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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가해 8월24일 연중 제21주일
[수도회] 하느님의 마침표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신부 -
† 제1독서 이사 22,19-23
† 제2독서 로마 11,33-36
† 복음 마태 16,13-20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베드로 사도의 신앙 고백을 듣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반석’이라고 이르시며 그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맡기십니다. 우리
지상 교회는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인 교황을 중심으로 일치하여 역사
속에서 순례의 길을 걷습니다. 순례하는 교회가 세상의 유혹에 굴하지
않는 가운데 하느님의 영에 따라 천상 교회의 완전함을 모범으로 삼아
꿋꿋이 나아갈 수 있도록 함께 간구합시다.
★ 이사야 예언자는 궁궐의 시종장에게 ‘그날’에 주님께서 엘야킴에게 해
주실 일에 대해 전한다. 주님께서는 그에게 다윗 집안의 권한을 선사하실
것이며, 그는 다윗 집안의 영광의 왕좌가 될 것이다(제1독서).
★ 바오로 사도의 하느님 찬미가이다.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깊디깊으며, 그분의 길은 참으로 알아내기 어렵다. 만물이 하느님에게서
나와, 그분을 통하여 그분에게로 나아간다(제2독서).
★ 베드로는 당신을 누구라 생각하는지 묻는 예수님의 질문에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시라고 고백한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맡기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이번 주일과 다가오는 주간에도 여름 휴가철의 마지막을 놓치지 않으려는
많은 사람이 산과 바다와 계곡을 찾을 것입니다. 여름철이 막바지에 이르면
휴가 때의 흐뭇함과 아쉬움을 함께 느낍니다.
특히 아이들에게는 멀리 있는 친척 집이나 휴가지에서 보낸 날들이 먼
훗날에도 잊히지 않는 추억이자 인생에 대하여 몸으로 깨치는 생생한
교육이 됩니다. 느긋하고 조금은 게으르게 보낸 것 같은 이 여름날에
어쩌면 아이들의 생각과 마음이 더욱 튼실하게 여물지도 모릅니다. 사실
어른이 되어서도 어린 시절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보낸 여름날의 기억은
설레는 모험처럼 간직되며, 그 추억에 대한 그리움이 가슴에 사무칩니다.
프랑스의 유명한 극작가 마르셀 파뇰이 여름 방학 때 시골에서 지낸 자신의
어린 시절을 소재로 한 자전적 소설 『마르셀의 여름』을 읽었습니다. 많은
이에게 사랑받는 이 책을 읽으며 여름 방학 때 시골에서 자연과 함께한
시간이 아이들에게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지를 새삼 깨달았습니다. 소설에
나오는 두 문장이 내내 마음에 남습니다. “방학은 항상 그날이 그날 같아서
시간이 흘러가는 게 느껴지지 않았고, 여름은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지나갔다.” 작가가 자신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 어린이의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물이 물레방아를 돌리듯, 그렇게 시간은 우리 인생의 바퀴를
돌리며 흘러간다.” 작가가 나이 든 뒤 어린 시절을 돌아보며 느끼는,
아름다움과 쓸쓸함이 함께 묻어 있는 감회입니다.
뜨거운 태양의 이 계절에 주님께서 허락하신 쉼의 시간을 보내면서 특히
아이들의 마음에 아름다운 추억과 사랑이 방울방울 맺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어른들은 무상한 세월을 실감하며 살지라도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과 아름다운 곳에서 쌓은 추억은 사라지는 것이 아님을 믿고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앞으로 그리워할 아름다운 추억은 바로 오늘
생겨난다는 것을 깨달으면 좋겠습니다.
- 매일 미사 -
◈ [인천] 내 삶의 기준도 주님께
2014년 가해 8월24일 연중 제21주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 마태오 16,13-20
요즘에 군대폭력 문제가 사회의 커다란 이슈로 남습니다. 저도 군대를
다녀왔지만 제가 군생활 할 때에도 폭력은 있었습니다. 그리고 비인간적인
얼 차례 역시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기억나는 두 명의 선임이
생각납니다. 한명은 늘 이런 말을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본전 생각난다. 내가 너희만할 때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그러면서 자기가 하는 폭력은 예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면서 폭력을
휘두룹니다. 또 한 명의 선임은 "나는 절대로 후임에게 폭력을 휘두르지
않겠어."라면서 제대할 때까지 단 한 번의 폭력을 휘두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후임 병들은 어떤 모습을 닮을까요? 당연히 폭력을 휘두르지
않았던 선임을 닮아야 하는데, 대부분이 폭력을 썼던 선임을 닮습니다.
