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에 흔들리는 꽃 조그만 잎이 성장하여 꽃을 피운 자리에 열매 맺어 신의 한숨인 바람결에 씨를 실어 보내니 이 모든 것이 신의 조화로다 이 모든 것이 바람의 조화로다
.............................. 상념·15 하루
발가벗긴 일상日常 쫓아다니다 꽃향기에 취하고 싶어 꽃밭을 일거 낼 시간 준비하다 보니 벌써 노을 꽃이 서녘에 만발하다 어둠이 널린 도시로 찾아드는 어스름 안고 수초 사이 누비는 수족관 물고기처럼 내 모습 갇혀있는 거리를 걸어간다
등 안개 가득한 카페의 불빛 눈가에 어설프게 몰려왔다 가고 고독이 지나간 거리만큼 내려앉은 커피 잔에 띄어진 내 얼굴 어느덧 짧은 시간에 갇혀 반죽된 탁자 위에 오른다
아름다운 추억 못 잊어 나날이 그대 앞에 내밀 유서 적어 어둠에 묻으며 아름다운 멜로디를 들어보는 하루 마지막 그림자에 내가 눕는다
.................... 상념·16 그 카페에는 음악이 없다
자신의 인생처럼 식어 가는 커피 향 콧속을 맴돌다가 벽면 배회하니 남은 시간은 도피하여 속도 내고 창가의 햇살들 실내의 어둠 사이로 빠져나와 적막 겨냥하던 거울에서 불빛으로 살아난다 내장 속에서 출렁거리는 실내 귀퉁이 차지한 피아노 건반 위에 반달 걸어놓고 낯선 건널목 건너온 인형만 홀로 남아 이끼 낀 목소리로 자신의 얼굴 보며 홀로 노래 부른다 하지만 귓전에 아무 소리도 남지 않는다 소금으로 짜게 절여진 인생 앞에 음악이 아닌 비음悲音이 들려오는 공간 어디쯤 이미 향일성 벌레가 되어 있는 나는 푸른 그리움이 넘치는 출구를 찾고 있다
............. 상념·17 가을이 오면
두 개의 세상 만드는 가을이 돌아오면 색감의 지친 영혼들이 제 살을 뚫고 색채를 바꾼다 어디를 보아도 자기를 스스로 비워 붉은 팬지꽃 태운 자국뿐이다
적요에 닿는 낮 달 아득한 그리움 바람결에 담아 하늘의 하얀 구름이 쓰는 마지막 편지 기러기도 애틋한 사연 입에 물고 산 너머로 멀리멀리 날아간다 외로움 가득한 눈물 그렁거려 보이면 물기 꼭꼭 쪼아대던 오후 햇살은 퍼져 내 몸에 옮기고
내가 꽃으로 피어날 때 내 가슴에서는 피어나지 말거라 아름다움이 떨어져 슬픔이 차 오르면 그리움의 꽃잎 차지할 자리가 없다 지금 밖에는 꽃잎 흔드는 바람 뿐이라 떨어져 날아다니는 그대의 모습 지금도 근심한다
............................. 저녁 강가에 서서
물결이 황혼을 안고 쓸린다 강가에 꿈을 쓸어 내리는 그대의 하얀 목덜미가 푸르다 풀잎과 입맞춤하던 물소리가 어딜까 쉬임 없이 강을 끌고 간다
물 위에 번지는 바람이 쓸린다 모자 쓴 저녁 안개 길게 물가를 떠돌고 바람 몇 점 머리감아 빗으며 흐르는 강변은 끝없고 한 겹씩 벗겨져 흐르는 세상 바다로 향하여 보내지 않으려 해도 보내는 물결은 숨을 곳이 없다
바람은 연신 실려온다 쉬지도 못하는 꿈이 허물어진다 물결을 타고 흐르는 어둠에 마루턱이 계속 흔들린다
그렇게 흘러가면서 우리는 마음에 푹 젖은 널따란 바다에 꿈 남겼다
..................................... 별 아래
풀잎 위에 허공이 더 들뜨고 유리 같은 대기 속에 호랑나비 화석化石으로 박힌다 해도 새까만 밤의 바다 진주를 드러내는 것은 아닐 것을
별들이 빛을 몰아 창문 두드리는 이 밤 별 아래 내가 누워 풀잎의 소리를 들으며 별의 향기를 맡는 것은 이미 부자유가 아니다
이 모든 것이 별이 뜬 태고의 메아리로 사라져 반생을 기울인 아쉬운 마음 지금에야 발효醱酵되어 꿈이 되는 이 밤 모두가 물이 되어 저 만큼 흘러간다
................ 종이비행기
내가 세상을 모두 잃어버리고 있는 동안 어느 소녀가 접어 날린 연분홍빛 종이비행기 날리는 것을 문득 바라보지만 그 조차 순간을 마냥 스쳐 다시 잊음 속으로 사라진다
내가 살면서 기쁨을 노래하던 푸른 한 시절 마법의 연기 모양 사라지더니 소녀가 날린 종이 비행기 역시 꿈을 한번 펼치기도 전에 그만 지붕 위에 걸려 어느덧 수세기 빛 속으로 사라진다
이는 홀로 바라보는 차창의 풍경 마냥 깊은 소망의 울림이 희망으로 접혀 날리는 때문인가
내 작은 꿈이 세월에 젖어 한껏 펼쳤던 날개를 접고 말듯 종이 비행기도 세월을 따라다니는 바람결에 걸려 지난 시간으로 가는 길에서 내 인생처럼 추락하는구나 희망은 언제나 등뒤에 있다
................ 새벽 기도하는 여인
집으로 아직 돌아가지 못하고 마른 가지에 걸린 달빛 아래 두 손 모아 기도하는 여인의 마음 어느덧 떨리면서 흔들리고 있다
흐르는 물 보듯 싱그러운 백은의 꽃송이 가득 핀 뭇별이 떠나가는 새벽 부끄러운 모래의 죽음을 찬양한다
기어이 참아가며 눈물 글썽여 기도하는 여인의 얼굴 간절한 애원을 다 하는 날에 풋풋한 능금 같이 마음이 익는 날이여 감은 두 눈 위로 흐르는 눈물에 가려도 마음의 별은 푸르게 떠오른다
고단한 옷자락 펄럭이듯 다가오는 간절한 기도 소리가 마음의 파문 지어 가슴에 묻히고 눈감아 빌고 빈 한 가닥 염원 오늘도 잠이 들지 못한 가슴 용서하라 다 용서하라 모든 것이 흐릿한 일순간 창밖에는 반짝이는 잠이 건너간다
..................... 23고목 한 그루
어진 삶 버린 고요한 죽음이여 죽어 번뇌도 잊고 벌써 눈앞 안개에 가려 움직일 수 없는 듯한 슬픔 안에 굳게 자란 내 나무여
환희의 푸름 잃은 채 가지는 하늘에 바치고 바람은 바다건너에 두어도 평생의 죄업 목마르지 않거니
설움과 애태움 굴레 벗듯 저녁 노을 뒷전에 숨겨진 슬픔이라면 무심코 바라보리
슬픔은 멎고 죽음은 불타고 고요하게 영혼의 축배 드리운 채 동구 밖 섰음은
내 삶도 다시 고개를 들어 당당히 나의 길을 걸어야할 한 때 뼈의 집이 지금 흔들리는 것은 나도 어느덧 세월을 스친 한 그루 고목이 된 때문이다
............................ 24산에 밤이오면
나무가 산 위로 올라간다 나뭇잎에 매달린 거미 한 마리 달빛에서 나온 토끼 그림자 밟고 수세기 흔들던 정상에서 내려온다
어둠의 가장 질긴 뿌리 속 억새가 휘감아 계곡 물소리 듣고 있다
....................... 25달빛
누가 달빛을 밟고 지나가고 있다 가을 밤 풀벌레 울음소리가 고요함에 묻히며 푸른 세상을 드러낸다
너무나 고요해서 흩어지는 이 세상 살아서 꿈이 되는 그대
지나간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달빛 세상에는 고요가 새겨진다 내 작은 숨소리는 무게 없이 쌓인다 작게 속삭여 보아라 다른 세상 언어들 안아보아라 무명의 꽃이 피어나는 밤 그리움이 지난 뒤 꽃은 더 아름답다
오늘도 누가 달빛을 밟고 지나가고 있다 그리움의 끝에서 이어지는 별 하늘에서 만난 미소로 오늘은 그대처럼 만난다 홀로
너무나 고요해서 그리워지는 이 세상 너무나 그리워서 흩어지는 그대
.......................... 26-27별을 바라보며
하늘에는 지금 별들이 걸어간다 꿈보다 아름다운 별들이 흔들리고 이곳저곳 숨겨진 그리움이 그림으로 걸린 내 감정의 화사한 보석들 사람들은 별을 보며 눈물을 갈아 꽂는다 어김없이 보이는 별들은 길을 잃고 별똥 몇 이가 사랑을 찾아 떠나는구나 그리움도 되고 미움도 되어 슬프지만 슬프지 않은 것 그립지만 그립지 않은 것들이 이웃을 기웃거리거나 초가지붕 위로 떠오르고 망망한 바다의 뜨는 빗살 검정블루의 천국이 열리는 소리 어둠이 제가 입은 옷을 벗어 연신 어두운 지상을 향해 던진다
무거운 고요의 바다를 건너오며 사라지는 유성의 노래를 부르는 떠도는 집시들 길을 잃어서 칙칙한 자유로 움직이고 절망 벗은 조개 몇 알 밤바다의 광활한 꿈을 다시 어둠에 연신 숨긴다
.......................... 28파도 꽃
바위에 부딪치는 순간 하얗게 솟구쳐 오르며 피어나는 파도 꽃 반짝이는 햇살 몇 점 벌 나비처럼 파도꽃잎에 날아와 앉는다
해변 따라 벚꽃 피어나듯 하얗게 피어나는 파도 꽃 피자마자 낙화하여 이곳 저곳 흩어지는 파도 꽃
......................... 29가을 밤
날아다니는 홀씨처럼 세상에 들어낼 가벼운 꿈이라도 꾸려면 마음을 접어 무게를 줄여야지
난 오늘 여기에 잠들지만 나무는 쉴새없이 떠나보낼 낙엽을 만지려고 바람의 날개 속에 몇 번인가 숨고 달빛은 푸른 강물로 출렁인다
나의 지난날이 그리움으로 드러나 가슴은 붉게 미어지더라도 모든 가을의 비밀은 차곡차곡 마음에 접어 가슴 깊숙이 파묻어야겠지
그리하여 어느 달이 뜨는 날 밤 길 잃은 기러기 만나 고요히 축배를 들고 잠시 접은 날개를 다시 펼쳐야지
....................... 30-31강가에 서서
물결은 강가에 꿈을 쓸어내는 그대의 하얀 목덜미 풀잎과 입맞춤하며 조용히 흐른다 그대여 고독한 소리 들려오는지 가만가만 귀 기울이여 보거라
물 위로 잔잔하게 번지는 푸른 모자를 쓴 안개 길게 떼지어 물가로 떠돌고 바람 몇 점 머리감아 빗으면 어디선가 울려오는 물결의 음악
흐르는 물결에 실려 바람은 연신 불어오고 쉬지도 못하고 떠도는 강변 그리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작별 잘 가거라 흘러서 잘 가거라 내 사랑이여 아름답게 가거라
물은 어딘가 계속 흘러 내 곁에서 이별처럼 떠나간다 내 마음이 푹 젖어 다시 눅눅해지면 나도 어딘가 그대 곁에서 침묵하여 떠나야 하는지
흔적도 없다 인생아 우리도 언젠가 흘러서 사라져야 한다
...................... 32마지막 잎새
바람결에 떠는 마지막 잎새들 창 밖 빈터에서 몸짓하니 내 가난한 마음 위해 촛불 켜리
귀뚜라미 울음소리 들으며 이별 할 때 한 철을 쓰다듬고 빚어온 내 사랑 마지막 잎새에다 이별의 편지를 쓰리
삶은 언제나 흔들리는 몸짓 세상의 지은 빚 많아 앙상한 가지에서 흔들리며 보낸 나날 스쳐서 지나온 세월이라면 떠나는 모습이 더 아름답구나
////////////////////
*제2부
35장마와 꽃밭
가벼운 눈을 뜨고 장마가 돌아왔다 안경을 쓴 강이 넘치자 안개들은 숨을 쉬었다 다시 젖는 강가에 잎사귀들은 몇 번인가 안경을 닦았다 수면에 떠오른 물방울들이 건반을 누를 때마다 번개가 두터운 하늘을 갈랐다 거친 바람이 빗줄기를 흔들고 하늘의 무게를 지탱하던 나뭇가지 찢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파헤쳐진 공사장 위로 붉은 흙이 상처로 흘러내렸다 처절한 진흙더미를 헤치고 너는 나타났다 너를 깨운 바람들이 줄을 서서 길을 건넜다 형광등 불빛이 사라진 창가, 백일홍이 꽃잎을 둘둘 말고 더러워진 고통을 참으며 텅 빈 추억의 방을 들여보다가 가만히 잎을 접었다 잎사귀 끝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졌다 빗방울에 맺힌 꽃잎들은 구술처럼 피어났다가 공중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36흔들리는 것에 대하여
붉은 장미꽃에 노란 나비가 떼지어 날아와 앉아 있다 가끔씩 바람의 결을 타고 나비는 공중을 선회하면서 쉬엄쉬엄 꽃잎에 내려앉는다 나비가 안긴 허공이, 긴 순례 길을 돌아와서 고된 신발을 벗는 성자의 편안한 모습이 아닐까 달콤한 꿀과 향기에 묻혀 내가 당신을 만날 때 언제 들이닥칠지도 모르는 이별을 앞두고 사랑하던 그 모습이 아닐까 지금 손끝에서 피어나고 중심에서 흔들리는 바람도 저 허공을 지나 움직이는 것은 아닐까 여러 가지 생각을 모아 보니 나비의 날개 크기가 너무도 궁금해진다 나비가 훨훨 날 때마다 붉은 장미꽃이 노랗게 물들어 피어난다 나비는 얼마나 많은 그리움을 지녔으면 잎새 사이를 드나들며 염문을 나르고 있을까 장미꽃의 요염한 모습도 나비의 아름다움에 취했으리니 붉은 꽃잎 넓은 삶을 어느 때 저 작은 나비에게 돌려주어야 하는 것일까 심한 바람결을 견디지 못한 나비가 허공 속으로 날아간다 분신의 날개로 하늘을 향해 길을 열 때면 한 생애의 비밀스런 자취가 빠져나간 비애의 절정하나가 마음을 흔들어 주는군요.
