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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가해 10월12일 연중 제28주일
[청주] 기뻐하고 즐거워하자.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제1독서 이사 25,6-10ㄱ
† 제2독서 필리 4,12-14.19-20
† 복음 마태 22,1-14
연중 제28주일인 오늘, 우리는 하느님의 구원의 초대를 듣습니다. 하늘
나라는 기쁨과 평화가 넘쳐흐르는 풍성한 잔칫상입니다. 그러나 현세의 삶
속에서 이 천상 잔치를 예감하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얻게 되는
풍요로움에 맛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며 하늘 나라에
대한 열망을 잠시도 잊지 않기를 청합시다.
★ 이사야 예언자는 만군의 주님께서 모든 민족들에게 베푸실 구원의
잔치를 노래한다.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며,
사람들은 그분을 찬미하고 그분께서 주신 구원을 기뻐할 것이다(제1독서).
★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어떤 처지에서든 잘 지낼 수 있는 비결을 안다고
말한다. 바로 그에게 힘을 주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제2독서).
★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를 혼인 잔치를 여는 임금의 비유로 말씀해
주신다. 초대받은 이들이 오지 않자 임금은 길 가던 사람들을 모두 불러오게
한다. 그러나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자는 다시 어두운 바깥으로 쫓겨난다
(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의 ‘혼인 잔치의 비유’에서는 잔치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끊임없는
‘초대’에 반하는 두 가지 유형의 모습이 자세히 묘사됩니다. 곧, 하늘 나라에
대한 초대를 외면하는 사람, 그리고 그들을 대신하여 잔칫상으로 불러들인
이들 가운데 ‘자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입니다. ‘초대받은 이들’이 ‘하늘
나라’를 외면할 뿐만 아니라 하늘 나라를 선포하는 이들을 박해하는
모습은, 오늘 복음의 바로 앞에 나오는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마태 21,33-46 참조)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유형의 모습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도 그대로 해당됩니다. 신앙의 선물로 하늘 나라의 복음을
받았음에도 그것을 하찮게 여기거나 그 메시지에 대하여 적대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 그리고 하늘 나라의 ‘잔치’를 온전히 ‘향유’할 수 있는 내적
품성과 외적인 생활의 변화를 게을리하는 것, 이 모두는 우리가 자주 빠지는
유혹이고 저지르는 잘못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영성 분야의 대가 십자가의 요한 성인이 『영혼의 노래』
에서 채찍을 가하는 내용은 오늘 복음과 관련하여 깊이 성찰하게 합니다.
“이렇게 위대한 선물을 얻으려는 영혼들이여, 그대들은 무엇을 하고 있으며
어디에다 마음을 쓰고 있습니까? 그대들이 갈망하는 것은 너무 천박하고,
그대들이 소유하고 있는 것은 가련한 정도입니다. 그렇게도 큰 빛을 보지
못하는 그대들 영혼의 눈멀음은 너무나 비참하고, 그렇게도 큰 소리를
듣지 못하는 그대들의 귀먹은 상태는 비참합니다. 그대들은 세상의 영광과
존귀를 찾으면서 실제로 큰 선물에 대해서는 무지하고 무자격하며 비참하고
미천한 사람으로 남아 있습니다.”
- 매일 미사 -
◈ [인천] 부르심은 지금 이시간에도
2014년 가해 10월12일 연중 제28주일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 마태오 22,1-14<또는 22,1-10>
어제와 그제를 이용해서 저는 서울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이틀 동안의
교육이 모두 18.5시간, 아침 8시 30분에 시작해서 저녁 6시 30분까지
계속되는 교육이었지요. 교육 내용은 정말로 좋았지만, 오랜만에
피교육자가 되어서 참석하는 교육은 상당히 힘들었습니다. 더군다나
사제로 살아가는데 이 교육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었거든요. 그보다는
제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도움을 더 드릴 수 있을까 해서
선택한 교육이었기 때문에, 솔직히 둘째 날에는 ‘가지 말까?’라는 유혹이
컸던 것도 사실입니다. 또한 교육을 받는 장소도 너무 멀었습니다. 출퇴근
시간, 사람들에게 치이면서 거의 2시간을 가고 오는 것이 정말로
힘들더군요. 그래서 ‘교육 참석을 하지 말까?’ 라는 생각이 끊임없이 제
머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유혹에도 불구하고 무사히 수료할 수 있었던 것은 솔직히 함께
교육을 받았던 사람들 덕분이었습니다. 대기업 은퇴를 앞두고서 새로운
삶을 찾기 위해 오신 분, 안정적인 직장생활을 하고 있으면서도 더 나은
‘나’를 만들기 위해 오신 분,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도움을 받기 위해 오신 분
등등……. 이분들 역시 교육 받고 싶지 않은 유혹이 없었겠습니까? 하지만
힘든 교육이지만 적극적으로 참석하는 모습에서 저 역시 함께 해야 함을
강하게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교육을 모두 마친 뒤에는
모두가 헤어지는 것이 아쉬워서 오랫동안 인사를 나눌 수가 있었고, 다음에
다시 만날 것을 약속했습니다.