왜냐하면 폭력을 쓰는 선임을 무서워해서 더 말을 잘 듣기 때문이죠.
그래서 군 폭력이 없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의 마음을 갖게끔
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자신이 후임들에게 대접 받지 못함을 알아도
폭력을 쓰지 않았던 선임입니다. 폭력은 잠시의 효과를 누릴 수는 있지만
영원하지 않습니다. 또한 감사의 마음보다는 미움과 또 다른 폭력을 양산할
뿐입니다.
이 사회는 폭력이 만연되어 있습니다. 폭력은 단순히 누군가를 주먹을 써서
때리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약자를 배려하지 못하는 것,
자지자신만을 드러내려는 마음으로 누군가의 위에 오르려는 것,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지만,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것 역시 또 다른 폭력입니다.
이런 폭력적인 생활에서 벗어나 주님의 모습을 따르는 삶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먼저 필요한 것은 주님을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또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물으시죠.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사람들은 예수님의 기적만을 보면서 세례자 요한, 예레미야, 예언자 중의
한 명 정도로만 생각하지요. 예수님을 참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몰랐기에, 후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정답을 이야기합니다.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렇게 주님을 알고 있었기에 끝까지 주님을 증거할 수 있었고, 폭력의
삶이 아닌 사랑의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저지르는 모든 폭력은 주님을 제대로 몰랐기 때문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참 사랑 그 자체이신 주님임을 잊지 않을 때, 내 삶의 기준도
오로지 주님께 맞출 수 있습니다.
나무에 가위질을 하는 것은 나무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부모에게 야단을
맞지 않고 자란 아이는 좋은 사람이 될 수 없다. 겨울 추위가 심할수록
오는 봄의 나뭇잎은 한층 푸르르다. 사람도 역경에 단련되지 않고는 큰
인물이 될 수 없다(벤저민 프랭클린)..
필요하기 때문에 사랑? 사랑하기 때문에 필요?
에릭 프롬이 말했습니다.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말한다. '당신을 사랑해요. 왜냐하면 당신이
필요하니깐!' 반면에 성숙한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필요해요.
왜냐하면 당신을 사랑하니깐!'
사랑하기 때문에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늘 필요하기 때문에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 순서의 차이가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주님께도
그렇지요.
주님께 사랑한다고 우리는 고백합니다. 그런데 그 이면에는 나의 필요를
위해, 즉 내 이익만을 얻기 위한 고백은 아니었을까요?
- 인쳔 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서울]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의 실체를 말했기에
2014년 가해 8월24일 연중 제21주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 마태오 16,13-20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의 실체를 말했기에
외모가 중요하다는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속은 못생겼다는 게 아닐까요?
재력을 중요하게 본다면 자신의 속이 옹졸하고 궁핍하다는 게 맞을 겁니다.
사람의 외모나 재력 학력 세력보다는 사람의 실체인 존재가치를 봐야겠지요.
사람의 실체는 누구인가로 남편 아내 아들 친구 스승 등을 말합니다.
단순하고 간단하게 보고 느껴 아는, 사람의 실체는 존재의미를 말합니다.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의 실체를 말했기에 주님께 동격권한을 받았잖아요.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마태오 16,15~16)”
- 서울 대 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청주] 하느님의 마침표|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8월24일 연중 제21주일 (마태16,13-20)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 마태오 16,13-20
하느님의 마침표
예수님께서는“잘 들어라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16,19).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20장22절 이하에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사도들에게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사도들의 후계자가 주교이고 그 주교들의 협력자가
신부입니다. 그리고 신부는 주교의 위임을 받아 사목권을 행사합니다.
그러므로 사제를 도구삼아 고해성사를 받을 수 있는 것은 큰 은총입니다.
고해성사를 거부하는 것은 교회를 거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입니다.
고해성사는 세례성사를 통해 모든 죄를 용서 받은 후에 또다시 범하게
되는 잘못에 대해 용서를 받을 수 있게 해준 것입니다. 이 성사는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마련된 권리의 보장책입니다(차동엽).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에서
달아나지 맙시다. 하느님께 가장 소중한 것은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가
죄인이라 해도 우리는 하느님 마음에 가장 소중한 존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시는 데에 결코 지치지 않으십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고해성사를 통하여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고 또 잘 유지해야 하겠습니다.
