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견 -
☆ 2014년 가해 6월12일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청주] 뿌리를 다스려라.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빈영억 라파엘 신부
† 제1독서 : 1열왕 18,41-46
† 복음 : 마태 5,20ㄴ-26
★ 엘리야 예언자는 카르멜 산에서 바알의 예언자들과 대결하여 그들을
물리친 뒤, 아합 임금에게 가뭄이 끝나고 비가 내릴 것이라고 전한다.
그리고 카르멜 산으로 올라가 징조를 살핀다. 마침내 큰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그는 아합 임금을 앞질러 이즈르엘까지 달려갔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해야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제단에 예물을 바치러 갈 때 형제가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면 그와
먼저 화해하라고 이르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의로움’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뜻있는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고귀한 가치였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정의(의로움)는 모든 품성과 덕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탁월한 것이며 저녁 별이나 샛별보다도 더 놀라운 것이라고 했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실천 이성 비판』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의로움의
원천인 도덕률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자주 그리고 계속해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내 마음을 더욱 새롭고 커다란 놀라움과 경외감으로
가득 차게 하는 것이 두 가지 있다. 내 머리 위의 별이 총총한 하늘과 내
마음속의 도덕률이 그것이다.”
예수님 시대의 바리사이들 또한 율법을 통하여 목숨을 걸고 의로움을
추구하던 이들이었습니다. 주님을 믿는 이들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해야 한다는 오늘의 복음 말씀을 들으며,
우리는 그리스도인 삶의 궁극적 의미를 드러내는 의로움이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번 주간 내내 듣고 있는 예수님의 산상 설교의
이 말씀은 세상의 의로움이 다 담지 못하는 주님의 의로움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의로움은 주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화해의 구체적 실천을 강조하는 오늘 복음 말씀처럼, 일상생활 속에서
소박하게 드러나는 삶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이러한 의로움은
하늘 나라가 겨자씨처럼 이 세상 안에서 소리 없이 자라나는 것과도
같습니다. 하늘 나라에 깃든 주님의 의로움을 바라보며 그 의로움에 조금씩
물들어 가는 가운데 이웃들과 소박하게 삶을 나누는 이들이야말로 사실은
가장 큰 의로움을 지닌 사람일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뿌리를 다스려라|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6월12일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마태5,20-26)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 마태 5,20ㄴ-26
뿌리를 다스려라.
고해성사를 준비합니다. 이른 아침 몸을 씻으면서 육체적인 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인데 마음보다 육적인 것에 집착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외적인 더러움보다 지저분한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이 더
문제입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탐하고 즐겼던 모든
것에 주님의 자비를 간구합니다. 육적인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원하시는 것은 육을 거스르게 마련인데 양다리 걸치기를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피정지도 신부님께서 ‘존중하는 사제’라는 주제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람은 인정받고 존중 받을 때 기분이 좋게 마련이다. 그러나 무시당하면
기분이 나쁘다. 상대방의 가치를 인정해 주고 높여주어야 한다. 언어로,
몸짓으로, 의견을 끝까지 들어주는 경청으로. 독선을 피우지 않고 함께하는
마음으로 어떤 결정에 참여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 나에게 존중을 받은
사람은 나를 존중한다.’는 말씀을 들으며 신자들을 제대로 존중해 드리지
못했던 부족함에 부끄러웠습니다.
신부님께서는 ‘공정한 사제’가 되기를 당부하셨습니다. ‘모든 신자들에게
공정한 사제, 차별을 두지 않는 사제, 누구에게나 똑같은 규칙과 기준을
사용해야 한다. 공정은 공평하고 정의롭다는 의미이다. 각 사람에게 줄 것을
주는 것이다. 각 사람의 몫을 다 주는 것이다. 일부만 준다든지 아예 주지
않는다면 불의한 것이다. 관심과 시간, 정성, 영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되
특별한 대우를 받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 들게 해야 한다. “있는 사람만
좋아해!”라는 인식을 준다면 사제생활에 치명적이다. 신자와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라. 그 거리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통제하는 것이 공정이다.
