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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가해 5월22일 (백) 부활 제5주간 목요일
[수원] 믿음은 이해할 수 없어도 따르는 것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 담당 전삼용 요셉 신부
† 제1독서 : 사도 15,7-21
† 복음 : 요한 15,9-11
★ 모세의 관습을 비유다계 그리스도인들도 지켜야 하는지를 두고 사도
회의에서 베드로가 이렇게 호소한다. 곧, 성령에 따라 주님께서 부르신 다른
민족 사람들도 동등한 제자의 자격이 있으며, 그들에게 멍에를 지우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야고보 역시 이 말에 동감하는 연설을 한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계명을 지켜 당신 사랑 안에 머무르라고
다시 당부하신다. 당신의 기쁨으로 그들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복음).
◈ 오늘의 묵상
어제와 오늘의 제1독서에 나오는 예루살렘의 사도 회의를 통하여 우리는
교회가 의견의 불일치를 어떻게 이겨 낼 수 있는지를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에서 큰 문제가 된 것은 유다계 그리스도인들과 다른 민족 출신의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갈등입니다. 특히 모세의 전통에 따른 계명들을 다른
민족 출신의 그리스도인들도 준수해야 하는지에 매우 첨예하게
대립하였습니다. 유다교 전통에 따라 예루살렘에 형성된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주요 율법의 준수를 요구하였고, 그 중심인물은 야고보 사도였습니다.
그 반면, 바오로 사도의 선교 활동의 무대인 비유다계 민족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율법에서 자유로웠고, 바오로 사도는 이 자유에 큰 의미를
두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 대립을 중재하는 역할을 맡은 셈이었고, 사실
이는 매우 힘겨운 일이었습니다. 긴 논쟁 뒤 베드로는 비유다계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애정과 존중을 담은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야고보 역시
열린 마음으로 동의하면서 답을 찾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관점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쉽게 이해할 수 없으나 우리의 교회
생활에서도 반드시 간직해야 하는 원칙을 사도들의 모습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교회 내의 갈등과 불일치를 이겨 내는 길은 인간적 편의를 위한
타협도, 자존심과 관습의 고집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도들은 진리를
포기하는 태도가 아니라, 오직 서로서로 진심으로 아끼며 짐을 덜어 주려는
사랑으로 화해와 일치를 이루었습니다. 이러한 상호 배려에는 서로를 포기할
수 없다는, 공동체의 일치 정신이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교회의 모습에 대하여 20세기 개신교의 위대한 신학자인 독일의
본회퍼는 『성도들의 공동생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교회는, 약한 자가 강한 자를 필요로 하듯이 강한 자도 약한 자 없이는
존재할 수 없음을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그에 따르면, 약한 자를 무시하는
것은 곧 교회의 죽음을 뜻합니다.
우리가 체험하듯 교회 안에는 다른 의견과 갈등이 있곤 합니다. 중요한 점은
서로가 겸허하고 존중하며 아끼는 마음으로 끈기 있게 일치점을 향하는
것입니다. 그 기준을 찾는 데에는 인간적 확신과 관습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사도들이 그러하였듯 성령의 움직임과 결실을 깨닫고자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5월22일 부활 5주간 목요일(요한15,9-11)
<너희 기쁨이 충만하도록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요한 15,9-11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무슨 일을 하든 억지로 마지못해 의무감으로 하면 기쁨을 갖지 못합니다.
