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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가해 6월27일 예수 성심 대축일
[수도회] 예수 성심의 사랑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신부
† 제1독서 신명 7,6-11
† 제2독서 1요한 4,7-16
† 복음 마태 11,25-30
(사제 성화의 날)
예수 성심 대축일은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을 공경하며 그 마음을 본받고자
하는 날이다. 이 대축일은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다음 금요일에
지내는데, 예수 성심이 성체성사와 밀접하게 관련되기 때문이다. 예수
성심에 대한 공경은 중세 때부터 시작하여 점점 보편화되었다. 1856년 비오
9세 교황 때 전례력에 도입되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대축일로 지내고
있다.
한국 교회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권고에 따라, 1995년부터 해마다 예수
성심 대축일에 ‘사제 성화의 날’을 지내고 있다. 사제들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복음 선포의 직무를 더욱 충실히 수행하는 가운데 성덕을 쌓고자
다짐하는 날이다. 또한 모든 그리스도인이 사제직의 존귀함을 깨닫고
사제들의 성화를 위하여 기도하는 날이기도 하다.
▦ 오늘은 예수 성심 대축일로, 우리가 이달 내내 지내 온 예수 성심 성월의
절정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한없는 사랑과 자비를 온전히 담고 있는 예수
성심의 신비 앞에 마음을 활짝 열 때 가슴속의 상처는 치유와 위로를
얻습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드러내신 예수 성심을 깊이 신뢰하는
마음으로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신 주님은 강한 손으로 그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신 참하느님이시다. 이제 모세는 백성에게 하느님에게서 받은
계명과 규정들과 법규들을 지키라고 명한다(제1독서).
★ 사랑과 믿음에 대한 권고이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한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제2독서).
★ 예수님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 감추신 것을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신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드린다.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이들을 당신께 오라고 초대하신다. 그분의 멍에는
편하고 그분의 짐은 가볍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예수 성심 대축일에는 우리의 ‘마음의 길’에 대해서도 각별히 생각하게
됩니다. 문득 프랑스의 사상가 파스칼이 말한 ‘마음의 논리’가 떠올랐습니다.
그의 철학 책 『팡세』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단상은 퍽 인상적입니다.
“마음은 이성이 알지 못하는 자신만의 이유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를 수
없이 많은 방식으로 안다. 마음이 어느 것에 충실한지에 따라 보편적 존재
또는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마음이 어느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것에는 냉담해진다. 당신은 마음을 거부하고 이성을
택하였다. 당신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이성 때문인가?”
이 말에서 우리가 끊임없이 이기심의 덫에 갇혀 살 것인지 아니면 하느님을
향할 것인지는 ‘마음의 길’이 어디로 향하는지에 달려 있다는 점을 새겨
봅니다. 파스칼의 생각을 따라가 보면, 우리는 이성만이 아니라 마음을
통해서도 진리를 알게 되며, 더구나 진리이신 하느님을 ‘결정적으로’ 알게
하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늘 하느님을 향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자주 어둡고 무디어 영원한 진리를 깨닫는 데 무력한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마음이 사랑의 질서 안으로 들어올 때만이 비로소 마음으로
하느님을 알아 뵙습니다. 우리 마음의 길이 사랑을 향할 때만이 하느님을
알게 된다는 사실을 오늘 제1독서는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라고
증언하면서 확실하게 알려 줍니다. 파스칼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육체와 정신을, 그리고 그들의 모든 업적을 함께 모아 놓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최소한의 사랑의 움직임을 일으킬 만한 가치가 없다.
사랑은 더 높은 질서에 속한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불타는 예수 성심을 마음에 품으며 저의 마음도 그
사랑의 질서가 당기는 힘에 깊이 이끌리기를 성체 앞에서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편안한 멍에이며 제 마음에 미혹과 이기심이
아니라 ‘진리’라는 가벼운 짐을 지어 주시리라는 점을 믿기에 그분 앞에
머뭅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예수님의 마음을 간직하라|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6월27일 예수 성심 대축일; 사제 성화의 날 (마태 11,25-30)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마태 11,25-30
예수님의 마음을 간직하라.
