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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경력 호텔리어가 털어놓은 서울 특급호텔 野史 |
낮엔 ‘제2 국무회의장’, 밤엔 ‘야화(夜花)’ 들의 밀실 |
최영수 SR레저개발(주) 대표이사 0319ysgd@hanmail.net |
●서울시내 호텔, 정치권력과의 유착으로 급성장 ●박정희, 혁명자금 대준 인사에 호텔 지을 땅 내줘 ●일본 최고 호텔 지배인 빼내와 지은 신라호텔 ●김우중, 美 재무장관 설득으로 ‘힐튼’ 상호 써 ●아프리카 대통령 객실로 들여보낸 미모의 탤런트 ●외도한 장관, “벗어둔 속옷 찾아내라” ●노태우·김대중·김영삼, 호텔 사우나에서 ‘나체 회담’ |
특급호텔은 부와 명예, 자본주의의 상징이다. 또한 이면의 역사가 흐르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국의 호텔이 어떠한 과정으로 현재의 상황에 이르게 됐는지에 대한 연구는 드물다. 필자는 1978년 서울 하얏트호텔에
취업한 이후 인천 송도비치호텔 사장, 서울 뉴월드호텔 사장, 대학 호텔경영학과 겸임교수 등으로 일하며 지금까지 28년간 줄곧 호텔과 인연을 맺고
있다. 이에 필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의 호텔과 호텔리어 117년 역사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만주로 가는 열차식당 풍경 한국 최초로 등장한 근대식 호텔은 1889년 인천 서린동에서 개관한 대불호텔이다. 그러나 서양식으로 세워진 호텔은 1902년 서울 정동의 손탁호텔을 효시로 본다. 1909년에는 고종 황제가 프랑스 여성에게 희사한 하남호텔(이화여고 정문 앞)이 개업했다. 나라를 빼앗긴 뒤인 1912년 일제가 부설한 경의선 철도를 중심으로 부산 철도호텔과 신의주 철도호텔이 문을 열었다. 조선호텔은 1914년 개관했다. 북한 지역에서는 1915년 금강산 온정리에 금강호텔, 1918년 내금강에 장안사호텔, 1922년 평양에 유옥호텔이 설립됐다. 일제 강점기의 호텔리어 사이에는 규율과 기강이 대단했다. 당시 신의주 철도호텔은 한국에서 만주로 가는 열차식당을 운영했는데, 이 식당의 캡틴은 강모씨(후에 서울 C호텔 커피숍 지배인 역임)였고, 최모씨(후에 서울 N호텔 총지배인 역임)는 그의 밑에서 일했다. 최씨는 그후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강씨를 만나면 ‘수장님’이라고 깍듯이 호칭했다. 당시 열차식당에서는 햄버거스테이크가 손님들에게 가장 인기였는데, 호텔측은 이를 ‘개떡’이라고 불렀다. 열차식당에서 일하는 일부 호텔 직원들은 고기 대신 밀가루를 규정보다 더 많이 섞는 방식으로, 원래 100개를 만들도록 한 햄버거스테이크를 120개로 늘려 만들었다. 이를 적발하기란 쉽지 않았는데, 이런 식으로 직원들이 챙기는 수입이 꽤 짭짤했다고 한다. 직원들이 돈을 많이 만지게 되어 만주에 ‘꾸냥(기생)’을 두고 있다는 얘기도 나왔다. 광복이 된 뒤 열차식당은 주로 공무원이 운영하다 1990년대 들어 한화 프라자호텔이 맡았다. 열차식당은 프라자호텔의 효자산업이 됐다. 1936년 반도호텔이 ‘탄생’했다. ‘탄생’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이 호텔이 비로소 한국 사회에 호텔산업의 진면목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반도호텔은 정치·경제·사회 지도층이 만나는 공간이 되어갔고, 한국 상용호텔(commercial hotel)의 대표적인 숙박시설로 손색이 없었다. 광복 직후 반도호텔의 룸서비스 웨이터이던 민모씨는 이승만 대통령의 눈에 들었다. 호텔이 많지 않던 시절이라 호텔을 이용하는 것은 일종의 특권이었다. 자연히 권력과 호텔리어는 가까운 관계로 발전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민씨의 경우가 대표적인 사례다. 그는 프란체스카 여사의 후원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주미 한국대사관 소속으로 머물게 됐다. 가끔 대통령 부처가 대사관으로 전화해 민씨의 안부를 묻자 대사관에서는 그를 무척 떠받들었다고 한다. 민씨가 귀국한 후 대통령 주변에선 청와대 근무를 권유했으나 그는 이를 사양하고 호텔에 남았다. 뒤에 그는 모 호텔 총지배인이 됐다.
