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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가해 8월26일 연중 제21주간 화요일
[청주] 마음이 먼저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제1독서 2테살 1, 1 - 5. 11ㄴ- 12
† 복음 마태 23,13-22
★ 바오로 사도는 테살로니카 교회의 신자들에게 주님의 날이 왔다는
거짓 소식에 마음이 흔들리거나 불안해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중요한
것은 참된 신앙의 전통을 굳건히 지키며 주님 은총에 힘입어 좋은 일과
좋은 말을 하는 것이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불행하다고 하시며 그들을
꾸짖으신다. 율법의 외적 조항은 강조하면서도 자비와 신의라는 율법의
근본정신에는 소홀하고, 겉으로는 깨끗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탐욕에 차
있는 위선적인 모습이기 때문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을 꾸짖으시면서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존경받기를 갈망하고 다른 사람의 크고 작은 과오를
들추고 판단하며 지배력을 행사하려는 모습 때문입니다. 외적 경건함을
추구하지만 사실은 율법의 근본정신인 자비와 신의가 아니라, 왜곡된
욕망인 질시와 증오와 탐욕으로 차 있는 위선이 그들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위선이 어디서 비롯되는지를 살펴보면, 이 불행이 그 시대
그들에게만이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에게도 다가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리석고 딱하고 불쌍한 삶의 모습은, 인생에서 진정 중요한 것은 보지
못한 채 다른 것에 집착하여 허무함을 보상받으려는 마음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참으로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하는지 깊이 성찰하고
그것을 얻고자 노력하지 않는다면, 겉과 속이 다른 위선이 삶의 방식이
되어 버립니다.
매서운 눈초리와 차가운 냉대의 분위기와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자아의
모습에서 벗어나 탁 트인 곳으로 나아가 인생의 참의미를 바라보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의 지위와 영예가 더 이상 의미 없는 곳,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문이 사라진 곳, 사랑과 존중의 온기가 느껴지는
곳, 참으로 중요한 것이 가려지지 않는 곳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참된 자유의 공기가 흐르는 곳이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는 그곳에
어떻게 다다를 수 있을까요? 그곳에서는 인생의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일까요? 이러한 질문을 진지하고 절실하게 던지는 사람은 사실은 그
답이 어디에 있는지도 예감합니다. 이러한 질문을 용기 있게 시작한 것이
바로 오늘의 복음을 만난 순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 매일 미사 -
◈ [서울] 연중 제21주간 화요일
2014년 가해 8월26일 연중 제21주간 화요일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더 중요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한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3,23-26
예전에 어느 나라 국민들이 행복을 느끼는지 조사를 했다고 합니다. 당연히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나라, 환경이 깨끗한 나라, 사회복지가 잘 되어있는
나라, 오랜 역사와 문화를 가진 나라의 국민들이 행복할까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조사의 결과는 달랐습니다. 우리가 되고 싶어 하는
선진국 국민들은 본인들이 행복하다는 생각을 많이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반면에 우리가 벗어나고 싶어 했던 가난한 나라의 국민들이 오히려
행복하다고 말을 했다고 합니다.
