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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가해 5월23일 (백) 부활 제5주간 금요일
[수원] 참 사랑은 '옷'이 되어 주는 것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 담당 전삼용 요셉 신부
† 제1독서 : 사도 15,22-31
† 복음 : 요한 15,12-17
★ 사도들과 원로들은 편지로 사도 회의의 결과를 안티오키아 교회에
전한다. 그 편지에서 비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이 몇 가지 필수 사항 외에는
다른 짐을 질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안티오키아 공동체는 그러한 격려와
배려에 기뻐하였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제자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제자들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이 계명을 실천하면 예수님의 친구가 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우리는 성경을 읽으며 예수님의 복음을 더욱 분명하게 알아들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분이 누구이시고 어떤 삶을 사셨는지 그 어떤 모호함도 없이
우리에게 뚜렷해지기를 바랍니다.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겠다고 다짐하기도 하나 아직은 우리에게 가려진 말씀이라고 믿는
부분이 많습니다. 말씀을 다 알아듣지 못한다고 생각하기에 그 말씀에 대한
주석이나 해설을 찾습니다. 말씀을 잘 설명하는 말들에 감탄하고, 그 말들을
사다리 삼아 말씀의 참뜻을 찾습니다.
그런데 문득 그 말들이 공허한 그림자로 보일 때가 있을 것입니다.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말씀이 우리를 정면으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 체험은 한편으로는 두려운 것입니다. 이제 구경꾼의
시간이 끝났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 순간에 지식의 사다리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자기 자신의 삶과 인격이 뒷받침되어야
복음을 제대로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위대한 영성가이자 장애인들을 위한 '라르슈(방주) 공동체'를
설립한 장 바니에는 복음을 삶으로 읽는다는 것을 『장 바니에의 시보다
아름다운 예수전』 머리말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으로서, 내가 알고 사랑하는 예수님과 나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보여 주고자 이 책을 쓴다. 이 책은 결점과 부족함이
많음에도 자기가 받은 것을 세상에 전해 주고자 하는 보통 사람의 작품이다.
오늘 나는 내게 영감을 주고 내 인생에 거름이 되어 준 복음서들을 사십 년
전에 읽던 것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읽는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살면서 형성되고 변화된 내 머리와 가슴으로 복음서를 읽는다. 이 책은
예수님의 추종자로서 살고자 한 나의 성숙과 미숙에 의하여, 나 자신의
삶에 의하여 잉태된 것이다."
- 매일 미사 -
◈ [청주] 후회없이 사랑하여라. |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5월23일 부활 제5주간 금요일(요한15,12-17)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요한 15,12-17
후회없이 사랑하여라.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으나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사랑은 말이 아니라 행위를 통해서 증거 되어야 하고, 기회는
많지만 실제로 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말하지만
자신을 죽이는 희생의 사랑보다는 자기만족을 위한 이기적인 사랑에 더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자유를 주지 못하고
일방적이며, 상대를 속박할 때가 더 많습니다. 사랑을 이유로 붙잡고
집착하며 기대를 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상처를 주고받으며 후회합니다.
아낌없이 내어주는 사랑 안에서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시어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당신 아들을 보내주셨습니다. 바로 여기에 사랑이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 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15,12-13)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은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신 데서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심한 모욕과 침 뱉음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도 그들을 용서하시고
아버지 하느님께 기도하시는 모습으로 우리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사랑은 없다.’고 선언하시며 당신
친히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벗으로 삼으시고 벗을 위해 목숨을 내
놓으셨습니다. 사실 목숨을 내 놓는다는 것은 모두를 바쳤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미 줄 수 있는 것을 다 주고 마지막 남은 것을 주는
행위입니다.
사랑이란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자기의 모두를 내놓는 것입니다.
자신을 희생할 기회는 끊임없이 주어지지만 지금 놓치면 그 기회는 이미
사라진 것입니다. 다음에 오는 기회는 또 다른 기회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사랑하십시오. 지금 후회 없이 사랑하십시오. 그러나 나의 일방적인
방식으로 하지 말고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사랑하십시오.
