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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가해 9월8일 한가위
[청주] 멍절이 아닌 명절이 되기를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제1독서 요엘 2,22-24.26ㄱㄴㄷ
† 제2독서 묵시 14,13-16
† 복음 루카 12,15-21
오늘은 우리 민족의 큰 명절인 한가위입니다. 인간의 수고에 답하여 풍성한
결실을 내어 주는 자연의 고마움에 우리 또한 넉넉한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리고, 비록 가난할지라도 가진 것을
인심 좋게 나누었던 조상들의 풍요로운 마음을 기억하며 참된 나눔의
성찬인 미사에 기쁘게 참여합시다.
★ 요엘 예언자는 주님께서 하신 일들을 찬양하며 시온의 자손들에게 주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라고 한다. 주님께서 비를 내려 주시며
수확물로 넘치게 하여 한껏 배불리시기 때문이다(제1독서).
★ 주님 안에서 죽는 이는 행복할 것이니 이제 그들의 고난은 지나고 안식을
누릴 것이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낫을 들어 수확할 때가 온 것이다(제2독서).
★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위해서만 재화를 모으고 하느님께는 인색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그는 많은 소출을 쌓아 둘 곳간을
새로 짓겠다는 달콤한 생각을 하지만, 그날 밤 그의 목숨을 주님께서
거두어 가실 것이니 아무 소용이 없다(복음).
◈ 오늘의 묵상
추석은 하느님께 감사하고 진정 풍요로운 인생이란 무엇인지를 성찰하며
마음을 채우는 날이기도 하지만 맛깔스럽고 푸짐한 추석상에 둘러앉는
날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나누는 가족의 정담은 한 해의 시름을 잊게
합니다.
이 민족의 명절에 덴마크의 소설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두 차례나 노벨상
후보로 올랐던 이자크 디네센의 단편 소설 『바베트의 만찬』입니다. 이
이야기는 작가의 그리스도교적 영성과 예술가의 소명에 대한 원숙한 성찰,
그리고 여성의 섬세함이 잘 조화된 작품입니다.
주인공 바베트는 프랑스 혁명의 광풍 속에 노르웨이의 시골 마을로 몸을
피한 프랑스의 한 여인입니다. 그녀는 착하게 살아가는 어느 두 자매의
하녀이자 요리사로 지냅니다. 알 수 없는 베네트의 과거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충실함과 깊은 인품은 점점 바닷가 작은 마을 사람들의 신뢰와
사랑을 자아냅니다. 많은 세월이 흐른 뒤 그녀가 프랑스에서 어마어마한
금액인 1만 프랑의 복권에 당첨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사람들은
축하하면서도 그녀가 고향으로 돌아가리라고 슬퍼합니다.
바베트는 ‘열두 명’의 이웃을 위하여 ‘마지막 만찬’을 준비합니다. 그날의
식탁은 사람들이 상상하지도 못했던 황홀한 음식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녀는 사실 프랑스 제일의 식당 ‘카페 앙글레’의 일급 요리사였던
것입니다. 혁명의 와중에 가족도, 친구도, 명예도 잃고 무명의 망명객이 된
바베트는 이제 자신을 환대한 이들에게 일생의 만찬을 대접합니다.
참으로 행복했던 만찬이 끝나고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며 그녀에게 이제
떠나는지 묻습니다. 베네트는 자신의 소중한 것들은 프랑스에서 이미 다
사라졌을뿐더러 1만 프랑을 이번 만찬에 다 썼기에 그대로 남을 것이라고
답합니다. 또한 그 큰돈을 어찌 다 쓸 수 있었는지 묻는 사람들에게 그녀는
이렇게 답합니다. “카페 앙글레에서는 12인분 저녁 식사 재료비가 1만
프랑이에요.”
바베트가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한 그날의 저녁은
인생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아름다운 상징이라 할 것입니다. 이는
성체성사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한가위의 풍성함을 누리면서 우리와
이웃을 행복하게 하는 진정한 풍요로움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 매일 미사 -
◈ [인천] 한가위
2014년 가해 9월8일 월요일 한가위
<사람의 생명은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 루카 12,15-21
한 농부가 아들을 데리고 밭에 나가 밭갈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들과 아버지의 밭고랑은 커다란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쟁기를
잡고 소를 몰아 갈아놓은 밭고랑은 똑바른 것이 보기에 아주 좋았지요.
