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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8월 13일 연중 제19주간 수요일
[수도회] "그대, 어디로 가는가?"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신부 -
† 제1독서 에제 9,1-7; 10,18-22
† 복음 마태 18,15-20
★ 에제키엘은 환시를 통하여 예루살렘에 닥칠 재앙을 본다. 주님께서는
징벌하는 이들을 보내시어 가차 없이 도성의 사람들을 치게 하시지만
이마에 표가 있는 이들은 죽음의 징벌을 면케 하신다. 그들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거슬러 행한 역겨운 짓에 괴로워하고 탄식했던 이들이다
(제1독서).
★ 주님께서는 회개하라는 교회의 권고를 무시하는 이들에게는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대하라고 하신다. 주님께서 매고 푸는 권한을
교회에 주셨기 때문이다. 또한 두 사람이 마음 모아 간절히 청하면
하늘의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당신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주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교회란 어떠한 공동체인지 묵상하게 됩니다.
교회는 서로 회개하여 하느님께 돌아서도록 촉구하고 격려하는
공동체입니다. 이처럼 회개하여 새롭게 변화된 삶을 위하여 교회의 각
구성원은, 서로서로 섬세한 배려로 설득하는 온유한 사랑을 드러내야
합니다.
복음은 이러한 자세를 ‘단둘이 만나’라는 표현으로 가르칩니다. 이러한
사랑은 우유부단함이나 감상적 태도, 또는 악습과의 적당한 타협이나
묵인을 뜻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심판자의 위치에 서라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따른 삶이 무엇인지 올곧은 직언을 하는 증인으로의 역할을
피하지 말아야 함을 복음은 일러 줍니다. 병든 생각이나 삶의 태도를
치유하는 사랑은 비록 아픔이 따를지라도 진실을 마주하게 하는 강직함을
품고 있어야 합니다.
치유와 회개의 삶은 자신보다 더 큰 진리에 순종하며 자신을 돌아보는
겸손함이 따를 때 비롯됩니다. ‘맺고 푸는’, 주님에게서 받은 교회의
권리와 진리 주장은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우리 삶의
길을 언제라도 비추어 보고 성찰하게 하는 기준인 진리를 교회가 담고
있음을 믿지 못한다면 우리의 흔들리는 마음과 흐려진 생각이 제자리로
돌아갈 길을 찾지 못할 것입니다.
‘어머니이자 교사’인 교회에 대한 신뢰는, 진정 진리에 따라 자신을
끊임없이 새롭게 하고 그 빛으로 치유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중요한 표지가 됩니다. 이렇게 회개하고 쇄신하는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주님의 도움을 간절히 청하며 주님의 현존을
느껴야 합니다. 교회가 쇄신을 갈망하는 공동체, 끊임없이 새롭게
변화하는 삶의 공동체이고자 한다면, 무엇보다도 함께 마음 모아 간절히
기도하는 공동체여야 한다는 사실을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듣고 있습니다.
- 매일 미사 -
◈ [인천] 주님 탓이 아닌 바로 우리 탓입니다.
2014년 가해 8월13일 연중 제19주간 수요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 마태오 18,15-20
어떤 책에서 남자와 여자의 행복에 대한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우선 남자는 감동을 잘 받는 여자를 만나면 행복하다고 합니다. 그녀의
수용성이 남자에게 ‘인정에 대한 욕구’를 채워 주기 때문이랍니다. 그리고
여자는 말이 통하는 남자를 만나면 행복하다고 합니다. 그 남자의 경청이
‘대화에 대한 열망’을 채워 주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맞는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어쩌면 남자와 여자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상대를 원하는 것이 아닐까 싶더군요.
즉, 나의 행동에 감동을 잘 받고, 나의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을 원하고
있지 않습니까? 상대방의 행동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뻣뻣함,
그리고 상대방의 말을 전혀 듣지 않는 무심함 등으로 나의 이웃과 일치와
화합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어제 전철을 타고 서울을 올라가고 있던 중에, 몸이 불편한 어르신 한
분이 전철 안에서 구걸을 하시더군요. 너무나 어렵고 힘들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도움을 청하며 비닐봉지 내미는데, 제가 타고 있던 칸에서는
그 누구도 도움을 주는 분이 없더군요. 아니 시선조차 마주치지 않습니다.