37연등을 바라보며
나는 누구이며 어디서 왔는지도 모른 채 내 마음 꺼내놓을 자리 찾으러 흩어진 꽃잎들이 어딘가 닿을 무렵 바람결에 흔들리는 연등 바라보며 무슨 생각에 그토록 젖어 있었을까 앞 섬 노을처럼 흐르는 불빛 짙은 어둠이 눈썹 초승달로 출렁이다가 불빛의 물들어 사위어 드는 산 속 깊은 조그마한 암자에서 스님의 저녁 예불소리 바람결에 날아간다 무가치한 내 삶이 갑자기 깨어난다 하늘과 땅 온 누리에 홀로 존재한다며 아홉 용들이 그대 몸에 감로주 내 뿜었다는 전설은 끊임없이 마음에 이어져 내 마음 속에서 환하게 자라난다 내 삶의 주변에 돋아난 그늘로 알고 어둠을 뚫고 흘러나오는 불빛 아직도 스스로 밝히지 못하는 것은 내 마음의 남은 욕망 아직은 벗기지 못한 때문인가
38연꽃
마음 속에서 흩어진 바람만 가득 채우고 그나마 세상을 채웠다고 여길 때 마음의 그늘에서 피어오르는 봉원사 대웅전 앞 연꽃을 바라본다 다른 나무에서 떨어지는 꽃잎의 묻혀도 연잎 사이로 고개를 내밀어 내 마음을 새긴 연등이 될 때 초록의 물 비늘이 꽃으로 피어난다 길에서 태어나 길로 다시 돌아갈 때까지 중생구제를 위해 살다 가신 부처님 모습처럼 물 자국만 잠시 지워내는 연못 위로 빈 것도 같게 넘을 것도 같은 연꽃이 내 마음을 적신다 한 송이씩 겹쳐진 바람결이 환한 그 끝에는 자비로운 미소가 돋아난다 연한 붉은 빛깔로 떠오르는 침묵 곁에서 주름진 햇살은 어느덧 바람결 타고 너울거리며 연못 속에서 저문다
39겨울의 꿈
눈이 내려 잠들지 못한 날엔 거리보다 가로수가 먼저 흔들린 뒤 바람은 잠이 들고 눈은 그제야 천천히 거리를 걷는다 바람은 결 따라 눈을 가르고 깊이 잠든 기억 몇 개 성긴 눈발 속 서성거린다 당신은 언제부터 순결한 꽃이 되었는가 어둠에 젖은 거리마다 당신 발자국 하나 둘 뒤 따라 오고 자동차 바퀴 자국을 타고 바람은 마을 건너마다 꽃의 나라를 세운다 하얀 꿈이 박힌 나라의 그리운 사람들은 안부를 전하던 추억을 꺼내 다시 가슴속으로 하얀 꿈을 안고 들어선다 당신은 오늘 하얀 나라의 그 길 위에 무슨 꿈을 펼쳐 가만가만 앉는가 하얀 물새가 날아가던 자국 남겨 부드러워진 길 위로 당신의 잠결은 무한정 떠다니는가 그 꿈속으로 내 발자국 따라 들어가면 세상을 모두 지워놓는 눈이 하염없이 내린다 이제는 이곳에서 영원한 사랑을 나누며 꿈을 꾸어도 좋으리
40눈이 내리 날 마음을 팝니다
지금은 모든 것이 하얀 계절 모든 것이 하얗게 흔들리는 계절. 우리도 흔들리는 두 팔과 두 다리 몸통과 머리 그리고 두 손과 두 발이 있어요 팔아서 붙이고 사서 끼울 수도 있어요 버려진 사랑을 사면 당일 배송되지요 지금은 하얀 계절 모든 것이 바람이 아니면 안되는 계절 살은 다 발라내고 싶은 계절 팔 다리 몸통 머리 그런 분할은 너무 도식적이니 단면으로 지하 1층에서부터 옥상까지 몸을 펼쳐 파는 거죠 내 몸을 천원이면 파는 마음마트에서 추억의 세트도 함께 팔고 있어요 그리움이 무언지 사랑이 무언지 몰라 그도 같이 팔고 있어요 지금은 하얀 계절 나무들의 잎들이 없어 마음을 헤아릴 수 없는 계절 쓰지 않는 추억이나 사랑을 팔아 고원이나 북극으로 배송하기 좋은 계절 보이지 않는 바람이 좋아서요 보이는 바람이 좋아서요
41겨울바다 바라보며
생선회를 먹으러 인천 연안부두를 갈 때부터 출렁이는 물결이 어디서 오는지 몰랐습니다 잔잔한 파도에 휩싸이는 물결을 타고 마음을 버리고 싶어 떠나는 날 뱃고동 소리는 지워져 일몰에 묻히고 나도 그렇게 석양을 삼키며 바다 위로 걸었습니다 우리가 살던 저편 끝은 수평선 끝자락에서 올가미가 된 또 다른 세상이 있는 걸 알았고요 그들 세상이 바람 속에 혼자 서 있는 나를 스치며 출렁인다는 것도 알았지요 그래요 바람이 나를 버리고 내가 세상을 버릴 때 나는 바다 한가운데로 날아다니는 갈매기가 되어 요동치는 파도를 쪼아대며 울어봅니다 바닷물이 파도에 밀려오고 어딘가 밀려갈 때 그대에게 해일이 담긴 편지 한 장 부칩니다 하지만 사랑이 담긴 말을 꺼낼 수 없었지요 이미 사랑은 물결에 휩쓸려 보이지 않았기에 마음으로는 차마 그 말을 할 수 없었고요 텅 빈 가슴에다 달빛이 아름다운 해일의 무늬로 떠오르는 오늘은 집을 한 채 바다 가운데 짓겠습니다 누군가 나를 기다리는 그 집에는 이별의 무늬가 선명해 보이지만 파도가 아름다울 것 같아서요 지금의 슬픔이 아름다운지 알 것 같아 바람도 찾아보지요
42-43일식日蝕 -러브호텔을 찾는 사람들
미명이 열린다 목에도 가슴에도 칭칭 감겼던 태양 심장마저 수은水銀처럼 싸늘하게 식어 가고 한 줄로 한 줄로 뒤를 잇는 어두워진 행렬을 좇아 숨겨진 하늘을 지난다 어둠 몇 송이가 떨어져 맨 먼저 구름을 건너간다 오랜만에 쉬고 있는 태양이 궁금해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슨 짓을 하는지 러브호텔에서 몇 세기형 콘돔을 씹고 있는지 내 눈빛을 살피던 하늘이 무거워 푸른 초원이 무너지려 한다 화정火精같은 수레에 그림자를 싣고 몇 만 그램의 정자와 난자를 분리 시켜 대낮의 어둠이 넉넉한 저울로 달았다 죽어서 살은 자의 꿈을 꾸며 내가 낳은 알 얼마나 무거워 졌는지 알을 키우던 하늘의 잠은 다이어트로 얼마나 가벼워 졌는지 내가 사는 세상은 잠시동안 어둑어둑 하여 끝을 볼 수 없지만 러브호텔 입구는 다시 낮도 밤이다
44기우제를 지내며
일기예보가 하늘을 핥는다 구름 층 덫에 걸린 빗줄기 탈진된 대지 위를 걷는다 식물들이 몸을 비틀며 삶을 포기하던 날 매말러 가는 알몸의 얹힌 생명의 무게를 만나기는 했으리 마른번개는 방향을 잃은 채 하늘 뛰어다니고 빗줄기를 만들어 가는 황홀한 섬광은 눈에 들어왔으나 오랜 기다림에 젖어 천둥소리는 듣지 못했다 번개가 환상의 빛만 자꾸만 내뿜을 때까지 빗줄기를 가둔 구름은 고요 속에 앉는다 구름 길 밟으며 번개의 다리를 물어뜯는 빗줄기 누군가의 눈물로 날아 어둠의 그림자가 차지한 가슴속 깨우리라 기우제를 지내는 소리가 다시 하늘을 선회한다 마른번개의 황홀한 눈물이 따스하다 허무의 윤곽을 각인하던 빗줄기는 생명의 무게가 실려 아주 가볍게 이 지상의 앉는다 눈부신 낟차落差가 머무는 빗줄기 바라보며 목덜미 아래로 흐르는 기다림에 감촉 씻는다 투명한 한줄기로 씻긴 하늘의 흰 뼈가 너무 환하다
45달빛
창문에 달빛이 그대의 그림자 남깁니다 달빛이 내 마음 흔들어 주는지 달빛이 내 마음에 살며시 앉으려는지 그대가 날 찾아온 것처럼 자국을 남깁니다 달빛이 일렁거리니 마음도 일렁입니다 달빛이 흔들리니 마음도 흔들립니다 그래도 마음 속 가득, 달빛이 그대가 되어 나를 찾아옵니다
46-47해무海霧
갈매기도 떠나고 그대가 백령도 파도로 흔들릴 때 나는 잔잔한 바람결로 그대 곁에 선다 눈시울에 젖어드는 해무海霧 가득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바닷가 그대를 흔드는 파도소리는 가슴속으로 성큼 건너와 어디선가 떠밀려온 미역줄기로 내 마음 동여맨다 아무도 파도소리 멈출 수 없어 그대 마음 대신 앓아 줄 수 없는 지금 어쩌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 꿈을 쫓아 해무海霧로 가볍게 날아 보리 이삭이 피어난 이랑을 넘는 그대 바라볼 뿐 그대의 하얀 손의 푸른 길 그걸 더듬는 숨결에 섞여 낮게 깔리는 시선 물 위에 뜨던 수많은 빛들 그리움을 쫓아 살았던 가슴 풀어 내 마음 놓아보내던 바다 멀리 장산곶 나루를 숨긴 햇살들 화촉으로 날아들어 바다물결 위에 뒤 섞여 아물거리며 뜰 때 나는 바다로 가는 길 위에 있고 그대는 내가 가는 길 끝에 서서 보이지 않는 바다를 내 가슴에다 옮긴다 (백령도에서)
48-49오늘도 연속극을 본다
여자들은 눈물을 사랑한다 눈물을 찾아가다 슬픔이 채워진 티브이 채널처럼 화면에 채워진 한 남자를 여러 여자들이 본다 애정어린 눈빛으로 서로 커피를 마시며 사랑의 밀어를 화면에 담는 동안 마음의 미터기를 가슴에 꽂아 넣고 이 시간이 눈물겹다 생각하긴 너무 아름답다 티브이를 보는 여자는 시간에 맞추어 눈물 흘리고 자기를 버린 사랑을 찾아 어딘가 떠도는 지금 혼자만이 즐기는 인생 여행을 떠난다 마음에 담긴 추억 걷어 버리고 싶어 여인들은 시간에 맞추어 연속극 매일 보고 있다 거실을 닦아내고 기다리는 시간을 딛고 배역들이 시간 채워주면 언젠가 곁을 떠나는 그를 바라보면 지친 입술에서는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는데 그렇다 세상, 나의 여인들이여 아직은 사랑하기에는 내 삶의 꿈이다 배역이라는 아쉬움이 쌓이는 싸늘한 가슴으로 눈물은 점점 굳어가지만 여인들은 오늘도 연속극을 본다 좌절한 마음이 채널을 돌린다 다른 시간이 프로를 감는다 채널이 돌아간다 여기 저기 연속극들이 다시 채널 돌린다
50행주산성 아직 오르지 못했다
