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살아있는 빵이다. -
☆ 2014년 가해 5월9일 (백) 부활 제3주간 목요일
[청주] 맛있는 음식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제1독서 : 사도 9, 1 - 20
† 복음 : 6, 52 - 59
★ 주님의 제자들을 박해하던 사울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주님을 만난다.
그는 자신이 박해하는 예수님이 주님이시라는 목소리를 듣는다. 사흘 동안
눈이 멀고 먹지도 마시지도 않은 그에게 주님께서는 하나니아스라는 제자를
보내시어 그의 눈을 뜨게 하시고 세례를 받도록 이끄신다(제1독서).
★ 생명의 빵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에 거부 반응을 보이는 유다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라고 하신다. 당신의 살은 참된 양식이고, 당신의
피는 참된 음료이기 때문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우리는 부활 제3주간 평일 내내 '생명의 빵'에 관한 요한 복음 6장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깊은 신학적 의미를 담고 있는 이 부분은 길기도 하거니와 그
뜻을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들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내용의 전체적인
흐름과 구조를 되짚어 보는 것이 더욱 깊은 묵상을 하는 데 도와줄 것입니다.
우리가 들은 것처럼 이 6장은,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에 이은 예수님의 긴 말씀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다시 '생명의 빵'에 대한 말씀과 오늘 복음에 나오는 당신의
살과 피에 관한 '성체성사적' 말씀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빵과 물고기로
배불리신 기적 이야기는 다른 복음서에도 모두 나오지만, 요한 복음은 우리가
이 기적에서 표징을 보도록 이끕니다. 배불리 먹은 군중이 그 표징을 육적인
차원에서만 이해하고 있음을 요한 복음은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표징은
시선이 영적인 차원으로 향할 때 비로소 그 뜻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빵과 물고기의 기적이 가리키는 표징에 대해 점점 깊이
이해하도록 이끄십니다. 지상의 양식만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온 빵'을
바라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제한되고 사라져 버릴 갈망을 채우는 양식에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생명의 빵'으로 우리의 시선을 옮기도록 촉구하십니다.
마침내는 그 생명의 살이 '당신의 살과 피'라고 선언하십니다.
요한 복음은 이 성체성사적 표징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지니신 예수
그리스도와 만나고 그분 안에 머무르는 것이 이 기적의 참뜻이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의 기적이 우리의 육신의 만족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영원한 진리 자체이신 예수님 안에 머물라는 표징이라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복음은 이제 그 표징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과 선택을
적나라하게 보여 줍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 매일 미사 -
◈ [청주] 맛있는 음식|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5월9일 부활 3주간 금요일 (요한 6,52-59)
<내 삶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요한 6,52-59
맛있는 음식
음식을 맛있게 먹으면 그만큼 몸에 영양을 보충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음식에
얼마만큼의 사랑과 정성이 들어갔느냐가 맛의 좋고 그렇지 않음을 판가름하게
됩니다. 그래서 맛보다는 영양을 중시하며 잡곡밥이나 현미를 먹기도 합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오히려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음은
그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 해도 사랑과 정성이 빠지거나 걱정을 안고 있으면 맛을 잃고 맙니다.
사랑과 정성이 담겨야 음식입니다. 사랑이 담기지 않으면 음식이 아니라
사료입니다. 사료는 짐승이 먹는 것입니다.
기도는 맛있는 음식입니다. 맛있는 음식을 통해서 영양을 보충하듯 기도를
통해 영적 양식을 보충해야 합니다. 아무리 풍요로운 음식이 있다 해도 그
음식을 먹지 않으면 영양이 보충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기도하지 않으면
영적인 성장을 가져올 수 없습니다. 따라서 ‘맛있는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마음’이 먼저 필요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기도 안에서 맛있는 음식이 된
사람은 예수님과의 온전한 일치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맛있는 음식으로 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살과 피를 음식으로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음식을 먹고 마심으로써 예수님과 하나가 된다는 말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먹고 마심으로써 인격적인 결속을 이룬다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사 안에서의 준비된 영성체가 중요합니다.
