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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가해 9월5일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수원] 미리 심판하지 마십시오. -
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제1독서 1코린 4, 1 - 5
† 복음 루카 5, 33 - 39
★ 바오로 사도는 자신은 그리스도의 사도, 곧 하느님 신비의 관리인으로서
성실한 관리인일 따름이며, 자신을 심판하시는 분은 주님뿐이시라고
말한다. 주님께서는 어둠 속에 숨겨진 것을 밝히시고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이다(제1독서).
★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단식 논쟁을 걸어온다.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 먹고 즐기는
비유와,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는 비유를 드시어 단식의 참뜻을 일깨워
주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아직 여름의 여운이 진하게 서려 있습니다만, 아침저녁으로는 새로운
절기에 접어들었음을 실감합니다. 가을이 다가오면 독일 시인 릴케의
‘가을날’이라는 유명한 시가 떠오릅니다.
“주님, 때가 왔습니다. 지난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얹으시고/ 들녘엔 바람을 풀어 놓아 주소서.//
마지막 과일들이 무르익도록 명하소서./ (중략)/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혼자인 사람은 그렇게 오래 남아/
깨어서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이며/
낙엽이 흩날리는 날에는 가로수들 사이로/
이리저리 불안스레 헤맬 것입니다.”
이 시에 대한 정서와 의미의 해석은 사람마다 다양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누구나 스스로의 내면이 얼마나 성숙되고
무르익었는지를 겸허하게 살펴보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시의 앞부분이
절대자를 향하도록 초대하고 자연과 절기의 위대함을 깨닫게 하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도 주님의 말씀으로 성숙되는지를 진지하게
살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무르익고 성숙했다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 강해져서 흔들림 없어 보이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의 생각과 주관을 고집하며 완고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아니라,
주님께서 깨우쳐 주시는 새로운 의미에 눈뜨고 반응하는 부드러운
마음에서 성숙함이 드러납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은 기쁨에 대한 적절한 감수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의
존재는 부드럽고 향기로우며 생명력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맞이하는 가을을 잘 익은 과일처럼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가는
시간으로 선용할 것을 다짐해 봅시다.
- 매일 미사 -
◈ [인천]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됩니다.
2014년 가해 9월5일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 그들도 신랑을 빼앗기면 단식할 것이다. >
복음: 루카 5,33-39
재미있는 글을 하나 보아서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한 유람선이 태평양을 지나가다가 풍랑을 만나 재난을 당하여
좌초되었습니다. 그래서 구조 헬기가 와서 사다리를 내리니 자매님 한
분과 형제님 열 분이 동시에 사다리를 잡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헬기가
구할 수 있는 인원은 딱 10명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기장은 어려운
부탁의 말을 던집니다.
“제발 1명은 손을 놓으세요. 안 그러면 우리는 모두 죽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눈치만 보면서 차마 손을 놓지 못했습니다. 바로 그때 한
명의 자매님께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저는 평생 남편을 위해 희생하고, 또 자식을 위해 희생했습니다. 이렇게
힘들게 살았는데 한 번 더 희생 못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제가 잡은
사다리를 놓겠습니다.”
이 말에 남자들은 너무 기쁘고 좋아서 모두 힘차게 박수를 치다가 떨어지고
말았다고 하네요. 아무튼 자신을 희생하겠다고 했던 자매님만 구조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냥 웃으며 넘길 수도 있는 이야기이지만, 어쩌면 우리의 삶 안에 있는
모습들을 지적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즉, 자기만 아니면 그만이라는
생각, 또한 자신이 불리할 때에는 남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고 때로는
남을 깎아내리는 모습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요즘 현 교황님이신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하신 말씀들을 모아 놓은 책을
읽고 있습니다. 이 책을 보다가 책의 제목이기도 한 이 구절이 크게 와
닿습니다.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됩니다.’