자기 혼자만의 삶은 순간의 편안함을 가져다 줄 수는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만남의 뒤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기쁨은 체험할 수 없겠지요. 또한
이 과정 안에서 얻게 될 많은 것들 역시 전혀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의 비유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침을 전달해주십니다. 혼인 잔치에 사람들을 초대하지만
사람들은 오려고 하지 않지요. 밭으로 가고 장사하러 갑니다. 바로 자기
일에만 매어 있는 것입니다. 임금의 초대보다 자기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니 혼인 잔치에 가는 것이 귀찮을 수도 있을 것이고, 별로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임금의 마음을 보았다면
그리고 이 혼인잔치에서 만나게 될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생각했다면,
자신의 일과 세상의 일을 제쳐두고 초대에 응했을 것입니다.
이 부르심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됨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을 실천하라는
부르심, 이웃과 함께 하라는 부르심,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행동하라는 부르심, 어렵고 힘든 이웃에게 힘이 되라는 부르심 등등…….
그런데 우리들은 이러한 부르심에도 불구하고 자기 일에만 집중하고,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기준만을 내세우면서 무시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혼인 잔치에 초대받았으나 응하지 않은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임금은 진노해서 군대를 보내어 없애고 고을 역시 불살라 버립니다. 임금의
진노를 받는 우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초대에 적극적으로
임해서 혼인 잔치를 즐기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사랑을 함으로써 사람들은 단결하고 하나가 됩니다. 또한 사람 각자에게
있는 보편적인 지성이 연합을 뒷받침해줄 것입니다(톨스토이).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사제의 길을 걸으신 것을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라고 교황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저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왜냐고요? 그것은 제가 앞으로 거침없이 나아갈
수 있을 만큼 강하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제가 후회하지 않는 까닭은
제가 어둠 속에 있을 때에도, 죄를 지을 때에도, 약하거나 실패할 때에도
언제나 주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분에게 초대되었습니다.
그분은 저를 혼자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과 함께 앞으로 나아갑시다. 그분은 절대 우리를 놓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결코 실망시키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신실하십니다.”
주님과 함께 앞으로 갈 때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내게 용기와
힘을 주시는 분,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앞을 헤치고 나아갈 수 있게끔
하시는 분, 그래서 진정한 나를 발견하고 기쁘게 살 수 있도록 하시는 분.
이러한 분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지 않을까요?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서울] 연중 제28주일
2014년 가해 10월12일 연중 제28주일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 마태오 22,1-14<또는 22,1-10>
가끔씩 어릴 때 살던 집이 생각납니다. 담 뒤에 작은 개울이 있었고,
동네에는 넓은 공터가 있었고, 밭에는 옥수수, 깨가 심어져있었습니다.
친구들과 어울려 놀다, 배고프면 집에 가서 찬밥을 먹고 다시 놀았습니다.
동네 우물가에서 박카스 병을 줄에 매달아 물을 퍼 올리기도 했습니다.
지금 우리 아이들은 그런 놀이와 그런 기쁨을 느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경제 발전과 아파트의 편리한 삶을 대가로 소중한 많은 것들을
상실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풍요로운 삶도 좋고, 경제의 발전도 좋은데,
우리 사회는 우울증은 더 늘어나고, 이웃과의 따뜻한 정은 더욱
각박해져가는 세상에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만들어가야 하는
공동체는 무엇인가? 참된 행복은 무엇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가를
생각합니다.