고해성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
영혼을 깨끗이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너는 죄를 용서 받았다”는
선물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비로 마침표를
찍어주신 것에 대해서는 결코 물음표를 달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잘못에 대한 벌을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언제나 자비와 사랑으로
용서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실망하지 않으시고 언제나 우리의
기쁨을 되찾아 주시는 온유함으로 우리가 고개를 들고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니다.”그러므로 고해성사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죄는 우리를 얽어매고 하느님 사랑의 흐름을 가로막습니다. 또한
죄책감으로 어둠에 갇히게 합니다. 그러나 용서는 해방과 자유를 줍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는 주님의 물음에 오늘 만큼은 “주님은
한 없이 용서해 주시고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라고 고백하며
고해소를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좀 더 생각해 볼까요?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는 질문은 당신의
정체성을 묻는 것이기도 하지만 ‘나는 당신의 무엇입니다.’라는 고백을
하도록 요구합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저는 주님 손 안에 쥐인
몽당연필”로 고백했습니다. 나는 과연 그분의 무엇인가를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을 돈을 많이 벌게 해 주시라고 매달리며 조폐공사 사장쯤으로
여기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병을 낫게 해 달라고 매달리며 유능한 의사로
생각하며 요구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이는
외로움을 달래줄 신경안정제로, 의지가 약한 사람이 찾는 점쟁이 정도로
자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무엇이든 내 뜻대로, 내일만 잘되면 돈다고
생각하며 돈만 주면 무엇이든 해결해 주시는 해결사로, 올바른 생활을
가르쳐 주고 제시하는 공자와 같은 윤리교사로 생각한다면 종교의
근본정신을 잃고 있는 것입니다. 주 하느님은 우리의 구원자이시고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생명의 주인이시고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주시는 분에 대한 나의 믿음을 매 순간 새롭게 고백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 ***** *****
@@@ 고해성사를 준비하기 위해서 생각할 것들을 요약해 보겠습니다.
1) 성찰을 잘해야 합니다. 자신의 마음을 구체적으로 살펴야지요.
어떻게 잘못했는지? 어떻게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했는지? 그리고
인정하고, ‘잘못했습니다.’ 해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한 것
같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주 범하는 잘못은 그 원인을 잘 찾아내야
합니다. 그러나 너무 세심해서 죄책감에 짓눌려 사는 것은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의 거울은 성경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성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를 들면 “남을 해치는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마십시오. 오히려
기회 있는 대로 남에게 이로운 말을 하여 도움을 주고, 듣는 사람에게
기쁨을 주십시오.”라는 말씀으로 살펴본다면 남을 흉보거나 험담한 사실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침묵한 것도 잘못입니다. 남을 위해 이로운
말을 해 줘야 하는데 이웃에게 관심이 없었다면 그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기쁨을 주는 일을 찾지 못한 것도 잘못입니다. 특별히 입을
조심하지 못한 사항을 찾아보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5절에 보면 “성령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으니 우리는
성령의 지도를 따라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잘난 체하지 말고 싸움을
걸지 말고 서로 질투하지 말아야 합니다.”성령의 지도를 따라 산다는 것은
내 뜻대로 살지 않고 주님의 뜻을 앞세운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무시하거나 업신여긴 일은 없는지? 남이 잘 되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시샘하지는 않았는지? 등등 살피는 것입니다.
2)통회(뉘우침); 지은 죄에 대한 마음의 고통이며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그 죄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옷만 찢지 말고 심장을
찢고 너희 하느님 야훼께 돌아오라. 주는 가엾은 모습을 그냥 보지
못하시고 좀처럼 노여워하지도 않으신다. 사랑이 그지없으시어
벌하시다가도 쉬이 뉘우치신다.”(요엘2,13).
3)정개 (결심); 다시는 이탈하지 않겠다는 굳은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나 독일 속담에는 “정개의 징검다리를 건너 지옥 문 앞에까지 간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시는 죄짓지 말아야지’ 하면서 마음을 고쳐먹기만
하고 결심한 것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니까 어느새 지옥 문 앞에 다다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보들은 항상 결심만 하고, 남의 탓만 한답니다.