너무 많은 사랑을 요구하여 무거운 짐을 지우지 말고, 아무런 구속이나
강요가 없이 자유를 주는 사랑으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이는
날로 기뻐하고 자유롭도다. 사랑은 짐을 모르고 모든 것을 이해하고
무엇이든지 하려고 하기에….”(성녀 젤뚜르다)
진정한 사랑은 사랑하는 이에게 자유를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이 사랑할 수 있게 하려고 자유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자유의 유일한 존재이유는 인간이 스스로 자유롭게 사랑의 노예가 되는 데
있습니다. ” ... 사랑은 “실천에 옮기지 않는다면 잘 꾸며놓은 연극, 그저
생각 없이 입에서 나오는 대로 한 번 해 본 빈말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피에르신부).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으며,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자유를 주는 사랑, 고통을 감당하는 사랑에 기뻐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서로 사랑합시다.
2014년 가해 5월23일 부활 제5주간 금요일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요한 15,12-17
어느 본당에서 미사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신자들에게 성당 마당에서
인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젊은 청년 한 명이 저에게 안수를
해달라고 부탁하더군요. “힘든 일이 있어요?”라고 물었더니, 회사 면접을
보러 가야 하는데 너무 떨린다는 것입니다. 저는 안수를 해 준 뒤에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잘 될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그런데 회사가 자매님을 면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자매님도 회사를 면접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자매님은
일 할 자리가 필요하고, 또 반대로 회사도 일 할 사람이 필요한 것이니까요.
그러니까 자신 있게 면접에 임하세요.”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자신감만
있으면, 면접에서 떨어진다고 해도 나를 필요로 하는 다른 직장을 분명히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유명한 JYP 엔터테인먼트도 한창 대세인 가수
아이유를 몰라보고 오디션에서 떨어뜨렸다고 하지요. 따라서 절대
실망해서는 안 됩니다. 대신 내 가치를 알아봐주는 곳을 아직 찾지 못한
것뿐임을 기억하면서, 자신 있게 살아야 합니다.
솔직히 우리가 정말 포기하는 이유를 잘 따져보십시오. 불가능하다고
말하면서 포기하지만, 사실은 불가능해서가 아니라 불가능할 것 같아서가
아닐까요? 괜히 불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에서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지 않는 것이지요.
내 가치를 잘 알고 계신 주님께서 우리를 뽑아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시지요.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기에 우리를 직접 뽑아 세우시면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실망할 상황이 주어지기도 하지만 그것은 단지 순간적인 실망일 뿐인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신 분이 내 편이 되어 나를 뽑아 세워주시는데 과연
무엇을 실망할 것이며, 과연 무엇이 불가능하겠습니까? 그런데 이 분께서
우리에게 단 한 가지 명령을 내리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께 한없는
사랑을 주시면서도 내리는 명령은 바로 이것이지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너무 어려운 것을 명령하신다고요? 하지만 내가 받은 사랑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더군다나 주님께서는 사랑만 무조건 베풀라고 하지 않습니다. 내
편에서만 하는 사랑이 아닌, ‘서로’ 사랑하라고 하시지요. 과연 어려운
것일까요? 그동안 받기만 하는 사랑에만 익숙했기에 어렵고 힘들다고
지레짐작할 뿐입니다.
서로 사랑합시다. 이렇게 주님의 명령에 충실한 사람만이 주님께서 주신 이
세상의 삶을 더욱 더 자신 있고 힘차게 살아갈 것입니다.
“난 못해.”라는 말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지만, “해 볼 거야.”라는 말은
기적을 만들어 낸다(토머스 J.빌로드).
나만의 답을 찾으며 살아가는 자신감
언젠가 보았던 텔레비전의 광고가 생각납니다. 그래서 얼른 그 광고를
인터넷에서 찾아서 그곳에 나온 자막을 그대로 옮겨 봅니다.
1살: 걸음마가 늦으면 지는 걸까?
4살: 영어유치원에 못가면 지는 걸까?
8살: 반장이 못되면 지는 걸까?
15살: 영어발음이 된장이면 지는 걸까?
26살: 대기업 못가면 지는 걸까?