그저 사람들이 하고 있는 것은 조그마한 스마트폰만을 보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자기와 상관없으면 철저하게 외면하는 세상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뻣뻣함과 무심함으로 나의 이웃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세상 안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주님께서 이러한 우리의
무심함과 뻣뻣함을 좋아하시고, 또 원하시는 모습일까요?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이웃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우리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원하셨으며, 또한 이웃의 대한 사랑으로 어렵고 힘들 때 외면하지 않는
우리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이웃 형제와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야기하시지요. 특히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철저히
개인적이 아닌,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의
일치와 화합을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결국 우리의 소망과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은 주님 탓이 아닌, 바로 우리 탓입니다. 우리가
생각이나 삶의 방식에서 이웃과의 일치와 화합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을 외면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철저하게 함께 하면서 그들에게 힘이 되어주고 또
그들의 말을 들어주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소망들이 나의 이웃들과 함께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기적으로 향하는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를 갖고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스테이시 추).
1/606,758,4000,000,000
어느 책에서 우리가 로또에 당첨될 확률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확률이
글쎄 ‘1/8,140,000’이라고 하네요. 어떻습니까? 내가 로또 복권을 아무리
사도 당첨되지 않는 이유를 아시겠지요? 그런데 이 지구라는 별에서
누군가를 만나는 확률은 얼마나 될까요? 지구 안에 사는 사람들의 숫자를
생각해서 낸 확률이 글쎄 ‘1/606,758,4000,000,000’라고 합니다.
내가 누군가를 오늘 새롭게 만났을 때, 그 사람은 위의 확률을 뚫고서
만난 것이랍니다. 로또보다 더 어려운 확률을 뚫고 만난 사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만남을 소홀히 하시겠습니까? 만약 로또 복권에
당첨되면 당첨금을 수령하기 전까지 복권을 애지중지 할 것입니다.
혹시라도 잃어버리면 당첨금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지요.
사람과의 만남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또 복권의 확률보다 더 희박한
확률을 뚫고 만난 사이인데 어떻게 그 사람을 소홀히 하고 무시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만나는 나의 이웃들이 그만큼 소중한 인연임을 기억하면서 더욱
더 주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는 기쁜 날이 되시길 바랍니다.
- 인쳔 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그대, 어디로 가는가?"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8월13일 연중 제19주간 수요일
에제9,1-7;10,18-22 마태18,15-20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 마태오 18,15-20
"그대, 어디로 가는가?"
어제 못다한 이야기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주님, 당신 말씀 제 혀에 얼마나 달콤한지! 그 말씀 제 입에 꿀보다 더
다옵니다."(시편119,103).
어제 화답송 시편입니다.
말씀 맛이 꿀맛일 때 건강한 영혼입니다.
육신이 건강할 때 밥맛이 꿀맛이듯 말입니다.
그러니 말씀 맛을 보아 내 영혼의 건강상태를 진단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밥맛이 좋아도 말씀 맛이 없으면 반쪽 건강입니다.
과연 밥맛도, 말씀 맛도 좋은, 영과 육이 다 건강한지 묻고 싶습니다.
어제 산티아고 순례를 위한 7차례 걷기 훈련을 일행과 함께 했습니다.
끝없이 난 강변북로를 걷는 두 형제가 마치 순례자 처럼 보였고
휴대폰으로 찍었습니다. 순간 떠오른 말마디입니다.
"그대, 어디로 가는가?"
믿는 우리들의 영원한 화두입니다.
과연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하느님 목적지로 가면 순례자이고 하느님 목적지 없으면 방랑자입니다.
하느님 목적지로 향하면 그분 자체가 하느님의 집이고 하느님의 영광이
그 위에 머뭅니다.
1독에서 보다시피 하느님의 영광은 고정불변이 아닙니다.
죄악이 가득할 때 하느님의 영광도 주님의 집에서 떠납니다.
