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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가해 9월10일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서울] 예수님께 하늘 스타일을 잘 배워 살면 -
서울 대 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제1독서 1코린 7,25-31
† 복음 루카 6,20-26
★ 바오로 사도는 혼인 문제를 이야기하며 아내가 있으면 갈라서지 말
것이나, 아내가 있는 이는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세상을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살기를 당부한다. 세상의 형체가 사라질
마지막 때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참행복에 대하여 말씀하시며 불행도 선언하신다.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하다. 하느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우선적 사랑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선언하신 ‘참행복’과 ‘불행’을 듣습니다.
예수님께서 행복한 이들이라고 여기시는 사람들은 하늘 나라의 희망을
안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가치보다 하느님의 나라에 더욱 마음을
두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계명을 따라 새롭게 살아가려면 이처럼 세상 것에 고착되지 않는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가족에 대한 책임, 사회적 관계에 따른 역할을
다하는 하루하루가 때로는 힘겹기도 한 우리에게 이러한 참행복은 너무나
멀고 큰 이상이라는 생각마저 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서,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평범한
일상에서 참행복을 체험하는 새로운 삶이 시작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거창한 일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생각과 관점의 작은 방향
전환을 통해 일상은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귀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자신의 가족에 대한 사랑의 방식과
사회적 책임의 실천을 성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몇 달 전에 보았던 아름다운 장면 하나가 떠오릅니다. 한 할머니가
첫영성체를 준비하는 손녀를 위해 가정을 방문하는 사제 일행을
기다리십니다. 혹시라도 집을 잘 찾지 못할까 염려되어 일찌감치 밖에
나와 기다리신 것입니다. 손녀에게 신앙을, 예수님을 전해 줄 사람을
맞이하는 얼굴은 기쁨이 넘쳐흐르는 모습이었습니다.
우리가 가족에게, 이웃에게, 동료에게 과연 무엇을 간절하게 전해 주고
싶은지 가만히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과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에게, 자신에게 맡겨진 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차 있다면 이미 소박한 일상 속에서 하느님 나라의 행복한
시민의 삶을 시작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 매일 미사 -
◈ [인천] 늘 주님을 필요로 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2014년 가해 9월10일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루카 6,20-26
제가 신학생 때에 등산을 하다가 이런 체험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명절
휴가 때에 선배들과 함께 한 야간 산행이었지요. 처음 하는 야간 산행이라
긴장을 하기는 했지만, 주간 산행과 다를 것이 뭐 있을까 싶었고 또
호기심도 생겨서 야간 산행을 쫓아갔습니다. 제 앞의 사람의 뒤꿈치만을
보면서 따라 올랐지요. 그런데 갑자기 앞 사람을 놓친 것입니다. 딴 생각을
하다가 앞 사람과의 간격이 벌어졌고, 더군다나 제가 있었던 위치는 우리
팀의 맨 후미였기 때문에 제 뒤에 누구도 없었습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기 때문에 무엇 하나 제대로 보이지 않더군요.
순간적으로 덜컥 겁이 났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한 걸음도 움직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잘못 움직였다고 혹시라도 절벽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닐까
라는 공포가 밀려왔거든요. 저는 제 앞에 있었던 선배의 이름을 조그맣게
불렀습니다. 솔직히 창피해서 큰 소리로 선배를 부를 수가 없었지요.
하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는 것입니다. 조금 더 큰 소리로 선배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이번 역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제가 어떻게 했을까요? 저는 아주 큰 소리로 선배의 이름을 외쳤습니다.
그것도 한 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외쳤지요. 저의 외침
소리를 듣고 선배들 모두가 저를 찾아서 내려왔습니다. 그들을 보는 순간
구세주가 따로 없더군요.
간절한 기도의 외침도 이러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렵고 힘들 때
주님께 바치는 기도, 나의 모든 체면과 자존심을 내려놓는 기도, 형식적인
기도가 아닌 주님을 필요로 하는 간절한 기도가 우리에게는 필요한 기도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기도보다는 형식적이고, 내 체면과
자존심을 내세우는 기도를 바쳤던 적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이렇게 간절한 기도를 바칠 수 있는 사람은 주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고,
결국 주님의 응답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어떠할까요? 아무래도 간절한 기도를 바칠 일이 없게 되고, 그렇기
때문에 주님과 함께 하는데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의 구분을 이렇게 하시지요.