사실 성찰과 통회, 정개는 하나입니다. 성찰을 잘하면 통회는 자연히
따라오는 것이고 통회는 마땅히 결심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4)고백; 알아낸 잘못을 말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부끄러워 감추는 것
없이 고백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 앞에서 행해지는 성사인
만큼 두려워 말고 주님 앞에 고백하는 것입니다. 죄의 횟수, 상황에
대해서 간단명료하게 해야 합니다. 혹 “몇몇을 고의로 숨기는 사람들은
사제를 통하여 용서해 주실 선한 하느님께 아무 것도 제시하지 않는 것이
됩니다.”만일 환자가 부끄러워서 자신의 상처를 의사에게 감춘다면
치료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기 죄를 고백하지
않고 남의 죄를 고백합니다. 자기는 잘못이 없는데…. 남에게 탓을 돌리며
변명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자기 죄만
고백하십시오. 고해의 비밀은 2천년 교회의 역사가 보증합니다.
5)보속; 보속은 일종의 영적인 형벌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꼭 이행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미래의 죄에 대해서 보호해 주고 나머지
죄를 치료해 주는 것입니다. 기도와 선행, 충고를 받아들이고
실천함으로써 고해성사를 완성합니다. 보속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기”(로마8,17) 때문에 우리를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
상속자가 되게 해 줍니다. 물질의 손해를 끼쳤으면 보상해야하고요,
명예를 실추시켰다면 명예를 회복시켜 주도록 해야 합니다. 가끔 어떤
분들은 잘못에 비해서, 보속이 너무 작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의
은총입니다. 아무리 큰 잘못에도 그분의 사랑이 있고 그분의 넘치는
자비가 있습니다.
시 한편 읽어드리겠습니다.
고해소를 나오며 -장정애-
참 알 수 없는 당신의 저울
그 한 가슴의 사랑과
수 많은 유다를
한 몫에 매기시더니
오늘
송곳 같은 나의 죄와
성모송 한 번을
같은 추에 두시다니
- 청주교구 감곡 매괴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그리스도의 눈을 받은 이들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8월24일 연중 제21주일
<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
복음: 마태오 16,13-20
< 그리스도의 눈을 받은 이들>
아주 먼 옛날, 앞을 못 보는 남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한 번이라도 좋으니 눈으로 세상을 볼 수만 있다면...’
이것이 그 소경의 소원이었습니다.
어느 날 밤에 그 소경의 집에 부엉이 한 마리가 날아 들어왔습니다.
그리고는 그 소경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저씨, 난 아저씨의 소문을 듣고 아저씨를 도우려고 찾아왔어요. 나는
밤에만 활동하니까 낮에는 눈이 필요 없어요. 그러니까 낮 동안에는 내
눈을 빌려 드릴게요. 그러나 밤에는 꼭 돌려주셔야 돼요.”
다음날 아침 소경이 깨어보니 세상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에게 눈을
빌려준 부엉이에게 한없이 고마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날부터
부엉이와 생활을 하며 낮에는 소경이, 밤에는 부엉이가 눈을 달고 먹이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며칠이 지나자 소경의 마음에 은근히 욕심이 생겼습니다.
‘부엉이와 눈을 함께 쓰는 바보가 어디 있담.’
그리고는 소경은 부엉이가 잠든 낮에 먼 곳으로 도망쳤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밤하늘의 별을 보며 기뻐하였습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눈이 희미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아무것도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소경은 다시 더듬거리며 부엉이가 있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왜 나를 버리고 가셨어요. 난 밤에 먹이를 찾지 못해서 굶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내 눈도 기운을 잃은 거예요.”
이 말을 마치고 부엉이는 죽고 말았습니다. 소경은 한없이 후회하며 엉엉
울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눈뜬장님’이란 말이 있습니다.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있거나 지나치게
어떤 것에 집착하게 될 때 본질을 왜곡시켜 보거나 아예 보지 못하게
되기도 합니다. 너무 정신이 없으면 아기를 업고도 하루 종일 찾아
헤맨다고 합니다.