더군다나 끌어 들이지도 말아야 한다. 거룩함을 유지 하려면 불가피하게
떼어 놓아야 한다. 가족과의 관계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관심과 사랑, 시간,
정성이 치우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가난하고 고통을 받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정성은 시샘을 유발하지 않는다. 어려운 사람에게 다가가라.’는
말씀에 절제하지 못했던 지난 시간들이 속속들이 비추어졌습니다.
살아가면서 무엇인가 잘해 보려고 하면 남의 단점이 유난히 잘 보이게
됩니다.‘사람이 왜 저럴까? 이렇게 하면 좋을 텐데…이런 것 하나 제대로
못하나’ 하면서 사람을 판단하고 마음에는 화를 쌓기 시작합니다. 이런 것도
성장의 과정이기도 하지만 늘 나는 잘하는데 남이 따라주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한 단계를 넘어서서 남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것을 기쁨으로 여길 수 있으면 좋으련만 오늘도 여전히 탓을 남에게
돌립니다. 그러다 결국은 남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덩어리가 되어 남의
입에 오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재판에 넘겨지고, ‘바보’라고
하는 자, ‘멍청이!’ 라고 하는 자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상 안에서 흔히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
이렇게 강하게 말씀하실까? 사소한 것을 소홀히 하면 결국은 큰일을
저지르고 마는 것입니다.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는 옛말도 있습니다.
따라서 먼저 ‘마음을 다스려라.’‘뿌리를 다스려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성을 다스리지 못하면 미움이 생기고 미움이 커지면 더 큰
죄를 범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죄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먼저 마음을
단속해야겠습니다.
마음속에 분노를 품고 있는 사람은 상대방에게 온갖 해악이 미치길
은연중에 바라기 마련입니다. 심지어는 죽었으면 하고 바라기도 합니다.
그래서 요한의 첫째 편지 3장 15절에서는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입니다” 하고 말합니다. 따라서 겉으로 드러난 행위도 중요하지만
내적으로 싹트고 있는 화에 대해 무엇보다도 두려움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사실 형제와 이웃 간의 관계가 중요하지만 주님과의 관계가 올바로 서지
않고는 그 관계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주님 앞에 흠 없는 나를 가꾸고
주님의 마음으로 빛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마음이 똑바로 향해 있으면
행동 또한 바릅니다. 그리고 마음과 행동이 일치할 때 구원의 은혜를 입을
것입니다”(성 아우구스티누스).
성경 한 구절 더 읽겠습니다. “나를 심판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미리 심판하지 마십시오. 그분께서 어둠
속에 숨겨진 것을 밝히시고 마음 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 때에
저마다 하느님께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1코린4,5).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사랑의 실천
2014년 가해 6월12일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 마태 5,20ㄴ-26
저의 하루 일과를 보면 우선 새벽 5시쯤 밖으로 나가 걸으면서 묵주기도
20단을 바칩니다. 묵주기도를 바친 뒤에는 사제관 성당에서 성무일도를
바치고 영적독서와 성체조배를 하지요. 이렇게 거의 2시간 이상을
아침기도의 시간을 갖습니다. 그리고 미사와 낮기도, 저녁기도 시간을
가지면서 하루 중에 3시간 이상을 주님 안에서 머무르고 있습니다. 이렇게
살아가면서 ‘이 정도면 그래도 주님 안에서 머무는 시간이 다른 사람보다는
많은 것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지요. 하지만 하루
24시간이라는 생각을 하다 보니, 그 중에서 그렇게 많은 시간이 아니더군요.
또 주님께 머무르는 시간을 어떻게 이 정도로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하루 24시간 온전히 주님 안에 머물러도 부족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냥
‘이 정도면 됐어.’라고 말한다는 것은 스스로의 착각과 교만에서 나오는
것뿐이었습니다.
