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제 대법원 판결 소식을 듣고 할 말을 잊었습니다.
...참으로 위험한 세상입니다.
오늘은 비정규직 이야기입니다.
=============
전체 목차는 다음과 같습니다.
책을 열며_사람 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 났다더냐
서(序) / 서_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경제학인가?
의(衣) / 1장 명품의 경제학
식(食) / 2장 식량 주권과 GMO
주(住) / 3장 고령화 사회, 뒤집어지는 피라미드
주(住) / 4장 비정규직과 워킹푸어
주(住) / 5장 귀농과 슬로시티
주(住) / 6장 녹색성장이 녹색으로 살리는 것은?
주(住) / 7장 아파트 공화국
활(活) / 8장 대출의 덫, 마이너스 인생
활(活) / 9장 아이엠에프(IMF)
활(活) / 10장 지금 필요한 건 뭐? 스피드!
활(活) / 11장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는 신성장 동력
활(活) / 12장 고용 없는 성장과 청년 세대의 아우성
활(活) / 13장 부익부빈익빈의 디스토피아
금(金) / 14장 금융시장, ‘투자’의 잔치를 벌여라
금(金) / 15장 고환율, 현대판 저곡가정책
금(金) / 16장 제로 리스크의 파라다이스
통(通) / 17장 남북경협을 바라보는 몇 가지 시각
통(通) / 18장 정보통신 혁명과 유토피아
통(通) / 19장 자유무역협정(FTA)과 촛불
통(通) / 20장 경제 성장의 추억과 관치(官治)의 부활
통(通) / 21장 피 묻은 다이아몬드와 차이나프라이스
결(結) / 22장 피라미드에서 네트워크로
책을 마치며
==============
주(住) / 5장. 비정규직과 워킹푸어
--- 노동시장 유연성
“천사를 그리라고? 그렇다면 내 눈 앞에 천사를 보여다오.”
(쿠스타브 쿠르베)
2009년의 어느 날이었다.
어쩐지 스산한 느낌이 드는 초저녁, 서울 어느 동네에 있는 ○○동물병원 앞, 일요일이라서 거리는 차량도 뜸하고 나다니는 사람도 별로 없다. 은행잎만 길 위를 어지럽게 달린다. 이때 검은색 오피러스가 와서 서고, 40대 초반의 여자가 개 한 마리를 안고 내린다. 시츄라는 애완종이다. 여자는 동물병원으로 향한다. 동물병원에는 불이 켜져 있어 실내가 훤히 다 보인다. 여자가 문을 밀고 들어가려고 하는데 문이 열리지 않는다. 문이 잠겨 있다. 그제야 여자는 실내에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유리문 한 쪽에 붙어 있는 쪽지를 발견한다. ‘개인 사정으로 금일 야간진료는 하지 않습니다.’ 여자는 난감한 표정으로 승용차 쪽을 돌아본다. 중학생으로 보이는 딸이 차 안에서 고개를 쏙 내밀고 묻는다. 잠겼어?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딸은 운전석의 아버지에게 뭐라고 말을 하고, 아버지가 딸에게 뭐라고, 다시 딸이 여자에게 외친다. 아빠가 그냥 두고 가재! 여자는 잠시 망설이다가 개의 목줄을 동물병원의 현관문에 묶는다. 그리고 따뜻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우리 맘 이해하지? 우리도 너와 함께 살고 싶지만, 어쩔 수가 없어서 그래. 알지? 잘 살아, 건강하게, 응? 함께 했던 추억은 영원히 간직할 거야. 널 잊지 않을 거야.”
여자는 마지막으로 시츄의 머리를 두어 차례 쓰다듬고 돌아선다. 그러자 개는 짖기 시작한다. 개도 먼 이별을 예감한 모양이다. 여자가 승용차에 타고, 딸이 손을 흔들고,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들도 누나를 밀치고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손을 흔든다. 여자가 창문을 내리고 손을 흔들 때는 이미 승용차는 움직이기 시작했고, 개는 멀어지는 승용차를 향해서 있는 힘껏 짖어대며 또 있는 힘껏 그쪽으로 가려고 힘을 준다. 그러나 현관문 손잡이에 묶인 목줄은 녀석의 몸을 팽팽하게 잡아당기며 붙잡는다. 승용차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보이지 않아도 녀석은 계속 짖어댄다.
