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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가해 5월16일 (백) 부활 제4주간 금요일
[청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제1독서 : 사도 13, 26 - 33
† 복음 : 14, 1 - 6
★ 바오로 사도는 안티오키아의 회당에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에
대하여 설교한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일으키셨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여러 번 나타나셨고, 이제
그들이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마음을 산란하게 하지 말고 하느님을 믿고
당신을 믿으라고 당부하신다. 그리고 아버지의 집에 먼저 가시어 제자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면 그들을 데려다가 당신과 함께 있게 하리라고
말씀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예수님의 이 당부와 함께 요한
복음 14장이 시작됩니다. 우리는 이 구절이 27절에서 다시 반복되는 것을
봅니다. 이 말씀에는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깊은 위로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산란해지다'라고 번역된 그리스 말의 동사 '타라소'는 십자가의 길
앞에서 느끼는 두려움과 마음의 동요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이, 또 우리가 다가올 고난에 대하여 단지
마음의 평정심을 잃지 말라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어떠한 삶의 풍파에도 잃지 않는 부동심과 초연한 자세를 인격의
잣대이자 덕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두려움과 감정의 동요가 없는 것을 한
인간의 고귀함을 드러낸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마음의 수양을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구절에 예수님 당부의 참뜻이 담겨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믿음을 굳건히 하는 것이야말로 당신께서 떠나시는 길에서 제자들에게 간곡히
당부하시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세상의 모든 위협과 유혹에도
마음이 산란해지지 않고 믿음을 굳건하게 하는 데 우리가 끊임없이 기억해야
할 약속을 주십니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주님께서 가시는 것은 하느님 아버지의 집에 우리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두렵고 불안한 마음을 이기고 신앙 안에 굳건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아버지의 집은 사랑의 집입니다. 그 사랑의 집에 머무는
사람은 인간의 부족함과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고 기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지난해에 제 아버지가 선종하였을 때 어머니는 묘비명에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라는 이 구절을 넣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가끔
아버지의 묘소를 찾을 때마다 이 말씀을 보면서 지상의 삶이나 천상의 삶에서
우리가 믿고 의지할 약속이 무엇인지를 거듭 깨닫습니다. 주님의 이 약속을
기억할 때마다 산란한 이 세상에서 문득 잔잔한 평화와 위로를 느낍니다.
오묘한 이치나 도를 깨닫는 '득도'가 아니라 주님께 믿음을 두는 것, 바로
이것이 우리 신앙인의 길이라는 점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5월16일 부활 제4주간 금요일 (요한14,1-6)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 요한 14,1-6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남자들은 살면서 세 여자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답니다. 첫째는 엄마 말을 잘
들어야 하고 둘째는 부인의 말을 잘 들어야 하며, 내비게이션에서 흘러나오는
여성의 목소리를 잘 들어야 한다고 합니다. 첫째와 둘째 못지않게 셋째가
중요한데 그것은 목적지에 도달하기까지 잘 안내해 주고, 모르는 길도 큰
어려움 없이 안전하게 도착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때로는 엉뚱한 곳으로
안내해 방황하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길의 안내자역할에
내비게이션은 분명히 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여정을 살아가면서 때로 옳은 길을 가고 있는 것인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 물을 때가 있습니다. 최선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목적도 방향도 없이 방황을 하고 하느님께서 원하지
않는 것에 안주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우구스띠노 성인은 주 하느님 품안에
쉬기까지 늘 불안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천상에 목적을 두고
어떠한 처지, 상황이라도 감당하며 순례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늘을 향한 확실한 내비게이션, 안내자는 누구이겠습니까? 예수님
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께로 가는 길입니다. 당신을 ‘문’(요한10,9).이라고도 하셨습니다.