오늘은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드러내신 예수 성심을 특별히 기억하는
날입니다. 또한 ‘사제 성화의 날’로 사제들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복음
선포의 직무를 더욱 훌륭히 수행하는 가운데 완전한 성덕으로 나아가고자
다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닮고 그 삶을 충직하게 사는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길 기도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우리 각자의 마음으로 간직하고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주어진 소명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인간적인 마음이 지배할 때가 훨씬 많습니다. 심지어는 기도 안에서도 내
욕심을 채우려고 합니다. 그러니 언제 예수님의 마음으로 바뀔지 장담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간직하고 싶은 소망은 있지만 그에 따르는
노력과 정성은 여전히 소홀하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예수님의 대표적인 마음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마태11,29-30). 온유한 마음은 부드러움입니다. 어떠한 상황 안에서도
흔들림이 없는 마음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세상의 모든 것이 다
변해도 좋습니다. 주 하느님 당신 안에 뿌리 내리면!”이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느님 안에 뿌리 내리면 모두를 하느님의 섭리로 받아들이며 호들갑을
떨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겸손은 한없이 낮아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시면서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의
눈높이를 맞춰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면서 겸손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노자는 “알면서도 모르는 게 으뜸이요, 모르면서 아는 게 병통”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당시에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에게는 배척을 당하였습니다. 소위 잘나고 똑똑한
내로라하는 사람에는 쉽게 받아들여 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최고였기 때문에 주님의 가르침이 들어갈 곳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철부지들에게는 받아들여졌습니다. 그야말로 촌놈들,
상것들, 별 볼일 없는 못난이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에게는 겸손과 단순함이 있었고 그것이 사실 세상의 희망입니다.
잘난 사람은 남을 등쳐먹으려 애를 쓰고 기득권을 잃지 않으려 서로를
헐뜯고 깎아 내리지만 때 묻지 않은 철부지들은 새로운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머리로 계산하지 않고 마음을
열고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단순한 사람을 미덥게 여기십니다. 그러므로
아는 것이 결코 병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서 안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물을 꿰뚫는 통찰력을 가리키며 친숙해 지는
것, 그리고 감정을 이해하며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결국 알기 때문에
달라지는 것을 포함합니다. 또한 남녀가 결혼을 통해 가장 깊이 만나는
것을 ‘안다’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안다고 하는
것은 당신의 사랑으로 충만히 채워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안다는 것은
곧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고 하셨고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마태11,27) 고 말씀하심으로써 예수님과
하느님과의 긴밀한 관계를 알려주셨습니다.
이제 그 아버지에 관해서 아들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고 그분이 알려준 아버지를 세상에 알려야
합니다. 그분을 알리기 위해서 그분을 알아야 하는데 그 첫 자세가
“어린이와 같이”(마르10,15)단순한 마음으로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어린이는 잔머리를 굴리지 않습니다. 온전히 부모에게
의존합니다. 계산하지 않고 부모를 따릅니다. 그것이 겸손이기도 합니다.
단순하면 할수록 하느님의 뜻을 더욱 잘 깨닫게 될 것입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어렵고 힘들어하는 사제들이 참 많습니다.
2014년 가해 6월27일 예수 성심 대축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마태 11,25-30
윌리엄 스태퍼드(William Stafford, 1914~1993)라는 시인이 있습니다. 그는
성인이 된 후로 매일 한 편의 시를 썼던 것으로 유명하지요. 창작의 어려움을
겪은 한 젊은 시인이 스태퍼드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많은 시를 쓸 수 있습니까? 저는 단어 하나하나마다
혼신을 쏟으며 만족스런 시 한 편을 쓰는 데 몇 주가 걸립니다. 저보다
나이도 훨씬 많으시면서 어떻게 매일 시를 쓰실 수 있습니까?”
젊은 시인에게 스태퍼드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자네의 기준을 낮추게나.”
50년 동안 윌리엄 스태퍼드는 약 22,000편의 시를 썼습니다. 과연 이 시
전부가 출간되었을까요? 당연히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가 발표한
시는 현대 영시의 위대한 유산이 되었습니다. 즉, 자신의 기준을 낮춰서
매일 매일 한 편의 시를 쓴 것이 후대에 남기는 유산이 된 것이지요.