가까이 두고 바라보면서 행주산성 아직 오르지 못했다 눈앞에 푸르게 우거진 숲이 내 눈을 덮은 탓이다 가을에는 권율장군의 뜨거운 마음 녹아 낙엽은 붉고 겨울에는 아낙의 하얀 행주치마폭에 눈이 쌓인 탓이다 하지만 내 생의 마음을 지금도 던지지 못하다니 조국의 운명과 아름다운 목숨을 바꾸는 행주치마 입은 아낙의 모습이 뒤엉킨 사이로 권율장군 모습 생각하며 지금처럼 산다면 행주산성을 어째서 다녀오지 못할 것인가 오늘도 행주산성은 한강을 안고 섬처럼 저만치 앉아 있다 차라리 아비규환의 함성이 존재하지 않는 행주산성 사라지는 전설의 강을 그대로 안은 덕양산이면 어쩌랴 머리에 물동이를 인 채 마을 어귀 지나는 어머니 머리 위에 하얀 눈이 소복소복 내리는 평화로운 마을을 안은 산 하나 가슴에 묻고 산다면… 더러운 냄새나는 리스트들이 날아다닐 적에 쓸어 담는 아낙의 치마폭은 오늘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권율장군의 노기 어린 목소리 지우는 바람결 그 뒤로 뒤섞인 하얀 눈이 행주산성 덮고 있을 뿐
51목련꽃이 낙화를 시작한다
목련꽃은 허공에 가지런히 눕고 바람은 최후로 꽃에다 파문을 그렸다 어두운 세상이 갑자기 환하게 빛나고 몽상에 휩싸인 침묵이 봄날에 껍질 벗긴다 봉오리 안에 물방울들 반짝이는 꿈이라도 있는지 알고 싶다 꽃 무리 속 가볍게 스러질 세상은 절망만 그윽할 뿐 저 만큼 하세월 아름답게 꽃으로 피어난 꿈은 희디흰 멍 자국 스치는 바람결이 지우는 중이다 하얗게 끓고 있는 마지막 삶 지상에 뿌린다 마음이 어두워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등불처럼 환한 꽃이 그토록 떨어지고 나면 다시 어두워질 세상 걱정하면서 걷는 발길 아래로 무참하게 밟히는 꽃잎의 슬픔 못 이겨 유년의 그 골목 끝에다 봄을 버리고 말았다
52-53 콩돌해안
오후에 한번 바다를 내려다 본 뒤에 햇살로 닦여 반짝이는 콩알만한 보석을 보았다 파도는 해안에 잠시동안 누워 푸른 물결에 몸을 풀고 있었다 물빛이 더욱 낮게 흔들리는 콩돌해안 황홀한 꿈이 엉킨 보석 꽃으로 가득 피어 있었다 바다는 자기가 만든 보석을 보려고 조심스럽게 손에 젖은 편지 들려 파도를 내 가슴에 보냈다 나는 내 맨살의 가슴을 떼어 바다에게 던졌다 거친 세월이 가고 둥근 잠 속에서 떨어져 내 눈가에 문득 아련한 시간이 닿았을 때 박혀진 무늬에서 몇 억 광년 동안 빛의 눈물이 보였다 죽어간 물새의 꿈을 빌려 허공을 헤매는 바람 비밀스럽게 보석을 닦아 해안에 두고 비로소 제 무게로 세상으로 내려앉는 반짝반짝 부서지는 햇살의 조각 그들은 모두 보석을 쪼아대고 있었다 햇살의 부리에는 숱한 형태의 꿈이 물려 있었다 한 마리 갈매기의 마지막 울음소리가 박혀진 보석 파도는 여전히 보석을 씻어 연신 내 가슴에 던졌다 (백령도에서)
54지하철
어둠이 잔뜩 끼인 지하의 그늘 걸쳐 오늘과 내일 사이 오락가락 하는 사이 어느덧 내 신경만큼이나 구부러진 길 또 다시 간다 전깃줄에 몸을 기댄 채 분주하게 가고 있는 지하철 어둠 덮인 적막 터널에 뿌리고 올곧은 세월 목청 돋우며 둥그런 불빛에 검은 그림자 듬뿍 묻힌다 그래, 내 인생도 언젠가 그렇게 떠나야 될지 몰라 내 체중에 무게를 세울 때 언제나 떠나는 시간 속에 묻힌 그림자로 그렇게 떠나기 위해 시간 넘기며 사는 것이야 언제나 소용돌이치는 바람 몰고 나와 강물 흐르는 철교 위를 구르는 스산한 바깥 풍경 지금은 내 생애의 어디쯤이다
55포도밭을 가며
울타리 쳐진 그 안에서 자라나 허공으로 뻗어 올라 거꾸로 누운 생애 태양을 향하여 줄기를 뻗어도 싱싱하게 띠어진 그늘진 공간의 문 아직은 스스로 열지 못한다 바람 몇 점이 스치어 날아들어 누이 가슴에 달린 젖꼭지 쓸어내듯 가볍게 훑어 초혼의 향내 살금 풍긴다 하늘빛 밑으로 흐르는 그늘 아래 잎새의 갈피 사이에서 조심스런 알갱이 다시 잎새의 그늘아래 숨는다 거꾸로 매달린 이 세상의 상처 뼈만 보이도록 투명한 햇살로 번져 허공의 고통 몇 번이나 벗긴다 기억하리라 지독한 고독 알알이 맺혀 말갛게 씻긴 낙일洛日로 쏟아지는 충만한 보석으로 빛나는 여름 낮 향기가 잎새 사이로 뚫고 나온 누이의 젖가슴에 달려 익은 보랏빛 꿈이 달콤하다
56낙엽의 계절
햇살 널린 귤빛 창가로 잎새가 날린다 아직도 섭리를 배우지 못한 광녀狂女마냥 노을 메고 온통 선혈처럼 붉은 길을 가는 살肉의 하녀 나무와 풀잎들이 마멸되고 처절한 생명마저 조락의 붉은 피 흘리며 온통 하늘 끌어안고 스스로 사르는 정결한 불길 그 뿌리에 넘어지는 나무의 창문들 소리 없이 한꺼번에 열린다 창가에 놓아둔 시간이 모두 불길에 젖어 그대 눈은 붉어진 세월 기다리며 다음날 인사도 없이 돌아가는 바람 몇 점 찾아들어 잎새 날리는 구경을 한다 나뭇가지 끝에서 망설이던 잎새 줄지어 즐거운 하늘 날아다닌다 떨어지는 가을 꽃 송이들 갈래갈래 묶였으면 돌아누운 아픔은 병이 아니겠지
57노을이 지고 나면
날이 조금씩 저문다 당신의 옥토沃土는 빈 뜰이 되어 넘어진다 무심히 뿌려진 씨앗이 꽃처럼 피어 흔들리고 수줍게 연지 칠한 하늘에서 구겨진 구름들 마지막 남긴 햇살에 쪼개져 돌멩이 보다 작은 도시를 끌고 다닌다
날이 완전히 저문다 다시는 새벽이라 올 것 같지도 않게 캄캄하게 저무는 강기슭 태양이 죽어서 조곡弔哭은 들려오고 물결은 자기의 살을 뜯어 어둠의 둑을 쌓다가 지친다 별빛이 나약하게 흐르고 외로운 이슬이 바람 위에 내려 내 작은 눈물 한 방울이 되었을 때 누군가 살을 감추던 자리를 마련해 안개보다 지독한 몸살 앓는다
58코스모스 연정
코스모스 꽃잎이 허공을 흔들었다 어느덧 코스모스 꽃잎은 도시까지 걸어오기 시작했다 아주 뒷날 부는 바람을 걱정해 빈터가 없는 그늘에 앉아 살(肉)밖으로 빠져나가는 날이면 어쩌면 바람의 비파 소리를 듣는 해일 같은 그리움이 가슴에 남아요 아련히 흔들리는 마음의 편지를 들고 아무리 흔적 지워도 지지 않는 상처를 닦으며 무궁한 감정 이제야 쏟아 놓네요 소중한 여광餘光의 피어난 사랑 아름다워요 순박한 기약으로 흔들리는 눈물 어린 저 외로운 가을의 뒷모습 남기며 물빛으로 바람결에 흔들리는 마지막 정 오늘도 그렇게 나를 흔들고 있어요
59무당벌레
아름답게 슬금슬금 기어가다 멎었다 등 무늬의 빛깔이 선명하게 흔들리며 어두운 절망을 벗기는 시간이 저 만치 흐른다 바깥에 내비친 이 세상은 정말로 궁금하다 기꺼이 일년을 살려는 삶의 명암이 찬란하다 하세월 기어서 어디론가 떠나려는 야릇한 꿈은 아직도 지워지지 않고 내 안에 조용히 머무는 중이다 그리고 기어서 꿈꾸는 이민을 준비중이다 이 세상을 둘러보면서 기어코 절망의 마디를 자르고 말았다
60노을은 어디로 흐르나
나는 당신을 가꾸는 조그마한 꽃밭 불붙은 사랑이 아름다운 꽃을 피어 놓았습니다 그대여 나비처럼 날아 붉어진 정열을 수놓아 주십시오 입술을 갖다 대면 연지 빛으로 물 드는 저녁 강물입니다 이제 어둠을 준비하는 빛은 무슨 색깔로 강물 위 그토록 흘러갑니까
61그대의 꿈
밤마다 아름다운 꿈을 꾸네 누구가 색깔을 모두 칠했나 저 보이지 않는 신비로운 빛깔 속에 사랑하는 사람 만나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내가 아는 꿈나라 어디에 항상 잔잔한 바람 타고 오가는 이들 슬프게 멈춘 고독이 전혀 보이지 않는 그러나 낯설게 열리는 작은 문 세월이여 가거라, 문을 열고 그대 모습이 비친 거울의 마법 앞에 나는 잠시 숨을 멈춘다 그대는 오늘 밤 내게 무엇을 말하려는가 오 나를 버리고 꿈속으로 떠도는 사랑이여
62황혼일기
보고싶어도 떠나간 얼굴이 많았다 가끔 쓴 소주잔 기울이던 더운 입김들 곁에 있었지만 지금은 부끄러운 생명에 거미줄 치고 있다 헛기침은 늘어가고 보이지 않는 앞은 짙은 안개가 끼어 굴절되는 돋보기 걸쳐 보아도 지난 세월 희미하게 저녁 강물로 흘러 넘쳤다 살아온 삶은 휴지처럼 구겨지고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길이 숱하게 많았다 젊은 시절 떠나던 길은 너무 멀었다 지겹도록 내리는 비 빨래 젖는 날 많고 잊을 만 하면 날아오는 부고訃告에 괜스레 미안했다 애꿎은 담배꽁초 연기에 휩싸여 주눅드는 나날 마지막 지는 낙엽이 지상에 떨어져 이상할 정도로 곱게 황혼으로 물들인다
63꿈꾸는 겨울
바람이 마른 가지를 흔드는 골목길 걸으며 눈 나린 길 위에 내 발자국을 찍는다 미래를 거슬러 오르는 듯한 발자국 밤새도록 눈이 내리면 다시 지워질 발자국 아이가 만든 눈사람 어딘가 돌아가라고 그래도 약도처럼 또박또박 발자국 낸다 세월은 마른 가지 위에 눈송이로 쌓이고 참새 몇 마리 허공에 앉아 빈 가슴 모두 모인 황량한 골목길 바람은 가지를 흔들다 사라지고 있었다 사람들이 걸어가는 눈길들이 잠시 기우뚱하다 바로 놓였다 찍혀진 발자국 쳐다보며 눈사람은 오래도록 지금의 나로 서 있다
64-65눈 내리는 밤에는 버스가 없다