많은 분들이 미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합니다. 그동안 자신을
감싸고 있었던 원망과 불평이 사라지는 것을 체험합니다. 성령께서 참된
자유를 주시고 마음 깊이 있었던 상처를 치유해 주시는 것을 체험합니다.
경제적인 어려움도, 가족의 불화도, 갑자기 찾아온 병도, 이웃에게 느꼈던
서운한 감정도 우리는 미사를 통해서 치유 받을 수 있습니다. 행복은
감사의 문으로 들어온다고 합니다. 불행은 불평의 문으로 들어온다고
합니다. 우리가 오늘 감사를 드린다면 하느님의 크신 사랑으로 우리는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불평과 원망의 옷을 입고 있다면 우리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불평과
원망의 옷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마음을 함께하지 못하면 이곳에서
하느님 나라의 잔치를 열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느님 잔치에 함께
하지 못합니까?
첫째, 교만한 사람입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하느님은 이미 높은 분이
아닙니다. 자신만이 모든 것을 알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잔치에 초대를 받았어도 가지를 않습니다.
둘째, 독선적인 사람입니다. 그들은 자신만이 초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남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이해를 못합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보다 못한 사람이 초대를 받은 것에 대해서 이해를 못합니다.
결국 그런 사람들은 초대를 받았지만 가지 않습니다.
셋째, 시기와 질투하는 사람들입니다. 모든 것을 자신의 잣대로 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땀과 노력을 인정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아주 고약한
병입니다. 저도 예전에 이 병에 걸려서 상당히 고생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잣대로, 사랑의 잣대로 보기 시작하면 이 병은 금세
치유될 수 있기도 합니다.
그럼 하느님의 잔치에 초대받기 위해서 그 초대에 응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까! 다행스럽게도 오늘 제 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 해답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을 힘입어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의 모든
능력과 힘은 결국 하느님께서 주신다는 겸손한 마음입니다. 또한 어떠한
처지에 있다 해도 감사할 줄 아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그
하느님께서는 나의 모든 수고와 땀과 노력을 알아주시고 결국은 나를
당신의 나라로 초대하신다는 절대적인 믿음 이것이 우리가 하느님의
초대에 응답하는 바른 자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예복’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그것은 화려하고, 값비싼 옷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예복은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감사의 옷을 입을 때, 우리가
나눔의 옷을 입을 때, 우리가 인내의 옷을 입을 때, 우리가 용서의 옷을
입을 때 우리는 참된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저에게 힘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모자라거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하느님 안에서 감사의 옷을, 인내의 옷을, 나눔의 옷을, 사랑의 옷을
입도록 합시다. 그러면 우리는 그 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신부의 합당한 옷은 신랑을 전부로 여기는 마음
2014년 가해 10월12일 연중 제28주일
<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
복음: 마태오 22,1-14
< 신부의 합당한 옷은 신랑을 전부로 여기는 마음 >
어느 날 사탄이 열개의 병을 들고 한 청년을 찾아와서 여기 아홉 개의
병에는 꿀물이 들어 있고 한 개의 병에는 독약이 들어있는데 꿀이 들어있는
병을 찾아 마시면 엄청난 액수의 돈을 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처음엔 돈이 아무리 좋아해도 생명과 바꿀 수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계속 유혹하는 사탄의 간청에 청년은 ‘열 병중에 딱 한 병인데...’하며
떨리는 손으로 병 하나를 골라 마셨습니다.
다행히 죽지 않고 살아난 청년은 돈을 받으며 다시는 자기를 찾아오지
말라고 사탄에게 말했습니다. 청년이 방탕하게 살다가 돈을 다 탕진했을
무렵, 사탄이 또 나타났습니다. 그 청년은 사실 마음으로 사탄을 부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탄은 이번에는 아홉 개중 하나를 마시면 돈을 두 배로
주겠다고 제안합니다. 청년은 돈이 필요했기에 이번에도 모험을 했고
다행히 이번에도 꿀물을 마시고 두 배의 돈을 받았습니다. 청년은 그렇게
쉽게 번 돈으로 인생을 즐겼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알콜, 마약중독 등으로
삶이 허물어져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계속 사탄을 불러댔습니다. 계속 그 위험한 선택을 했고 하면 할수록
두려움마저도 사라져가고 있었습니다. 돈이라면 영혼까지 팔아도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나이가 들어 이젠 ‘돈 벼락이냐, 죽음이냐’하는
마지막 인생의 승부를 거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미 노년에 이른 그는
남은 두 병 중 한 병을 식은땀을 흘리며 꿀꺽 삼켰습니다.
