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ife ] Wine
와인 왕초보, 겁 없이 즐기자!
와인? 그냥 서양 막걸리! 와인을 대하는 왕초보의 자세
와인을 마시는 법은 간단하다. 1단계. 따고. 2단계. 마시면 된다. 이토록 간단한 것인데 와인 입문자를 위한 입문서가 수백권이나 되는 이유는 뭘까. 마시는 방법이 유독 복잡해서일까? 사전 지식 없이는 맛을 음미할 수 없어서일까? 아니다. 한 때 소수만이 특별한 날에 즐겨왔던 와인 문화가 대중화 되는 시기에 격식 없이 마시는 즐거움보다 격식 있게 마셔야 촌스럽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 섞인 형식주의가 먼저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에 대한 태도는 때때로 그랬다. 스테이크도 아닌 그저 돈가스를 경양식집에서 먹던 시절에도 스프를 앞쪽에서 바깥쪽으로 떠야 한다는 낯선 형식이 소문처럼 먼저 자리를 차지했고, 아직도 동네의 작은 레스토랑에서조차 떨어뜨린 포크를 자신의 손으로 줍는 것이 세련되지 못한 행동이라 생각하기도 한다. 이제 그런 껍데기는 걷어치우자. 그리고 겁 없이 와인잔을 손에 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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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와인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동호회를 결성하고 열심히 메모도 하며 학습하듯 와인을 배우던 시대는 지났다. 그냥 서양 막걸리쯤으로 우습게 보자. (물론 와인은 과실주다.) 우리가 막걸리의 기원이나 제조 방식을 다 알고 즐기는 게 아니듯, 와인이라고 주눅 들 것 하나 없다. 집에서 삼겹살 구워 먹을 때 한잔 마시자. 뻥튀기랑도 마시자. 혼술 할 때 맥주 대신도 참 좋다.
당연한 얘기지만 파리에선 노숙자가 와인을 들고 다닌다. 아주 대중적이고 편한 술이다. 와인을 즐길 생각만 있다면 이젠 아무 때나 어디서나 즐기자. (알코홀릭이 되자는 건 아니다) 소주처럼 용량도 다양해서 댓병(저그, 매그넘)도 있고, 반병짜리(할프 바틀), 미니병, 팩와인 등등 선택의 폭도 넓다. 맥주처럼 안주 없이도 마시기 좋고, 스위트한 디저트 와인을 제외하곤 맥주보다 탄수화물도 적어 배나올 두려움도 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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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무엇을 마실 것인가.
우리가 소주나 막걸리를 마실 때는 보통 특정 상품명으로 고른다. 하지만 와인은 해당 국가와 산지, 포도 품종, 그리고 와이너리(양조장)와 와인명, 그리고 빈티지(수확년도)까지 선택의 폭이 너무나 넓다. 그렇기에 초보는 매장에서 와인을 한참을 고르다 결국 예쁜 라벨의 디자인이나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그럴듯한 이름, 혹은 적당한 가격에 끌려 자신의 선택을 의심하며 와인을 들었다 놨다 반복하게 된다. 그렇다고 영업사원이 추천하는 걸 사자니 속고 살아와서 그런지 그닥 믿음직스럽진 않다. 나도 의심스럽고 쟤도 의심스럽고 그런거다. 결국 ‘에이 다음에~’ 하며 돌아서는 엔딩을 맞는다.
우린 더 복잡해지기전에 한가지에 집중하기로 하자. 포도 품종. 딱 그것! 물론 품종이 같아도 프랑스에서 떼루아라 표현하는 '산지의 환경'과 양조시 '발효 방식'에 따라 맛은 조금씩 달라지지만 기본적으로 그 품종이 품고 있는 성향이란 게 있다.
자, 와인을 잘 모르는 당신도 까베르네 소비뇽이란 품종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레드와인의 대표 품종이다보니 와인에 대한 첫경험이 그 품종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까베르네 소비뇽은 기본적으로 무겁고 드라이하기 때문에 입문자에겐 다소 부담스럽다. 한마디로 ‘뭔가 떫고 뻣뻣하며 텁텁하다.’ 그렇기에 그보다는 당신의 첫경험이 멜럿이길 추천한다. 까베르네 소비뇽이 멋스러운 풀 정장이라면 멜럿은 양복바지에 가디건 상의를 입은 정도와 같다. 조금 더 따스하고 부드럽다. 참고로 미국이나 칠레산이 종류도 많고 가격도 저렴하다.