거룩하게 살지 못하게 하고 동시에 사랑의 완성도 이루지 못하게 하는 것이
바로 뒷담화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처음에는 빨아 먹는 캐러멜처럼
좋거나 재밌어 보일 수도 있지만 결국은 우리 자신을 불쾌하게 하고, 우리
역시 망치고 말기 때문입니다. 이 뒷담화가 무엇일까요? 다른 사람들을
험담하는 말이고, 남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말이며, 자신의 불리함을
만회하기 위해 상대방을 깎아내리는 말입니다. 이런 말을 하는데 성인의
길에서 어떻게 가까워질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복음을 보면, 요한의 제자와 바리사이의 제자들과 달리 단식하지
않는다고 비판하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모습을 봅니다. 그들의
비판은 그럴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향한 부정적인 말 그 자체,
즉 뒷담화가 그들의 발목을 잡게 됩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을 감히
비판한 것입니다.
지금도 뒷담화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면서 주님에게서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신선한 공기, 빛나는 태양, 맑은 물, 그리고 친구들의 사랑. 이것만 있거든
낙심하지 마라(괴테).
포용하는 사람(정현천, ‘나는 왜 사라지고 있을까’ 중에서)
결혼할 때 평소 외삼촌처럼 생각하고 존경하던 분이 글씨를 써서 액자에
담아주셨습니다. [수지청즉무어(水至淸則無魚) 인지찰즉무도
(人至察則無徒)] ‘물이 너무 맑으면 물고기가 살지 않고, 사람이 너무
따지면 따르는 사람이 없다.’는 뜻입니다. 당시 20대의 젊은이였던 제겐 이
문구가 마치 “세상과 타협해 편하게 살라.”는 충고 같았습니다. 그래서
액자를 다락에 처박아 두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그분이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그 액자 생각이
나서 포장을 뜯었습니다. 새로 바라본 그 글씨는 예전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적당히 편하게 살라는 소인배를 위한 충고가
아니었습니다. 세상의 많은 것을 감싸고 아우르고 품으라는 호연지기의
충고였습니다. 그분의 참뜻을 20년이 지나서야 깨달은 것입니다.
물은 맑을수록 좋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물이 지나치게 맑아서
먹이가 없고 적을 피해 숨을 곳도 없으면 물고기가 살 수 없습니다.
까다로운 사람보다는 아무래도 너그러운 사람 주위에 사람들이 모이기
마련입니다. 원리원칙만 앞세워 사소한 것까지 따지고 단죄하려 들면
사람들은 등을 돌리게 됩니다. 특히 깨끗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도를
지나쳐서 남을 차별하고 적대시하는 데까지 나아가면 그것은 독극물과
같이 위험합니다. 남들에게만 상처를 입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심각한 해를 끼치게 됩니다.
이 글을 보면서 사람들과의 관계들을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무조건
반대하고 단죄하려 했던 내 자신의 작은 마음 역시 반성하게 되네요.
원리원칙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랑의 완성이 중요합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미리 심판하지 마십시오.
2014년 가해 9월5일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 그들도 신랑을 빼앗기면 단식할 것이다. >
복음: 루카 5,33-39
< 미리 심판하지 마십시오 >
모세는 80세 때 하느님으로부터 파견을 받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손아귀에서 빼내오라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임을 잘 압니다. 그래서 파견하시는 분의 이름을
알려달라고 합니다. 그분의 이름을 대면 그들이 파견된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모세를 받아들이지 않음은 곧 그를
파견한 하느님을 밀쳐내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당신의 이름을
가르쳐주십니다.
파견하시는 하느님의 이름은 바로 ‘나다’입니다. ‘나’는 한 명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말은 거부하는 우리 각자 마음의 자아, 즉 ‘나’를 버리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우리 안에서 새로운 주인인 ‘나’가 되겠다는
말씀입니다. 자아가 강해 버리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은 하느님께로부터
파견된 이를 받아들이려하지 않습니다.
교구청에서 근무하다보니 본당 신부님에 대해 불평을 토로하는 전화가
많이 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떤 신자들은 심한 말까지 써가면서 그런
사제를 왜 자신의 본당에 보냈느냐고 윽박지르기까지 합니다. 사제가 너무
자기 뜻대로만 하고 권위적이란 이야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민주주의처럼 교회의 주인인 본당 신자들이 결정한 것을 사제들이 따르게
해야 평등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진정 그런 민주주의가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걸맞은 모습일까요?