어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성 안토니오 마리아 클라렛은 “우리가 영성체에
임할 때 모두 같은 주 예수님을 모십니다. 그러나 다 같은 은총을 받고 같은
효과가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차이는 준비된 마음의 자세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영성체에 임하는 사람과 예수님 사이에 더 많은 유사성이
있을수록 영성체의 결실도 더 좋은 것입니다.”하고 말합니다. 유사성을
회복하는 방법은 고해성사입니다.
그러므로 맛있는 음식을 맛있게 먹기 위해서는 먼저 속을 비워야겠습니다.
그리고 영성체를 통하여 그분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그분 안에 있음을
감사하십시오. 이번 기회에 미사 참례회수를 늘리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모든 선행을 한데 모아도 미사 한 번의 가치를 따라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선행은 사람의 행위이지만, 미사성제는 하느님의 역사(役事)이기 때문입니다”
(아르스의 비안네).
성 아우구스티노도 말합니다. “미사성제에 참례하러가기 위하여 내딛는
발걸음 하나하나를 천사가 세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서와
영원에서 큰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그러므로 너무 바쁘다는 말을 하지 말고
하루 일과 중에 미사참례를 첫 자리에 놓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 보십시오. “마르타, 마르타, 너는 많은 일에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루카10,41-42). 평일에도
미사참례를 위해 애쓰는 가운데 주님의 온갖 축복을 풍성히 받으시기
바랍니다. “미사는 지상의 천국입니다.”“미사는 종합영양제입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것
2014년 가해 5월9일 부활 제3주간 금요일
<내 삶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요한 6,52-59
지난 3일부터 6일까지 저에게 있어서는 황금연휴였지요. 그동안 계속
피곤함이 쌓여서 정말로 힘들었는데, 마침 연휴가 저한테 찾아온 것입니다.
어린이날이라고 해서 제가 챙겨야 할 아이가 있는 것도 아니고, 또한
석가탄신일이라고 해서 절에 갈 이유가 없지요. 그래서 저는 이 기간 동안
잠이나 실컷 자고 기도와 함께 밀린 책이나 읽겠다는 소소한 계획을 세웠지요.
더군다나 나라 전체가 슬픔에 잠겨 있는데 어디 여행을 갈 것이며, 또 누구를
만나서 즐길 분위기도 아니지 않습니까?
연휴 첫날, 정말로 많은 잠을 잔 것 같습니다. 평상시에는 4~5시간밖에 자지
않는데, 자그마치 하루에 8시간 이상을 잤습니다. 기분이 너무나 좋았고,
커다란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연휴 둘째 날도 오랫동안 잠잤습니다.
그리고 일어나는 순간, 괜히 시간을 낭비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할 것도
많은데, 나의 게으름만을 누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너무나
불편했습니다.
잠이 부족한 사람이 잠을 많이 자면 행복감을 느끼겠지요. 그러나 계속 잠을
많이 잔다고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이 커다란 수입을 얻게 되면 행복감을 느낍니다. 그러나 계속 돈을 많이
번다고 해서 행복한 것은 아니지요. 한 순간의 행복은 있을 수 있겠지만,
영원한 행복이란 세상의 것으로는 얻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말을 두고서 말다툼이 벌어집니다.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우리의 머리로도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이해하기 힘들지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살을 먹으라고 하다니, 우리가 식인종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또 배려를
해주시지요. 성사 안에서 참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을 수 있도록
하십니다.
예수님의 몸과 피를 모셔야만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먹는 행위 안에서 우리의 본성이 그분의 본성과 결합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것들을 통해서는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 없지만,
주님 안에서 그리고 주님과 하나 됨으로 인해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매 미사
때 영하는 주님의 몸을 좀 더 거룩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모셔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주님과 더욱 더 일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삶이 힘들다 해도 살다 보면 살아진다. 살다 보면 힘겨움에도 적응이 되는
것이다. 삶에서 견딜 수 없는 고통이란 없다. 다만 견딜 수 없는 순간만이 있을
뿐이다(박현욱).
그 말이 틀렸음을 증명하도록 하라!