“아! 나는 이겼어. 끝까지 살아나고야 말았어! 이제 어서 돈을 내놔라.”
승리에 도취되어 어쩔 줄 모르는 노인에게 사탄은 마지막 병을 스스로
마시면서 “후후, 처음부터 독약이 든 병은 없었지. 그러나 너는 이미
돈이라는 독약에 죽어가고 있었던 거야! 너는 청춘을 돈이란 종이에 얽매어
노예로 살다가 그것에 묶여 영원한 것을 잃어 버렸다. 자 이제까지 받은
돈의 대가를 지금부터 내가 있는 곳으로 와서 고통과 함께 지불해야 할
것이다. 하하하~~~”라고 하며 돈을 부여잡고 죽어가는 그를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속으로 끌고 들어갔습니다.
하나에 집착하면 다른 것은 잃고 맙니다. 이 주인을 섬겼다면 저 주인은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자신의 교만, 육체적 욕망, 세상의
유혹들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분을
받아들이면 마치 자캐오가 자신의 재산 절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한 것처럼 세상 것은 쓰레기가 돼 버립니다. 만약 세상 것이
소중하여 그것을 잃었을 때 내가 흔들린다면 아직은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전부가 되신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바로 그분만이 나의 구원자이시고 나의 사랑이시고 나의
신랑이시며 나의 전부가 되심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나의 전부라면 더
이상 필요한 것은 없어야 마땅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시며 자신이 가장 소중하다고 여기는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가차 없이 바칠 수 있을 때에야 믿음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믿음이 없는 이들은 그리스도와의 혼인잔치에 참석하지
못하여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비유말씀입니다.
즉, 임금으로부터 초대받은 많은 이들은 그 귀중한 초대를 거부합니다. 그
거부하는 이유는 세상 것을 더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것을 버리지
못했다는 것 자체가 믿음이 없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초대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 자체가 곧 죽음으로 심판받는 것이 됩니다. 관계는 같은
수준의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그 초대에 응답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하느님과의 정상적인 관계를 맺을 수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응답하여 왔어도 혼인의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쫓겨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 사람이 더 중요한데 그 이유는 앞에 나오는 21장을
설명해주는 상징적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22장 1절부터
14절까지인데, 저는 이것이 21장의 결론으로 서로 다른 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21장의 첫 번째 내용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성경은 요한 계시록에서 하느님의 어린양과 천상예루살렘이
혼인하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
안으로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것은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혼인을
상징합니다. 처음부터 예수님은 혼인 이야기를 하시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때 예루살렘은 ‘겉으로는’ 예수님을 잘 맞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성전 안에 들어갔더니 상황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 안에는
하느님을 섬기는 마음이 아니라 세상을 섬기는 마음만이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내용이 ‘성전정화’인 것입니다. 강도들의 소굴로 변해버린
성전, 이것이 바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세상을 섬기는 이들이었습니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믿지 않는 이들이었던 것입니다.
곧 이어 예수님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며 그들의 불신앙의 문제점을
밝히십니다. 그들은 아담과 하와가 자신들의 부끄러움을 무화과 나뭇잎으로
가리려 했던 것처럼 믿음의 열매가 아닌 자신들의 행위로 인정받으려던
이들이었습니다. 바로 이들이 의복을 갖추지 않은 이들입니다. 의복은
하느님의 어린 양의 피로 빨아 깨끗해진 것이라야 합니다. 천상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어린양의 피로 깨끗해진 이들만 들어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잎만 무성한 무화과를 저주하여 영원히 믿음의 열매가 맺지
못하게 하셨던 것처럼, 믿음이 아닌 자신들의 공로로 옷을 만들어 입으려
했던 유다인들의 불신앙을 저주하신 것입니다.
