 이런 말로 기쁘게 인사말을 건넬 수 있습니까?
우리 내면에 기쁨이 있어야지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의 인사를 건넬 수
있습니다. 기쁨이 터져나오는 원천은 바로 내 마음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우리 내면에서 만났을 때 우리는 기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조건이나 환경이 행복해야만 기쁨을 터져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사람들은 속 사람이 아니라 겉 사람일 뿐입니다.
겉 사람은 자신의 주위가 행복해야지 기쁨을 느끼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속
사람은 내면에서 기쁨이 터져나오기 때문에 자신만 아니라 주위까지
행복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행복의 원천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기쁨은 내면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날 때 얻는 것이지요.
이런 사람이 참 부활을 사는 사람이고 이런 사람이 기쁨을 잃은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합니다. 우리도 속 사람이 되어 기쁘게 인사를 건넵시다. “카이로!!!”
-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님의 복음 단상 -
◈ [수도회]내적 체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요셉 수도원)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4월21일 부활 팔일 축제 내 월요일
사도2,14.22-23 마태28,8-15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 마태 28,8-15
내적 체험
내적 체험이, 깨달음이 내적 힘의 원천입니다. 정신이, 영혼이 무너지면
육신도 속절없이 무너집니다. 몸은 피곤하고 아파도 정신이 희망으로,
기쁨으로 살아있으면 결코 육신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잘 먹고 잘 몸을 관리해도 희망이, 기쁨이 없으면, 목표를 잃어버리면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자신입니다. 안으로부터 무너져 내리면 아무도 도와줄
수 없습니다.
얼마 전 한 형제의 피곤해 보이는 모습에 일견 걱정했지만 반짝이는 눈빛,
의욕 넘치는 모습에 안심했습니다. 몸은 피곤해 보여도 정신은 기쁨과
의욕으로 살아있음을 감지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구체적으로 언제
어디서든 중심과 질서를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며 나름대로 일과표에 따라
기도시간, 밥시간을 잘 지키는 것이 중심과 질서를 유지하는 첩경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구체적인 수행을 통한 내적 체험이, 내적 확신이 중요합니다. 지난
성목요일의 체험이 새롭습니다. 예전 요셉수도원이 서울대교구에 속했던
시절, 사정이 여의치 않아 한 번도 성목요일 성유축성미사에 참석하지
못했는데 지난 이번 성목요일에는 참석했습니다.
지인의 전화에 전혀 뜻밖의 결정이었지만 은총이었습니다. 안식년에
성지순례의 일환으로 간편한 잠바차림으로 조용히 명동성당의 신자석에 앉아
참여할 생각이었습니다만 그게 아니었습니다. 잘 마련된 사제석을 보는 순간
비록 제의는 준비하지 않았지만 사제석에 앉아 '사제들의 서약갱신'을 통해
수도사제로서의 신원도 새로이 확인했습니다.
문제는 양형 영성체를 위해 제대에 나갈 때 였습니다. 제의를 다 갖춰입은
사제들 사이에서 검은 잠바를 입은 것도 신경이 쓰였는데 제대 앞에 잠바를
입고 나가는데는 정말 갈등했습니다.
'아, 내적으로 사제인 것이 본질적이지 않겠는가' 자위하면서, 내적확신을
새로이 하면서, 미안함을 무릅쓰고 용기를 내어 제대에 나가 양형영성체를
했습니다. 제의를 입어 사제가 아니라 내적으로 아니 존재 자체가 주님을 닮고
주님과 일치된 자가 진정 사제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1독서의 열한 사도와 함께 일어나 주님 부활을 선포하는 베드로의 설교가
감동입니다. 주님을 배반하여 도주했던 예전의 비겁한 베드로가 아닙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했기에 내적확신에 넘쳐 담대하고 용기있게 주님을
선포합니다. 이런 내적체험에서 터져 나오는 살아있는 선포가, 강론이 감동을
주고 변화를 일으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죽음에 사로잡혀 계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살리셨고 우리는 모두 그 증인입니다. 하느님의 오른쪽으로 들어 올려지신
그분께서는 약속된 성령을 아버지에게서 받으신 다음, 여러분이 지금 보고
듣는 것처럼 그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통해 하느님을 체험한, 성령충만한 베드로와 그 사도
일행입니다. 이렇게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해야 내적확신에 내적힘이요,
성령충만한 삶에 감동적인 강론입니다. 이래야 육신도 영혼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1독서의 베드로와 그 사도일행과 복음의 수석사제들과 원로들, 경비병들의
처신이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전자가 담대하고 용기에 넘쳐있다면 후자는
비겁하고 비열하기 짝이 없습니다. 바로 내적체험의 차이를 반영합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갔다.'하여라.