아래의 글은 어떤 책에서 본 글입니다. 교만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실
순간에 감사하지 못하고 교만에 빠질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교만의
삶과 겸손의 삶을 기억하면서 아래의 글을 읽어 주시길 바랍니다.
1825년 러시아 알렉산드로 1세가 죽은 뒤에, 니콜라이 1세가 즉위하자마자
데카브리스트(12월 당원)들이 러시아의 근대화를 요구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황제는 황실 근위대인 코작 기병대를 동원해 사흘 마에 이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주동자 5명에게 교수형을 선고했다. 이때 운 좋게도 콘드라티
릴레예프의 목을 매단 밧줄이 그만 끊어지고 말았다. 시인이었던 그는 벌떡
일어나 군중을 향해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이 밧줄을 보라! 러시아는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밧줄 하나
제대로 못 만들지 않는가!”
그 당시, 유럽의 다른 나라처럼 러시아에서도 사형장 밧줄이 끊어진 경우,
이를 신의 섭리라 믿고 사면해주는 게 관례였다. 니콜라이 1세도 별수가
없었다. 사면장에 서명을 하다 그가 물었다.
“기적이 일어난 뒤 릴레예프가 뭐라던가.”
신하가 ‘러시아는 밧줄 하나도 제대로 만들지 못한다’고 조롱했다고 전하자,
황제는 화를 내며 사면장을 찢어버렸다.
“그 말이 틀렸음을 증명하도록 하라!”
릴레예프는 다음날 교수대에 다시 섰다. 이번엔 줄이 끊어지지 않았다.
더 이상 볼 일이 없을 거라 생각될 때가 있다. 그래서 내키는 대로 내뱉어도
될
거라 생각될 때가 있다. 그때 그 한마디를 조심해야 한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표징은, 그분이 내 안에 내가 그분 안에 살게 하는 힘
2014년 가해 5월9일 부활 제3주간 금요일
<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
복음 : 요한 6,52-59
< 표징은, 그분이 내 안에 내가 그분 안에 살게 하는 힘 >
시골 작은 마을 외딴집에 어머니와 딸이 살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밤손님이라도 들어올까 봐 해만지면 문고리를 이중 삼중 잠그는 게
일이었습니다. 딸은 촌구석에 풍경화처럼 묻혀 살고 있는 자신이 너무
싫었습니다. 도시가 그립고 라디오를 들으며 상상해 온 화려한 세상에 나가
살고 싶었습니다.
어느 날 새벽, 딸은 가슴 속의 그 허황된 꿈들을 좇아 어머니 곁을 떠났습니다.
어머니가 잠든 사이 몰래 집을 나온 것입니다.
‘엄마, 못난 딸 없는 셈 치세요.’
딸은 쪽지 하나 달랑 남기고 고향을 떠나 도시로 갔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녀가 꿈꾸던 것처럼 아름답기만 한 곳은 아니었습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타락의 길로 들어서게 된 딸은 더 이상 갈 데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진 뒤에야 잘못을 깨달았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딸은 좁은 방에
웅크린 채 엄마의 사진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날이 잦아졌습니다.
“엄마...”
그렇게 10년이 흘러 어느새 어른이 된 딸은 병든 마음과 누추한 몸을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집에 도착한 것은 늦은 밤... 창틈에선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왔습니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문을 두드렸지만 방안에는 아무런
기척도 나지 않았습니다.
순간 불길한 생각이 들어 문고리를 잡아당긴 딸은 깜짝 놀랐습니다.
“이상하다. 단 한 번도 밤에 문 잠기는 걸 잊은 적이 없었는데...”
어머니는 깡마른 몸을 차가운 바닥에 눕히고 가련한 모습으로 잠들어
있었습니다. 딸은 엄마의 머리맡에 무릎을 꿇은 채 흐느꼈습니다.
“엄마, 흑흑...”