34살: 외제차를 못타면 지는 걸까?
왜, 남의 생각, 남의 기준으로 살까? 생각대로 해. 그게 답이야.
그렇습니다. 남의 답이 아닌, 나만의 답을 찾으면서 살아가는 자신감이
우리에게 필요할 때입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원] 삼용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참 사랑은 ''옷''이 되어주는 것
2014년 가해 5월23일 부활 제5주간 금요일
<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
복음: 요한 15,12-17
< 참 사랑은 '옷'이 되어주는 것 >
제가 한 여인을 사랑할 때 너무 서둘러서 낭패를 본 기억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좋아져서 빨리 연인관계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사귀자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자매가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연스러운 게 좋은 것 같아요.”
즉, 지금의 나의 모습이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직 준비가 안
되어있는데 너무 빠르게 나의 속도로만 몰아가려 했던 것입니다. 밥도 함께
먹었고 영화도 함께 보고 커피도 함께 마시는 것이 사랑인 줄 알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관계에 있어 ‘자연스럽지 않음이 폭력’입니다. 어떤 사람은 여인이
만나주지 않는다고 해서 그 집에 찾아가 피해를 주기도 합니다.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데 억지로 자신의 뜻대로 하려고 하는 것이
폭력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사랑의 모델이 그리스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당신 뜻대로 무작정 몰아가는 분이
아니십니다. 과연 그리스도는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던 것일까요?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자신들의 몸이 부끄러워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들을 가렸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부끄러움이 가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무 뒤에 숨어야 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하느님 앞에 정의롭게 설 수 없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구원은
우리 노력의 힘이 아닌 것입니다. 스스로 자신을 구원하려고 계단을 쌓았던
것이 바벨탑입니다. 그러나 야곱의 사다리처럼 하늘에서 내려오는
구원만이 우리를 살릴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당신 앞에서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는 인간을 당신 집에 두실 수
없으셨습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하셨는데, 이렇게 자신들의 죄 때문에 하느님 앞에서 당당하지 못한 상태가
바로 죽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당신 집에서 쫓아내면서도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가려주시기
위해 ‘가죽옷’을 해 입히십니다. 가죽옷은 어떤 동물의 죽음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우리들의 부끄러움이 가려지지
않으면 우리는 하느님을 직접 대면할 수 없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은 이와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뜻을 따라 당신
자신의 가죽으로 우리를 덮어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어린양을 잡아 그 고기는 먹고 그 피로는 자신들의 집을 붉게 하여 죽음의
천사가 자신들의 집에 해를 끼치지 못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의 희생을 입은 집은 죽음의 천사가 하나도 해하지 않고 넘어갔다고
해서 그것을 ‘파스카’라 하고 이것이 ‘미사’로 이어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먹고 그분으로 옷 입은 이들만이 하느님을 만날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마치 야곱이 자신의 몸에 털을 두르고 에사우가 받아야 할 축복을 받게 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상대를 나의 몸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죽어
상대의 몸에 맞추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뜻에 따라
우리 몸에 맞추어지신 것처럼, 우리 또한 그리스도의 명에 따라 우리 자신을
이웃들의 몸에 맞추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이렇듯 우리 몸의 옷이
되어 이웃이 당신 대신 축복을 받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가끔은 남을 강요해서 나에게 맞추려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내가 이웃의 옷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진정 우리는 누군가를 나의 옷으로 삼으려고 하는지,
혹은 내가 누군가의 옷이 되어주려 하는지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삼용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 담당 전삼용 요셉신부 -
◈ [기타] 열매를 맺으시라 합니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우리는 아름답게 살기 위해서 이 세상에 왔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2014년 가해 5월23일 부활 제5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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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나무든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꽃을 피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열매를 맺으시라 합니다. 그리고 그 열매는 썩어
없어질 열매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도 남기십니다.
어떤 나무든 태어나면서 정해진 꽃을 피우고 정해진 열매를 맺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그 모습에 의해 다양한 꽃을 피울 수 있고, 열매의
종류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큰 눈으로 볼 때, 삶의 꽃과
죽음의 꽃 두 가지로 나뉠 뿐 입니다.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열매를 정하시지 않습니다. 각자가 피우고 싶은 꽃을
피우고 그에 상응하는 열매를 맺고, 그리고 그 열매에 책임을 지라 하십니다.