잎새 없는 가로수가 서 있는 길가 이정표 잃은 나를 홀로 남겨두고 버스는 몇 대나 스쳐서 지나갔을까 사랑의 열병으로 몇 달간 시달린 그 밤 바람소리에 나뭇가지는 마냥 흔들리고 시나브로 메어 다는 눈송이 모자를 쓴 채 술집의 셔터를 붙들고 노래를 부르지
지금쯤 네가 나를 안다면 옷을 벗고 내 사랑의 기억 더듬어 더 하얀 그리움 만들고 싶었는데 눈길이 너무나 환하게 빛나서 가물거리는 공간마저 제 집처럼 낯익어서 눈꽃 그림자 너울거리는 것마저 어둠에 던져 아직도 이르지 못한 지점에서 만난 이 시간 그리움 부풀려 하얗게 부분 염색하는 중이다
버스에 실린 그림자는 몇 겹을 접어 잎새 잘린 가로수 밑을 지나며 중얼거린다 하루를 머물지 않은 세상에서도 마음의 갈피에다 눈꽃을 꽂은 내 그림자 지워가듯 바람에 흔들리는 여자가 향기를 지우며 서 있다
저건, 저건 그리움이 아니다 돌아갈 시간이 너무 가까이 박히는 정류장이여 하얀 그림자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이제 알았니 백치 같은 병이 돋아난 거리는 거리가 아니다 땅에 떨어진 눈빛 몇 개 태우고 가는 버스에는 하얀 그림자가 자란다
66연습 없는 이별이 더 아름답다
그대여 풀꽃을 보면 눈물이 난다 사랑하던 날들이 모두 지난 뒤 그대 풀꽃의 그림자 다가오는 날 이별은 연습이 필요 없다 밀물이든 썰물이든 물결이 오가는 바다처럼 마지막 침묵을 길에 묻으며 사랑으로 시작하여 사랑으로 끝나면 나는 그대에게 다가가 마지막 말을 전하고 싶다
낯선 길 위에 핀 풀꽃 사랑이기에 스러져갈 날을 슬퍼하지도 않고 이별연습 없이 다른 시간을 기다리며 그대로 머물고 싶다
그 때에 만남의 상처가 모두 내 것이니 이별의 절망도 나의 몫이다 무한한 마음을 담던 사랑 그리워할 때 언제나 비에 젖은 추억이고 싶다
67추억을 남기는 밤은 아름답다
정과 우수에 엉켜 흐르던 우리들 사랑 내가 마시는 시간에 어느덧 지친다 해도 방 한 귀퉁이에서 내 마음 밝혀주는 등불 그리움의 조각도 남김없이 모두 태운다 어쩔 수 없이 등불이 꺼져도 창문 틈새로 들어온 새하얀 달빛 한 이불을 덮은 빛에 그만 눈이 먼다 어둠이 들어찬 깊은 사랑은 싫어 잠들려는 네 눈까풀을 순간 닫아 버린다 소리마저 파묻던 사랑하던 한 계절 어둠이 떠도는 허공 중에 올리나니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이 사라지는 별빛 살아서 사랑하는 꿈을 꾸는 그대 위해 맨몸의 돋아난 이끼 위에 마음을 심으니 사랑이여 오늘 밤 별들은 이리도 아름다운가 이제 마지막 기침소리로 부는 서늘한 바람 몇 번이라도 다시 아무는 상처의 뜨거운 숨소리 사랑이여 캄캄한 길 위에 무슨 추억 이리도 많은가 별들은 하늘에 걸터앉아 내 마음 흔든 뒤 제 갈 길을 터벅터벅 걸어 어둠의 살 위로 날아가는 나비로 자란다
68-69천장에다 별을 그려 잠들다
바로 누워 있으면 지붕 밖에서 떠도는 별 어둠을 지키며 떠도는 별 그대와 언덕에 앉아 헤아리던 별 그 정겨움에 못 이겨 아직 잠들지 못하고 나는 하늘에서 별을 따서 천장에 붙여본다 평생 깊은 마음을 차지하며 자기 마음 속에 허공의 거리를 넓히던 별 스스로 지상의 꿈이 되어 떠도는 별 추운 겨울 밤 나는 별이 되어 그 꿈으로 빠져들고 싶다 별들이 천장에 그윽하게 뜨면 별들은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너도 이제 모자 하나쯤 준비해야지요 하얗게 세어버린 내 머리카락 보이지 않게 덮어주세요 그러면 나이가 훨씬 젊어 보이겠지요 삶의 여정이 가슴 덮을 때 마음으로 살아나는 별 멋지게 보이게 하려고 별이 뜬 거예요 꿈에서 깨어나 성애 낀 창문을 열면 필생의 바람도 그치고 남은 세상 그 자투리에 별이 묻히는 게 보인다
70-71어둠에다 문패를 달아주며
어둠에다 문패를 달아 줍니다 몇 번이나 마음 속으로 망설이 던 문패 기어이 어둠에다 달이 뜨는 시간에 맞추어 천천히 마음 가다듬으며 못질을 시작합니다
한 손에 든 망치가 허공의 뜨고 한 손에 바치는 문패가 가지런하지 못해도 달이 지기 전 어둠에다 문패를 달아줍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번지 없어 못내건 문패 별들이 용케도 찾아들어 필요 없었지만 요즘 들어 창 밖에는 별이 찾아오지 아니하여 내 마음에는 강아지풀만 무성하게 자라나 있습니다
밤하늘이 항상 흐릿해 별들이 길을 잃었나요 아니면 별들도 밤이 외로워 숨어서 떠도는 까닭일까요 대기오염 때문에 별들이 사라져 어둠에 박히고 흐릿한 뭇별 몇 이가 고개를 살며시 내밀던 밤 이런 날은 어디에서 별을 찾아 마음 속 깊이 접어 두어야 하는가요
오늘 밤 하늘에다 문패를 달아줍니다 길 잃은 별들이 나를 찾아오게 문패를 달아줍니다 소복한 꿈을 지닌 어린 별들이 소리 없이 어둠을 뚫고 다시 내 곁으로 다가 오도록 어둠에다 문패를 달아줍니다
72오늘은 붕어빵을 먹는다
퇴근길, 버스 정류장 옆에 카바이트 흐미한 불빛을 밝히며 한 여인이 마음을 꺼내 틀에 끼운다 틀 속에 모인 붕어를 연신 뒤집으며 자신의 마음 새긴 삶도 함께 굽는다 대로로 어둠 몇 장 굴러다니고 영문을 모르는 자동차 불빛이 스쳐도 여인의 삶에 반죽을 붓고 잘 발효된 마음을 쏟아가면서 세월의 불을 당겨 붕어빵을 굽는 동안 향기롭게 한껏 부풀어오르는 여인의 마음이 길가는 사람을 거리에 붙들어 맨다 종이봉지 안에 따스하게 담긴 여인의 마음 다시 한번 골고루 뜸이 들어 오래도록 보드랍게 말랑거리는 붕어빵 바다에서 바로 건져온 물고기로 어둠이 물든 낯선 거리를 정처없이 헤엄쳐 떠돌아다닌다 따뜻한 느낌표 같은 붕어빵 입에 넣고 목 메인 일상을 천천히 목으로 넘기며 삶의 따스한 마음을 먹은 기쁨에 오늘은 너무도 흐뭇하다
/////////////////////
제3부
75창녀의 노래
정 없이 만난 사람 잘 가게 하라 아름다운 얼굴 꼭 안고 슬픈 노래 불러 줄게 아픔을 눈물로 삭이고 그 나머지 고독 풀어 가벼운 정을 준 것은 아주 잘 했느니라 허물어진 둥지에 가치 없는 돈 구겨 넣고 오늘밤은 무엇이 그리도 슬퍼 향기 없는 장미꽃 가슴에 꽂아 어째서 밤이면 꽃 그림자로 피어나느냐 가로등 불빛 타고 정 없이 가려는 사람 내일 다시 오게 오늘은 잘 가게 하라
76-도시의 비둘기
도심에서 떼지어 피어나는 날개의 꽃은 길 잃은 성자聖者의 눈물이다 언제나 울음소리 내며 덜 마른 몸을 털어 내지만 기억의 저 끝에는 평면의 지붕이 내려앉는다
모처럼 방향을 잡아 날개를 펼칠 때 두려움이 가득한 자동차가 사라지고 매연이 가득하게 덮인 묘지와 자투리땅을 흐르는 강물
날개는 하늘이 그 가슴에 피우는 구름 내가 어느 날 날아가면서 후회 없이 맡긴 노란 램프의 꿈은 울음소리 섞인 눈물뿐이네요
어제 밤은 좋은 꿈을 꾸고 도시의 광장을 걸어가는 쓸쓸한 아버지여 그대 없이도 바람은 살아서 늘어진 레일 위로 흐르는 강물에 가냘픈 광장을 두 손으로 걸어가며 그대를 작별해요 구구구..... 잘 가거라 눈물보다 고운 꿈
77봉숭아꽃
가는 시간보다 기다린 시간이 길어 붉은 피를 머금은 살을 떼어 울밑에 걸어 놓는다 쪽빛 바다가 해일을 타고 출렁인다 내 손톱에 아련하게 떠 있는 붉은 파도 몇 점
78아직은 봄이 아니다
들녘에 나가면 구겨진 콘돔이 하얗게 부풀기 시작한다 독한 추위를 피임하던 막막한 터널 성급하게 꽃망울 터트리는 고개 숙인 꽃샘바람 아지랑이 등에 업혀 자라야 했다 꽃밭에 묻혀 두근거리는 구근 눈알에다 여린 싹을 트이고 있었다 땅 속에서 때 이른 꽃 내음이 난다 봄의 바람날 년 놈은 모두 모여라 거기에 걸터앉은 나 혼자 아직도 머나먼 눈 산 바라보며 내 가슴에 내린 눈을 털어 낸다 낮잠 속에 소리 없이 다가오는 봄의 꿈은 지금 너무 달콤하다
79밤 안개
모든 걸 다 풀어 홀연히 떠도는 밤 안개 젖빛 강물 흘려보내 무슨 세상 덮느냐 이 세상 덮은 뒤 적막한 바람과 어떻게 사느냐 은현銀鉉의 무게를 가늠하는 사람들 이미 어디론가 떠나가 사라지고 세상의 정거장은 지워진지 한참이다 기차도, 꽃잎도 유년의 시간을 버리고 꿈속을 헤매며 살의 집을 짓고 있다
몇 사람은 잠긴 문 뒤에서 살을 풀어낸다 사정 거리 안 가로등 불빛 거리에서 서성이다가 아비의 혼으로 날아다닌다
문을 열면 시야를 가리고 허공에 투신하며 울고 있는 그리움 한 묶음의 고요는 일어서서 움직이고 텅 빈자리에서 생긴 그림자 몇 덩이가 하늘로 가는 길을 지금쯤 묻고 있다
80-81겨울이별의 샹송
하얀 눈이 내린 길을 걸으며 내 사랑아 추위에 얼마나 옷을 벗었니
코스모스 꽃길에서 처음 만나 바람 껴안고 나부끼듯 몸부림치며 붉은 낙엽을 가슴에 안고 천년을 약속한 사랑 이 겨울도 눈길을 떠돌고 있다
추운 밤 골목에서 하얀 입김 외투에 뿌리며 한 계절의 마디를 자른 사랑
보이는 것에 향기로운 정열로 이제 그대는 떠나가도 내 마음에서 다시 만나는 숨결로 쓸쓸하게 노래하면서 날아다니는 홀씨의 사랑 무엇이 그리도 외로워져 밤을 지새워 추억의 곁으로 젖어드는가
