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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가해 6월8일 성령 강림대축일
[수원] 그리스도의 상처가 우리에게 주는 평화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 담당 전삼용 요셉 신부
† 제1독서 : 사도 2,1-11
† 제2독서 : 1코린 12,3ㄷ-7.12-13
† 복음 : 요한 20,19-23
오늘 전례
▦ 오늘은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교회의 삶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불어넣어 주신 성령에서 비롯합니다. 성령에 따른 삶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듯 용서의 삶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오신 성령께
용서와 화해를 실천할 은총을 청하며 정성을 다해 이 미사에 참여합시다.
★ 오순절에 성령께서 사도들에게 강림하셨다.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불꽃 모양의 혀들로 갈라지며 사도들에게 오신 것이다.
사람들은 사도들의 말을 각기 다른 자신의 지방 말로 알아듣는 것을
체험하며 놀라워하였다(제1독서).
★ 바오로 사도가 성령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다. 성령을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을 주님이시라고 고백할 수 없다. 성령은 공동선을 위하여
하느님에게서 선사되었다. 은사는 다양하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이시다
(제2독서).
★ 유다인들이 두려워 숨어 있는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오시어
평화의 인사를 나누시며 사명을 부여하신다. 그들이 성령을 통하여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받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그대로 남을
것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그의 모습이 눈에 보이지 않았으나/
그의 안에서 나의 호흡이 절로 달도다.//
물과 성신으로 다시 낳은 이후/ 나의 날은 날로 새로운 태양이로세!//
뭇사람과 소란한 세대에서/ 그가 다만 내게 하신 일을 지니리라!//
미리 가지지 않았던 세상이어니/ 이제 새삼 기다리지 않으련다.//
영혼은 불과 사랑으로! 육신은 한낱 괴로움./
보이는 하늘은 나의 무덤을 덮을 뿐.//
그의 옷자락이 나의 오관에 사무치지 않았으나/
그의 그늘로 나의 다른 하늘을 삼으리라.”
우리나라의 대표적 시인 정지용 프란치스코의 ‘다른 하늘’이라는 시입니다.
1934년 『가톨릭 청년』 제9호에 실렸다가 이듬해 발간된 『정지용 시집』
에 수록된 시이니, 이미 오래전의 작품이나 감동은 여전합니다. 아름다운
서정시로 유명한 정지용 시인은 주옥같은 신앙 시들도 많이 남겼는데, 이
시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저는 이 시를 보좌 신부로 사제직의 첫발을 내딛고 맞은 첫 번째 성령 강림
대축일의 「서울주보」에서 처음 만날 수 있었습니다. 세월이 많이
흘렀으나 그때 받은 깊은 감동은 지금도 그대로 떠올릴 수 있습니다.
스페인에서 활약한 위대한 종교화가 엘 그레코의 그림 ‘성령 강림’과 함께
감상할 수 있어서 더욱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시와 그림이 실린
주보의 앞면을 제 책꽂이에 한참 붙여 놓았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이사를
거듭하면서 아쉽게도 잃어버렸지만 그 기억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매일미사』의 묵상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성령 강림 대축일이 되면 이
시를 교우님들과 함께 나누리라 마음먹었습니다. ‘다른 하늘’을 품고 사는
행복에 대하여 깊이 감사하는 대축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성령께서 약속대로 오셨습니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6월8일 성령강림 대축일 (요한20,19-23)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 요한 20,19-23
성령께서 약속대로 오셨습니다.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오늘 성령강림은 바로 한결 같은 그분의 사랑을 드러내 줍니다.
주님의 승천이 가져온 슬픔에 잠긴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시고 “성령을
받아라.” 하시며 두려움을 거두어주신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도 같은 성령의 기운을 불어 넣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성령세미나를 하는 중에 또는 기도회를 하다보면 ‘성령의 역사가 얼마나
다양하게 나타나는지 알게 됩니다. 물론 성경을 읽는다든지, 성체조배 중에,
기도하는 가운데 얼마든지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을 느끼고
받아들이려면 영적인 삶이 꼭 필요합니다. 영은 영을 알아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눈물을 통하여, 어떤 사람은 웃음을 통하여, 어떤 사람은
뜨거운 열기를, 어떤 사람은 시원한 바람으로, 어떤 사람은 온 몸에 기운이
빠져 안식을 갖고 어떤 사람은 이상한 언어를 하고 어떤 이는 마음의
어두움을 씻어내어 평화를 회복시켜 주심으로, 어떤 이는 친절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채워 주심으로, 어떤 이는 용서의 마음으로, 그렇게 미웠던
배우자가 사랑스럽고 더 잘해주지 못했던 동안의 부족함을 볼 수 있게 해
줌으로써 ……무뎌진 마음을 일깨워 하느님의 마음을 상하게 해드린
허물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 주시고 마음의 정화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여러
사람이 함께 모여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방법으로 채워주시는 놀라운
역사를 볼 수 있습니다.
한 자매가 저와 상담을 하였는데 그는 일찍 부모를 잃고 두 동생을 키우느라
고생을 많이 하였습니다. 삶의 고달픔으로 웃음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가
그렇게 된 것은 하느님께서 벌을 내린 탓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마음에
자리한 하느님은 무서운 하느님, 두려운 하느님, 벌을 주시는
하느님이었습니다. 부모에 대한 사랑이 그리웠고 그 사랑을 느끼고 싶었고,
제발 한번 만이라도 사랑의 하느님으로 만나고 싶고, 기쁨을 회복하고
싶다고 간절히 기도를 청하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머리위에 손을 얹어
안수를 하는 중에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너무도 평화롭게 한없이
웃을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울고불고 하는데 너무도 기뻐
어쩔 줄 모르게 해 주셨습니다. 정말 그 자매의 웃는 얼굴이 환희
빛났습니다. 맑고 밝은 웃음을 회복한 그가 얼마 후 남자 친구를 만나게
되었고 혼인 청첩장을 보내왔습니다.
세미나를 받고 어떤 사람은 ‘성경을 쳐다보면 졸음이 쏟아졌는데 한 시간을
읽고 두 시간을 읽어도 더 읽고 싶은 마음이 솟구쳐 오른다’ 고 하는 분도
계시고……‘늘 만나던 사람이지만 유난히 사랑스러워 보이고 그야말로
사물까지도 다르게 보인다’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다양하게 은총의 역사를
이루어 주십니다.
어떤 사람은 미사참례를 그저 의무로만 했고, 짧은 미사를 가느라 어린이
미사에만 갔는데 이제는 미사에 맛 들여 매일미사 참례를 하고 영성체가
기다려지고 말씀을 그리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더욱이 성체를 모시는
기쁨이 너무도 커서 가슴이 벅차오르고 감사의 눈물도 흘립니다.
성령께서는 오늘도 여전히 각 사람에게 알맞은 방법으로 다가오십니다.
