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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가해 9월15일 월요일 (백)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청주] 성모님의 고통을 거울삼아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제1독서 히브 5,7-9
† 복음 요한 19,25-27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함께하신 성모님의
고통을 기억하는 날이다. 자식의 아픔은 어머니에게 더 크게 다가오는
법이다. 시메온은 성모님의 그 고통을 이렇게 예언하였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34-35).
성모님의 고통을 묵상하고 기억하는 신심은 오래전부터 널리 퍼져
있었으며, 1688년 인노첸시오 11세 교황 때 이 기념일이 정해졌다. 1908년
비오 10세 교황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 다음 날인 9월 15일로 기념일을
옮겨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과 연계하여 기억하도록 하였다.
★ 히브리서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성부께 간곡한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다고 전한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지만 고난 중에
순종을 배우셨으며, 이로써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제1독서).
★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는 곁에 서 있는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먼저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을 함께하신 성모님의 고통을 기리는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을 지냅니다. 이날 미사에는 ‘복음 환호송’ 전에
‘부속가’를 자유로이 바칠 수 있습니다. 이 부속가는 성모님의 고통과
슬픔에 대한 묵상과 그분의 슬픔에 함께하려는 간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부속가를 통하여 성모님께서 몸소 겪으신 고통의 신비를 깊이
묵상하는 한편 그 고통에 동참하도록 초대받습니다.
절절한 슬픔과 신앙을 담은, 중세의 어느 수도자의 기도였던 이 부속가는
많은 음악가에게 영감을 주어 뛰어난 곡을 여럿 낳게 했습니다. 그
가운데에서 가장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작품으로는, 스물여섯의 나이에
요절한 이탈리아의 작곡가 페르골레지(1710-1736년)의 ‘스타바트 마테르’
(Stabat Mater: 슬픔의 성모)를 꼽을 수 있습니다.
오페라 ‘마님이 된 하녀’로 20대 초반의 나이에 일약 당대 음악계의 주목을
끈 그는 이내 자신의 병마로 젊은 나이에 삶을 마감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도 이 곡의 완성에 전념한 그에게
‘스타바트 마테르’는 간절하고 진실한 마지막 기도 자체였습니다. 조촐한
현악 협주에 소프라노와 알토 두 사람의 목소리로 엮어진 이 곡에는 비애의
아름다움만이 아니라 절절한 간구가 배어 있습니다.
음악가이신 선배 신부님이 다른 음악가들과 사순 시기에 어떤 본당에서 이
곡을 연주하였을 때 나이 지긋한 분들이 눈물을 뚝뚝 흘리는 것을 보고 더
큰 감동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음악의 아름다움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아마도 우리 가슴속 깊이 계시는, 세상 모든
자녀들의 고통을 아시고 함께하시는 성모님에 대한 그리움과 고마움이 그
눈물의 근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 각자의 고통에 함께하시며 위로해 주시고, 우리가
주님의 고통에 깊이 참여하도록 이끄십니다. 성모님에 대한 사랑의 의탁을
통하여 우리 자신의 슬픔과 고통을 주님께 온전히 봉헌해야 하겠습니다.
- 매일 미사 -
◈ [인천] 고통과 시련에 의연하게 대처
2014년 가해 9월15일 월요일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요한 19,25-27)
<아들 수난 보는 성모 맘 저미는 아픔 속에 하염없이 우시네('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부속가>
요한 19,25-27<또는 루카 2,33-35>
언젠가 눈이 아파서 병원에 갔습니다. 따끔따끔 아파서 도저히 생활하는데
불편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가 마침 새벽마다 수영장을 다닐 때라
혹시 눈병이 아닌가 싶었지요. 의사 선생님께서는 제 눈을 이리저리
살피시더니 어이없는 말씀을 하십니다.
“속눈썹이 박혔네요.”
그리고 속눈썹 한 개를 빼주셨습니다. 얼마나 시원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자식’
우리 부모들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지요. 눈에 속눈썹 하나만 들어가도
아프고 불편한데, 자식이 눈에 들어간다면 어떨까요? 그런데 그 사랑이
너무나도 크기에 눈에 넣어야 한다면 넣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들을 위해 자기희생을 늘 감수하십니다. 자녀를 위해서라면 심지어
자신의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어놓는 이 세상의 부모님들이십니다.