살아가면서 ‘이 정도면 됐어.’라는 말과 생각을 얼마나 많이 했습니까? 사실
이 정도면 충분한 것도 아닌데, 단순히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착각과
교만에 빠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서 갑자기 숨이 확 막히는
느낌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조항들을 더 확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단순히 ‘살인해서는 안 된다.’라는 계명만 잘 지키면 충분할
것이라 생각하는데, 이 계명을 확대해서 형제에게 성을 내거나 ‘바보,
멍청이’라고 하는 사람은 엄청난 벌을 받는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솔직히 당시의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은 정말로 열심히 살았던 사람들로
유명합니다. 그들은 정말로 철저하게 613개나 되는 율법 세부조항들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열심히 지키기는 했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다.’라는 안일하고 교만한 생각을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잘 살고 있다는 자신들의 기준에 맞춰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행위가 잦았던 것입니다. 이 기준 때문에 주님께서도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주님께서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라는 생각을 뛰어넘으십니다. 그런데
단순히 형제에게 화 내지 말고, ‘바보, 멍청이’라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러한 세세한 조항의 이행보다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하는 것이 사랑의 실천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고서는
아무리 세부조항을 만들어 지킨다 해도 의미가 없다는 것이지요.
지금 내 자신이 하고 있는 그 어떤 것도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특히 사랑이 담겨 있지 않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음을
기억하면서, 사랑이 가득 담겨진 말과 행동으로 언제나 충실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의 부족함이 사랑으로 채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체의 장애라 할지라도 마음에 두지 않는 한, 의지의 장애는 아니다.
마음을 평온하게, 영혼을 맑게, 신체를 쾌적하게 유지하자(H. 하이네).
어려움과 힘듦의 시간은 필요합니다.
작년에 등산을 갈 기회가 생겼습니다. 오랜만의 등산이었지만, 신학생 때
산악반을 하면서 꽤 많은 산을 다녔고 또한 평소에도 운동을 많이 했기
때문에 별로 힘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산 중턱까지 올랐을
때, 정말로 후회가 막심했습니다. 얼마나 더 가야 정상이 나오는지
막막하기만 했고, 매고 있던 배낭도 왜 이렇게 무겁게만 느껴지던 지요.
그러면서 산을 우습게 봤다는 반성, 또한 왜 등산을 왔는가 라는 후회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산 정상에 올라간 뒤에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산 정상에 이를
때까지 가졌던 모든 부정적인 마음들, 힘듦이 모두 사라집니다. 대신 정상에
올라가니 그다음 목표가 생기더군요. ‘다음에는 더 높은 산을 오르겠다.’라는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떠한 목표에 오르기 위해서는 어려움과 힘듦의 시간이 당연히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목표에 이른 뒤에 또 다른 더 높은 목표를 잡아서 이를
향해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 어려움과 힘듦의 시간을
이겨내기가 쉽지는 않다는 것이지요. 반드시 필요한 것인데도 말입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묵상 - 의로운 사람 되는 법
2014년 가해 6월12일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 마태 5,20ㄴ-26
의로운 사람 되는 법
채널A ‘모큐드라마 싸인’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일명 ‘500원 할머니’라는 가짜
거지생활을 하는 한 할머니를 취재하였습니다. 할머니는 지나가는 사람마다
붙잡고 500원만 달라고 떼를 씁니다. 그러나 그 할머니를 주위에서 본
이들은 그 할머니의 연기에 혀를 내두릅니다.
한번은 할머니가 식당에서 밥을 먹고 검은 비닐봉지를 놓고 나갔습니다.
주인이 할머니에게 다시 돌려주려고 비닐봉지를 보는 순간 할머니가 다시
들어와 화를 내며 비닐봉지를 낚아챘습니다. 그러는 도중 비닐봉지가
찢어지며 그 안에 있던 내용물들이 떨어졌습니다. 그 내용물들이란 몸에
치장하는 고가의 귀금속들이었습니다. 그 할머니는 자기 소유로 빌딩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장애인 흉내를 내며 구걸을 하고 있던 500원 할머니는
실상 굉장한 부자였던 것입니다.
중국에서는 대대적인 단속결과 거지의 80%가 가짜였고 실제로 어떤 이들은
대졸임금의 3배 이상 벌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구걸할 때 자신들에게 돈을 주지 않는 사람들을 흘겨보기도 합니다.
