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2014년 가해 8월7일 연중 제18주간 목요일
[수도회] 떠나 보내는 것도 사랑입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제1독서 예레 31,31-34
† 복음 마태 16,13-23
★ 예레미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새 계약을 맺을 그날이
오리라고 예언한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법을 사람들의 가슴에 새겨 주시어
그들이 주님의 백성이 되게 하실 것이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이 누구라고 하는지 물으신 뒤
이제 제자들의 답이 무엇인지 질문하신다. 시몬 베드로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시라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는 그를 반석으로
삼아 교회를 세울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처음으로 수난과 부활에
대한 예고를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베드로의 수위권’의 근거가 되는 대목이자 교회의 기원과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성찰하게 하는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 복음을
한 구절씩 묵상해 나가다가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들으신 뒤
그에게 이르신 말씀에 머뭅니다.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인간적인 차원에서 스승으로만 바라보는 것을 넘어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라는 결정적 고백을 합니다. 이는 어디선가
떠도는 이야기나 누군가 알려 준 사실을 그저 반복하며 인정한 것이
아니라 가슴속에서 솟아난 진심 어린 고백이었습니다. 자신의 삶을 그분께
송두리째 바쳐야 함을 예감한 대답이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신앙
고백은 ‘깨달음’의 언어이기도 합니다. 신앙인에게 깨달음과 자각의 과정은
신앙의 성숙에 반드시 필요합니다.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난 독일의 시인 힐데 도민은 문화적으로 높은 수준에
오른 독일에서 나치즘의 광풍이 휩쓴 이유를 ‘스스로의 머리로 사고하는
사람’이 너무나 적었기 때문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저 폭넓은
지식과 높은 교양은 위기의 시대에 너무나 나약했습니다. 신앙에도 스스로
깨닫고 성숙시킨 신앙의 언어들이 있는 곳에서만 예수님의 인격과 삶을
닮아 가는 그리스도인의 길이 끝까지 투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렇지 않을
때에는 배타적 광신이나 율법주의, 자기 합리화나 시대에 영합하는 모습이
득세하고 복음은 왜곡됩니다.
그러나 스스로 깨달아 발견하는 신앙 고백과 언어는 사실은 자기 자신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자기보다 더 큰 진리의 빛이 이끄는 대로
주님께서 가슴속 깊이 들려주시는 소리를 듣는 이만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늘의 아버지 안에서 비로소 우리의 고유하고 참된 모습을
발견하기에 그렇습니다.
- 매일 미사 -
◈ [인천] 사람의 일보다는 하느님의 일에
2014년 가해 8월7일 연중 제18주간 목요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마태오 16,13-23
저는 줄곧 혼자 살고 있습니다. 물론 만나는 사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요. 하지만 가톨릭 사제로 산다는 것은 독신을 지키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고, 그래서 사제 서품을 받은 이후 혼자의 생활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그 누구도 저의 삶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지
않습니다. 왜 늦게 자느냐? 왜 식사를 하지 않느냐? 왜 술을 많이
마시느냐? 왜 운동을 하지 않느냐? 등등 옆에 누군가 있다면 쉽게 들을
법한 말들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혼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으니 ‘건너뛰자!’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가능합니다. 심지어 기도생활까지도 건너뛰면서 삶 자체를 흐트러트리게
살 수 있습니다. 또한 편한 것, 재미있는 것, 화려한 것만을 찾으면서 내
자신의 영성생활에 해가 되는 것만을 쫓을 수도 있습니다.
문득 저와 같은 성직자, 수도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일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쩌면 현대를 살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해당되는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요즘 특히 외롭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왜
외로울까요? 친구가 없어서, 가족이 없어서? 아닙니다. 편하고, 재미있는
것, 그리고 화려한 것들을 통해서만 자신의 탈출구를 찾으려하기
때문입니다. 혼자 조용히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간, 그리고 그 안에서
함께 하시는 주님과 함께 하지 못하기 때문에 외로움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화려함만을 가져다주는 쉽고 편한 길을 통해서는
참 행복의 길을 얻지 못함을 깨닫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이 선택하고
싶은 길은 과연 어떤 길인가요?