우리는 어떤 꽃을 피우려 노력하고 있고, 어떤 꽃을 피워놓고 어떤 열매를
기대하고 있을까요? 우리의 각자의 삶이 피우고자 노력했던 꽃, 그래서
피워진 꽃, 그 꽃은 어떤 꽃일까요? 어느 누구의 삶도 한 권의 책으로
담기에는 너무도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꽃이냐,
감동적인 책이냐 하는 문제는 한결 같이 각자의 삶의 태도에 담겨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누구나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를 원할 것입니다.
누구나 감동적인 책을 쓰고 싶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감동적인 책을 쓴다는 것이 그리 녹녹하지 않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꽃을 피우십시오.
아름다운 꽃을 피우십시오.
아름다운 삶으로 아름다운 꽃을 피우십시오.
그렇다면 열매는 아름답게 따라옵니다.
아름다운 꽃은 상처를 입어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꽃은 시들어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좋은 열매를 기대할 수 있고, 영원을 희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름답게 살기 위해 이 세상에 왔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서울] 서로 주고받을 만한 선물
2014년 가해 5월23일 부활 제5주간 금요일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요한 15,12-17
서로 주고받을 만한 선물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노력할 게 참 많다고 봅니다.
서로 사랑해야할 사람들인데 사람 사랑보다 동물사랑에 간혹 빠지네요.
그뿐인가요. 재물사랑, 이기적 사랑, 자기 몸 사랑 등 참 다양합니다.
우는 이 달래주고 굶는 사람과 나누며 슬픈 이 곁에 있을 때 보람 느껴요.
받은 만큼 돌려주고 나눈 만큼 돌려받으며 힘을 내고 고마움에 눈물 나요.
희생과 보답으로 서로 주고받을 만한 선물 말고 세상에 뭐가 더 있을까요.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 서울 대 교구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 [서울] 서로 사랑하십시오.
2014년 가해 5월23일 부활 제5주간 금요일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요한 15,12-17
지난 수요일 새벽에 교구장님께서 개성공단으로 가셨습니다. 저는
교구장님과 함께 가시는 분들을 배웅하기 위해서 교구청 현관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기자들이 교구장님을 취재하면서 사진을 찍었고,
그 사진에 뒤에서 배웅하던 저의 얼굴도 나왔습니다. 마침 뉴스시간에 그
소식을 보았던 자매님이 제게 카톡을 보내왔습니다. 오랜만에 저를
보았다면서 안부를 전해 왔습니다. 방송의 힘이 크다는 것을 새삼
알았습니다. 남에게 잘못하고 살면 안 된다는 것도 실감했습니다.
강의를 하고 있는 부제님들에게 ‘하느님은 여전히 말씀하신다. 그러니
들으십시오.’라는 책의 번역을 부탁했습니다. 수정을 해서 곧 번역된 책이
나올 예정입니다. 수고해주신 부제님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부제님들도
자신들이 번역한 책이라서 더욱 애정을 가지는 것 같습니다. 자신들의 땀과
노력이 스며든 책이기 때문입니다. 강론과 설교에 대한 교재는 많이 있지만
본인들이 직접 번역한 책에 더 많은 손이 갈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도들은 이방인 공동체에 대해서 관대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신앙인이 되는 것은 유대인들의 관습과 전통을 따라야 할 의무까지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는 결정입니다. 이것은 초기 유대인 공동체들에게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포기하는 결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결정은
교회 발전의 발판이 되었습니다. 이방인 공동체들은 자신들의 전통과
문화를 유지하면서 예수님을 믿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말씀하십니다. ‘나는 여러분을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습니다. 이제 나는 여러분을 친구라고 부르겠습니다.
여러분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겠습니다.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십시오.’ 제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마음이 뭉클했을 것
같습니다. 훈련을 마치고 처음으로 자대 배치를 받았을 때를 기억합니다.
