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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5월 31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 방문 축일
[수원] 사람보다 먼저 방문 하신 분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 담당 전삼용 요셉 신부
† 제1독서 스바 3,14-18
† 복음 루카 1,39-56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은 성모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잉태하시고,
친척이며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인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것(루카 1,39-56
참조)을 기념하는 날이다. 5월 31일을 축일로 정한 것은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3월 25일)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6월 24일) 사이에
기념하기 위해서다. 성모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것은 바로 이웃
사랑의 실천이다. 이러한 이웃 사랑은 위대한 두 인물이 만나는 자리가 된다.
★ 스바니야 예언자는 예루살렘의 재건을 노래한다. 이제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에 내리신 판결을 거두시고 원수들을 쫓아내시며 백성 한가운데에
계신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때문에 기뻐하시고 사랑으로 그를 새롭게
하실 것이다(제1독서).
★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자 엘리사벳 태 안의 요한이 뛰놀았다.
마리아는 하느님께 감사하는 찬미가를 노래한다. 하느님 계약의 약속이
비천한 자신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니 한 해의 가장 아름다운 시기를
제대로 지내지 못한 채 보내는 아쉬움이 먼저 들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무엇이 부족해 이렇게 아쉬운지는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가끔 산책도 했고,
동네 집들 담장과 아파트 단지 화단만 해도 꽃이 만발하는 시절이니
꽃구경하지 못한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햇볕도 마음껏 즐겼고, 공원에서
열리는 이런저런 축제도 둘러보았습니다. 모임이 많은 시기였으니 지인들과
만나는 반가운 자리도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그 좋은 것들이 그저 스쳐 지나가거나 흘러가 버린 듯한 씁쓸함을
이 화창한 날씨에 떨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저 스스로도 궁금합니다.
사람 마음이란 본디 아름다운 시기나 좋았던 때가 지나갈 때 감사하기
보다는 잡아 두지 못한 안타까움이 앞서는 법인가요? 아니면 이 좋은 때에
저만 행복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숨어 있기라도 한 것일까요? 왜 사람들은
행복한 시간에 굳이 상실의 그림자를 보는 것일까요? 행복한 순간이
흘러가야 또 다른 행복한 순간이 오는 것이 이치일 텐데, 그걸 믿지 못하기
때문일까요?
이러한 생각에 잠시 머물다가 구약 성경 「코헬렛」의 한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행복한 날에는 행복하게 지내라"(7,14). 현자가 이렇게
권고하는 것을 보니 좋은 것을 그늘진 마음 없이 즐기기가 말처럼 쉽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좋은 것을 누리면서도 기뻐할 줄 몰라서, 행복한 순간에도
그것을 잃을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앞서는 사람들에게 오늘 복음은 더없는
치유제가 될 것입니다. 저도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을 찾아가는 이 장면을
떠올리며 봄날의 난데없는 서글픈 감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만남'을 보고 있습니다.
아니, 그 만남에 초대되는 특권을 얻었습니다. 유다 시골의 소박한 두
여인이 얼마나 기쁨과 감사에 넘쳐 있는지, 그들이 얼마나 행복한지 헤아려
보십시오. 이제, 두 사람의 만남의 순간에 깊이 들어가 봅니다. 화창한
봄날에 느끼는 기분 같은 기쁨이 어떻게 두 사람의 마음에 영원히
간직되는지를 잠시나마 묵상해 보십시오. 좋았던 순간에 매달린 채
사라지는 것을 미리 두려워하는 것과는 다른 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
길이 어떤 것인지는 한번 찾아보십시오. 그리고 기쁨과 슬픔을 느끼는
자신의 마음을 그 길에 비추어 보십시오.
이 오월의 마지막 날, 아름다운 꽃을 가만히 바라보며 산책하는 우리의
발걸음이 엘리사벳에게 다가가시는 성모님의 발걸음과 닮기를 바랄
뿐입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믿음으로 행복하기 /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토요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축일 (루카1,39-56)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 루카 1,39-56
믿음으로 행복하기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음성지구 성모님의 밤 행사를 하게 됩니다. 국가의
안녕과 세계평화를 기원하면서 시가지 행렬에 이어 밤 미사를 봉헌합니다.