불길처럼, 뜨거운 감동으로 오기도 합니다. 불은 정화하고 갱신하며 불순한
것을 깨끗이 태워버립니다. 그렇듯이 우리 안에 옛 것을 태워버리고 새
삶을 살도록 인도합니다. 세상 것을 우선시 하던 마음을 천상의 삶을
그리워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불로 표상 되는 성령의 특성을 교회는
빨간색으로 상징화 하였습니다. 붉은 제의는 바로 내면의 불꽃을
상기시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바람처럼 임하기도 합니다. 세찬 바람으로, 때로는 여린
바람으로 나의 진부한 것들을 쓸어내기도 하시고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기도 하십니다. 우리 성당의 장점은 바로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시는
어머니의 따뜻한 손길을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성모님을
통해서 다가오시기도 합니다. 또한 물처럼 샘솟기도 합니다. 내면의 기쁨이
솟구쳐 올라 기쁨과 활력을 주기도 합니다. 한편으로 비둘기처럼
다가옵니다. 평화와 온유함으로 어떤 상황 안에서도 흔들림이 없이
요란스럽지 않게 다가오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일상 안에서 성령의 강림을 느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성령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때 원하시는 방법으로 역사를 이루시지만
특별히 기도하는 가운데, 성경말씀을 읽으며 주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성체조배를 하는 가운데, 그리고 주님의 뜻을 행하는 가운데 성령의 손길이
더 강하게 역사하시니 만큼 그에 걸 맞는 영적인 삶을 살아감으로써 성령의
힘과 능력을 체험하고 성령께서 주시는 열매를 맺기를 희망합니다.
갈라티아서에는 “성령께서 맺어 주시는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 선행, 진실, 온유. 그리고 절제입니다. 이것을 금하는 법은 없습니다”
(갈라5,22-23)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느님의 영’이 특별히 뽑힌 이들에게 임했습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사람들, 모세, 판관들, 전사들, 시인들, 왕이나 예언자에게
역사하셨습니다.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을 이룰 수 있도록
함으로서 주 하느님의 영의 역사를 드러내셨습니다. 그런데 요엘서
3장1절에 보면 “그런 다음에 나는 모든 사람에게 내 영을 부어 주리라.
그리하여 너희 아들딸들은 예언을 하고 노인들은 꿈을 꾸며 젊은이들은
환시를 보리라. 그 날에 남종들과 여종들에게도 내 영을 부어 주리라.” 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의 사람에게만 특별히 임했던 성령이 장차
누구든지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었습니다.
바로 이 약속은 먼저 예수님의 일생에서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성령으로 가득 찬 생애였습니다. 마리아는 성령에 의하여 예수님을
잉태하였고(마태1,28-30), 예수님께서 훗날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에도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 왔습니다. 이 성령이 예수님을
광야로 데려가서 유혹을 물리치게 하였고 예수님의 공적활동도 성령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루가 복음 사가는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시니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모든 지방에 퍼졌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셨다”(루카4,14-15).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나자렛에서 첫 설교를 시작할 때
이사야 61장 1절에서 2절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성령의 역사를
언급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은 다시 보게 하며…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루카14,17-19).
그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악령에 시달리는 이들을 풀어주었고(마태12,28).
병자를 치유하셨습니다(루카5,17). 또한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3,5이하).하시며 새로 나기
위해 성령의 세례가 필요하다고 역설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은 성령과 함께한 역사였습니다.
이렇게 성령과 함께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승천을 통한 작별을 하기에
앞서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시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파라끌리또 성령을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요한15,26-27).
이 말씀은 당신이 얼마 후 제자들의 곁을 떠나게 되겠지만 대신에 이들을
도울 보호자이신 성령께서 그들과 함께하실 것을 확신시켜 주시기 위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실상 제자들은 이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떠나신 후 두려움에 사로잡혀
다락방에 모여 문을 모두 잠가놓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아! 그래서 그리
하셨구나.’ 하며 무릎을 친 것은 바로 오늘 성령의 강림을 체험하고 난
다음이었습니다.
구약의 예언말씀과 예수님의 약속은 바로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이 성령께서 예수님의 십자가 길에서 뿔뿔이 도망쳤던
겁쟁이 제자들을 당당한 복음의 선포자로 변화시켰습니다. 죽음이 두려워
문을 걸어 잠그고 다락방에 숨어있던 제자들을 복음의 증거자로 변화시켜
그리스도를 담대하게 전하게 하였습니다(사도2,1-11). 한마디로
성령께서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제자들이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제자들이 송두리째 바뀌어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령강림
대축일을 교회의 탄생일로 보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음으로 인하여 베드로와 바오로도 예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는데 사도행전을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성령의 힘으로
절름발이를 낫게 하였고, 죽은 이를 살려내고 악령을 몰아냈으며
열정적으로 설교하게 하였고 복음을 전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사람들이 성령을 받도록 이끌어 주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성령께서는 공동체가 한마음, 한뜻이 될 수 있도록 하여 가진 것 모두를
공동 소유로 내놓고 나눔의 생활을 하였으며 그 안에서 하느님을
찬미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공동체가 커졌습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말합니다.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갈라3,28).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도 성령의 손길이 더욱 더 요청되고 있습니다. 사실
성령께서 나와 함께 하심에도 불구하고 그 성령의 역사를 느끼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내 선입견과 욕심, 세상 걱정 때문에 그분의 숨결을 내가
놓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다가오시지만 내가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한
까닭으로 역사하시지 못하십니다. 세례성사를 통하여 이미 우리 안에 오신
성령께서 활발히 역사하시도록 그 장을 만들어 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러니
마음의 문을 여십시오. 성령의 도움으로 거룩함을 회복하십시오. 복음의
증인이 되십시오! 성령께서는 당신 은총의 선물을 우리 모두에게 나누어
주시고 모든 부분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십니다. “오소서 성령님! 새로나게
하소서”
성 아우구스티노의 기도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성령이여, 제가 거룩함을 생각하도록 제 안에서 숨 쉬게 하소서.
성령이여, 제가 거룩함을 행하도록 제 마음을 움직이소서.
성령이여, 제가 거룩함을 사랑하도록 저를 이끌어 주소서.
성령이여, 제가 거룩함을 보호하도록 저를 강하게 해주소서.
성령이여, 제가 결코 거룩함을 잃지 않도록 저를 보호 하소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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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칠은 카드를 뽑겠습니다. 간략하게 그 은사를 설명하겠습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은혜는 참으로 많고 다양합니다. 그러나 이사야서11장1절
에서 3절의 말씀을 중심으로 개인 성화를 위해 베푸시는 은혜를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1). 슬기 (지혜) : 하느님과 하느님께 관한 것들을 올바로 판단하고,
맛들이고, 실천하도록 돕는 은혜입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 관점에서 보고
판단하며, 하느님의 눈, 하느님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이지요.
주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아무리 큰 꿈과 희망도 하느님 마음에
들지 않고 하느님을 거스르는 것이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2). 통달 (깨달음, 이해) : 하느님 계시진리를 깊이 통찰하여 잘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은혜입니다. 성경의 의미, 전례의 의미등 숨은 뜻을 알게 됩니다.
더 열심히 기도하고 노력하면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감동을 얻게 되고
기쁨을 차지하게 됩니다.