사실 우리 모두도 다 눈뜬장님이었습니다. 행복이란 것이 이 세상에서
인정받고 돈을 많이 벌고 성공하는 것으로 여겼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모든 것들이 오히려 우리 자신을 노예로 만드는 것들이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참 행복의 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눈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 예수님께서 태어날 때부터 눈을 가지지 못했던 소경에게 진흙으로
눈을 만들어 넣어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실로암 연못에서 눈을 씻은 뒤
새로운 눈이 생겨 제대로 보게 된 이 사건을 교부들은 우리 개인의 세례를
상징한다고 말합니다. 새로운 영적인 눈으로 태어나는 것이 세례인
것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볼 수 있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눈을
주셨기 때문이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눈 때문이 아닙니다. 내가 스스로
보인다고 하는 이가 참으로 장님이고 그리스도의 눈으로 보려고 하는
이만이 올바로 보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끔 그 눈이 그리스도의 것이었음을 잊고 살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베드로도 예수님께서 수난하시고 죽으셔야 한다는
말을 하셨을 때 그래서는 안 된다고 그분을 나무랍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이렇게 꾸짖으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넣어주신 영적인 눈은 다시 교만해지고 죄를 지으면
잃게 됩니다. 다시 세상의 영화가 최고라고 보게 되고 십자가가 저주받는
것이라 믿게 됩니다. 벳사이다에서 눈을 띄워주시고 다시 그 마을로
돌아가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죄를 지으면 그 눈을 다시 잃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주신 영적인 눈을 잃지 않으려면 오늘 예화에서처럼 그
눈을 주신 분에게 돌려드려 영양분을 얻게 해야 합니다.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죽게 되면 나에게 넣어주신 눈도 죽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뜻이 아닌 내 뜻을 따르는 것이 내 안에서 그리스도를 또 십자가에 못 박는
일입니다. 그 눈을 다시 에너지를 얻기 위해 그 주인에게 돌려주는 시간이
기도하는 시간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모두 불완전하여 우리는 매번 우리 힘으로 살려고 하다가
또 다시 장님이 되어버립니다. 다시 이 세상 삶에 집착하게 됩니다. 넓은
집을 얻으면 행복할 것이라 생각해서 평생을 고생하지만 그것을 얻고
느끼는 행복이 한 달 이상 가지 않습니다. 지금 가진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는 것이 행복임을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단 한 명이라도 제대로
볼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합니다. 그 사람을 따라가기만 하면 장님일지라도
길을 잃는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월호가 많은 사람을 태운 채 바다 속으로 가라앉고 있을 때, 바로
사태를 파악하고 탈출을 지시만 했어도 모두가 살 수 있었음에도, 한
시간이 넘는 시간동안 승객들을 움직이지 못하게 했던 배의 선장을
기억합니다. 그 선장은 나와서 젖은 돈을 말리는데 바빴습니다. 소경을
우두머리로 삼고 그를 따라가는 사람들의 안전은 누구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우리에겐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을 지닌 지도자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만약 해적 선장이 이끄는 배에 탄다면 그 선장이 이끄는 대로
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배에서 아무리 착한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 배에 탔으면 해적입니다. 교회 또한 한 명의 선장을 두고 같은 배에 탄
공동운명체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시며
거기에서 절대 장님이 될 수 없는 그래서 오류가 없는 선장을 지정해주지
않으셨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당신을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제자들이 대답합니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의 본성이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제대로 알아볼 눈이
없음을 보여줍니다. 그저 예언자 중 한 명으로밖에는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제자들보고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그들에게는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이 있는지를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그때, 베드로가 나서서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베드로만이 올바로 볼 수 있는 눈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올바로 알아볼 수 있는 눈이
베드로의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즉, “네가 나를 알아볼 수 있게 된 것은 네가 그럴 수 있는 눈일 가져서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그 눈을 넣어주셨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눈으로는 절대 하느님의 본성을 알아볼 수
없고 오직 주님의 도우심이 있어야만 그분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베드로에게 그 볼 수 있는 눈을 주셨다는 것을
보시고는 그 위에 교회를 세우십니다. 교회는 무엇일까요? 바로 하느님의
백성입니다. 특별히 베드로 위에 세워진 교회는 완성된 교회는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에로의 길을 걷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런데 그 중의
한 명이라도 올바로 볼 수 있는 눈이 없다면 어떻게 하느님 나라로 교회를
이끌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당신이 세우신 교회 안에는 하느님께서 볼
수 있는 눈을 주셔서 올바로 볼 수 있는 한 명의 목자를 세우심으로써 길을
잃거나 분열되지 않도록 섭리하신 것입니다. 교회라는 배가 난파하지
않도록 항상 깨어 지켜보는 선장을 세워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베드로가 죽는다고 교회 안에 더 이상 볼 수 있는 선장이 없게
된다면 예수님께서 올바로 교회를 세우셨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베드로가 죽어도 하느님께서 볼 수 있는 눈을 계속 넣어주시는 교회의
수장이 있어야만 합니다. 따라서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님들도 하느님의
은총으로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됩니다.