당신 자신이 종점이 아니라 종점에 이르는 길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전하는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그리고 말씀이 사람이 되신 예수님 자신이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하나입니다. 그리고 생명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생명의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 6,51).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요한14,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당신이 떠난다고 해서 마음 흔들리지 말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내가 떠나는 것은 너희가 머물 곳을 아버지 집에
마련하러 가는 일시적인 것이니 슬퍼하지 말라’는 당부이십니다. 그러나 그런
보증을 받기 위해서는 믿음의 행위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믿고 나를
믿어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준다 해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마음의 산란함 속에 살수 밖에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나 가정에서도
믿음에 바탕을 두지 않으면 인간적인 이득을 따지게 되고 계산하면서 결국은
주님의 뜻과는 먼 삶을 살아가면서 방황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14,6). 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다다르는 수단이십니다. 아버지와 만남을 이루는 방법은 예수님을 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중개자이십니다. 아버지를 가장 잘 알고
계시니 그분을 따라 가는 것이 최선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분명하고
확실한 내비게이션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진리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셔서 아버지 안에 살고 아버지께서도 그 안에 사십니다. 그래서
누군가 예수님을 알면 아버지도 아는 것이고, 예수님을 보는 사람은 아버지를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알려주는 계시자로서 진리이십니다.
그리고 생명이십니다.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과 생명을 완전한 방법으로
드러내고 세상에 구원을 알립니다. 당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내어 주셔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원자로서
생명이십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고 마음으로 받아들인다고 하면서도 내 삶을
주님의 삶으로 바꾸지 않는 한 그분은 그저 좋은 분으로 머물 뿐 구원이 될 수
없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분께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산란한
마음을 다스리고 매사에 내 뜻을 내려놓아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용기 있게
실천하며 순례의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많은 사람들이 ‘나는 정말로 행복해지고 싶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러한 말을 한 적이 없습니까? 아니면 비슷한 생각이라도 하신
적은 있으시죠?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행복하기를 간절하게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행복을 가로 막는 많은 장애물들이 내 안에 그리고 내
곁에 있다는 것이지요.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 물질적 빈곤으로 인해 힘들어
하는 사람들, 사람들과의 대인관계에서 행복을 잃었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들 역시 하나같이 ‘행복해지고 싶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상황을 볼 때 절대로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지금 행복하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은 행복할 수 없는 이유만을 찾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정말로 간절히 원한다면 그리고 그 행복을 나의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사람은 어렵고 힘든 상황에 닥쳐와도 “행복 하고 싶다.”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상황을 긍정적으로 바꿔나가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실제로
행복한 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전에 가지고 있었던 모든 상황이 하나도
바뀌지 않았음에도 말이지요.
반대로 행복할 수 없는 이유만을 찾는 사람은 언제나 만족할 수 없습니다.
큰돈을 벌게 되어도, 또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더라도, 사람들과 좋은 만남을
가져도...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되면서 ‘이것 때문에 나는 행복할 수가 없어.’
라면서 단정을 짓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과연 행복한 사람일까요?
거액 로또 복권에 당첨된 한 청년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 청년은
복권에 당첨된 후에 너무나도 기뻤습니다. 더군다나 경제적으로 매우
힘들었기 때문에 뜻밖에 찾아온 이 행운은 자신을 분명히 행복하게 해준다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그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흥청망청 쓰다
보니 그 많은 당첨금은 사라졌고 어느 순간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는 자신을
보게 된 것이지요. 문제는 그동안 펑펑 쓰던 습관이 남아 있어서 지금의
자신이 얼마나 비참하게 느꼈는지 모릅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청년은 절도죄로 교도소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 복권에 당첨되지
않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라는 것이었지요.
평범한 일상이 바로 행복의 순간인 것입니다. 작은 것에 행복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당신 스스로를 진리이며, 생명이라고 말씀하시지요.
주님은 진리 그 자체이시기에 우리를 그릇된 길로 인도하지 않으십니다. 또한
주님은 생명이시기에 영원한 삶으로 우리를 인도할 유일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에 대한 믿음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행복할 수 있습니다. 진리와
생명을 주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으니까요.
행복할 수 없는 이유를 더 이상 찾지 마십시오. 대신 작은 것 안에서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접하면서 행복할 수 있는 이유가 너무나도 많다는 것을
스스로 느꼈으면 합니다.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조건을 불행이라고 말하지 말라. 다른 조건에 있더라도 우리는
외로울지 모른다. 지금의 조건에서 조금씩 덜 외로운 일을 시작하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삶’이다.(신달자)
행복은 멀리에 있지 않다.