하지만 아들이 소를 몰고 간 밭고랑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들은 아무리
똑바로 밭을 갈고 싶었지만 도대체 잘 되지 않아 아버지께 물었지요.
“아버지, 저도 아버지처럼 밭고랑을 똑바르게 갈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는지요?”
아버지는 “밭을 갈 때는 먼저 목표를 정하고 소를 몰아야 한다.”라는
간단한 답만 가르쳐주신 뒤에 다시 자기 할 일을 하십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다시 쟁기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어디를
목표로 삼을 것인지를 따져보았지요. 그런데 막상 목표를 정하려고 하자
눈앞에는 황소의 등과 커다란 뿔만 보이는 것입니다.
아들은 눈앞에 보이는 황소의 커다란 뿔을 목표로 정하고 소를 몰았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밭고랑은 똑바로가 아닌 삐뚤삐뚤 어지럽게 갈렸지요.
아버지는 이 모습을 보고는 아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움직이는 소뿔은 목표가 될 수 없다. 언덕 위에 서 있는 저 미루나무를
목표로 해라.”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그대로 따랐고, 그제야 밭고랑이 제대로 똑바르게
갈리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보면서, 어디를 목표로 삼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혹시
움직이는 것, 금방 없어지고 말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을 나의 목표로
삼으면서 삐뚤삐뚤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나의 목표는 오직
주님뿐이어야 합니다. 주님만이 움직이지 않는 분, 불변의 진리 그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우리 민족의 큰 명절인 한가위입니다. 풍성한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도와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리고, 동시에 나를 있게끔 해 주신
조상님을 기억하는 날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우리는 과연 어디에
목표를 두면서 살고 있었는지를 반성하게 됩니다. 주님의 은혜와 조상님께
감사의 마음을 갖지 않기에 주님의 뜻에 맞게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위해서만 재화를 모으고 하느님께는
인색한 어리석은 부자 비유 말씀을 하시지요.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자기 자신을 위해 새로 짓는 곳간이 결국은 자기를 위한 것이 되었을까요?
한가위인 오늘, 내 자신의 목표를 다시금 새로 매겨야 할 것입니다.
삐뚤삐뚤한 삶을 살도록 하는 목표가 아닌, 전혀 흔들리지 않고 똑바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주님의 뜻에 우리의 목표를 맞춰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먼 훗날 주님 앞에 섰을 때 떳떳할 수 있으니까요.
인생은 양파와 같다. 한 번에 한 꺼풀씩 벗기다 보면 눈물이 난다
(칼 샌드버그).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
책을 보다보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이러한 사람이라고 하네요.
“자기가 하고 싶은 일과 해야만 하는 일과 하고 있는 일치 하는 사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해야만 하는 일도 떠올려
봅니다. 또한 지금 하고 있는 일도 따져 봅니다. 어떠세요? 이 세 가지가 다
일치한다면 행복한 사람이라고 하지요.
생각해보니 저는 정말로 행복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솔직히 하고 싶은 일,
해야만 하는 일, 그리고 하고 있는 일이 일치하고 있으니까요. 물론 약간
부족한 것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방향은 모두 일치하고 있기
때문에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것을 떠나 더 많은 것에 욕심을 갖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때로는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려하고, 해야만 하는 일을 소홀히 하기도
합니다. 또 지금 하고 있는 일 역시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서 행복을 스스로
걷어찰 때가 얼마나 많았을까요?
지금의 자리가 가장 행복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위해 최고 자리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기타]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서울] 한가위
2014년 가해 9월8일 월요일 한가위
<사람의 생명은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 루카 12,15-21
추석입니다.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들 보내고 계시는지요? 여성분들은 음식
준비를 하시느라 바쁘실 것입니다. 남성분들은 모처럼 가족들과 만나서
한잔 하시느라 즐거우실 것입니다. 남성분들이 설거지를 도와 드린다면
더욱 행복한 추석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가족들이 모여서 윷놀이,
고스톱을 하는 것도 좋지만 모처럼 대화를 나누고, 시간이 있으면 책을
읽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어떤 책을 읽으면 좋을까요?