먼저 가난한 사람, 굶주리는 사람, 우는 사람, 쫓겨나고 모욕과 중상을 받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부유한 사람, 배부른 사람, 웃는 사람,
사람들의 좋은 평을 받는 사람이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즉, 주님과 함께
하느냐 하지 못하느냐를 따졌을 때에 세상의 관점에서의 행불행이 거꾸로
된다는 것입니다.
늘 주님을 필요로 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기도하는 자세,
특히 형식적인 기도가 아니라 간절한 기도를 바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행복선언의 주인공이 될 수 있으니까요.
물건을 살 때면 3단을 생각한다. 단순한 것, 단단한 것, 단아한 것. 일을 할
때면 3단을 생각한다. 단순하게. 단단하게. 단아하게. 사람을 볼 때면 3단을
생각한다. 단순한가. 단단한가. 단아한가(박노해).
지퍼 손잡이에 왜 구멍이 뚫렸나?
평소에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았는데, 어떤 책에서 ‘지퍼 손잡이에 왜 구멍이
뚫렸나?’라는 질문이 나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얼른 제 바지를
보았습니다. 정말로 지퍼 손잡이에 구멍이 뚫려 있네요. 다른 옷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다면 구멍이 뚫려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구멍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그 구멍에 끈을 달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끈을 연결하면 지퍼를 힘들이지 않고 여닫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미끄러짐을 방지하기 위해서랍니다.
손잡이에 구멍이 뚫려 있으면 손가락이 걸려서 미끄러짐을 방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작은 구멍도 그 이유가 있었네요. 그러면서 의미 없는 것들이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특히 주님께서는 우리 하나를 소중하게 그리고 특별한
의미를 두고 사랑하십니다. 이 점을 기억하면서 내 자신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각자 각자는 주님의 특별한 창조물입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서울] 예수님께 하늘 스타일을 잘 배워 살면
2014년 가해 9월10일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루카 6,20-26
예수님께 하늘 스타일을 잘 배워 살면
강남과 강북은 생활이 다르지요. 그러니 강남 스타일이라면서 구분하지요.
저는 세상 과 하늘 스타일이 다르다 봐요. 세상은 우리가 잘 알고 있어요.
하늘 스타일을 알 생각들은 안하고 세상 스타일만 알면 되는 줄 압니다.
예수님은 하늘 스타일이십니다. 원죄로 물든 우리는 세상스타일입니다.
그러나 수많은 성인들과 순교 복자님들은 하늘 스타일로 사신 분들입니다
우리도 예수님께 하늘 스타일을 잘 배워 살면 참 좋을 텐데 말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루카 6,25)”
- 서울 대 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서울]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2014년 가해 9월10일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루카 6,20-26
행복했던 시간들, 즐거웠던 시간들이 있습니다. 아름다웠던 장소, 기억에
남는 장소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오선지 위에
연주되는 음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나의 음표로는 음악을 만들 수 없을
것입니다. 음표들이 모인 악보는 아름다운 음악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음악은 잔잔한 시냇가를 표현하기도 하고, 흘러가는 구름을 느끼게도 하고,
세찬 폭풍우를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이번 추석 여러분들의 악보는 어떠셨는지요? 길이 막혀서 고생하신 분들은
느린 노래가 되었겠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들과 함께 하신 분들은 경쾌한
노래가 되었을 것입니다. 교구청에 있는 신부들은 모처럼 푹 쉴 수 있는
편안한 노래가 되었습니다. 이번 추석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분들에게는 이별의 노래가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들 모두에게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오선지가 주어질 것입니다. 그
오선지에 악보를 만드는 것은 우리들의 몫입니다. 우리들 모두는 가족,
이웃, 직업, 국가와 더불어 아름다운 삶, 행복한 삶을 그리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그 오선지 위에 ‘불신, 오해, 분노, 욕심, 시기, 질투’를
그리곤 합니다. 자신이 만든 삶이라는 악보를 보면서 불평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고, 괴로워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행복과 불행에 대해서 이야기 하십니다. 정의와
평화, 진실과 행복을 만들어가 가는 악보를 만들라고 하십니다. 자비와
연민, 나눔과 사랑의 악보를 만들라고 하십니다. 하늘나라가 그런 사람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분열과 거짓, 불신과 증오를 만들어가는 악보를 만들지
말라고 하십니다. 개인의 이기심과 욕심을 채우는 악보는 만들지 말라고
하십니다. 불행의 씨앗이 되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우리들 마음에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행복한 날을 만들어 가야하겠습니다.