주님께서 장차 고난을 당하시리라는 말씀에 베드로가 반박하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면서 큰 칭찬을
받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칭찬의 여운이 아직 채 사라지지도 않은
시간에 예수님으로부터 심한 꾸중을 듣게 된 것이지요.
이 모습을 보면서 어쩌면 우리 역시 주님으로부터 사탄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즉, 주님의 일을 방해하는 걸림돌은 사탄의 일을
하는 것이고, 하느님의 일보다도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은
사탄의 모습을 따르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탄의 일은 언제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일들을 통해서 드러났었습니다.
칭찬과 꾸중의 차이. 하느님의 일이냐 아니면 사람의 일을 선택하느냐가
칭찬과 꾸중으로 나눠진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주님으로부터 칭찬받는
내가 될 수 있도록 더욱 더 노력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즉, 사람의
일보다는 하느님의 일에 더욱 더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남을 이기려는 사람은 반드시 먼저 자신부터 이겨야 하고, 남을 논하려는
자는 반드시 자신부터 논해야 한다(여씨춘추).
오르막길과 내리막길
제가 살고 있는 동네를 잘 알고 있다 보니, 어디에 오르막길이 있는지
또 어디에 내리막길이 있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힘이 좀 많이
드는 날에는 오르막길을 피해서 주로 평탄한 길이나 내리막길만을
걷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평탄한 길, 내리막길을 걸어서 다시 집으로
돌아오면 도대체 운동한 것 같지가 않습니다. 즉, 오르막길을 좀 걸어야
약간의 뻐근함도 느끼면서 운동한 것 같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삶도 그렇지 않을까요? 어렵고 힘든 오르막길도 있고,
편하고 쉬운 평탄한 내리막길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조건 평탄한
길만을 선택한다면 어떨까요? 그 삶이 얼마나 지루할까요?
어렵고 힘들어도 오르막길을 과감하게 선택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 오르막길을 통해서 삶의 의욕도 생겨나고, 새로운 삶의 의지를 지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 인쳔 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기타] 교회의 사명..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어쩌면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마음은 관심과 공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두 말에서 이해, 용서, 화해, 나눔, 정의와 평화가 시작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2014년 가해 8월7일 연중 제18주간 목요일 화답송 시편 묵상
"부서지고 꺾인 마음을 하느님 당신께서는 업신여기지 않으십니다.”
(시편51,19)
---
오늘 미사의 화답송으로 선택된 시편 구절입니다.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느님의 마음을 너무 잘 표현한 구절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들이, 이 아버지의
마음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일 때 마음이 아파옵니다.
교회가 교회답지 못할 때, 그것은 하느님의 교회가 아닌 악마의 교회가
됨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옳지 못한 권력에 하수인 노릇이나 하며 덕을
보려 해서는 더욱 안 될 것이고, 권력이 무서워 침묵을 지키거나 도망을
가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어려움에 처해있는 사람들을, 특히 불의한 힘에 억눌린 이들을 외면하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이 시대에도 부서지고 꺾인 마음들은
너무도 많습니다. 세월호라는 욕망의 자화상에 희생된 아이들을 떠나
보내지 못하는 갈기갈기 찢긴 마음의 부모들, 밀양의 노인들, 위안부
할머니들, 윤일병과 같은 고립된 폭력의 희생자들, 부당 해고 근로자들,
가정 폭력 희생자들 등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마음들이 고통 받고
있음을 의식해야만 합니다. 또한 지구 저편에는 속수무책으로 이스라엘의
천인공노할 폭력에 울부짖는 팔레스타인의 안타까운 마음들을 강 건너
불구경하는 듯한 태도도 있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세상의 악은 주저 없이 잔인하게 선하고 힘없는 이들을 짓밟으려 합니다.
우리가 방관이나 침묵을 선택할 때, 더욱 더 잘못 만들어져 일그러진
영혼들은 늘어날 수밖에 없고, 악의 힘은 강해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마음을 닮아가고자 하는 이들의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보다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고 그를 위해 투신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부서지고 꺾인 마음을 외면하는 교회라면 분명 그것은 악마의 동조자임을
명심해야만 합니다.