행복의 기준은 원하는 것을 채우는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행복의
기준은 물질, 명예, 권력, 업적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행복의 기준은 건강,
오래 사는 것, 커다란 집만도 아닌 것 같습니다. 행복의 기준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느님을 닮았다고 합니다. 따라서 행복의
기준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살아간다면 비록 현실에서
고난을 당해도,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실패하고 넘어질지라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불행하다고 여기는 것들이 있습니다. 몸이 아픈 것, 장애가
있는 것, 가진 것이 없는 것,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하는 것 등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불행이 아니라 불편한 것들입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완벽하게 모든 것을 채울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이 세상에
살면서 각자 불편한 삶을 살기 마련입니다. 성직자와 수도자로 사는 것도
불편한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청빈, 독신, 순명’을 서약하면서 많은
불편함을 스스로 감수하면서 살아갑니다. 사제복과 수도복은 하고 싶은
것들을 할 수 없게 만드는 족쇄 일 수도 있습니다. 세상은 넓고 하고 싶은
것은 많지만 수도원의 울타리 안에서 지내는 것이 부담이 될 수도
있습니다. 행복과 불행의 기준은 하느님을 닮느냐에 있습니다. 하느님을
닮는다는 것은 얼마나 사랑하느냐에 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동양 사람과 서양 사람은 생각하는 것이 다를 때가 있습니다. 동양
사람들은 관계와 맥락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서양 사람들은 문제
자체와 속성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서 교통사고가 났을 때,
동양 사람은 그로인해 피해를 입은 당사자들은 물론이고, 길이 막혀서
피해를 입은 사람들까지도 생각을 합니다. 교통사고가 났을 때, 그날
사고를 낸 사람의 행동이나, 기분을 생각합니다. 하지만 서양 사람들은
교통사고 자체만 생각하지 그로인해서 피해를 입었을 다른 사람들은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동양 사람들은 방송을 해도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서부간선도로에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그로인해 많은 사람들의 출근길이
늦어졌습니다.’ 하지만 서양 사람들은 방송을 해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동부간선도로에 교통사고가 있었습니다.’ 사고자체만 보도를 하지, 사고로
인해서 벌어진 여러 상황들은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동양은 고
맥락 사회라고 하고, 서양은 저 맥락 사회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점을 이야기 하십니다. ‘율법을 지키고,
십일조를 성실하게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비와 자선을 베푸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율법을 지키고 십일조를 내는 것은 본인의 문제이고,
속성의 문제입니다. 하지만 자비를 베풀고, 자선을 베풀며 이웃을 돕는
것은 관계의 문제이고 맥락의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개인이 하느님을
믿어서 구원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공동체가 더불어서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이야기를 하십니다. 그래서 교회를 만드시고, 제자들과 공동체의
삶을 사셨습니다. 예전에 우리사회는 고 맥락 사회였습니다. 이웃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고, 이웃의 기쁨을 함께 기뻐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점차
문제 자체와 사물의 속성만을 생각하는 저 맥락의 사회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바로 이런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바로 그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십시오. 누가
예언이나 설교로 또 우리가 보냈다는 편지를 가지고 주님의 날이 이미
왔다고 말하더라도, 쉽사리 마음이 흔들리거나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누가
무슨 수를 쓰든 여러분은 속아 넘어가지 마십시오.” 우리들의 겉모습을
가꾸는 그만큼, 우리들의 영적인 성장을 위해서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교황님은 작은 차를 타셨습니다.
2014년 가해 8월26일 연중 제21주간 화요일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더 중요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한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3,23-26
교황님은 작은 차를 타셨습니다.
외제차가 많이 다니고 있고 그 중에도 검은 색 차를 저는 외면합니다.
교통수단인 차에 왜들 그렇게 멋과 품위를 살리려는지 맘에 안 듭니다.
호텔이나 식당이나 관공서나 어디나 수위들이 인사하는 각도가 다릅니다.
이번에 교황님은 한국에서 작은 차를 타시겠다고 의사를 표하셨습니다.
저도 국산 소형차를 무조건 고집하며 여태 타온 게 아주 기분 좋습니다.
겉치례 환장병에 걸린 사람들이 많은 걸 보면 기본교육이 문제 아닐까요?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마태오 23,25)”
- 서울 대 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청주] 마음이 먼저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8월26일 연중 제21주간 화요일 (마태 23,23-26)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더 중요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한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3,23-26
마음이 먼저다.
매일 같이 이를 닦고 얼굴을 씻고 옷매무새를 고칩니다. 외출을 하려면
거울을 보고 다시 한 번 몸단장을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일상입니다. 어떤
이는 ‘아름다운 얼굴이 추천장’ 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형수술도 하고
외모를 가꾸려 많은 정성을 기울입니다. 그에 비하면 마음을 가꾸는 일에는
너무도 인색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마음이 깨끗하면 표정이 맑고, 얼굴이
빛납니다. 그 ‘아름다운 마음은 신용장’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똑바로 향해
있으면 행동 또한 바릅니다. 그리고 마음과 행동이 일치할 때 구원의
은혜를 입을 것입니다”(성 아우구스띠노).