부정적인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내가 선호하는 것에서 어긋나는
것을 얻게 될 때가 종종 있게 되지요. 그때는 부정적인 생각을 갖지 않으려고
해도 좀처럼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떤 책을 보니까 저자는 이러한 방법을
제시하더군요.
‘나는 A가 더 좋아. 하지만 B도 나쁘진 않아!’
나쁘다는 것은 있지 않습니다. 스스로가 나쁘다고 생각할 뿐인 것이지요.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줄여 나갈 때, ‘행복’이란 그리 멀리에 있지 않음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2014년 가해 5월16일 부활 제4주간 금요일
<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
복음: 요한 14,1-6
<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
헬렌 켈러는 이런 말들을 남겼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보다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나의 생애에서 닥쳐오는 모든 고난은 하늘이 값없이 내리는 은혜다.”
“다른 사람에게는 내가 가는 길이 어두울 것으로 여기겠지만 나는 내 마음
속에 신비한 빛을 가지고 산다. 신앙이라는 강한 영적 등이 내 길을 비춰 주는
것이다.”
헬렌 켈러에게 신앙은 그녀의 삶을 행복으로 바꾸어준 가장 중요한 삶의
등불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녀는 신앙을 가지고,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했던 자신을
이겨낼 수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녀가 Water라는 한 글자를 배우는 데는 앤 설리반이라는 선생님의 7년
동안의 끊임없는 노력이 있었습니다. 헤렌 켈러는 출생 후 19개월 때 심한
열병으로 눈과 귀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녀에게 이 세상은 암흑이고
빛이 무엇인지, 꽃이 무엇인지도 몰랐습니다. 동물과 같았던 것입니다.
그녀가 하버드 대학의 래드클리프 칼리지에 입학하여 우등으로 졸업했을 때
전 세계가 놀랐습니다. 그녀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에는 앤 설리반
선생님이 평생을 그녀를 위해 바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녀는
앤 설리반 선생님 덕에 신앙을 알게 되었고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앙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헬렌 켈러가 하느님의 존재를 알기 이전에 이 세상을 먼저 알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알게 해 준 데는 설리반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설리반
선생님이 없었다면 헬렌이 신앙을 갖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아버지께 가기 위해서는 먼저 그 파견자이신
그리스도를 알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버지께 갈 수 없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파견하셨다면, 우리와의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에 그 길을 내어주셨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 길을 통하지 않는다면 절대 아버지께 도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당신이 아버지께로부터 파견 받으신 것처럼 ‘교회’를
파견하셨습니다. 이 말은 또한 교회를 통하지 않고서는 당신께 올 수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교회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교회를 파견한 당신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고, 또한 당신을 파견한 아버지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버지께서 세상에 오실 수는 없으셨을까요? 혹은 예수님이
지금까지 남아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실 수는 없으셨을까요?
아버지께서 세상에 오실 수 있으셨다면 아들을 파견하실 이유가 없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우리와의 수준차이 때문입니다. 헬렌 켈러가 보고 들을 수도
없는 상황에서 곧바로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지닐 수 없는 차이와 같습니다.
저도 한 때 요한 바오로 2세의 손에 친구를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분의 손은
이웃집 아저씨의 손과 같이 편안했지만 감히 그분의 손에 입을 맞추지 못하고
입술이 손의 근처까지 갔다가 멈추었습니다. 그분이 교황님이기는 하지만 한
인간입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두렵고 떨리는데 만약 지금 예수님이
나타나신다면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까요? 우리 삶은 굳어져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보고 죽지 않는 자가 없다고 성경을 말합니다. 그분을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처지란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께서
머물러 계실 때 감히 그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벌벌 떨며 귀를 막았습니다.
