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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번 국도 변에 차세대 선지식들이 모여 있다.”
선에 관심있는 분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36번 국도는 서해안 대천항에서 시작하여 청주를 거쳐 충주에서 소백산맥을 가로지르고, 영주, 봉화를 지나 태백산맥을 넘어 동해안 울진으로 이어진 도로입니다. 이 근처에 근래 이름 높은 스님들로는 봉화 각화사 고우 스님, 봉화 축서사 무여 스님, 영주 부석사 근일 스님, 그리고 충주 석종사 혜국 스님 등이 계십니다. 이분들은 모두 앞으로 조계종의 선풍을 이어갈 분들로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법회와 설법』에서는 두 분은 이미 소개해 드렸으나 두 분은 아직 모시지 못했는데 두 분 다 서로를 추천하시면서 사양하셨습니다. 혜국 스님과는 몇 년 전부터 인연이 있었고 여러 차례 찾아뵙고 후학을 위한 일이니 응락하여 주십사 간청드렸으나 거듭 거절하시다가 이번 여름에야 애처롭게 보신 듯 자비심으로 응해 주셨습니다.
혜국(慧國) 스님께서 계시는 충주 석종사는 10년 전만 해도 폐사지였던 곳을 3년 전부터 본격적인 불사에 들어가 지금은 중부권에 우뚝한 도량으로 중창되고 있습니다. 스님은 해인사로 출가하여 일타 스님을 은사로 득도하였습니다. 젊은 수좌 시절 해인사 장경각에서 발심으로 소지(燒指) 공양을 하신 이래 태백산 도솔암에서 수년간 장좌불와 정진을 하였고, 이후 해인사, 상원사, 송광사, 칠불암, 봉암사 등 제방 선원에서 정진하며 일생을 수행의 본분사에 매진하여 왔습니다. 10·27법난 직후 잠시 제주도 관음사 주지 소임을 6개월 정도 살았으나 곧 다시 산중으로 돌아가 정진하였고, 1980년 후반에 제주도에 남국선원을 개원하여 무문관까지 운영하고 계십니다.
지금은 한반도의 중심인 중원 땅 충주에 10만평 도량의 대작불사를 하고 계십니다. 석종사는 충주 동남쪽의 금봉산을 배산으로 한 남향 도량으로, 무척 장엄하였습니다. 대웅전은 이미 낙성하여 지난 5월에 점안식을 하였고, 지금은 선방과 시민선방을 짓고 있습니다. 조만간 선원 불사까지 회향되면 석종사는 충주 일대에 가장 큰 규모의 도량이자 선풍을 떨칠 또 하나의 이름 있는 선원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 스님, 후학들을 위해 출가 인연을 좀 들려 주십시오. 그런 게 뭐 도움이 되나요. ...... 나의 6촌 형님이 스님이셨어요. 내가 중학교 입학할 때 어떤 충격을 받아 절로 가게 되었는데 그 스님께서 제 부모님을 설득해서 저를 해인사로 보냈어요. 그 때는 성철 큰스님은 해인사 들어가시기 전이고 청담 스님이 주지였을 때죠. 해인사에 가니까 워낙 어려서 그런지 노스님들께서 친아버지처럼 할아버지처럼 자상하게 대해 주셔서 더 오래 있게 되었지요. 1962년이었습니다. 그 때는 가야에서 해인사로 올라가는 차가 없었어요. 걸어서 다녔지요. 그리고 해인사에 전기가 안 들어 왔을 때예요. 내가 간 다음에 자체 발전기를 가동해서 아침저녁 밥 먹을 때만 잠깐씩 썼지요. 내가 출가하여 해인사로 간 것은 큰 발심을 해서 간 것이 아니었어요. 중학생이 될 열세 살짜리 콩만한 것이 무엇을 알았겠어요. 그런데 해인사 가니까 그렇게 좋았어요. - 그럼 중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바로 출가하여 해인사로 오셨군요? 나는 중학교도 못 다니고 나중에 검정고시를 보아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대학에 갔어요. 중학교는 처음 입학시험 보던 날하고 합격자 발표하는 날, 그 때 밟아 보고 건너 뛰었지요. 하루도 못 다닌 거지요. 그런 얘기는 쓸데없는 얘기예요.