그동안 매괴성모님을 모시고 지구성당을 순례하며 기도하였고 오늘 마음을
모아 정성을 봉헌합니다. 촛불을 봉헌하면서 자신을 녹아내려 세상에 빛을
밝힐 수 있기를 소망하고 아름다운 꽃을 봉헌하면서 꽃처럼 예쁜 삶을
다짐하게 됩니다. 성모님께 드리는 멋진 노래와 사랑의 마음을 담은 시
낭송이 가슴에 젖어 매일같이 성모님을 기억하게 되기를 기원할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어머니와 함께하는 가운데 어머니를 통하여 우리의
모든 바람이 주님께 전구되고 가슴에 담았던 아픔과 시련의 상처들이
치유되기를 기도합니다.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첫
기적이 성모님의 청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이루어주셨듯이 오늘 우리에게도
성모님의 전구를 통하여 모든 소망이 열매 맺기를 기도합니다.
일상 안에서 누군가를 찾아갈 수 있는 마음을 지닐 수 있고 또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만나서 끝까지 기쁨을
나눈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도와달라고 부탁을
하지 않았는데도 실컷 도와주고서는 그것으로 끝나면 좋은데, 나중에
고맙다는 인사를 제대로 받지 못하였다고 서운한 감정을 드러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차라리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구지 스스로 해 놓고는 서운한
감정을 지니고 화로 가득 채우는 것이 우리의 어리석음입니다. 그러나
만남을 위한 노력은 그 자체가 보상이고 기쁨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마리아는 서둘러 유다 산골에 있는 한 동네로 갔습니다.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습니다. 그것은
이웃 사랑의 실천입니다. 그리고 둘은 배속에 든 세례자 요한과 함께
기쁨으로 가득 찼습니다. 사실 엘리사벳은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인 이라고
손가락질을 받던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임신을 하였고 더욱이 마리아의
방문에 성령을 받아 외쳤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그러자 마리아가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 보셨기 때문입니다….” 하며 찬미의 노래를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당신이 비천한 여종이라는 사실,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겸손을 지니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는 일은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위대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 두 여인은 참으로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석 달 가량이나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서로가 통하지 않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정에서 ‘손님이 오실 때 반가운 손님,
떠나실 때 더 반가운 손님’이라고 합니다. 결국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으며
행복한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믿음과 사랑 안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체험할
때 풍요로워 지는 것입니다.
누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까? 루카복음 11장 27절 -2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이 말씀은 성모님께서 “모든 여인들 가운데 가장 복되신 분”이라는 것은
예수라는 훌륭한 아들을 낳아서 젖을 먹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행복이란
그렇게 하면 행복해진다는 말씀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 자체가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무엇이 이러이러 해서 행복하다면 그 행복은 무엇이
저러저러해질 때 없어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행함으로써 복되었듯이 우리도
주님의 말씀을 믿고 행하는 것이 곧 행복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러저러한
조건과 환경이 마련되어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주님 안에
있다는 자체가 행복의 순간임을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미사를 봉헌하고
있는 지금 이시간이 더없이 행복한 시간입니다. 주님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시고 마리아를 통하여 큰일을 하셨듯이 오늘 우리의
부족함도 굽어보시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시리라 믿습니다.
따라서 이 시간 무엇보다도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던 성모님의 믿음을 간직할 수 있는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길
바랍니다. 베르나르도 성인은 “성모님을 통하여 은총을 구하십시오.
성모님을 통하여 반드시 얻을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우리에게
든든한 후원자가 계시다는 것을 기뻐하고, 준비된 마음 안에 우리의 모든
바람을 성취시켜 주시길 희망합니다. “성모님의 일생은 사람의 기림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다만 하느님의 뜻에 맞기만을 원하셨습니다”(성
암브로시오). 오직 주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사는 것으로써 행복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옛날 한국에는 고려장 풍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먹고 살기가 힘들고 그래서
부모가 나이가 많이 들면 깊은 산속에 모셔다 놓고 그냥 돌아오는 것입니다.
한 아들이 늙은 어머니를 지게에 짊어지고 깊은 산 속으로, 산속으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지게 위에서 나뭇가지를 계속해서
부러뜨려 놓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이 어머니에게 무엇을 하시느냐고
물으니 ‘네가 늦게 내려가다가 길을 잃을까봐 그런단다.’하셨답니다.
당신을 버리는 아들이지만 아들에 대한 어미의 사랑은 더욱 애절하기만
합니다. 바로 이런 어미의 사랑이 우리 어머니 성모님의 사랑입니다.