그렇게도 자비가 없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자신들의 죄를 덮는 길은 남을
정의롭지 않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뿐입니다.
우리에게 거지가 다가오면 도와주어야할까요, 말아야 할까요? 항상
도와주어야합니다. 정말 가난한 사람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들
중 어떤 이들이 가짜 거지라고 하여 그 핑계로 도와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비롭지 못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가 도와주었는데 그 사람이
거지가 아니었다면 그 사람은 정의롭지 못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도대체 우리의 의로움은 무엇이고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의로움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은 겉으로는 살인이나 간음, 고리대금업
등을 하지 않기 때문에 의인이라 스스로를 칭송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살인을 해서 꼭 살인자가 아니고 형제에게 화를 내거나 판단하는 자 또한
살인자라고 하십니다. 즉 행동으로만 정의롭다고 여기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비판하시는 것입니다. 간음을 해서 간음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라 음탕한 마음으로 쳐다보기만 해도 간음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리사이는 ‘구별된다.’란 뜻입니다. 자신들은 정의로워서
다른 이들과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겉으로만 올바로 산다고 이웃을
정의롭지 못한 사람들로 만들어버리는 이들입니다. 겉으로 자신이 의롭다고
하는 이는 이웃도, 하느님도 정의롭지 못한 사람들로 만들어버립니다.
이것이 그들 나름대로의 정의인 것입니다. 즉, 바리사이들와 율법학자들의
정의는 이것입니다.
“내가 올바로 행동하니까, 나는 다른 이들보다 의로운 사람이지. 또 나의
정의로운 삶을 하느님께서는 그만한 보답을 해 주셔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들의 행동으로 스스로를 정당화시키고 하느님은 그저
자신들의 정의로움을 인정해 주셔야만 하는 자신들의 하수인으로 보는
정의롭지 못한 정의입니다.
우리의 정의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정의는 이래야합니다.
“나는 정의롭지 못한 사람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정의로 내가 정의롭게
되었다. 그런 면에서 다른 이들을 판단할 만큼 정의로운 사람은 못된다.”
그렇습니다. 내가 정의롭지 못한 사람이 되어야 하느님의 자비와 정의가
드러납니다. 내가 정의롭고 세상으로부터 칭찬받는 사람이 된다면 하느님은
더 이상 정의롭고 자비로운 분으로 드러나실 수가 없습니다. 만약 내 힘으로
정의롭게 될 수 있다면 하느님이 당신 아드님을 죽여 가면서까지 정의를
세우셔야 할 필요가 없으니 하느님께서 하신 행위가 정의롭지 못한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내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을 정의로운 분이 되게 하는 것이
나의 정의입니다.
예루살렘 입성 때, 예수님은 많은 사람의 환호 가운데 입성하십니다.
그러나 며칠 뒤에 모든 백성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지릅니다. 그 분이 오실 때 그렇게 기뻐하던 백성이 이젠 그 분을
고통스럽게 죽이려고 목청을 높여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소리
지릅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지르는 것 자체가 예수님보다
자신들이 더 정의로운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정의로워지면 남을 판단하게 됩니다. 남을 판단하다가 예수님까지도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정의인
것이고 구원을 보지 못하는 정의인 것입니다.
그 분을 때린 것이 바로 나이고 그 분에게 침을 뱉고 오물을 던진 것이 바로
나이고 그 분을 십자가에 못 박아 고통을 드린 것도 바로 나라는 것을
인정할 때 비로소 내가 정의롭지 못한 인간이 되고 그리스도를 유일하게
정의로운 분으로 인정하게 됩니다. 이렇게 내가 정의롭지 못함을 고백할 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정의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구원의 길입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 담당 전삼용 요셉신부 -
◈ [수도회] 마음의 순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요셉 수도원)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6월12일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열왕기 상18,41-46 마태5,20ㄴ-26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 마태 5,20ㄴ-26
마음의 순수
얼마 전의 강렬한 깨달음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보이지 않는 울타리가, 봉쇄지역이 있어야 하고 이를 지켜야 한다.