- 그러면 해인사 큰절에서 행자 생활을 하신 겁니까? 해인사 행자가 힘들다고 하는데 그 때 당시에는 어땠습니까? 1962년 종단 정화 직후네요. 그렇지요. 해인사에서 열세 살부터 행자 생활을 한 거지요. 절에서 어른 스님들이 저를 그렇게 귀여워해 주셨어요. 특히 지월 스님같은 자비보살이 계시어 감화를 받았지요. 그 은덕이 큽니다. 내 사형이신 혜인 스님이 제주도 분이세요. 그 인연으로 일타 스님을 은사로 모시면 좋다고 권해서 찾아뵙고 스님 상좌가 되고 싶다고 하니까 좋다고 그러시면서 기꺼이 받아 주시대요. 은사 일타 스님 이야기 - 은사이신 일타 스님(日陀, 1919~1999) 이야기를 좀 해주십시오. 속가의 아버님을 포함한 가족, 일가 친척 40여 분이 모두 출가한 진기록을 남긴 분이신데, 참 인정이 많으신 자비로운 스님이셨죠. 은사 스님의 일가 친척이 출가하신 이야기는 워낙 유명하지요. 이분이 어느 정도 인정이 많으냐 하면 이건 관계없는 얘기인지 몰라도 기록해 두면 좋지요. 내가 송광사 3년 결사를 끝내고 성철 스님께 인사를 드리고 은사 스님이 계시는 지족암에 갔더니 “혜국 수좌, 좀 앉아 보지” 해서 앉으니까 “자네는 3년 한다고 하면 3년을 마치는데 어쩌면 사람이 그렇게 강단이 있을 수 있는가? 이제 3년 결사를 했으니 이번 해제 때는 두 달만 나의 문지기 노릇 좀 해 줘. 누가 찾아오면 안 된다고 딱 잘라 내보내 줄 수 있겠는가?” 그러세요. 그래서 “스님, 그것은 제가 자신이 있습니다”하고 말씀 드렸죠. “그럼 내가 이제부터 2달간 묵언을 할 거야. 내가 묵언할 테니까 자네가 문을 지키며 밑으로 내려가지도 말고 위에서 나하고 같이 밥 먹고 같이 살자”고 하셨어요. 나도 3년 결사를 해서 두 달 쉬고 싶었고 스님도 모시고 싶었는데 잘 되었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서울하고 부산에서 가까운 신도 일곱 분이 스님을 뵈러 지족암에 왔어요. 스님이 6일째 묵언하고 계셨는데 나는 스님이 묵언 정진 중이니까 뵐 수 없다고 그냥 가라고 했지요. 그런데 서울에서 온 보살님이 자기가 새벽 3시에 출발해서 왔는데 얼굴이라도 뵙고 가야지 안 된다고 막무가내였어요. 내가 성질이 좀 급합니다. “이번에는 내가 전권을 위임받았으니까 안 된다면 안 되는 줄 알아야지 보살들이 말이 많냐”고 고함을 질러 쫓아 보내 버렸어요. 그런데 스님이 문을 열더니 그 광경을 보셨어요. 그리고는 점심을 차려 먹는데 안 드시는 거예요. “스님! 점심 안 드시겠습니까?”하고 내가 물으니 “그렇게 신도들 마음 아프게 해 놓고 목구멍에 밥이 넘어가?” 그러시더라고요. 남 아프게 해 놓고 당신이 밥을 못 먹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섰으니까 “어떻게 수행자가 그렇게 뻔뻔스러울 수가 있느냐, 전화라도 해서 마음을 풀어줄 생각은 안 하고 그렇게 서 있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해서 할 수 없이 스님 당신이 절대 안 된다고 빼 놓은 전화 코드를 꽂아서 보살님에게 전화를 했더니 그분이 “스님! 오히려 신심이 나고 기분이 좋고 환희심이 났습니다” 그러셔요. 그래서 “보소, 우리 스님한테 그 말씀 좀 해 주소” 하고는 스님께 “전화를 바꿔 달라는데요” 하니 거기에서 뭐라고 하는지 스님 얼굴이 확 펴져요. 전화를 끊고는 “혜국이 희한한 재주가 있네. 기분이 억수로 좋단다. 밥 차려라.” 그러신 분이에요. 은사 스님이 혜국 스님을 당신 은사가 환생한 분으로 믿은 이야기 - 은사 스님께서 스님을 당신 은사였던 고경 스님의 후생이라고 그런 말씀을 하신 게 있더라고요? 처음에는 긴가민가했는데 그 전에 은사께서 “저 아이는 우리 스님을 닮았어, 우리 스님을 닮았어” 그런 얘기를 들어도 나는 귀넘어 듣고 은사 스님께서 그냥 하신 말씀이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1970년이였을 거예요. 당시 해인사 선방이 극락전이었어요. 은사 스님께서 극락전 선방에서 결사를 하고 계셨는데 성철 큰스님께서 나하고 11명 정도 뽑아서 퇴설당에 철조망을 치고 몇 년 나가지 말고 정진하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며칠 지나자 다 도망가고 결국 나 혼자 남았어요. 그 때는 성철 스님이 백련암에 안 계시고 큰절에 내려와 계셨어요. 그랬는데 퇴설당에 혼자 앉았으니까 책을 보고 싶어요. 그것도 법화경을 보고 싶었어요. 그 때가 봄이었는데 장경각에 가서 절하다가 와서 앉아서 정진을 하는데 졸음은 쏟아지고 화두가 안 들려요. 