성모님은 우리 한사람, 한사람의 마음을 헤아리십니다. 우리의 허물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바람을 아들 예수님께 전구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기적을
오늘 우리에게도 이루도록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성모님을 통하여 모든 것을 예수님께로 향할 수 있다는
믿음을 새롭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모님이 생각하는 것을 생각하고
그분께서 바라신 것을 바라고 그분께서 하고자 하시는 바를 행하고
그분께서 지향하시는 바를 지향하십시오. 그분의 마음으로 사랑하고 거기에
견주어 마음을 성찰하고 그분을 닮지 않은 것이면 무엇이나 마음에서
몰아내십시오. 왜냐하면 예수님 안에 있기 위해서는 먼저 성모님 안에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을 통하여 모든 것을 예수님께로! 예수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성모님께로!(복자 마르첼로 심파냐). 그리하여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2014년 가해 5월31일 복되신 동정 바리아의 방문 축일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 루카 1,39-56
언젠가 어떤 할아버지와 이런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이 할아버지께서는
젊었을 때 아들딸들에게 이런 말을 자주 하셨다고 해요.
“나는 늙어서 절대로 자식 의지하지 않겠다. 우리들은 우리끼리 잘 살
테니까 너희들도 굳이 연락하려고 들지 말고 스스로 알아서 잘 살아라.”
그래서 자녀들과 함께 살지 않고 부부만 서로 의지하면서 살고 있었지요.
처음에는 좋았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외로워지더라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찾아오고 전화도 자주 해줬으면 좋겠는데 명절 때 외에는 좀처럼
연락 한 번 하지 않더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한번은 가족 모임에서 아들이
친척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하더래요.
“우리 부모님께서는 우리들 오는 것을 별로 좋아하시지 않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희 자식들에게 절대 의지 않겠다고 또 연락도 하지 말라고
일찌감치 선포하셨다니까요. 뭐 저희야 편하죠.”
이제 와서 “내가 그때는 잘 몰라서 그랬어. 이제는 자주 찾아오고 전화도
자주해라.”라고 말할 수도 없는 상황이 되었다면서, 함부로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하시더군요.
자기 자신에 대해서 큰 소리를 치는 사람을 종종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 큰
소리대로 되던 가요? 그렇게 호언장담을 했지만, 이 말이 공허한 말이 되는
경우가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우리 인간의 부족함과 나약함을 기억하면서,
내가 뱉어내는 말과 하고 있는 행동들 모두에 있어서 겸손함을 잃어서는 안
됨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겸손함을 마치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겸손하다는 것을 알리려고 하는지 무엇인가를 충분히
할 수 있어도, “저는 못해요.”라고 부정부터 하지요. 그러나 겸손은
무조건적인 부정이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겸손은 용기와 짝을 이룰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행동하는 용기를 표현하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겸손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이런 측면에서 진정으로 겸손하신 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을 잉태했다는 사실에 교만할 수도 있었지만
엘리사벳을 직접 찾아가는 겸손을 보여주십니다. 또한 마리아의 노래를
통해 자신의 비천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믿는다는 겸손을 표현하시지요.
성모님께서는 자기 자신의 지위가 높아졌다는 생각을 갖지 않으십니다.
또한 비천한 신분과 위치를 보면서 ‘못 한다’고 하느님의 일을 부정하지도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있어서 불가능한 것이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자신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용기를
표현하시기에 진정으로 겸손하신 분이셨습니다.
이 겸손을 우리 역시 배워야 할 것입니다. 괜히 허세만 부리는 모습을
버리고 또 무조건 할 수 없다는 부정적인 생각 역시 버리고, 내 자신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다는 용기를 갖춘 겸손한
사람이 되도록 합시다.
행복은 물건의 많고 적음이나 가격의 높낮이에 있지 않아요. 우리 눈이
평범한 것을 얼마나 귀하게 볼 수 있느냐에 달렸지요(와타나베 가즈코).
좋은 모범을 본 우리, 이제 우리 역시 좋은 모범을 보입시다.
어느 날, 한 초등학교 선생님이 학생들을 가르치며 칠판에 글을 쓰고 있는데
한 아이가 뒤에서 큰 소리로 이렇게 외쳤답니다.
“선생님! 안 보여요. 대가리 좀 비켜주세요.”