스태퍼드는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역시 이러한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특히 주님을 따름에 있어서
무조건 따라야 하는 마음을 간직해야 합니다. ‘능력이 없다’, ‘가진 것이
없다’, ‘운이 없다’ 등등의 이유를 들면서 주님을 따를 수 없음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갖춘 사람들을
당신께로 부르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듯이,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의 기도를 바치십니다. 즉,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 11,25)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진짜 지혜가 아니라 단지 지혜처럼 보이는
것을 지녔을 뿐인데도, 예수님께서 그들을 지혜로운 자들이라고 표현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그들은 단순히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지혜를
갖추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렇게 세상에서 인정하는
지혜를 갖춘 사람을 원하지 않습니다. 비록 세상에서는 철부지라고 부를지
모르겠지만, 그보다는 주님께 깊이 들어갈 수 있는 사람, 낮은 곳이라도
주님과 함께라면 기꺼이 갈 수 있는 사람, 늘 겸손한 마음을 갖춘 사람에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은총과 사랑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
사람들에게 부족한 모습이라고 해서 포기하고 좌절에 빠질 이유가
없습니다. 주님의 크신 사랑의 마음만으로도 충분히 주님의 참 제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이러한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을 공경하며 그 마음을 본받고자 하는
날인 ‘예수 성심 대축일’입니다. 단순히 주님의 사랑만을 기억하는 것이
아닌, 이제 우리 역시 이 사랑을 본받아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참 제자라 불릴 수 있으니까요.
참, 오늘 예수 성심 대축일을 1995년부터 해마다 ‘사제 성화의 날’로 지내고
있습니다. 사제들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복음 선포의 직무를 더욱 충실히
수행하는 가운데 성덕을 쌓을 수 있도록 스스로 다짐하고, 또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 사제들을 위해 기도하는 날입니다. 어렵고 힘들어 하는
사제들이 참 많습니다. 이들을 위해 꼭 기도해주시길 바랍니다.
과실은 사람을 결합시키는 힘이다. 진실은 진실한 행위에 의해서만
전달된다(톨스토이).
이런 사제를 청합니다.
어느 책에서 본 글인데, 너무 좋아서 글 내용을 적어 놓았지요. 문제는 어떤
책에서 보았는지를 도무지 모르겠네요. 어느 성인의 글이었는데.... 그래도
함께 공유하고 싶어서 그냥 올려봅니다.
“나는 세상에 있으나,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습니다. 나는 인간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말해 줄 수 있습니다. 나는 죽음에 관해 잘 알고
있습니다. 죽음을 이기신 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주인이고 나의 벗이기
때문입니다. 그대가 원한다면 그분에 관해서 말해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대가 그분을 알게 되도록 해 줄 수 있습니다. 만약 그대가 무언가를 찾고
있다면, 나에게 오시오. 만약 그대가 고통 받고 있다면, 내가 그대에게
갈게요. 나는 세상에 속해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분께 순명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그대가 마음에 두고 있는 많은 것들이 나에겐
무용지물입니다. 그래서 그대는 나의 얼굴에서 여유와 기쁨을 보게 됩니다.”
이 글을 보면서 사제의 모습에 대해 묵상을 해 봅니다.
사제는 교회 안에서 무엇이 되고자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묵상하게 됩니다.
즉, 만약 성직자로서 어떤 출세를 꿈꾸는 사람은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제는 세상의 중심에서 한참 떨어진 외진 곳에 있어도
그것이 고통이 되어선 안 됩니다.
요한 마리아 비안네 성인이 41년 5개월 동안 머물렀던 프랑스의 아르스,
오상의 비오 성인이 일생의 대부분을 보냈던 이탈리아의 산 조반니
로톤도를 보십시오. 이 두 곳 모두 정말로 외진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두
성인은 비록 외진 곳이었지만, 이곳에 하느님의 빛이 내리고 있기에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빛이 내리고 있는 곳, 그곳에 있음 그 자체로도 만족하고 감사하며
행복할 수 있는 사제. 이러한 사제가 되기를 주님께 청해봅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예수 성심(聖心)의 사랑 -사랑 예찬(禮讚)-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요셉 수도원)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6월27일 금요일 예수 성심 대축일(사제성화의 날)
신명7,6-11 1요한4,7-16 마태11,25-30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마태 11,25-30
예수 성심(聖心)의 사랑 -사랑 예찬(禮讚)-
예수 성심의 사랑입니다.
예수 성심을 통해 환히 들어난 하느님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없이 하느님을 알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인생 사랑의 학교에서 평생 하느님을, 사랑을 공부해야 하는 평생학인인
우리들입니다. 배우고 배워도 늘 사랑에는 초보자인 우리들입니다.
진정한 내적성장과 성숙도 사랑에 있습니다.
만병의 근원은 사랑 결핍에 있고 만병 통치는 사랑의 명약뿐입니다.