사제 서품을 받고 첫미사를 봉헌했을 때를 떠올립니다. 300명의 작은
본당이지만 첫 본당신부로 부임했을 때가 생각납니다.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나의 일이었을 때의 기분은 다르기 마련입니다.
오늘 아침,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바로 우리들 각자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도회] 평생공부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랑-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요셉 수도원)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5월23일 부활 제5주간 금요일 사도15,22-31 요한15,12-17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요한 15,12-17
평생공부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랑-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평생공부가 하느님 공부, 사랑 공부입니다.
인생은 졸업이 없는 사랑의 학교입니다.
평생 사랑을 공부해야 하는 평생학인인 우리들입니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 우스개 소리 같지만 진리입니다.
사랑도 공부해야 합니다. 문제는 사랑에 있고 답도 사랑에 있습니다.
사랑 공부에는 끝이 없습니다.
어찌보면 우리는 사랑 공부에 있어 '영원한 초보자'라는 생각도 듭니다.
'하느님 자비에 결코 실망하지 마라'는 분도 성인의 말씀입니다. 결코 내
부족한 사랑에 결코 실망하지 말고 끝까지 주님께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사랑공부에 지치거나 지루해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은 복음 말씀을 중심으로 평생 배워야 할,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답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 안에 있습니다.
첫째, 깨끗한 형제애의 사랑입니다.
주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은 깨끗한 사랑, 끝없이 깊고 넓은 사랑입니다.
집착없는 사랑, 자유롭게 하는 사랑, 행복하게 하는 사랑, 생명을 주는
사랑입니다. 바로 이게 주님께 배워야 할 깨끗한 사랑입니다.
이런 주님의 사랑을 부단히 배워갈 때 비로소 우리의 이기적인 사랑, 편협한
사랑은 끊임없이 정화되고 확장되어 주님의 사랑을 닮아갑니다.
바로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은총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말씀하시며
공평무사한 형제애를 강조하시며, 분도 성인 역시 당신 수도승들에게
깨끗한 형제애의 사랑을 강조하십니다.
둘째, 형제들의 짐을 가볍게 해주는 사랑입니다.
깨끗한 형제애의 사랑은 구체적으로 형제들의 불필요한 무거운 짐을
가볍게 해주는 사랑, 자유롭게 해주는 사랑으로 들어납니다.
하여 삶은 짐이 아니라 선물임을 깨닫게 해 줘야 합니다.
오늘 제1독서인 사도행전의 사도들과 원로들의 결정이 이의 모범입니다.
"성령과 우리는 다음의 몇가지 필수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곧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과 피와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불륜을 멀리 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것들만
삼가면 올바로 사는 것입니다."
깨끗한 형제애에서 나온 이런 분별의 지혜요, 이 격려 말씀에 자유로워
기뻐하는 안티오키아 교회 공동체 형제들입니다.
셋째, 목숨을 내놓는 사랑입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은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말씀하시며 주님
친히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당신 친구들인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신
주님이십니다.
이에 응답하여 친구인 주님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은 무수한
순교성인들입니다. 바로 사도행전의 바르나바와 바오로가 그 모범입니다.
'바르나바와 바오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입니다.'
형제사랑의 절정을 보여주는 두 사도에 대한 묘사가 감동적입니다.
말 그대로 주님의 친구들인 두 사도입니다.
넷째, 주님의 친구가 되는 사랑입니다.
위의 주님이 원하시는 사랑을 실천할 때 이런 사랑이 우리를 주님의 친구로
만듭니다.
'주님의 친구'라는 칭호보다 자랑스럼고 영예로운 칭호는 없습니다.
주님의 친구가 된 사람보다 존엄한 품위의 사람은 없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른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아버지에게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우리를 가슴 벅차게 하는 말씀인지요.
주님의 친구가 되었는데 더 이상 바랄 것이 무엇이겠는지요.
주님을 닮아 이런 이타적인 깨끗한 사랑, 목숨을 내놓는 사랑의 실천에
항구할 때 주님의 친구가 되고 주님과의 우정도, 일치도 더욱 깊어져 갈
것입니다.
다섯째, 주님께 뽑힌 이들로서의 사랑입니다.