그래서 성철 스님은 어렵고 우리 은사 스님한테나 물어 봐야지 하다가 억지로 며칠을 어째어째 하는데 ‘아이고, 은사 스님도 성철 스님도 몰래 어디 가서 뒷방에서 소리소리 지르면서 경이나 실컷 봤으면…...’ 하는 망상을 폈어요. 그렇게 망상을 펴면서 앉아서 졸고 있는데 갑자기 어깨에서 노장님 한 분이 앞으로 툭 튀어 나오더라고요. 졸면 망상이 오거든요. 망상과 졸음은 같이 와요. 꾸벅꾸벅 조는데 튀어나와 앉더니 “내가 어디서 너를 봤지?” 하셔요. 근데 우리 노스님 진영에서 보았던 모습이에요. 그러시더니 옛날 끈으로 묶은 누런 금빛 나는 뚜껑을 한 법화경 한 권을 탁 내 앞에 내놓으면서 “전생에도 글을 안 보고 참선을 한다고 원을 세우더니 익혀 놓은 게 그것 밖에 없어서....... 책이나 봐라, 강사나 되거라!”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어찌나 서릿발 같던지 그 때 눈을 번쩍 떴는데 한동안 눈 앞에 책이 있더라고요. 누런 뚜껑인데...…. 나도 모르게 ‘우리 노스님이다’ 그리고는 그 길로 은사 스님께 쫓아갔어요. 극락전 선방에 가서 “스님! 우리 노스님이 쓰던 법화경 좀 주십시오.” “왜?” “스님, 죄송하지만 한번만 꺼내 주십시오.” 내가 너무 진지하게 말하니까 노장님이 책장에서 꺼내 주시며 “이거다” 하셨습니다. “스님, 이건 아닙니다.” “왜?” “이거 말고요. 책은 이것인지 몰라도 누런 뚜껑입니다.” 그러니까 나를 이렇게 쳐다 봐요. 쳐다 보시더니 “별일 다 있네…….” “스님, 왜요?” “내가 누워서 이 책을 보다가 졸아서 촛불 때문에 파란 뚜껑으로 바꾼 것은 이 세상 천지에 나 하나 밖에 모르는데 네가 어떻게 누런 뚜껑을 아느냐?” “스님, 알겠습니다. 저 갑니다.” 그러고는 그냥 바로 와 버렸어요. 어쩌면 노스님인지 모른다 싶고 그런데 다른 말은 안 들리고 그렇게 책 안 보고 참선한다고 원을 세우셨다는 얘기를 우리 스님한테 들었거든요. “내가 죽으면 바다 건너 태어나서 아무도 모르는 데 가서 참선만 할 거다” 라고 돌아가실 때 우리 노스님이 그랬다고 하더라고요. 노스님 이야기 - 노스님께서 강사 출신으로 입적하실 때 다음 생에 태어나면 참선만 할 거라고 말씀하셨다고요? 강사 정도가 아니라 경봉 스님, 구하 스님, 월하 스님 전부 그분 밑에서 배웠다지요. 우리나라 제일 강사로 통도사 스님이셨죠. 일제시대에 통도사 주지를 하라고 하니까 걸망지고 차기 주지가 나올 때까지 토굴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법전 임고경 스님인데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동원 스님인가 하는 상좌가 “스님, 경만 보실 겁니까?”하고 억지로 금강산 마하연 선방으로 모시고 갔는데, 갔다 오자마자 “내가 이제부터 책을 보나 봐라. 이놈의 ‘강사(講師)’ 얼어죽을 강(?)자다” 그러면서 선방에만 다닌다고 하셨는데 머리가 아파 누우셨대요. 우리 스님이 충청도 공주 분이라서 “충공아!”하고 불렀다는데 조금만 머리가 나아지면 “충공아, 내가 이번에 다시 회복만 해 봐라. 금강산에 올라가서 면벽관심으로 일평생을 보내리라” 하셨대요. 그런데 결국 못 일어나고 돌아가시게 되니까 “야야, 나는 찾아오는 사람들이랑 이름 때문에 공부를 못했으니 다음 생에는 물 건너 아무도 모르는 곳에 태어나서 진짜로 참선만 할거다” 하고 돌아가셨대요. 그런데 이게 우연의 일치지만 그분이 8월 13일에 태어나셨는데, 나도 8월 13일이에요. 그분 돌아가시고 1년인가 뒤에 제가 태어났지요. 제가 은사 스님 가시고 난 후, 몇 달을 정신을 못 차렸어요. 제가 은사가 가고 나서 우는 스님들을 보면 늘 그랬거든요. “수행자가 자기 마음을 관리 못하고 눈물을 남 앞에서 보여서 저게 무슨 수행자냐!”라고……. 그런데 그게 남 말 할 게 아니에요. 몇 날 며칠을 울었는지 산에 가서 울어도 울어도 끝이 없어요. 나중에는 며칠 현기증이 날 정도로 스님이 그립더라고요. 그렇게 그리운 여자가 있으면 못살지요. - 은사 스님이 노스님의 후생이라고 믿으셨다면 참 대단한 인연이네요. 다음 생에서도 인연이 이어지고…. 은사 스님은 또 만난다고 했어요. 그런데 시기가 언제인가 하면 아까 전화 바꿔 줬던 그 보살님이 돌아가시고 나면 꼭 우리 스님 상좌 된다고 하니까, 우리 스님이 말년에 “보살이 그렇게 오래 살아서 나하고 나이가 비슷해지는데 나도 혜국이한테 올지 모르니까 보살도 혜국이 한테 오소!” 그런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하셨어요. 그러니까 그런 것을 믿으셨습니다.