오직 모세만이 그 위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모세만을 그들에게 파견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모세를 통하지 않고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을
만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가리옷 유다는 예수님이 나타나셨다고 하더라도 견디지 못하고 또 목을 맸을
것입니다. 물 위를 걸었던 베드로도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하고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떳떳이 만날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께서 안아주셔서
간신히 고개를 들 수 있었을 것입니다. 3년 동안 함께 있었고 수많은 기적을
체험한 베드로도 그렇게 예수님을 감당하기 어려운데 우리가 감당해 낼 수
있을까요? 만약 그분을 감당할 수 있다면 성모님처럼 깨끗한 사람이거나
그분이 당신을 너무나 가려서 그저 한 보통 인간으로 보이거나 혹은 마귀에게
속는 것일 겁니다. 그분과 항상 함께 했던 이들도 부활하신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교회에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고 하늘나라의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는
권한까지 주셨는데 내가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 죄를 용서받겠다고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아버지를 직접 만나겠다는 말과 다름이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도 사람의 모습이었지만, 제자들이 알아보지도
못하고 감당하기도 어려웠습니다. 하물며 우리 같은 죄인이 어찌 하느님을
직접 만나겠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그분을 감당할 수준이었다면 이
세상에 떨어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버지께 갈 수 없다고 하신 더 근본적인 이유는, 당신께 오기 위해서는
당신이 파견하신 교회를 통해 오라는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오산 성당 홈페이지: http://cafe.daum.net/ca-osan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 담당 전삼용 요셉신부 -
◈ [기타] 기도하십시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힘들고 지치셨습니까? 그러면 기도하십시오.'
2014년 가해 5월16일 부활 제4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요한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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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삶을 다할 때까지 결코 부정적인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는 것이
우리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것이 삶이기도 하지요. 때로는 불안하고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가슴이 찢어질 듯한 슬픔도 경험함은 자연스러움입니다.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부정적인 감정을 없애려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움을 거부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미 생긴 감정을 없앤다는 것 역시 불가능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간단히 두 가지 점에 대해서만 생각해보지요.
하나.
부정적인 감정이란 결국 어떤 것에 대한 반응입니다.
사람마다 반응은 다릅니다.
보다 좋은 반응을 만들기 위한 자기 수련에 대해 힘을 쏟아야 합니다.
둘
부정적인 감정이 생겼을 때 빨리 추스르고 긍정적인 감정으로 옮겨야 합니다.
여러 방법이 있을 수 있습니다만, 제가 깨달은 가장 좋은 방법은
하느님을 신뢰하고 의탁하는 길이 아닐까 싶습니다. 억울할 때, 불확실한
미래에 불안과 두려움을 느낄 때, 다스릴 수 없는 슬픔을 느낄 때,
용서할 수 없을 정도의 미움과 분노를 느낄 때, 신앙을 가진 이들이라면 먼저
하느님을 떠올려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당신을 믿으시라고.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서울] 하느님이 인간에게 건네신 몸 말씀
2014년 가해 5월16일 부활 제4주간 금요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 요한 14,1-6
하느님이 인간에게 건네신 몸 말씀
사람이 길 진리 생명일 수 없습니다. 사람은 이를 따라갈 뿐입니다.
사람은 가야할 길, 따라야할 진리, 지켜야할 생명이 있기에 고귀합니다.
길 진리 생명을 지키며 살아갈 때에 훌륭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살면 하느님 아버지께 갈 수 있는 영원생명이 열릴 수밖에 없지요
예수님을 모시는 것이 하느님의 말씀을 모셔 들이는 것이란 뜻입니다.
사람으로 육화되신 예수님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건네신 몸 말씀(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 서울 대 교구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 [서울] 부활 제4주간 금요일
2014년 가해 5월16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 요한 14,1-6
어떤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남자는 3명의 여자 말을 잘 들어야
한다.’ 첫 번째는 어머니의 말을 잘 들어야 하고, 두 번째는 아내의 말을 잘
들어야 하고, 세 번째는 차에 있는 내비게이션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요즘은 거의 대부분의 차량에 내비게이션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차에
타서 목적지를 설정해 놓으면 친절하게 안내를 해 줍니다. 예전에는 지도를
보고 목적지를 찾아갔지만 지금은 지도를 보고 찾아다니는 경우는
드물어졌습니다.
동양에서는 삼강오륜이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이정표와 같았습니다.