사랑은 우리 삶의 의미이자 존재이유입니다.
사랑 있어 충만한 삶이요 사랑 없어 허무한 삶입니다.
사랑을 공부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오늘 두 독서와 복음도 모두 우리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강조합니다.
'주님께서는 너희를 사랑하시어, 강한 손으로 너희를 이끌어 내셔서,
종살이하던 집, 이집트 임금 파라오의 손에서 너희를 구해 내셨다.'
비단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우리 역시 사랑하시어 세례성사를 통해
당신 자녀로 삼으신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사도 요한 역시 하느님의 사랑을 강조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제2독서를 살펴보니 '사랑'이란 단어가 무려 16회 나옵니다.
사랑은 모두임을 웅변합니다. 사랑뿐이 길이 없습니다.
사랑만이 답입니다. 사랑 없으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닙니다.
복음의 예수님 또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하시며 당신 성심의 사랑으로 우리 모두를
초대하십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아버지와 예수님과의 깊은 사랑의 관계를 깨닫게 하는 확신에 찬
말씀입니다.
오늘은 예수 성심으로부터 배워야 할 사랑에 대한 묵상나눔입니다.
첫째, 찬미(讚美)와 감사(感謝)의 사랑입니다.
예수 성심은 그대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했을 때 저절로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입니다.
불평 불만의 어둠은 흔적 없이 사라집니다. 찬미와 감사는 하느님 향한 우리
사랑의 표현이자 우리의 하느님 사랑을 북돋웁니다.
예수님도 오늘 복음에서 아버지께 드리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로 시작합니다.
우리 수도자들 역시 찬미와 감사의 시편성무일도를 통해 끊임없이 하느님
사랑을 고백합니다.
둘째, 온유(溫柔)와 겸손(謙遜)의 사랑입니다.
예수성심의 사랑은 겸손과 온유로 환히 들어납니다.
진정한 사랑은 겸손과 온유입니다. 온유와 겸손의 사랑이 우리에게 안식을
주고 우리의 짐을 가볍게, 우리의 멍에를 편하게 해줍니다.
주님 역시 우리 모두가 당신의 온유와 겸손을 배울 것을 간곡히 권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을 가볍다."
주님의 온유와 겸손의 사랑을 배워갈 때 비로소 우리 삶은 짐이 아니라
선물이 될 수 있습니다.
셋째, 격려(激勵)와 위로(慰勞)의 사랑입니다.
예수성심의 사랑은 격려하고 위로하는 사랑입니다. 충고하고 조언하는
건조한 사랑보다는 격려와 위로의 다정한 사랑이 절실한 시대입니다.
매일 미사와 시편성무일도의 공동전례기도를 통해 우리를 격려하시고
위로하시며 치유하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넷째, 공감(共感)과 배려(配慮)의 사랑입니다.
차별하고 무시하는 게 큰 죄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서로 존중하여 공감하고 배려하며 환대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 친히 공감과 배려, 환대의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우리의 처지를 공감, 배려하시어 우리의 짐을 덜어주시고
우리의 멍에를 편하게 해 주시고자 매일의 성체성사에 초대해 주십니다.
다섯째, 정화(淨化)와 성화(聖化)의 사랑입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합니다. 하느님을 뵈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정화하여 깨끗하게 하는 것은 사랑뿐입니다.
죄가 없어 깨끗한 마음이 아니라 사랑이 많아 깨끗한 마음입니다.
하느님의 거룩함을 닮을 수 있는 길, 역시 사랑뿐입니다.
오늘은 사제성화의 날입니다.
사제뿐 아니라 믿는 이들 모두가 사랑으로 성화될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진정 예수 성심의 사랑을 닮아갈 때 정화되고 성화되는 우리들입니다.
여섯째, 긍정적(肯定的)이고 낙관적(樂觀的)인 사랑입니다.
절망이 대죄입니다.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사고는 병든 사고입니다.
치유제는 예수성심의 하느님 사랑뿐입니다. 사랑할수록 부정적인 사고는
긍정적인 사고로 비관적인 사고는 낙관적이 사고로 바뀝니다.
어둠을 빛으로, 죽음을 생명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바꿔주는 예수성심의
사랑입니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으로 이끄시는 하느님 섭리의
사랑입니다.
인생은 사랑의 학교입니다. 사랑하라고 선물로 주어진 인생입니다.