일식당은 제2의 국무회의장
광복과 6·25전쟁을 거친 이후 한국에선 관광호텔의 양적 확대가 진행됐다. 1959년 29명의 민간 호텔업자로 구성된 대한관광호텔업협회가 발족했다. 1961년 박정희 정권이 ‘관광사업진흥법’을 제정한 것은 관광호텔의 획기적 발전을 가져왔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사회의 다른 부분에서는 외국제품 수입을 철저히 차단하면서도 호텔만큼은 규제를 상당히 완화해줬다. 박 정권의 도움으로 서울에 많은 호텔이 생겨나 호황을 누렸다. 당시 권위주의 정권하에서도 호텔리어들은 특별한 대접을 받았다. 사회 분위기 자체가 그랬다. 경찰도 통행금지 단속 때 호텔 직원 신분증을 제시하면 집으로 보내줬다. 호텔산업의 부흥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호텔 소유주 간의 개인적 친분도 적잖이 작용했다. 서울 A호텔은 북한 원산에서 양조장을 하던 거부(巨富) B씨가 월남해 지은 것이다. 호텔업계에선 B씨가 박 전 대통령의 5·16 군사정변 거사자금을 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거사에 성공한 이후 박 전 대통령은 B씨를 불러 서울시내 지도를 펼쳐 보이면서 원하는 곳에 표시하라고 했다. B씨가 조그맣게 동그라미를 치자 박 전 대통령은 측량을 하여 그 위치, 그 면적 그대로 땅을 살 수 있게 해줌으로써 B씨가 호텔을 짓게 됐다는 것이다. C호텔은 원래 서울 차이나타운이 있던 자리에 세워졌다. 박정희 정부는 이곳에 있던 중국인들을 내쫓은 셈이다. K회장은 이 땅을 국가로부터 불하받았다. 당시 일본 미쓰비시는 이 호텔 건설에 10억원을 투자하기로 했다가 발을 뺐다. 그러나 박 정권은 미쓰비시측을 압박해 예정대로 투자가 이뤄지게 했다. 일본은 이 호텔 건설에 별도로 100억원의 해외차관을 제공했다. 이 호텔 건너편에 있던 조선호텔은 고객을 빼앗길 것 같아 이 호텔 건설에 강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이 호텔이 들어선 뒤 이 일대에 호텔촌이 형성되면서 오히려 조선호텔은 장사가 더 잘됐다. 1962년 국제관광공사(현 한국관광공사)는 워커힐과 반도호텔을 인수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1963년 워커힐호텔이 문을 열었다. 부산과 경주 등지에도 많은 호텔이 개관했다. 조선호텔은 육군 공병대가 지었다. 그래서 이 호텔의 사원번호 1번이 공병대 병장으로 알려져 있다. 최덕문씨는 1970년대 한국 호텔업계의 전설적 바텐더였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그는 6·25전쟁 때 통역장교로 참전했다 포탄에 맞아 다리가 불편했다. ‘서서 일하는 직업’을 찾던 그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영어로 대화하며 칵테일을 만들어주는 바텐터 일에 흥미를 느꼈다. 이후 조선호텔이 바 지배인으로 그를 스카우트했다. 최씨는 해외의 칵테일 관련 자료를 죄다 끌어모아 한국어로 번역하는 데 매달렸다. 한국의 호텔들에 단시간에 칵테일 제조법이 체계적으로 보급된 것은 그의 노력 덕분이다. 웬만한 특급호텔의 음료부장은 모두 최씨의 제자라고 봐도 무방하다. 1960~70년대 호텔리어는 수입이 좋아 선망의 직종이었다. 그래서 청와대 직원이 호텔에 취업청탁을 해오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호텔이 늘어나면서 호텔 간 경쟁도 치열했다. 오늘은 업계 1위라도 내일은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1970년대에 뉴코리아호텔은 조선호텔 다음으로 큰 호텔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문을 닫게 됐다. 이 호텔 직원들은 대부분 서울 하얏트호텔로 옮겨갔다. 당시 벨맨으로 근무하던 직원은 후에 하얏트호텔의 이사가 됐다. 서울 광화문 파이낸스빌딩 자리에 있던 엠파이어호텔은 재일동포가 주인이었다. 과거엔 재일동포 소유의 호텔이 서울시내에 꽤 있었다. 퍼시픽호텔, 아스토리아호텔도 재일동포 소유였다. 퍼시픽호텔의 극장식 레스토랑인 ‘할리데이 인 서울’은 1980년대 중반까지 서울의 유흥 문화를 선도하던 곳이다. 그런데 엠파이어호텔의 주인과 박정희 전 대통령 사이에 핫라인이 있다는 소문이 나면서 아무도 이곳을 못 건드렸다. 엠파이어호텔이 운영하는 일식집에는 장관들이 워낙 많이 찾아 국무회의장을 옮겨놓은 듯했다. 지금은 강남·북 할 것 없이 유명 음식점이 많이 생겼지만, 그 무렵만 해도 고위층이 즐겨 찾는 곳은 제한적이었다. 이 일식당은 일본 관광객도 많이 찾아 서울시내에서 장사가 가장 잘되는 집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렇게 잘나가던 호텔도 결국 문을 닫았다. 2년이나 장기 투숙하던 독일인 기술자가 방값을 내지 않고 자살한 사건은 이 호텔의 불운을 알리는 전주곡이었다. 1975년경 서울시청 앞 서린관광호텔은 ‘정치 1번지’로 통했다. 커피숍의 테이블마다 전화기를 설치해 손님들이 쓸 수 있도록 한 것이 큰 효과를 봤다. 그러나 이 호텔도 이후 무리한 투자 등으로 건물을 매각해야 했다. 1978년, 가정의례준칙에 의거해 호텔 예식이 전면 금지됐다. 그러나 H호텔 등 일부 특급호텔은 문을 걸어 잠그고 고위인사들의 자녀 결혼식을 비밀리에 진행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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