사랑이 이별이라는 공식 앞에 내 사랑이 빚은 빙판 길 위에 자국들도 눈발로 휘날려 지워지고 눈부신 만남의 향기만 그대로 남아 가난한 사랑의 가장 누추한 모습 되어 내가 어디쯤 돌아가야 내 사랑의 추억이 봄이 오기 전 아지랑이로 가물거리며 단단한 땅 속에 묻힐 씨앗이 되는가
82-83봄이면 꾸는 꿈
봄이 찾아오려는지 꿈들이 내 머리 위를 살금살금 거닌다 그 꿈이 너무 아름다워 바라본다 아지랑이가 하얀 꿈으로 바람에 안긴다 바람이 밖에서 내 꿈을 흩어놓으려 한다 허공의 귀퉁이 찾아들어 날아다니는 꿈 가슴에 품어도 따스하게 떠도는 꿈 꿈들은 내 가슴속을 너무 사랑하나 봐요
홀로 벗은 나무에 잎새를 다는 꿈 들판에 냉이 잎새로 향긋한 꿈 거기에 바람의 발자국이 너무 아름답다
그 발자국에 고이는 내 얼굴 꿈이 되어 나비로 다가오다가 한 폭의 민들레꽃으로 돋아난다
언젠가는 강물로 모두 흘러갈 꿈이지만 봄이 오는 꿈은 가슴속 깊이로 여러 가지 꽃 빛으로 파고들어 세상은 모두 꽃문을 열어 놓는다 바람도 잠들어 흐르며 쌓이는 꿈들
훗날 나도 꿈이 되어 황홀한 꽃 빛 가슴마다 가장 아름다운 봄의 그림자 새겨 말린다
84-85안개 낀 러브호텔
어스름처럼 물 비늘 떨어진 안개 도시의 거리를 걸어간다
그 거리에는 망각된 그림자 드리워진 러브호텔 불빛 몇 점 잔잔한 빗물로 흐른다
안개가 사방으로 뿌옇게 번진 호텔 입구에 심은 사과나무 근처 자궁 속에서 회전하던 어느 남자 낙과로 떨어진 사과를 주워 슬그머니 문 뒤에 숨긴다
농익은 그 사과는 아주 달콤한 시간 차량 가리개가 안개로 구워진다 그 곁에 뒹구는 20세기형 콘돔 하나 전구처럼 불을 켜 반짝인다
콘돔은 여자가 기다린 반찬이다 여자가 콘돔을 씹으며 안개 낀 벌판을 가로질러 미세한 혈관들이 터진 길을 걷는다
안개가 풀려 평온해 보이는 러브호텔 앞에 남자가 모여든다 그들 남자의 모습은 숨어서 희미하다 안개는 주위에서 연신 그들을 삼킨다
안개가 배설한 콘돔이 거리에 쌓인다 지워진 시간이 자꾸만 꿈틀거린다
이 세상은 다시 지워진다
86 장미꽃에 대하여
나를 버린 땅 위에 서서 가시에 찔린 사랑을 보아라 화사한 꽃 빛 가슴에 물든 그 위로 제 나이 지나 멀리 와 버린 바람결이 촘촘하게 스며든다
너는 있고, 나는 세상에 없고
자만에 취한 생각은 남고 꺼져버린 짚불에 불씨도 남고 다만 눈짓으로 흔들리는 그림자로 흔들리는 충만 뿐
거부하는 몸짓에 사랑이 아름답다 환청으로 들리는 고독한 쉼표와 열정....그 열정 틈새에서 속마음 태우며 종을 치는 시간 꽃 빛이 하늘을 나를 때 나를 버린 땅 위에 가시에 찔린 사랑을 보아라
너는 있고 나는 세상에 없고
87한 송이 장미
이름하여 두고 온 계절의 붉은 꿈이라 하라
고요한 마음 못 이룬 터전에 작은 뉘우침조차 없는 상처의 마음인데 등불 켠 그대의 얼굴이 오늘은 고아라 화병의 꽂혀 계절 잊은 장미여
두고 온 내 마음 어째 찢겼을까 그대의 꽃 빛 모아 이 마음 꾸미기에 어쩌면 불과 같은 고운 향료 어쩌면 불과 같은 사색의 제단 이제 이를 조용히 바라보는 누군가의 기다림이 있다는 말인가
불 송이처럼 마음을 태우며 절로 오는 마지막 꽃의 향기 절로 가는 계절의 바람결들
하나씩 붉어지는 한 점에 낙조落潮 거실에 떨어지다가 광채 너울거리며 벽지에 붙는다
88-89꽃의 이미지
비어 있는 색깔 가득 채워 피어난 꽃 바람이 건드리면 무슨 색깔 쏟아내는지
뜰 앞 솔 나무에 하얀 구름 쌓이고 낮 밤 없이 널 기다리려 붉은 등불 켜 서성인다
사랑이여 네가 아프면 피어낸 꽃길이 어째서 이리도 아름다운가
마음이 몇 번인가 흔들리는데 맨발의 영혼들이 소곤거리는 소리 바람으로 가는 꽃잎들의 열정 꿈결을 수놓아 부풀어오른다
지금은 꽃 빛이 넉넉한 좋은 아침인가 어제 밤 풀어놓은 꿈에 꽃길인가
그리움처럼 사는 꽃들도 꽃이 피어날 시간 기다려 땅 끝까지 길을 열고 터질 듯 말 듯한 그윽한 향기는 언제나 그늘에 두고 잎새의 무게를 바람에 달았다
심장이 터질 듯한 열정 남겨 기다림이 다만 길고 길었던 나날들 꽃이 물 드는 이 세상 손바닥만한 정원 서너 개로 아주 적게 꾸며진 마음 꽃 그림자로 오늘이 젖는다
90-91나비의 꿈
언제나 나비로 날고 싶으나 아직은 화려한 꿈에 젖어 꽃향기에 취해 잠들어 있다 오늘은 이른 잠이 벗어놓은 꿈 위에 든 노래를 부르며 아무런 바람도 없이 꽃이 되어 맨몸으로 흔들린다
길이 멀고 하루 낮만 내리는 비 멀어지는 것들이 쌓여서 잠이 들면서 꿈꾸며 알았으리 내 스치며 지나던 세월 저쯤 꽃의 목숨 빚던 향기가 남았다는 것을
꽃이 빚은 끝은 처음과 더불어 남고 가볍고 가벼운 향기에 취해 긴 꿈에 날개를 접어 편안하다고 속삭이는 그 말 눈부신 그 말이 꽃잎에 숨은 것이기에
오래 전에 여길 찾아든 저 혼자 부는 바람도 다정하다 설레는 꿈의 저쪽 꽃밭에 모아둔 시간은 모두 젖어 날아가고 마신 향기에 취한 나비 한 마리 꽃 그늘 그림자에 잘려 기어코 모습 지운다
92-93어머니
새벽 기침소리로 깨어난 어머니 한숨 눈꽃송이로 피었다 지는 뭇 별이 된 얼굴 나뭇가지 스쳐 차갑게 걸리고
삶의 물이끼는 돋아나 소여물로 씹혀 핏기 잃은 절망 너무 가벼워지고 삶의 엇갈린 시간표에 나타난 동그라미 새벽의 김이 되어 삶의 향기로 날아다닌다
아직도 못다한 자식들 홀로 앉아 생각하며 깊어진 시름 타고 내리는 한숨의 빗방울들 여읜 손에 손금을 타고 젖어들어 작아진 가슴에 맺힌다
저토록 등 굽은 어머니 노을로 묻히는 걸 보면 내 따라갈 세월 하나 내 모습이 너무도 가깝게 보인다
94-95안개 같은 사랑
까마득한 기억이라 마음에서 지우려 해도 저녁 강물로 저물어 흐르는 내 가슴 구부리고 잠드는 촉촉한 밤의 긴 터널 오래 전 물든 앙상한 그리움 남아 흔들린다
어둠이 뭉개지어 떠도는 바깥 물결로 흐르지 못하면서 모여들어 텅 빈 공간에다 그리움 하나 내려놓고 홀로 채비를 서두르며 둘 내려놓고 새 번째 내려놓은 그 길 위 자욱한 안개뿐이다
오늘은 그대 있는 쪽으로 흘러 사라질 것은 멀리 사라져 가고 떠날 것은 모두 묶어 떠나 보내면 이제는 안개의 가려 보이지 않아야 하는데 그래도 쉬어갈 모래 언덕 하나 보여 거기다 그리움 다시 묶어놓는다
저녁 강물로 젖은 안개는 뒤로 밀리고 그 사이를 떠도는 시간이 더 많아지면 그대 그림자 살금살금 지우면서 안보여서 그리움이 되는 사랑 안개의 젖어 슬픔이 되는 그대의 이별 이제는 누가 안개 숲에 들어서 낮선 곡조의 기타를 퉁긴다
안개가 깔린 길은 고요를 안고 저문다 사랑의 영혼이 젖어 있는 시간은 끝없고 전혀 보이지 강가에 발이 묶이고 그러나 지금 안개로 허리가 감겨 보이지 않는 그리움 깊은 곳에 추억을 한 묶음 내려놓는다
허공의 짧은 숨소리만 남기는 안개여 내 얼마나 그대를 숨겨서 사랑하면서 그리워하는 지를 기억해다오 숨어서 그 사랑 내 얼마나 아파했는지를....
96-97내 가슴에 그리움은 남았다
하얀 도화지 햇빛 접힐 무렵이면 언제나 손님처럼 다가간 그대 길 잃은 그 카페에 늦도록 앉아 추억을 그려 천장에 불빛에 묶어놓네
그 때 그리움 가슴 에이는 날 꽃구름이 스친 바람 하나가 내 가슴 속 찾아들어 그대의 숨결로 다시 묻히고 나면 언젠가 사랑의 시간을 벼리고 떠나간 그리운 얼굴 문득 보이네
모습 마냥 더듬어 추억을 따라가다 보면 토라진 사랑의 날들은 아름다운 기억을 데리고 물로 흐르고 까마득하게 흘러간 지금의 시간 그리움에 그토록 마음 아파하면서 내 마음이 우울한 안개가 되는 것도 내 몸에 푸른 풀잎의 추억 아직도 남아 마음으로 수놓는 것이니
떼 묻은 욕망이 숨겨진 불발의 그리움들 어디를 가도 반복되어 영혼을 눈멀게 하나니 천 개의 지등紙燈 켜 따라오며 밤새도록 불빛을 타고 내 가슴에 그리움은 내리는구나
98-99별들의 노래
오늘도 밤의 나그네로 마냥 떠돈다 하늘의 뒷모습 새겨 이름표 달지 않은 별들이 길을 잃고 어둠을 가르는 빗살로 아주 넓은 뜰에 낙화가 되고 울타리 밖에는 낮게 낮게 외로운 사람들 만나 소곤거린다
산밑에 소금기 없는 세상이 열리고 가장 작은 꿈을 지닌 나그네로 떠돌며 고향집 뒤뜰에 핀 배꽃의 화려함 닮아 가슴 환하게 열어 천상의 베일 벗는다
어둠이 너무 깊어져 즐겁게 저문 하늘 어째서 마음껏 떠도는 지 알 수 없지만 아주 먼 곳에서 들려오는 노래 어딜까 마음을 끌고 어디로 간다
오늘은 길도 없이 모두 떠돈다 거기에 잠에 자리 남겨주던 무게가 쌓인다 날이 새면 네 뼈의 뿌리로 그토록 흔들리며 짧은 그림자는 끝없이 이어지고 하나씩 벗겨지는 허공을 향하여 오늘도 살아서 죽은 자의 꿈이 되면서 누군가 기억에서 잊혀지는 것이 싫어 늘 외롭게 떠돌면서도 지상의 꿈을 빛으로 남겨 찬란하다
100-꽃잎
이별 그 다음에 나는 아무런 까닭 없이 눈물 같은 이슬 맺힐 수 있을까 내 사랑 속에 깊이로 잠든 그대 붉은 속살로 바꾼다면 내 사랑의 모습 이제 드러내리라 영혼의 아침은 켜진 등불로 환하다
101눈물
눈물은 시월의 과원을 떠나던 바람의 오줌발 너무나 마려워 아무렇게 누다보니 두 갈래로 갈리네 한 갈래도 이별 또 한 한 갈래도 이별.