폭력을 정당화하고 약자를 힘들게 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한다면,
그런 하느님은 버리는 것이 옳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악마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나라의 정치가 엉터리라는 것은 그 나라의 국민이 가지고 있는
도덕성이 엉터리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모두가 진심으로 냉정하게
스스로를 반성하고 다시 일어설 길을 모색하지 않는다면 희망은 존재하지
않음을 알아야만 합니다.
---
이곳 신자들과 성지순례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당분간 묵상을 쉬게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수도회] 떠나보내는 것도 사랑입니다.
2014년 가해 8월7일 연중 제18주간 목요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마태오 16,13-23
떠나보내는 것도 사랑입니다.
야생에서 살아가는 포유류 동물 어미들의 양육 과정을 영상화한
프로그램을 보고 크게 느낀 바가 한 가지 있었습니다. 새끼들을 출산한
어미의 모성애는 정말이지 눈물겨운 것이었습니다. 지극정성, 애지중지,
그리고 그렇게 책임감이 강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어미 덕분에 새끼들은 아무런 걱정 없이 무럭무럭 자라나더군요.
어느 순간 젖을 떼고 점점 덩치도 커져만 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토록 금이야 옥이야 키우던 애기들이었는데 갑자기
키우던 녀석들에 대한 어미의 태도가 돌변합니다. 아주 매몰차고 냉정하게
외면하고 내칩니다. 아마도 이제 때가 되었으니 너희들 밥그릇은 너희들이
알아서 차려먹으라는 표시인 듯합니다.
그런 어미의 모습에 적응이 안 된 녀석들은 당황해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지만 어미의 태도는 완고합니다. 우왕좌왕하던 새끼들도 본능적으로
때가 왔음을 알아차립니다. 어쩔 수 없이 생존을 위해 홀로서기를
시작합니다.
갑작스럽게 변한 어미의 모습, 왜일까요? 곰곰이 생각해보니 새끼가
귀찮고 미워서라기보다 녀석들의 미래를 위한 특단의 조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녀석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언제까지 녀석들을 끼고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녀석들이 스스로 야생에서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눈물을 머금고 떠나보내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니 어미가 새끼들을 뜨겁게 끌어안는 것도 사랑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녀석들의 미래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떠나보내는 것도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뜨겁게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때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매몰차게 몰아붙이십니다. 해도 해도 너무할 정도의 독설을
퍼부으시며 질타하십니다. 가장 자주 질타의 대상이 된 인물이 수제자
베드로였습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오 복음 16장 23절)
이런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관계는 오늘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때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뜨거운 당신의 사랑을
보내십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식처럼 애지중지하시며 자비를
베푸십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철저하게도 하느님은 우리에게서
숨어버리십니다. 철저한 하느님 부재체험에 눈물 흘립니다. 이해할 수
없는 십자가 앞에서 기막혀합니다.
그 순간 우리가 기억할 일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 부재 체험, 그 큰
고통과 십자가 역시 우리를 향한 극진한 하느님 사랑의 한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더 큰 성장을 위한 하느님의 침묵, 하느님의 배려,
하느님의 사랑이 어둔 밤이요 십자가요 부재 체험인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하늘의 소리와 하나되면 인생은 성공한 것
2014년 가해 8월7일 연줃 제18주간 목요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마태오 16,13-23
하늘의 소리와 하나되면 인생은 성공한 것
각 사람의 주장이 다를 경우 의견 존중하면서도 결정을 해야 된다면,
의견수렴을 위해 언쟁 없이 진솔 성의껏 토론하기란 참 어려운 일입니다.
의견수렴이 그리 쉽지 않아 늘 골치 아픈 세상으로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의 생각은 원초적 본능에 기초를 두는 게 일반적입니다.
종교교육, 철학, 논리에 의존하여 생각의 원천을 교정해야 되겠습니다.