하느님은 믿을 교리와 같은 영적인 눈이 필요할 때에 하느님은 특별한
은총으로 교황의 결정에 오류가 없도록 섭리하십니다. 교황님을 우리의
선장으로 여긴다면 우리는 그분이 키를 돌리면 그 방향으로 같이 갈 수
있어야만 교회라는 한 배에 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열쇠를 가지고 계신 분은 교황님뿐입니다. 구원의
길은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수장이 누구인지를 구별하고 그 수장이
이끄는 대로만 쫓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며칠 동안 참 행복한 시간을 지냈습니다. 우리 교회를
이끌도록 우리 목자, 우리 선장으로 뽑아주시고 올바로 볼 수 있는 눈을
넣어주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우리를 어루만지고 위로하시고 희망을
주시고 떠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까지 그분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감동하였습니다. 그분이 비록 교리에 대해 말씀하실 때 오류가
없게 하실지라도 하느님께로부터 최고의 은총을 받고 있는 분이십니다.
해적선에 탔다면 누구나 해적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황님이 이끄시는
배에 탔다면 내가 아무리 죄를 지어도 구원받는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 담당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도회] 보잘 것 없는 죄인뿐입니다.[단상]
2014년 가해 8월24일 연중 제21주일
<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
복음: 마태오 16,13-20
연중 제21주일(2014년 8월 24일) 보잘 것 없는 죄인뿐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로마로 돌아가시는 기내에서 기자한테 이런 질문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당신은 당신을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교황님의
대답은 간단 명료했습니다.
“저는 죄인 중 죄인이지요.” 교황은 베드로의 후계자라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너는 베드로이다.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다”는 은혜로운 약속을 하셨습니다.
이 약속은 인간 베드로에게 하신 것이지만 선물일 뿐입니다. 주님의
약속은 공수표가 아닙니다.
주님의 약속은 곧 실현입니다. 파기될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겉으로는
단단한 바위였지만 이 바위는 온갖 약한 요소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주님의 무한한 은혜에 비하면 베드로의 인간적 자질은 보잘 것 없는
것뿐입니다.
그래도 주님은 나약한 인간 베드로를 당신 교회의 기초로 삼으셨습니다.
우리의 나약함을 주님의 선물과 은혜에 진정 내어드리고 맡겨드리면
주님은 우리의 나약함을 통해 당신의 놀라운 일을 하십니다.
오늘도 고백합니다. “주님, 저는 보잘 것 없는 죄인일 뿐입니다. 당신
마음대로 쓰소서!”
- 성 베네딕도 왜관 수도원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 -
◈ [수도회] 순례여정의 삶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요셉 수도원)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8월24일 연중 제21주일
이사22,19-23 로마11,33-36 마태16,13-20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 마태오 16,13-20
순례여정의 삶
순례여정 4일 차, 어제 마침내 우리 일행은 루르드 성지에 도착하여
수녀님으로부터 성지에 대한 자상한 설명을 들었고, 비오10세 교황
성전에서 세계에서 모인 무수한 신자들과 함께 성체조배후 강복을
받았습니다. 이어 밤에는 촛불 행렬에 참여하여 '아베 마리아', 감격에
벅차 성모찬송가를 부르며 성모님을 기렸습니다.
생각하면 제가 이렇게 순례길에 오른 것은 놀라운 신비입니다.
동행하는 두분의 도반이 마치 하느님 보내주신 수호천사 같습니다.
참으로 무수한 신비들로 이루어진 삶임을 깨닫습니다.
오,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정녕 깊습니다. 그분의 판단은 얼마나
헤아리기 어렵고 그분의 길은 얼마나 알아내기 힘든지요!
과연 만물이 그분에게서 나와,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그러니 우리 삶의 신비 앞에 하느님께 드릴 응답은 찬미와 감사뿐임을
깨닫습니다. 믿는 이들 눈에는 모두가 필연이며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하느님은 최상, 최선의 길로 우리 순례여정을 인도하십니다.
제가 늘 강조하는 순례여정의 네 요소를 실감합니다.
첫째, 하느님의 목표입니다.
목표없는 방랑자의 삶이 아니라, 하느님을 찾는 순례자의 삶입니다.
이래야 삶의 허무로 부터 해방입니다.
겉으로는 관광객이지만 내면 깊이에서는 모두가 하느님 찾는
순례자입니다. 루브르 박물관의 무수한 순례자들이었습니다.