‘未得先愁失한데 當歡己作飛이네’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쁨은 아직
사라지지도 않았는데 근심이 먼저 나에게 오네!’라는 말입니다. 우리
속담에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라는 말과 비슷합니다.
어떤 분은 자식 때문에, 남편 때문에, 만나는 이웃 때문에 늘 걱정과 불안을
가슴에 품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지금 즐거운 일들도, 행복한 일들도 곧
사라질까봐 두려워합니다. 그러기에 행복하지가 않습니다. 어떤 분은 지금,
아픔과 시련, 갈등과 고민이 있어도 웃음을 잃지 않습니다. 앞으로 더 잘 될
거라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인생을 가치 있고 의미 있게
사는 것인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바로 불편심,
항상성, 중용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때로 소중한 것들, 아름다운
것들을 말을 통해서 잃어버리곤 합니다. 우리의 주변은 많은 소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소음들에 묻혀서 진실의 소리, 침묵의 소리, 내면의
소리를 듣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감각과 감정에 따라가다 보면 참된
진리를 보지 못하게 됩니다. 현실이라는 벽을 넘으라고 이야기 합니다.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천상을 추구하는 것이 행복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9월10일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 루가 6,20-26)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루카 6,20-26
천상을 추구하는 것이 행복
남보다 머리가 좀 뒤떨어진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머리가 좋지 않다고
사람들에게 놀림을 받고 무시를 당해서 하느님께 열심히 기도를 하였더니
어느 날 하느님께서 나타나셔서 소원 한 가지를 청하면 꼭 들어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젊은이는 얼른 똑똑한 머리를 달라고 청했습니다. 청하고 나서
가만히 생각하니 머리보다는 돈이 좋을 듯 했습니다. 돈이 많으면 머리
좋은 사람을 부릴 수 있다고 생각해서 청을 바꾸었습니다. 또 청을 바꾸고
생각하니 돈보다는 아리따운 여자와 함께 사는 것이 좋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하느님께 청했습니다. 청하고 나니 다시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다시 간절히 청했습니다. 세 가지를 다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참다못해 말씀하셨습니다. ‘자꾸 이랬다. 저랬다 하지 말고
한마디로 말 하여라.’ 그래서 큰 소리로 외쳤답니다. ‘머리 돈 여자!’
하느님께서는 그의 청을 들어 주셨고 그는 지금 많은 어려움 속에
산답니다. ‘머리 돈 여자 !’정신없는 여자와 살려니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행복은 똑똑한 머리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많은 돈에서 오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아리따운 여인에게서 오는 것도 아닙니다. 행복은 ‘천상의 것들을
추구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골로3,2). ‘옛 생활을 청산하여 낡은 인간을
벗어 버리고 새 인간으로 갈아입은’사람다운 생활을 하는 데 있습니다
(골로3,9-10). 세상의 기쁨과 슬픔에 휘둘리지 말고 주님께 삶의 중심을
두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 굶주리는 사람들, 지금 우는 사람들, 미움을
사고 쫓겨나고 모욕을 당하고 누명을 쓴 사람들을 행복하다고 하시고
오히려 부유한 사람들, 배부르고 웃고 칭찬 받는 사람들을 불행하다고
하시니 선뜻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부유한 사람은 부 때문에 위험합니다. 그들은 자기 삶의 확고한 기반을
하느님에게서가 아니라 자신의 부에서 찾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난한
이들은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탁하고 하느님에게서 얻으려 하기 때문에
행복합니다.
그래서 아우구스띠노 성인은 말합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알되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하며, 이 모든 것을 모르나 하느님을
아는 사람들은 참으로 행복합니다.” 그리고 “행복한 사람이란 하느님에
대한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을 자신 안에 모신 사람입니다”
(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성 베르나르도는 “내 행복은 오직 하느님 곁에
있는 것, 내 주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일 뿐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것만을 가지고 ‘행복하다.’, ‘불행하다’를 말하지 말고
“우리 마음에 열성을 기르고 믿는 바에 관심을 일깨우며 천상사물을
갈망하십시오. 어떠한 불행 중이라도 천상 것을 추구하는 이 행복을 스스로
포기하지 마십시오”(성 대그레고리오 교황). 시편의 말씀으로 마무리
합니다. “행복하여라!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
(시편1,1-3). 우리는 소유와 지배에서 만족하지 않고 베푸는 사랑 안에서
만족하며 행복을 누립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우리는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 사랑합니다. 행복하십시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행복해지는 법입니다.