그러나 똑 같은 일을 하면서도 자발적으로 하면 보람과 기쁨이 큽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것을 명령이나 의무에 의해 한다면 진정한
사랑을 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기쁨이 없습니다. 그러나 계명을
내리는 분의 뜻을 알기 위해 또 그분과 하나가 되기 위해 지킨다면 그 의미가
풍요로워집니다. 사실 진정한 사랑을 한다는 것은 그만한 사랑을 받은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은 것을 인식하는 사람이 많이 사랑할 수
있고, 하느님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실제적으로도 이웃의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자기를 먼저 생각하는 부족한 사랑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미 받은 사랑에 감사하고 또 많이 사랑해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지역의 특산물은 복숭아입니다. 복숭아는 나무 가지에
달립니다. 그러나 가지가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닙니다. 나무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나무 자체가 튼실하지 않으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뿌리가 튼튼하고 그 뿌리를 통해 영양분을 충분히 공급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농부의 손에 의해 가지치기를 하고 적과를 하며 다듬어져 더 좋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햇빛과 비가 적기에 주어지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더더욱 나무가 심겨진 땅은 이미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것입니다. 한 알의 열매가 맺어지는 것은 하느님의 섭리 안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우리 인간은 더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무조건 ‘머물러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그들을 위한 당신의
사랑이 선행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아버지께서 당신을 사랑하신 것과
같은 사랑으로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목숨을 내놓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아버지께 받은 사랑은 제자들을 위한
사랑의 기초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아들 예수님께서 받으셨고 예수님의
사랑을 제자들이 받았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제자들 서로 간에 사랑을 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이웃 사람에게로 사랑의 손길을 펴게 되었습니다. 그리해서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요한13,35).
우리 옛 속담에 “부모가 온 효자가 되어야 자식이 반 효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식은 부모가 하는 것을 보고 따라하게 된다는 듯입니다. 하느님과 예수님,
그리고 제자들은 내리사랑 안에 머물렀습니다. 우리도 같은 사랑을 해야
하겠습니다. “아버지의 품 안에는 아홉 자식이 있을 곳이 있지만, 아홉 자식의
어느 집에도 아버지가 있을 곳은 없다.”는 격언이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랑 안에 머물라고 당부하는 것은 ‘당신의 기쁨을 제자들에게
전해 주고 그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기쁨은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만이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충만한 기쁨을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에서 얻게 될 것입니다. 혹 계명을 억지로 지키는 사람은
헛고생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으로 계명을 지키십시오. “마음 속 깊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도 그를 아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채비가 갖추어져 있는
만큼 그는 하느님을 사랑합니다”(디아도쿠스주교).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더 사랑 받는 존재가 됩니다”(작은 거인들에서). 망설이지 말고 사랑을 위한
사랑을 함으로써 주님의 계명을 기쁘게 지키시기 바랍니다. ‘말로나 혀가
아니라 행동으로 진심으로 사랑합시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으며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내가 할 수 있는 것에서 조금만 더 하자.
2014년 가해 5월22일 부활 제5주간 목요일
<너희 기쁨이 충만하도록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요한 15,9-11
고등학생 때 기타를 치면서 친구들과 함께 노래를 부를 때면 빠지지 않고
불렀던 노래가 기억납니다. 바로 비틀즈의 대표곡인 ‘예스터데이(Yesterday)’
입니다. 아마 이 노래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사랑을 받는
명곡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이 곡을 작곡한 폴 매카트니
(Paul McCartney)는 이 노래의 멜로디가 글쎄 어느 날 꿈에서 문득 떠오른
것이라고 말하더군요. 꿈에서 들은 멜로디를 그대로 악보에 옮겨 놓은 것이
명곡 ‘예스터데이’라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저는 폴 매카트니가 참으로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냥 잠자고 있었을 뿐인데 역사상 가장 유명한 곡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것, 얼마나 운이 좋습니까? 그리고 왜 내게는 그런 행운이 없을까
라면서 투덜댔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이러한 행운은 저절로 주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폴 매카트니가 아무
것도 하지 않다가 갑자기 꿈에서 멜로디를 들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계속해서 작사와 작곡하는데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고 하지요. 며칠 밤을
새면서 아름다운 단어와 문장을 고르는데 애썼으며, 그리고 자신의 마음에
드는 멜로디가 나올 때까지 멜로디를 수 백 번도 떼었다가 붙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꿈에서도 그 훌륭한 멜로디를 떠올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어떠한 희생과 노력 없이 갑자기 저절로 주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에서 조금만 더 하자’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이유, 저런 이유를
붙여서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이유들은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하지
못하게 하는 구차한 핑계에 불과한 것이니까요.