“삼강은 군주와 신하, 어버이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강조했습니다. 하늘과 땅을 임금과 신하, 양과 음을 남편과 아내, 봄과
여름을 아버지와 아들에 각각 비유하면서 이를 왕도(王道)와 결부시켰습니다.
삼강은 군신·부자·부부의 3가지 인간관계에 한정되어 있고, 또 전자에 대한
후자의 종속성이 두드러집니다. 즉 삼강은 통치기준에 입각한 윤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삼강은 상하가 철저한 절대적이고 일방적인 윤리의 성격을
가집니다.
오륜은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붕우유신(朋友有信)”을 말하는데 삼강과 더불어 기본적인
실천윤리로 강조되었습니다. 오륜도 삼강과 마찬가지로 상하 관계적 질서의
확립을 통해 봉건적 신분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 지배층의 통치이념으로
기능했습니다. 삼강오륜의 가르침은 많이 퇴색되기는 하였지만 지금도
우리사회의 곳곳에 그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어제는 ‘스승의 날’이었습니다. 예전에는 ‘군사부일체’라고 하였습니다.
임금님, 스승님, 아버님은 같은 분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만큼 스승님의
권위와 인격을 존중하였습니다. 스승님의 그림자도 밟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스승님께 대한 예의를 지키라는 뜻입니다. 이번 스승의 날을 지내면서 가슴이
찡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진도의 팽목항에서는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선생님들을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지난번 세월호의 사고 때 선생님들은
제자들을 먼저 탈출시키셨다고 합니다. 제자들을 먼저 보내셨던 선생님들은
밖으로 나올 수 없었고, 아직도 차가운 물속에 있다고 합니다. 제자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신 선생님들입니다.
적성 본당에 있을 때입니다. 본당 교우분과 함께 식사를 하는데 교우분의
고향 후배가 왔습니다. 교우분께서 저를 이렇게 소개하셨습니다. ‘인사드려라!
내가 아버님처럼 모시는 분이시다.’ 고향 후배는 그 말을 듣고 제게 큰 절을
하셨습니다. 저는 본당 교우분의 말씀을 들으면서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사제로 살면서 그렇게 존경받고, 사랑받을 말과 행동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시대를 이끌어 가주셨던 어른들이 그립습니다. 그분들은
지성으로, 덕으로, 사랑으로 어둠 속에 있는 이들에게 빛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분들이 있기에 우리는 힘을 낼 수 있었고, 위로를 받았고, 희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수 없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희생과 끝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것을 신앙으로 믿고 따르고 있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함께 가는 것입니다. 말로는 예수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고백하면서 행동은 다른 길을 찾고, 다른 진리를 찾아가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은 우리 인생의 내비게이션입니다.
우리의 삶의 이정표입니다. 우리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길입니다.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도회] 하느님을 찾는 사람들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요셉 수도원)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5월16일 부활 제4주간 금요일 사도13,26-33 요한14,1-6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 요한 14,1-6
하느님을 찾는 사람들
우리 수도자를 한 마디로 정의하면 하느님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하여 수도원을 하느님의 집이라 하며, 하느님의 집에서 사는 수도자를 일컬어
하느님의 사람이라 하며 수도자가 바치는 성무일도를 일컬어 하느님의
일이라 합니다. 바로 하느님이 수도자의 존재이유이자 삶의 의미임을 깨닫게
됩니다.
비단 수도자뿐 아니라 사람 모두가 마음 깊이에서는 하느님을 찾습니다.
토마스 머튼은 사람은 누구나 마음 깊이에서는 수도자라 말합니다. 우리의
궁극 목적지인 하느님을 찾아가는 평생 순례여정 중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첫째, 길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을 찾는다 함은 길을 찾는다는 것과 같습니다.
길에서 태어나 길을 가다가 길에서 죽는 사람들입니다.
가도가도 제자리 걸음 같아, 또 제대로 길을 가고 있는지 몰라 두려움이요
불안입니다. 좌우간 길을 잃어 방황이요 혼란이요 복잡한 삶입니다.
길눈이 어두우면 길을 찾는데 어려움이 많듯이
마음의 길 눈이 어두우면 환상과 유혹에 빠지기도 쉽습니다.