이 소식이 총독의 귀에 들어가더라도, 우리가 설득하여 너희가 걱정할 필요가
없게 해 주겠다.“
교활한 음모요, 바로 유언비어의 진원지가 여기임을 깨닫습니다. 무지한
경비병들은 돈을 받고 시킨대로 하였고 이 말은 오늘날까지 유다인들 사이에
퍼졌다 합니다.
바로 이런 유언비어가 역설적으로 예수 부활을 입증합니다. 사도들처럼
우리도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할 때 내적으로 강건해져 독야청청, 온갖 시련과
고난에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바로 순교성인들이 그 생생한 증거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의 중심과 질서를
새롭게 잡아 주시고 내적 힘을 북돋아 주십니다.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 [서울] 부활 팔일 축제 내 월요일
2014년 가해 4월21일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 마태 28,8-15
피정을 다녀왔습니다. 피정 중에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함께 한
신부님들과 함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사고로 인해서 돌아가신 분들, 슬픔에
젖어있는 가족들, 사랑하는 친구를 먼저 보낸 학생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이번 피정은 신학교에서 신학생들과 성주간을 함께 지내는 것이었습니다. 제
젊은 시절 꿈을 키웠던 신학교에서 지내는 것도 좋았습니다. 온전히 주님의
수난과 부활을 묵상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입술에 난 작은 염증이 사라진
것도 좋았습니다.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부담감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이야기를 하십니다. 복음을 전하셨던 곳입니다.
많은 이적과 표징을 보여주셨던 곳입니다. 참된 행복을 말씀하셨던 곳입니다.
가파르나움, 갈릴래아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셨던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셨던 사람들이 살던 곳입니다. ‘중풍병자, 나병환자, 절름발이, 소경,
세리, 죄를 지었던 사람’들이 살던 곳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다시
‘갈릴래아’로 가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에게도 갈릴래아로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부활은 끝이 아니었습니다. 부활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부활의 진정한 의미는 다시 사람들 속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두려움, 근심,
걱정, 절망, 아쉬움, 불평, 불만을 던져버리고 ‘편안한’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편안하십니까? 여러분에게
평화를 빕니다.’ 이제 부활을 체험한 사람들은 도망가지 않습니다. 다시금
삶의 현장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어둠의 세력도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거짓과 탐욕은 남아 있었습니다.
위선과 폭력도 남아 있었습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사람들도
여전히 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 갔다.' 하여라. 이 소식이 총독의 귀에 들어가더라도, 우리가 그를
설득하여 너희가 걱정할 필요가 없게 해 주겠다."
하지만 변화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체험한 사도들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던 여인들입니다. 이제 그들은 거짓과 탐욕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위선과 폭력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았습니다.
담대하게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부활하신 주님을 전하였습니다. 이것이
부활의 삶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신비입니다.
부활은 나를 에워싸고 있는 세상이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은 이제 내가
변하는 것입니다. 저도 다시금 제가 살아야 할 명동 교구청으로 갈 것입니다.
성소국에서의 일을 할 것입니다. 복음화 학교 담당 신부의 일도 할 것입니다.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도 할 것입니다. 교황 방한 준비위원회의
영성신심분과의 일도 할 것입니다. 이번 사고로 희생되신 분들, 가족들,
이웃들을 위해서 기도 할 것입니다.
세상은 변한 것이 없는 것 같은데 세상은 변해 있었습니다. 내가 변했기
때문입니다. ‘알렐루야!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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