다음날인 월요일 아침, ○○동물병원 원장은 출근을 한다. 그리고 병원 현관문에 개의 목줄이 묶여 있는 것을 발견한다. 하지만 목줄만 있을 뿐 개는 보이지 않는다. 참으로 괴이하다. 개가 탈출을 한 것일까, 아니면 누가 문에다 개의 목줄만 묶어놓은 것일까?
그날 새벽, 52세의 미화원 오장수 씨는 ○○동물병원에서 두 구역 떨어진 곳에서 쓰레기 수거 작업을 한다. 저녁 7시부터 시작하는 일은 다음날 빨라야 오후 1시에 끝난다. 구청 소속 미화원의 한 달 평균 임금은 340만 원 선이지만, 오장수 씨처럼 대행업체 소속의 비정규직 미화원은 160만 원 정도밖에 받지 못한다. 이런 일도 없어서 못 하는 사람이 수두룩한데 그나마 일자리라도 가지고 있는 게 어디냐며 스스로를 위로하며 오장수 씨는 길거리에 쌓여 있는 쓰레기봉투를 부지런히 차에 싣는다. 그런데 이때 오장수 씨의 눈에 죽은 개 한 마리가 눈에 띈다. 허리 아래 부분이 완전히 으스러진 채 모퉁이돌 옆에 널브러져 있다. 로드킬을 당한 모양이다. 역겨운 피비린내가 진동한다. 오장수 씨는 비닐장갑을 낀 손으로 개의 사체를 쓰레기봉투에 담아서 쓰레기차에 싣는다. 오장수 씨에게 이런 일쯤은 아무 것도 아니다. 거리를 깨끗하게 해서 시민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오갈 수 있도록 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오장수 씨에게는 직업적 사명감이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현황
2010년 3월 현재 한국에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전체 임금노동자의 49.8퍼센트인 828만 명이 있고, 이들이 받는 임금 수준은 정규직 노동자의 46.2퍼센트이다.
OECD가 발표한 자료인 <도표 12-1>을 보면 한국의 비정규직 노동자 비율이 외국과 비교해서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표에서는 비정규직이 총고용 가운데서 28퍼센트 정도 차지하는 것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는 한국의 분류 기준과 국제적인 분류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통계청은 국제적인 분류에 들어가지 않은 시간제근로자 그리고 비전형근로자 가운데 용역과 특수고용, 가정내근로자를 포함해서, 2009년 3월 기준으로는 비정규직 노동자는 537만 명으로 전체에서 33.4퍼센트를 차지한다고 발표했다.(*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 이런 기준으로 작성한 비정규직 노동자 현황 추이는 <도표 5-2와>와 같다.
하지만 이 기준은 통계청이 ‘경제활동인구조사 부가조사’에서 7개 설문 문항(한시근로, 시간제근로, 파견근로, 용역근로, 가내근로, 호출근로, 특수고용형태) 중 어느 하나에 응답한 사람만 비정규직으로 추계하는 기준으로 따랐기 때문에, 여기에 (노동현장에서 임시․일용직은 불안정고용(비정규직)을 지칭하는 대명사로 통용되어 온) 임시․일용직을 추가하면, 비정규직 노동자 추이는 다시 바뀌어 <도표 5-3>과 같으며, 2010년 3월 현재 비정규직 노동자는 전체 임금노동자의 49.8퍼센트인 828만 명이다.
2007년을 기점으로 해서 비정규직이 감소한 것은, 2007년 7월부터 시행된 비정규직 보호법의 정규직 전환효과와 경기침체에 따른 비정규직 감소효과 이외에, 상용직 위주로 고용관행이 변하는 등 여러 요인이 맞물린 결과이다.
비정규직의 유형
▶임시직 : 일정한 사업의 완료, 일시적 결원의 대체 등 합리적인 사유와 조건에 의해 정한 고용 계약 기간의 만료로 인해 자동적으로 고용 관계가 종료되는 관계. 계속 근로에 대한 명시적 합의가 없는 경우도 이에 해당한다.
▶파견근로 : 임금을 지급하고 고용 관계가 유지되는 고용주와 업무 지시를 하는 사용자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 파견사업주가 노동자를 고용한 후 그 고용 관계를 유지하면서 근로자 파견 계약의 내용에 따라 사용사업주의 사업장으로 노동자를 파견하고, 파견노동자는 사용사업주의 지휘와 명령을 받아 근무한다.