딸의 흐느낌에 잠을 깬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딸의 그 지친 어깨를 감싸
안았습니다. 어머니의 품에 안겨 한참을 울고 난 딸은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엄마, 그런데 오늘은 왜 문을 안 잠갔어? 누가 오면 어쩌려고.”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오늘뿐이 아니란다. 혹시 네가 밤중에 왔다가 그냥 갈까 봐 10년 동안 한 번도
문을 잠그지 못했어.”
천천히 방을 둘러보던 딸은 다시 한 번 깜짝 놀랐습니다. 어머니가 하루같이
딸을 기다리던 방안엔 라디오도 책들도 모두 10년 전 그대로였습니다. 모녀는
그날 밤 10년 전으로 돌아가 방문을 꽁꽁 걸어 잠근 채 편안하게 잠이
들었습니다.
[TV동화 행복한 세상 1, 잠기지 않는 문]
나의 어머니와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아니면 나의 자녀와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세상 어디를 돌아다니며 찾아봐도 어머니만큼 나를
안아줄 따듯한 집은 없습니다. 또한 어머니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녀를
위해서라면 문을 절대 걸어 잠그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머니 마음 안엔
항상 자녀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녀 또한 어머니의 그 사랑을 받아들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이 바로
표징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 사랑의 표징들을 받아들인 자녀는 멀리 떠나도
어머니를 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머니는 그 표징들을 통해 당신의
존재를 자녀의 가슴으로 옮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집을 나간 딸도 결국
어머니 집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어머니의 가슴엔 딸이 살고, 딸의 가슴엔 어머니가 삽니다. 그 이유는
둘 사이에 오고간 사랑의 표징들 덕분인 것입니다. 이것이 삼위일체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시다.”
이 신비는 바로 성령님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성령님을 받으신 그리스도는 그
안에 아버지를 품고 당신을 보는 것이 곧 아버지를 보는 것이라 하십니다.
그러나 돌아가실 때 성령을 아버지께 보내시며 그분의 손에 당신의 영을
맡깁니다. 그렇게 서로의 품 안에 살게 되는 신비가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삼위일체 신비인 것입니다. 이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의 표징이 곧 성령이신
것처럼,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둘 사이를 오고가는 사랑이 곧 표징이 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마치 노아의 홍수 때 노아의 방주에 들어가야 하는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안에 들어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이렇듯 표징은 그 사람이 내 안에, 또 내가 그 사람 안에 머무르게 하는 중재자
역할을 하게 됩니다. 성령으로 축성된 그리스도의 성체도 그분의 사랑의
표징이기에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만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유일한 구원의 길이시기에 그분 안에 머물기 위해서는 그분의 성체와
성혈을 모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표징이 곧 당신의 살과 피인 것입니다. 그것을 영함으로써
그 분이 내 안에 사시지만, 나 또한 그분 안에 살게 되어서 죽음의 힘도 나를
해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딸이 표징을 통하여 어머니의 사랑을 믿게
되는 것처럼, 우리 또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인 성체와 성혈을
믿어야합니다. 그 믿음이 있다면 우리도 그리스도의 품에 들어 죽음도 이기지
못하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오산 성당 홈페이지: http://cafe.daum.net/ca-osan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 담당 전삼용 요셉신부 -
◈ [서울] 부활 제3주간 금요일
2014년 가해 5월9일
<내 삶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요한 6,52-59
교황님 방한과 시복식을 준비하면서 저는 ‘영성 신심 분과’를 맡았습니다.
교황님 방한과 시복식이 한 번의 행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삶을
통해서 순교자들의 영성이 계속 이어지도록 하는 것이 제가 맡은 분과의
일입니다. 지난 1989년 ‘세계 성체대회’가 끝난 후 한국 교회는 ‘한 마음 한 몸
운동 본부’를 만들었습니다. 성체대회의 정신이 계속 이어지도록 한 마음 한
몸 운동 본부를 통해서 ‘나눔과 사랑’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교황님 방한과 시복식을 위한 기도문을 만들어서 전국 각 본당에 나누어
드렸습니다. 전국의 많은 본당은 교황님의 방한과 시복식을 위한 기도를 함께
하고 있습니다. 6월부터 10월까지 각 교구에서 지정한 성지와 124위 복자와
관련된 성지를 순례하고, 미사와 영성체 그리고 묵주기도와 고백성사를 하면
전대사를 받을 수 있도록 각 교구에 협조를 구하였습니다. 이제 곧 16쪽
구성된 자료집과 124쪽으로 구성된 자료집이 나올 것입니다. 이런 자료집을
통해서 교황 방한의 의미와 순교자들의 영성을 이야기 할 것입니다.