하여 안팎으로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그들이 주님의 집 동쪽 대문 어귀에 머무는데, 이스라엘 하느님의 영광이
그들 위에 자리잡고 있었다.'(에제키엘19,9ㄷ).
하느님과 함께하는 거룩한 이들 위에 머무르는 하느님 영광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처럼 하느님을 향해 사는 이들의 모습이 잘 나타납니다.
무엇보다 함께 기도하는 이들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에게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18,19-20).
이렇게 주님을 찾아 함께 기도할 때 진정 주님의 집이 되고 형제들의
화해도 용이해집니다. 쉽사리 형제들을 포기하거나 단죄하지 않고
형제들이 돌아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합니다.
사실 이들이 무엇이든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무엇이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입니다. 새삼 땅과 하늘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또 마음을 모아 기도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를 용서해주시고 한 마음으로 청하는
우리의 기도를 기꺼이 들어주십니다.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 -
◈ [서울] 세상은 원래가 하느님의 기로 꽉 차 있답니다.
2014년 가해 8월13일 연중 제19주간 수요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 마태오 18,15-20
세상은 원래가 하느님의 기로 꽉 차 있답니다.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는 것, 사람 인(人)자도 다 둘 이상을 말합니다.
둘 이상은 공동이나 ‘함께’라는 걸로 하느님은 그렇게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개인주의에 빠졌거나 세상 것을 조건부로 모인 집단은 초대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인간에게 맡기셨지만 당신과 함께 하자고 초대하십니다.
사실 자연 질서의 운행인 세상은 원래가 하느님의 기로 꽉 차 있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느님을 빼고 세상을 자기들만이 좌우하려 하니
문제지요.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오 18,20)”
- 서울 대 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청주] 마음이 통하는 사람|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8월13일 연중 제19주간 수요일(마태18,15-20)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 마태오 18,15-20
마음이 통하는 사람
깊은 산길을 가고 있는 사람에게 제일 무서운 것은 마주 오는
사람이랍니다. 그리고 산길을 가고 있는 사람에게 가장 반가운 것
역시 사람이랍니다. 사람이 제일 좋기도 하면서 제일 힘든 존재이기도
합니다. 좋을 때는 더없이 편하지만 틀어지면 그것만큼 불편한 것이
없습니다. 가장 친했던 사람이 가장 어렵고 힘든 사람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간 쓸개 다 빼줄 것처럼 호들갑을 떨다가도 마음한 번 돌아서면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이 없게 됩니다. 그것은 자기의 기대가 충족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됩니다. 내 기대와 상대의 바람, 그리고 허물조차
공유할 수 있는 마음이 커졌으면 좋겠습니다. 진심을 주고받기까지 더
큰 사랑이 필요합니다.
성무일도 찬미가에서“겹겹이 둘러싸인 어두움 속에 내 마음 거짓으로
가득 하오나 하느님 전능으로 다스리시면 내 마음 백옥같이 희어지리다.”
라는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어둠을 알고 인정하면 밝은 빛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어둠 속에 있다는 사실조차 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누군가 그것을 일깨워줘야 합니다. 그래야 그가 바른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른 충고를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칭찬은 달지만 충고는 한없이 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변의 머릿수가 아니라 마음입니다.
쓰지만 약이 되는 바른 충고를 해줄 수 있고 또 충고를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소중합니다. 더더욱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고 하셨으니 한마음,
한 뜻을 이룰 수 있는 형제가 있다면 기뻐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런 형제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인간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을 선호하지 말고 “주님의 이름으로” 모두를 품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사실 믿는 이들에게 “충고는 하느님의 소리요, 하느님의
뜻”(성녀 안젤라 메리치)이기 때문입니다.