3). 의견 (일깨움) : 마땅히 해야 할 것, 피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판단하게
하는 은혜입니다. ‘예’, ‘아니오’를 분명히 하고 자기 분수를 알며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를 아는 것입니다. 부모는 부모로서, 자녀는 자녀로서의
역할이 있고 직장인은 직장인으로서, 학생은 학생으로서의 고유역할이
있습니다. 자기역할에 충실하게 하는 은사입니다.
4). 지식 (앎) : 영원한 생명, 피조물에 대해서 올바로 판단하는 습성입니다.
믿어야 할 진리, 믿지 말아야 할 거짓에 대해서 확실히 분별하는 은사입니다.
피조물은 하느님의 연장입니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도 분명히
피조물입니다. 하느님의 섭리, 주관하심을 알고 그에 순응하는 것입니다.
안다는 것은 알기 때문에 달라집니다. 세상 사람들은 ‘아는 것이 병’일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여 섬기는 것이 지식의 근본입니다.
5). 굳셈 (용기) : 어떤 어려움이나 시련, 위험을 극복할 수 있다는
확고부동한 신뢰를 지니고 덕을 실천하도록 성령께서 영혼에게 주시는
힘입니다. “끝까지 참는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고 했으니 흔들림이 없는
믿음으로 가야할 길을 가는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을 지키셔서 복되십니다. ‘초장에 초싹, 파장에 파싹’이라고 하나요?
한번 시작을 했으면 끝까지 하는 것입니다.
6). 공경 (받듦, 섬김, 효경) :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자녀다운 사랑과 모든
인간 안에 보편적 사랑의 정을 담아주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선언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모시고 삽니까? 데리고 삽니까? 한입으로 두말하지 않고 오로지 주님을
섬겨야 하겠습니다.
7). 두려워함 (경외) :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으로 죄를 피하는 은혜입니다.
무서움과는 다릅니다. 벌 받을 것에 대한 무서움이 아니라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린 것에 대해 죄송한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만큼
감각적인 절제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주님 마음에 드는 것을 선택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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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곤드레 만드레 취한 한 남자가 성당 안으로 들어서더니 곧 고해실로
들어갔습니다. 신부님께서 기다리고 있었지만 아무 말이 없어서 헛기침을
하며 신부가 안에 있다는 표시를 하였습니다. 그래도 아무런 기척이
없었습니다. 결국 신부님께서 고해실의 작은 가림 막을 ‘똑,똑,똑’ 세 번
쳤습니다. 그러자 그 쪽에서 말했습니다. “노크해도 소용이 없어요!
이쪽에도 휴지는 없어요!” @@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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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술 취한 사람과 성령에 취한 사람이 비슷하답니다. 말수가 는다. 노래를
한다. 권한다. 운다. 용감해 진다. 지배당한다.
중독된다. 안주가 필요하다(말씀). 냄새를 풍긴다.(성령을 받은 사람은
향기를 풍기죠)@@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요행을 바라는 착각속에서 벗어나
2014년 가해 6월8일 성령 강림 대축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 요한 20,19-23
가정에 소홀한 남편이 있습니다. 중요한 기념일이나 가족 대소사를 놓치는
것을 처음에는 미안해 하다가 이제는 당연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자기는
가장으로 돈을 많이 벌어야하기에 바쁘고 그래서 가정에 소홀히 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번 한 건만 잘 되면 우리 가족 모두 화목하게 잘
살 수 있다’고 자주 말합니다. 그런데 이 한 건이 잘 되고 나면 어떨까요? 더
큰 건이 자기 앞을 기다리게 되고, 결국 가족에는 늘 소홀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 프로야구가 한창인데, 사람들은 어떤 선수를 좋아할 것 같습니까?
당연히 자기 팀이 이기는데 커다란 영향을 끼치는 선수를 좋아합니다. 팀의
승리를 위해서 때로는 번트도 대고, 때로는 기다릴 줄도 아는 선수, 그리고
자신이 부상을 당할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몸을 던져서 아웃 카운트를
잡아내는 열정을 가진 선수를 원합니다.
만약 홈런 한 방만 치겠다고 무조건 큰 스윙만 하는 선수는 어떨까요? 또한
자기 몸을 끔찍이 챙겨서 슬라이딩이나 허슬 플레이를 전혀 하지 않는
선수는 어떻습니까? 제가 감독이라도 그런 선수는 절대로 쓰지 않을
것입니다. 어쩌다 한 번은 이길 수도 있겠지만, 이 선수를 기용함으로 인해
패배를 더 많이 안게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지요.
직장에 충실한 사람은 가정에 소홀할 수밖에 없을까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은 매사에 충실하기에 직장이나 가정에나 똑같이
충실합니다. 문제는 무조건 큰 것만을 얻으려는 욕심과 이기심이 그
어디에서도 소홀하게 만든다는 것이지요. 작은 것도 소홀히 하지 않고
충실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어떠한 상황에서도 충실하게
자신의 일들을 해나갈 것입니다.
오늘은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성령이 사도들에게 내린 날을 기념하는
날이지요.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 이후 숨어 지냈던 다락방을
벗어나 용기 있게 세상에 기쁜 소식을 전파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단지
성령을 받음으로 인해서 용기를 가지고 세상에 복음을 전파할 수 있게 된
것일까요? 예수님과 함께 했었던 그 모든 과정들이 있었기 때문에, 성령을
통해서 비로소 그 결실을 맺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어느 날 갑자기 주님께서 특별한 은총과 사랑을 주셨으면 하는
마음을 갖습니다. 즉, 큰 것 한 방 주셨으면 합니다. 이것으로 세상 안에서는
부귀영화를 누리고, 그래야 주님을 위한 일도 조금 할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리고
주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면 이미 우리에게 다가온 주님의
은총과 사랑을 깨닫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세례를 통해서 받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항상 말씀하시는 것은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을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은 또 주님의 뜻대로 살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은 은총과 사랑으로 다가오는 성령의 활동을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큰 것 한 방이라는 요행을 바라는 착각 속에서 벗어나, 매 순간 주님께
충실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천년 전의 제자들처럼 주님
안에서 주님의 일을 용기 있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우리가 찾는 것에 따라 달라진다(존 러벅).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우연히 작년 평화신문을 보다가 우연히 다음과 같은 기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기사 원문을 올려 봅니다.
마산교구 진주 신안동본당(주임 최봉원 신부)에는 매주 중고등부 미사가
끝나면 함께 모여 기도하는 성소자 모임이 있다. '진홍색 가운'이라는
이름을 붙인 성소자 기도모임은 6월 15일부터 미사 후 그날 복음 중 마음에
와 닿는 복음말씀을 나눈다. 묵주기도를 하고 서로 성소 체험도 털어놓는다.