▶용역근로 : 용역업체에 고용되어 이 업체의 지휘를 받는 노동자가, 이 업체와 용역 계약을 맺은 다른 업체에서 근무한다. (예: 청소용역, 경비용역)
▶기간제 : 임시직 근로자 중 고용 계약 기간을 정한 경우. 기간 계약의 반복 갱신이 이루어지는 경우도 포함된다.
▶호출근로 : 일일근로자(일용직). 근로 계약을 정하지 않고, 일거리가 생겼을 경우 며칠 또는 몇 주씩 일하는 형태.
▶특수고용 : 독자적인 작업장을 보유하지 못하거나 비독립적 형태로 업무를 수행하면서 모집·판매·배달·운송 등의 업무를 제공하고 일한 만큼 소득을 얻는 경우.
노동시장 유연성
1997년 12월 3일, 캉드쉬 아이엠에프 총재와 임창렬 부총리가 한국의 아이엠에프 관리 체제에 동의하며 공식 서명한 550억 달러의 구제금융 양해각서 31조는 다음과 같이 명시되어 있었다.
“31. 급변하는 경제 환경에 대응, 노동시장의 능력을 증진시키기 위해 (...) 기업 인수합병이나 기업 구조조정에 따른 (정리)해고 제한 규정을 완화해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개선한다.”
사용자가 마음 내키는 대로 노동자를 쉽게 해고할 수 있게 제도를 개선하라는 것이다. 세계화를 국정지표로 내세우고 노동시장 유연화를 노동 정책 핵심 과제로 추진했던 김영삼 정부에 이어, 아이엠에프 체제와 함께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신자유주의 체제를 추구하는 아이엠에프와 한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서 ‘평생 직장에서 평생 고용으로’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기업 구조조정(즉, 대량해고)과 노동시장 유연화(즉, 비정규직 비율 강화)를 강도 높게 추진했다. 그 뒤로도 이 정책은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를 관통하여 계속 이어졌다. 그 결과 현재 전체 임금노동자의 절반이 비정규직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아직도 정부와 세계의 경제기구는 한국 경제의 개선점이 노동시장의 비효율성에 있다고 지적한다.(*참조, 본문 **쪽과 <도표 11-6>)
▶한국의 정규직 노동자와 미국의 노동자 : 한국의 정규직은 OECD 국가 중 노동시장이 가장 유연하다는 미국 노동자(정규직과 비정규직 포함)보다 고용 변동성, 노동시간 변동성, 임금 변동성 모두 높다.(*김유선, “외환위기 이후 노동시장 구조변화”(2004년))
기가 막힐 일이다. 도대체 얼마나 더 유연해져야 한다는 말일까? 전체 임금노동자의 2분의 1이 모자란다면 3분의 2? 아니면 4분의 3? 아니면 5분의 4?
하지만 시장경제 원리를 전파하는 민간 연구기관인 (1997년 4월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설립한 자유기업센터를 모태로 하는) 자유기업원의 한 연구보고서는, 한 술 더 떠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현재 고용 보호 수준을 한층 더 완화해야 한다며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지나친 정규직 고용 보호가 완화되어야 한다. 첫째, 해고 제한 요건인 근로기준법 제24조 ①항의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는 ‘긴박한’을 삭제하고 ‘경영상의 필요’로 바꿔 사용자의 해고를 쉽게 해주어야 한다. 둘째, 해고 요건인 근로기준법 제24조 ④항인 노동부장관의 허가 취득 요건을 삭제하여 해고를 쉽게 해주어야 함. 이와 관련하여 근로기준법 시행령> 제10조(경영상의 이유에 의한 해고 계획의 신고)도 삭제되어야 한다. 셋째, 해고 요건인 근로기준법 제24조 ③항인 해고 전 노조에 대한 통보 ‘50일 전까지’는 ‘30일 전까지’로 단축하여 노조와의 협의에 많은 시간을 쏟지 않고 해고를 쉽게 해주어야 한다.
