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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가해 6월14일 연중 제10주간 토요일
[청주] 헛된 맹세를 하지 마라.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빈영억 라파엘 신부
† 제1독서 1열왕 19,19-21
† 복음 마태 5,33-37
★ 엘리야는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엘리사를 만나 자신의 뒤를 이을
예언자로 세운다. 엘리사는 겨릿소로 밭을 갈고 있었는데 엘리야를 만나자
자신의 부모에게 작별 인사를 한 뒤 소를 잡아 사람들이 먹도록 내어놓고
엘리야를 따라나선다(제1독서).
★ ‘정직함’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예수님께서는 거짓 맹세는 물론
아예 맹세를 하지 말 것이며,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오.’라고만 하라고 이르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 말씀을 우리는 ‘정직성’ 또는 ‘진실성’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새길 수 있습니다. 사실 ‘정직’과 ‘진실’의 의무 또는 덕목은 모든 종교와
윤리의 기본적인 가르침이며, 사회의 법을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힘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이 우리에게 무척 무겁게 다가오는 것은 우리 시대가
진실과 정직보다는 허위와 왜곡을 일삼는 문화 속에서 병들어 가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한 사람의 정직함과 진실함의 가치는 그의
성향이나 외적 태도를 가리키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진리’와
어떻게 관련하는지에 따라 최종적으로 결정됩니다. 그가 과연 ‘진리를 담을
만한 그릇’이 되는지에 따라 깊은 인격적인 차원의 정직성과 진실성을
가늠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스 철학에서 ‘진실성’의 덕목을
가리키면서 ‘진리’와 같은 말을 사용한 데에는 이러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진리를 담을 그릇이 되는 것이 인간의 힘만으로, 사람의
덕성과 경험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진실은
진리와 닿아 있고, 인간적 진리라는 것은, 사실은, 가장 깊은 차원에서
하느님께 속할 때만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헛되고 과장된 맹세가 아니라 진실하고 겸허한 모습을 강조하신 것은
그러한 뜻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삶 안에서 자신의 ‘진실성’이 시험받는 순간마다 겸허하게 주님의
도움을 청하며 ‘나의 진리’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 더욱 귀 기울이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헛된 맹세를 하지 마라|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연중 제10주간 토요일 (마태5,33-37)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 마태 5,33-37
헛된 맹세를 하지 마라.
피정 지도 신부님께서 기도에 관해 도움을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창조하신 자연법칙을 위반하지 않으시는 가운데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기도할 때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섭리에 우리의 참여를 원하시지만 자연법칙을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나의 중요한 일을 나누는 것이고 나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기도는 행복한 삶을 위한 소망의 표현입니다.
때로는 결혼, 독신, 권력, 건강, 명예, 행복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청원기도의 모델을 예수님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겟세마니에서
예수님께서는“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마르14,36).하고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는 일상 안에서 늘 기도하기 보다는 아쉬운 일이 생기면 간절히
매달립니다. 늘 주님을 대면하고 찬미하며 청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이 생기면 놀라서 갑자기 기도합니다. 이때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는 약속을 마구 해댑니다. 청을 들어 주시기만
하면 당신께서 원하시는 것을 무엇이든 꼭 하겠다고 맹세합니다. 때로는
들어주시지 않으면 안 된다고 협박도 합니다. 그러다가 해결되거나 시간이
지나면 그 맹세를 잊고 전혀 거리낌 없이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인간의
연약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맹세하지 마라”고 하시며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할
것은 ‘아니요’ 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온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이유로든 군소리를 덧붙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는 어떤 상황에 접해서 이러 저러한 핑계를 얼마나 많이 댑니까?
나의 입장과 처지에 따라 헛된 약속도 많이 하고 그러다 보니 쉽게 잊어버린
것이 많습니다. 권위 아닌 권위를 내세우며 자기 위신과 체면을 살리느라
하느님의 이름을 판 경우도 있습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잇속 때문에
하느님을 얼마나 이용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분이시며 그분의 약속과 맹세는 변하지 않습니다
(히브6,17-18). 그러나 우리 인간은 너무도 자주 자기도 모르는 약속,
지키지 못할 약속을 남발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악’은
‘악’이고, ‘선’은 ‘선’입니다. 그러므로 악에는 언제나 ‘아니요’, 선에는 언제나
‘예’할 수 있는 마음을 키웠으면 좋겠습니다.