'진홍색 가운'은 가르멜 수도회 성소자인 최동현(프란치스코, 고1)군이
'빠다킹 신부'로 유명한 조명연(인천교구 성소국장) 신부의 복음묵상을
듣고 정한 이름이다. 최군은 "프랑스의 사상가 디드로라는 사람이 친구에게
멋진 진홍색 가운을 선물 받고 서재에 고이 보관했는데, 멋진 가운 때문에
자신의 서재가 초라하다는 것을 느껴 서재의 물건을 새것으로 바꾸기
시작했다"며 "이 말씀을 듣고 우리도 하느님을 진홍색 가운이라 생각하고,
우리 자신을 하느님 뜻대로 바꿔나갈 것을 다짐하며 지은 이름"이라고
설명했다.
제 이름이 들어가서 깜짝 놀랐지요. 특히 저의 글을 읽고서 ‘성소자
기도모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하니 더욱 더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썼다는 ‘진홍색 가운’이라는 글이 기억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검색을 해보니 2013년 6월에 썼던 글이더군요. 이 글을 보니 비로소
‘아~ 맞다.’ 하면서 생각이 납니다.
저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신경 쓰지 않았던 글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됩니다. 즉,
어떠한 상황에서도 소홀히 살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네요.
아무튼 이 성소자 모임이 앞으로도 잘 되기를 기도합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그리스도의 상처가 우리에게 주는 평화
2014년 가해 6월8일 성령 강림 대축일
< 평화가 너희와 함께! >
복음 : 요한 20,19-23
< 그리스도의 상처가 우리에게 주는 평화 >
그리스 신화에 ‘헤라클레스’란 영웅이 나옵니다. 헤라클레스는 괴력을 지닌
반신반인이었는데, 그의 아버지가 태양의 신 제우스입니다. 제우스 신의
아내는 헤라였는데, 사실 헤라클레스는 제우스의 아내가 아닌 아크메네란
한 인간 여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외 자식인 것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제우스의 아내인 헤라여신으로부터 미움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헤라는 헤라클레스가 아직 요람에 있을 때 독사 두 마리를
보내어 헤라클레스를 물어죽이게 하였는데, 헤라클레스는 아기였음에도
손으로 뱀의 목을 눌러 죽입니다.
헤라는 헤라클레스를 괴롭힐 방법을 찾다가 헤라클레스가 페르세우스의
아들 에우뤼스테우스의 부하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그를 통해 매우 어려운
일들을 시키게 만듭니다. 괴물 사자의 모피를 가져오라든지, 머리가 아홉인
히드라를 죽이라든지, 아마존 족의 여왕의 허리띠를 가져오라는 등의
고역들이었습니다. 이런 것들을 헤라클레스의 12가지 과업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근래에 헤라클레스 헐리우드 영화가 개봉되었었는데 내용은 신화와는
다르지만 그 근간에 흐르는 메시지는 거의 동일하다 할 수 있습니다.
한 폭군 왕이 있었는데 그의 아내가 제우스의 아들을 잉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폭군 왕은 헤라클레스가 자신의 아들이 아님을 눈치
채고는 그를 매우 미워합니다. 그래서 일부러 전쟁터에 내보내서
죽게 만듭니다. 어려운 과업을 시키는 것입니다. 간신히 목숨을 건져서
많은 죽을 고비를 넘기며 자신의 나라로 돌아왔지만 아버지는 계속
그를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는 중에 자신이 왕의 아들이 아닌 신의
아들이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믿으려하지 않습니다.
결국 폭군은 자신의 아내, 즉 헤라클레스의 어머니도 죽였습니다.
그리고는 기둥에 묶어놓고 헤라클레스도 죽이려고 합니다.
그제야 헤라클레스도 자신이 폭군의 아들이 아닌 제우스의 아들이고 폭군을
이기고 세상에 평화를 가져올 임무로 태어났음을 인정하고 고백합니다.
하늘에서 제우스는 자신을 부르는 아들에게 초인적인 힘을 주고 그 힘으로
폭군을 죽이고 평화로운 나라를 세운다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사제들에게도 무리한 일을 맡깁니다. 사람들의 죄를
씻어주고 사람들에게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생명의 양식을 나누어주도록
시키신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우리는 그저 그 일을 할뿐이지만, 그것을 행할 때마다 황당하기
그지없습니다.
또한 오늘 복음에서는 죄를 사하는 일까지 시키십니다.
“너희가 용서해주면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의 병을 고쳐주실 때, “너의 죄는 사해졌다.”라고
하셨습니다. 수많은 기적을 행하시는 그분도 세상 사람들이 비웃었는데,
우리 같은 죄인들이 생명의 빵을 나누어주고 죄까지 용서해준다고 하니
정말 우리 스스로도 인정하기 힘든 역할입니다. 죄를 사해주고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은 신의 영역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역할을 해야 하니
부담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헤라클레스도 영원한 생명을 주는 양식을 인간에게 준 적이 없고, 인간의
죄를 용서할 권한도 없었습니다. 사실 신화에서 제우스가 자신의 아들인
헤라클레스에게 영생을 주기 위해서 몰래 자신의 아내 헤라가 잘 때, 그녀의
젖을 물린 이야기도 나옵니다. 오직 헤라의 젖만이 영생을 주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제우스도 줄 수 없었던 영생과 헤라클레스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죄 사함의 권한을 저희 같은 한 인간이 가질 수
있다니요? 이것은 가히 사제들 스스로도 인정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오늘 부활하신 예수님은 불안에 싸여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너희에게 평화를 빈다.”라고 인사하십니다. 그들이 무엇 때문에 불안해
하는지 예수님은 잘 아십니다. 그리고는 당신 상처를 보여주십니다. 당신
상처에서 나온 것은 ‘피’입니다. ‘피는 생명’입니다. 즉, 그들을 위해 당신
생명을 바쳤다는 것을 보여주시면서 불안해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론의 핵심입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생명입니다. 즉 하느님께서
생명을 주신다는 것은 모든 것을 주신다는 것인데, 그 모든 것이 곧
성령이신 것입니다.
1989년 구소련에 속해 있던 아르메니아에서 무려 5만5000명이 참사를 당한
대지진이 일어났었습니다. 이 때 9층 아파트가 무너지면서 스잔나라는
엄마와 네 살 난 딸 가이아니가 철근과 콘크리트 틈새 속에 갇혀있었습니다.
그들은 오랜 시간 동안 갇혀 있었는데 가이아니는 엄마 옆에 누워서 “엄마,
목말라”라는 말을 계속 토해냈습니다. 움직일 수도 없었던 엄마는 딸의
목을 축일 방법을 고민하다 조난당한 사람들이 먹을 것, 마실 것이 없을 때
피를 나눠 마시던 TV 장면을 기억해냈습니다. 어둠 속에서 엄마는 손을
더듬어 깨어진 유리조각을 하나 찾았고, 지체 없이 손가락을 찢어 흐르는
피를 딸의 입술에 축여 주었습니다. 이렇게 두 주일이 지났고 그들은
극적으로 구조되었다고 합니다.