주님 안에 머무는 것도 이러한 노력과 희생이 필요합니다. 그냥 주님께서 내게
머무시려고 해도 내가 주님을 받아들이려는 어떠한 노력과 희생이 없다면 내
안에 모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받아들이고 함께 할 때,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지요. 이를 많은 성인성녀의 삶을 통해서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분들은 세상의 기준을 뛰어넘는 참 기쁨의 삶을 살았고, 우리
역시 그 삶을 지향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런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일까요?
아닙니다. 주님을 받아들이는데 최선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뜻대로 살아갈 때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면서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쉽지 않은 길입니다. 그렇다고 포기해야 할까요? 앞서 폴 매카트니가
끊임없는 노력으로 꿈에서까지 영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주님
안에서 큰 기쁨을 누리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가 될 그
날이 올 때까지 ‘내가 할 수 있는 것에서 조금만 더 하자’는 마음으로 힘차게
살도록 합시다.
사랑이란 서로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둘이서 똑같은 방향을 내다보는
것이라고 인생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생텍쥐페리).
남과 다르다면(‘좋은생각’ 중에서)
전설적인 재즈 기타리스트 장고 라인하르트. 그는 바이올린 연주자인
아버지와 댄서인 어머니 밑에서 줄곧 음악을 들으며 자랐다. 가난한 데다 유랑
극단을 따라 이곳저곳을 떠돌았지만 음악이 있어 행복했다.
비극은 그가 열여덟 살 때 찾아왔다. 극단에 불이 나면서 무시무시한 화마가
그를 덮친 것. 그는 왼쪽 팔다리에 심한 화상을 입고 왼쪽 손가락 두 개를
잃었다.
음악은커녕 삶에 대한 의욕까지 잃어 가던 어느 날, 동생이 기타라는 낯선
악기를 선물했다. “형 실력이면 두 손가락이 없어도 분명 좋은 소리를 낼
거야.”
그날부터 기타 연습을 시작했다.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손가락 때문에 기타를
내던지며 울부짖다 또다시 집어 들길 여러 해. 하루에도 몇 번씩 깊은 절망에
빠졌지만 아름다운 기타 선율에 매혹돼 연습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나는 남들과 다르니까, 나만의 연주법을 찾아야 해.’
쉴 새 없이 손을 움직이며 자신에게 맞는 연주법을 찾아 헤맨 그는 마침내 두
손가락을 끌면서 자판을 이동하는 새로운 연주법을 만들어 냈다. 이
연주법으로 유럽 곳곳을 떠돌며 자신만의 음악을 조금씩 완성해 나간 장고
라인하르트. 아픔이 담긴 그의 연주는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준다. 그의 이름을 딴 ‘장고 라인 하르트 상’이 유럽의 권위 있는 재즈 상으로
꼽히는 이유는 그의 땀과 열정, 눈물을 잊지 않기 위함이다.
‘남과 다르다면?’ 좌절하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방법을 찾는 것.
이것이 정답임을 기타리스트 장고 라인하르트는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남과 다른 점에 대해 나는 어떻게 받아들였었나요?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원] 삼용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믿음은 이해할 수 없어도 따르는 것
2014년 가해 5월22일 부활 제5주간 목요일
< 너희 기쁨이 충만하도록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
복음 : 요한 15,9-11
< 믿음은 이해할 수 없어도 따르는 것 >
요즘 개봉중인 ‘트렌센더스’란 영화를 보았습니다. 거기서 주려는 메시지는
‘누군가의 마음 안에 머무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는 것입니다.
천재 과학자 윌은 인간의 뇌를 컴퓨터에 업로드해서 인간과 컴퓨터가 하나로
작동하게 만드는 연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미 어느 정도 인공지능을
지닌 핀(PINN)이란 슈퍼컴퓨터를 만들었습니다. 그녀의 아내 애블린도 윌과
함께 이 세상을 참으로 살기 좋은 곳으로 변화시키고 싶은 열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연구가 성공하면 인간이 컴퓨터 안에 들어가 수많은 정보를 통해
하느님과 같은 엄청난 능력을 지니게 됩니다. 그래서 컴퓨터가 인간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이 연구를 방해하는 인공지능반대단체까지
생겼습니다. 윌은 결국 그들이 쏜 총에 맞아 서서히 죽어가게 됩니다.