교회가 민주적으로 되면 오히려 더 많은 분열이 일어납니다. 개신교 같은
경우 목사들의 권위가 낮으면 낮을수록 더 많은 분파로 분열되는 현상을
보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뽑으실 때나 사도들을 뽑으실
때 당신 스스로 하신 것입니다. 그래야 당신 대리자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비록 완전한 사람들은 아닐지라도 주님께서 뽑으셨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순명하고 따르며 지금까지 가장 큰 종교의 위엄을 지켜온 것입니다.
코린토는 바오로파, 아폴로파, 베드로파, 그리스도파 등으로 분열되고
있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교회 안의 분열을 조장하는 세력들이 항상
존재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가 파견된 사도들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가져야 한다는 뀜으로 교회를 분열시킵니다. 그것이 자신들이
교회의 주인이 되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바오로는 어떻게 해서든 그들의 분열을 막고 하나 된 교회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에서 분열의 원인은 바로 신자들이
그리스도로부터 파견 받은 이들을 ‘하느님의 신비를 맡은 관리인’으로
생각하지 않고 판단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바오로는
파견 받은 이들을 판단하지 말라고 합니다. 자신을 심판하시는 분은
주님이신데 자신에 대해 신자들이 이렇게 저렇게 판단하다보니 파가
나뉘게 되는 것이란 의미입니다. 바오로를 싫어하면 아폴로에게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양이 어떻게 목자를 선택할 수 있겠습니까? 목자 또한
파견 받는 것이고 양들 또한 그 파견하신 분이 보내주신 목자에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파견된 사람을 받아들이는 이가 파견하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베드로를 선택하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나의
생각이 옳으니 그런 사제는 쫓아내고 다른 사제를 세우자고 말하는 이들을
조심하십시오. 그들의 헛되고 교만한 지혜가 교회를 분열시키고 많은
영혼을 잃게 만들 것입니다. 사제들은 하느님께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미리 심판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오늘 독서의
가르침입니다.
“사제의 입술은 지식을 간직하고 사람들이 그의 입에서 법을 찾으니 그가
만군의 주님의 사자이기 때문이다.”(말라 2,7)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담당 전삼용 요셉 신부 -
◈ [기타] 너무도 아파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우리의 신앙은 선과 옳음을 향한 열망이자 실천이어야 합니다.'
2014년 가해 9월5일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루카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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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당신의 마음에 저희 사는 모습이 참 마음에 안 드시지요?
제 눈에도 그러니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습니까? 당신의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가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한다고 고백하셨지만, 우리는 참 어쩔 수
없는 탕자들인가 봅니다.
죄송합니다, 하느님. 그래도 저희는 알고 있습니다.
당신께서는 결코 저희를 포기 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것을. 소돔과 고모라가
단 열 명의 선한 이들을 찾을 수 없어 멸망을 맞이하였다 하지만, 그래도
선하고 아름다운 이들이 많이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어차피 삶은 악과의 싸움입니다.
선한 마음을 가진 이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들에게 힘을 주십시오.
악의 방법이 아니라, 당신께서 보여주신 당신의 방법으로 악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허락하소서. 당신이라는 가장 큰 용기와 힘을 믿고,
당신께서 소개하신 세상을 희망하며 악의 힘을 이길 수 있게 하소서.
하느님, 비겁도 배신도 그리고 거짓도 저희 안에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바보 멍텅구리 같은 저희의 모습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당신의 모든 것이 옳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따르게 해주십시오. 베드로의 약함을 반석으로 만들어주신 것처럼,
저희 안에도 약함을 선택하시고, 강함으로 일으켜 세우소서.
하느님, 너무도 아파하는 이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서울] 하늘의 뜻을 어기는 미련한 짓
2014년 가해 9월5일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 그들도 신랑을 빼앗기면 단식할 것이다. >
복음: 루카 5,33-39
하늘의 뜻을 어기는 미련한 짓
인간이 세운 굴레로 자연의 흐름을 막는 것은 뒤바뀐 게 아닐까요?
홍수가 밀려오는데도 캠핑가기로 했다며 막무가내로 진행해야 될까요?
이런 잘못으로 종종 인재가 크게 일어나 엄청난 손해를 봅니다.
사람 몸도 매일 진수성찬 고급요리만 먹어대면 몸이 버티어내지 못합니다.
자연의 순리 앞에 인간의 감정이나 모자란 지식으로 대항하면 안 되지요.