14일간이나 딸에게 자신의 피를 먹인 엄마의 손이 어떤 상태였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물이 없으면 사람은 3일 이상 버틸 수 없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딸에게 ‘피’를 주었다는 것은 ‘생명’을 준 것입니다. 그런데 생명을 준다는
것은 ‘다’ 준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의 사랑도 피를 주고 생명을 주고 다 주는데, 하물며 하느님이 인간에게
사랑한다고 하시면서 무언가 감추어놓고 주지 않으실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엄청난 일을 맡기셨지만 그분은 당신 상처를 보면서 안심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제우스는 헤라클레스에게 자신의 힘을 줄 때 그것을 믿도록 어떤 표도
보여주지 못했지만, 예수님은 당신이 우리를 위해 생명까지 바칠 수 있는
사랑을 지녔기 때문에 당신의 모든 능력 또한 우리에게 주셨음을 믿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우리를 파견하고 계신 것입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파견하시면서 당신의 모든 권능을 교회에 부여하십니다.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은 사람이 어떻게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느냐고 교회에서 벌어지는 죄사함이나 생명의 양식을 나누어 주는
것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비웃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랑하면 내 것은 아무 것도
남기지 않는 법인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느님은 모세를 부르시고 그를 파견하십니다. 이집트로 다시
들어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해오라는 명령을 내리십니다. 이집트가
무서워서 도망쳐 나와 40년간 숨어살던 모세에게는 말도 안 되는 명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못하겠다고 버팁니다.
그러나 모세의 마음을 꺾은 것이 바로 그가 지니고 있던 ‘지팡이’
덕분이었습니다. 하느님은 그 지팡이가 뱀이 되게 하고 집으면 다시
지팡이가 되게 하는 기적을 보여주십니다. 즉 하느님의 능력이 자신과 함께
한다는 것을 믿게 해 주신 것입니다. 성령을 ‘파라클레토스’라 하는데, 이는
‘부르면 항상 응답할 수 있는 거리에서 언제나 함께 있어주시는 분’이란
뜻입니다. 그분의 능력은 그분이 파견하신 교회에 언제나 함께 계십니다.
마찬가지로 모세도 항상 함께하시는 그 능력, 즉 성려의 상징인 지팡이로
10가지 재앙도 일으켜 파라오를 혼비백산하고 하고, 바닷물을 가르기도
하였으며, 바위에서 물이 솟아나게도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누구를 파견하시면서 그 역할에 맞는 능력을
주시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지팡이가 바로 교회에 주어진 하늘나라의
열쇠이고 그 열쇠가 바로 오늘 복음에서 맺고 풀 수 있는 성령의 능력인
것입니다.
성령강림은 교회에서 이루어졌고, 성령이 한 분이시듯 교회도 성령으로
하나가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리스도로부터 파견된 참 교회임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그 교회 안에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평화를 빈다’라고 하시는 인사는 바로 우리에게도 하시는 말씀입니다.
“내가 교회를 사랑하여 파견하면서 나의 생명이고 모든 것인 성령을
맡기셨으니, 너희는 그것을 믿고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마라.”
그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교회에 주어졌음을 믿는 것이 곧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대한 사랑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불안해하지 맙시다. 그럴 때마다
그분의 상처를 봅시다. 피를 주신 분이, 생명을 주신 분이, 무엇은 주실 수
없으셨겠습니까?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 담당 전삼용 요셉신부 -
◈ [수도회] 성령 충만한 삶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요셉 수도원)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6월8일 성령 강림 대축일
사도2,1-11 1코린12,3ㄷ-7.12-13 요한20,19-23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 요한 20,19-23
성령 충만한 삶
저는 수녀님들과 함께 피정하면서 성령을 충만히 받았습니다. 수녀님들도
피정을 시작하면서 매일 아침 성무일도때 마다 성령 송가를 노래했고, 하여
성령을 충만히 받았습니다.
지금 미사는 우리가 성령을 충만히 받았음을 체험하고 확인하며 또 성령을
충만히 받는 시간입니다. 저는 참으로 오늘 성령 강림 대축일을 맞이하여
성령님께 큰 선물을 받았습니다.
하나는 바로 이 은혜로운 시기에 수녀님들의 피정지도를 맡았다는 것이며,
하나는 수녀님들의 피정 중에 제가 26년 동안 몸 담았던 요셉수도원을
지난 3.26일 떠난 후 어제 처음 방문했다는 것입니다.
은인 자녀의 혼인미사를 위한 수도원 방문이었지만, 원장직을 내려놓고
안식년을 위해 수도원을 떠난 후 이렇게 어제처럼 성령 충만한 분위기에서
힘차게 미사를 드려보기는 처음입니다.
어제 수도원을 방문했을 때의 다음 두 가지 깨달음도 순전히 성령의
선물이요, 평생 잊지 못할 체험입니다.
하나는 '요셉수도원'은 떠나려야 떠날 수 없는 '내 운명이자 사랑'이란 무한
책임에 대한 깨달음이었고, 수도원을 찾았을 때 '내면에서 솟구치는 새로운
힘'에 대한 깨달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임을 만났을 때, 내면에서 샘솟는 그런 힘이었습니다.
하여 지난밤은 임을 만난 기쁨에 제대로 잠을 못 이루었습니다.
이 모두가 성령의 선물입니다.
오늘은 부활시기를 끝내는 부활시기의 절정인 성령강림대축일입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 모두에게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참 좋은 성령의 선물로
우리를 충만케 하십니다. 오늘 강론은 성령 충만한 삶에 대한 묵상입니다.
첫째, 공동생활에 충실하십시오.
공동생활에 충실할 때 성령 충만한 삶입니다. 애당초 우리 그리스도교의
영성은 두 말할 것 없이 그리스도 중심의 공동체 영성입니다.
공동체 영성에 바탕을 두지 않은 개인 영성은 환상이요 착각이기
십중팔구입니다. 오늘 두 독서와 복음은 모두 공동체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독서의 성령강림의 강렬한 체험을 누렸던 이들은 오순절이 되어
모두 한 자리에 모였던 사도들이었습니다.
성령은 거센 바람처럼 사도들이 있는 온 집안을 가득 채웠고, 세계 모든
나라에서 온 독실한 유다인들 역시 성령으로 가득 차 하느님의 위업을
선포합니다. 성령강림으로 모든 불통은 사라져 완전 소통의 만인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성령은 하느님 사랑과 힘의 현존이자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입니다. 성령을 통해 자유자재 활동하시는 하느님이자 부활하신
그리스도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닫아걸고 있던 제자들의
공동체에 성령을 통해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은 물론, 오늘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에게 평화를 선사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너희'는 개인 모두를 포함한 공동체를 뜻합니다.
이런 공동체의 평화가 진정한 평화요 개인 평화의 강력한 버팀목이 됩니다.
세상에 성령의 주님께서 주시는 이런 평화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니 평화와 더불어 기쁨이란 성령의 선물을
받은 제자들 공동체입니다. 우리 또한 이 거룩한 미사 중 평화와 기쁨의
선물을 받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하여 우리가 받은 성령의 은사는 모두 공동선을 위한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바오로의 말씀처럼 우리는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
공동체가 되었고,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 바로 이런 한 성령
안에서 일치의 공동체요, 일치된 공동체 안에서 성령 충만한 삶의
실현입니다.