사랑만 하기도 턱없이 짧은 인생입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있고 답은 예수성심의 사랑안에 있습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 예수성심의 사랑으로
충만케하시어 당신 '사랑의 샘'이 되어 살게 하십니다.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 [서울] 예수 성심 대축일
2014년 가해 6월27일 연중 제12주간 금요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마태 11,25-30
오늘은 예수 성심 대축일입니다. 선배 신부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예수님의 마음을 닮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께서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예수님처럼 말하고, 예수님처럼 행동하면 여러분은 모두
예수님처럼 될 수 있습니다.” 간결한 말씀이고,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삶이기도 합니다.
‘왔다 장보리’라는 드라마에는 두 가지의 마음이 드러납니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남의 것을
가로채고, 남의 것에 흠집을 내고, 거짓을 말하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남의 탓을 주로 합니다. 겉으로는 성공하는 것 같지만, 언제나
불안하고, 하늘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합니다. 재능이 있고, 일도 잘 하지만
따뜻함이 없고, 사람을 살리지 못합니다.
그런가하면 사람이 먼저인 사람이 있습니다. 옷을 만드는 목적은 옷을 입는
사람이 편하게 입는 것입니다. 사람을 위하는 일이 있다면 자신에게 돌아올
영광과 명예도 기꺼이 포기합니다. 가진 것이 많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고,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기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순간에는 천사와 같은 분들이 나타나서 도움을 주곤 합니다.
인문학에서도 두 가지의 길을 이야기 합니다. 하나는 경쟁과 성장입니다.
생존을 위해서는 경쟁을 하고, 다른 경쟁자와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폭력과
전쟁이 정당화 됩니다. 제국주의, 식민지의 운영은 바로 이런 패러다임에서
가능했습니다. ‘적자생존, 무한경쟁, 자연도태’는 당연한 생각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함께 살아가야 하는 지구촌의 많은 생명들이
멸종되었습니다. 다양한 언어들이 사라졌습니다. 소중한 자원들이
사라졌습니다. 모래위에 지은 집처럼 화려하지만 불안해 보이는 길입니다.
다른 하나는 ‘전일적인 관점’입니다. 대화와 타협입니다. 상생과 공존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상호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몸의
지체들이 모두가 소중하듯이, 우리와 함께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소중하다는 생각입니다. 갈대가 부러졌다고 꺾어 버리지 않습니다. 심지가
깜빡인다고 꺼버리지 않습니다. 인류의 스승들이 보여준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온 몸으로 살아가셨던 길입니다. ‘나눔, 희생, 헌신, 사랑,
희망’의 길입니다. 물질은 의식과 마음에 따라서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기운, 에너지, 하느님의 사랑이 우주의 모든 것들을 이끈다고 믿는 것입니다.
철학, 물리학, 심리학, 신학에도 새로운 물결이 흐르고 있습니다.
오늘은 ‘사제 성화의 날’이기도 합니다. ‘聖化’라는 말은 거룩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예전에 사람들은 천상의 세계가 있고, 지상의 세계가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천상의 세계는 신의 세계이고 거룩하며, 지상의 세계는
사람의 세계이며 세속적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지상의 세계가 거룩하게
되기 위해서는 천상의 세계의 거룩함이 흘러와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성전’은 지상에 있지만 천상의 것으로 인해서 거룩하며, 성직자도 지상에
살고 있지만 천상의 직무를 수행하기에 거룩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성수, 성물’은 지상의 것이지만 천상의 힘에 의해서 거룩하다고
여겼습니다.