행동이 뒤따를 때 입으로 하는 말은 효과가 있습니다……. 입은 다물고
행동으로 말합시다. 우리는 불행히도 말로는 부풀어 있고 행동에는 텅 비어
있습니다”(파도바의 안또니오). 행동으로 따르지 못할 과장된 약속이나
맹세를 거두고 그저 삶으로 주님의 뜻을 드러내야 하겠습니다. 헛된 약속을
하지 않는 오늘을 축복해 주시길 청합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몸으로 믿음을 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2014년 가해 6월14일 연중 제10주간 토요일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 마태 5,33-37
우리는 살다보면 거짓말을 참 많이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의도적으로 하는 거짓말도 있지만,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게
되는 거짓말이 있습니다. 당연히 의도적으로 하는 거짓말은 큰 잘못이라고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거짓말을 하게 될
때에는 참으로 당황스럽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친구와 만나기로 약속했습니다. 친구는 약속을 자주 어기는
것을 내세우면서, 또 약속을 어기겠냐고 다짐을 받습니다. 그는 친구에게
“그때는 내가 정말로 급한 일이 있어서 그랬지. 다신 그런 일이 없을 거야.
만약 그런 일이 있으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라고 장담합니다. 그런데 이를
어떻게 합니까? 또 갑자기 급하고 중요한 일이 생긴 것입니다. 더군다나
마침 휴대전화를 들고 나오지 않아서 친구와 연락도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어쩔 수 없이 급한 일을 최대한 급하게 처리한 뒤에 약속장소로 바삐
뛰어갔습니다. 하지만 이미 약속시간은 1시간 넘게 지났고, 친구는 그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이런 경우가 바로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게 되는 거짓말입니다.
분명히 친구와의 만남에 대한 약속 자체는 거짓말이 아니지요. 그러나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기에 친구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 된 것입니다.
이는 베드로 사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
예고를 하실 때 어떻게 말했습니까? 그는 분명히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럼 이 맹세가 거짓일까요? 아닙니다. 그는 정말로
예수님을 사랑했고, 그 순간 예수님을 절대로 배반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는 예수님을 3번이나 부인을 했고
결국 거짓말을 한 셈이 된 것입니다.
거짓말을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요? 자신의 의도보다도 어쩌면 호언장담하는
맹세가 아닐까요? 맹세함으로 인해 거짓말이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맹세하는 것보다는 반드시 약속을 실천함으로써 믿음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정직함’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거짓
맹세는 물론 아예 맹세를 하지 말 것이며,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라고 이르시지요. 바로 의도된 거짓말은 당연히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며, 맹세를 함으로써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하게 되는
거짓말도 짓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도 이러한 맹세를 얼마나 많이 하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맹세를 얼마나 많이 어겨서 주님께 ‘거짓말쟁이’가 되고 있을까요? 이제는
주님께도 믿음을 드릴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절대로 헛된
맹세를 하지 않고, 몸으로 믿음을 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완벽하게 거짓을 꾸며낼 수는 있지만, 끝까지 그것을 관철시킬 수는 없다.
거짓말은 무게가 없기 때문에 달아보면 꼼짝없이 들통이 나게 되어있다
(이드리스 샤흐),
습관 때문에(‘따뜻한 하루’ 중에서)
한 젊은이가 백발노인에게 찾아가 물었다.
"제게는 정말 큰 소원이 있습니다. 이 소원을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러자 백발노인은 근처의 새하얀 백사장에 가서 '소원석'을 찾으면 된다고
말했다.
"소원석은 중앙에 별 문양이 있으니 명심하게."
젊은이는 그날부터 백사장에서 돌을 찾기 시작했다. 돌을 살펴봐서 찾던
돌이 아니라고 확인한 다음에는, 다시 확인하는 일이 없도록 바다 멀리로
던지는 일을 반복했다.
'언제까지 이 일을 지속해야 하나..'
젊은이는 한숨을 쉬면서도 돌을 찾는 일을 계속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젊은이는 백 한 번째의 돌을 살펴보다가 별 모양을 발견했다.
"드디어 찾았구나!"
젊은이는 크게 기뻐하면서, 무의식중에 이제까지 했던 것처럼 어깨에 힘을
주어 돌을 멀리 던지고 말았다!
젊은이가 겨우 찾아낸 소원석은 지금까지 그가 던졌던 돌들처럼 포물선을
그리며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
습관적으로 행하는 그 어떤 행동으로 인해 내게 다가오는 행복을 걷어차는
것은 아닐까요? 나의 잘못된 습관을 되돌아보았으면 합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맹세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
2014년 가해 6월14일 연중 제10주간 토요일
<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
복음 : 마태오 5,33-37
< 맹세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 >
요즘 애인이 변심했다고 하여 애인을 찾아가 보복을 해서 경찰까지
출동하는 사례들이 많이 나옵니다. 애인의 집을 차로 들이박는 것은 그나마
애교에 불과합니다. 정말 엽기적인 사건들도 많이 나옵니다. 영국에서는 여
치과의사가 변심한 옛 남자친구가 치통을 호소하자 치아 32개를 몽땅 뽑아
보복했다는 기사도 있었습니다.