102그 겨울 바다
밀려가는 파도 내 마음 쓸려 나간다 차가운 바람결 연신 부딪치며 생각에 잠겨 몸부림치는 파도 누군가 바람을 풀어 휘 젖는다 피어오르는 파도의 하얀 채운彩雲 물 여울 따라 세차게 흔들린다 밤새도록 혼자서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맨발이 보이느냐 엇갈린 이별 여기서 시작하며 파도는 오지만 대낮 빈 바다에서 후광을 드리우는 갈매기들 노래의 악기가 되고 해조음이 뒤섞인 음률로 목이 메이는 소리들 바람결에 섞여 날리는 바다 내 가슴에 점 하나 찍어 몇 개의 분신으로 나누어져 연신 갈래지어 찢긴다 나누어 만나는 파도 혼자 수평선에 닿고 내 마음도 그리로 닿아 아, 나보다 크게 하늘이 얼비친 물결 내 눈앞에서 서로 갈려 때아닌 이별 그토록 서둔다
103그대는 별이 되어
마른 풀잎 사이로 별이 매달려 있었다 그리움 발효시키지 못한 그대 꿈결에 모습을 드러내 길모퉁이를 돌고 있었다 사랑을 염소에게 먹인 뒤 별을 파는 가게는 조금전 문을 닫았다 나는 어둠 속에 홀로 서 있었다 끝없이 떠도는 사랑의 굽은 등이 보였다 그대가 내민 넓은 손에다 판자집에서 지은 이름 아로새기기 시작했다 파란 꽃이 공중에서 파르르 떨었다 비 새던 지붕 위로 꿈도 스며들었다 별들이 나를 밀어 하늘로 끌고 다니다가 발목을 자른 뒤 다시 지상으로 내려보냈다
104 눈보라로 날린다
바람으로 날리며 눈이 내린다
오후에 휘청거리는 발걸음 눈보라 속에서 길을 찾아 헤맨다
나를 가두고 있는 모든 걸 풀고 눈보라를 뚫고 나갈 나의 설계도는 헛된 것이 아니다
눈이 내리면 쳐내도 쌓이는 무리들에 섞여 허름한 내 옷에 달라붙어 표백시킨다
눈에 옷은 가벼워도 실밥을 타고 눈길 위로 떨어진다 소나무 위에 눈꽃 길바닥에 떨어진다
뛰어 놀던 개의 눈빛이 빛난다 지붕에 쌓이는 하얀 이야기들 흘러가는 그 소리를 듣노라고 우리는 얼마나 차가운 시간 속에 서서 바람소리에 지쳐가고 있는가
105꿈속의 그대
꿈결 타고 그대가 오가느니 그리운 마음 가슴속에 넣고 그대 얼굴 추억으로 오려낸다
뜨거운 마음 저 멀리 두고 외로워하는 이를 사랑하여 보내던 한 때
사랑은 멀리서도 가까이 오는 마음 꽃잎으로 흔들려 가슴에 남았느니 꿈속에 그대는 고독을 벗기는 마음의 꽃
꿈결 타고 그대가 오가느니 오늘은 마음놓고 외로워하라 그리움 어린 긴 잠에 취해 사랑하는 사람 잠시 쉬게 하라
106-107눈 내리는 날에 추억
눈이 나리는 날 추억이 수런거리며 낯선 골목으로 걸어간다 사랑하던 날들은 쓸쓸하게 흔들리고 아직 마음 다독거리지 못하여 눈 내리는 거리를 돌아다니는 오래도록 낡은 바람들 머릿속에 스치는 추억을 꽂는다 내 마음 속 빈자리가 많아 길을 잃어버린 바람결이 엇갈린 시간표를 들고 다니다가 가슴에 벽돌을 쌓고 있구나 바싹 세운 코트 깃은 눈길을 걷던 기억을 들추거나 추억의 반대쪽으로 사라지고 하얀 대지 위에서 어제 안은 추억 외로워진 마음의 흐린 발자국 소리 언덕에 자그마한 종을 치는 눈사람이 하늘을 향해 소리친다
하얗게 물든 세상을 달려가는 겨울 나무 한 그루 눈길 위로 걸어가는 외로운 사람들 세월 저편에 새겨질 그림으로 남고 하얀 백지로 남은 사랑 몇 알 지난 시간을 베어먹는 법을 내게 묻고 있다
108-109안개 낀 거리에 대하여
마음의 뒤로는 숨겨진 사랑뿐이다 오늘은 그 사랑 너무 아름다워 보이지 않게 떠도는 때문이다 내 사랑은 오늘도 보이지 않게 저 건너편 그림자로 숨어 있다
주위를 둘러보면 세상은 그대의 모습을 숨긴 안개뿐이다 정원의 꽃도 도시의 창가에도 언제나 보이지 않게 서성이는 그대
내 사랑도 어느 날 그대처럼 안개 숲 사이로 숨었다 아득한 기억 속에 구름이 흐르듯 그대를 숨겨놓고 내 마음 흐르게 하여 숨겨진 사랑을 위해 나는 이 밤이 새도록 안개를 내 가슴에 보이지 않게 채웠다
안개는 다시 흩어져 뿌연 그림자로 남았다 구름은 언제나 나를 버린 채 흐르고 나는 언제나 안개에다 마음을 묻었다
희미한 그림자 하나 그리고 보이지 않는 안개 숲에 아름다운 사랑하나를 묻으며 나도 이제 보이지 않는 사랑을 찾아 거리의 모퉁이에서 안개를 마신다
110-111오늘은 바람이 분다
오늘은 바람이 분다 먼 곳에서 내 옷깃이 펄럭인다 그 사이로 사람 몇 이가 흔들린다 흔들리는 사람과 집들은 아직은 수평선 내 사랑처럼 포근하게 다가오던 햇볕 몇 점 거리를 막고 서서 벽을 허문다
내 삶 하나가 모퉁이에서 떤다 내 마음도 덩달아 흔들리고 그 위로 비가 내리고 바람이 쌓인다 보이지 않는 손길로 빗줄기 잡지 못하는 생각은 끝없고 인생이 바람이라는 걸 모르는 평온의 아주 어두운 날들은 거기에 모습을 감추고 있다
바람이 흐느낀다 집이 흔들리고 날은 어둡다 세찬 바람이 온몸을 쓸어내려 살아온 삶이 썩은 落果낙과로 흔들린다 인생이라는 것을 높이 세워 허물어지는 벽에 걸어 놓으며 바람에 조금씩 쌓이는 아, 슬프게 살다 어딘가 떠나는 사람들
바람이 겨우 그치고 그 뒤에 삶이 바람에 묻히는 걸 남겼다
112겨울 바다를 마신다
오늘은 바다를 통째로 마신다 창 밖에 어둠이 내리고 작은 눈송이들이 내 가슴위로 하얀 꽃잎 되어 내리는 날 바다가 바라보이는 조그만 카페에 앉아 바다를 마시고 파도로 취하고 싶다
내 마음 속 하얗게 쌓이는 눈 내 가슴 속 흩어내는 바람결 바다 위로 아무리 날아다녀도 깊어진 등대불빛 바라보는 자리에 앉아 파도로 오는 그대라도 바라볼 수 있다면...
안주 접시에 생선 몇 마리 기르며 입안에 넣고 씹는 파도의 맛 더 짙은 고독이 물결로 출렁거려 목구멍에 하얀 포말로 밀려드는 파도 그 곁에서 흩날리는 눈발
말린 해초의 머릿결 같은 바다 하얗게 여백을 물들여 주기에 겨울 바다를 통째로 마신 다음 내 가슴에서 홀로 취해 출렁거리는 파도 튼튼한 바다의 풍경으로 넘어간다
113그대 위해 오늘은 촛불을 켠다
어둠에서 무엇을 보느냐 나를 낳았던 어둠 내 삶을 낳았던 어둠이 보이느냐 지붕 위로 숱하게 물들인 별들의 물결은 떠오르고 어디서 이불 덮는 남자가 어둠을 사르려고 손톱과 부딪친다
말없이 타는 촛불은 한결 화려하다 멀리만 보이는 어둠 속에서 지나간 삶들이 꿈을 싣고 와서 서성이고 마침내 퍼진 듯 불빛에 젖어 나비처럼 불꽃 속으로 사라진 남자 풀잎을 덮고 잠든 도시 위로 하나씩 사라졌다가 공간을 날아다닌다
꿈꾸며 기다리던 나의 새벽을 걷는 길손들 불나비처럼 촛불에 모두 모여 어둠 속 멀리 별들이 놓은 다리 건너 아직도 멀리로 떨어진 그대를 위해 오늘은 내 봄 같은 촛불을 켠다
114-115 그대 눈동자
아픔을 주고 떠나간 이별의 나날들 그대 그리움 아직도 찾아들어 그대의 눈동자 기억으로 바라본다
하늘을 지키던 별들이 잠든 밤 나는 마른 기억들을 꺼내들고 어둠 헤치고 보이는 그대의 눈동자 그대는 아직 잠들지 않고 그림자로 내 곁으로 다가온다
어둠에 젖은 창이 어둠을 마구 문지르고 나처럼 홀로선 가로등 하나 그대 눈동자 보려는 내 눈을 감긴다
창가에서 내 마음처럼 흔들리는 나뭇잎 지금은 그림자로 나를 보고 있고 때로는 사랑의 아픈 기억 흔드는 그대의 그림자로 보이는 눈동자 오늘은 맑은 호수로 반짝인다
어느 듯 이별의 슬픔 모두 잊은 듯 가로등 불빛에서 더 슬퍼하던 마음 어둠 속 그 자리에서 눈물에 젖던 그대의 눈동자
눈을 뜨고 바라보면 어둠은 밤새 나를 끌고 다닌다 어둠이 살아난 뒤에는 별들이 대신 떠다니며 상처 어린 가슴의 나를 바라본다 아아 그리움은 잔인한 것 내 사랑도 잔인한 것 이제는 가슴에는 바람뿐이다
116-117사랑하던 날은 가고
그대여 지나간 것은 더 아름답다 사랑하던 때는 그대가 아름답게 보이고 이별 할 때는 슬픔 머금은 꿈이 더 잘 보인다 때로는 아름다운 시절의 나눈 추억이 마음에 물든다 찾아오다가 길을 잃은 사랑 추억에 젖은 낙엽을 날리며 다가온다 조각난 추억을 마음 깊이 간직해 보지만 이별의 순간이 안개의 묻혀 가물거린다 순수한 사랑을 키스로 나눈 사랑도 있다 키스로 이별을 나눈 아름다운 추억도 있다 이별 때문에 사랑의 시간은 가버리지만 생각을 하면 그대가 녹아 가슴 속 앉는다 아, 찢긴 나비의 날개로 날아가는 추억이여 과거는 누구를 위해 남고 추억은 누구를 위해 낙엽으로 떨어지는가 이제는 떨어진 낙엽으로 가슴을 덮어보자 어디론가 바람결에 날리더라도 가슴이 낙엽에 물들어 벌겋게 달아오르더라도 추억을 위해서 오늘밤은 가슴을 덮어보자 아름다운 사랑을 위해서는 이별이 알맞다 그대여 나는 지금 지나간 추억을 더 사랑한다
118-119떠나도 아름다운 그대 사랑
그대 사랑 아직도 잊지 못해 더 외로운 오늘은 조그만 내 가슴 오려 구멍난 내 마음마다 수채화로 그려진 추억 다시 채워 보지요 영롱한 이슬방울 머금은 채 불씨 한 점으로 타오르는 그대의 열정 사랑하던 이름이 선명하게 새겨지네요 흔적으로 물든 아름다운 속살마다 그윽한 향기로 베이는 그대의 사랑 생각하면 할 수록 그대 숨결 내 마음 물들여 주기에 그대가 오는 줄 알고 마음 활짝 열어 사랑스런 비밀의 색깔만 접어 마구 뿌려보지요 시간의 공백 사이로 찾아든 그대 빗살 어린 꿈이 모여든 사랑의 빛깔 오늘도 차곡차곡 내 가슴에 다시 묻어도 떠나간 그대는 지금도 보이지 않아요 그대를 처음 만나는 순간 향기의 언어로 물들어 가득 채워진 사랑 영롱한 무지갯빛이 펼쳐지는 것 같아 오늘도 떨리는 마음 어쩌지 못해 떠나도 아름다운 그대 사랑 추억이 물든 마음으로만 바라보아요
120-121꽃의 연가
아무런 색깔도 가지지 못했지만 뜨겁게 달구어진 내 사랑 지금도 추억으로 남아 빗물로 씻기지요 언젠가 숲길 걸으며 이름 없는 꽃 한 송이 꺾어 손에 쥐어 주는 것으로 이별을 하고 슬픈 모습 보이며 떠나간 그대 이제라도 그대와 마주치면 지난 시간을 꽃으로 오려 사랑했다고 말하고 싶어요 지나간 세월은 그리움이겠지만 내 마음을 한꺼번에 보여주지 못하고 이제 조금씩 열어 보여주는 것은 그 때에 사랑한다는 말을 아직도 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가슴에 고스란히 담아두었기 때문이지 오랜 세월 지난 지금 다시 이 숲길을 혼자 걸으며 그대의 꽃으로 다시 피어나는 빈가지 어떻게 꺾어야 할지 몰라 추억을 모두 꺼내 빗물에 씻으며 슬프지만 슬프지 않게 노래를 불러요