- 인연을 기다리셔야겠네요. 쓸데없는 얘기예요. (슬며시 미소지음.) 사춘기의 방황과 성철 큰스님의 야단, 그리고 재출가 - 그러시다가 학교를 다니라고 해서 다시 제주도에 가서 고등학교를 다니신 거예요? 그렇게 된 게 아니고 해인사를 가니까 그 때 누군지 기억은 잘 안 나는데 초등학교 졸업하고 왔다고 하니까 “이 사람아! 학교를 다녀야지 그런 식으로 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당신 상좌의 검정고시 강의록을 보게 하더라고요. 그 때가 1965년인데 그걸 다 보고 나니까, 그 상좌 스님이 시험을 보러 간다고 하더라고요. 나도 어디 갔다 온다고 핑계를 대고 같이 갔는데 그 스님은 안 되고 나는 합격해 버렸어요. 그래서 중학교를 건너뛰고 고등학교 입학 자격증을 얻어 놨어요. 그러다가 어느 때인가 해인사로 수학여행 온 학생들이 있었어요. 그 때 내 나이 또래였는데 교복을 입은 모습이 그렇게 좋아 보여요. 내가 사춘기였을 때니 나도 학교를 더 다니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혼자서 제주도로 갔어요. 제주도에서 빈 절을 찾아 거기서 학교를 다닐 생각으로 돌아다녔는데 양진사가 비었더라고요. 그래서 거기에서 고등학교를 다녔지요. 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서울로 올라가 성북동 정법사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성철 큰스님한테 “혜국이가 서울에서 대학 다닌다”는 얘기가 들어가서 “이놈의 자식 내려오라!” 해서 내려갔다가 혼나고 해인사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사춘기 때에 그렇게 해서 몇 년을 보내버린 셈이지요. 그래 가지고 1968년경에 성철 스님께 불려가 혼이 난 거예요. 그 때 무슨 생각이었는지 해인사로 가지 않고 1968년 겨울인가 용화사 선방으로 갔어요. 그래서 다시 돌아와서 있었는데 은사 스님이 내려오라고 해서 내려왔다가 그렇게 성철 스님과 인연이 시작된 거지요. 성철 스님의 준엄한 경책과 소지(燒指) 공양 - 해인사로 내려오셔서 소지공양을 하신 인연을 좀 들려 주십시오. 해인사로 내려가니까 그 때서야 성철 큰스님이 받아들이대요. 처음에는 지금 종정 스님 계시는 퇴설당에서 정진을 했어요. 그런데 한 3년 해도 화두가 안 되요. 아까 망상 중에 노스님 친견하고 법화경을 보았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게 그 때 화두 공부가 안될 때 이야기예요. 그래서 하루는 성철 큰스님께 찾아가서 공부가 안 된다고 하소연을 하였지요. “스님, 도저히 안 되겠습니다. 저는 글을 봐야겠습니다. 학자의 길을 가렵니다.” 그랬더니 노장님이 “이놈의 새끼 공부 좀 하는 줄 알았더니……” 하시면서 대뜸 죽비를 들어 보이더니, “보이나?” “예, 보입니다.” “무엇으로 보노?” “눈으로 봅니다.” “눈 어디 있노?” “이마에요.” “너 분명히 눈으로 본다고 했나?” “예, 눈으로 본다고 했습니다.” 갑자기 불을 꺼 버리셨어요. 그 때가 밤 12시 반쯤이라 캄캄하기 이를 데가 없었지요. “보이나?” “아니요.” “망할 놈의 새끼야! 아까 눈으로 본다고 했는데 눈 어디 있나?” “여기 있습니다.” “있으면 보여야 할 거 아니냐. 그러면 눈으로 보는 게 아니지 않느냐?” “스님! 캄캄하니까 안 보이는 것 아니겠습니까?” “고양이 새끼나 부엉이나 올빼미는 캄캄할수록 잘 보이는데 너는 고양이 눈만도 못하다. 그 눈으로 글을 봐? 무엇으로 보는지도 모르면서 글을 본다고? 고양이만도 못한 이 놈의 새끼, 패 죽인다.” 그러시면서 죽비로 한 대 치더라구요. 캄캄한데 노장님 눈에 빛이 나면서 고함을 지르며 죽비로 치니 소름이 쫙 끼치데요. 그거 안 당해 본 사람은 몰라요. 깜깜한데 언제 팰지 아니면 어떻게 될지 소름이 끼치더라고요. 그래서 거기에서 진짜 도인이란 다르구나 했죠. “스님!