선생님은 너무나도 당황했지요. 그래서 그 아이를 불러서 ‘대가리’라는 말을
함부로 써서는 안 된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이상하다는
듯이 이렇게 말하더래요.
“집에서 우리 엄마 아빠는 대가리라고 말씀하시는데요?”
집에서 엄마 아빠로부터 늘 듣던 말을 한 것뿐이었지요.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대가리’라는 말을 쓰면서 잘못 되었는지를 몰랐던 것이고요.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늘 좋은 사랑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모범을
직접 보여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그 모범을 따라서 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범을 따라 사는 우리의 모습을 또 다른 누군가가
보고 그대로 따라 살기를 바라시는 것이지요. 이렇게 모든 이들이 사랑의
모범을 따를 때, 그때가 바로 이미 왔지만 아직 완성된 하느님 나라가
완성된 순간이 될 것입니다.
나는 과연 사랑의 모범을 잘 실천하고 있나요?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사람보다 먼저 방문하시는 분
2014년 가해 5월31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 방문 축일
<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
복음 : 루카 1,39-56
< 사람보다 먼저 방문하시는 분 >
1989년 미국의 심리학자 캘러먼과 루이스가 눈 맞춤의 힘을 밝혀내기 위해
한 가지 실험을 하였습니다. 한 번도 서로 만나보지 못한 남녀 48명을
모집하여 두 그룹으로 나누었습니다. 남녀 짝을 잠시 만나본 다음 서로에
대한 첫 인상이 어땠는지를 알아보는 실험입니다. 그런데 다른 한 그룹에는
2분간 조용히 서로의 눈을 바라보게만 하였습니다.
결과는 이렇습니다. 특별한 지시가 없던 그룹은 남녀 사이에 아무런 변화나
반응이 없었습니다. 반면 2분간 서로의 눈을 바라본 그룹은 대부분 서로에
대해 호감이 증가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눈을 마주치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설레었어요.”
“가까이서 보니 그녀의 눈이 참 예쁘더군요.”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합니다. 몸을 거치지 않고도 마음과 마음이 통할 수
있는 창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눈 맞춤은 호감도와 비례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호감을 사기 위해 선물도 하고, 예의도 차리고, 예쁜 옷도
입고, 화장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것보다 더 호감을 사는 것이 상대의
눈을 쳐다보는 것이라니 놀랍지 않습니까? 따라서 전문가들은 대화의 85%
이상 ‘눈 맞춤’을 하라고 권합니다.
그러고 보면 관계 또한 나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에게 깍듯한 예의를 차리고 많은 것을 해 주려 하지만 왠지
꺼려지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아무 것도 해 주지 않는데도 눈을 많이
마주치게 되고 편안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사람이 사람을 받아들일 때는
그 사람보다 먼저 받아들이는 무엇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기운이라고도 하고, 그 사람의 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먼저 받아들여지면 그 다음 부터는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다
받아들여지지만, 그 사람의 마음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는 무슨 일을 해도
좋아 보이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엘리사벳을 위해 어떤 좋은 일을 하셨을까요? 엘리사벳은
성모님의 인사를 듣고 성령으로 가득 찼습니다. 소리만 들었는데도
성령으로 불타고 또 태중의 아기도 기뻐 뛰놀았습니다. 다만 성모님의
인사만을 들었는데 누구에게서도 받을 수 없는 도움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성모님께서 당신 안에 하느님을 모시고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무언가 하려고 하는 것을 멈추고 가끔은 자신의 모습이
어떤지 살펴보아야합니다. 속은 텅 비어있는데 겉만 노력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이 사랑이라면 주위의 사람들은
우리의 음성이나 시선, 풍기는 모든 것을 통해 나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하느님’이란 단어는 천주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쓰이던 조물주를 의미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말을 그대로 이어서 쓰고 있습니다. 엘,
엘로힘, 야훼, 데우스, 갓 등의 말들은 모두 하느님을 나타내는 말인데
그리스도교가 생기기 이전에 이미 각 지방에서 하느님을 부르던
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런 말들을 그냥 사용하는 이유는 종교가
들어오기 이전에 이미 성령께서 활동하셨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로마 백인대장 코르넬리우스에게 천사를 보내시어 베드로를 만나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세례를 주기도 전에 그들은 성령을 받습니다.