순교자들의 영성이 우리의 삶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드러날 수 있도록
실천사항들을 담아 낼 것입니다. 평화 방송과 신문을 통해서 영성 신심
분과에서 준비한 자료들을 함께 나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혹을 받으셨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 요즘 예수님께서
‘생명의 빵’을 이야기 하십니다. 이것은 곧 다시 먹어야 하는 밥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에게 영적인 힘을 주고,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
용기를 주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는 명예와 권력이라는 황금 알을 찾으려는 사울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제 사울에게 새로운 길을 알려 주십니다. “나는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그에게 보여
주겠다.” 사울은 이제 주님의 도구가 됩니다. 그리고 많은 고난을 받게 됩니다.
사람들은 그의 회개를 믿지 못합니다. 예전의 동료들은 그가 배반했다고
미워합니다. 사울은 이제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멸시와 조롱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방법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회심한 것은,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된 것은 ‘빵’을 먹어서가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그를 변화시킨 것입니다.
수업을 받는 부제님들에게 기말고사 숙제를 내 주었습니다. ‘서품 성구’를
정하고, 그 의미를 설명하라고 하였습니다. 서품 성구는 앞으로 사제생활을
하는데 커다란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저의 서품 성구는 시편의 말씀입니다.
‘눈물로 씨 뿌리는 사람들이 기쁨으로 곡식을 얻을 것입니다.’ 이 말씀은 제게
힘이 되었고, 이 말씀은 제게 용기를 주었고, 이 말씀은 제게는 다시 배고프지
않는 생명의 빵이 되었습니다.
신앙은 ‘황금 알’을 낳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매일 기도하고, 선행을
베풀면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셨고, 성인
성녀들이 예수님의 삶을 따랐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제 우리들도 주님의 뜻을
따라서 우리의 사랑과 우리의 재능을 기꺼이 이웃들에게 나누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된 행복의 시작이고, 영원한 생명의 출발이기 때문입니다.
- 서울 대 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도회] 내리사랑[단상]
2014년 가해 5월9일 부활 제3주간 금요일(2014년 5월 9일) 내리 사랑
<내 삶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요한 6,52-59
어제는 어버이날이었습니다.
저는 집에 두 분만 계신 부모님에게 축하 전화만 해드렸습니다.
부모와 자식은 살과 피를 나눈 사이입니다. 한 몸이었다가 둘이 된 것이지요.
한 몸이었다는 사실은 영원히 서로를 그리워하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오늘 예수님도 당신과 우리가 한 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물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윗 사람이 아랫 사람을 먼저 사랑하는 것이라 해서 사랑은 ‘내리 사랑’이라고
했던가요. 우리 부모님들처럼 ‘우리보다 먼저’ 예수님이 당신의 모든 것, 살과
피를 우리에게 내어주셨기에 우리는 그분 안에 존재하고 그분도 우리 안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내리 사랑’ 덕분에 우리는 예수님과 한 몸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내리 사랑’을 우리 현실에서 봅니다. 세월호 부모들 안에서
우리는 당신들 가슴에 묻은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지금 살아 있는 다른
아이들까지 내려가고 있음을 봅니다. 자신들의 아이들에 대한 염려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아이들에 대한 염려에 이르기까지 넓어졌습니다.
어젯밤 단원고 2학년 5반 故 박성호 군의 어머니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아이들의 죽음이 묻혀서는 안됩니다. 절대로 안됩니다. 왠지 아십니까?
오늘은 우리 아이들이 죽었지만 내일은, 모레는, 몇 년 후는 당신의 아이들
당신이 죽을 수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우리보다 더 힘들고 어렵고 아픈 사람들을 향해 우리의
몸과 피를 내어줍시다.