성모님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들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았을까요?
하느님의 아드님이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낳은 자식이기에 사랑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더욱 더 특별한 아들이고,
원죄 없으시며 사랑 가득하신 분이기에 더 큰 사랑을 간직하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을 앞둡니다.
사람이 죽게 되면 땅속에 묻히게 되는데,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게 되면
부모는 자식을 가슴에 묻는다고 하죠. 성모님께서 사랑하는 아들의 수난과
죽음을 직접 목격하셨고,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십자가의 길을 함께
하셨습니다. 그 순간이 얼마나 괴로웠고 고통스러웠을까요?
성모님께서 겪으셨던 이 고통이 모든 것의 끝이 아니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고통의 순간이지만, 성모님께서는 이를 부정하지도 않고 또 하느님
아버지께 불평불만을 던지지도 않습니다. 그냥 묵묵히 당신의 자그마한
몸으로 다 받아들이실 뿐이었습니다. 예수님 잉태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셨듯이 더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하느님께 의지하면서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걸으셨던 것입니다.
너무나 큰 고통을 힘들게 이겨내신 성모님의 모습을 기억하면서 우리 역시
고통과 시련에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무조건
피하려고 해서도 안 되고, 또한 불평불만으로 한풀이 하듯 살아서도 안
됩니다. 항상 최고의 것을 그리고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을 주신다는 굳은
믿음으로 주님께 철저히 의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우리가 될 때, 십자가의 죽음 이후 부활을 목격했던 성모님처럼
우리도 큰 영광의 순간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당신에게 일을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일생에 걸쳐 몰두할 수 있는
일을 당신은 갖고 있는가. 당신 인생의 행복과 불행은 그 대답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다(이나모리 가즈오).
오상의 성 비오 말씀
십자가 없는 예수는 있을 수 없고, 예수 없는 십자가 또한 있을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고통을 당하지만 고통을 슬기롭게 당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고통은 하느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고통을 제대로 쓰는 법을 아는 사람은
참으로 복됩니다.
언제나 고통을 원하십시오. 고통은 우리에게 거룩한 지혜와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줄 것입니다.
고통에 대해 깊이 묵상하여 봅시다. 오상의 비오 성인의 말씀을 보니,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우리들의 간절히 원하는 행복이
결정됨을 깨닫게 됩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서울]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2014년 가해 9월15일 월요일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요한 19,25-27)
<아들 수난 보는 성모 맘 저미는 아픔 속에 하염없이 우시네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부속가>
요한 19,25-27<또는 루카 2,33-35>
저는 1991년 사제서품을 받았습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첫 본당으로 갔지만
3일 만에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병명은 ‘유행성 출혈열’이었습니다. 증상은
열이 심하게 나고, 얼굴이 붓고, 음식을 먹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중환자실에 있었고, 많은 분들이 저를 위해서 기도 해 주셨습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치료를 해 주셨고, 간호사 분들이 돌보아 주셨습니다. 하지만
제가 병이 나아서 퇴원할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제가 입원하면서 퇴원할 때까지 단 10분도 제 곁을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물수건으로 온 몸을 닦아 주셨고, 음식을 먹다 토하면
깨끗하게 치워 주셨습니다. 열도 내리고, 음식도 조금씩 먹게 되니
어머니께서 정말 좋아하셨습니다. 저는 몸이 아파서 통증이 있었지만
어머니께서는 마음이 아파서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그 후 23년 동안 제가
사제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어머니의 사랑과 기도가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몸이 아파서 고통을 겪게 됩니다. ‘암, 고혈압, 당뇨, 심장병, 통풍,
대상포진, 신장투석’ 정말 많은 질병이 우리에게 고통을 줍니다. 또 우리의
몸은 외부의 충격에 의해서 고통을 겪습니다. 매일 일어나는 각종 사고와
사건은 건강한 몸을 아프게 합니다. 2년 전에 저도 다리가 골절되는 사고를
겪었습니다. 한동안 움직이지 못하였고, 골절된 부위에 심을 박았습니다.