충고를 한다는 것은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따라서 남을 충고하기 전에
자기 자신에게 충고해서 바꾸고 변화시키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먼저 주님께서 내 마음을 다스리고 백옥같이 희게 만드시길 기도하면
주님께서는 그 마음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오늘은 나에게 주어진 쓴
소리를 하느님의 소리로 듣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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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을 가졌는가 / 함석헌
만 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不義)의 사형장에서
'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두거라' 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며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시집「수평선 너머」(한길,2009)
누군가에게 그런 친구가 되어주고자 한다면 이미 내 곁에도 그런 친구가
와 있을 것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친구가
되어 주셨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말씀 묵상 - 사랑하면 나타나는 현상
2014년 가해 8월13일 연중 제19주간 수요일
< 사람들의 이마에 표를 해 놓아라 >
독서 : 에제 9,1-7; 10,18-22
< 사랑하면 나타나는 현상 >
여자가 사랑하면 예뻐진다고 합니다. 남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예뻐지는 것뿐만 아니라 몸에서 예뻐지게 하는 호르몬이 분비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숨길 수 없는 ‘표’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호르몬이 분비되어 나타날 수밖에 없는 현상들이 이런 것들이 있다고
합니다.
1. 사랑하면 따라한다.
사랑하면 닮아갑니다. 얼굴뿐만 아니라 행동도 상대의 것을 따라 하게
됩니다. 우리도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되면 그분이 사신 것처럼 살고
싶어 질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가난하고 박해받고 멸시받았으며 가진
것을 우리를 위해 다 내어주셨습니다.
2. 입꼬리가 올라간다.
기쁘다는 말입니다. 사랑을 하면 의무도 생기고 부담도 늘어나지만, 그
사랑 때문에 오는 행복감을 느끼게 하는 도파민과 같은 호르몬들도 많이
분비됩니다. 그 행복감이 의무감보다 크기 때문에 사랑도 하고 결혼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을 닮는 것이 부담이
되기도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넘어서는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면 삶이 기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매력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행복한 사람에게 끌리기 때문입니다.
3. 입술에 침을 바른다.
입이 바짝바짝 타고 심장박동과 혈압이 상승합니다. 그래서 입술에 침을
바르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행복감뿐만 아니라 스테레스를 주는 호르몬도
분비됩니다. 예수님도 우리를 사랑하셔서 “목 마르다.” 하시며 더욱 갈증을
느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다 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받아들이면 입에는 달지만 뱃속으로 들어가면 아프게 하고 스트레스를
줍니다. 결국 사랑이 들어오면 내 안에서 연탄에 불을 붙이이듯이 나를
뜨겁게 태워 소진시켜버립니다.
4. 사랑은 감기를 막아준다.
사랑하면 아미뇨글로빈이 많이 생성되는데 그것이 면역력을 강하게 하여
몸도 건강하게 해 준다고 합니다. ‘마더 테레사 효과’란 남을 위해 봉사를
하는 것을 바라보기만 해도 타액에 존재하는 면역성분이 50%이상 증가한
실험 때문에 나온 용어입니다. 이는 육체적인 건강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삶의 의미를 주어 활기찬 삶으로 이끌어줍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함으로써
우리는 죄라는 병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5. 사랑을 하면 살도 빠진다.
사랑하면 에너지는 많이 쓰는 반면 먹는 것은 줄어든다고 합니다. 사랑으로
채워지니 호르몬들이 자극하여 배가 부른 느낌을 갖게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이 세상의 것들에 대한 욕구가 사라집니다. 그리스도는 이
세상의 모든 권력과 쾌락, 부귀영화를 쓰레기처럼 여겼습니다. 밭에 묻힌
보물을 위해 모든 제물을 다 버릴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만큼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사랑은 이 세상 것들의 애착으로부터 자유롭게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은 에제키엘에게 당신이 이스라엘을 왜 쳐서 망하게
하였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바로 성전에서부터 타락하여 온 나라
사람들이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저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섯 천사를 저마다 파멸의 무기를 들고 나오도록 한 다음, 한
천사를 보내어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의 이마에 ‘타우(T)’ 표시를 해 주고,
그 표를 받지 못한 나머지들은 성전에서부터 시작하여 온 예루살렘을
다니며 처 죽이라고 하십니다.