이는 교회가 도달하기 이전에 이미 교회 안에 활동하시는 성령께서
그들에게 먼저 도달하셨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만나기 이전에 이미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그 사람을 먼저 만나러 가십니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일 준비를
시켜주십니다. 성모님의 음성만 듣고도 엘리사벳이 성령님으로 가득 찼던
이유가 그것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좋은 관계를 위해 수많은 노력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 안에 성령님으로 충만하게 하여 놓으면 성령님께서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볼 때 호감을 갖도록 해 주십니다. 그러면 노력하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됩니다. 우리보다 성령님이 먼저 만나러 가신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삼용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 담당 전삼용 요셉신부 -
◈ [수도회] 찬미의 기쁨, 만남의 기쁨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요셉 수도원)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5월31일 토요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
스바3,14-18 루카1,39-56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 루카 1,39-56
찬미의 기쁨, 만남의 기쁨
오늘은 '찬미의 기쁨', '만남의 기쁨'에 대한 묵상나눔입니다.
부활시기는 물론 요즘의 엊그제에 이어 계속 '기쁨'이 주제입니다.
누가 저에게 '무슨 기쁨으로 살아가느냐?'묻는 다면
저는 주저함 없이 '찬미의 기쁨'으로 살아간다고 고백합니다.
진정한 기쁨은 찬미의 기쁨뿐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매일 바치는
시편 성무일도도 온통 '알렐루야', 하느님 찬미에 관한 내용들입니다.
사실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도 수도형제들과 함께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께 찬미 노래를 바칠 때입니다.
저뿐만 아니라 수도형제들의 고백일 것입니다.
'찬미의 종교'인 그리스도교요, '찬미의 기쁨'으로 살아가는 '찬미의
사람들'인 우리 수도자들이요, 믿는 이들입니다. 종파를 초월해 이슬람이든,
유다교이든, 가톨릭이든, 개신교 이든 모두가 '하느님 찬미'에서 일치합니다.
'기쁨과 즐거움을 돌려주시어, 바수어진 뼈들이 춤추게 하소서.‘
'당신 구원, 그 기쁨을 내게 도로 주시고, 정성된 마음을 도로 굳혀주소서.‘
'그러나 주여, 나는 주님 안에서 기뻐하며, 내 주 하느님 안에서
춤추겠나이다.‘
'주 내 하느님은 나의 힘이시며, 나를 사슴처럼 달리게 하시고, 산 봉우리로
나를 걷게 하시나이다.‘
어제 아침 시편성무일도 중 주운, 보석같이 반짝였던 구절들입니다.
모두 찬미의 기쁨을 노래한 시편들입니다.
찬미의 기쁨 중에 만나는 살아계신 주님입니다. 찬미의 기쁨, 만남의
기쁨입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면서 내적위로와 치유입니다.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과의 우애는 물론 형제들과의 우애 역시 깊어집니다.
찬미의 기쁨으로 살아갈 때 자연스럽게 뒤따르는 만남의 기쁨입니다.
세상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찬미의 기쁨, 만남의 기쁨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인공이자 찬미의 여인들인 영적 도반,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이 참 아름답습니다. 바로 오늘 1독서는 두 분은 물론 우리의 찬미의
기쁨을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주 너의 하느님, 승리의 용사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다. 그분께서 너를
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신다.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 주시고, 너
때문에 환성을 올리며 기뻐하신다. 축제의 날인양 그렇게 하신다.‘
바로 이게 찬미의 은총입니다.
우리를 부단히 새롭게 하시며 허무한 고해인생을 충만한 축제인생으로
바꿔주는 공동찬미전례기도의 은총입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찬미기도를 바칠 때 저절로 하느님의 위로와 치유입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좋은 힐링도 없습니다.
이런 찬미의 공동체 분위기에 주님과의 우정은 물론 형제들과의 우정도
깊어집니다. 찬미의 기쁨은 저절로 만남의 기쁨으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찬미의 사람들로 살아갈 때 선물처럼 뒤따르는 만남의 기쁨입니다.
참 아름다운 영적도반이자 찬미의 여인인 엘리사벳의 격려에 성령
충만하여 하느님을 찬미하는 찬미의 여인, 마리아입니다.
매 저녁기도 때마다 우리 모두 성모님과 함께 바치는 유명한
마니피캇입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가난한 영혼들에게 한 없는 위로와 치유, 평화와 기쁨을
주는 마니피캇의 하느님 찬미입니다.