윌의 아내 애블린 박사와 윌의 절친 맥스는 윌의 뇌를 인공지능 컴퓨터인
핀(PINN)에 이식하는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윌은 컴퓨터에서 ‘아무도
없나요?’라는 대화를 걸어오면서 자신의 의식이 컴퓨터 안으로 들어갔음을
알립니다. 애블린은 남편이 비록 컴퓨터 안에서지만 살아있다는 것에 너무
기뻐합니다. 그러나 맥스는 그것이 윌이 아니라 본래 있었던 핀이 윌의 흉내를
내는 것일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을 확인도 안하고 인터넷에
연결했다가는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핀이 아닌 윌임을 굳게 믿은 아내 애블린은 맥스를 내쫓고 윌을
인터넷에 연결시켜 모든 인터넷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부여합니다.
2년 뒤 윌은 인터넷상의 모든 컴퓨터를 통제함으로써 엄청나게 진화합니다.
거의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는 의학으로 장애인들을 슈퍼맨처럼 강하게
만들고 오염을 정화시키며 엄청난 세력을 구축해나갑니다.
그러나 애블린도 이젠 서서히 의심이 들기 시작합니다. 마치 총을 맞아도 죽지
않는 군대들을 양산해 내는 것과도 같아 보입니다. 조금 있으면 온 지구를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됩니다. 자신의 심장박동수와 혈압까지도 읽고
있는 컴퓨터를 애블린도 서서히 무서워하게 됩니다. 그것이 예전의 따듯한
남편이 아닌 핀이라는 냉정한 지능컴퓨터일 수 있다고 느끼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자신이 존경하는 한 과학자로부터 ‘도망쳐!’라는 쪽지를
받게 되자 그녀는 자신이 그동안 이용당해 왔다고 확신하게 됩니다.
애블린은 윌로부터 탈출하여 몰래 테러집단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 곳엔 윌을
두려워하는 정부 기관과 맥스까지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힘을 합쳐
걷잡을 수 없이 강대해져가는 윌을 막을 방법을 모색합니다. 힘으로는 윌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이들은 윌이 유일하게 믿는 애블린의 몸에 바이러스를
심어 그것을 치료할 때 컴퓨터에 스며들도록 하는 방법을 씁니다. 물론 그렇게
하면 애블린도 죽게 됩니다. 결국 애블린은 자신의 몸에 바이러스를 심어
윌에게 다시 돌아옵니다. 상처입은 애블린을 치료하려다 윌은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죽어갑니다. 그리고 애블린도 함께 죽어가게 됩니다.
그러면서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처음부터 윌이었음을. 윌은 세상을
바꾸려는 아내의 뜻을 따라 자신의 능력으로 좋은 일만 하려고 했음을.
그러나 바이러스는 이미 컴퓨터에 퍼졌고 윌은 그렇게 아내와 두 번째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의미심장한 말을 던집니다.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두려워해.”
애블린은 이 세상을 바꿔보고 싶었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여 아내의
뜻대로 자신의 능력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바꾸려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자신이 남편을 의심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망쳐버리게 된 것입니다. 남편이
계속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누군가 무엇을 하고
싶어도 그것을 온전히 믿고 받아들일 사람이 없다면 아무 것도 안 될 때가 더
많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당신의 사랑 안에 머물기 위해서는 당신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당신만을 믿고 따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또한
그분 계명 안에 머무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또한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정도까지만 믿고 그 다음부터는 믿지
않습니다. 우리 또한 그렇게 그분 뜻에서 벗어나 나 자신도 죽고 내 안의
그분도 죽일 수 있습니다. 그렇게 그분은 나를 통해 세상을 바꾸실 수 없게
됩니다.