타우(T)는 히브리어의 마지막 단어이고 알파요 오메가(처음이자 끝)인
그리스도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또한 교부들는 그 형태가 십자가와
같다고 하여 십자표시, 혹은 세례 때나 견진 때 성령으로 상징되는
기름을 이마에 십자모양으로 바르는 것과 연관시켰습니다. 이 인호를
받은 이들은 죽음을 면할 수 있게 되는데, 그 표가 과월절 때 하느님의
어린양의 피로 하느님 백성들의 집 문설주에 발랐던 것과 연관이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나온 피와 물로써 새로 태어나 이마에
표를 받은 이들로써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섬기는 이들인 것입니다.
그분을 따르는 이들은 보이지 않는 타우 표시뿐만 아니라 사랑의
증상까지 지니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표는 성령의 인장을 의미하는데,
그 인장으로 표를 받는다는 것이 곧 성령을 받는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곧 사랑이십니다. 사랑의 호르몬이 우리 몸 안에서 반응을 일으켜
감출 수 없는 표를 드러내듯이, 사랑의 성령 또한 우리 안에 들어오면
그런 사랑의 표징들을 드러냅니다. 사랑은 어차피 하나이기 때문에
사랑할 때 나타나는 증상과 성령을 입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은 비슷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과연 이마에 표를 한 사람처럼 숨길 수 없는
표를 지니고 살아가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마에서가 아니라 삶 자체어서 감출 수 없는 표가 드러나게
되어있습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 담당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연중 제19주간 수요일
2014년 가해 8월13일 연중 제19주간 수요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 마태오 18,15-20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책이 있었습니다. 남자와
여자는 생각하는 면에서 많이 다르다고 합니다. 이미 지나간 일, 말을
해도 되돌릴 수 없는 일, 들추어내보아야 상처만 더 커지는 일이 있습니다.
논리적으로 생각을 해도 별로 득이 되지 않는 일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남자와 여자는 생각이 다릅니다. 여자는 그 일을 이야기 하면서 자신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이해 해 주기를 바라는 것 같습니다. 남자는 이미
사과를 했고, 지나간 일인데 왜 자꾸만 들추어내느냐고 화를 냅니다.
남자는 이미 계산이 끝났다고 생각을 하고, 여자는 아직 계산이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쇼핑을 할 때도 그렇습니다. 남자들은 대충 사고 돌아오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여자들은 쇼핑 자체를 즐기는 것 같습니다. 다리가 아픈 것도
감수하면서 몇 번이고 물건을 고르고, 다시 생각하고 마침내 원하는
물건을 손에 넣습니다. 남자들은 왜 그렇게 쇼핑을 오래 하는지 이해를
못합니다. 하지만 여자들은 남자들이 몸에 좋지 않은 술을 마시면서 그
많은 돈을 지출하는지를 이해 못합니다. 쇼핑은 남는 것이라도 있지만
술을 마시는 것은 몸도 망치고 돈도 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전화를 할 때도 그렇습니다. 남자들은 대충 용건을 말하면 전화를
끊습니다. 하지만 여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
10분은 족히 넘습니다. 언젠가 동생 수녀님이 어머니와 통화하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한 30분 이야기를 하면서 하는 말은 ‘엄마 중요한
이야기는 나중에 할게’였습니다. 분명 남자와 여자는 다른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남자와 여자뿐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저마다 성격이 다르고, 품성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기 마련입니다. 자란 환경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역사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서로 다른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소통하려 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문화와 역사를 만들어
갑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다른 것을 인정하지 않고, 상대방이 틀리다고
말을 합니다. 그래서 나와 다른 것들은 잘못된 것이고, 고쳐야 하고,
없애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불신과 분노가 생겨나고 분쟁과
갈등이 생겨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에제케엘 예언자는 그릇된 길을 걸어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심판이 내릴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고, 충실하게 살았던 사람들은 살아남을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들은 고난 받고, 힘들었지만 결국은 승리하리라고 이야기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승자와 패자’의 패러다임을 없애고자
하십니다. 잘못한 사람이 있다면 조용히 그에게 가서 잘못을 지적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일 그가 말을 들으면 형제를 얻는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모두가 승자가 될 수 있도록 하십니다.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주님께서도 함께 있겠다고 말씀하시면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승, 패의 패러다임이 아니라, 모두가 승리하는
‘승,승’의 패러다임이라고 하십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고, 틀린 사람을 쫓아내고 격리시키는 것은 주님께서
바라시는 방법은 아닙니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 것이고,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하며 함께 살아가는 공생의 길을 찾는 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입니다. 주님께서는 ‘돌아온 탕자를 용서하시고,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시고,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도 용서하시고, 자신을
배반한 제자들도 용서하십니다.’ 용서와 포용이 진정한 승리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도회] 얼마나 소중한 인연인데...