둘째, 성령을 갈망하십시오.
성령을 갈망함은 하느님을, 그리스도 예수님을 갈망함을 뜻합니다.
주님은 분명 말씀하셨습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루카11,9-10).
'우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 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우리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습니까?'(루카11,13).
성령을 갈망할 때 성령의 선물을 받아 성령 충만한 삶이요 성령의 열매를
받습니다. 바로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신의, 성실, 온유, 절제의
열매들입니다(갈라5,22-23).
그러니 성령은 우리의 모두입니다.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1코린12,3).
우리는 성령의 힘으로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하고 외칩니다(로마8,15ㄴ).
성령의 은혜가 무한합니다. 세상에 성령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습니다.
우리의 불안을 평화로, 슬픔을 기쁨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교만을
겸손으로, 불평을 감사로 바꿔주는 성령의 힘이요, 성령의 샘에서 끊임없이
샘솟는 하느님 찬양과 찬미입니다.
오늘 우리는 화답송 후렴, '주님, 당신 숨을 보내시어, 온 누리의 얼굴을
새롭게 하소서' 기도하며 성령을 갈망했고, '오소서, 성령님' 노래하며
성령의 도래를 갈망했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마라나타!', 즉 '오소서, 주 예수님!'을 기도했지만,
우리는 '오소서 성령님' 성령의 오심을 이 거룩한 미사 중 기도합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복음의 부활하신 주님은 숨을 불어 넣으며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창조자 성령이요 위로자 성령이요 치유자 성령입니다. 우리를 용서하고
위로하고 치유하심으로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시는 성령입니다.
우리가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이런 참 좋은 성령을 갈망하는 것이며, 성령께
감사하는 일뿐입니다. 우리 받은 모두가 성령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성령강림대축일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그동안 공동생활에 충실하며, 성령을 갈망해온 우리 모두에게 평화의
성령을 충만히 부어주시며 말씀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요한20,21).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 [기타] “성령을 받아라.”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의 평화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약속을
믿는 마음에서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2014년 가해 6월8일 성령 강림 대축일 복음묵상
“성령을 받아라.” (요한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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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에 사로잡혀 방구석에 꼭꼭 숨어 있던 제자들의 모습을 그려봅니다.
서로의 눈을 마주치는 것도 불편했을 분위기, 서로 알고 있는 모두의
비겁함에 누구 하나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던 분위기, 정말 힘든 시간이었을
겁니다. 스승 예수님과 함께 했던 많은 것들이 기억으로 살아 움직였을
겁니다. 이미 그분을 따르지 못했던 시간은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이고 그저
후회일 뿐입니다.
그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첫 인사로 평화를 전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그리고 성령을 불어넣으셨다고 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의지가 강하고 심지가 곧은 사람이라고 해도 두려운 것은
똑같습니다. 용기가 있다는 것은 두려움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누구든 두려움을 느끼면서 살아간다는 말이지요.
굴곡 많은 삶 속에서, 두려움 앞에 서야만 할 때,
우리는 설명하기 힘든 초라함을 체험합니다.
성령을 받은 후의 제자들의 백팔십도 달라진 삶을 떠올려봅니다.
그들에게 더 이상 두려움도 없어 보입니다.
어디서든지 당당하게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순교의 관도 마다하지 않게 됩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체험은 두려움을 없애주는 것이라 생각해도 될까요?
아닙니다. 두려움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얻는 것입니다. 두려움을 이겨야 할 이유와 두려움을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어차피 우리의 힘으로는 벅찰 수밖에 없는 두려운 상황을 만나게 되어 있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활동하셔도 두려운 것은 두려운
것입니다. 두렵겠지요. 왜 안 두렵겠습니까?
다만 두려움을 대하는 마음에 변화가 생기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게 간절히 청해야 합니다.
어떤 두려움 속에서도 하느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믿음과
그 믿음으로 인해 얻을 수 있는 평화를 청해야 합니다.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성령께서는 우리가 선택해야 할 태도를 위해 힘을 주십니다.
그분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의 평화와 다르다 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분을
믿고 따를 수 있을 때 얻어지는 평화입니다. 믿고 따를 수 있는 힘을 위해
성령께서 우리 안에 활동하실 수 있도록 마음을 열고 청해야만 합니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서울] 성령 강림 대축일
2014년 가해 6월8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 요한 20,19-23
피정을 다녀왔습니다. 피정을 지도하신 수녀님께서는 우리가 기도를
열심히 하면 잊고 있었던 상처들, 그러나 나의 삶에 많은 아픔을 주는
상처들, 하느님께 가지 못하게 가로막는 상처들을 치유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태중에 있을 때 받았던 상처, 자라면서 받았던 상처, 부모,
형제, 이웃에게 받았던 상처들이 있습니다. 그런 상처는 ‘희망기도’를
통해서 치유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희망기도는 청원기도와는 달리, 나의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무엇을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되면 좋겠습니다.’라는 희망을 기도하는
것입니다.
강론을 준비하는 것도 늘 부담이 됩니다. 매일 강론을 준비하는 것, 주일
강론을 준비하는 것이 기도이며, 제가 사제로 살아가는데 참으로 유익한
일인데 그것을 준비하는 것 역시 부담이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나의 삶을 돌아보며, 교우들에게 도움이 될 말씀을 전하는 것이 강론입니다.
세상의 일들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표징을 읽고 숨겨진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아내는 것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말씀으로 전하는 것이
강론입니다. 강론을 하는 10분은 금세 지나가지만 준비하는 1시간은 늘
‘생손앓이’를 하곤 합니다. 앞으로는 강론 준비도 부담이 되지 않도록,
하느님을 찬미하는 기쁨의 시간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하였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중요한 일, 소중한 일들을 하게 됩니다. 중요하고
소중한 일들이 기쁘고 즐거우면 좋겠지만 그런 일들이 커다란 짐으로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 일들이 마음에 큰 부담이 될 때가 있습니다.
학생들은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중요하고 소중한 일입니다. 그런 공부가
부담이 된다면 재미가 없을 것이고, 공부를 잘하기 어렵습니다. 직장인들은
회사에 열심히 다니고, 창의적인 것들을 만들어 내야합니다. 그런 일들이
부담이 된다면 직장 생활이 재미없을 것입니다. 아내들은 가정을 돌보고,
밥을 하고 설거지를 하고, 시장을 봅니다. 자녀를 키우는 일, 남편을 위해서
맛있는 식사를 준비하는 일, 가족들을 위해서 청소를 하는 일이 부담이
된다면, 그것이 해야 할 의무가 된다면 이 또한 재미가 없을 것입니다.