1. 나 자신을 위해서 꽃을 산다.
2. 날씨가 좋은 날엔 석양을 보러 나간다.
3. 제일 좋아하는 향수를 집안 곳곳에 뿌려 둔다.
4. 하루에 세 번씩 사진을 찍을 때처럼 환하게 웃어 본다.
5. 하고 싶은 일을 적고 하나씩 시도해 본다.
6. 시간 날 때마다 몰입할 수 있는 취미를 하나씩 만든다.
7.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내 맘대로 춤을 춘다.
8. 매일 나만을 위한 시간을 10분이라도 확보한다.
9. 고맙고 감사한 것을 하루 한 가지씩 적어 본다.
10. 우울할 때 찾아갈 수 있는 비밀 장소를 만들어 둔다.
11. 나의 장점을 헤아려 본다.
12. 멋진 여행을 계획해 본다.
13. 내일은 오늘보다 무엇이 나아질지 생각한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갈라서려고 하지 마십시오.”
2014년 가해 9월10일 연중 제23주간 수요일(코린토 1서 7장 25~31절)
<그대는 아내에게 매여 있습니까? 갈라서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대는
아내와 갈라졌습니까? 아내를 얻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오늘 독서 27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대는 아내에게 매여 있습니까? 갈라서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 말씀을 읽으면서 처음에 들었던 생각은 ‘쉽게 갈라서려고 하는 부부들이
있을 텐데, 그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 줘야 할까..’ 하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머리속에 떠오르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밀린 숙제를 먼저 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냉담하는 아이들을
방문해야 하는 개인적인 숙제가 있거든요. 그래서 몇 가정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다시 복음을 반복해서 읽는데.. 문득 ‘그대는 .. 매여 있습니까?
갈라서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는 말씀과 함께 몇 가지 스쳐지나간 모습이
있었습니다. 두 가지인데요.
첫 번째는 친척들과 갈라서려 했던 모습(?)입니다. 이 번 추석에 큰 집이나
외가에 가지 않았었습니다. 식구들끼리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식사를
했는데요. 저녁을 먹으면서 어머니가 ‘큰 집에 갔다 올까..’ 하셨는데, 제가
조금 피곤한 기색을 했더니 어머니도 가지 말자고 하시더라고요.
사실 별로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제가 말이 없는데다가 내성적이어서
그런지 오랜만에 만나는 친척들이 불편합니다. 차라리 지금 일하고 있는
분들과는 조금 할 이야기라도 있는데 일 년에 한두 번, 아니면 몇 년 만에
만나는 친척과는 할 이야기가 거의 없더라고요. 그래서 만나면 불편하기도
하고, 찾아가는 것도 귀찮아서 ‘가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냥 명절이라도 마음 편히 쉬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저녁에도 막내 이모가 집에 온다고 했는데요. 슬쩍 자리를 피했습니다.^^;
피곤해서 목욕탕 갔다 온다고 어머님께 말씀드리고 나갔다 들어왔습니다.
은근히 마음속에 ‘이제 친척들 보지 말자..’ 하는 마음이 있었는데요. 누나가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신부님이 오늘 강론에 친척들끼리 모여라~’
라고 하셨다고..
오늘 독서 말씀도 저에게는 이렇게 들리는 거 같습니다. ‘친척에게 매여
있습니까? 갈라서려고 하지 마십시오.’ 저의 편안함을 생각하며 끊어내고
가는 것이 아니라, 묶여 있는 사람들과 함께 갈 수 있는 모습이 필요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친구와 갈라서려 했던 모습입니다. 성당에 같이
다니던 동네 친구가 있습니다. 지방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명절이면
올라옵니다. 그럼 제가 전화를 할 때도 있었고, 그 친구가 전화를 할 때도
있었는데요. 몇 가지 서운한 일이 있어서 이 번에 전화가 왔었는데도 다시
전화를 걸지 않았습니다. ‘약속을 몇 번이나 펑크 내는 친구랑 만나서
뭐해..’ 하면서 조금 극단적인 생각을 했던 거 같은데요.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조금 후회가 되네요. 어린 시절부터 그 친구와 묶여 있었고 여러
가지 추억을 가지고 있는데, 그걸 너무 쉽게 잘라버리려고 했던 거
같습니다.