그럼에도 마음을 가꾸는 것에 정성을 기울인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마12,2)라고 권고합니다.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정결 예식에 대한 법을 지키고
가르치는 데 신중을 기했습니다. 그럼에도 ‘위선자’소리를 들은 것은
중요한 것은 외적인 의식(컵을 닦고 그릇을 닦는 것)이 아니라
속마음이라는 것을 간과했기 때문입니다. 겉을 깨끗이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저 닦아야 할 속을 버려두고 겉만 닦는 데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잔이 아무리 좋은 잔이고 화려해도 속이 더러우면 쓸 수가
없습니다. 속이 깨끗하면 다른 것은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더럽히는 것은 오히려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마태15,11).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데 바로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살인 간음, 불륜, 도둑질, 거짓증언, 중상이 나온다”(마태15,19-20).
그러므로 마음을 깨끗이 하고 하느님과 스스로에게 정직할 수만 있다면
외적 행동 또한 빛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가꾸는데 인색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신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홀로 있어도 부끄러움이
없다는 뜻입니다. 사실 우리는 홀로 있을 수가 없습니다. 언제나 하느님
앞에 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이중적이거나 위선적이지 않도록 마음을
일깨워야 하겠습니다.
“마음이 즐거우면 얼굴이 밝아지고 마음이 괴로우면 기가 꺾인다”
(잠언 15,13). 따라서 “무엇보다도 네 마음을 지켜라. 거기에서 생명의
샘이 흘러나온다”(잠언 4,23).“주님, 당신께 찬미 노래 부르오리다. 흠 없는
길에 뜻을 두리니 언제 저에게 오시렵니까? 저의 집 안에서 온전한
마음으로 걷고 불의한 일을 저의 눈앞에 두지 않으오리다.,,,그릇된 마음
제게서 멀리 떨어지고 악한 것을 제가 알지 않으리이다”(시편101,2. 4).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필요한 변화는 믿음이다.
2014년 가해 8월26일 연중 제21주간 화요일 (마태 23,23-26)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더 중요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한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3,23-26
언젠가 필요한 물건이 있어서 어느 백화점을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그 백화점에서는 조용한 음악이 어디선가 잔잔하게 흘러나오고 있었지요.
그런데 워낙 사람들이 많은 곳이기 때문에 그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 어른들의 싸우는 듯한 말투, 아이들의 울음소리, 사람들의
구두 발짝 소리 등등 너무나도 많은 소리들로 인해서 그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지요.
솔직히 저는 이 음악소리가 백화점에서 틀어놓은 음반 소리라고
생각하면서,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요. 하지만 알고 보니 백화점의
넓은 홀에서 공연이 이루어지고 있더군요. 피아노와 현악기로 이루어진
현악4중주 공연이었습니다. 제가 워낙 음악을 잘 모르지만, 스피커를
통해서 나오는 소리가 아닌 직접 연주하는 소리를 들으니 특별한 느낌을
받게 되더군요.
솔직히 저는 클래식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직접
들어보니 너무나 좋아서 그 자리에 서서 꽤 오랫동안 그 공연을 보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좋아하지 않았던 제가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 동안 클래식을 접할 기회도 없었지만,
알려는 노력도 또 접해보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문득 사람들이 주님을 멀리하는 이유를 조금이나마 깨닫게 됩니다. 즉,
자신이 직접 주님을 느끼고 체험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주님을 모르겠다고, 믿지 못하겠다고 이야기하지요. 그러나 정말로
주님을 알려고 했으며, 주님을 체험하려고 노력했을까요? 그러한 노력도
없이 “주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지나친 교만인 것입니다. 마치 클래식을
접해 보지 않았기에 모르는 것을 그냥 싫다고 말하는 저의 모습과 똑같은
것이지요.
어제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불행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중요한 것은 무시하면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
전부인 것처럼 행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이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과거의 율법에만 매어 있기 때문입니다. 조상님들의 율법에 갇혀
있어서 그들은 스스로 주님을 직접 느끼고 체험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비슷할 때가 얼마나 많았을까요? 주님을 알고 체험하면서
주님과 하나 되는 것 외에는 중요한 것이 없는데도 다른 것들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까? 주님께 불평불만을 던지기
전에, 내가 얼마나 주님을 알려고 했으며 체험하려고 했는지를 따져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 대한 바른 믿음을 내 안에 세움으로써
주님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하지 마세요.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여러분에 대해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여러분이
그들을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하니까요(롤랑 바르트).