2014년 가해 8월13일 연중 제19주간 수요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 마태오 18,15-20
얼마나 소중한 인연인데...
때로 공동생활을 하면서, 때로 한 단체를 동반하면서, 그들과 함께
신앙공동체를 꾸려가면서 정말이지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측면이 한
가지 있습니다.
사실 이 땅에 두발을 딛고 서 있는 그 누구든 인간적 약점과 나약함,
실수와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다들 불완전하고
부족한 우리들이지만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고 보완해주면서 완전함의
‘끝’이신 하느님께로 조금씩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때로 무한한 인내도 정말 필요합니다. 한없는 기다림도
필요합니다. 그러려니 하는 큰마음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더 필요한
노력이 한 가지 있습니다. 진심에서 우러난, 솔직한 ‘형제적 교정’입니다.
형제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의 심각한 약점과 중대한 결핍 앞에서
외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가 아니라 바로 당사자 그와
일대일로 만나 그의 잘못과 죄에 대해서 정확하게 이야기해주고 개선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 일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기에, 또 때로 엄청난
반발이 예상되는 일이기에, 때로 더 큰 상처와 소란함을 유발하는
일이기에 정말 신중하게 접근해야 되는 일이며 다른 무엇에 앞서 많은
기도가 선행되어야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잘 파악하고 계셨기에
우리에게 이렇게 권고하십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들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본인이 아닌 다른 사람들 앞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여러 사람 앞에서가 아니라 당사자 ‘단둘’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일, 그가 말을 듣지 않더라도 분노하거나 낙담하지 말고 다음 단계를
밟으라는 것입니다. 그를 진정으로 한 가족, 한 형제로 여기면 절대로
한번 시도해보고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다른 누군가, 지혜로운
사람, 너그러운 상담자, 깊이 있는 영적 지도자와 함께 또 다시 그의
회개를 위해 합심하라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 가정 공동체, 교회 공동체, 사회 공동체 안에 아무리 막가는
사람, 공동체의 분열을 초래하는 암적인 존재가 있다손 치더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한번 권고해서 안 된다고 해서 단칼에 그를
매장시키려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이 방법을 써보고 안되면 또 다른
방법을 써보고, 최선을 다한 후에 안 되면 그때는 하느님 자비의 손길에
맡기라는 것입니다.
인간관계 안에서 특히 부족한 이웃들 앞에서, 그들의 교정과 성장을 위한
조언의 과정에서, 인내와 겸손, 신중함과 기도가 얼마나 필요한지
모릅니다. 얼마나 소중한 인연인데, 얼마나 보석 같은 관계인데, 단칼에
끝나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인천] "제 영혼이 당신을 그리나이다."
2014년 가해 8월13일 연중 제19주간 수요일(시편 42장)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 마태오 18,15-20
요즘 가정방문을 다니고 있습니다. 9월부터 모든 신자들이 함께 말씀을
읽고 친교를 나눌 수 있는 작은 그룹들을 만들려고 하는데요. 아마 어떤
그룹에도 들어가지 않고 우물쭈물 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분들이
묶일 수 있도록 도와드리려고 하는데요.
그러려면 그분들의 상황이나 상태가 어떤지 알아야 하잖아요. 예를 들면
‘성경책을 읽을 수는 있으신지, 읽을 수 없다면 듣는 건 가능한지.. 바빠서
다른 분들과 약속 시간을 잡을 수 없다면 가족끼리 함께 할 수 있는지..’
하는 것들을 알아야 하기 때문에 찾아가 뵙고 있습니다.