이제 품종을 골랐으면 맘편히 하나씩 골라 마시면 된다. 여러 품종을 번갈아가며 마셨을 때보다 선택이 한결 쉬워지고, 산지와 와이너리에 따라 미묘하게 맛이 다름을 경험하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그렇게 어느정도 익숙해졌다 싶을 때 다른 품종으로 옮겨가자. 품종의 순서는 상관없다.
보통 여성들은 화이트와인을 좀 더 선호하는데 아이스바인 같이 너무 달달한 와인보다는 좀 가벼우면서도 생기있는 산미를 가진 소비뇽블랑이나 경쾌하면서도 약간은 스윗한 독일산 리슬링의 슈페트레제급 정도에서 시작하면 좋다. 무엇을 선택하든 잊지 말자. 중요한 건 '좋은 와인'을 마시는 게 아니라 내 입에 '맛있는 와인'을 찾아 마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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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어디서 얼마짜리를 살 것인가.
어디선가 특별히 파격적 이벤트를 하기 전에는 보통 대형마트가 제일 저렴하다고 보면 된다. 때론 마트가격이 주류 도매점에서 와인바나 레스토랑으로 납품하는 사입가보다 저렴한 경우가 심심찮게 있을 정도이다. 할인 상품도 자주 눈에 띈다.
포도 품종을 이미 정하고 온 당신, 이제 제품을 고르면 된다. 마트에서 파는 제품들은 수입업체에서 나름 가격대 성능비가 괜찮고 기본적인 완성도가 있는 것을 수입한 것이기 때문에 대충 잘 모르고 골랐다고 해서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제 찬찬히 라벨을 보자. 처음엔 봐도 도통 뭐라는지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나마 미국, 칠레, 호주등의 신세계 와인은 좀 쉽지만 프랑스나 이태리 같은 유럽쪽 라벨은 좀 더 복잡하다. 하지만 걱정은 금물. 진열장 가격표나 병 뒷면에 한글로 대강 다 써 있다. 중요한 건 어디선가 본 듯한 와인명에 집착하지 말고 품종에 집중해야 함을 잊지 말자.
그럼 최소한 얼마짜리 와인을 사는 게 적당할까? 한마디로 그런 기준 따윈 없다. 와인을 잘 아는 사람은 절대 만원짜리 와인을 무시하지 않는다. 그만의 미덕이 있고, 제조 기술의 상향 평준화로 싸고 맛있는 와인이 얼마든지 있다. 창고 털기식의 대방출 이벤트를 하면 몇천원짜리인데도 꽤 마실만한 데일리 와인들도 왕왕 눈에 띈다. 가격은 그날그날 호주머니 사정에 맞추어 부담 없는 선에서 구입하자. 와인이 당신의 통장을 박살내길 바라지 않는다. 와인은 남에게 맛있는 게 내게 맛있다는 보장이 없으며 맛과 가격이 꼭 비례하지 않는다. 많이 마셔보고 입맛에 맞는 걸 찾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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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맛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이것도 은근히 강박을 갖는 부분이다. 이 역시 한 때 와인 붐 속에 학습하듯 했던 분위기와 붐을 주도했던 특정 일본 만화들이 준 부작용이랄 수 있다. 바디감(무거운 정도), 산도(신 정도), 탄닌(떫은 정도)과 드라이(단 정도)한 정도를 파악하긴 좀 쉽고, 향을 뜻하는 아로마나 부케는 좀 더 어렵다. 이것은 경험이 많아질수록 좀 더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경험이 많아졌다고 해서 평생 먹어 본적도 없는 블랙커런트나 말린 감초향을 느낄 순 없다.
만화에서는 한 술 더 떠 한 모금을 음미하는 순간, 머리속에 푸른 초장이 펼쳐지고, 한쪽에선 폭포가 쏟아지기도 하며, 비 온 뒤의 싱그러운 햇살 밑에 뛰노는 사슴까지 보이곤 한다. 흉내가 아니라 진실로 이런 표현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테이스팅 감각은 물론 문학적 소양까지 엄청 뛰어난 감별사이거나 마약을 했거나 둘 중에 하나이다.