고대 이집트인들의 거대한 석조물과 조각을 통해서도
불멸을 추구하는, 영원하신 하느님을 찾는 인간 영혼을 확인했습니다.
이미 우리 안에는 하느님을 찾는 DNA가 각인되어 있음을 봅니다.
하여 일년 내내 여기 루르드 성지를 찾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에게 많이 밟혀야 성지가 되고 성인이 된다는 수녀님의 말씀이
새롭게 마음에 와 닿습니다. 하느님을 찾는 순례여정에서 이런저런 괴롭고
힘든 모욕적 상황을 기꺼이 잘 견뎌내야 겸손이요 성인이 됩니다.
둘째, 사랑의 도반들입니다.
혼자가 아닌 함께 도반들이 되어 하느님을 찾습니다. 우리 이냐시오,
프란치스코 형제와 함께 셋이 미사를 봉헌하니 얼마나 오붓한지요!
만약 저 혼자 미사를 드린다면 혼자 먹는 밥처럼 참 처량했을 것입니다.
매일 미사를 통해 주님의 형제들이요 도반들임을 깨닫습니다.
무엇보다 최고의 도반은 주님이십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주님은 제자들은 물론 오늘 당신의 도반들인 우리 모두를 향해 묻습니다.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렇게 고백해야 진정 주님의 도반입니다. 순례여정중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의 신원을 정확히 파악하고 고백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내 생의 전부입니다.'라는 바오로의 고백이 생각납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모두가 은총이지만 신앙고백역시 은총이요, 신앙고백의 축복이 참으로
큽니다. 주님을 알 때 참 나를 압니다. 주님을 고백함으로 '베드로'로
계시된 자신을 알게된 시몬 바르요나입니다.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베드로란 이름도, 우리에겐 본명도 없었을 것입니다.
셋째, 이정표들입니다.
이정표를 보고 목적지를 향한 길을 찾듯이 역시 이정표의 상징들을 보고
주님을 찾습니다. 눈만 열리면 모두가 주님 목표를 가리키는
이정표들입니다. 주님은 물론 함께하는 도반들이, 성인들이 이정표입니다.
루르드를 비롯한 무수한 성지들 또한 주님을 가리키는 참 좋은
이정표들입니다. 이런 이정표를 따라야 길을 잃지 않습니다.
이정표를 못봐 길을 ,.잃어 헤매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어제 비오10세 성전 분위기는 얼마나 충만했는지요.
성인들의 초상화들만 보면 참 기분이 좋습니다.
주님을 가리키는 참 좋은 이정표들이기 때문입니다.
한국103위 성인들 초상화 앞에서 우리 순례자 일행 셋이 촬영하며,
"이제 성인 셋이 추가됐다" 말하니 모두 웃었습니다.
무엇보다 하루하루 최고의 이정표는 아마 미사일 것입니다.
이런 주변의 이정표 따라 주님을 찾는 우리의 순례여정입니다.
넷째, 기도입니다.
성서의 사람들 모두가 기도의 사람들이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바꿔야 할 것은 환경이나 사람 이전에 내 자신입니다.
바로 기도가 내 마음을 바꾸어 새 하늘, 새 땅을 살게 합니다.
기도해야 하느님 목표를 잊지 않고, 도반과의 우정을 깊이하며, 이정표를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늘 깨어 '지금 여기' 살게 하는 기도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이사야 예언자, 기도의 사람임이 분명합니다.
"나는 다윗 집안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메어 주리니,
그가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그가 닫으면 열 사람이 없으리라. 나는 그를
말뚝처럼 단단한 곳에 박으리니, 그는 자기 집안에 영광의 왕좌가 되리라."
그대로 오늘 복음의 베드로를 통해 실현됨을 봅니다.
우리 역시 기도에 항구할 때, 주님은 우리를 말뚝처럼 단단한 곳에 박을
것이며 우리 교회 집안에 영광의 왕좌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평생 순례여정중에 있는 하느님의 거룩한 순례자들입니다.
하느님 목표는 분명합니까?
도반들은 있습니까?
이정표들은 늘 확인합니까?
기도에 항구랍니까?