그 다음 이어지는 내용은 ‘두 아들의 비유’입니다. 맏이는 포도밭에 일하러
가지 않겠다고 아버지의 명을 거부했지만 나중에는 마음을 돌려 일을 하러
갔고, 작은 아들은 그 반대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두 아들의 비유를 통해서
당신에 앞서 파견된 세례자 요한을 믿었던 세리와 창녀들이 그를 믿지 않아
변화되지 않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보다 먼저 하늘나라로 들어가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지금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파견된 세례자
요한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당신을 증거하라고 열두 사도로 이루어진
교회를 파견하셨습니다. 결국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은 그분이 파견하신
교회를 믿는 행위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못된 소작인의 비유’를 들어주시며 세상 것에 집착하는 이들
안에서 당신이 어떻게 또 한 번 돌아가시는지 알려주십니다. 포도원
소작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느라고 주인의 아드님까지 죽이게 됩니다.
주인의 아드님은 포도원에 오십니다. 그러나 이미 세상 것에 집착하여
믿음을 저버린 이들 안에서 또 돌아가십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마음에도
말씀과 성체로 들어오시지만 우리가 세상 것에 얽매여 있을 때면 또 우리
안에서 죽임을 당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이 내 안에서 죽으면 구원도 함께
죽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에 이어서 나오는 것이 오늘 혼인잔치의 비유인 것입니다.
구원은 그리스도와의 혼인으로 이루어지는데 그 혼인은 믿음으로 그분의
초대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것에 집착하는 이들은 믿음이
없음이 증명되어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설사 그 초대에 응했더라도
합당한 믿음의 옷을 입지 않고 겉으로 신앙생활을 하지만 삶으로는 세상
것에 집착한다면 마지막 날에 역시 쫓겨나게 되리란 것입니다.
흰 옷은 그분에 합당한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 합당한 변화란 세상
것을 끊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성전이 세상 것으로 더럽혀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외에는 세상 것이 나에게 영향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신부에게는 신랑이 전부가 되어야 합니다. 애정이나 재산, 명예나 자녀
등으로 괴로워 못 견딘다면 그리스도는 그 안에서 어떤 역할도 하지 못하고
또 돌아가시고 맙니다. 이 세상 것 모든 것을 끊을 수 있다면 이젠
혼인잔치에 합당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어렸을 때 저녁때가 되면 동네에 항상 같은 풍경이 펼쳐집니다. 뛰어놀고
있는 우리들을 향해 각자의 집에서부터 엄마들이 “밥 먹어라~~~”라고
부르는 소리들이 들려옵니다. 그러나 구슬치기, 딱지치기, 전쟁놀이에
열중하다보면 엄마의 말이 잘 들리지 않습니다. 나중에 엄마의 큰 소리가
나야 정신을 차리기 시작합니다. 그때는 정말 엄마의 따듯한 사랑이 담긴
저녁식사보다도 나중에 쓰레기통으로 들어갈 의미 없는 구슬이나 딱지에
왜 그리 집착했는지 모릅니다.
지금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초대에 쓰레기와 같은 세상
것들에 집중하며 그분의 초대를 거부합니다. 혹은 성체를 모시는
감사보다도 봉헌하는 헌금을 더 아까워하기도 합니다. 믿음이란 바로
그리스도를 위해 이 세상 것들이 가치를 잃어버리게 될 때 증명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치며 믿음을 증거해 복의 근원이 된
것처럼, 우리 또한 스쳐지나가는 이 세상 것들을 휴지조각처럼 여길 수
있는 마음을 청합시다.
이번 일주일간은 사제 연수가 있어서 복음묵상이 없겠습니다. 다녀와서
뵙겠습니다. 행복한 한 주 되십시오 ~ ^^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기타] 하느님의 부르심은 공평합니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하느님의 초대가 마감되는 시간은
늘 공평하게 각자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2014년10월12일 연중 제 28주일 복음묵상
“초대받은 이들에게,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혼인 잔치에 오시오.’
하고 말하여라.”(마태오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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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우리가 하느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셨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자신들이 신앙을 선택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앙적 관점에서 볼 때, 하느님께서 우리를 초대하셨고, 따라서
우리는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응답한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부르심, 즉 값진 초대를 받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초대를 받아들이고 거부하고는 모두 우리의 몫입니다.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여러분은 분명 초대에 응한 것입니다.