▷지나친 비정규직 고용 보호가 완화되어야 한다. 첫째, “기간제 및 단시간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비정규직법) 제4조(기간제근로자의 사용)는 삭제하여 기간제근로에 대한 기간 제한은 철폐하고, 당사자 간 합의에 따라 계약을 갱신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둘째,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 입증은 노동위원회에 맡길 것을 제안한다. 근로자파견제는 전 업종에 확대 실시되어야 한다. 첫째, 근로자파견 28개 업종에 제한적으로 실시되고 있는 대상 업무를 일본과 독일 등처럼 전 업종으로 확대해야 한다. 둘째, 파견 기간 한정은 ‘기간제근로’ 경우처럼 ‘사용기간 2년 제한과 2년 초과 경우 정규직으로의 자동 전환’은 철폐되어야 한다.” (*박동운, “경직일로(硬直一路)의 한국 노동시장과 고용보호 개선 방안”)
오장수 씨와 같은 비정규직 노동자 혹은 언제 비정규직으로 떨어질지 몰라 두려움에 떠는 노동자 입장에서 보면 기가 차고 분통이 터질 노릇이다.
경제학적 의미에서 노동시장 유연성은 ‘경제 상황이 바뀔 때 이에 따라서 노동시장이 얼마나 유연하게(탄력적으로, 빠른 속도로) 대응하는가’를 의미하는데, 이것은 기능적 유연성과 수량적 유연성으로 나누어서 살필 수 있다.
▶수량적 유연성 : 고용 조정, 비정규직 확대, 아웃소싱에 초점을 맞춘다. 기업에게는 경제적 효율성을 의미하지만, 노동자에게는 고용 불안과 생활 불안을 의미한다.
▶기능적 유연성 : 노동자의 교육 훈련, 작업 조직 재편 등을 통해 변화하는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 향상에 초점을 맞춘다. 기업에게는 ‘지속 가능한 경쟁 우위’의 원천을 보장한다.
수량적인 유연성에만 매달리지 말고 기능적 유연성을 살펴야 한다. 그래야 파탄을 막을 수 있다. 파탄? 이렇게 과격한 표현을? 그렇다, 파탄 직전이다. 아니, 이미 파탄은 시작되었다. 다음은 미화원 오장수 씨의 증언이다.
“저녁 7시부터 새벽 2시까지 리어카로 골목골목의 쓰레기를 일일이 문전수거하면 새벽 2시 30분부터 예비차에 모아둔 쓰레기를 실어야 한다. 그리고 본차로 한 바퀴 더. 소각장이 문을 닫는 오전 11시까지 쓰레기를 처리하고, 11시 이후 또 한 차례 예비차로 돌며 못다 치운 쓰레기를 청소한다. 이때가 오후 1시, 그제야 하루 일이 끝난다. 작업복 한 번 지급받지 못했다. 160만 원의 월급으로 작업복과 장갑, 토시, 작업모까지 사야 한다. 회사에서 나오는 건 두 달에 한 번 지급되는 장갑 40벌이 고작이다. 공휴일일지라도 명절 및 연휴 등 생활 폐기물이 다량 발생되고 적치되어 특별 수거가 필요할 경우 ‘갑’[○○구청]의 요구가 있으면 응해야 한다.”(*네이버 카페 전국환경미화원연합“환경미화원 인권실태”(2009.11.19)에서)
이것은 건강한 노동을 보장하는 계약 내용이 아니다. 열등한 지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노예 계약이나 마찬가지다.
** 오른쪽 그래프의 ‘47%’는 ‘46.7%’이고, ‘자료: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부가조사”(2010년)
*** 수정 전 도표라서, 죄송합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고용 형태별 저임금 노동자의 규모를 그림으로 나타낸 <도표 5-4>에서 보듯이 임금노동자의 저임금 문제는 비정규직에 집중되어 있다. (여기에서 저임금 기준은 유럽연합 저임금고용연구네트(EU LoWER)가 설정한 ‘임금노동자 중위임금의 2/3 미만’이다. 이것을 기준으로 하면 2010년 3월의 시간당임금 중위는 8,289원이고, 이것의 2/3는 5,526원이다.) 또한 <도표 5-5>에서 보듯이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임금 격차는 점점 악화되고 있다. 2010년 3월 기준으로 비정규직 노동자 임금은 정규직 노동자 임금의 46.2퍼센트밖에 되지 않으며, 이런 상황은 슬프게도 개선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한국의 최저임금과 OECD 평균 : OECD에 따르면 2008년 한국의 전일 근로자 평균임금 대비 최저임금 비율은 32퍼센트로 법정 최저임금제도가 있는 OECD 회원 21개국 가운데 17위에 해당한다. 중위임금 대비 최저임금의 비율도 32퍼센트 18위에 그쳤다. OECD국가의 평균 최저임금인 6.44달러와 비교해도 한국(3.12달러)은 매우 낮은 수준으로, 한국보다 낮은 나라는 멕시코, 터키, 체코, 헝가리, 폴란드, 슬로바키아뿐이다.