122-도시의 남자들
도시의 남자들은 구운 물고기 눈알로 젊은 여자의 가슴 길고 흰 다리를 쳐다본다
연한 신경을 뽑아 내고 여자의 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정념情念의 눈
모든 감각이 늘어지면서 아련한 마음 이어놓는 시간 남자들은 여전히 살 냄새 맡으며 눈뜨고 서 있거니
착잡하고 황홀한 불가사의로 밝혀진 도시 층계의 대낮
이글거리며 흘러내리는 눈빛에 엉킨 종잡을 수 없는 마음 하나 오만가지에 씹히는 도시가 남자의 앞산만큼 더 높게 콘크리트 숲 흐른다
123행복은 어디서 오는가
인생들마다 때로는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듯 내 인생도 차가운 바람이 불다 그치면 양지바른 언덕에 피어난 파란 풀잎 같은 나긋한 행복 내 마음마다 심을 수 있을 거야
바람결에 갈대들이 누운 것처럼 불행이 스친 자리마다 봄 날 아지랑이 물안개로 피어나 눈앞에서 가물거려 보이지 아니해도 그리고 잃은 것이 있어도 마음은 행복하다
행복은 잡으려해서 잡히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흐뭇한 미소를 지으면 마음의 깊이로 천천히 잡히는 것
작은 마음의 버섯으로 자란 기쁨 행복이라 생각하니 그 생각이 바로 행복인줄 세월이 지난 뒤에야 알만 하다
124-125눈이 내린다
설레는 잠의 저쪽 마을에 눈이 펄펄 내리고 있다 사람들아 눈을 보아라 마을에서는 백합꽃이 하얗게 피어 지상에 머리를 박고 포근한 꿈을 꾸고 있다
없는 소리가 아름다워요 뜰에 핀 꽃이 언덕을 내려와요
발가벗은 나무에게 이불을 덮어주는 여자가 하얀 피로 하혈하다가 잘 생긴 아기 눈사람 낳으며 웃는다 옆에 강아지는 꼬리를 친다 새들은 날다가 모여들고 아주 가깝게 흩날리던 오후는 슬프게 덮인다
꽃이 아름다워요 회색빛 하늘이 광장이 되어요
꽃마을 저쪽에 눈이 내리고 하얀 숲이 우거지고 아주 먼 하늘에 살면서도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 것처럼 눈꽃 흩날리는 사이로 걸어오는 눈사람 시린 손을 호호 불며 누군가 기다리다 회색 하늘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다만 새들이 날아갈 뿐
그러니 사람들아 가슴이 차갑거든 눈을 보아라
126 내가 그린 마음 하나
어두운 별 하나를 따다 내 마음에 매단다 입김이 부드럽게 흐르는 차가운 겨울밤 발가벗은 나무가지들이 춤을 춘다 별빛에 걸린 나뭇가지 사이 짝 잃은 기러기 한 마리 날아간다 별빛이 희미하여 어딘지도 모르는 곳 옆에 짝이 없는지도 모른 채 날아 높고 낮은 산 너머 깊은 어둠에 빠진다 새끼줄에 묶인 초가지붕 위로 기우는 초생달 날카로운 비수처럼 마음을 찌른다 하얀 피는 쏟아져 낮선 길을 이룬다 그 길 위로 날개 잃은 기러기가 걸어간다 그 길 위로 바람이 리본을 풀어 출렁인다 그 길 위로 술 취한 여자가 날아간다 이제 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별들이 떨어져 곱사춤을 출 뿐 마을의 울타리도 지워져 보이지 않는다
황홀한 어둠이 내 몸을 떠돌던 자국들 앙상한 마음에 걸려 별이 맺힌다
127겨울비 오는 날
이제 추워서 이별하며 쏟는 눈물이 아니다 뉘우침 없이 떠도는 그리움도 아니다
마음의 뒤 안을 지나가면 눈꽃 사이로 살며시 걸린 내 보이지 않는 조그마한 사랑 하나
허공에서 그 조차 빗방울로 부서지며 벗은 가로수 쓰다듬다가 그대 살결인지 알고 멈추어 방울방울 흘러내리는 눈물 이제는 정말 사랑이 아니다
128겨울밤 소나타
창가에 앉아 버려진 날들을 주워 모으며 하얀 소리를 들어보네 눈이 내려 하얀 마음이 물든 세상이 아름답게 보일 것만 같은 밤 생각해보면, 나를 스쳐간 사랑은 바람으로 날린 내 사랑은 너무나 짧은 것들이어서 그토록 오래 머물지 못했던 것인가 마음이 흔들리는 이 밤 별들과 초승달이 만나는 어둠 속에서 내 마음은 무너져 이미 초라하지만 나는 촛불을 켜고 어둠을 밝히며 더듬거리며 그대에게로 가보네 가서는 떠나지 못하네 내 마음 위에 그대 얼굴 올려놓으며 사랑의 실타래를 풀어주었네 그대는 실패, 나는 실 이렇게 우리 서로 풀리고 감기며 별빛 반짝이는 어둠을 거슬러 오르며 우리의 사랑도 이만큼 익어 다른 별로 빔 하늘 떠돌고 있었네
//////////////////////
제4부
131풀꽃의 노래
나는 늘 바람에 흔들리면서 아름다운 꽃을 피우지 굳이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도 좋아 바람이 날 데려가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새롭게 태어날 수 있어 하고 싶은 모든 말들 아껴둘 때마다 씨앗으로 영글어 떨어지는 소리를 듣지 너무 작은 꽃으로 피었다고 불완전한 것은 아니야 내게도 고운 이름이 있음을 사람들은 모르지만 조금도 서운하지 않아 기다리며 피어나 흔들리는 법을 오래전부터 바람에게 배웠기에 마음 넉넉히 채워 기쁘게 살 뿐이야 푸름에 물든 삶에 꽃이기에 잊혀지는 것은 두렵지 않아 나는 늘 그렇게 잊혀지면서 살지 지금도 그렇게 바람과 함께 살지
132-133하루살이로 살지요
하루살이 떼들 안개처럼 날아다닌다 황혼이 밀려간 땅거미 사이 처마 앞 곱실거리며 날아다니는 무리 오늘 지나면 찾아오지 못할 미래를 목전에 두고 기약 없이 혼절하는 시간 위에서 사랑을 버리는 연습을 시작한다
그렇다 하루살이는 좀더 살려고 어둠의 자궁 속으로 묻히려한다 결코 호락호락 생을 내어주지 않을 것 같은 저 짱짱하게 날개 짓 하면서 네세來世 한가운데 모여들어 어째서 작은 몸 누일 집 떼지어 찾느냐 떠오르는 모든 생각을 버린 길은 멀고 황혼은 아름다운 꿈이 되고 그 꿈 줄기에서 마지막 날아보는 생명들
내일이라는 가까운 거리가 오늘은 너무나 멀리 보이고 눈부신 상생相生의 교리 하나 찬란한 윤무로 땅거미 넘는다
134 그대가 꿈에 보이나요
꿈에도 처음과 끝이 있다 해마다 꽃으로 피었다 지는 꽃 아직도 바람이 미더워 흔들리는 꽃 내 눈에는 가끔 보인다
아무리 잊으려 해도 그림처럼 고운 얼굴 이제야 보이는가
세월을 접는 헤어짐 그런 만남도 가을비로 젖어 눈물로 피고 지는 그런 꿈에도 처음과 끝이 있다
철없는 시절 내 가슴에 하얀 종이배 띄어 꿈결인 듯 떠내려가는 이별 잡지 못하고 이제야 잡으려 하는 마음 꿈속에서 오늘은 그대가 보인다
135 가을 이별 너무도 길다
그대를 보내는 시간인데 못 견디는 바람을 건너 내가 떠나는 시간인데 저물도록 낙엽은 지고
은행잎이 땅위로 쏟아지는 날 길가에 희미한 가로등 하나 달처럼 지붕에 걸리고 황홀한 설움의 눈물이던 마음 빈손이 더욱 가볍다고 소곤거리는가
아쉬움은 생명을 키우는 바람 허허로운 낭만의 둘레 맴돌며 그리움의 잔을 기울이는 쓸쓸한 행렬은 지금도 이어지는가
어느 가난한 이름을 쓰려고 모두 벗어버린 숙명으로 머리카락 날리며 몇 겹에 이승의 마지막 밤을 지새우려 몇 겹 훗날 세상까지의 죄업 씻는 은행잎 그대를 보내는 이별의 시간은 어째서 밤새워 땅에 내리기만 하는가
136겨울 장미
이름하여 두고 온 계절의 꿈이라 하라
고요한 마음 못 이룬 터전에 작은 뉘우침조차 없는 상처의 마음인데 등불 켠 아낙의 얼굴 오늘은 너무 고아라 계절을 잊고 피어나는 장미여
두고 온 내 마음 어째 찢겼을까 그대의 꽃 빛이 가슴 꾸미기에 어쩌면 불과 같은 고운 향료 어쩌면 불과 같은 사색의 제단 이제 이를 조용히 바라보는 누군가의 기다림이 있다는 말인가
아무리 추워도 불 송이로 마음을 태우며 절로 오는 마지막 꽃의 향기 절로 가는 차가운 바람결들
하나씩 붉어지는 오늘의 낙조落潮로 담 밑에 떨어지다가 광채의 너울거림 다시 벽에 걸어둔다
137열정
한 잔 술에 내 몸이 뜨거워지는 것이나 화려한 장미가 담 밑에 탐스럽게 핀 것이나 뜨거운 열정은 무엇이 다르랴
사람들 몸에서 내 품는 열정 화려하게 피어 뜨겁게 보이는 열정 모두가 사랑처럼 뜨거운 것이니 사랑도 그렇게 뜨겁게 있다가 말 없이 돌아오는 이별로 바람결에 식어 가는 날도 때로 있거니 말없이 흘리는 눈물보다 더 뜨거우랴
138그대를 잊는다
언제부터인가 겹꽃으로 피어난 내 작은 가슴 위로 향기가 나기 시작했다
잎새가 젖어 가슴 아파하던 마음 사랑하던 사람 떠나보낸 뒤 벌집구멍이 송송 뚫려 바람이 넘나드는 시간이면 비 오는 날 밤에도 별을 찾으러 조그마한 창문을 연다
어두운 시그널이 널린 하늘 아무리 눈을 떠도 캄캄한 여백 이제는 그대의 기억으로 채울 시간이다
빗방울과 함께 내리는 어둠에서 그대 얼굴은 하나의 까만 점으로 아롱이고 슬픔보다 빠르게 피어나는 무명빛깔 종이꽃 향기 없이 내 가슴에 피어나서 기억에서 지친 마음을 몇 번인가 가른다
139마지막 꿈
마지막 꿈에 아름다운 세상 보이고 마지막 꿈에 그리운 사람 만나면 나는 작은 별이 되어 하늘에 떠돌고 싶어요
보일 듯 멀리 사라지는 아주 작은 별 별빛은 머리풀어 방향 없이 미련을 두고 오직 그대 눈에서만 찬란하게 빛나는 별
오늘 밤 이름 없는 작은 꽃이 될까요 내일 밤 아주 작은 그대의 향기 될까요
소리 없이 스며 꿈으로 가는 아주 작은 별 지난 세월 버리고 저 멀리 가고 있네요 버려진 한밤에 다시 꾸는 마지막 꿈 아직도 내 마음 남아 있음을
140지하철을 타고 가면 꿈이 있을까
시간의 공백 싣고 떠나는 지하철 블랙홀에서 뛰어나오는 그림자 바람결로 흩어진다
공간과 공간 사이 뚫고 어둠의 가슴 더듬다가 지상에서 만나면 하도 눈이 부셔 멈출 수 없이 그대에게 다가가는 두 줄기 선로
스치는 바람결 뒤로 버리고 어둠을 지워주는 천장 불빛 초라한 풀씨가 되어버린 사람들 내 무게 사이에서 너무나 가볍다
정지된 시간에 흔들림 그 흔들림에서 생긴 지하의 꿈 어둠이 몰려 잠시 베어먹는다
141겨울바다
겨울 바다에 가면 이 세상 끝이 하얗다
영원의 깊이로 출렁이는 파도 더 넓어진 수평선 멀리 점이 되어 떠나가는 조각배
갈매기 바라보면 볼 수록 내가 품은 눈물이 부질없음을 안다
날기 위해 어깨 낮추 듯 물결 위를 걷는 파도 혼자 떠돌다가 사라지는 구름 영원한 푸름을 씻어내는 겨울 바다 해변에 피어난 하얀 눈꽃이 파도를 살금살금 잘라먹는다