하지만 각자의 응답이 정말 그분의 초대에 올바른 응답으로서 그 모습을
갖추고 있는지는 평생 각자가 살펴보아야 할 부분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공평합니다.
그리고 그 부르심에 대한 응답의 결과 역시 공평할 것입니다.
결국 주어진 시간 안에 응답하면서 살아가는 삶이 신앙인의 삶입니다.
응답을 한다는 것은 요구하는 쪽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요구에,
부르심에 어떤 마음과 자세로 응답을 하면서 살아가야 할 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초대가 마감되는 시간은 늘 공평하게 각자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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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서울] 하늘나라 탄생할 준비
2014년 가해 10월12일 연중 제28주일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 마태오 22,1-14<또는 22,1-10>
하늘나라 탄생할 준비
세상에 태어났으니 언젠가는 갈 수밖에 없습니다. 변하는 세상이니까요
세상에 태어나는 게 기쁜 일이라면 하늘에 태어나는 건 더 기뻐해야지요.
하늘을 천당 연옥 지옥 환생 여러 가지로 이야기하니 복잡한 모양입니다.
세상엔 상황적으로 탄생하지만 하늘엔 삶의 조건 따라 태어나나 봅니다.
태어날 땐 모르고 태어나지만 죽을 때는 알고 죽는 게 훨씬 좋지 않습니까?
세상 살면서 하늘나라 탄생할 준비는 높은 분의 혼인잔치 참석준비라 하네요.
“하늘 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마태오 22,2)”
- 서울 대 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수도회] 축제의 삶을 살기위하여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10월12일 연중 제28주일
이사25,6-10ㄱ 필리4,12-14.19-20 마태22,1-14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 마태오 22,1-14<또는 22,1-10>
축제의 삶을 살기위하여
실로 중요한 것은 꿈이요 희망이요 비전이요, 이들이 사람을 고결하게
합니다. 잘 먹어서 건강이 아니라 꿈이, 희망이, 비전이 생생할 때 심신의
건강입니다. 꿈을, 희망을, 비전을 잃으면 서서히 타락이요 건강도
잃습니다.
산티아고 순례를 하면서도 절실히 깨달은 것은 '영양신화'에서 해방되자는
것입니다. 영양가가 있든 없든 생생한 희망이 있어 기쁘게 먹고 힘껏 살면
저절로 건강해집니다. 굳이 건강식품을, 보조식품을 먹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니 최고의 식이자 약은 희망이요 꿈이요 비전임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은 축제의 삶을 살기위한 방법에 대한 묵상입니다.
첫째, 희망을 지니십시오.
우선적으로 지녀야 할 바 희망이요 꿈이요 비전입니다.
이런 희망에서 샘솟는 열정이요 의욕입니다.
성경의 사람들 모두가 희망의 사람들, 꿈의 사람들입니다.
바로 예언자들이 그러합니다.
실로 위대한 지도자들은 이런 희망을, 꿈을, 비전을 제시해 주는
사람들입니다. 1독서 이사야의 비전은, 꿈은 얼마나 희망에 넘치는지요.
"그분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겨레들에게 씌워진 너울과 모든 민족들에게
덮인 덮개를 없애시리라. 그분께서는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리라.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주시리라."
얼마나 빛나는 꿈의 비전인지요.
이 거룩한 미사잔치를 통해 은연중 깨닫는 현실이 아닙니까?
바로 우리의 희망은, 꿈은, 비전은 하느님 그분이심이 다음 고백을 통해
감격스럽게 계시됩니다.
"보라, 이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이분께 희망을 걸었고 이분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이분의 구원으로 우리 기뻐하고 즐거워하자.
주님의 손이 이 산 위에 머무르신다."
미사를 통해 실현되는 이런 하느님의 꿈입니다.
바로 하느님 자신이 희망과 꿈, 비전의 원천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하느님을 모실 때 비로소 삶은 축제가 됩니다.
둘째, 삶을 즐기십시오.
하느님이 그 삶의 희망이자 꿈이, 비전이 될 때 자유입니다.