다름이 십자가에 못 박힐 이유인가?
한 때 ‘새벽형 인간’이라는 말이 유행했던 적이 있습니다. 이러한 유행에
발 맞춰서 ‘새벽형 인간’을 찬양하는 책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너도나도
이 새벽형 인간이 되기 위한 노력을 했습니다. 심지어 전임 대통령조차
스스로 새벽형임을 과시하면서 조찬 회의를 강행했었지요. 그런데 정말로
모든 사람이 새벽형이 될 수 있을까요?
저는 어쩔 수 없이 ‘새벽형 인간’이 되고 말았습니다. 유일하게 사람들을
벗어나 저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사람마다 각자의 리듬이 분명히 있습니다. 새벽에 집중이 잘 되는 사람도
있겠지만, 어떤 사람은 한밤중에만 집중이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를
무시하고 무조건 새벽에 맞추라고 한다면 어떨까요? 먹고 살기 위해
어떻게든 맞추려고 노력하겠지만, 그 시간까지 받은 스트레스와 업무의
손실은 분명 상당할 것입니다.
나한테 무조건 맞추라는 생각들,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일까요? 그런데
이러한 사람들이 세상에는 상당히 많은 것 같습니다. 나와 다른 것을
잘못된 것이라고 말해버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다른 것을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는 닫혀 있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세요. 잘못된 말씀과 행동을 하셨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당시의 사람들과 다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다름이 과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할 만큼의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인가요?
지금도 우리는 계속해서 내 이웃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다르다는 이유로
말이지요....
- 인천 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삶의 예술 -삶은 아름다워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요셉 수도원)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8월26일 연중 제21주간 화요일,
2테살2,1-3ㄱ.14-17 마태23,23-26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더 중요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한다.>
+ 마태오 23,23-26
삶의 예술 -삶은 아름다워라-
찬란한 별빛 가득 쏟아지는 새벽 2시, 해발 800m 오리손 산장에서 강론을
씁니다. 스토리가, 이야기가 사라져가는 영적으로 가난한 시대입니다.
역사와 전통, 전설이 사라져가는 시대는 외적풍요에도 불구하고 분명
정신적으로 궁핍한 시대입니다.
어제부터 본격적 산티야고 순례가 시작되었습니다. 어제 저녁 피레네
아름답고 평화로운 산맥의 산들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산장에서(아,
이런 내적시야를 지닌 초연한 삶이라면!), 서울서 온 진지한 젊은 부부를
만나 우리 일행은 행복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저도 참 오랫만에 많은 말을 했습니다. 젊은 부부가 대접한 레드와인과
과일이 합쳐진 샹그리아 향기로운 술맛이 분위기를 한껏 넉넉하게
했습니다. 삶은 예술입니다. 삶은 아름답습니다.
아름답고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떠오른 강론 주제입니다.
자연과 조화된 순례자들의 분위기가 참 자연스럽고 평화롭고
아름다웠습니다. 며칠 전 파리 민박집에서 정성 다해 차려 준 식사에,
'식탁이 예술이네요.' 자매님께 한 말이 생각납니다.
어제 마음을 새롭게 하고자 이발소에 들려 아름다운 여인 이발사가 완전
삭발해 줬습니다. 12유로 인데 하나도 아깝지 않았습니다.
웃음 가득한 얼굴에 즐겁게 정성을 다한 민첩한 손놀림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완전 예술 경지에 이른 이발 노동이었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아 웃으며 엄지 손가락을 높이 들어 감사를 표현했습니다.
첫째, 삶의 기본에, 본질에 충실할 때 아름답습니다.
하여 우리 분도수도회의 모토는 '기도하고 일하라.'입니다. 진정 정성을
다해 기도하는 모습보다, 일하는 모습보다 아름답고 거룩한 모습도
없습니다.