우리 초보들은 그런 거 다 필요 없다. 맛있다 맛없다. 이 두 마디로 충분하다. 그것도 굉장히 주관적인 기준으로. 그럴 듯한 언어로 표현해야 된다는 부담감은 포도밭 너머로 날려 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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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레스토랑에서 와인 즐기기
보통 남자가 레스토랑에서 와인을 고르고 즐기는데 조금 더 부담을 갖는 경우가 많다. 자리를 주도해야 한다는 생각이 한 몫 하는 듯 싶다. 하지만 굳이 아는 척 하려고 노력하거나 리드해야 된다는 강박을 버리자. 상대방도 잘 모른다면 둘 다 모르니 공평하다. 상대방이 잘 알면 덕분에 잘 듣고 호응해 주면 좋은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대신에 남녀를 불문하고 자리를 책임지는(계산 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한 가지 에티켓은 있다. 가능하다면 와인리스트를 카톡이나 메일로 미리 받거나 해당 사이트에서 조회해 본 후 미리 와인을 두어가지 골라 가는 게 좋다. 안 그래도 한눈에 잘 안 들어오는 와인리스트를 난감한 눈으로 한참 노려보다 왠지 가격대에 맞춰 고르는 듯한 인상을 줄 수 있다. 상대를 편하게 해주자.
물론 레스토랑의 직원이나 소믈리에에게 추천해 달라고 할 수도 있다. 유능한 직원이라면 주문한 음식과 고객들간의 관계, 분위기 등에 맞추어 중급 하나, 중상급 하나 정도를 추천할 가능성이 많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마트와 똑같은 갈등이 일어난다. 왠지 순순히 그 초이스를 받아들이기가 (속고 살아와서 그런지) 좀....
그렇다. 물론 직원이 친절하게 시간을 들여 설명해 주거나 인상이 유독 좋은 경우라면 조금 다르긴 하지만 대게 “정말 이게 최선입니까?” 라고 묻고 싶어진다. 자, 왕초보인 당신도 고집이란 게 있다. 그러니 미리 적당한 가격대를 먼저 정한다. 그리고 이번에도 포도 품종을 먼저 정하자. 그러면 후보가 확! 줄어든다. 그 줄어든 후보를 인터넷으로 검색해보고 대강의 와인 성향을 파악한 뒤 왠지 전생의 인연처럼 끌리는 걸로 두개쯤 정하자. 레스토랑에 재고까지 확인하면 최고다.
당일엔 당신이 선택한 두어개 중에 상대의 의중을 물어 정하면 센스까지 있어 보일 것이다. 초보에겐 이게 최고다. 하지만 그럴 시간도 없고, 주머니 사정도 괜찮다면 직원의 초이스대로 가보는 것도 좋다. 마지막으로 간단히 반주 정도로 가볍게 딱 한잔하기에는 잔 당 계산할 수 있는 하우스 와인으로 주문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6. 어떤 음식과 마실 것인가.
와인을 잘 모르는 사람도 육식엔 레드와인, 생선, 해물류엔 화이트 와인이라는 공식을 들어 보았을 것이다. 의미 없는 말은 아니나 오늘부로 그런 건 싹 잊자. 육고기에 잘 어울리는 화이트 와인도 얼마든지 있고, 해산물과 함께 가벼운 레드와인도 많이 마신다. 주재료 외에도 조리법과 양념이 무엇이냐에 따라 선택이 달라지기도 한다.
그럼 안주는 무엇이 좋을까? 치즈나 크래커? 과일 혹은 피자? 하지만 음식과의 페어링을 글자로 배우는 건 겁 없이 마시는 왕초보에게 어울리는 일이 아니다. 그 조합이 최고가 되었건 최악이 되었건 먹어봐야 안다. 닥치는대로 그 순간에 아는 지식을 총동원해 최고의 조합이라고 생각한 그대로 도전하자. 그래도 아무런 가이드 없음이 섭섭하다면 작은 팁 하나를 드리려한다. 정말 정말 매칭을 모르겠다면 로제와인이 답이다. 대체로 모든 음식과 어울리는 편이고, 예쁜 빛깔로 여성들이 좋아하며 테이블을 경쾌하게 만든다.
마치며.
실용적인 관점에서 보면 와인 양조를 예술에 비견하는 전통적 양조자들의 끝모를 자부심과 첨예한 미각으로 수만가지 와인을 맛으로 분류해 낼 수 있다고 믿는 비평가들의 견해들이 우스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오랜 세월에 걸친 그들의 집요한 추구가 오늘날 구천구백원짜리 와인조차 함부로 할 수 없는 수준으로 끌어 올렸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래도 여전히 초보의 미덕은 편견없는 모험에 있다. 입이 아닌 머리로 와인을 맛보기 시작하면 술잔에 담긴 즐거움이 휘발될지도 모른다. 닥치는 데로 겁 없이 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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