‘공감의 시대, 총 균 쇠’도 있습니다. 인문학에 대한 소양을 넓힐 수 있을
것입니다. ‘제3인류, 종이 여자’도 있습니다. 프랑스 소설가들의 참신함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제노사이드, 13계단’도 있습니다. 일본 소설가의
섬세함을 맛볼 수 있습니다. ‘수메르, 지구 연대기’도 있습니다. 인류의
여명기를 돌아 볼 수 있습니다. ‘민족 생활의학, 사람을 살리는 단식’도
있습니다. 건강한 몸은 역시 건강한 마음이 있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텔레비전도 추석 연휴를 즐기는 좋은 친구가 될 것입니다. 교황님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셔도 좋고요. 추억의 명화를 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텔레비전 편성표를 보시고, 마음에 드시는 것을 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영화를 보는 것도 좋습니다. 모처럼 가족들이 함께 영화를 보고,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도 있습니다.
행복은 무엇일까요?
하고 싶은 일을 좋아하는 것이 행복은 아닐 것입니다. 행복은 어쩌면 해야
할 일을 좋아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쌓아야 할 결실은 재물만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쌓아야 하는 결실이 눈에 보이는 재물과 돈만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의 창고에 사랑을 쌓아야 합니다. 희생과
봉사를 쌓아야 합니다. 나눔과 기도를 쌓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눈에
보이는 재물과 돈을 원칙과 기준으로 삼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들에게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오늘 제 2독서는 그래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우리의 진정한 행복은 재물을 많이 모으고 물질적으로 성공하는 것에 있지
않음을 이야기 합니다. 주님을 섬기다 죽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신앙인에게 원칙과 기준은 바로 그것입니다.
모든 재물과 물질의 진정한 소유주는 바로 하느님이심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섬긴다는 것은 우리가 가진 재물과 물질을 이웃과 나누며 우리
마음의 창고에 사랑과 희생 그리고 나눔과 섬김을 쌓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추석을 맞이하면서 무엇보다도 조상과 하느님께 감사드릴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겠습니다. 풍요와 여유로움의 이면에는 땀 흘리는 노력과
수고가 있었음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겠습니다. 아울러 말뿐인
사랑보다는 행동으로 이루어지는 사랑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 추석이 감사와 고마움의 축제가 되고, 풍요와 기쁨의 축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멍절이 아닌 명절이 되기를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9월8일 월요일 한가위 추석 명절미사
<사람의 생명은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 루카 12,15-21
명절의 의미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허물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십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은혜가 넘쳐나길 기도합니다. 아울러 우리
보다 앞서 세상을 떠난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비로 천상행복을 누리시길
기원합니다. 명절을 맞이한 여러분의 가정에 하느님의 은혜로 기쁨과
평화가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명절의 의미는 무엇보다도 ‘만남’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먼저
하느님과의 만남을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받는 만물의
영장입니다. 하느님께 나는 언제나 최고의 존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우리 인간에게 모든 것을 관리하고 다스리도록
맡기셨습니다.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활용하여
사용하는 것입니다. 시간, 탈렌트, 지식, 재물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수고와
땀이 배어있지만 하느님께서 먼저 그 바탕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기뻐하시고 마음에 들어 하시는지를 생각하며 세상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잘 써야 합니다.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사랑,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세상이
맑고 밝게 보입니다. 더 큰 축복을 만나게 됩니다.
두 번째는 조상님들을 만납니다. 조상들을 기억하고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날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오늘의 나를 있게 한 혈육의 조상뿐
아니라 천상의 삶에 눈을 뜨게 한 신앙의 조상들도 기억합니다. 조상과
부모님께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는 데 명절의 의미가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보다 앞서 세상을 떠난 이들을 기억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로 천상에서
영원한 삶을 누리시길 기도합니다. 그분들의 삶의 모범과 표양을 만나고
본받게 됩니다. 혹시라도 상처받고 힘든 것이 있었다면 용서를 베풀어
자유를 허락해 드리고 부족했던 모든 것에 용서를 청하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생명의 근원이신 부모의 은혜에 대한 보은에 남다른 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조상들은 부모에 대한 효의 실천은 세 가지
양상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첫째가 부모로부터 받은 신체를 잘 보전하여
후손에게 길이 전해야 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벼슬길에 올라서 부모의
이름을 드높여 부모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를 정성껏
봉양하고 공경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부모님을 정성껏 봉양하고 효도함은
돌아가신 후에도 제사를 통해서 계속되었습니다.