여기 산티야고 순례 중에는 걷고, 먹고, 잠자기에다 기도가 기본입니다.
걷기가 기도이자 묵상입니다. 저절로 마음은 단순해지고 깨끗해 집니다.
여기에 위선이나 거짓이 것들일 수 없습니다.
이런 순수한 마음에서 나오는 분별의 지혜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발상들아!"
지식은 넘쳤을지 몰라도 마음의 순수는 결핍됐던, 분별의 지혜가 부족했던
자들입니다. 십일조는 충실히 바치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라는 본질적
요소를 간과했던, 접시의 겉은 깨끗이 닦으면서 속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했던 참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삶의 기본에, 본질에 충실하지 않을 때
누구나의 가능성입니다.
둘째, 삶의 중심이 확고해야 합니다.
삶의 중심은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모실 때 비로소 안정과 평화입니다.
하느님 중심이 빈약하여 불안과 혼란입니다.
뿌리 없어 이리저리 떠돕니다.
"누가 예언이나 설교로 주님의 날이 왔다고 말하더라도, 쉽사리 마음이
흔들리거나 불안해 하지 마십시오. 누가 무슨 수를 쓰든 여러분은 속아
넘어가지 마십시오."
우리 모두를 향한 바오로를 통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 중심'만이 유일한 답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주님 말씀대로 주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삶의 본질에 충실할 때
안정과 평화요, 삶은 예술이 됩니다.
셋째, 전통에 충실하십시오.
살아있는 전통에 충실해야 됩니다. 역사와 전통이 배어있는 여기의 도시와
시골, 사람들과 건축물들이 부럽습니다.
경박하지 않고 중후하며 자연스럽습니다. 하여 문화강국의 프랑스입니다.
진정 뿌리 깊은 전통과 역사가 체화된 자들이 내적부요의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겐 무엇보다 자랑스런 교화전통이 있습니다.
최고의 전통을 담고 있는 것이 미사를 포함한 거룩한 전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복음을 통하여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차지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형제 여러분, 굳건히 서서 우리의 말이나 편지로 배운
전통을 굳게 지키십시오."
역시 우리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미 배운 교회 전통에 충실할 때,
또 정성을 다해 항구히 교회 성사에 참여할 때 하느님의 축복이요, 삶은
아름답고 깊은 예술이 됩니다.
삶은 예술입니다. 삶은 아름답습니다.
삶의 기본에 충실하고, 삶의 중심에 주님을 모시며, 교회전통을 굳게 지킬
때, 비로서 삶은 예술이 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또 우리를
사랑하시고 당신의 은총으로 영원한 격려와 좋은 희망을 주신 하느님 우리
아버지께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의 마음을 격려하시고 힘을
북돋우시어 온갖 좋은 일과 좋은 말을 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주님께 나아가면 빛을 받으리라. 우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
(시편34,6).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 -
◈ [인천] “배운 전통을 굳게 지키십시오.”
2014년 가해 8월26일 연중 제21주간 화요일
<여러분이 배운 전통을 굳게 지키십시오.>
(테살로니카 2서 2장 1~3.14~17절)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더 중요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한다.>
+ 마태오 23,23-26
오늘 독서 중간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 배운 전통을 굳게 지키십시오.
그 말씀을 들으면서 요즘 하고 있는 일들이 떠올랐습니다. 공동체의
밑거름이 될 수 있는 기본적인 일들을 생각하고 실행하고 있는데요. 이런
겁니다.
첫 번째는 아침 성무일도를 함께 바치는 겁니다. 본당에 더 많은 기도가
필요하겠다.. 는 생각이 있은 후부터 조금씩 성무일도에 대한 생각이
나더라고요. ‘함께 바치면 더 좋겠다.. 아침마다 기도의 불빛을 밝혔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점점 생겼습니다. 그러다가 수녀님들께 보통 몇 시에
성무일도 기도를 하시냐고 물어보았더니, 아침 5시 30분에 하신다고
합니다.