그분이 시키시는 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오른 뺨을 때리면 왼 뺨을
돌려대고, 부자가 되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으니 가진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라고 하시고, 과부가 가진 전부를 봉헌하면
칭찬하십니다. 모든 계명들이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워, 어쩌면 가장 쉬운
수입의 십분의 일을 봉헌하라는 것도 들으려하지 않습니다. 대신 미사에 나와
성체를 영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스스로 믿어버립니다. 우리는 그렇게
명목상으로는 그분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의심하며 그분의
보호에서 스스로 벗어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선생님이 믿고 사랑하는 아이에게는 더 어려운 문제를 풀어보라고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더 어려운 문제, 더 고통스러운
십자가, 더 이해하기 어려운 맹목적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완전히 신뢰하고 그분 계명 안에 머물 줄 아는 이들을 통해 이 세상을
변화시키십니다. 예수님께는 그런 성모님처럼 온전히 받아들이고 끝까지
믿고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모세는 수많은 사람들이 비웃어도
하느님의 뜻을 끝까지 따라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계명을 지키면 결국
그분 보호 안에 머물게 된다는 상징적인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 세상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어차피 믿기로
했으면 맹목적으로 그분 계명을 하나도 어김없이 다 지켜보도록 결심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삼용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 담당 전삼용 요셉신부 -
◈ [기타] 사랑에 확신을 갖고자 합니까?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상대의 사랑에 대한 확신을 원한다면,
먼저 상대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뒤돌아 보아야 합니다.
2014년 가해 부활 제5주간 5월22일 목요일 복음묵상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요한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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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한 확신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상대의 표현도, 그것의 진위를
파악하는 우리의 감각도 늘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사랑을 구하지만, 사랑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해 힘들어 합니다.
더욱이 사랑하는 쪽의 입장이라면 그 안타까움은 더 합니다.
연인 관계라면 상대의 사랑을 끝없이 확인하려는 작업이 자연스럽습니다.
사랑하는 데 쓰는 에너지보다, 사랑을 확인하려는 데 쓰는 에너지가 더
강해집니다. 우리는 왜 사랑에 확신을 가질 수 없을까요?
그리고 우리의 사랑은 왜 변할 수 있는 것일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랑을 해야 하는 우리 모두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불완전한 우리이기에 우리의 사랑도 불완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이라는
말을 쓰면서도 자기 중심이 되어버리고 마는 우리의 모자람은 사랑을 힘들게
합니다.
예수님의 하느님에 대한 사랑 고백은 늘 확신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순간까지도 한결 같은 사랑에 대한 확신이었습니다.
또한 제자들에 대한 당신의 사랑에도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셨기에 가능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답을 구해봅니다. 사랑의 확신은 상대에게서 찾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자신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확신할 수 없다는 말은 내 이기심이 크다는 말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상대가 움직이고 있지 않는다는 발상 자체가 사랑과는 거리를 가집니다.
불완전한 우리는 상대의 반응에 사랑의 의미를 두고자 합니다.
이런 발상은 사랑을 소유의 개념으로 만들어버립니다.
하지만 사랑의 방향은 항상 내 쪽으로부터 흘러가야 합니다.
일방적인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이 서로 지켜야 할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진정으로 사랑을 할 줄 아시는 분이셨습니다.
제자들의 배반 앞에서도, 당신이 마셔야만 했던 죽음의 잔 앞에서도,
당신께서는 진정 사랑했기에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불완전함은 자기가 그린 그림 안에서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상대를 향한 것이 사랑인줄 알면서도 모든 것이 자신을 향하기를 욕망합니다.
사랑에 확신을 갖고자 합니까?
그렇다면 사랑 받는 것이 아닌, 사랑하는 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서울] 하느님의 사랑 안에 살고파
2014년 가해 5월22일 부활 제5주간 목요일
하느님의 사랑 안에 살고파
내가 바라는 대로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사랑인줄로 아는 건 잘못입니다.