수도자는 물론 믿는 모든 이에게 필요한 내외적 울타리와 봉쇄지역이다.
이게 없으면, 이를 지키지 않으면 마음의 순수도 불가능하다.
아, 그러니까 사막의 고요를 확보하기 위한 수도원의 전통적인 외적
봉쇄지역은 내적 봉쇄를 상징하는 구나. 내가 나름대로의 일과표 준수를,
기도시간, 밥시간의 준수를 강조한 것도 결국은 울타리를, 내적봉쇄지역을
잘 지키라는 말이었구나.‘ 하는 깨달음입니다.
이어 수십년 전에 읽은, 그러나 지금도 뇌리에 생생한 성철 큰 스님의
일화도 생각났습니다. 스님은 1955년 동안거부터 1963년 동안거까지
팔공산 파계사 성전암에서 만 8년을 스스로 만든 철조망 울타리에 갇혀
수행에만 전념했습니다.
"철조망으로 둘러쳤으니 이제는 완전히 갇힌 것입니다."
-아니지, 자물쇠가 안쪽에 있으니 갇힌 것은 반대쪽이네.-
성철스님이 파계사 성전암 주위에 철조망을 쳤을 때 시자와 주고 받은
대화입니다. 스님께서는 성전암에 불공하러 오는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으며 그 방법으로 암자 주위에 철조망을 치기로 한 것입니다.
하여 부산 서면 고철물 시장에서 철조망을 구입해 와서 암자 주변을 완전히
둘러막고 입구에는 문을 달고 안쪽에다 큼직한 자물쇠를 채웠고 그
울타리의 봉쇄지역에서 치열한 내적 담금질을 통해 마음의 순수에
이르렀던 것입니다(스님의 맏상좌 천제스님이 당시를 회상하여 쓴 글의
일부 참조).
바로 이게 마음의 순수를 지키기 위해 내외적 울타리가, 봉쇄지역이 얼마나
절실한지 보여주는 강렬한 상징적 일화입니다.
이런 나름대로의 내외적 울타리와 봉쇄지역이 없이는 결코 마음의 순수에
이르지 못합니다. 성인들의 삶을 깊이 들여다 보면 모두가 내외적
봉쇄생활에 충실했음을 봅니다.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라.'는 주님의 말씀처럼
궁극의 울타리이자 봉쇄지역은 '주님 사랑 안'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게 마음의 순수를 유지하기 위한 첫째 요소입니다.
다음 시편 구절에서 시편 저자는 바로 하느님이 궁극의 봉쇄지역임을
고백합니다.
'내 영혼아, 오직 하느님을 향해 말없이 기다려라.
그분에게서 나의 희망이 오느니!
그분만이 내 바위, 내 구원, 내 성채. 나는 흔들리지 않으리라.'(시편62,6-7).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제자들은 물론 우리 모두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5,20ㄴ).
바로 마음의 순수를 말하는 것입니다. 형제에게 성을 내거나 '바보!'라고
하거나 '멍청이'라고 하는 일체의 말의 살인, 마음의 살인까지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원망을 품고 있는 형제에게 먼저 화해하고 예물을 바치는 행위 역시 마음의
순수를 표현합니다. 새삼 마음이 순수해야 일체의 살인행위를 피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하여 수도자의 모든 수행이 목표하는 바도 마음의
순수입니다. 힌두의 성자 라마크리슈나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비밀스런 능력에 관심을 갖는 인간은 신의 임재 속에 살 수 없다. 그런
현상들이 네 안에 생겨나더라도 조금도 귀를 기울이지 마라. 비밀스런
능력을 획득하기는 쉬워도 마음의 순수에 이르는 길은 몹시 힘들다.
순수함을 지니는 자는 종교의 진정한 모습을 안다.“
둘째는 사랑입니다.
사랑 있어 마음의 순수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사랑할 때 마음이 깨끗해져 하느님을 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죄가 없어 깨끗한 마음이 아니라 사랑할수록 하느님을 닮아 깨끗한 마음,
마음의 순수입니다. 이런 사랑 있어 죄도 용서 받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내는 사랑(1코린13,7)'이 마음의 순수에 이르게
합니다.