거룩함이란 것은 단순히 지상의 것들이 천상의 것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우리는 성서를 통해서 ‘거룩함’의 또 다른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레위기 19장 3절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거룩해야
하는 구체적인 행위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로 십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웃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가난한 이들을 배려하며, 다른 이의
눈에 눈물을 흘리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천상의 기운이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거룩함은 하느님과의 관계일 뿐 아니라,
거룩함이라는 것은 사회적인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마태오 복음 5장 48절에서 예수님께서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도 거룩함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 거룩함이란 하느님과의
개인적인 관계일 수 있지만 이웃과의 관계회복을 더 강력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비를 베푸는 일,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일, 평화를 위해
일하는 일, 복음 때문에 희생을 당하는 일,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일이
바로 거룩함을 이루는 행위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처럼 된 다는 것’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부정적인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긍정적인 의미입니다. 부정적인 의미는 내 안에
하느님을 몰아내고, 내가 하느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창세기
3장 5절(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 게 될 것이다.)과 창세기 11장 4절(성읍을 세우고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은 탑을 세워 이름을 날리자.)에서 볼 수 있습니다. 교회는
하느님처럼 된다는 것을 잘못이해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폭력을
행사하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긍정적인 의미입니다. 내 안의 욕심과 이기심을 버리고 이제
하느님께서 내 안에 사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 입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또 나를 위하여 당신의 몸을 내어 주신
하느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갈라2장 20절) 이러한
삶은 사회의 정의를 이루고, 자신을 희생하며,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참된 성화라는 것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면서 사회 안에서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하느님의 자리를
밀어내고 우리가 하느님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욕심과 이기심을
버려버리고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우리 안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 서울 대 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성소국장 신부 -
◈ [기타] 십자가는 그분께서 보여주신 사랑입니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십자가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2014년 가해 6월27일 금요일 예수 성심 대축일 복음묵상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마태오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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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인이라면 이 복음 말씀에 대해 모르는 이는
없습니다. 특히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는 말씀은 각기 다른 번역본에 따라 표현의 차이는
있을 지 몰라도 그 내용은 알고 있을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지쳐야 하는 삶, 사랑조차도 때로는 짐으로 느낄 수 밖에 없는
삶, 이것이 우리의 삶의 모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여, “당신을 따르면
정말 평화의 안식을 얻을 수 있습니까?”는 질문으로부터 신앙생활을 시작한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게 된 우리는 늘 평안 속에 있는가요?
그분의 약속에 대한 희망이 당신의 걱정을 앞서고 있는가요?
온갖 종류의 사욕편정(邪慾偏情)에서 늘 자유로운가요?
이에 대해 자신 있게 말할 이는 없으리라 봅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그분을
믿고 있는데도 이리도 갈피를 못 잡고 흔들려야만 합니까?
우리가 간과한 것이 있습니다.
마지막 구절에 그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그렇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안식을 주신다는 것이 짐과 멍에로부터의
해방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짐과 멍에를 내려놓으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짐과 멍에로 바꾸어 지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우리의 착각은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분께 다가서면 내가 지고 있는 모든
짐을 내려놓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 대해 너무도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이 세상을 다하기
전까지 우리는 자기 몫의 아픔을 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시려
했습니다. 그래서 당신께서 보여주신 것이 십자가라는 것을. 그리스도교의
신앙은 십자가를 생각하지 않고는 그 어느 것도 자유로울 수 없고,
이루어지지도 않습니다. 이 십자가는 단순히 어깨를 짓누르는 짐이나
멍에와 같은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그분께서 보여주신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닮아가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원하는 이는 없습니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그 무엇이고, 그것이
그분의 약속을 위한 전제 조건이라 한다면 적극적으로 끌어안아야 합니다.
절대적인 희망은 결국 그 안에서 창출되기 때문입니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인천] “그분이 원하시는 물길에 따라 흘러가봅시다.”
2014년 가해 6월27일 예수 성심 대축일(시편 33장)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마태 11,25-30
반복되어 보여지는데 여전히 잘 하지 못하는 일들이 있는 거 같습니다.
아이들과 귀찮게 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인데요. 오늘 시편 말씀을 읽고 어제
새 신부님의 강론 이야기를 들으면서 뭔가 잘 될 것만 같은.. 달라질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 있었습니다.
우선 말씀을 보면 이렇습니다. ‘주님의 마음속 계획은 대대로 이어지네..’
하는 것이었는데요. 그 말씀을 들으면서 어제 미사 해 주러 오셨던 새
신부님이 해 준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피정을 하는 중에 하류로 이어지는 물길이 있었다. 그 물길을 바꿔보고
싶어서 장난을 쳤는데 다음날 보니 물길이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하류로
다시 흘러들어가고 있었는데, 문득 주님이 이루시는 일도 그와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문득 내가 피하고 외면하려 했던 일도 결국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흘러가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 가지
일에서 그런 거 같습니다.
먼저 아이들입니다. 요즘 아이들과 잘 해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함께
놀기 위해 다가가보기도 하고, 아이들과 관련해서 필요한 교육도 참가해
보고, 그와 관련된 책이나 영상들도 찾아보고 있는데요. 영상 가운데 한
선생님의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15분’이라는 강의에 나온 선생님이었는데 아이들을 차별하지
않고 친밀하게 대해주려고 노력하는 분이었던 거 같습니다. 그런데 그분
고백으로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이들을 차별하였고
아이들을 따뜻이 대해주지 못했다고 하는데요.