그 묶여 있는 관계가 주님께 나아가는 데에 분명 도움이 되고 함께 가야
하는 것일 텐데, ‘그런 거 없어도 주님의 일만 하면 되지..’ 했던 거 같습니다.
아마도 바오로 사도는 그런 생각을 경계하고 말렸던 거 같습니다.
오늘 하루, 주님의 일에만 헌신하고 싶다고 지금의 관계를 끊어내고
갈라서려 하기 보다는 지금의 관계를 유지하고 돌보며 함께 갈 수 있도록
해 봅시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어떤 형제님이 혼자 사신다.
그래서 내가 “형제님, 여자 혼자는 괜찮은데
남자 혼자 계시니 조금 불쌍해 보이네요..”
그랬더니 형제님이 조그맣게 이런 이야기를 하신다.
“불쌍하게 생긴 신부님한테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조금 어색하네요...”^^;
- 인천교구 대부동 성당 김기현 세례자 요한 신부 -
◈ [수도회] 축복받은 날, 축복받은 사람 -
2014.9.10 연중 제23주간 수요일(순례22일차).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9월10일 연중 제23주간 수요일(순례22일차).
1코린7,25-31 루카6,20-26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루카 6,20-26
축복받은 날, 축복받은 사람
여기 순례여정의 날들이 다 축복받은 날이지만 추석을 전후로 한 3일은
특히 어제는 더 그러합니다. 축복받은 날에 축복받은 사람이 이냐시오
도반과 저입니다. 이냐시오 도반은 완전히 저의 수호천사가 되고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그대로 체험한 날입니다. '가난한 사람들' 대신, 가난한 순례자 이냐시오
형제와 저 프란치스코를 넣어도 그대로 통합니다.
며칠 전 있었던 예화를 비롯해 엊그제와 어제의 체험을 나눕니다.
부르고스 알베리게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부끄럽기도 하면서 웃음이
나옵니다.
우선 알베리게에 도착하면 샤워를 합니다.
샤워후 문을 아무리 밀어도 열리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시도해도 열리지 않아 당황하여 문을 열어 달라 소리쳤습니다.
잠시 문이 옆으로 드르르 열리면서 친절한 순례객들이 옆으로 여는 것이라
시범을 보이면서 설명해 줬습니다. 옆으로 열면 스르르 가볍게 열리는 것을
잠시 잊고 계속 밀어댔으니 열릴리가 없었던 것이지요.
부끄러워 쏜살같이 사라졌지만 정말 많이 깨달았습니다.
발상의 전환이, 고정관념을 바꾸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깨닫습니다.
이어 엊그제 알베리게의 선정도 좋은 깨달음이었습니다. 미니시펄이라
하여 믿고, 또 몇 사람이 등록후 안내 받는 듯하여 저희도 등록하고 안내를
받았습니다. 들어가 보니 규모도 작고 어린 자매 두명만 있었고
침실은 물론 주변 환경이 몹시 열악하여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형제뿐 아니라 저도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불편했습니다.
이미 지불한 도합 8유로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예감이 이상하여 즉시
문밖을 나가 순례자들이 모여드는 다른 알베리게를 방문하니
정원에 풀장과 더불어 낯익은 많은 순례자들이 있었습니다.
전광석화, 망설일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냐시오 도반을 재촉하여 이미 지불한 8유로를 포기하고 떠난다며,
짐 싸들고 새로 택한 알베리게에 도착하니 얼마나 통쾌하고 흡족한지요.
바로 이날은 추석날이었고 저녁도 알베리게 식당에서 잘 먹었으니 가난한
순례자에게 하느님 주신 당신 나라의 체험이었습니다.
추석 다음 날 새벽에 강론 완성 후 방에 들어 와 보니 스틱이 없었습니다.
즉시 어제 잠시 머물렀던 알벨리게에 스틱을 놓고 나온 줄로 착각하여
새벽 그 알베리게를 찾았지만 문은 완전히 닫혀 있었습니다.