자주보는 분들은 대략 알기 때문에 잘 모르는 분들이나 안 보이는 분들
위주로 만나고 있는데요. 잘 안 보이시는 분들을 만나다 보니 드는 느낌이
하나 있었습니다. ‘목마름이 없는 거 같다..’ 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런 이야기를 하실 때 그렇습니다. 하나는 ‘어짜피 고해성사
볼 건데..’ 하는 겁니다. 몇 주 빠진 분들을 찾아갔었는데요. 하시는
이야기가 ‘지금 나가도 또 바쁜 일이 있어서 빠질 텐데, 그러면 또
고해성사 봐야 하잖아요. 그래서 아주 언제부터 나가려고 해요.’
의무감과 책임감은 있으신 거 같지만 주님께 대한 목마름, 그리움은
없으신 거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님을 만나고 경배 드리는 그 장소가
그리운 게 아니라, 억지로 가야 하는 부담스러운 장소처럼 느껴집니다.
다른 하나는 어르신들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눈도 안 보이고 귀도 안
들리고, 관절도 좋지 않고... 다 늙어 나가서 뭐하나..’ 하십니다. 그래서
그분들에게 봉성체 이야기를 드리면 그것도 부담스러워하시는 경우가
있는 거 같습니다. 저의 친 할머니도 그러신 거 같습니다. 요양원에
찾아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봉성체 하시냐고 물었더니 귀찮아서
안 한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럼 그분들에게는 영적인 갈망과 그리움이 없는 걸까요?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뭔가 다른 것들로 채워지다 보니 느끼지 못하는 것일
겁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밥을 먹어야 하는데 지나가다
아이스크림을 사 먹으니 포만감이 생겨 밥을 안 먹는 겁니다. 또
초콜렛과 사탕을 잔뜩 먹었더니 밥 생각이 없어진 겁니다. 먹어야 하는
양식은 있는데 다른 것들 때문에 생각이 나지 않는 겁니다.
때로 우리의 영적인 삶도 그러한 거 같습니다. 채워질 수 없는 갈망과
그리움을 다른 걸로 채우려고 합니다. 일에 몰두하거나, 술로 오늘의
고통을 잊으려 하거나, 수다와 티비에 정신이 팔려 나에게 어떤 갈망이
있는지 감지하지도 못하는 겁니다.
때로 ‘이게 아닌데..’ 하면서 그 갈망이 살짝 느껴져도 게으름과 두려움에
가로막혀 나아가지 못하고 ‘살던 대로 살다 가지..’ 하면서 주저앉는 거
같습니다. 그것들을 걷어내고, 조금 거리를 둘 수 있다면, 오늘 영성체송에
있는 말씀과 같은 고백을 하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하느님, 제 영혼이 당신을 그리나이다.
제 영혼이 하느님을,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하나이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한 자매님이 콩을 심으면서,
한 구멍에 콩을 4개씩 넣었다고 한다.
“두 개는 까치 먹고, 두 개는 나 먹고.. 했는데,
까치들이 4개를 다 먹어버렸어~”
- 인천교구 대부동 성당 김기현 세례자 요한 신부 -
◈ [수도회] 해방[단상]
2014년 가해 8월13일 연중 제19주간 수요일
제1독서
<예루살렘의 역겨운 짓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이마에 표를 해
놓아라.>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9,1-7; 10,18-22
복음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15-20
연중 제19주간 수요일(2014년 8월 13일) 해방
얽힌 실타래는 아무데도 쓸모없습니다. 풀어야 쓸 수 있습니다. 우리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근육이 뭉쳐 있으면 풀어야 몸도 마음도 편안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할 일은 단 하나입니다.
얽히고 섥힌 것을 푸는 일입니다. 혹시 내 마음에 그리고 우리 사회에 뭉친
곳은 없습니까? 오랫동안 맺혀 있으면 ‘한’(恨)이 됩니다.
이는 독이 되고 이 독은 자기 자신과 다른 이를 죽입니다. 우리 모두를
죽입니다. 풀어야 정(情)이 됩니다.
진정 마음에 주님을 모시는 사람은 맺혀 있는 것을 푸는 사람입니다.
풀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습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맺힌 것을 ‘해방’(解放)하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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