지금은 그렇지 않고 다른 사람으로 변화되어 다른 분들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자리에 섰습니다. 그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도 아이들에게
성실하고자 하는 지금과 같은 마음이라면.. 또 계속 좋은 것들을 배우고 그
일들을 실천해 나간다면 10년 20년 후에는 아이들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다른 모습이 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리고 떠오른 다른 한 가지 일은 이런 겁니다. 아침에 매실을 따려고
남리에 있는 밭에 갔는데 오늘도 vip 손님이 오셨습니다. 지난 번에 고구마
심고 있을 때 술 먹고 와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늘어놓고 귀찮게 했던
분인데요. 당시에 대꾸도 안 하고 빨리 가길 바랐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분이 두 분 계셨습니다. 첫 번째는
교황님입니다. 요즘 파격적인 행보를 많이 하셨는데, 문득 교황님라면
저분을 어떻게 대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노숙자나 말썽부리는
사람을 vip로 모시는 동인천 민들레 국수집 수사님이라면 그분을 어떻게
대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나와 같진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내 마음이 예수님과 같지 않음을 새삼 느꼈었는데요. 오늘
그 vip 손님이 다시 오셨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볼 거 같은데요. 문득
언젠가 나도 교황님이나 수사님과 같이 예수님을 닮은 모습으로 귀찮은
사람을 대해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마음가짐이 좀
달라졌는데요. 살짝 방향이 바뀌는 걸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꾸 귀찮다고 다른 길로 가려고 거부하지만 그분이 원하시는 물길을 바꿀
수 없을 거 같고, 그분이 내게 바라시는 일이라면 그렇게 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그렇게 변화되어 갈 수 있기를
바라고, 그렇게 될 수 있다면 나와 같은 죄인을 사랑하셨던 그분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하루, 그분이 원하시는 물길에 따라 흘러가봅시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딸이 워킹홀리데이를 가려고 했는데 자매님이 반대하셨다고 한다.
친척중에 외국 갔다가 바로 결혼해 버린 사람을 봐서 그렇다고 한다.
상관없지 않냐..고 했더니 이런 대답을 하신다.
“그래도 말은 통해야죠...”
- 인천교구 대부동 성당 김기현 세례자 요한 밤송이 신부 -
◈ [수도회] 사랑 덩어리[단상]
제1독서
<주님께서는 너희를 사랑하시어 너희를 선택하셨다.>
▥ 신명기 7,6-11
제2독서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 요한 1서 4,7-16
복음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 마태 11,25-30
예수 성심 대축일(2014년 6월 27일) 사랑 덩어리
영화 ‘그리스도의 수난’(the Passion of Christ) 가운데 한 장면이
생각납니다.
한 로마 병사가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르자 심장에서 피와 물이
터져 나오고 그 병사는 주님의 피와 물에 온 몸이 흠뻑 젖어 무릎을 끓고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바라봅니다.
교회 전승에 따르면 이 병사의 이름을 론지누스(Longinus)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심장에서 터져나온 피와 물로 세례를 받아 나중에는 순교까지
하는 위대한 성인이 됩니다.
심장은 우리가 엄마 배에서 생성될 때 제일 먼저 생기고 또 이 세상을 떠날
때 가장 마지막까지 기능하는 생명의 장기입니다. 그래서 심장은 단순히
신체 기관 중 하나가 아닙니다.
우리 몸의 중심이며 모든 힘이 나오는 원천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자주 예수님의 심장을 날카로운 창으로 찌릅니까.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중상하고 이간질합니다. 또 세월호 참사를
비롯한 사건들 때문에 아파하고 힘들어하고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의
호소를 외면합니다.
거짓에 눈감아 버립니다. 또 우리는 우리 자신들도 얼마나 괴롭히는지요.
이러한 것이 다 주님의 심장을 찌르는 악행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심장은
당신을 찌른 죄인까지 성인으로 변화시킵니다. 예수님의 심장은 사랑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사랑 덩어리입니다.
사랑이 응축된 곳이 심장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님은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시는 데에 결코 지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데에 지쳐 버립니다”(복음의 기쁨 3항)고 말씀합니다.
매일매일 지치지 말고 주님의 심장에 힘껏 달려갑시다.
- 성 베네딕도 왜관 수도원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님의 복음 묵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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