다행히 지금은 뼈가 다시 붙었고, 잘 다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연세가 많아지셔서 매일 저를 간호하지는 못하셨지만 그래도 매일 병원에
찾아 오셨습니다.
우리는 또 다른 차원의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그것은 타인의 아픔, 타인의
슬픔, 타인의 고통에 공감을 하기 때문입니다. ‘세월호’ 사고가 발생했을 때
많은 분들이 함께 아파했고, 슬퍼했습니다. 슬픈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우리에게는 상대방의 아픔을 함께 느끼는
‘측은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문명을 이룩하고, 역사를 만들고,
함께 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공감’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공감을 넘어서는 또 다른 차원의 고통이 있습니다. 바로 타인의 고통을
대신 겪는 것입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입니다. 신앙 때문에
박해를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고귀하게 만들었고, 이것이 우리를
영적인 차원으로 이끌었고, 이것이 인류가 가진 특별한 힘입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겸손의 3단계를’ 이야기 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대죄’를 짓지 않는 것입니다.
계명을 충실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대죄’는 물론 ‘소죄’까지 짓지 않는
것입니다. 주일미사를 잘 지키며, 본당의 여러 단체에서 봉사하고, 삶의
중심에 신앙이 있는 삶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제 고통을 받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가난한 것도, 병이
드는 것도, 죽는 것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모님의 고통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성모님의 모든 고통은
아드님, 예수님과 관련된 것들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이런 고통에
함께하시면서, 예수님의 구원 사업에 동참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성모님은 모든 고통을 받으셨지만, 좌절하지 않으시고, 하느님의
구원사업에 동참하셨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없다고 하지만, 비에
젖지 않고 피는 꽃도 없다고 하지만 성모님의 고통은 인간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그 모든 것을 받아드렸고, 예수님의
마지막 부탁을 받아들여서 교회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우리들 또한
어머니이신 성모님을 의지하면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통과 아픔을
이겨내고 신앙의 결실을 맺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성모님의 고통을 거울삼아|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9월15일 월요일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요한 19,25-27)
<아들 수난 보는 성모 맘 저미는 아픔 속에 하염없이 우시네('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부속가>
요한 19,25-27<또는 루카 2,33-35>
성모님의 고통을 거울삼아
성모님은 우리의 어머니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곁에 계신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여인 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들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습니다. 결국 거룩하신 어머니 마리아는 이제 모든이의 구원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아들에 의해 모든이의 어머니가 되신 것입니다.
성모님은 이제 나의 어머니이십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는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시는 시작부터 끝까지 많은
고통을 안고 사셨습니다. 천사를 통해 주님의 잉태를 예고 받지만 그
자체가 고통입니다. 시대상황으로 볼 때 처녀가 잉태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 달라고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루가1,38). 저는 감히 이 순명을 감히 아름다운
기도요, 순교라고 말합니다. 그리하여 한동안, 약혼한 요셉으로부터 간음한
여인이라고 오해를 받으셨습니다(마태1,19). 요셉이 남모르게 파혼 하려고
마음을 먹기까지 했습니다. 누우실 한 평 방이 없어서 마구간 말구유에서
해산을 해야 했고(루가2,7), 또한 어린 아기를 안고 이집트로의 피난길에
나서야 했던 어머니이십니다. 율법에 따라 출산 후 40일만에 정결례를
거행할 때가 되어 예루살렘 성전에서 아기를 봉헌하면서 시므온의 예언을
접하게 되었는데 “품에 안긴 아기가 많은 사람들의 반대 받는 표징이 되어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루가2,34-35).이라는 고통의 예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예언의
실현을 30년 이상 기다리며 살아야 했습니다.