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글을 보든 참선을 하든 부처님께 물어 봐서 해라. 하루에 5천배씩 절을 하면서 부처님께 물어 봐라!” 그런 일을 당하고 난 뒤에 부처님께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하루 5천배씩 하는데 장난이 아니에요. 절이 그렇게 잘 돼요. 신심이 났지요. 그 날 저녁 혼나고 나서 다음 날부터 절을 시작을 했어요. 장경각에서 하루 5천배씩 삼칠일 그러니까 21일 동안 절을 하는데, 회향이 다가올 20일째 되는 날 그렇게 신심이 복받쳐 올라와요. 그래서 나도 은사 스님같이 세세생생 정진해서 성불하겠노라고 부처님께 다짐하는 소지(燒指)공양을 해야겠다는 발심이 났어요. 세 손가락에다 천을 감싸고 기름까지 다 준비해서 연비를 하려는데, 그 때 장경각을 지키는 장주(藏主)가 운범 스님이었어요. 야경을 돌 때 지나가면서 “여기에서 뭘 해?” 그러시더라고요. 그래서 처음 삼칠일에는 못했어요. 다음에 또 하루 5천배씩 시작을 해서 삼칠일 두 번째 회향날에 연비를 했어요. 삼칠일 5천배와 소지(燒指)공양 - 아, 두 번씩이나 삼칠일 5천배를 하시고 회향날 부처님에 대한 믿음과 세세생생 정진하여 깨치겠다는 발심을 다지기 위해 소지공양을 하셨군요? 처음부터 공양을 하기 위해 원을 세우고 하신건가요? 처음부터 공양하려고 한 건 아니었어요. 처음 삼칠일 동안 절하면서 은사 스님께서도 하셨는데 나도 공양해야 되겠다는 마음이 절실하게 나더군요. 18일째인가 그런 마음이 들어서 20일째 하려고 했는데 못하고, 다시 5천배를 시작해서 회향날 했지요. 그런데 하루 5천배씩 두 번이나 절을 한다는 놈이 어느 날 없어졌거든요. 나중에 보니 탄 냄새도 나고 하니까 연비했다 그래 가지고 성철 스님이 “장경각에서 연비를 하다니 미친놈 아이가. 그러다 불나서 국보 다 태우면 어쩌려고?” 하시면서 그놈 오기만 하면 때려 죽이라고 했다고 하대요. 장경각에서 불을 내는 연비를 못한다는 건 불문율인데 그걸 어겼으니…….
- 그래도 성철 스님이 참 좋아하셨겠습니다. 공부 안 된다고 하더니 그렇게 발심을 하여 연비를 했으니……. 성철 스님이 좋아했고 그건 다른 사람도 알아요. 그런데 우리 스님은 당신도 연비를 했으면서 그 소식을 듣고 아무 것도 안 드셨답니다. 연비한 날이 해제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인데 3월 1일이에요. 손가락 세 개를 불 태우고 나오니까 부어오르는데 태우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더니 그게 그렇지 않더라고요. 뼈가 앙상하게 남는데 진짜 태울 때는 견뎠는데 다 태우고 나니까 죽겠어요. 건드리면 온몸에 전율이 와서 건드리지를 못해요. 장경각에서 밤 1시에 연비가 끝났어요. 아무도 몰랐지요. 태운 곳을 헝겊으로 묶고 걸망 싸서 짊어지고 해인사를 내려오는데 밤 1시에 홍류동쯤 오니까, 내 착각이었는지 하늘이 분명히 맑았고 별이 총총했는데 비가 확 쏟아지대요. 그 때 비를 흠뻑 맞으며 내 업장이 다 씻어져 내려가는 것 같았어요. “나는 새로 태어났다” 그렇게 고함을 지르면서 걸어 내려오는 데 다섯 시간인가 얼마나 걸었는지 몰라요. 어디서 차가 오더라고요. 손을 흔드니까 태워 줘요. 대구 가는 차예요. 손 때문에 어떻게 남에게 보일 수도 없고 죽겠어요. 어디 마땅히 갈 데는 없고 통증은 더 심해져 갔어요. 할 수 없이 내 아는 신도라고는 야단맞고 간 그 보문성 보살님뿐이었어요. 그분 집을 은사 스님 심부름 가느라고 서너 번 가본 적이 있어서 거기로 갔는데 거짓말 같이 그 보살님이 “스님, 연비하셨지요?” 그러더라고요. “스님이 연비를 하고 하늘로 훨훨 뭘 타고 올라가는 걸 봤다”고 거짓말 같은 얘길 하더라구요. 태백산 도솔암으로 가다 - 그 보살님도 보통 분이 아니네요. 그분 대단했지요. “스님, 들어오지 마시고 잠깐 기다리세요” 하더니 그 길로 병원에 데려 가더라고요. 