끊임없이 바치는 이런 하느님 찬미가 우리를 찬미의 사람으로 만들고
찬미의 기쁨, 만남의 기쁨으로 살게 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시간, 마음을 다해 당신을 찬미하는 우리 모두에게
위로와 치유, 평화와 기쁨을 선사하시어 충만한 기쁨의 축제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 [서울] 복되신 동정 마리아 방문 축일
2014년 가해 5월31일 부활 제6주간 토요일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 루카 1,39-56
김수환 추기경님께서는 ‘만남’이라는 노래를 좋아하셨습니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램이었어.’ 만남에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내가 아쉬워서 만나는 것도 있고, 남의 아쉬움을 해결해주는 만남도 있고,
형식적인 만남도 있고, 사랑해서 만나는 것도 있습니다. 사람을 통해서
만나는 것도 있지만 스스로의 성찰과 묵상을 통해서 깨닫는 만남도
있습니다. 책을 통해서 만나는 것도 있습니다. 책은 인류의 역사, 문화,
사회, 경제, 신화, 과학, 예술을 만날 수 있는 통로입니다. 연습을 통해서
만나는 것도 있습니다. 운동선수는 오랜 연습을 통해서 새로운 기술을
만나게 됩니다. 노래하는 사람은 발성 연습을 통해서 더 높은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저는 매일 새벽에 묵상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글을 통해서 나의
내면과 만납니다. 그 만남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그 만남이 제게 힘과
용기를 줍니다. 성찰과 묵상이 있으면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만남에서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적인 에너지를 이웃들과 나눌 수
있습니다. 내 안에 욕심과 교만이 가득차 있으면 우리는 만남을 통해서
위로를 받기 어렵습니다. 만남을 통해서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기 쉽습니다.
마음을 열면 길가의 꽃에게서도, 하늘의 구름에게서도, 불어오는
바람에서도 배울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닫으면 아무리 좋은 글을
읽어도, 좋은 사람을 만나도 배울 것을 찾지 못합니다. 오늘 우리는
엘리사벳을 찾아가는 마리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엘리사벳은 찾아온
마리아를 축복하여 주었고, 마리아는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찬가를
부릅니다. 이것은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그러나 우리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마음에 품어야 할 가르침입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에게 축복의 인사말을
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축복에 기도로서 화답합니다.
‘성모님의 노래’라고 불리는 이 기도를 음미하는 것만으로도 오늘의 묵상은
충분합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오늘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해서 ‘마리아의 노래’를 불렀듯이 우리들
또한 각자의 노래를 만들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을 찬미하고,
하느님이 나에게 어떤 분이신지를 고백하는 신앙의 노래를 만들어 보면
좋겠습니다.
- 서울 대 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도회] 낳음의 신비/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인영균끌레멘스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동정 마리아 방문 축일(2014년 가해 5월 31일)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 루카 1,39-56
낳음의 신비
오늘 두 여인이 만납니다. 하느님의 놀라운 손길을 체험한 이 두
여인입니다. 그 이름은 마리아와 엘리사벳입니다.
한 여인은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이었고 다른 여인은 아이를 갖지 못하는
나이 많은 사람였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납득할 수도 받아들일 수 없는 놀라운 일을 이
여인들에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놀라운 일이란 무엇입니까?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말했습니다. “나를 낳으신 분을 내가 다시 낳는
것이다.” 성모님은 당신을 낳으신 분을 당신이 낳으셨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을 낳으신 하느님을 당신 자신이 낳으셨다는 것입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 안에서 일어난 이 놀라운 탄생의 신비를 증거하는
아이를 잉태했습니다.
하느님의 강한 힘과 한 인간의 나약한 힘이 믿음 안에서 만나 놀라운 탄생을
이루었습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믿음을 경탄합니다. “복되도다, 믿으신 분!” 오늘
우리가 성모님처럼 참으로 믿는다면 우리 안에서도 놀라운 탄생이
이루어집니다.
하느님은 나를 낳으시고 내 자신은 나를 낳으신 분을 낳습니다. 낳음을 받고
낳는 사건이 우리의 믿음 안에서 동시에 일어납니다. 또한 동시에 우리의
단순한 삶이 이러한 놀라운 탄생을 증거합니다.
이것이 생명의 활동입니다. 살아움직이는 것입니다.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님의 복음 단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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