세상속에 살되 세상에 초연한 자유인의 삶입니다. 실로 환경이 지유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꿈이, 희망이 자유롭게 함을 깨닫습니다.
이때 다음 바오로의 고백은 나의 고백이 됩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모자라거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나의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영광스럽게
베푸시는 당신의 그 풍요로움으로, 여러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실 것입니다."
어떤 환경 속에서도 자유를 누리는 대자유인 바오로 사도입니다.
영원한 희망이자 꿈이신 주님 안에 살기에 이런 축제의 삶입니다.
주님께서 힘을 주시기에 이런 자유인의 삶, 축제의 삶입니다.
셋째, 축제의 초대에 응하십시오.
삶은 고해가 아니라 축제입니다. 잔치입니다. 삶의 잔치입니다.
혼자서는 결코 축제의 삶을 맛볼수 없습니다.
삶의 의미도, 깊이도 결코 계시되지 않습니다.
공동체를 통한 주님의 초대에 응할 때 비로소 축제의 삶입니다.
"초대받은 이들에게,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혼인 잔치에 오시오. 하고 말하여라."
혼인잔치가 상징하는바 삶의 축제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가 삶은 축제임을 웅변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초대에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어떤자는
장사하러 갔고,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 합니다.
삶의 축제에 참석할 절호의 기회를 놓친 현대인들을 상징합니다.
주님은 끊임없이 우리를 교회공동체를 통해 삶의 잔치에 초대하십니다.
세례로 끝난 초대가 아닙니다.
끊임없는 회개로 믿음과 희망, 사랑으로 옷입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예복을 입어야 합니다.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
예복을 입지 않아 혼인잔치에서 쫓겨난 이가 믿는 우리 모두에게 경각심을
줍니다. 과연 주님의 미사잔치이 초대에 응한 우리들, 이 잔치에 맞는
예복을 입으셨는지요.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습니다. 끊임없이 공동체 삶의 잔치에서 확인해야 할 우리의 예복입니다.
삶은 축제입니다.
주님은 연중 제28주일 축제의 삶을 살기위한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1.희망을 지니십시오. 하느님이 희망이십니다.
2.삶을 즐기십시오. 언제 어디서나 자유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3.주님의 초대에 응하십시오. 주님은 언제나 당신 축제의 삶에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를 당신 축제의 삶에
초대해주십니다. 미사은총이 우리 삶을 고해의 삶에서 축제의 삶으로
바꿔주십니다.
"부자들도 궁색해져 굶주리게 되지만, 주님을 찾는 이에게는 좋은
것뿐이리라."(시편34,11).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신부 -
◈ [수도회] 하늘나라의 실체
2014년 가해 10월12일 연중 제28주일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 마태오 22,1-14<또는 22,1-10>
하늘나라의 실체
우리 모두에게 언제나 궁금한 궁극적이면서도 본질적인 질문 하나가
있습니다. 언젠가 입국하게 될 하늘나라의 실체입니다. 한 봉쇄 수녀원
부활성야 미사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전례를 목숨처럼 중요시하는
수녀님들이기에 갖은 정성을 다 기울여 미사 전례를 준비했습니다. 참석한
사람들은 아름다운 전례에 감동했고 너나할 것 없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생생하게 체험했습니다.
잘 아시는 바처럼 부활성야 미사는 독서도 한 두 개가 아니고 빛의 예식도
추가되는 등 소요시간이 만만치 않습니다. 그러나 거룩하고 정성스런
분위기에 압도되어 깊이 몰입하니 전혀 시간가는 줄을 몰랐습니다. 거룩한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회중은 그 말씀을 진지하게 묵상한 뒤 아름다운
성가로 응답하는 과정을 반복했습니다.
당시 그 거룩한 전례의 자리에 함께 있으면서 문득 든 생각입니다.
‘하늘나라에서 펼쳐질 광경은 아마 이런 광경이 아닐까? 하느님이 중심에
자리하시고 성모님·요셉 성인과 더불어 수많은 성인성녀들이 함께 하시며,
사랑으로 충만한 뽑힌 이들이 둘러앉아있는 곳 말입니다. 그곳에서는 항상
하느님의 따뜻한 사랑과 격려의 말씀이 선포되며, 함께 자리한 사람들의
기쁨에 찬 찬미의 응답이 계속해서 울려 퍼지는 곳.’