인간이 만든 굴레로 하늘의 뜻을 어기는 미련한 짓, 현인들은 압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으냐? (루카 5,34)”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청주] 불을 위하여 등잔이 있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9월5일 연중 제22주간 금요일(루카5,33-39)
< 그들도 신랑을 빼앗기면 단식할 것이다. >
복음: 루카 5,33-39
불을 위하여 등잔이 있다.
새것과 헌 것은 충돌하게 마련입니다. 헌 것이 다 나쁜 것도 아니고 새것이
다 좋은 것만도 아닙니다. 그것이 어떻게 쓰이느냐가 중요합니다. ‘등잔을
위하여 불이 있지 않고 불을 위하여 등잔이 필요한 이치’입니다. 단식은
슬픈 일이 있어서, 뜻이 있어서 합니다. 슬픈 일이 없는데, 오히려
기뻐해야할 날에 단식을 하는 것은 그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단식은 단순히
밥을 굶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목적을 분명히 해야 단식의 의미가
살아납니다. 묵은 것이 좋다하더라도 새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는
항상 준비되어있어야 합니다. 또한 새것은 묵은 것을 함부로 무시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루카5,37-38).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자신들의 전통과 아집, 지식
때문에 다른 것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하신 말씀입니다. 새 시대가
왔으면 새 시대에 걸 맞는 좋은 것을 시행해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렇다고 과거의 모든 것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옛 것은 디딤돌이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인다면 더 큰 성장과
발전을 가져옵니다. 그러나 옛 것에 안주하여 마치 내 것이 전부인양
생각한다면 후퇴하는 것입니다. 나이든 사람들이 쉽게 노여움을 타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여러 이유가 있지만 자신의 삶의 경륜과 지식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말에 동조하고
아첨하는 사람만 좋아하는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열려 있어야 합니다.
사목자들이 소이 구교신자들이 많은 지역에서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그곳에는 성직자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남다르기도 하지만 아주 고집스런
분들이 많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성직자 수도자들의 부모나 친인척이 많아
어느 신부도 알고, 어느 수녀도 알고, 누구는 예전에 어떻게 했는데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다는 등 말도 많고 아는 것도 많은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일수록 정작 본인은 새 영세자만도 못한 신심을 가지고
있고 자신의 틀 안에 갇혀서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분의 경륜을
보아서는 모두를 품을 것 같은데 그 속이 밴댕이요, 좁쌀입니다. 예전에
비해서 많이 물러졌다고 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거룩하고 엄격한 삶을 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순간마다 새로워져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도 배려하면서 믿음의 쇄신을
이루어야 합니다. 성 아우구스띠노는 어머님께 말했습니다. “여인이여!
당신이 전에 부르던 아우구스띠노는 이미 죽었고, 지금의 나는
그리스도님과 함께 사는 아우구스띠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참 변화라는 것은 영적인 몸으로 변하는 것이고 그리스도님의 수난의
모습을 닮는 것이요, 영광으로 변하는 것입니다”(성 아타나시오). 새로운
가르침은 새로운 틀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모든 새로운 가르침은 “다시
근본으로 돌아가는 가르침”입니다. 시련과 역경, 모든 혼돈 속에서 다시금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실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밥을 굶기 위한 단식을
하지 말고 근본을 회복하는 단식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서울]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2014년 가해 9월5일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 그들도 신랑을 빼앗기면 단식할 것이다. >
복음: 루카 5,33-39
지난 8월 누가 다녀갔습니까? 예 교황님께서 다녀가셨습니다. 많은 분들이
교황님과 함께 했던 시간들이 무척 행복했다고 말씀하십니다. 교황님께서
우리들에게 사랑의 약을 나누어 주셔서 우리 모두가 치유되는 느낌을
받았다고 합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던 고등학교 동창도 제게 전화를
하였습니다. 교황님 너무 멋지다고 하였습니다. 동창인 제가 사제인 것이
자랑스럽다고 하였습니다. 천주교 신자인 것이, 성소후원회 회원인 것이
자랑스럽고, 행복했던 시간들이었나요? 특히 이번 광화문 시복식에는
400명의 성소후원회 회원들이 봉사를 하였습니다. 새벽에 광화문으로
나오셨고, 성체 분배가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봉사하셨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서 수고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사람들은 늘 건강하기를 바라지만, 나이가 들면 조금씩 아픈 곳이 생기게
됩니다. 저도 몇 가지 친한 병이 있습니다. 제가 ‘통풍’하고 친하게 지낸
것이 9년쯤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지만, 증상은 발가락 끝이
따끔거리고 심하면 잘 걷지 못합니다. 약을 먹으면 증상이 씻은 듯이
없어지는데 약을 먹으면 약에 취해서 힘들 때가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혈압도 있어서 혈압 약은 20년째 먹고 있습니다. 또 있습니다. 잇몸이 좋지
않아서 갈비나 조금 질긴 음식은 거의 먹지를 못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있습니다. 염색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하얀 머리카락이 많습니다.