병원에 가니까 타다 남은 손가락이 여기저기 형편이 없었어요. 두 달정도 병원에 입원해야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도망다니는데 그럴 수도 없고 두 달 동안 어떻게 병원에 갇혀 있겠어요. 신심이 뻗칠 대로 뻗쳐서 두 달이면 견성하겠다고 그렇게 자신이 있었고 꼭 될 것만 같아요. 그래서 대강 타다 남은 손가락 뼈를 잘라 내고 소독을 하여 약을 바르고 붕대로 싸 두었어요. 새벽 2시쯤에 모두 잠이 들어 아무도 없대요. 다시 바랑을 싸서 태백산으로 향했어요. 은사 스님께서 당신께서 태백산에서 정진하신 것을 자랑삼아 말씀하시고는 “너도 꼭 태백산 도솔암에서 정진해 보거라” 하신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태백산으로 도망을 가니 또 난리가 났대요. 병원에서는 자기가 책임져야 된다고, 죽을 지도 모른다고……. 그러거나 말거나 태백산 들어가서 그 길로 생식을 했는데 그렇게 하니까 그게 염증이 나지 않게 했나 봐요. 그런데 꿰맨 실을 빼내야 되는데 뭐 마땅한 도구가 없어 망치로 못을 두들기고 숫돌에 갈아서 그렇게 해서 빼다가 두 개는 살이 찢어져 아파서 그냥 내버려 뒀거든요. 그 때는 뭐 죽음 같은 것은 두렵지 않았으니까 꿰맨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었더니 실이 살 속에 있다가 한 3년 만에 나오더라고요. 손목 위로 다 나와요. 거짓말 같지요.
- 본래 태백산 도솔암은 은사이신 일타 스님이 정진하신 곳으로 유명하지 않습니까? 그 때 도솔암에서 혼자 정진하셨습니까? 혼자 있었지요. 도솔암 밑에 백련암도 있고, 그 밑에 홍제사가 있는데 비어 있었어요. 도솔암에 가니 겸무 노스님이 계셨는데, 내가 가서 “같이 살겠다”고 하니까 노장님이 젊은 사람이 손을 다쳐 묶어 가지고 왔는데, 그 때 내가 사람 같지 않았어요. 손을 묶어 가지고 소리를 지르고, 보이는 게 없어서 환장을 하겠고, 공부는 안 되고…. 노장님이 저러다가 홧김에 밤에 돌멩이 들고 달려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셨다고 나중에 그래요. 그래서 그 노장님이 밤 사이 간다온다 말씀도 없이 가 버리셨어요. 나는 그게 죄송해서 나중에 제주도 남국선원에 노장님을 위해 집을 지어 6년 동안 모신 사연이 있어요. 지금은 영주쪽 어디에 계시는데 율사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율사일 거예요. 정진도 정말 열심히 하시고 그 노장님이 도솔암에 있다가 내가 발발대니까 이틀 있다가 무서워서 못 있겠다고 사람 죽인다며 도망가 버렸어요. 그래서 영락없이 혼자 있게 되었어요. 생식과 장좌불와, 그리고 성철 스님의 지도 - 도솔암에서 여러 가지 체험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체험이라기보다도 처음부터 공부 길을 모르니까 발버둥이고 방황이에요. 성철 큰스님이 눕지 않고 정진하는 장좌불와를 하라고 했거든요. 그 때 삼칠일 5천배씩 하고 장좌불와를 하라고 했는데 나는 연비하고 태백산 도솔암으로 도망간 거예요. 도솔암을 간 그 날부터 장좌를 시작하고 솔잎 뜯어 먹고 가루를 만들어 먹고, 쌀을 씹어 먹고 하는데 쌀을 오래 씹으니까 이빨이 뾰족뾰족해져요. 아침에 일어나 보면 방바닥에 침이 흘러 여기저기 굳어 있고 진짜 죽고 싶어요. 그런데 손가락까지 불에 태워서 스스로 병신을 자처해서 여기까지 와서 도대체 이게 뭔가 싶어요. 그리고 무서워요. 왠지 그렇게 무섭고 공부가 잘 되면 누가 철퇴로 한방 갈겨 버릴 것 같고 ……. 망상을 피우는 거예요. 나중에는 열이 나기 시작하는데 그 때는 화두는 둘째고 제일 궁금한 게 성철 큰스님은 10년 장좌하는데 안 졸았을까, 이렇게 안 꼬부라졌을까, 키도 나보다 크고 허리도 긴데 정말 안 꼬부라졌을까였어요. 별의 별짓을 다 해도 꼬부라지니까 들어간 지 다섯 달 만인가 여섯 달 만인가에 열불이 나서 새벽에 일어나서 뛰쳐나와 곧장 해인사로 뛰었어요. 