사랑을 말하려면 대상과 나와의 관계가 정립되어야 합니다. 정상관계지요.
돈을 사랑해 돈을 뫃으면 과연 인생이 즐겁고 행복하기만 할까요?
돈, 짐승, 식물, 취미 등은 사랑대상으로 인간을 만족시키지는 못합니다.
사람이 사랑을 느끼려면 상대가 사람이거나 그 이상이라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 살고파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게 신앙생활입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요한 15,10)”
- 서울 대 교구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 [서울]여러분이 원하는대로 남들에게 하라.
2014년 가해 5월22일 부활 제5주간 목요일
<너희 기쁨이 충만하도록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 요한 15,9-11
교황 방한 준비위원회를 함께 하면서 많은 문제들이 드러납니다. 실천운동은
어떻게 할 것인지, 자료집의 크기는 어떻게 할 것인지, 수록되는 글들은
어떻게 분류할 것인지, 예산은 어떻게 정할 것인지, 정부와의 협의는 어떻게
할 것인지, 기업의 협찬은 어떻게 받을 것인지, 각 교구에 인원은 어떻게
배정할 것인지, 외부에서 오는 손님들의 숙소와 교통편은 어떻게 정할 것인지,
교황님의 이동 수단은 무엇으로 할 것인지 등입니다. 시간은 점점 가까워지고,
아직 풀어야 할 문제들은 많이 남았습니다. 예전에 103위 시성식과 44차
성체대회를 준비하셨던 분들에게 존경을 드립니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모든
것들이 잘 해결되리라 믿습니다.
초대교회는 몇 가지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점차 늘어나는 이방인 공동체들에
대한 문제입니다. 이방인 공동체는 유대인 공동체와는 다른 문화와 전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언어가 달랐고, 음식이 달랐습니다. 그들의 사고와 철학도
달랐습니다. 유대인 공동체는 이방인 공동체들도 유대인들의 문화와 전통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 공동체는 자신들의 문화와
전통을 쉽게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한국교회에서 초기에 박해의 단초가
되었던 ‘제사논쟁’도 비슷한 문제입니다. 사도들은 예루살렘에 모여서 첫 번째
공의회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명학하게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방인 공동체의
문화와 전통을 그대로 인정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신앙의
토착화’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전해지는 지역의 풍토와 전통에 맞게 토착화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도들은 이렇게 결정하였습니다.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 하느님께 돌아선 이들에게 어려움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선배 사제들은 이런 말씀을 하곤 하셨습니다. ‘새로운 곳에 가게 되면 먼저
6개월 동안 그곳의 전례와 그곳의 사람들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먼저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보고 문제점이 있다면 천천히 고쳐나가야 합니다.
새로운 곳에 가서 전임자들이 하였던 일들은 한꺼번에 바꾸려 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보지 않고 성급하게 자신의 뜻대로 일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는 것을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삶의 기준을 제시해 줍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남들에게 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도회] 관상과 활동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요셉 수도원)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5월22일 부활 제5주간 목요일 사도15,7-21 요한15,9-11
<너희 기쁨이 충만하도록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 요한 15,9-11
관상과 활동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어제 상담을 공부하려는 어느 분에 대한 충고가 생각납니다.
"상담가의 우선적 자질은 공감의 사랑입니다. 이런 기본적 자질인 사랑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하느님과의 대화인 기도가 테크닉이 아니라 사랑이듯이 사람을 대하는 상담
역시 테크닉이 아니라 공감의 사랑입니다.
기도를 잘하는 비결은 사랑뿐이듯 상담을 잘하는 비결도 사랑뿐입니다.
진정 사랑할 때 알고 보임으로 올바른 분별력의 지혜입니다.
관상과 활동 역시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관상에서 흘러나온 사랑의 활동입니다.
그러니 우선적인 것이 사랑의 관상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역시 제가 자주 써드리는 고백성사 처방전의 보속 말씀입니다.
어제의 '내 안에 머물러라.'에서 구체적으로 '사랑'이 첨가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의 샘, 관상의 샘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이
예수님의 샘솟는 사랑, 지칠줄 모르는 사랑의 근거였음을 봅니다.