사랑은 서로를 믿어야하는데 그 믿음이 배신으로 돌아왔을 때는 분노가
치밀어오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만나다보면 헤어질 수도
있을 것임을 몰랐던 것일까요?
얼마 전에 어떤 신자분에게 안타까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친척이 잠깐만
돈을 빌려달라고 해서 가지고 있는 현찰, 그러나 지금까지 모은 모든 돈을
차용증도 없이 빌려주었다고 합니다. 억 단위를 사기를 당한 것입니다.
그분은 사람을 잘 믿고 베푸는 사람인데 자신에게 왜 그런 안 좋은 일이
일어났는지 답답해 하셨습니다.
사실 우리 주위에는 이런 분들이 적지 않게 있습니다. 사랑은 사람을 믿는
것이고 그래서 굳게 믿었는데 배신이나 사기를 당하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모순이 하나 있습니다. 사랑은 ‘사람이 완전하다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믿는 것이 사랑이라고 해서, 그 사람이
하느님처럼 완전하다고 믿어서는 안 됩니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란 말도
있듯이 사람의 마음은 쉽게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을 믿어야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완전하게 믿는다는 것은 곧 자신이 완전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내가 완전합니까? 내가 죄를 짓지 않아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입니까? 완전한 사람은 아무도 없기에 우리가 다른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자신도 잘못을 하면서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정의롭지 못한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자신도
완전하지 못한데 어떻게 다른 사람은 완전할 것이라고 믿으려 하는
것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예, 맹세를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맹세를 한다는 의미는 그 맹세한 것을 반드시 성취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맹세하는 것 자체가 자신이 완전하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례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맹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말을 꺾으십니다. 베드로는 비로소 자신이 맹세를 지킬 수 없는
부족한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런 겸손한 마음을 가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또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말은
바로 내 자신이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나는 자꾸 자신을 높이고 내세우고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그런 마음 때문에 맹세도 하는 것입니다. 아예 말에서
자신이 드러나지 않게 만들라는 것입니다. 우리 불완전함을 인정한다면
우리 힘이나 말로써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나 없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라고 하시는데
우리가 자꾸 우리 힘으로 무언가를 하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앞으로는 미사도 빠지지 않고, 성경도 매일 읽고, 사람을 판단하지도
않을 것을 맹세합니다.”
이는 바리사이의 기도입니다. 우리는 다만 이렇게 기도해야합니다.
“저는 당신 도움 없이는 어떤 것도 이루어 낼 수 없는 존재입니다. 다만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이것이 세리의 기도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큰일을 이루어내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다만 겸손하고
순결한 모습을 보여주기만을 기대하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눈에는
성모님께서 많은 일을 한 이들보다 더 좋아 보이시는 것입니다. 진정 우리는
우리 힘으로 무언가를 이루어내려는 교만을 버리고, 오직 우리 부족함을
깨닫고 그분의 자비에 우리 자신을 내어맡길 수 있어야겠습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 담당 전삼용 요셉신부 -
◈ [수도회] 진실과 겸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요셉 수도원)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6월14일 연중 제10주간 토요일
열왕기 상19,19-21 마태5,33-37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 마태 5,33-37
진실과 겸손
진실하고 겸손한 삶 자체가 힘이요 감동입니다.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주님 사랑의 은총은 우리 궁극의 울타리이자 봉쇄지역이요 안식처입니다.
주님 사랑 안에 머물 때 마음의 순수요 진실이요 겸손입니다.
이런 마음은 그대로 은총의 열매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 말씀 역시 단호합니다.
하느님은 하느님이요 인간은 인간입니다.
이를 깨달아 알아 믿는 것이 진실이요 겸손입니다. 하여 주님은 하늘을
두고도, 땅을 두고도, 예루살렘을 두고도, 네 머리를 두고도, 아니 그 무엇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라 하십니다. 모두 우리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일이요
사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말할 때에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할 것은 '아니오.' 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말은 그대로 마음의 반영입니다. 단순한 마음에서 단순한 말입니다.
바로 이게 겸손이요 진실입니다. 주님 사랑 안에 머물 때 비로소 자기를
알아 이런 겸손하고 진실한 마음이자 말입니다.
진실과 겸손을 떠난 입에서 배설되는 무수한 헛된 말들이 공해가 되어
주변을 오염시키고 숱한 상처를 줍니다. 삶을 아주 복잡하고 혼란하게
만듭니다.