예루살렘 축제 때에는 예수를 잃고 사흘 만에 성전에서 찾았건만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라고
하여 “이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며”(루가2,41-52) 그 구원의 때를
기다리셔야 했습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술이 떨어진 사실을 알렸을 때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요한2,4) 라고 외면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하시며 평정을 잃지 않으셨고 오히려 주님께 순종하며
일꾼들에게 순종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일찍 남편 요셉을 잃고
홀어머니로서 가정을 꾸려야 했거늘 아들도 집을 떠났습니다. 어떻게 보면
홀로 버려졌습니다. 어느 날 소문을 듣고 아들을 찾았으나 “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냐?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마르3,33-35).라는 말을 흘려들어야 했습니다.
게쎄마니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시며 기도하는 아들을 지켜봐야 했고,
가시관을 쓰시고 채찍을 맞으시며 골고타 언덕을 오르시는 아들과 함께
십자가를 가슴에 묻어야 했습니다. 제자들과 새로운 자녀관계를 맺어주며
죽음을 맞이하는 아들을 침묵 속에 받아들이고 끝내는 피에 엉긴 아들을
무릎에 눕혀야 했던 어머니이십니다. 부활의 소식도 다른 사람을 통해
뒤늦게 알아야 했던 어머니는 인간적으로 보면 그야말로 고통에
묻혀버리신 분입니다.
성모님은 모든 것을 희생으로 바치셨습니다. 성모님에게는 하느님이
당신의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뜻을 헤아리며 모든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겸손과 순명으로! 그러므로 우리도 성모님을 거울삼아
자진하여 고통을 참아 받으며 주님께 온전히 희생을 바쳐야 하겠습니다.
성모님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셨기에”(루카1,45.)
당신 앞에 펼쳐지는 예기치 않은 상황에 흔들림이 없이 감당하셨습니다.
우리도 힘들고 어려울 때 성모님의 고통보다 더 큰 아픔을 겪고 있는지,
나의 믿음의 현주소를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교부 푀멘은 말합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언제나 성모님께서 울고 계시던 구세주의 십자가 곁에
머물도록 하십시오. 항상 성모님과 함께 울도록 하십시오.” 시련과 역경
앞에서 성모님의 마음으로 감당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사랑합니다.
@@@ 성모통고 신심은 14세기 초에 나타났으며 복음서에 근거하고 있다.
이 신심은 처음에 예수께서 올리브동산에서 피땀을 흘리시는 장면에서부터
수난 전체로 묵상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드러나게 되었는데 이것이
나중에는 성모 칠고로 발전되었다. 또한 '성모 칠고' 신심이 보편화되면서
점차 수많은 묵상과 기도문 그리고 시들이 쏟아져 나와 이 신심을 더욱
고취시켰다.
복음서에 근거를 둔 '성모 칠고'는 다음과 같다.
1.시메온의 예언 (루가 2,34-35)
2.이집트로 피난가심 (마태 2,13-21)
3.삼일 동안 예수를 잃으심 (루가 2,41-50)
4.‘해골 터’라는 골고타로 오르심 (요한 19, 17)
5.예수,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죽으심 (요한 19,18-30)
6.예수, 십자가에서 내리심 (요한 19,38)
7.예수, 무덤에 묻히심 (요한 19, 40-42)
@@@ 예수님의 수난이 곧 성모님의 고통이라 할 수 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십자가의 순종을 배우다.
2014년 가해 9월15일 연중 제24주간 월요일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 아들 수난 보는 성모, 맘 저미는 아픔 속에 하염없이 우시네 >
복음: 요한 19,25-27
< 십자가의 순종을 배우다. >
임금이 한 신하를 불러 이상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우물물을 길어 저기 밑 빠진 독에 가득히 채우시오.”
밑 빠진 독에 물이 채워질 리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충성스러운 신하는
오직 임금의 명령만 생각하면서 밤을 낮 삼아 물을 길어 날랐습니다. 결국
우물 바닥이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우물 바닥에 무엇인가 번쩍이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것은 엄청나게 큰 금덩어리였습니다. 신하는 임금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임금님, 용서하소서. 독에 물을 채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물 바닥에서
이 금덩이를 건졌나이다.”
임금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습니다.