이 네가지 질문들 늘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순례여정에 항구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우리 주 하느님께 영원토록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 [수원] 보물에 감사드리고(마태16,13-20)
2014년 가해 8월24일 연중 제21주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ㅏㄹ의 열쇠를 주겠다.>
마태 16,13-20
보물에 감사드리고(마태16,13-20)
찬미예수님! 알렐루야~
하느님께서는 궁궐의 시종장 세브나에게 ‘나는 너를 네 관직에서
끌어내리고 엘야킴에게 너의 관복을 입히고, 다윗 집안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메어 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뜻을
따르지 않을 때 축복의 열쇠를 다른 사람에게 건네어 주시기도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 이십니다.”라고 신앙고백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하시면서 베드로
사도에게 하늘나라의 열쇠까지 맡기십니다. 열쇠라는 것은 창고나 집의
문을 열고 닫는 역할을 하는데, 교황님들께 그러한 중책을 하느님께서
맡겨 놓으셨습니다. 그러면 무슨 보화를 관리하도록 하셨는가? 사도
바오로는 “오!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정녕 깊습니다. 누가 주님의
생각을 안적이 있습니까?” 하고 하느님의 놀라운 신비에 대해 감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피와 물을 쏟고 돌아가셔서 성사들을
세워주셨습니다. 성체성사는 미사 때 마다 당신이 지상에 내려오시어
우리 영혼의 양식이 되어 주는 성사입니다. 하느님의 심오한 신비입니다.
또 고해성사는 나약한 우리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영혼의
치유성사입니다. 고해성사는 객관성이 있습니다. 자신의 죄를 성찰하고
하느님께 직접 용서를 받는다는 것은 자신을 합리화 시킬 수 있습니다.
또 혼배성사는 혼인하는 부부를 하느님의 은총으로 한 몸이 되게 합니다.
인간이 갈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혼배성사인 것입니다. 병자들에게
기름을 발라 영혼과 육신을 치유하는 것이 병자성사입니다. 저는
병자성사를 통해 치유되는 경험을 많이 봅니다. 이런 것들이
예수그리스도께서 마련해놓으신 보고(寶庫) 안에 있는 것이고 우리는 잘
관리해야 합니다.
또 성경말씀은 살아있는 말씀이고 모두 진리의 말씀인 것을 우리가 믿고
받아들여 전해야 되는 보물입니다. 그 밖에 사도들을 통해서 내려오는
많은 전승들이 보물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유형한 표징들을 잘 관리하도록 임무가
맡겨진 것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성사들을 잘 관리하고 거행해서 이
지상에 하느님의 은총이 충만하게 하는 것이 교회의 역할입니다.
교회가 그런 역할을 제대로 못할 때에는 보물을 손상시키거나 잃어버리게
됩니다. 대표적인 것이 중세 때 개신교로 교회가 갈라져나간 것입니다. 그
당시는 고해성사나 미사를 지나치게 남용했다면, 지금은 너무 소홀히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수많은 개신교도들이 그러한 보화 없이 살아갑니다. 결국
북유럽에서 보듯이 교회도 안 나가고, 윤리관마저 다 무디어져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들은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 벽돌 하나하나가 모여서 집이 되는
것처럼 우리 한사람 한 사람이 모여 교회가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세워주신 성사들에 거룩하게 참여할 때 더 많은 더 많은 은총을 교회를
통해서 받게 됩니다. 그러나 성사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고, 성경 말씀,
교회의 전승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점점 희미해지고 약화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보고의 열쇠를 주면서 은총들을 잘 관리하도록
맡겨주셨습니다. 교황님은 전 세계의 가톨릭교회를 잘 다스려야 되고, 저는
우리 본당 신자들을 영적으로 잘 관리하고 은총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또 여러분들은 가정에서 각자에게 부여된 신앙의 보고들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가족들이 기도하고, 성사생활을 잘 하도록 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할수록 신앙고백이 점점 더 깊어져야합니다.
“너희들이 공부를 하고, 좋은 직장을 다니고, 돈을 벌고 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그런 것들을 통해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그것이 너의 인생의
목표가 돼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너에게 소중한 천국의 열쇠를 주셨단다.”
이것이 여러분이 가정에서 해야 하는 일들입니다. 그럴 때 우리 교회는
튼튼해질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사생활도 제대로 하지 않고 교회는
텅 비게 됩니다.
오늘 이 미사 중에 하느님의 사랑으로 만들어진 보물에 감사드리고,
성교회가 성사와 성전을 잘 보호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각자에게 맡겨진
성사생활, 신앙생활을 통해서 하느님을 증거 할 수 있는 은총을 구합시다.
아멘.
- 수원 교구 죽전 1동 하늘의 문 성당 윤민재 베드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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