마태복음의 산상설교는 초대교회 예비신자들을 위한 교리교육내용입니다.
세례를 받아 주님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신자들을 위한 교리입니다.
주님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 주님의 은총으로 변화되어 진실하고 겸손해진
이들이 지켜야 할 교리입니다.
오늘 1독서 열왕기 상권의 짧은 일화는 엘리사의 성소를 묘사합니다.
'그때 엘리야가 엘리사 곁을 지나가면서 자기 겉옷을 그에게 걸쳐 주었다.'
그대로 엘리야를 통한 하느님의 영이 엘리사를 사로잡음을 상징합니다.
은총이 작용했기에 엘리사의 반응 역시 아주 단순하고 진실합니다.
즉시 기존의 삶과의 결별이 이루어집니다.
완전히 내외적으로 새롭게 변모된 모습입니다.
'엘리사는 엘리야를 떠나 돌아가서 겨릿소를 잡아 제물로 바치고, 쟁기를
부수어 그것으로 고기를 구운 다음 사람들에게 주어서 먹게 하였다.
그런 다음 일어나 엘리야를 따라 나서서 그의 시중을 들었다.“
엘리야를 통해 주님을 만난 엘리사의 변모된 모습입니다.
바로 우리의 성소를 상징합니다. 주님의 부르심과 우리의 응답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평생과정의 성소입니다. 주님은 매일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는 응답합니다. 끊임없이 내 중심의 삶에서 벗어나 주님 중심의 삶을
살아야 비로소 진실하고 겸손한 삶입니다.
바오로의 말씀대로 주님 사랑 안에서 끊임없이 하느님과 화해하여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야 하는 우리들의 운명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의 부르심에 응답한 우리
모두를 당신 중심의 진실하고 겸손한 사람들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주님, 당신은 제 몫의 유산, 저의 잔, 당신이 제 운명의 제비를 쥐고
계시나이다."(시편16,5ㄱ참조).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 [기타] 정말 식별을 잘 해야 합니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올바른 국가를 위해서 국민이 제일 먼저 해야 할 것은 부정한 권력으로부터
언론을 지키는 일입니다.'
2014년 가해 6월14일 연중 제10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마태오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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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과거에 비해 자기 소신이 참으로 뚜렷한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자기 의견을 거침 없이 쏟아내는 것을 자연스럽게 봅니다.
예, 맞습니다. 우리는 ‘예’ 할 것은 ‘예’라 해야 하며, ‘아니요’ 할 것은
‘아니’라고 해야 합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는 곡해할 소지도 있음을 주의해야만 합니다.
이 말씀에서 ‘예’ 나 ‘아니오’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할 것은’이라는 말에 담겨 있습니다.
즉 ‘해야만 할 것’에 맞는 답을 내놓으라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어떤 답이던 옳음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예’라고 할 지, ‘아니오’ 라고 할 지에 대해서는 옳은 것이
무엇이냐를 항상 생각한 후에 선택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나 ‘아니오’라는 답변이 아니라, 옳은 것을 선택하고
행동했느냐를 가지고 우리의 삶을 평가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나라 안이 무척 시끄럽습니다. 저 역시 견딜 수 없는 분노와 아픔
때문에 당장이라도 한국 땅으로 날아가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수녀님들의 수건이 벗겨지고, 벌거벗은 할머니들이 짐짝처럼 들려져 나가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았습니다. 단순하고 무지한 머리에 어떻게 얻었는지
모를 면허증을 휘두르며,
가장 하느님께서 싫어하실 짓거리를 하느님의 뜻이며 진리라고 떠드는
총리 후보자도 보았습니다. 부정선거의 증거들은 속속들이 나타나고 있지만,
야당이라는 작자들도 한 마디도 하지 않고 함구하고 있습니다.
세월의 안타까운 영혼들은 덧없이 잊혀져 가고 있고, 정치하는 인간들은
정략적으로 이용하기에 급급합니다.
온 나라가 거짓으로 도배를 한 듯 합니다.
이러한 시국적 혼란 속에서 신자들 사이에도 의견이 둘로 나누어져 있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말 식별을 잘 해야 합니다.
우리의 이기심이나 기득권이 아니라, 복음이 기준이 되어 옳은 편에 서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을 따라야 합니다.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온갖 편견과 이유 없는 증오심에 휘말려서는 안 됩니다.