▶근속년수 : 국제노동기구(ILO)는 고용안정성의 지표로 근속년수를 사용한다. OECD 국가들의 근속년수 평균값을 살펴보면, 유럽대륙은 8.5~13.3년이고, 영미권은 6.7~8.3년인데, 한국은 2009년 9월 기준으로 정규직이 6년 7개월이고 비정규직 중 1년 이상 근속자 비중은 37.4퍼센트로 2008년 8월에 비해 4.6퍼센트포인트나 하락했다.
정규직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비정규직으로 내몰리는 순간 빈곤층의 나락으로 떨어지니만큼, 실직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사생활과 건강을 포기하면서까지 회사 업무에 매달린다. 시키는 일은 물론이고 시키지 않은 일까지 본인이 찾아가며 죽어라고 일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사실은 OECD의 “2010년 팩트북”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2008년 기준 한국 노동자의 연간 근로시간은 2,256시간으로 OECD 평균인 1,764시간에 비해 1.3배가량 길며 OECD의 30개 회원국 가운데서 압도적으로 1위이다. 한국 뒤를 그리스, 칠레, 체코, 헝카리, 폴란드 등이 따른다. 한편 부지런하기로 소문이 난 일본도 1,772시간밖에 되지 않는다. 1위와 2위인 네덜란드와 노르웨이는 각각 1,389시간과 1,422시간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저임금의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삶은 피하고 싶은 악몽이 되어버렸다. 임금노동자를 대상으로 1년 동안 자살 생각을 했는지 분석한 결과, 남성의 경우 비정규직에서 자살 생각을 한 집단의 비중이 12.0퍼센트로 정규직의 5.6퍼센트에 비해 2.1배 이상 높았고 여성의 경우 비정규직에서 1.4배가량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2007~2008년 국민건강영양조사”에서)
대한민국의 헌법 제10조에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고 되어 있다. 이 조항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일까? 오장수 씨는 절규한다.
“저임금의 비정규직 노동자도 대한민국 국민이다!”
신자유주의와 워킹 푸어
신자유주의 질서는 기업의 자유를 극대화하며 기업들 사이에 무한 경쟁을 유발한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우리 경제에 이 질서를 강요했고, 한국은 외환 부족 위기의 막다른 길에서 이 질서를 받아들였다. 한국뿐만 아니라 1980년대 이후 세계는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빠르게 신자유주의 질서로 재편되었고, 세계의 각 나라에서는 외국 자본의 직간접 투자를 유치하려고 임금 인하, 사회보장 축소, 규제완화 등을 향해서 경쟁적으로 내달렸다. 이런 현상을 이른바 ‘바닥을 향한 경주’(race to the bottom)라고 한다. (신자유주의와 ‘경제의 자유화’에 대해서는 11장 ‘지금 필요한 건 뭐? 스피드!’에서 자세하게 살펴보겠다.)
▶워킹 푸어(Working Poor) : 일할 능력과 의지는 있으나 잦은 실직과 낮은 소득 때문에 일을 하더라도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계층을 일컫는 말. 2008년 기준으로 3인 기준 최저생계비인 102만 6,603원 이하를 받는 근로자를 워킹 푸어로 정할 때 이들의 숫자는 총 취업자 2357만 명 중 273만 명(11.6%)이다.(*현대경제사회연구원) 1990년대 미국에서 노동유연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처음 이 용어가 부각되었는데, 이후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가 빠르게 확산되면서 워킹 푸어 문제는 세계적으로 공통의 문제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정부는 각종 규제를 완화했고, 기업은 이윤을 극대화하려고 ‘노동시장 유연성’ 강화라는 명목을 내세워 노동비용을 줄였다. (한국에서 정규직 노동자의 비정규직화는 경기 변동이나 산업의 구조 변화에 따라 노동자를 쉽게 해고 할 수 있도록 하자는 노동의 유연성 확보 명분으로 진행되었지만 그보다도 노동자에 대한 임금을 낮추기 위해 진행된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어떤 생산 라인을 직영에서 사내하청 형태로 바꾸면서 임금 수준을 떨어뜨렸다.)