그것은 죽음으로써 생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형태로든지 생이
계속됨을 믿었고 살아계실 때와 같이 가족공동체와 계속적인 유대 관계를
유지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제사는 죽은 이들을
계속 공경함으로써 효도를 이어가는 방법이며 결국 제사의 의의는 은혜를
기억하고 상기하며 어떻게든 갚고 싶은 마음을 간직하며 그 사랑을
이웃에게 향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하느님의 계명과 아무 마찰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님이나
조상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절을 하고 예를 드리는 것은 신앙에 위배되지
않습니다. 이는 죄나 우상숭배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 천주교회의 전통적인 제사는 무엇입니까? 미사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 아버지께 온전히 바치신 십자가의 죽음을
제사로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리고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하시며 이 제사가 계속 이어지기를 명하셨습니다. 명절에는 특별히 세상을
떠난 이들을 기억하며 아직 천상의 영복을 누리지 못하는 이들, 연옥에
계시는 분이 있다면 우리의 기도와 희생으로 하루빨리 하느님나라에 갈 수
있게 기도해야 합니다. 위령미사는 바로 교회공동체가 한마음으로 세상을
떠난 분들을 위해 자비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주 미사봉헌을 하여 효를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아니면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여 고유한 미풍양속인 제사를 봉헌하며 세상을 떠난
조상이나 부모, 형제를 위해 기도하는 시간을 꼭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는 형제, 친척, 이웃을 만나고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으며 사랑의
정을 키우는 날입니다. 아무쪼록 지금 내가 여기에 있음을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날의 시대는 자녀의 출산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형제애를 찾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형, 누나, 언니, 삼촌
이라는 말도 머지않아 없어질 처지입니다. 자녀의 출산이 많아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웃과의 만남이 더욱 확장되어야 합니다.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인
삶은 바로 저 출산 가정에서 비롯됩니다. 하느님 안에서 형제자매의 관계가
더욱 넓어지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12,50).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을 행함으로써 형제자매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사후황금주북두, 불여생전일배주”라는 말이있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술과 안주를 북두칠성까지 쌓아놓는다 해도, 살아생전의 한 잔 술만
못하다“라는 뜻입니다. 돌아가신 조상들을 생각하는 마음 못지않게
살아계신 부모, 웃어른, 친척들에게도 도리를 다 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과 조상님들, 부모와 친척, 이웃과의 만남의 관계를 어떻게 맺고
있는가를 돌아보고 보다 더 친밀한 사랑의 관계형성을 위해 정성을 쏟는
기쁨의 명절이 되길 희망합니다. 마음의 거리를 좁히는 명절, 소통과
공감이 함께하는 명절이 되기 바랍니다. 절대, 상처를 주는‘멍절’이 되지
않기를! 사랑합니다.
“정채봉” 시인은 만남을 다섯 가지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가장 잘못된 만남은 생선과 같은 만남이다
만날수록 비린내가 묻어나니까
가장 조심해야 할 만남은 꽃송이 같은 만남이다
피어 있을 때는 환호하다가 시들면 버리니까
가장 비천한 만남은 건전지와 같은 만남이다
힘이 있을 때는 간수하고 힘이 다 닳았을 때는 던져 버리니까
가장 시간이 아까운 만남은 지우개 같은 만남이다
금방의 만남이 순식간에 지워져 버리니까
가장 아름다운 만남은 손수건과 같은 만남이다
힘이 들 때는 닦아주고 슬플 때는 눈물을 닦아주니까
여러분은 어떤 만남을 이루고 있습니까? 손수건 같은 만남을 통해 서로에게
힘을 주고 위로를 주며 희망을 안겨 주어야 하겠습니다.
노사연씨의 만남도 있습니다. 노래 한 번 할까요?