“밑 빠진 독에 물을 채우겠다고 우물이 바닥나도록 수고했구려. 그대는
참으로 충성스러운 신하요. 그 금덩이는 그렇게 순종하는 신하를 위해
준비된 것이라오.”
하느님이 사울의 왕권을 빼앗아 다윗에게 넘기신 이유는 당신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서입니다. 사울이 전리품을 남겨놓은 것은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라고 핑계를 댑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낫습니다.”(1사무 15,22)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을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마련할 수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개미가 인간을 위해 무엇을 열심히 준비해봐야
인간에게는 아무 쓸모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인간이 귀한 보석을
개미집에다 맡겨 놓았다면 그 귀한 보석을 지니고 있는 개미집은 인간에게
매우 특별한 것이 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 안에 들어온 보속과
같은 ‘말씀을 잘 간직하고 따르는 것(순종)’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하느님께
가장 아름다워 보이는 일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결혼풍습에 먼저 남자는 자신의 집에서 일가친척과 일주일간
잔치를 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아내의 집으로 신부를 만나러 갑니다.
이것을 장가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이를 낳으면 다시 남편의 집으로
오는데 이것을 시집간다고 합니다. 아무튼 신부는 언제 올지 모르는 신랑을
깨어 기다리고 있어야합니다. 신부는 신랑이 온다는 말을 들으면 처녀들과
함께 신랑을 맞으러 나갑니다. 그런데 신랑은 신부를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요? 신부는 신랑이 미리 보낸 혼수품으로 몸을 장식하고
있어야합니다. 자신이 준 옷과 장신구를 하고 있는 처녀가 자신의 신부임을
알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다른 옷과 다른 장신구를 하고 있다면
신랑의 신뢰는 거기서 끝나고 맙니다. 우리 또한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말씀을 잘 간직해야합니다. 말씀을 잘 듣고 간직한다는 말이 ‘순종’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예수님 또한 순종을 배우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아드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이었습니다. 아드님은
죽기 싫은 마음을 누르고 아버지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시며 당신 뜻을
십자가에 못 박아 순종하셨습니다. 그렇게 당신 말씀을 잘 간직한 아드님의
청을 아버지는 무엇이든 다 들어주십니다. 그래서 아드님은 당신 순종으로
인간의 구원을 청하여 세상에 가져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의 청을 들어주십니다. 오늘은
성모님의 고통을 묵상하는 날입니다. 성모님의 고통이란 바로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위해 순명함으로써 하와의 불순종을 기워 갚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만 순종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아니라 성모님도 순종을 위해
당신 영혼이 칼에 찔리는 아픔을 겪으셔야만 했습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는 순종은 없습니다.
하루의 전투가 끝나고 나서 지휘관이 그날의 전투 상황에 대해 장교들과
함께 평가를 하고 있었습니다. 지휘관이 물었습니다. 어느 군인이 그 날
가장 탁월한 군인이었는지 생각들을 말해보라고 했습니다.
어느 장교는 가장 탁월한 군인은 그 날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한
군인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다른 장교들은 이 군인,저 군인 자기 나름대로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지휘관은 말했습니다.
“아니오. 여러분 모두가 다 틀렸어요. 오늘 전장에서 최선의 군인은 적을
죽이려고 칼을 들어 막 내리치려는 순간 퇴각 나팔 소리를 듣고 적을 치지
않고 팔을 내리고 나팔 소리대로 후퇴한 군인입니다. 지휘관의 명령에
복종한 것이 오늘의 가장 고귀한 일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순종은 자신을 버리는 행위이고 이 행위가 위에 계신 분을
가장 기쁘게 해 줍니다. 그리고 그렇게 존경심을 표현한 사람은
하느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구해낼 수 있기 때문에 은총의 중재자가 됩니다.