세레성사로 주님께 뽑혀 아버지의 자녀가 되고 예수님의 형제이자 친구가
된 우리들입니다. 이게 우리의 건전한 자랑이요 긍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뽑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뽑아 세우셨습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을 배우고 실천해 열매을 맺어 우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어야 합니다.
이런 사랑 실천 없이는 뽑힌 이들로서의 우리의 열매도 없습니다. 열매
가득한 충만한 인생이 아니라 열매 빈약한 허무한 인생으로 끝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런 사랑 실천에
항구할 수 있는 은총을 주십니다.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 [인천] 어떤 소개말을 들으십니까?
2014년 가해 5월23일 부활 제5주간 금요일(사도행전 15장 22~31절)
<성령과 우리는 몇가지 필수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지으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사도 15,22-31
오늘 독서에 보면 사도들과 원로들이 바르나바와 바오로를 안티오키아에
보내며 그 둘을 공동체에게 이렇게 소개합니다.
바르나바와 바오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입니다.
정말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확신해도 좋다는 소개인 거 같은데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를 소개하는 사람은 나를 어떻게 소개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잠시 생각해 보았는데요.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김 신부는 말이 없습니다.
지난 본당에 있을 때 엠티나 연수나 캠프 때문에 어떤 본당에서 오면
신부님도 같이 오실 때가 있는데요. 강론이나 인사말을 하실 때 저에
대해서 착한 신부다.. 좋은 신부다.. 하는 표현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건
아마도 제가 하도 말이 없어서 저에 대해서 잘 알 수 없고, 모르다보니 딱히
할 말이 없어서 달리 표현하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 어떤 신자 분이 저에게 ‘강론 할 때는 이야기를 잘
하시는데 평소에는 너무 말씀이 없으신 거 같아요..’ 하는 이야기를
하셨는데요. 그 비슷한 이야기를 전에 있던 본당에서도 들었던 거
같습니다. 초반에 한 자매님이 저에게 ‘신부님은 강론 때만 이야기 하는 거
같아요...’ 하시더라고요.
그리고 지금 있는 본당으로 발령 나기 전에 주교님과 동기 신부들이 식사를
한 적이 있는데요. 주교님이 저에게 자주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기현아~
너는 왜 이렇게 말이 없냐~ 이번에 가는 지구에서는 다른 신부님들과 잘
지내봐~’ 라는 이야기를 하셨었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면서 문득 사도 바오로가 티모테오에게 ‘너를 신뢰하지만,
너의 수동적이고 부끄러워하는 성격을 극복해야 한다..’ 고 가르치고
권고하는 느낌의 모습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면서 제 주위의 신자들이
하는 이야기도 저에게 말을 하지 못하는 어떤 장벽들을 부수어 버리길
바라는 누군가의 뜻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이나 학년이나 낯선 상황이라는 벽을 넘어 친근한 한 마디, 따뜻한 한
마디 말을 건넬 수 있는 사제가 되기를 바라는 거 같습니다. 그 요구에 따라
할 수 있는 일을 조금씩 해 나가다보면 언젠가 누군가 저를 소개할 때 ‘그
신부님.. 평소에 참 따뜻하고 친근한 말들을 많이 하셔..’ 하는 말을 들을 수
있겠죠?
여러분도 한 번 생각해 보시면 좋을 거 같습니다. ‘나와 가까운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소개할 까.. 나는 어떤 소개의 말을 듣고 싶어 하나..’ 듣고 싶고
들어야 할 소개말이 있다면, 그런 말을 들을 수 있도록 필요한 훈련들을
평소에 잘 수행해야겠죠? 오늘 하루 그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실천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어제 본당 특강이 있었다.
미사도 있어서 셋이서 같이 미사를 드렸는데, 예상한 이야기를 또 들었다.
“신부님 밖에서 일을 너무 많이 하시는 거 아니에요~”
혼자 미사 할 때는 괜찮은데 다른 신부님이랑 같이 있으면
흑인 같아 보이나보다..^^;
- 인천 교구 밤송이 김기현 세례자 요한 신부님의 매일 묵상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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