다 원하지는 않았지만 오랜 시간 저의 친구들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그러려니 하고 지냅니다. 몸이 아픈 것은 약도 있고, 운동을 하고 관리를
잘 하면 건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저는 미사시간 전에 고백성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고백소에 들어가려하는데
한 자매님께서 이렇게 질문을 하였습니다. ‘신부님! 주일 미사 빠지면
그때마다 고백성사를 봐야 하나요?’ 저는 그 질문을 받고 잠시 생각을
했습니다. 신앙이란 과연 무엇일까? 근본적인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신앙이 나를 구속하고, 신앙이 나를 불편하게 하고, 신앙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못하게 막는 것일까? 신앙이 나에게 죄의식을 심어주고, 신앙이 나를
두려움과 공포로 가두어 두는 것일까?
우리는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갑니다. 의사는 처방전을 주고 우리는 돈을
주고 약을 먹습니다. 매번 아플 때마다 우리는 아무런 불평과 불만이 없이
돈을 주면서 약을 먹습니다. 우리의 몸을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건강을
위해서입니다. 병원에 가지 않으면, 약을 먹지 않으면 몸이 더 아프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몸이 아프지 않도록 평소에 운동을
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몸이
건강하면 굳이 병원에 갈 필요가 없습니다. 돈을 주고 약을 먹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등산을 하고, 적당한 휴식을 취하고,
즐겁게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우리를 억누르고, 우리를 구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신앙은 우리 안에 맺힌 것들을 풀어주는 것입니다. 오늘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해서 판단을
내리고 있습니다.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지냈다면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았다면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 가지고 제자들을 판단하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에게는 신앙은 삶을
구속하고, 죄의식을 심어주는 것들이었습니다. 이는 또한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부부가 갈등을 일으키는 많은 경우도 미리 판단하고
의심하기 때문입니다. 절친했던 친구가 갈라지는 경우도 충분히 듣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만 들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새 술은 새 부대에 남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참된 신앙은
이해와 용서, 인내와 관용이라는 그릇에 담아야만 더욱 빛을 낼 것입니다.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도회]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9월5일 연중 제22주간 금요일(순례17일차),
1코린4,1-5 루카5,33-36
< 그들도 신랑을 빼앗기면 단식할 것이다. >
복음: 루카 5,33-39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형제 여러분, 누구든지 우리를 '그리스도의 시종'으로, '하느님의 신비를
맡은 관리인'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바오로의 자부심이 대단합니다.
참 자존감 높고 존재감 강한 바오로입니다.
어제는 순례17일차, 산토도밍고에서 벨오라도까지 22.4km,
아침 6:20분에 출발하여 2번 쉬고 11:30분, 너무 빨리 도착했습니다.
갈수록 가속도가 붙는지 주변을 감상하며 걸어도 빠른 걸음이니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몇몇 깨달음의 예화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참 넓은 자급자족하고도 넘치게 남을 축복 받은 스페인입니다.
나라 전체가 역사 박물관 같고 잘 가꿔진 정원 같습니다.
버려진 땅이 없어 버려진 사람도 없어 보입니다.
낙천적이고 정열적이며 부지런한 민족 같습니다.
어디나 비슷한 모습으로 널려 있는 드넓은 밭입니다.
그동안 모르고 썼던 말이 너무 많습니다.
새삼 깨닫게 되는 많은 말마디입니다.
예를 들면 양냄새, 지평선, 순례자, 도반, 여정, 길 등 수없이 많습니다.
양무리 곁에서 물씬 풍겨나는 양냄새를 맡으면서 교황님의 양냄새 나는
목자의 의미를 알았습니다.