‘그 시간이면 일 시작하기 전에 함께 할 수 있는 분들이 있겠다..’ 싶어서
수녀님들과 성무일도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보통 성무일도를 바치고 1시간
정도 성체조배를 하는데요. 개인 사정에 따라 성체조배는 자유롭게 하고
있습니다. 처음 예상으로는 당분간 아무도 안 나오지 않을까.. 했는데요.
예상외로 관심이 있는 분들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그분들과 함께 아침마다
기도의 불빛을 밝히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이제 곧 시작할 성경 통독입니다. 일부 신자들만 하는 통독이
아니라 전 신자가 함께 하는 통독을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따로 시간을
내서 원하는 분들만 하는 것도 생각해 보긴 했는데요. 그러면 또 하던
분들만 하게 될 거 같아서, 전 신자 성경 통독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냥 혼자 읽는 것도 아닙니다. 주일에 전 신자가 함께 읽고, 강론 때
설명을 듣습니다. 그리고 집에 가서 개인적으로 읽고 공부와 나눔을 위한
질문들에 답을 하고 나서, 소그룹에 가서 또 읽고 나눔을 합니다. 그러면
말씀이 머리와 가슴에 남지 않을까.. 합니다. 또 소그룹 안에서 말씀을
살아가고자 하는 좋은 움직임도 기대할 수 있구요.
세 번째는 더 자주 미사에 참여하는 겁니다. 신자들에게 가장 기본적인
신앙생활일 거 같은데요. 바쁠 때 보면 주일조차 지키지 않는 분들이
많습니다. 또 주일만 지키는 분들도 있죠. 그런 분들이 좀 더 자주 미사에
오실 수 있도록 계속 독려하고 강조하려고 합니다.
때로 제가 하는 교육은 젖은 땔감에 석유를 부어서 일시적으로 불이
타오르게 하는 거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조금 타다가 또 사그러들
텐데요. 한 번은 그렇게 하고 있을 때 구름 사이로 햇빛이 비추더라고요.
그 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시적으로 불이 타오르게 하려고 석유를 붓기보다 땔감을 햇빛에 더
노출시켜야 활활 타오를 수 있겠다. 그 일이 신앙 안에서는 세속에 물든
신자들을 더 자주 말씀과 성체 앞에 노출시키는 것이겠다. 그래야 세속의
물을 말릴 수 있고, 성령의 불로 타오를 수 있을 거다...’
아마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미사에 참여하는 것은 오랜 세월 이어져온
신앙생활의 기본 중의 기본일 겁니다. 그 일을 성실히 하는 것이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그분께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이겠죠. 오늘 하루, 그 일에
마음을 써 봅시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옆 본당 신부님이 자주 피정을 가시자,
선배 신부님이 한 마디 했다.
“그러다가 산 속으로 들어가는 거 아니냐...”
- 인천교구 대부동 성당 김기현 세례자 요한 밤송이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속이는 자들의 특징
2014년 가해 8월26일 연중 제21주간 화요일
<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더 중요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한다. >
복음: 마태오 23,23-26
< 속이는 자들의 특징 >
김창옥씨의 강의를 듣다보니 감자 때문에 이혼하게 된 사연이 있어 소개해
드립니다.
아내가 감자를 삶아 소금과 함께 남편에게 가져왔습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소금 대신 설탕을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아내는 “세상에 감자에 설탕을
찍어먹는 사람이 어디 있어?”하며 비꼬았습니다. 남편은 “우리 집에서는
항상 설탕 찍어먹었어.”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내는 “당신 집안은 참
이상해. 쓸데없는 고집만 있어가지고는!”이라며 집안을 들먹였습니다.
남편은 자신도 모르게 아내의 뺨을 때렸고 그렇게 싸움이 커지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살 바에 이혼해. 내가 지금까진 꾹 참아왔는데 이젠 결판을
지어야겠어.”
아내는 이혼 법정에 섰을 때 판사에게 물었습니다.
“판사님은 훌륭한 집안에서 자라셨으니 잘 아시겠네요. 판사님 집안에서는
감자에 소금을 찍어 드셨나요, 설탕을 찍어 드셨나요?”
판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저희는 신김치에 싸 먹는데요...”