-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 -
◈ [수도회] 5월의 향기 -하느님 체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요셉 수도원)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5월9일 부활 제3주간 금요일
사도9,1-20 요한6,52-59
<내 삶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요한 6,52-59
5월의 향기 -하느님 체험-
어버이날인 어제 저는 '5월의 향기' 같은 하느님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하여 강론 제목도 지체할 것 없이 '5월의 향기'로 정했습니다.
"두 분은 아버지께서 오늘 저에게 보내 주신 선물입니다.“
함께 고사리를 뜯은 후 떠나는 중년 부부에게 제가 드린 말씀입니다.
두 분도 유쾌하게 웃었습니다.
이어 제가 드릴 것은 강복뿐이 없어 두 분께 하느님의 강복을 드렸습니다.
정말 다정한 친구 사이 같은 중년 부부는 저에겐 뜻밖의 하느님의
선물이었습니다. 부인인 자매님은 저에게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라는
리본이 달린 귀여운 화분에다 작은 정성의 축하금과 더불어 제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아 주셨고, 장부인 형제님은 고사리를 뜯던 묘지부근에서
5월의 향기 그윽한 아카시아 꽃을 꺾어 주셨습니다.
강론 쓰는 이 시간에도 방안 가득 채운 아카시아 꽃 그윽한 향기입니다.
"참 향기가 좋습니다. 맡아 보십시요.“
예기치 못한 아름다운 마음의 선물이었습니다. 그대로 5월의 향기를 대표하는
아카시아 꽃 향기와 더불어 초등학교 교편시절 이때 쯤이면 아이들과 함께
불렀던 '과수원길'이란 동요도 그립게 떠올랐습니다. 좌우간 저는 아버지께서
보내 주신 두분의 착한 부부를 통해서 주님을 체험했습니다.
어제 1독서에서 에티오피아 여왕 칸타케의 내시에게 아버지는 필리포스를
보내주셨고, 오늘 1독서에서 주님은 당신을 만난 사울에게 하나니아스를
보내주셨듯이, 어제 아버지는 당신의 착한 중년부부를 저에게 선물로
보내주셨습니다.
오늘 당신을 만난 사울에 대한 주님의 후속조치가 참 기민하고 완벽합니다.
하나니아스를 불러 단호하게 명령하시자 그는 즉시 주님 명령에 순종합니다.
"가거라. 그는 다른 민족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 나는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그에게 보여주겠다.“
이 또한 하나니아스의 주님 체험입니다. 얼마나 주님의 충실한 종,
하나니아스인지 깨닫습니다. 하나니아스는 사울을 통해 자신을 한없이
신뢰하시는 주님을 체험했고, 사울 역시 다마스쿠스 도상에서 강렬한 주님
체험에 이어 하나니아스를 통해 자비하신 주님을 체험합니다.
"사울 형제, 당신이 이리 오는 길에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나를 보내셨습니다.“
그러자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다시 보게 되었고,
하나니아스에게 세례를 받은 다음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린 사울입니다.
이어 곧바로 회당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선포합니다.
주님과의 결정적 만남으로 회심의 완성에 이른 사울입니다.
그 무엇보다 주님과 만남의 절정은 거룩한 성체성사입니다. 이보다 강렬한
주님 체험도 없습니다. 그러나 성체성사를 통한 주님 체험은 순전히
은총입니다. 은총 없이는 성체성사의 이해도 주님 체험도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세례를 받아 새롭게 태어난 성령으로 충만한 이들만이
성체성사를 통해 이런 주님을 이해할 수 있고 체험할 수 있습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성체성사를 통해 생명의 빵이신 주님을 모심으로 주님으로
말미암아 지금 여기서 영원한 삶을 살게 된 우리들입니다. 사실 성체성사를
통한 주님과의 일치 체험보다 더 은혜로운 체험도 없습니다.
하느님이 우리 믿는 이들에게 주신 참 좋은 선물이 이 거룩한 성체성사입니다.