142밤
아름다운 꿈을 꾸는 밤 사람들은 모두 꿈속으로 돌아가고 별들만 수북하게 허공의 귀퉁이에 남아 반짝이는 밤
외로움 피아노 치듯 어둠 매만지는 밤
가벼운 소나타로 들려오는 바람 소리 아름다운 음율로 내 귓전 두드려 이 밤 홀로 그대 그리워하고
어둠 머금은 물결 위에서 그대 모습 그림자로 떠도는 밤 어둠에 젖으면 그대 더욱 그리워
오늘밤도 그리움이 쏟아져 사랑하는 마음 바람으로 날리는 순수여 너는 지금 어째서 이토록 어둠을 방황하느냐
143가을이 오면
깊어진 가을날 낙엽은 귀뚜라미 울음에 실려 아주 낮은 곳으로 간 뒤 텅 빈 뒤안길 위로 남긴 외로움의 빛깔들이 무채색인줄 알았다
144황혼이 질 때
바람결 타고 붉게 쏟아지는 마지막 빛을 보아야 하리 산이 젖어 나무가 젖어 모두가 붉은 꿈에 물들어 있을지라도
세상은 다시 붉게 젖고 바람은 보이지 않아 기러기 떼 산을 넘는 이 가을은 너무 짧다 지나는 태양이라도 가슴에 넣던 내 꿈 어쩐지 오늘은 하늘보다 너무 멀다
길손이 된 황혼, 찬란한 마지막 빛 가을에는 낙엽이라도 바라보아야 하리
145산바람
산에서 만나는 바람결 흔들리는 풀잎과 나뭇잎 새들
오늘은 모두 일어서서 손짓한다
이 세상에는 즐거운 일이 얼마나 많은가 이 세상에는 슬픈 일이 얼마나 많은가
높은 산 큰 바위에 햇살이 스치듯 바람결 스치는 여음餘音 산은 오늘도 내 그림자 안고 멀쩡하게 드러눕는다
흐르는 세월 속에 박힌 바람결 구차한 사슬 풀고 내 마음 자꾸 허물어 씻는다
146-7태풍 나들이
반갑지 않은 태풍 루나가 오려는지 어제 밤비가 내리고 바람이 창문을 흔든다
향긋한 포도알 입에 넣고 터트리는데 거실 통 유리창을 두드리는 빗방울 유독 길고 검은 바람을 몰고 파닥이며 뜨락에 포도나무 흔들어 땅 위에 떨어진 포도 알갱이들 한숨덩어리로 쌓인다 세월을 버린 쓰레기로 모인다
남쪽에서 아픔이 있다면 거기서 삭이지 못하고 어째서 멀리로 찾아오는 것일까 바람에 젖은 빗방울로 쓰러져야 하는 고통 처절하게 내 가슴 찌르고 있기에 아무리 찾아와도 문을 열어 줄 수는 없다 벌써 몇 번인가 검은 베일을 쓴 채 키를 높인 남자 눈물의 비와 한숨의 바람소리로 오늘은 정말 슬프다
자주 찾아오니 반갑지 않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태풍의 나들이 울음소리는 공간을 떠난다
148밤비가 내린다
원시의 언덕을 넘어 슬픔의 냄새가 베인 투명한 빗줄기 어둠의 속살 적신다 뼈와 뼈를 잇는 마디마다 빗방울 맺히고 눅눅하게 꿈을 넘나드는 갈피 깊은 잠에 어둠 두드린다 눈을 들어 바라본 하늘의 마디 시간에 지쳐 종착역 머물러 잠들고 천년의 무게를 풀어 내리는 빗방울 어두워진 계절의 또 다른 마디 풀어낸다
149 배꽃
봄볕이 바람결로 젖어드는 산야 하얀 구름이 무리 지어 꿈처럼 피어난 꽃을 바라봅니다 푸른 잎 돋아내는 물오른 나뭇가지마다 옅은 하얀빛 연등 총총 걸어놓고 화사한 웃음으로 캄캄한 밤하늘에 하얀 별을 기다릴 것입니다 때가 와서 사람들 앞에 아름답게 보여주고 훗날에는 꽃잎 바람결에 흩날려 다시 맨몸에다 열매 달고 있더라도 오늘만큼은 온화한 꿈 지상에 아로새기며 잠시동안 산야에서 피어난 무더기 하얀 꽃으로 그대의 꿈으로 너울거립니다
150-51달빛 가슴속에 담으며
달빛이 내려 뜰이 환하다 어둠이 밝아진 지금쯤 내 영혼이 어둠 속에서 등불을 켰을까
내 곁에서 살다간 사람 환하게 웃음 짓는 얼굴 공중에 떠서 이 밤 맑은 한 조각 유리가 되었을까
지금도 추억으로 있는 사람과 지금도 사랑하여 잊지 못하는 사람 그 사이로 여울지어 내리는 달빛 오늘밤은 어째서 곱게 눈가에 어릴까
바람이 불어 나뭇잎 한 잎새씩 뚝뚝 떨어져 젖빛의 달빛이 강물로 흐르는 광장
가로등 불빛은 지금도 환한데 사랑하는 그대 이름 생각나지 않아 태고太古에 굳어진 달빛 바라보며 다시 한번 그대를 기억하노라니 달빛으로 밝아진 내 가슴 빛 여울 가볍게 스치는 것을
어느 훗날 작은 추억 남기려 흐르는 달빛 이제 내 가슴에 조금씩 담아볼까
152해안선 따라 가며
푸른 줄기 길게 엎어진 파도 춤추는 해안선 따라 섬들은 마지막 촛불로 반짝인다
물결은 무엇 때문에 출렁거리는지 알 수 없지만 파도는 연신 해안선에 부딪치며 가벼운 목숨을 내걸었다가 어디에선가 나타난 노을 물결 위로 유유히 떠돌다가 어디론가 멀리멀리 사라진다
갈매기 몇 마리 함께 울며 저 멀리로 날아가다가 죽지에 부리 깊이 묻고 섬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나보다 더 외로운 갈매기 바다 위로 날아가다 나를 쳐다본다
153꿈속에 아버지
가난이라는 소박한 눈물 옷소매로 훔치며 무량한 가슴 어찌 열었습니까 흐르는 세월 감당키 어려워 자식들 곁에 두고 홀로 떠나신 아버지 지금 영민 하는 꿈속에도 슬픔의 겨운 모습 어째서 내 보이십니까
너무나 어린 나이에 자식 남겨두고 떠나가신 아버지 아버지가 남긴 자식보다 정원의 나무로 훌쩍 커버린 손자들 내가 그들의 부모가 된 나이에 애오라지 아이들 잘 되기를 비는 연한 나뭇잎 같은 마음이 있다면 이제는 누구에게 벌을 주시겠습니까
반생을 머리에 위고 삶의 마루터기 오르내리는 삶 불현듯 달밤의 그리움으로 다가오시며 기약 없는 꿈 하나 새로 곱게 새겨 오늘 밤 제 가슴에 기꺼이 넣어 주시렵니까
154장미의 계절
담 밑에 꿈은 모여 강물로 흘러라 말끔히 씻긴 해가 흩어져 빛을 뿜으며 등피 燈皮를 닦는 햇 맑은 거울 그 거울 속에 비추어져 담긴 꽃잎 내 마음 사로잡던 나날은 사랑의 정열보다 붉어라
꿈속 같기만 한 영혼의 램프 그대 그리워 낮 밤 생애 잊고 무한대 정열을 쏟아 내기에 가시에 찔려도 아픔 모른 채 삶의 애린 愛隣 이토록 마음의 구석에서 꿈을 머리에 핀처럼 꽂아 바람결에 흔들리며 다가 올 줄 누가 알았으랴
초록 잎이 멍들어 붉은 태양 빛 닮아 가는 동안 열정에 도취하여 가라앉는 빛깔 내 가슴에 가만가만 물들어 잠긴다
155내 인생은 강물로 흐르고
내 인생이 강물로 흘러갈 때 갈대는 춤을 추며 바라만 보아요
떠나는 아쉬움의 손짓 지난 꿈은 뭉개 구름으로 흐르고
우리가 모두 버리고 흔적 없이 떠나가면 인생의 그림자조차 멀어져 보이나요
순간 순간 쌓여서 이어진 생각들이 하나씩 풀려 갈 길을 재촉하지만 흐르는 눈물은 어쩔 수 없었어요
내 인생 아주 작은 꿈만 가득했던 내 인생 뒤돌아보면 무형의 자국만 남겼을 뿐인데 이제 강물로 다시 흐르고
미련을 두고 그리도 흐른다면 내 마음의 강에는 바람만 불어요
156-7어느 소녀의 기억
세월의 뒤 안으로 또 다시 세월이 가면 아주 작은 마을에 하얀 얼굴의 소녀를 생각해요 순이라면 하느님은 누군지 알겠지요 맑은 눈동자에 이 소녀 어느 날 동구 밖 사는 나를 사랑하며 딴 생각 아무 것도 없이 내 사랑 나누며 살다간 소녀 순이
내가 그녀를 사랑하던 날 그녀의 눈동자에 맺힌 사랑이 무언지 알았죠 철부지들이 사는 작은 방에 촛불 켜고 소꼽 사랑을 나누며 보내던 기억들 나와 그녀는 버릴 것 모두 버리고 하늘의 날개 달린 천사들이 시샘할 만한 사랑으로 살았지요
하늘의 먹구름 한 차례 바람이 실린 비를 몰고 오더라도 우리의 아름다운 사랑을 위해 찢어진 우산을 쓰고 눈물의 기도를 올렸어요 하지만 작은 집에서 흐르는 사랑 하느님은 멀리 데려가 버렸어요.
우리 사랑의 반만큼도 아닌 하늘이 그녀와 나를 시기한 것이었어요 그래요.... 사랑은 잔인한 주검인가 싶어요
별이 뜨는 밤에는 난 지금까지 허탈한 꿈을 꾸어요 그리운 순이의 꿈을 꾸는 밤은 내 사랑이 누운 작은 무덤이 슬퍼 별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어요
158낙화의 계절
꽃잎이 바람결에 흩날리는 오후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거리에 떨어진 꽃잎들 내 사랑처럼 밟힌다
뜨거운 정열 꽃으로 피었다 지는 나무 곁에 바람 몇 점 찾아들어 삶의 꿈 흔든다
마지막 화려한 생을 버린 슬픔인지 다시 돌아오는 바람결에 쌓여 일그러진 기억 안에서 흔들리는 촉각 이별의 신호등을 켠다
나는 지금의 나를 다시 한번 돌아본다 세월이 흘러 마음은 비록 나약하지만 더욱 뜨거운 열정의 꽃을 피어낼 만한 나무로 자랄 곳을 찾아 오늘도 뒤를 돌아본다
159내 이름 지우기
평생 누구에게 불려온 이름 이제는 지우개로 흔적 없이 지우고 싶다 하얀 백지에 푸른 하늘만 곱게 그려 내 이름 대신 쓰고 싶다 드넓은 하늘에 꿈을 새겨 무형의 언어로 불려진다면
160봉선아 물들이며
얼굴 일찍 내민 하얀 낮달 한낮 여름 땡볕 피하여 푸른 잎새 펼치고 앉아 누군가 기다리는 듯 붉게 피어난 풋내기 새색시로 다가오는 울밑의 봉숭아꽃 내 사랑이 다시 꽃으로 피어난다면 저토록 수줍어하는 사랑일까
인생의 색깔은 미지수다 바람결 스치듯 고운 정 닦아 마음을 물들이던 누이의 옛이야기 내 빛깔이 곱게 하얀 낮 달로 뜨다가 이웃집 순이 만나 붉어진 얼굴 지난 세월 못 잊도록 내 마음 물들여 놓더니 오늘도 낯설지 않은 빛깔 손톱에서 노을로 맴돈다
161그 해 여름
그 푸른 잎새 달아보려 세월 마냥 쫓았더니
푸른 하늘 밑에 새끼 쳐 다시 내게 돌아왔다
희망 그냥 가지고 있을 푸르고 푸른 바람 지금 내 곁에 있을 줄이야 누가 알겠나 162바다를 바라보며
바다를 바라보면 하얀 파도 위로 걸어오는 그림자가 있다
갈매기들이 떼지어 우는 소리가 있다
속이 환하게 들여다보이는 바다의 창자 속 날카로운 수평선의 칼날이 도려낸다
푸른 내부에서 출렁이는 바다 누설되지 않은 맑은 꿈이 전복 안에 소복하게 담겼다
163나팔꽃 피는 아침
작은 길가에서 나팔꽃으로 오르는 사랑이여 오늘도 한꺼번에 키를 높여 하늘보다 멀리 높게 오르려 들지만 내 사랑은 꽃이 피는 시간보다 더 멀리 이 아침을 향하여 찬란한 꿈을 꾸고 있었어
첫댓글 ~~가슴에~절절히 다가옵니다...좋은 시 감상하게 하심 또한 고맙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좋은글 담아감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