셋째는 기도입니다.
기도 역시 사랑입니다.
간절히, 항구히, 끊임없이 기도할 때 마음의 순수입니다.
바로 1독서 열왕기 상권의 엘리야 예언자가 그 모범입니다. 다음 카르멜 산
꼭대기에서 가뭄 해소를 위한 비를 기다리며 기도하는 모습이 얼마나
간절하고 절실한지요. 그대로 그 장면을 인용합니다.
-엘리야는 카르멜 꼭대기에 올라가서, 땅으로 몸을 수그리고 얼굴을 양
무릎 사이에 묻고 시종에게 일렀다.
"올라가서 바다 쪽을 살펴보아라.“
"아무것도 없습니다(There is nothing).“
엘리야는 일곱 번을 그렇게 다녀 오라고 일렀다.-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여호수아가 그 백성들과 함께 예리고성을 일곱 번 돈
다음 그 성이 무너졌듯이(여호5,13-6,21), 마침내 일곱 번째, 엘리야의
절체절명의 간절한 기도가 끝나자 하느님의 응답입니다.
이런 간절하고 절실한 순수한 마음의 기도가 있어 하느님의 응답입니다.
마음의 순수는 고정불변의 실재가 아니라 유동적 실재입니다.
항구히, 자발적으로 내외적 울타리의 봉쇄지역을 준수할 때, 끝없이
사랑하고, 끊임없이 간절히 항구히 기도할 때 비로소 마음의 순수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마음과 생각을 깨끗이 정화해
주십니다.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 [기타] 진실을 직시하고자 하는 마음이 우선적입니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우리의 모순은 진실을 보려 하지 않으려는 이기심에서 시작됩니다.'
2014년 가해 6월12일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마태오5,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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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께서 의식하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미사 중 평화의 인사를 언제
나누는지 기억하고 계신가요? 예, 맞습니다. 성체를 모시기 전, ‘하느님의
어린양’을 노래하기 전에 우리는 평화의 인사를 나눕니다.
여기에는 커다란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모시기 전에, 우리는
그분께서 원하시는 모습을 보여드립니다. 그것은 화해와 일치와 나눔의
모습입니다. 만일 우리가 누군가에 대한 미움으로 가득 찬 상태로 성체를
모신다면, 그것은 분명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는 죄가 될 것입니다.
하여, 교회는 미사 전에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으면 고해성사를 보도록
권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사의 시작 단계에서 사제와 신자는 공동
고백과 함께 죄의 사함을 청합니다. 그리고 성체를 모시기 바로 전, 사제와
신자 모두는 서로에게 평화의 인사를 나누면서 그리스도를 모실 준비를
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고귀한 죽음을 지불하면서까지
우리에게 알려주시고자 한 것은 그리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나눔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그것을 못하며 살아가는 우리이지요. 이런 예수님의 마음이 무척
매력적입니다. 얼마나 멋지신 분입니까?
정말 수없이 많은 모순적인 모습으로 삶을 꾸려나가는 것이 우리입니다.
신앙 생활 안에서도 예외는 아닌 듯 합니다.
하여, 그분의 매력적인 모습에 더욱 부끄럽고 죄송스러워지나 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모순적인 모습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요? 아마도 이 삶이 다 할 때까지 불가능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조금씩이라도 우리의 모순적인 모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싸움에 그
의미를 두어야 할 것입니다.
방법을 알려드리렵니다. 그것은 먼저 스스로에게 진실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진실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 어떤 진실도 볼 수 없습니다.
불편한 진실일지라도 그 진실을 직시하고자 하는 마음이 우선적입니다.
그래야 내 안의 모순이 보일 것이고, 고쳐 나아가고자 하는 자기 싸움이
허락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자신 안의 불편한 진실을 인정하고 개선하려는 노력을 할 수
있다면, 이 세상은 참으로 많은 화해를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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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가슴이 미어진다.