오늘은 성령강림 대축일입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전하는 것이 큰 부담이었을 것입니다. 말이 다른
이방인들에게 예수님을 전하는 것,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을 전하는 것은 정말 큰 부담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전하다가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질 수도 있고, 예수님처럼 죽임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가족들을 떠나야 하고, 앞으로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실지 걱정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성령께서 함께
하였습니다. 성령께서는 제자들의 그런 모든 부담을 기쁨으로, 희망으로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수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나의 부담, 나의 의무, 나의 책임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오직 주님만을 믿는다는
고백이라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가장 사랑하시고, 가장 기뻐하셨던
일들은 사람들의 믿음이었습니다. ‘너의 믿음이 너를 살렸다. 나는
유대인들에게서는 이런 믿음을 보지 못하였다.’ 주님은 우리의 능력, 재능,
업적을 보지 않습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가진다면 다른 모든 일들은
주님께서 함께 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들 각자는 살아가면서 부담스러운 일들이 있을 것입니다. 제가 강의,
강론 준비가 부담스러웠듯이, 어떤 분들은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어떤
분들은 기도하는 것이, 어떤 분들은 가족을 돌보는 것이, 어떤 분들은
누군가를 도와주는 일들이 부담스러웠을 것입니다. 또 우리는 각자 끊어
버리고 싶은 악한 습성들이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게으름이, 어떤 분들은
노름이, 어떤 분들은 알코올 중독이, 어떤 분들은 미움과 분노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 성령강림 대축일을 지내면서 성령의 은사를 청했으면 좋겠습니다.
슬기, 통달, 굳셈(용기), 지식, 의견, 효경, 두려움(경외)의 은사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우리들의 부담과 악한 습성들을 하느님께 드리고, 성령의
은사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예전에 읽은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성령이 아니 계시다면 하느님은 멀리만 계신다.
성령이 아니 계시다면 그리스도는 과거에 머무신다.
성령이 아니 계시다면 복음은 죽은 문자에 불과하다.
성령이 아니 계시다면 교회란 한낱 조직에 불과하다.
성령이 계시면 부활하신 하느님 여기 계시고
복음은 찬란한 생명력을 내뿜고 교회는 성삼위와의 통교를 의미하고
권위는 해방자의 섬김이 되며 선교는 성령강림의 축제가 된다.
전례와 그리고 미사는 하느님왕국에 미리 참여함이 되고
인간의 행위는 성령으로 하느님으로 가득 차리라! 아멘.”
- 서울 대 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평화를 위해 기술과 능력을 쓰라고 파견
2014년 가해 6월8일 성령 강림 대축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 요한 20,19-23
평화를 위해 기술과 능력을 쓰라고 파견
모든 교육 후에는 파견으로 이어지게 마련입니다. 졸업 역시 그렇지요.
사람이 교육으로 변화되어 그 배움을 갖고 사람들에게 파견되는 거지요.
기술이나 능력이라는 힘을 길러 자기를 위한 이득을 위한 파견이라 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교육시켜 하늘이라는 영원세상을 위한 파견이었습니다.
평화를 전할 업무를 지워 파견되는 제자들의 입장을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평화를 위해 기술과 능력을 쓰라고 파견하시고요.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요한 20,21)’
-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 [인천] “내가 가진 은사를 서로를 섬기는데 사용합시다.”
2014년 가해 6월8일 성령강림 대축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 요한 20,19-23
오늘은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는 독서에서 묵상한 내용이고,
하나는 복음에서 묵상한 내용입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앞부분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잠가 놓고 있었다.’ 그
말씀이 저에게는 아이들이 저를 대하는 느낌과 비슷한 거 같다.. 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나를 보고 도망가는 것이나, 노래 연습할 때
목소리를 내지 않는 모습들을 볼 때 그렇습니다.
아이들이 저에게 마음이 조금 열려 있다면 힘들거나 약간 창피해도 열심히
따라 부르는 모습을 조금 보일 텐데, 그러지 않는 거 같습니다. 연애인을
좋아하고 따라하듯이 저에게 매력이 있다면 뭔가 따라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도 모르겠는데 그런 게 없는 거 같습니다. 인기라는 것이 어느 정도는
필요한지도 모르겠더라고요.
조재연 신부님도 청소년 사목자는 어느 정도 아이들의 관심을 모을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하는데요. 저는 그런 매력이 별로 없는 거 같습니다.
무뚝뚝하고 매력도 없는데, 화도 잘 냅니다. 오늘로 아이들을 세 번째
울렸네요.
가만 보면 아이들을 사목하는데 타고난 달란트는 없는 거 같습니다. 그래서
한계를 많이 느끼고 벽에 부딪힌 거 같은 막막함이 많은데요. 지금 마음은
안 되니까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 아니라 더 성실하게 하고픈
마음이 있습니다. 왠지 모르겠는데 아이들을 대하고 지내다보면 제 바닥을
보는 느낌이 들어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조그만 아이들이 저를 한참 바라보고 있으면 왠지 형식적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제 마음이 들키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바로 뜯어고치려는 성급한 마음이 드러나기도 하고, 성가나 기도를 쉽고
재밌게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이 거의 없다는 걸 발견하기도 합니다.
아이들이 저의 그런 부족함을 드러내 보여주는 거 같고, 그것이 필요함을
대신 말해 주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전 같으면 그런 문제들이
보이지 않게 아예 그런 일들과 거리를 두었을 겁니다. 그런데 오늘은
주님께서 아이들을 통해 ‘이 일들을 받아라~’ 하시는 듯합니다.
두 번째는 독서의 내용을 보면서 생각난 겁니다. 마지막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나라 사람인 우리가 저들이 하느님의 위업을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언어로 듣고 있지 않는가?’ 하는 겁니다. 여러 나라
사람들이 사도들의 말을 각자의 언어로 듣고 이해하고 있는 모습인데요.
그 모습을 보면서 얼마 전에 외국에서 연수할 때의 모습이 생각이 났습니다.
30여 개 국에서 사람들이 모였는데요. 그 사람들도 회의하는 내용을 각자의
언어로 들었습니다. 어떤 분은 그런 모습 자체가 초대교회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와 같은 것이 아닌가.. 성령께서 우리에게 임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를 하셨는데요. 그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예상하시겠지만 여러 통역사가 있었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에게는
프랑스에서 한국으로 선교를 와서 40년 간 사셨던 임신부님이 계셨고요.
다른 나라 사람들도 그렇게 서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두 세가지 언어를
하는 사람이 한 가지 언어 밖에 하지 못하는 사람 옆에서 통역을 해 주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두 세가지 언어를 하는 레바논 사람이 이집트
사람에게 아랍어로 통역을 해 주었고, 네 가지 언어를 한다는 어떤 자매님이
브라질 사람에게 회의 내용을 통역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더 많은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달란트와 능력을 가지신 분들이
그 달란트를 서로를 위해서 사용하고자 했을 때 초대교회에서 보던 것과
같은 놀라운 일이 우리 안에 있을 수 있었는데요. 우리 안에도 그런 놀라운
일들이 있을 수 있겠죠. 서로서로가 가진 달란트를 나누고 부족한 지체를
돕는다면 그런 일들을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두 가지 예화를 통해 여러분들이 조금 쉽게 그 일에 접근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는 아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에게..입니다. 어떤 신학교에서
설교학 시간에 설교실습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신학생이 처음 실습을
하는 날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순서가 되어 강단에 올라갔습니다. 그는
긴장이 되어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어떨 결에 입을 연 그는 "여러분,
지금 제가 무슨 말을 할는지 아십니까?"라고 했습니다. 모든 청중들은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 때 그 학생은 "여러분이 모르는 것을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하고 내려왔습니다.