성모님께서 바로 하느님께 순종하여 얼마나 큰 사랑을 받는 분이신가를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성모님이 청하면 하느님은 안
들어주실 수가 없습니다. 그만큼 당신을 죽여 ‘말씀’을 간직하여
순종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신을 매일 십자가에 못
박는 순종을 배워야만 합니다. 순종이 구원의 유일한 길입니다.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하늘께 부탁 말고 하늘의 배려를
2014년 가해 9월15일 월요일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요한 19,25-27)
<아들 수난 보는 성모 맘 저미는 아픔 속에 하염없이 우시네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부속가>
요한 19,25-27<또는 루카 2,33-35>
하늘께 부탁 말고 하늘의 배려를
하늘이 맺어준 관계라고 말들은 하지만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결혼을 그렇게 생각한다면 하늘을 보면서 배울 게 뭔지 느껴보셨습니까?
부모 자식 간, 동창들, 이웃, 옷깃을 스친 사람들 관계 모두가 그렇지요.
하늘에게 배울 것을 세상의 어떤 안내자들이 가르칠 수 있다고 봅니까?
하늘님, 곧 하느님뿐이지요. 하느님의 말씀님이신 예수님 말입니다.
하늘께 부탁 말고 하늘의 배려를 들읍시다. 사도요한처럼 말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요한 19,27)”
- 서울 대 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수도회] 슬픔의 성모님(Stabat Mater)
2014년 가해 9월15일 월요일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요한 19,25-27)
<아들 수난 보는 성모 맘 저미는 아픔 속에 하염없이 우시네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부속가>
요한 19,25-27<또는 루카 2,33-35>
슬픔의 성모님(Stabat Mater)
자녀들로 인해 큰 슬픔과 고통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은
세상입니다. 무엇보다도 자식을 자신보다 앞세운 부모님들의 비통함은
평생 씻지 못할 정도로 하늘을 찌릅니다. 뿐만 아닙니다. 평생 큰 장애를
안고 살아야 하는 자녀를 둔 부모님들, 현대 의학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는
불치병 자녀들을 매일 바라보는 부모님들...
어찌 보면 오늘은 그런 부모님들을 성모님께서 위로하시는 날입니다.
성모님도 아드님으로 인해 크나큰 슬픔을 겪으셨던 고통의
성모님이셨습니다.
만일 자녀와 관련해서 만사형통했던 성모님, 자녀로 인해 아무런 괴로움도
겪지 않으셨던 성모님이라면 오늘 힘겨워하는 우리 부모들을 조금도
위로해주실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인류 역사상 자녀로 인해
가장 큰 괴로움과 슬픔을 겪으셨던 분입니다.
당연히 우리의 깊은 슬픔과 끝도 없는 고통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분이기에 공감과 동병상린의 마음을 나눌 수 있고 그분 위로의 말씀이
설득력을 지니며 존재 자체로 힘이 되는 것입니다.
성모님에게 있어 예수님은 정말이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이었습니다. 자신의 몸을 통해 이 세상의 빛을 본 예수님이셨습니다.
서른 해 동안이나 동고동락하며 애지중지 정성껏 양육한 아들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성모님은 아들 안에서 무죄한 어린 양, 인류의 구원자로서의
모습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배은망덕도 유분수지 사람들은 무죄한 아들을 참혹한 십자가형에
처합니다. 자신의 분신, 아니 자신의 전부인 그 아들이 지금 눈앞에서
끔찍하게 죽어가고 있습니다. 십자가 위해 높이 매달린 처참한 몰골의
아들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비명을 내지르는데, 그 비명 소리가 하늘을
찌릅니다.
그 십자가 밑에 성모님께서 서 계셨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저 안타까워 발을 동동 구르며 그저 무력하게
서셨습니다. 혹시라도 그게 가능한 일이라면 내가 대신 형벌을 받았으면...
하는 마음뿐이었습니다.
다만 성모님께서 끝까지 할 수 있는 일은 예수님의 마지막 순간까지
혼절하지 않고 쓰러지지 않고 그 자리에서 버티는 일이었습니다. 그 자리에
남아있으면서 아들을 위해 기도하고 마지막 순간에는 아들과 함께 죽는
일이었습니다.
성모님은 어쩌면 아들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서 아들과 함께 영적 죽음을
맛보셨습니다. 비록 성모님께서 계속해서 육적으로 숨 쉬며 살아계셨지만
아들의 십자가 죽음과 함께 세상에서 죽으셨습니다.