‘예’ 와 ‘아니오’라는 답은 여러분이 선택할 몫입니다. 하지만 어떤 답이든
그 답에는 복음적인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신부들과
수녀들이 고통 받는 이들이 있는 곳의 현장으로 나가서 그 고통에 동참하는
이유가 잘못된 사상에 물들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기호나 적성에 맞아서 즐기러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들에게조차 몰이해와 손가락질과 미움을 받을 것을 각오하고 본분에
맞는 삶을 살고자 자신을 던지는 것입니다.
두렵고 떨리지만 ‘해야만 할 것’이기에 용기를 청하면서,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 하는 그분들을 격려와 응원은 못할 망정 비난을 해서는 안 됩니다.
누구보다도 기도하는 분들이기에 그러한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어주십시오.
둘.
교회 내에서도 이토록 갈라지는 가장 큰 이유는 언론매체의 책임이 큽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독재자들이 제일 먼저 손아귀에 넣고 주무르려 했던 것이
언론이지요. 이를 관제언론이라고 합니다. 사실을 보도해야 할 언론이 그
기능을 잃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 언론 속에 사는 사람들은 보도되는
내용대로 판단을 하게 됩니다. 속고 있는 줄도 모르면서 말입니다.
전 세계에서 인터넷 환경이 가장 좋다고 하는 대한민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가슴 아픈 현실입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올바른 편에 설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가장 반그리스도적으로 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서울] 연중 제10주간 토요일
2014년 가해 6월14일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 마태 5,33-37
군대에서 들었던 말입니다. ‘침상이 작으면 몸을 줄여라!, 신발이 크면 발을
늘여라!’ 군대는 개인의 사정과 개인의 요구를 다 들어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군대는 엄격한 규율과 통제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전쟁은
개인의 사정을 봐 주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발의
크기가 작은 편입니다. ‘240’입니다. 신발을 사려면 어려움이 있습니다.
남자들의 신발은 작은 것이 ‘250’정도이기 때문입니다. 제 발이 작은 것을
탓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에 매장엘 갔는데 직원이 친절하게
알려 주었습니다. ‘손님처럼 발의 크기가 작은 분을 위해서, 또는 발의
크기가 큰 사람을 위해서’ 매장을 특별하게 마련하였다고 합니다. 그곳에는
작은 신발도 많았고, 큰 신발도 많았습니다. 저는 제 마음에 드는 신발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가 된다는 것은
또 무엇일까요? 내 몸에 맞는 신발을 구하는 것과 같은 것은 아닐 것입니다.
군대에서 들었던 것처럼 원칙과 규정에 나의 몸과 마음을 맞추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신앙은,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지난 목요일에 부제반 설교학 시간에 부제님 한 분이 이렇게 발표를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앞으로 사제가 될 것입니까? 아니면 사기꾼이 될
것입니까?’ 그러면서 복음의 기쁨을 인용하였습니다. ‘강론자는 자신이
하느님께 사랑받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께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그리고
언제나 그분의 사랑이 결정적이라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아름다움을 마주하면서 강론자는 자신의 삶이 그 아름다움에 대한
충분한 찬미가 되지 못한다고 자주 느껴서 그토록 위해한 사랑에 더욱
충실하게 응답하고자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마음을 열어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을 내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말씀이 자신의 삶에 와 닿지
못하게 한다면, 그 말씀이 자신을 반성하도록 이끌지 못한다면, 그 말씀이
자신에게 권고가 되지 않는다면, 그 말씀이 자신을 흔들어 놓지 않는다면,
그 말씀과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내지 않는다면, 그분 분명히 거짓 예언자,
사기꾼, 협잡꾼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복음의 기쁨 151항)
부제님의 말을 떠올리면서 오늘 복음 묵상을 하니 명확하게 이해 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따르는 것이 제자의 길입니다. 자신의
욕심과 자신의 뜻을 먼저 찾으려는 것은 사기꾼의 행위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 서울 대 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도회] 믿음의용기[단상]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6월14일 연중 제10주간 토요일(2014년 6월 14일)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 마태 5,33-37
믿음의 용기
“예, 아니오”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참된 용기가 있어야 됩니다.
참된 용기는 참된 믿음에 뿌리를 박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교회의 많은
순교자들은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이 있었기에 진리에는 예, 거짓에는
아니오 하고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순교자들의 용기를 칭송하지만 우리의 구체적 삶 안에서는 믿음이
없기에 이 핑게 저 핑게를 둘러댑니다. 내 자신이 다칠까 두려워합니다.
진리의 빛은 ‘예’라고 할 때 찬란히 빛나고 거짓의 어둠은 ‘아니오’라고 할
때 산산히 흩어집니다.
오늘 하루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합니다. 우리 가슴은 하느님이 계시는
거룩한 장소입니다.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님의 복음 단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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