머리는 긴 채로 가니까, 그 때 마침 스님께서는 해인사에 계시대요. 바깥에서 듬직한 지팡이를 짚고 계시길래 땅바닥에 절을 세 번 하고 물었어요. “스님! 장좌불와하실 때 졸았습니까, 안 졸았습니까?” “야, 내가 목석이가?” ‘아, 스님도 졸았구나!’ 하고 다시 하직 인사하고 돌아서서 그 길로 은사 스님이 계신 지족암으로 가려는데 “이놈아! 천장에 밧줄을 묶어 놓고 목을 묶으면 될 거 아니냐” 그 말을 듣고는 은사 스님께 들러 인사 드리고는 다시 태백산으로 돌아왔어요. 딱 그 한 마디 물어 보고 ……. 나중에 알았는데 곧바로 우리 은사 스님을 불렀답니다. 부르더니 “혜국이 잘 해 줘라! 혜국이 공부할 거다.” 은사 스님이 “스님, 왜요?” 물으니 “너는 알 거 없다. 공부할 거다.”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참 단순하고 우스운 얘기죠. 장좌불와해도 조니까 열불이 나서 스님은 졸았나, 안 졸았나 확인하고 스님도 졸았다는 걸 확인하고는 냅다 뛰어 태백산으로 돌아갔으니…. 성철 큰스님이나 은사 스님 모두 좋아했대요. 다시 태백산 도솔암으로 돌아와서 천장에 밧줄을 묶어 턱에 걸어 놓으면 밑으로 안 쳐지니까 노장님이 그렇게 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직접 해 보니까 그게 아니에요. 되지를 않아요. 가자마자 천장에 밧줄을 묶어서 했는데 끄덕끄덕 하니까 목살이 벗겨지기 시작해요. 걸리면 화두는 간 데 없고 “악, 악, 노장 해 보지도 않고…….” 도저히 효과가 없어요. 그래도 그렇게 애쓰니까 조금 안정되기 시작하고 하다 보니까 열은 내렸어요. 공부는 마찬가지로 안됐지만. 그래서 성철 스님 뵈러 갔을 때 “노장님, 해 보지도 않고 말하신거죠?”, “스님, 생식을 오래 했는데 어떻게 드셨길래 이빨이 견뎌냈습니까?”, “생쌀을 어떻게 잡수셨습니까?” 물어 보고 올 걸 정말 잘못했다 싶더라구요. 그래서 6개월 만에 다시 한번 큰스님을 뵈러 갈 계획을 세웠어요. 그 때는 산에서 먹을 게 없으니까 약초를 팔아 쌀을 샀어요. 잠이 올 때마다 뒷산에 올라가서 당귀, 백출, 천마 등 한약재가 될 약초를 캐서 6개월간 모았다가 짊어지고 영주장이나 춘양장에 가서 팔아서 생쌀과 생콩을 사서 먹었거든요. 그래서 약초를 짊어지고 가서 팔고 성철 스님께 가서 물어 보기 위해 다시 해인사로 갔어요. 성철 스님의 생식 지도 성철 큰스님은 늘 해인사에 계셨으니까 가서 정식으로 삼배를 하니, “와? 뭐 때문에 왔노?” “스님! 밧줄로 진짜 해 봤습니까?” “안 해 봤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와?” “여기 보십시오, 벌겋게 되었잖습니까? 보십시오.” “하하하! 그러면 말이야, 내 발우 하나 줄테니까 발우를 머리에 올리고 하거라!” 그러시고는 철발우를 하나 내 주시대요. 그러면서 생쌀 얘기를 또 물었죠. 그랬더니 “미련한 놈의 새끼야, 내가 그렇게 미련하나? 발우에 담아 물에 불려서 묽어진 다음에 먹는 거지, 누가 생쌀을 먹냐? 그리고 콩을 그냥 먹으면 어쩌느냐, 솔잎은 가루로 먹는 게 아니라 썰어서 먹는 기라!” 그렇게 장좌할 때 머리에 철발우를 이고 해 보라는 말씀과 생식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듣고서 다시 태백산으로 돌아왔지요. 그리고는 가르쳐 주신대로 솔잎을 고무줄로 감아서 사각사각 썰으니 꺼끌꺼끌해서 안 넘어갈 것 같은데 가루보다 훨씬 잘 넘어가요. 희한해요. 잠 올 때마다 써는데 잠이 오면 어째서 어째서 하다가 방이 크지 않으니까 방 한쪽이 솔잎 향기로 향기로워요. 그거 보다가 잠 오면 썰어 놓고 한 숟가락씩 먹었어요. 그리고 성철 스님 얘기가 만일 가루로 하려면 콩을 같이 넣고 빻으면 절대 비리지 않고 목에 걸리지 않는다더라구요. 그건 해 보셨어요. 딱 맞아요. “생콩을 물에 담갔다가 솔잎하고 같이 넣어 갈아 먹어라, 대추랑 같이 먹으면 떫지 않고 좋다.” “스님! 