“ ... ”
가볍게 웃을 수 있는 이야기지만 또한 한 가정의 평화가 어떻게 깨지는지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관계가 깨어지는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옳으니
상대가 내 식대로 바뀌어주기를 원하면서부터입니다. 하와가 “이걸 왜
따먹으면 안 돼?”라고 하며 하느님이 틀렸다고 생각하면서부터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가 단절되게 된 것과 같습니다. 즉, 모든 관계 단절의 원인은
‘교만’입니다. 교만은 하느님까지도 틀렸다고 말하게 만듭니다.
“가난하면 행복하다는 것도,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것도, 꾸어달라면
물리치지 말라는 것도 좀 지나치신 말씀 같아요.”
이렇게 교만해 져 있는 사람들에게 유혹은 순식간에 다가와서 구원의
길에서 멀어지게 만듭니다. 사탄이 베드로를 어떻게 유혹하는지 한 번
보십시오. 예수님은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시고 그에게 하늘 나라
열쇠까지 줍니다. 그리고는 곧 당신이 유다 지도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의 처참한 죽음을 당해야 한다고 예고하십니다. 그때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을 나무라며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고
충고합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고 예수님까지도 자신이 올바로
잡아주어야 하는 위치까지 올라가버린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하십니다. 자신이 옳고 하느님이
틀렸다고 말하는 이가 사탄인 것입니다. 사탄이 곧 교만이기 때문입니다.
테살로니카 후서 2장은 바로 종말이 다가왔다고 말하며 자신이 재림
예수이니 자신을 믿어야만 한다고 하는 적그리스도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마지막 때에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하는 이들이
많이 나타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이렇게
충고하는 것입니다.
“누가 무슨 수를 쓰든 여러분은 속아 넘어가지 마십시오. (마지막이 이르기
전에) 먼저 배교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무법자가 나타나야 합니다. 멸망하게
되어 있는 그자는 신이라고 일컬어지는 모든 것과 예배의 대상이 되는
것들에 맞서 자신을 그보다 더 높이 들어 올립니다. 그리하여 신으로
자처하며 하느님의 성전에 자리 잡고 앉습니다.”(2테살 2,3-4)
누구든 하느님의 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자는 적그리스도입니다. 자신이
하느님이라고 하거나 하느님과 같이 흠숭 받아야 할 존재라고 말한다면
그들을 믿지 마십시오. 그들은 하느님의 위치에 서기 위해 하느님을
자신들보다 부족한 분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속이는 자들의 특징은 바로
자기 자신을 하느님의 위치에 두어 하느님께로 가야 할 영광을 가로채는
이들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실패라고 말하며 자신이 그 부족한 면을
채우러 왔다고 말합니다. 지금 우리가 접하는 대부분의 이단들은 자신들을
그리스도를 대변하는 위대한 예언자라고 말하며 자신들을 하느님이라고
까지 합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다 그리스도의 구속사업이 불완전했고
실패했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그리스도는 그런 식으로 오시지 않습니다. 마치 번개가
치는 것처럼 온 세상이 한꺼번에 그분이심을 알아보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보라, 광야에 계시다.’ 하더라도 나가지 마라. ‘보라,
골방에 계시다.’ 하더라도 믿지 마라. 동쪽에서 친 번개가 서쪽까지 비추듯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마태 24,26-27)
모든 이들이 그분을 동시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위대한 힘과 영광으로
오시지 않는다면 그자가 누구든 속이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런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바로 그리스도를 완전한
분으로 믿고 순종하려는 겸손함을 갖는 것입니다. 이렇게 겸손한 이들은
이렇게 자신이 옳고 예수님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거부감을 느껴
그들을 저절로 멀리하게 됩니다. 그들에게 속아 넘어가고 있다면 교만과
권력을 좋아하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따라서 겸손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절대 이단이나 적그리스도에게 속지
않게 됩니다. 예수님은 겸손하시어 아버지께 순종하여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절대 아버지의 자리를 탐내지 않으셨고, 아버지께서
당신보다 부족하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교만으로 모든 죄가 들어왔고,
겸손으로 구원이 시작되었다는 것만 확실히 안다면 결코 이단에 빠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담당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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