그동안 말한 것을 몸으로 깨달아 알라고 하느님 주신 안식년
순례기간입니다. 깨달아 알면 지혜와 힘이 되지만 그렇지 못하면 지식의
짐이 되어버립니다. 마치 먹고 가면 넘치는 힘으로 가뿐히 갈 수 있는
음식물의 짐을 먹지 않고 지고 가는 경우와 흡사합니다.
맑은 공기, 밝은 햇살, 파란 하늘과 땅이 맞닿은 아득한 지평선을 배경한
대지가 흡사 제대 같습니다. 길 양편에는 수확이 끝난 밀밭이고 한쪽은
포도가 주렁주렁 달린 포도밭이니 그대로 대지 제대 위에 놓여있는 빵과
포도주의 상징입니다.
'아, 주님은 일상의 싸고 흔하나 필수적인 것을 당신 몸과 피로 삼으셨구나'
깨닫게 됩니다. 문득 예수님과 함께 대지 제대 위에서 하느님께 미사를
봉헌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나는 움직이는 수도원이고 움직이는 교회이다. 내 안에 숨어 계신
주님이시다. 바로 이것이 내 자존감, 존재감의 비밀이다.'라는 깨달음도
힘이 됐습니다.
사정상 먼저 귀국한 도반의 카톡 메시지도 새로운 깨달음이었습니다.
"신부님, 무사히 귀가했습니다. 먼저 혼자 오니 죄송합니다."
순간, '아, 나는 집이 없네. 어디로 가지'라는 생각과 더불어 산티야고가
상징하는, 우리 평생 순례의 최종 목적지인 '하느님'이 떠올랐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새들도 둥우리가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 조차 없다는
예수님 말씀이 마음 시리게 와 닿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이 고향집입니다.
지상의 집이 영원히 머물집이 아님은 죽음을 통해 담박 들어납니다.
이런 생각이 드니 하느님이 더욱 그리워졌습니다.
이런저런 깨달음이 자존감 높은, 존재감 강한 겸손한 삶을 살게 합니다.
이런 이들은 남을, 자신을 심판하지도 않고 주변의 심판에도 개의치
않습니다.
바오로가 그 좋은 모범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심판을 받든지 세상 법정에서 심판을 받든지,
나에게는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나도 자신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나를 심판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미리 심판하지 마십시오."
바오로처럼 자존감, 존재감 좋은 이들은 결코 남을, 자신을 심판하지 않고
주님께 맡깁니다. 그분께서 오실 때 어둠 속에 숨겨진 것을 밝히시고,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길 것이며, 그때에 우리는 저마다 하느님께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자존감, 존재감 약하고 열등감 클 때 질투와 시기에
무분별한 심판입니다. 사사건건 붙잡고 늘어집니다. 바로 복음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그러합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
자존감, 존재감이 최상의 경지에 이른 예수님의 대응이 참 통쾌하고
멋집니다. 적절한 비유를 통해 이들의 예봉을 무력하게 합니다.
비유의 결론인즉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매일 새롭게 선사되는 새 포도주의 무수한 새 현실들을 담아내기에도
부족한데 심판할 시간이 어디있겠는지요.
오히려 깨어 새포도주를 담아낼 수 있는 새 부대의 자존감, 존재감을
높이는데 노력할 것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자존감, 존재감 높은
삶을 살게하십니다.
"주님, 거룩한 잔치에서 천상 진미로 저희를 기르시니,
참 생명을 주는 이 양식을 언제나 갈망하게 하소서."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 [인천] 성실한 사람
2014년 가해 9월5일 연중 제22주간 금요일(코린토 1서 4장 1~5절)
<주님께서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1코린 4,1-5
< 그들도 신랑을 빼앗기면 단식할 것이다. >
복음: 루카 5,33-39
오늘 독서 앞 부분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무릇 관리인에게 요구되는 바는 그가 성실한 사람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읽으면서 그렇지 않은 저의 몇 가지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첫 번째는 미루다가 정말 필요한 때에 함께 해 주지 못했던 모습입니다.