진정한 사랑, 순수한 사랑은 이런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지금도 주님을 통해 끊임없이 제공되고 있는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바로 이게 관상의 사랑, 관상의 행복, 관상의 기쁨입니다.
우리 모두의 소명은 '사랑의 관상가'임을 깨닫습니다.
사실 눈 만 열리면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우리 존재임을 봅니다.
이를 실감나게 묵상할 수 있는 사랑의 관상시간이 성전에서의 미사, 기도,
묵상시간입니다. 아니 어느 자리에서든 이런 사랑의 관상 훈련은 참으로
필요합니다.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 살 때 비로소 해결되는 영적 배고픔이여
목마름입니다. 10일 간의 피정지도라 하지만 오히려 제가 피정하고 온
느낌입니다.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 지내다 온 기간이었습니다.
추상적인 주님 사랑이 아니라 수녀님들의 공동체를 통한 주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역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은 수녀님들과 함께 미사와
성무일도의 공동전례기도를 바치며 주님 사랑 안에 머물렀던 시간입니다.
"얼굴이 환하고 밝습니다.“
피정이 끝나는 점심 시간, 총원장 수녀님의 말씀에, "저요?“
"신부님도 그렇고 수녀님들도 그렇습니다.“
잠시 멋쩍은 느낌이었지만, 그 말씀을 듣고 수녀님들을 보니 하나하나가
태양처럼 환히 밝게 빛나는 얼굴들이었습니다.
총원장 수녀님은 앞에 보일 듯 말 듯 연초록 바탕에 연노랑 돗나물 꽃과
마가렛꽃 세 송이가 소박하게 꽃꽂이 된 모습을 보며 무엇을 뜻하는 가 저에게
물어봤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사랑의 하느님을,
신망애 삼덕의 하느님의 겸손한 사랑을 상징하는 듯 합니다.“
참 소박하고 겸손한 하느님의 사랑을 상징하는 듯 한, 작은 유리컵의
꽃꽂이였습니다. 말씀의 성보영보 수녀회 총원장 수녀님이나 공동체의 영성을
상징하는 듯 했습니다. 이 또한 관상의 표현, 사랑의 표현입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른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 것이다.“
정태적 관상이 아니라 역동적 관상입니다.
관상과 활동은 하나로 연결되었음을 봅니다. 관상 따로 활동 따로가 아닙니다.
사랑의 관상은 사랑 계명의 실천을 통해 그 진정성이 입증됩니다.
사랑의 미사는 하루의 사랑의 삶으로 확산되어야 하고 하루의 사랑의 삶은
사랑의 미사로 수렴되어야 합니다. 이래야 비로소 온전한 미사, 온전한 관상,
성체성사적 삶의 실현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사랑의 관상, 사랑의 활동에서 샘솟는 순수한 기쁨, 충만한 기쁨입니다.
주님의 참 좋은 기쁨의 선물입니다. 사랑을 통한 관상과 활동의 일치가 기쁨의
샘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관상과 활동의 사랑의 일치가 분별의 잣대입니다.
주님을 닮은 분별력의 대가, 사랑의 대가가 바로 사도행전의 베드로입니다.
베드로의 사랑의 웅변이 감동입니다.
사도의 탁월한 분별력의 지혜가 분위기를 압도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하신 것처럼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시어 그들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정화하시어, 우리와 그들 사이에 아무런 차별도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은 왜 우리 조상들도 우리도 감당할 수 없던 멍에를
형제들의 목에 씌워 하느님을 시험하시는 것입니까? 우리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주 예수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믿습니다.“
백번 지당한 사랑의 분별입니다. 베드로와 바르나바, 바오로의 의견을 충분히
고려한 후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야고보 사도입니다.
주님은 당신 사랑 안에 머물러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의 미사를 봉헌하는 우리
모두를 당신 사랑과 기쁨, 분별력의 지혜로 가득 채워 주십니다.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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