13~14세기 한 교부(어떤 학자는 인노센트 3세 교황, 또 다른 사람은
보나벤투라 사제)가 이토록 깊은 성모님의 슬픔을 20절로 된 성시(聖詩)로
구성했는데 이를 우리는 슬픔의 성모님(Stabat Mater)라고 부릅니다.
이 성시는 십자가 밑에 묵묵히 서 계시는 성모님의 고통을 현장감 있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성시는 1727년경 가톨릭 교회 전례에 도입되면서
오늘 날도 매년 9월 15일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때 마다 부속가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자녀로 인해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는 부모님들에게 매일 이 성시
‘슬픔의 성모님’을 권합니다. 매일 자녀를 위한 기도 끝에 이 성시를 덧붙여
기도해보시기 바랍니다. 계속 바치다보면 어느새 성모님의 한없는 위로가
손에 잡힐 듯이 다가올 것입니다.
1. 아들예수 높이달린 십자곁에 성모서서 비통하게 우시네.
2. 섧고설운 슬픔고통 성모성심 칼에찔려 참혹하게 뚫렸네.
3. 독생성자 수난하니 여인중에 복된성모 애간장이 다녹네.
4. 아들수난 보는성모 맘저미는 아픔속에 하염없이 우시네.
5. 예수모친 이런고통 지켜보는 우리죄인 누가울지 않으리?
6. 십자가의 아들보며 함께받는 성모고통 누가슬퍼 않으리?
7. 우리죄로 채찍모욕 당하시는 아들예수 성모슬피 보시네.
8. 기진하여 버려진채 죽어가는 아들보고 애처로이 우시네.
9. 사랑의샘 동정성모 저희들도 슬퍼하며 함께울게 하소서.
10. 그리스도 하느님을 사랑하는 제마음에 불이타게 하소서.
11. 어머니께 청하오니 제맘속에 주님상처 깊이새겨 주소서.
12. 저를위해 상처입고 수난하신 주님고통 제게나눠 주소서.
13. 사는동안 십자고통 성모님과 아파하며 같이울게 하소서.
14. 십자곁에 저도서서 성모님과 한맘으로 슬피울게 하소서.
15. 동정중의 동정이신 성모님의 크신슬픔 저도울게 하소서.
16. 주님상처 깊이새겨 그리스도 수난죽음 지고가게 하소서.
17. 저희들도 아들상처 십자가위 흘린피로 흠뻑젖게 하소서.
18. 동정성모 심판날에 영원형벌 불속에서 저를지켜 주소서.
19. 그리스도 수난공로 십자가의 은총으로 보호하여 주소서.
20. 이몸죽어 제영혼이 천국영광 주예수님 만나뵙게 하소서.
-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수도회] 고통, 기도의 사슬 [단상]
2044년 가해 9월15일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순종을 배우셨고,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5,7-9
복음
<아들 수난 보는 성모 맘 저미는 아픔 속에 하염없이 우시네(‘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부속가).>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9,25-27<또는 루카 2,33-35>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2014년 9월 15일) 고통, 기도의 사슬
아드님의 십자가 곁에는 성모님이 서 계셨습니다. 고통의 사슬로
어머니는 하나가 되었습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슬픔은 하나의 감정일 뿐이기에 이슬처럼
점차 사라지지만 고통은 몸과 맘에 새겨지는 것이기에 영원히 갑니다. 오늘
자식을 위해 헌신하는 모든 어머니를 기억합니다. 특히 자식을 일찍 품에
묻은 어머니들, 그 중에서도 세월호 참사로... 어린 자식을 잃은 어미의
고통을 기억합니다.
참으로 고통받는 사람은 고통을 승화합니다. 고통을 구원의 도구로
변모시킵니다. 성모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아드님을 체험하신
후 성모님의 몸과 마음에 새겨진 고통은 이제 우리를 위한 기도가
되었습니다. 성모님의 기도에 모든 어머니들의 자식을 위한 고통을
봉헌합니다. 고통은 이제 기도의 사슬이 됩니다.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인영균 끌레민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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