▶사내하청 : 원청과 하청 기업 간의 하도급 거래 형식으로 원청 사업장 내에서 원청 사업 일부분의 완성을 목적으로 일하는 방식을 말한다. 그런데 사내하청은 통상적인 원-하청 거래에 비해 원청에 대한 종속성이 특히 강하다. 사내하청 근로자들은 정규직과 동일한 업무를 수행하면서 극히 낮은 임금을 지급받고, 업무 수행과정에서 하청업체가 아닌 원청업체로부터 직접 지시를 받으면서 불법적인 파견의 성격을 띠지만 파견법의 적용을 전혀 적용받지 못하며, 기본적인 노동권조차 보호받지 못하지만 감독기관의 지적은 강제성이 없다. 게다가 원청업체는 언제든 하청업체와의 계약을 해지할 수 있어, 노동관계법의 준수가 오히려 사내하청 노동자의 고용 불안을 위협한다.
그 결과 비정규직이 급증했으며, 노동시장에서 양극화가 이루어져 중간층이 하향평준화의 길을 걸어왔음은 <도표 5-7>의 임금 계층별 비율의 추이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고임금 계층이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가운데 중간임금 계층이 빠르게 저임금 계층으로 떨어지고 있다. ‘바닥을 향한 경주’라는 이 지옥의 경주에 참가한 사람들은, 낚싯바늘에 걸린 물고기신세가 되고 만다. 미늘 때문에 한 번 걸리면 좀처럼 빠져나오기 어렵다. 걸리면 끝장이다.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소용없다.
이런 모습은 한국 사회가 부익부빈익빈의 굴레로 빠져들고 있음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지금 중산층이 급속하게 몰락하고 있다.
** 소수점 둘째자리에서 반올림한 수치임.
이처럼 해가 갈수록 심각해지는 계층 간의 소득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정부는 그동안 가계 대출을 늘리며 거품을 부풀리는 방식으로 대응했지만, 이것도 한계에 다다르고 만다. 가계의 대출 여력은 바닥을 드러냈고, 2008년 미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금융권이 안고 있는 부실 대출이 폭탄이 되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위험한 상황을 맞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 대해서는 9장 ‘대출의 덫, 마이너스 인생’에서 자세하게 살펴보겠다.
하지만 그 어느 계층보다도 일자리의 비정규직화 추세에 큰 피해를 입는 층이 바로 청년층이다. 이들 가운데 수십만 명은 신자유주의 질서가 정착되는 와중에 변변한 직장을 잡아보지도 못한 채 실업 혹은 반실업 상태로 떠밀려서 워킹 푸어가 되고 말았다.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쪽방이나 고시원을 전전하는 이들에게는 결혼도 사치가 되어버렸다. 청년층의 이런 문제는 다시 부메랑으로 돌아와서, 국민 경제의 기초가 되어야 할 내수 경제에 찬물을 끼얹는다. 하지만 이들은 장차 고령사회, 더 나아가 초고령사회에서 비경제활동인구를 부양해야 하는 책임까지 떠안고 있다. 참으로 불행한 세대이다. ‘청년 백수’ 혹은 ‘88만원 세대’로 일컬어지는 이들이 살아가는 모습과 이들이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13장 ‘고용 없는 성장과 청년 세대의 아우성’에서 따로 살펴보겠다.
역선택과 개살구시장
세상이 바뀌고 있다.