길은 많아도 우리가 찾아가야 할, 따라야 할 유일한 길은 '나는 길'이란 하신
주님 한분뿐입니다. 함께 길을 가는 우리의 유일하고도 영원한 길벗은, 도반은
주님뿐입니다.
주님은 분명 약속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ㄴ).
둘째, 집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을 찾는다 함은 아버지의 집을 찾는다는 것과 같습니다.
아버지의 집을 찾아가는 우리 삶의 여정입니다.
찾아갈 곳은 많은 것 같아도 결국 우리가 머물집은 아버지의 집 하나뿐이요,
찾아갈 사람은 많은 것 같아도 결국 찾아가 뵈올 분은 아버지 한 분뿐입니다.
바로 이게 우리 삶의 현실이요 이를 깨닫지 못해 외롭고 쓸쓸한 인생입니다.
주님은 오늘 복음 서두에서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하시며 집
걱정은 추호도 하지 말 것을 당부하십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셋째, 진리를 찾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을 찾는다 함은 진리를 찾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거짓과 허위의 삶은 우리를 부자유하게 하고 우리를 안팎으로 망가지게 하여
존엄한 품위를 손상시킵니다.
주님은 진리를 증언하기 위하여 세상에 왔다고 말씀하시며
우리 모두 진리를 위해 몸바치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니다.
추상적 진리가 아닌 구체적, 실제적 진리는 주님 한 분뿐입니다.
주님 만이 우리를 진리로 자유롭게 합니다.
진정 진리에 목말라 진리를 찾을 때 '나는 진리'라 말씀하신 궁극의 진리
자체이신 주님을 만나 진실한 사람, 자유로운 사람이 됩니다.
넷째, 생명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을 찾는다 함은 생명을 찾는다 함과 같습니다.
목마를 때 물을 찾듯이 영혼이 목마를 때 생명의 하느님을 찾습니다.
하느님을,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 하는 사람들입니다.
누구나 공감하는 시편의 고백입니다.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하느님,
제 영혼이 당신을 이토록 그리워합니다. 제 영혼이 하느님을, 제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 합니다." (시편42,2-3ㄱ).
이 영혼의 갈증은 '나는 생명이라' 말씀하신 주님이 아니곤 아무도 해갈시켜
주지 못합니다.
오늘 주님의 복음 말씀이,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의 모든 결핍과 부족을
일거에 해결해 줍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아버지의 진리에, 아버지의 생명에 이르는 유일한 구원의 길은 오직 우리 주님
한 분뿐입니다. 이런 주님을 모시는 복된 미사시간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떠남으로
거짓과 죽음의 세상에서 길을 잃어 방황하는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바오로가 신록의 계절 5월 부활시기, 우리 모두에게 전하는 기쁜 소식은 바로
이런 주님이십니다.
"하느님을 경외하는 여러분, 이 구원의 말씀이 바로 오늘 우리에게
파견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분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시편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바로 오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에게 파견되는 구원의 말씀이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아버지의 아드님, 주님을 모심으로, 우리 역시 새롭게 태어나
존엄한 인간 품위을 회복하는 복된 미사시간입니다.
하여 우리 역시 주님을 닮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 [수도회] 갈증과 기쁨의 변증법[단상]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 요한 14,1-6
부활 제4주간 금요일(2014년 5월 16일) 갈증과 기쁨의 변증법
믿음은 통합입니다. 길이며 진리이며 생명이신 분과의 일치입니다. 이 땅
위에서는 완전한 통합은 하나의 희망일 뿐입니다. 그래서 갈망이 생기는
것이지요.
일치에 대한 목마름입니다. 늘 부족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갈증이 우리를 앞으로 걷게 만듭니다. 이 여정은 자연스레 우리 내면을
향합니다. 아버지의 집은 저 멀리 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 속 깊이 숨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통합의 여정은 우리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지요.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더욱 목마름을 느끼지만 또한 기쁨도
더합니다. 오늘 하루도 갈증과 기쁨의 변증법이 우리를 걷게 합니다.
“주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당신을 목말라하는 이 영혼 기쁨에
뛰노나이다.”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님의 복음 단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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