&&& 한국천주교 사목지침서에는 “제사의 근본정신은 선조에게 효를
실천하고, 생명의 존엄과 뿌리의식을 깊이 인식하며, 선조의 유지를 따라
진실된 삶을 살아가고, 가족공동체의 화목과 유대를 이루게 하는데 있다”
(제134조1항)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명절을 통한 소중한 만남의 시간을
기뻐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우리나라는 다종교 사회이므로 종교의 신념을
표현하는 제례방법이 다릅니다. 그 다름을 인정해야 하겠습니다. 모처럼
만난 가족들이 서로 자기의 신념을 강요한다면 갈등만 커질 것입니다.
가족 서로 간에 성숙한 사랑이 넘쳐나길 희망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서울] 무형의 영적가치를 높이는 삶
2014년 가해 9월8일 월요일 한가위
<사람의 생명은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 루카 12,15-21
무형의 영적가치를 높이는 삶
일반적으로 삶의 문제 해결은 ‘돈’을 많이 벌면 된다는 걸로 알지요.
‘돈’벌이에 매달려 삶의 방향키를 아예 고정시켜 놓고 산다는 거지요.
돈에 살고 돈에 죽는 것이 세상살이로 규정짓고 더 더 벌려고 하고요.
가정 친척 이웃관계도 돈으로 생각하는 세상을 만드는 건 슬픈 일입니다.
나눔 봉사 희생 사랑 예술 특기 등은 사실 무형의 재산이며 삶의 가치지요.
제발 ‘돈’에 목숨 걸지 말고 무형의 영적가치를 높이는 삶이면 좋겠습니다.
“사람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루카 12,15)”
- 서울 대 교구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 [수원]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루카 12, 15-21)
2014년 가해 9월8일 월요일 한가위
<사람의 생명은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 루카 12,15-21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루카 12, 15-21)
안티오키아의 성 아나스타시우스 주교님께서는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은 죽은 사람과 살아 있는 사람의 주님이 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죽은 사람들의 하느님이 아니시고 살아 있는 사람들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살아 계신 분이 다스리시는 죽은 사람들은 이미
죽은 사람이 아닙니다. 생명이 그들을 다스리시니,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다음에는 다시 죽지 않으시는 것처럼, 이제는 그들도
살아나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도 바오로께서 우리 육신에 대하여 ‘육체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살아난다.’ 하셨습니다. 즉 우리를 앞서가신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변모를 닮는다는 뜻이니 더 말할 필요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사도 바오로께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변화시키시어 당신의
빛나는 몸과 같아지게 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전인류가 그렇게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조상들의 무덤에서 성묘를 하며 영원한 삶에 대하여
생각하여야 합니다.
오늘 요엘 예언자는 “시온의 자손들아, 주 너희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여라. 주님이 너희에게 정의에 따라 가을비를 내려 주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 육신의 먹을 것을 위해서 좋은 날씨를
주셨다는 말씀과 또한 영적인 구원에 필요한 은총을 다 베풀어주셨다는
말씀으로도 들어야 합니다.
또한 “너희는 한껏 배불리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한 주 너희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여라.” 하신 말씀에서 마찬가지로 세상에서 생명에 필요한
은총을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드리며 동시에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은혜에 찬양드리라는 뜻도 됩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묵시록에서 “‘이제부터 주님 안에서 죽는 이들은
행복하다.’고 기록하여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주님 안에서 죽는 이들은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들어가기 때문에 행복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고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은 나그네살이이고 영원한 고향은 하늘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세상의 재화와 명예 쾌락에 탐이 나서 세상에 씨앗을 뿌리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의 즐거움만 얻을 뿐입니다. 그 즐거움마저도 늘 불안하고 씁쓸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씨앗을 뿌리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조상님들을 통해서 우리는 이 자리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조상님들께
감사드리며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 조상들에게 가득하게 내리기를 마음
모아 청합시다. “하느님 저희 조상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또한 하느님께서는 우리 조상들을 창조하시고, 세상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외아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주인이신 하느님, 세상 만물의 주인이신 하느님은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아멘.
- 수원 교구 죽전 윤민재 베드로 희망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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