대추가 어디 있습니까?” “응, 대추가 없구나.” 실제로 대추하고 같이 먹으면 절대 떫지 않아요. 솔잎이 보들보들해요. 그런 걸 다 가르쳐 주셨어요. 노장님께서도 진짜로 해 보고 와서 달려들어 물어 보니까 그렇게 좋으셨던 거예요. 생식은 배우니까 좋았어요. 먹을 것은 자리가 잡혔어요. 그런데 이 장좌가 문제예요. 철발우에 물을 받아 머리에 이고 화두 하라고 해서 수건을 동그랗게 해서 하는데 이것도 노장님이 안 해 보신 거예요. 수건을 크게 동그랗게 하면 졸지만 않으면 하루 종일 떨어지지 않아요. 그런데 졸다가 까딱하면 딱 떨어져서 우당탕 물을 엎지르죠. 어떤 때는 몇 분 사이에 열 몇 번씩 떨어져요. 죽겠어요. 조는 거, 안 조는 거 알아보는 데는 세상 없는 법이에요. 또 하고, 또 하고 어떤 때는 졸다가 그래도 또 하고, 또 하며 몇 달이 흘렀어요. 별짓을 다 했지만 진전이 없어요. 포기할 생각이 저절로 났어요. 나는 이 공부는 어려운 사람이구나! 은사 스님 말을 듣고 참선을 시작했는데 글 공부를 이 정도 했으면 벌써 우리나라 수준급에 들어갔을 텐데……. 우리 은사 스님 말을 들어서 아닌가 싶기도 하고, 나는 참선은 도저히 안 될 사람이 아닌가 싶은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어요.
- 주로 졸음, 수마 때문에 그랬습니까? 졸음 때문에…. 잠이 말도 못해요.
공부인이 생식을 하는 이유 - 생식을 하면 공부에 어떤 도움이 되는지요? 생식하는 이유는 된장, 간장 필요 없지, 소금 필요 없지, 국 끓일 필요 없지, 반찬이 필요 없어요. 그냥 옆에 갖다 놓고 떠 먹으면 되니까 시간적으로 엄청나게 절약되지요. 밥을 해 먹으려면 하루에 서너 시간을 투자해야 해요. 국 끓여야지, 반찬 한두 가지라도 해야 먹게 되지요. 생식은 정진하는 자세 그대로 옆에 놓고 그냥 떠서 먹으면 되니까 시간적인 여유가 벌써 하루에 3분의 1을 벌어요. 그게 첫째 조건이라고 봐요. 그리고 밥을 지어 먹으면 반찬을 또 어떻게 해 먹어요. 참기름이 어디 있으며, 간장이 어디 있어요. 생식은 쌀가루만 있으면 거저먹는 거니까 …. 독초를 먹고 죽음을 경험하다 그러다가 별 공부 재미 없이 두 번째 봄이 왔어요. 아침에 하도 배가 고파서 풀잎을 뜯어 먹었지요. 이 세상에서 제일 먼저 나오는 풀이 산삼하고 초오(草烏)예요. 산삼은 영약이고 초오는 독약이에요. 영약하고 독약은 같이 나와요. 나는 그 때 그런 걸 몰랐지요. 파랗게 올라오길래 그냥 뜯어 먹는데 혀가 따끔따끔하고 확확 쏘대요. 아주 독하대요.
- 초오요? 초오, 풀 초(艸)에 까마귀 오(烏)자를 쓸 거예요. 독초예요. 그런데 옛날 사람들은 선식을 믿었어요. 성철 스님이 생식하려면 독하건 쓰건 떫건 한 구멍만 넘겨라 그랬거든요. 독해도 한 구멍만 넘겼지요. 그게 믿음이 가요. 한 구멍만 넘겨라 하면 옛날 사람들은 한 구멍을 넘겨요. 그런데 요즘 사람은 믿지 않아요. 무조건 한 구멍만 넘겨라 한 구멍 넘겨야 생식한다 그러기에 뜯어 먹으면서 한 구멍을 넘겼는데 조금 있으니까 목구멍이 끊어지는 것 같아요. 죽겠는 거예요. 그런데 소리 질러도 누가 들어줄 사람이 있어야 소리를 지르지요. 아무도 없으니까 사람 살려, 사람 살려 하다가 다리가 뒤로 넘어가더라고요. 다리가 뒤로 넘어가서 엎어졌어요. 다시 한번 죽어 보면 그런 경험을 해 볼 수 있을까 ……. 엎어지는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이렇게 죽는구나 싶었죠. <다음 호에 계속> |
첫댓글 연두님! 귀한 글 주셔서 감사합니다...._()()()_
혜국스님의 긴 법문 아주 짧게 잘 읽었습니다.... 연두님! 감사드립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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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