생각의 기초가 우주와 하늘의 소리와 하나 되면 인생은 성공한 거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오 16,23)”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수도회] 겸손의 덕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8월7일 연중 제18주간 목요일, 예레31,31-34 마태16,13-23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마태오 16,13-23
겸손의 덕
겸손할 때는 제자요 교만할 때는 사탄입니다.
겸손은 모든 덕의 어머니입니다.
오늘 베드로에게 부족한 것은 바로 겸손이었습니다.
섰다하면 넘어지는 것이 교만입니다.
자기를 아는 것이 겸손이요 자기 분수를 넘어서는 것이 교만입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스승 예수님을 정확하게 고백하는 베드로에게 기뻐하시며 큰 축복을
약속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시몬, 바르요나.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 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계속 이어지는 축복의 말씀입니다.
베드로의 고백에 감동하신 주님이심이 분명합니다.
바로 이때 교만의 악이 베드로의 마음에 들어왔습니다.
주님의 칭찬에 기고만장, 순간 자기를 잃었습니다.
뒤 이은 주님의 수난 예고에 베드로의 즉각적 반응입니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자기 분수를 넘어서는 순간이요, 좀더 깊이, 겸손히 주님의
말씀을 성찰했다면 이런 경솔한 반응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음 주님의 반응이 참으로 격렬합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오늘 복음의 핵심이자 절정입니다.
'반석'이라 칭찬 받던 베드로가 졸지에 '걸림돌'로 전락하는 순간이요,
수제자인 베드로가 졸지에 사탄으로 전락하는 순간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생각할 때는 주님의 제자요 사람의 일을 생각하여 주님을 가려버릴 때는
사탄입니다. 단 번에 수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런 끝없는 겸손의
수련을 통해 수제자가 된 베드로임을 깨닫습니다.
사탄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늘 우리 안에 있는 우리의 가능성입니다.
교만으로 자기를 잊어 사람의 일만 생각할 때 사탄입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순간 사탄의 도구가 된 베드로요, 이를 정확히
식별해 낸 주님의 분별력이 놀랍습니다. 이 충격적 표현의 격렬한 반응에
베드로는 크게 깨달아 제자로서의 겸손을 회복했을 것입니다. 사탄이
모방할 수 없는 겸손이요, 겸손한 자를 사탄은 결코 유혹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와 대조적인 1독서 예레미야 예언자의 겸손입니다.
겸손할 때 주님의 넓고 긴 시야를 지닙니다.
겸손한 이에게 계시되는 주님의 드 넓은 비전입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그때에 나는 이스라엘 집안과 유다 집안과 새 계약을 맺겠다.
나는 그들의 가슴에 내 법을 넣어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겠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늘 '그날'의 희망을, 비전을 지닐 때 겸손이요 현재의 시련에 걸려넘어지지
않습니다. 바로 베드로는 주님의 칭찬과 축복을 받는 순간 교만으로 이런
비전을 잃었음이 분명합니다. 주님의 죽음만 생각했지 사흘만에
부활하리란, 부활의 비전을 잃었습니다. 예수님은 늘 예레미야와 같은
비전을 지니고 시종일관 사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마침내 예레미야의 비전은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을 통해,
새 계약의 완성인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완전히 실현됨을 봅니다.
주님은 당신의 새계약인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가슴에 당신 법을
넣어주고 우리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어 주님의 겸손한 제자가 되어
살게 하십니다.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제 안에 굳건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편51,12ㄱ). 구원의 기쁨을 제게 돌려 주시고, 순종의 영으로
저를 받쳐 주소서(시편51,14)."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 [서울] 연중 제18주간 목요일
2014년 가해 8월7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마태오 16,13-23
하느님의 사랑을 듬뿍 느낄 수 있었던 ‘예비신학생 중등부 여름
음악캠프’였습니다. 처음에는 서로 어색했던 친구들이 친해졌습니다.
태풍이 오고 나서인지 날씨가 좋았습니다. 시원한 바람은 덤으로
주셨습니다. 어제 파견미사를 하는데 가슴이 조렸습니다. 아침부터
하늘이 잔뜩 흐렸기 때문입니다. 미사를 마치고 버스에 탑승을 하니,
비가 내렸습니다. 하느님께서 사제가 되려고 하는 예비 신학생들을 무척
사랑하신 것 같습니다. 함께 하셨던 부제님, 신학생들 그리고 성소후원회
봉사자들과 프레젠트 음악 봉사자들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의 문제를 내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은 저마다 대답을 합니다.