이미 많이 바뀌었으며 앞으로도 더 많이 바뀔 것임을 미화원 오장수 씨나 그의 고등학교 후배인 이요산 씨는 알아야 한다. 열심히 일을 해도 왜 살림살이가 더 나아지지 않는지, 무역흑자가 늘고 경기가 좋아지고 있다는데 왜 피부로 느끼는 소득과 물가와 고용은 나아지지 않는지, 좋은 일자리가 왜 자꾸 줄어드는지, 제조업 일자리가 왜 자꾸 줄어드는지, 대학생을 포함해서 청년층이 청춘을 노래하기에도 짧고 아까운 시간을 왜 그렇게 취업과 성공과 돈에다만 쏟는지, 백수로 사는 청년은 그렇다고 쳐도 왜 번듯한 직장에 다니는 청년들까지 결혼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지, 텔레비전만 틀면 왜 통신 관련 산업 광고들과 보험 광고가 판을 치는지, 왜들 그렇게 돈을 빌려쓰라고 길거리에서 나눠주는 전단으로 그리고 또 휴대폰 메시지로 악착같이 아우성인지, ‘좋은 땅’에 투자를 하라고 권유하는 기획부동산의 전화가 예전에는 그토록 자주 오다가 왜 갑자기 뚝 끊기고 오지 않는지, 이런 온갖 것들이 어떻게 서로 손을 잡고 있는지 혹은 간통을 하고 있는지 통째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여유가 있다면, ○○동물병원 현관문에 사랑했던 강아지를 묶어두고 간 검은색 오피러스 가족이 도대체 어떤 사연을 가지고 있는지도 (혹은 아무 사연도 없는지도) 알아야 한다. 그래야 개살구시장에서 ‘피박’과 ‘독박’을 한꺼번에 쓰는 꼴을 피할 수 있다.
A씨와 B씨는 도자기를 만들어서 시장에서 판다. (이 도자기 시장에는 도자기를 파는 사람이 A씨와 B씨밖에 없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A씨는 좋은 제품을 만들려고 재료도 좋은 재료를 쓰고 오랜 시간에 걸쳐서 정성을 많이 들인다. 그리고 자기가 세운 높은 기준에 맞지 않는 도자기는 최종 단계에서 깨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A씨가 시장에 내놓는 도자기는 품질과 디자인에서 명품이다. 당연히 비용은 그만큼 더 많이 든다. 하지만 B씨의 도자기는 겉만 A씨의 제품처럼 번지르르할 뿐 품질은 엉망이다. A씨는 자기가 만든 도자기를 시장에서 한 점당 30,000원에 받으려 하고 B씨는 12,000원 받아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소비자들은 시장에서 A씨의 도자기와 B씨의 도자기를 겉으로 봐서는 분간할 수 없다. 정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것들이 1 대 2의 비율로 섞여 있다는 사실밖에 모른다고 치자. (물론 1 대 3의 비율일 수도 잇고, 2 대 7의 비율일 수도 있다.) 소비자는 A씨의 도자기에 대해서는 35,000원까지 낼 용의가 있지만 B씨의 도자기에 대해서는 15,000만 내고 싶다. 이때 소비자가 생각하는 도자기의 기대값은 {(1×30,000)+(2×15,000)}÷3=20,000원이다.
그런데 과연 소비자가 20,000원으로 도자기를 사려고 할 때 A씨는 도자기를 시장에 내놓을까? 아닐 것이다. 이 시장에 A씨와 같은 생산자가 100명이 있고 B씨와 같은 생산자가 200명이 있다고 친다면, 시간이 흐르면서 이 시장에서 A씨와 같은 생산자는 점차 모습을 감출 것이다. 결국 시장에 남는 것은 싸구려 도자기뿐이다. 이처럼 정보가 부족한 상황에서 품질이 나쁜 상품이 품질이 좋은 상품을 시장에서 완전히 몰아내고, 사람들은 열등한 상품만을 선택하게 되는 것을 역선택(adverse selection)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런 시장을, 겉만 번지르르하고 내용은 형편없는 물건을 가리키는 영어 표현 ‘lemon’을 써서 개살구시장(lemon market)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사는 세상, 우리가 경제 활동을 하는 시장을 개살구시장으로 만들지 말자.
정직하지 못한 B씨가 돈을 벌 수 있는 것은 소비자가 충분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책임은 물론 시장에 관한 정보에 게을렀던 소비자가 져야 한다. (‘피박’에 ‘독박’까지!) 또 소비자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길 게을리 한 A씨에게도 책임이 있어 파산이라는 쓰라린 대가를 치른다. 그렇다면 시장에서 자릿세를 받는 C씨는? C씨에게 고용되어서 시장 관리를 하는 D씨는? D씨에게 국밥을 파는 욕쟁이 할머니는? 그리고 당신은? 당신은 자식들은?
========
메아리 없는 글을 계속 올리기가 힘드는군요.
주말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다음주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첫댓글 글자의 크기를 좀 더 크게해 주시면 보기에 편할것 같아요. 해연님 ... 좋은 글을 오려 주시어 고맙습니다. 잘 보았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