내가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나 하는 답답한 마음에 너무 힘이 든다.
강정 마을, 밀양, 세월호, 부정선거 등등, 곳곳에서 들려오는 가슴 아픈
진실들 때문에 울분을 가라앉힐 수가 없다.
진실의 절규에 귀를 막아서는 안 된다.
어떻게 지켜온 나라인데, 협잡꾼들이 판을 치게 나둘 수 있겠는가?
폭력이 난무하는 현장에서 힘없는 이들과 함께 하는 신부님들과 수녀님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려주었으면 한다.
교회의 윗전에 앉아 계신 분들께서도 이제는 일어나셔서 목자답게 고통
받는 양들을 위해서 한 소리를 해야 한다. 의로운 척 온갖 열변을 토하던
야당이라는 작자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선거철에 온갖 비굴한 모습
보이면서 표 동냥 하더니, 선거 끝나자 모르쇠로 나가고 있다. 아무리
정치하는 인간들이라고 하지만, 나라 망치고 인륜 저버리는 짓거리는 하지
마라. 이런 나의 생각이 종북이고 빨갱이라고 한다면 나는 기꺼이 종북이
되고 빨갱이가 되련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서울]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2014년 가해 6월12일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 마태 5,20ㄴ-26
살아오면서 힘든 날, 어려운 날도 있지만 기쁘고 즐거운 날도 있기
마련입니다. 언제가 가장 즐겁고 기뻤는지 생각합니다. 생각하지 않았는데
시험 성적이 좋게 나왔을 때, 원하는 대학에 합격했을 때, 내가 좋아하는
사람도 나를 좋아한다고 말을 했을 때를 기억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오랫동안 기다렸던 아이를 가졌을 때, 회사에 입사했을 때, 드디어 내 집을
마련했을 때를 기억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성당에 다니지 않았던 남편이
드디어 세례를 받았을 때, 암인 줄 알았는데 그것이 오진이라고 판명이
났을 때도 참 기뻤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인공위성이 없고, 기상 관측기구도 없던 옛날에는 자연의 이치를 아는
사람이 지혜롭다 하였고, 자연의 이치를 아는 사람들이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삼국지에서 제갈공명은 바람의 방향을 예측할 수 있었고,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것이 ‘적벽대전’입니다. 이슬람 제국이 해상 무역을
통해서 신라의 경주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바람을 이용할 줄 알았고,
경도를 측정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콜럼버스가 바람만을 이용해서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을 만날 수 있었던 것도 편서풍이 있다는 것을,
무역풍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엘리야도 바람의 방향을 예측하였습니다. 먹구름이
흘러오는 방향을 예측했습니다. 가물었던 땅에 비가 내릴 것을 예측 했으니,
그 옛날에 위대한 예언자로 불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내비게이션,
인공위성, 기상관측 기구를 통해서 원하는 곳을 쉽게 갈 수 있고, 1주일
혹은 한 달가량의 날씨도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지혜롭다
할 수 없습니다. 정말 지혜로운 것은 사람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내비게이션으로 찾아 갈 수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인공위성으로
예측하기도 어렵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처럼
겉모습만 하느님을 따라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신앙인은 세상 사람들
보다 더 치열하게 살아야 하고, 세상 사람들 보다 더 나누며,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참된 지혜는 며칠 앞의 날씨를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뜻을 아는 것입니다.
- 서울 대 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하느님의 뜻이란 이웃사랑이라고
2014년 가해 6월12일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 마태 5,20ㄴ-26
하느님의 뜻이란 이웃사랑이라고
돈 때문에 형제와 싸우고 이웃과 갈라지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합니다.
세상 불평불만 오해 시기 질투 등이 돈이면 해결되는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계속 돈을 좋아하니 이거 참 골치 아픈 돈이고 사람입니다.
형제와 화해하고 이웃과 화합하고 행복해지는 건 돈이 아니고 생각입니다.
그 생각은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사는 것으로 이웃과 화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이란 이웃사랑이라고 늘 반복하여 설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오 5,23~24)”
-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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