성체성사의 신비는 그대로 하느님의 신비입니다. 그러니 성체성사의 신비를
깨달아 알 수 있도록 주님의 자비를 청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요한6,55-56).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 [서울] 예수님이 원하신 사랑관계
2014년 가해 5월9일 부활 제3주간 금요일
<내 삶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요한 6,52-59
하나 되기 일치하기란 걸 물리적으로 말고 형상적으로도 말합니다.
마음의 일치, 사랑으로 하나 되기 같은 말들을 쉽게 하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마음 달라 갈라지고 사랑했다가고 헤어지기 곧잘 합니다.
자식 잃고 가슴 슬퍼 괴로워하는 부모님들 너무 잘 알지 않습니까.
살과 피로 엮어진 관계로 부모자식 형제들인 가족 그리 간단치 않습니다.
예수님(하느님의 사랑)도 이런 사랑관계를 인간 모두와 맺고자 하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요한 6,56)”
- 서울 대 교구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 [수도회] 유한한 인성이 영원한 신성에 참여하는 길
2014년 가해 5월9일 부활 제3주간 금요일
<내 삶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요한 6,52-59
유한한 인성이 영원한 신성에 참여하는 길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 백성들에게 건네신 말씀은 참으로 특별했습니다.
많은 구약의 예언자들 가운데 그 어떤 예언자도 예수님처럼 말한 적이
없었습니다. 유다인들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은 때로 큰 스캔들이 되기도 했고,
때로 큰 흥미꺼리가 되기도 했습니다. 때로 예수님의 말씀은 큰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때로 그 말씀이 꿀처럼 감미로웠습니다. 때로 생명수처럼 시원했습니다. 때로
산들바람처럼 신선했습니다. 때로 쌍날칼처럼 날카로웠습니다. 때로 비수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 들어가 대대적인 회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정말 특별한 예수님의 말씀이 있었는데,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유다인들 사이에 큰 말다툼까지 벌어졌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한 유다인들은 예수님과 제자들,
초대교회 공동체 사람들을 '식인습관'이 있는 인간도 아닌 무리로 여겼습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사실
성체성사의 제정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표현 안에서 '살'과 '피'는
한 인간의 생명 전체, 인간 전체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정하시는
성체성사에 온전히 참여할 때 우리는 비로서 참된 생명을 지닌 진정한 인간이
될 것입니다.
광야에서 유다 백성들은 만나를 먹음으로써 기근을 피하고 생명을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그때 당시 굶주림의 충족, 그로 인한 생명의 유지는
지극히 한시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성체성사를 통해 얻게 되는 생명은 만나보다
훨씬 우월합니다. 만나를 먹었던 사람들은 단 한명도 남김없이 다들 세상을
떴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성체성사를 통해 영하게 되는 빵을
먹는 사람들은 영원히 살것입니다.
역사 이래 수많은 인간들이 갈구해왔던 꿈이 한 가지 있습니다. 오래 오래
사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영원히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꿈이 드디어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성체성사를 통해서 말입니다.
성체를 받아모심으로 인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과 영원히 변치않는
관계를 맺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오는 생명으로 영원히
사는 것처럼 성체를 받아모시는 사람은 예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으로 또한
영원히 살것입니다.
이토록 은혜로운 성사가 바로 성체성사입니다. 유한한 인성이 영원한 신성에
참여하는 길이 바로 성체성사입니다. 부족하고 나약한 한 인간이 하느님성,
그리스도성, 신성, 영원성에 완전히 참여하고 일치할 수 있는 성사, 그래서 이
땅에서부터 영원한 생명을 맛보는 성사, 우리를 영원히 살게하는 축복의
성사가 바로 성체성사인 것입니다.
성체성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영하는 사람의 영혼은 예수
그리스도로 온통 채워집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에게서 샘솟는 시원한
생명수를 원없이 받아마십니다. 성체를 영한 사람 안에 예수 그리스도는
온전히 머물러계십니다. 따라서 경건하게 성체를 영한 한 인간 존재 자체는
또 다른 예수 그리스도요, 또 다른 성전인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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