두 가지인데요. 하나는 프랑스에 연수를 갔다 와서 일입니다. 연수를 가기
전에 암 말기셨던 모니카 할머님을 찾아 가 인사를 드렸었습니다. 평소에
눈물을 보이지 않으시던 할머니였는데 그 때는 고향 생각이 난다며 많이
우셨습니다. 한참 그러고 있었는데요.
누워서 우시다가 문득 그런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저쪽 벽에 십자고상에
걸려 있지 않은 것이 많이 아쉬워...’ 그 얘길 듣고 제가 외국 갔다 와서 하나
사다 드린다고 이야기를 드렸는데요. 외국에 갔다 와서 이런저런 일에 쫓겨
다니며 바쁘다는 핑계로 찾아뵙지 못하고 몇 주 뒤에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한 주 한 주 미룬 것이 결국 할머니를 그렇게
보내게 된 거 같아 마음이 아팠던 기억이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미카엘 형제님을 보지 못하고 보내드린 겁니다. 올 해 몸이
아주 빨리 안 좋아지셨던 거 같습니다. 병원에 다니시다가 입원까지 하시게
된 거 같은데요. 같이 사시는 자매님으로부터 문자가 왔습니다. ‘형제님이
병원에 계신데, 신부님을 많이 보고 싶어하세요...’ 그런데 그 때 바로
찾아가보지 못했습니다. 삼일 뒤에 주일 미사를 다 마치고 병원에 가서
전화를 드렸더니 병실에 계시지 않더라고요. 그 날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문상을 하고 다시 다음 날 와서 장례미사를 했었는데요. 돌아
나오면서 ‘정말 중요한 일을 미루면 안 되는구나.. 너무 죄송하다..’ 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최근에 있었던 일들이 그렇게 느껴지네요. 말이 없어지고 화에
사로잡혀 있으려고 했던 모습입니다. 하나는 지난번에 엠이를 다녀오면서
일입니다. 오는데 형제님이 차를 제 생각에 빨리, 그리고 험하게
운전하셨던 거 같습니다. 그럴 때 저도 모르게 ‘천천히 가세요~’ 하는 말이
튀어나올 때가 있습니다. 예전에 교통사고가 나고 나서 차가 빨리 달리면
몸이 무서움을 느끼는 거 같습니다. 그래서 몇 번 표현을 했는데 안
들으시더라고요.
그러면 ‘이 분은 내 말을 안 들으시는구나...’ 하면 되는데 순간 자존심이
뻗대고 화에 사로잡혔었습니다. 그래서 환영식도 망치고 싶고,
‘나 화났어~’ 하고 그냥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들어가진 않았지만 말도 안
하고 무표정으로 밥을 먹었는데요. 그 모습이 신자들을 대하는 데에 있어서
불성실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성실한 모습은 표현은
확실히 하고, 그분의 행동에 상관없이 나를 맞이해주는 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밥을 맛있게 먹으며 대화를 나누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른 하나는 오늘 가게 축복을 가서 보였던 제 모습입니다. 집 축복을
가는데 마음이 약간 불편했습니다. 작은 일들이 신경 쓰여서 마음이 편치
않았는데요. 마음이 편치 않고 걱정이 있다 보니까 말하기도 싫더라고요.
조용히 먹고 있는데 또 다른 일이 다가옵니다. 더 말하기가 싫어집니다.
그 순간 마음속에 앞에 계셨던 형제님이 술 먹고 한 이야기가
떠오르더라고요. ‘신부님은 강론 때는 얘기를 잘 하시는데, 평소에는
말씀이 너무 없어~’ 그게 좀 불편하셨던 거 같은데요. 그 자리에서도 그런
느낌을 드리지는 않았나... 다가가고 관심을 가지고 대화해야 하는 일에
불성실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그 자리에서 요구되는 성실함을 살아내고
계신가요? 그렇지 못한 모습들이 떠오른다면 다시 노력해 봅시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각자의 자리에서 성실하게 살아가길 바라십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엠이를 갔다오는데 한 형제님이 무서운 후배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신다.
노래 시키면 노래 모른다고 ‘선배님이 먼저 불러보세요~’ 한다든지,
화가 나서 차에서 내려버리는.. 그래서 오히려 타라고 달래야 하는..
무서운 후배들이 있다고 한다. ^^;
- 인천교구 대부동 성당 김기현 세례자 요한 밤송이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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