다시 포기하고 침실에 들어 섰을 때 형제가 헤드랜턴으로 스틱있는 쪽을
가리켰습니다. 저의 순전한 착각이었습니다.
다른 형제의 것으로 알았는데 분명 제 것이었습니다.
이 또한 저에겐 좋은 깨달음이었습니다. 배낭의 짐을 싸들고 미사를 드리러
내려왔을 때 뒤따라 내려 온 형제가 소켙과 아이패드와 휴대폰을 전원에
연결하는 줄을 들고 내려왔습니다.
이것들 분실하면 휴대폰, 아이패드 사용도 끝납니다.
함께하는 도반이 얼마나 고맙고 필요한지 절감했습니다.
새벽 조촐한 미사 중 유럽의 노년부부가 조용히 참여하였고 성체를
나눠주니 매우 행복한 표정이었습니다.
로만컬러가 있는 셔츠를 가져온 것이 얼마나 잘 한 일인지 모릅니다.
이 사제복장은 미사처럼 만인의 보편언어가 된 느낌입니다.
어제 페르난도 알베리게 주인도 저에게 강복을 청했습니다.
추석 다음날인 어제의 새벽길도 잊지 못합니다.
길 따라 족히 1시간 반은 보름달을 안고, 추석의 축복 가득 받으며 걸었고
이어 끝없이 난 길을 걸어 밝고 따가운 햇살의 축복 속에 오후 12시 반에
까리온 산타 마리아 알베리게에 도착했습니다. 보아딜라에서 6시 출발하여,
시속 4km 로 6시간 반만에 도착한 것입니다. 얼마나 활력이 넘치는
알제리게인지 완전 젊은이들로 살아있는 축제 분위기였습니다.
무려 7명의 한국 젊은이도 만났습니다. 이 축복의 알베리게를 택할 수
있었던 것은 우선 하느님 덕분이고 눈치의 결과였습니다. 음식점이나
병원의 이치와 똑같은 서비스업의 특징을 갖춘 알베리게입니다.
순례자들의 동향을 예의 주시해 많이 몰리는 곳으로 가면 틀림 없습니다.
사람이 많이 모인 곳이 믿을만 하고 마음도 편합니다. 여기서 좋은 분
(캐나다 교포 신자; 송글라라)을 만났고 저녁 대접도 잘 받았습니다.
제 "사랑밖엔 길이 없었네" 책을 보았다며 너무 기뻐했으며 함께 사진
촬영도 했습니다. 좋으신 하느님은 넘치는 축복으로 가난한 순례자를
행복하게 해 주셨습니다.
스페인의 자연을 보면 왜 스페인에서 성인과 신비가가 많이 나왔는지
깨닫게 됩니다. 어디가나 광활한 땅에 보이는 것은 하늘과 땅이 닿은
지평선뿐입니다. 얼핏 사진을 보면 사막같이 보이는 밭입니다.
사막같은 광활한 땅 중심마다 자리잡은 마을입니다.
마을 중심의 성당은 꼭 사막의 오아시스 같습니다.
성당을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입니다.
마을 한 편에는 공동묘지의 '죽은이들의 마을'과 공존을 이루니 삶과
죽음이 화해한 모습입니다.
바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상징하는 마을의 구조입니다.
마을의 안정과 평화, 일치의 중심인 성당이요 미사입니다.
어제 미사에 참석했을 때도 미사의 고마움에 감격했습니다.
하느님 사랑의 일치를 상징하는 세계 만민의 보편언어인 미사입니다.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인 아나뵘은 전적으로 하느님께 신뢰와 희망을 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진정 가난한 사람들이요, 이런이들에게 하사되는
하느님의 선물,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참으로 하느님께 온통 신뢰와 희망을 둔 우리 순례자들에게
하느님은 당신 나라의 축복을 체험토록 하셨습니다. 이런 하느님 나라의
사랑과 영원을 체험할 때 현세의 집착에서 이탈하여 초연한 자유의
삶입니다. 바오로가 그 좋은 모범이며 그의 종말론적 삶의 고백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하지
않는 사람처럼, 물건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1코린73,29-31).
하느님을 중심한 가난한 삶에서 하느님의 영원과 사랑을 체험할 때,
세상에 살되 세상에 절대를 두지 않는 이런 초연한 자유인의 삶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당신께 희망과 신뢰를 둔 가난한 우리
모두에게 하느님의 나라를 선사하십니다.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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