노발대발한 교수는 다음 날도 올라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학생은 또
할 말을 잃고 이렇게 물었습니다. "여러분, 제가 무슨 말을 할는지 아십니까?"
라고 했습니다. 그 때 학생들이 웃으면서 "다 압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 그 학생은 "여러분이 다 아는 것을 제가 말할 필요는 없지요."라고
말하고 강단에서 내려왔습니다. 화가 난 교수가 그 다음 날에도 다시 그를
강단에 세웠습니다.
다음날 강단에 올라간 이 학생은 또 이렇게 물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제가
무슨 말을 할는지 아십니까?" 이때 학생들은 웅성웅성 하면서 안다는
학생도 있었고 모른다는 학생도 있었습니다. 그 때 이 학생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에게 전해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아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에게...’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크게 두 가지 경우에서입니다. 하나는 본당 공동체 안에서 먼저
활동하던 분들이 있고, 그렇지 않은 분들이 있을 텐데요. 그 안에서 필요한
것들을 먼저 알고 있는 분들이 가르쳐주고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새로 이사
온 분들이나 단체나 구역 기도에 들어간 분들이 훨씬 수월하게 적응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지금 수녀님이 냉담하다가 돌아온
분들에게 예비자 교리를 해 주고 있는데요. 아는 수녀님이 모르는
냉담자들에게 시간을 내어 주고 가르쳐주니까 냉담자들이 신앙생활로
돌아오는 것이 훨씬 좋아지는 거 같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신앙을 알고 있는 우리 신자들이 신앙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알려줄 수 있어야겠죠. 내가 신앙 안에서 체험한 좋은 것들을
전하고 알려줄 수 있다면 많은 이들이 올바른 길로 들어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내 눈에 보이는 그 일을 하는 겁니다. 그 일을 하는데
다음의 글이 도움이 될 거 같습니다. 송길원 교수의 글인데요. 그 내용이
이렇습니다.
【나와 아내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나는 오른손잡이 인데, 아내는
왼손잡이다. 그래서 습관에 따라, 국그릇을 왼쪽에다 잘 갖다 놓는다. 별거
아닐 것 같은 그 차이가, 신경을 건드린다. 거기다 나는 종달새 형이다.
새벽 시간에 일어나 설친다. 늦잠을 자면, 무조건 게으르다고 여긴다.
그런데 내 아내는, 올빼미 형이다. 밤새 부엉부엉 하다가, 새벽녘에야 잠이
든다. 도대체 맞는 구석이 없다.
나는 물 한 컵을 마셔도, 마신 컵은 즉시 씻어 둔다.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이고, 언제 해도 할 일이며 내가 다시 손을 댈지 모를 일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 내 아내는, 그게 안 된다. 찬장에서 꺼내 쓸 그릇이 없을 때까지,
꺼내 쓰다가 한꺼번에 씻고, 몸살이 난다. 나는 미리 준비하는 스타일이다.
그런 나와 달리, 아내는「떠나야 할 시간에」 화장한다고 정신이 없다.
다가가서 보면 참으로 가관(可觀)이다. 화장품 뚜껑이라는 뚜껑은, 다 열어
놓고 있다. 나는 그게 안 참아진다. 나도 모르게 버럭 화를 낸다. “아니,
이렇게 두고 외출했다 돌아오면 향(香) 다 날아갈 것 아냐, 뭐 땜에 비싼 돈
주고 화장품을 사, 차라리 맹물을 찍어 바르지.”
거기다 나는 약속 시간에 늦은 적이 거의 없다 나중에는 견디다 못해,
성경책까지 들이밀었다. “여보, 예수님이 부활만 하시면 됐지, 뭐 때문에 그
바쁜 와중에, 수의(壽衣)인 세마포와 머리를 싼 수건을 개켜 놓고
나오셨겠어? 당신같이 정리정돈 못하는 사람에게, 정리정돈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하고 싶으셨던 거야. 그게 부활의 첫 메시지야. 당신 부활 믿어.
부활 믿냐고?”
그렇게 아내를 다그치고 몰아세울 때 하늘의 음성을 들었다. "야, 이
자식아! 잘하는 네가 해라. 이놈아 네 부인이 안 되니까, 너를「붙여 놓은
것」아니냐! ” 너무 큰 충격이었다. 그렇게 나 자신의 생각을 전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람들이 늘상 궁금해 하는 게 있다. 하느님이 주신 나의
은사는 무얼까? 하지만 뜻밖에도 너무 간단하게 은사를 알 수 있다. '내
속에서 생겨나는 상대방에 대한 불평과 불만, 바로 그것이 자신의 은사인
것이다.'
일테면, 내 아내는 물건이 제자리에 놓여 있지 않고, 종이 나부랭이가
나뒹구는데도, 그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니까 불편한 게 없다.
오히려 밟고 돌아다닌다. 하지만 나는 금방 불편해진다. 화가 치민다. 이
말은 내가 아내보다 정리정돈에 탁월한 은사가 있다는 증거다.
하나님은 이 은사를 주신 목적이 상대방의 마음을 박박 긁어 놓고,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무기로 사용하라는데 있지 않다. 은사는 사랑하는 사람을
「섬기라고」주신 선물이다.
바로 그 때, 내가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내 아내한테는, 화장품 뚜껑 여는
은사가 있고 나에게는, 그 뚜껑 닫는 은사가 있다는 사실을ㆍㆍ 그때부터,
아내를 대하는 내 태도가 바뀌었다. 아내가 화장한다고 앉아 있으면, 내가
다가가 물었다 "여보, 이거 다 썼어? 그러면 뚜껑 닫아도 되지. 이거는?
그래, 그럼 이것도 닫는다." 이제는 내가, 뚜껑을 다 닫아준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그렇게 야단을 칠 때는 전혀 꿈쩍도 않던 아내가,
서서히 변해 가는 것이다. 잘 닫는 정도가 아니라 얼마나 세게 잠갔던지,
이제는 날 더러 뚜껑 좀 열어달라고 한다. 내가 먼저 변하니 이렇게 아내가
변할 줄이야 미처 몰랐지요.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기도가 있다. 제가 젊었을 때는 하느님에게 세상을
변화시킬만한 힘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중년이 되었을 때 내 가족과
친구들을 변화시켜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늙어 지난 세월을
돌아보니 저의 우둔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지금 드리는 기도는 저를
변화시켜 달라는 것입니다. 만약 제가 처음부터 이런 기도를 드렸더라면 제
인생은 크게 달라졌을 것입니다."】
내게 보이는 그 일을 하는 것이 나의 은사를 나누는 일일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 내가 받은 은사를 나누고 활용해 봅시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아이들에게 물었다.
“신부님이 좋아요? 싫어요?”
한 아이가 한 템포 쉬고 말했다.
“싫어요~”
- 인천교구 대부동 성당 김기현 세례자 요한 밤송이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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