‘예언자 중의 한분, 엘리야, 죽은 요한’ 등등의 대답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제자들에게 또 다른 문제를 내십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사실 제자들은 주님을 따라 다녔지만 한 번도 심각하게 주님이 누구인지
생각하지 않았는지 모릅니다. 저마다 예수님을 따라다닌 목적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어떤 제자는 예수님께서 높은 자리에 오르면 그 옆에서 한
자리 차지하려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어떤 제자는 특별히 할 일도 없고
집에서 쉬고 있는데 친구들이 함께 가자고 해서 왔는지도 모릅니다. 또
다른 제자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분의 인격에 매료되어서 왔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오늘 아주 정확한 대답을 하였습니다. ‘선생님은
살아있는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이 대답에 만족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칭찬과 더불어 선물을
주십니다. ‘사람의 몸과 피로는 이것을 알 수 없다. 오직 하느님께서만
이것을 알려 주신다. 너는 바위이다. 나는 이 바위위에 나의 교회를
세운다. 죽음의 힘도 이것을 어기지 못한다. 나는 너에게 천국의 열쇠를
준다. 무엇이든지 땅에서 묶으면 하늘에서도 묶일 것이다. 또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반드시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 이야기 합니다. ‘선생님 그러면 안 됩니다.’
사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말을 했지만 예수님께서 가야 할 길이
어디인줄은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셔야 할 길은 영광의 길, 기쁨의
길, 성공의 길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칭찬을
했던 베드로에게 정확하게 이야기 하십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합니다.’ 그것은 악한 생각입니다.
예전에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눈이 오는 추운 겨울에는
소나무와 전나무만 푸르다.’ 뜨거운 여름에는 산이 온통 파랗습니다.
그러나 가을이 오고, 찬바람이 불면 낙엽이 되어 떨어지고 눈 내리는
겨울에는 앙상한 가지만 남는다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이처럼 신앙을
가지고 예수님을 믿지만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 고통의 길,
죽음의 길까지 함께하기는 결코 쉽지 않은 것입니다. 가장 사랑받고
칭찬받았던 베드로마저도 예수님께서 걸어가야 할 길을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오늘 예레미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자비를 이야기 합니다. ‘나는 너희들의
악한 행동을 용서하겠다. 너희의 죄를 더 이상 묻지 않겠다.’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충실하게 따라가는 이들에게는 위로가 되는 말씀이고
희망의 말씀입니다. 주님과 함께 갈 수 있도록 용기를 청해야 하겠습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도회] 매일 조금씩 천천히/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인영균끌레멘스신부님
2014년 가해 8월7일 연중 제18주간 목요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연중 제18주간 목요일(2014년 8월 7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마태오 16,13-23
매일 조금씩 천천히
우리 마음속에는 빛과 어둠, 은총과 죄악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
사이에서 갈등합니다. 혼란스럽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한테서 “너는
행복하다!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다”는 축복과 칭찬의 말을
듣자마자 곧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나에게 걸림돌이다”는 저주와
질타의 말을 듣습니다. 빛에서 어둠의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베드로
개인은 얼마나 몸들 바를 몰라겠습니까.??
우리 삶의 중심을 ‘사람의 일’에서 ‘하느님의 일’ 쪽으로 끊임없이 옮기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이제는 이만하면 되겠지”라는 것이 없습니다.
안도의 숨을 쉬는 그 순간 사람의 일 쪽으로 끌려갑니다. 오늘은 어제보다
좀 더 하느님 일 쪽으로 우리의 무게 중심을 옮기도록 합시다. 아주 조금씩
조금씩 말입니다. 단 한번에 옮겨가는 것은 교만이지요. 하루하루 천천히
조금씩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장거리 경주이지요.
큰 호흡으로 하느님 일 쪽으로 걸어갑니다.???????????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