사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하늘나라에 초대되지만 어떤 사람들 특히
영성생활에 맛들이지 못한 사람들, 기도생활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그런 분위기가 너무나 지루하고 괴로워 마치 생지옥 같은
느낌이 들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그들이 지상에서 그토록 즐겨보던 막장 드라마도 더
이상 없습니다. 더 이상 상다리 부러지는 휘황찬란한 연회상도 없습니다.
그들 입장에서 그저 밋밋하기만 한 말씀 잔치만 되풀이되니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그러니 이 지상에서부터 ‘밋밋한’ 천국 생활을 준비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검소하고 단순한 생활 습관, 작은 것에 만족할 줄 아는 천진난만한 생활
태도, 쉬지 않고 기도하는 영적생활.
사실 하늘나라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향해 활짝 열려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대자대비하신 분,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상관없이 골고루
비를 내리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죄악이 진홍빛 같다 할지라도, 지난 삶이
너무나 부끄러워 쥐구멍만 찾는다 할지라도, 너무나 부당해서 매일 가슴을
친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무나’ ‘만나는 대로’ 그저 존재
자체로 세상 모든 사람들은 잔치에 초대하십니다.
단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천상복락에 참여하기 위한 한 가지 작은 조건이
있습니다. 잔치에 합당한 예복을 갖춰 입는 것입니다. 그 예복도 그리
복잡하지 않습니다. 잔치 주인이신 하느님의 적극적인 초대에 두말 하지
않고 응하는 것입니다. 천국 생활이란 하느님께서 차려놓으신 산해진미를
감사하며 만끽하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것이며 그분 권고에
따라 회개의 삶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수도회] 혼인[단상]
2014년 가해 10월12일 연중 제28주일
제1독서
<주님께서 잔치를 베푸시고,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25,6-10ㄱ
제2독서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필리피서 말씀입니다. 4,12-14.19-20
복음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2,1-14<또는 22,1-10>
연중 제28주일(2014년 10월 12일) 혼인
혼인의 상징은 영성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에 있습니다. 남녀가 혼인을
통해서 온전히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됩니다. 그래서 혼인이야말로 하느님과
우리의 합일을 가장 잘 드러내는 상징이 됩니다.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고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진리, 선, 미, 가치, 생명, 기쁨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당신 아드님을 통해서 하느님은 당신 자신과 우리를
온전히 일치시키고자 원하십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마음을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왕의 비유를 통해서 알려주셨습니다.
우린 살면서 끊임없이 저울질합니다. 이것이 좋은가, 저것이 좋은가 하며
고민에 고민을 합니다. 좋은 쪽으로 따라갑니다. 오늘 이 아침 주님은
우리에게 선택의 기회를 선물로 주십니다. 무엇을 택할 것인가는 우리의
몫이며 책임입니다. 사실 우리는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많은 사람들처럼 이
핑게 저 핑게되면서 가장 좋은 ...하느님과 합일하는 은혜를 회피합니다.
주님께는 마음의 문을 닫고 하느님 아닌 다른 것에 문을 엽니다. 본당
신부로 일할 때 많은 신자들이 주일 미사에 와서 주님과 하나되는 기회를
택하지 않고 다른 일에 마음을 빼앗겨 그쪽으로 가는 것을 많이 봤습니다.
또 미사에 와서도 온전히 주님께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두고 온 다른 일에
마음을 빼앗겨 몸만 성당에 있는 것도 느꼈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이 마음에 남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 -
◈ [청주] 기뻐하고 즐거워하자|반신부의 복음 묵상
연중 28주일 (마태오 22,1-14 : 이사야25,6-10 : 필리4,12-20)
2014년 가해 10월12일 연중 제28주일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 마태오 22,1-14<또는 22,1-10>
기뻐하고 즐거워하자.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감곡매괴성모성당 성체현양대회 100주년 감사미사를 성대하게 거행할 수
있도록 기도와 사랑으로 함께 해 주신 모든 분들께 마음을 다해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아울러 우리의 수고와 땀을 주님께서 헤아려 주시고
풍성히 갚아주시리라 확신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가 성체 안에
하나가 되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귀한 연장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 날의 감동이 매순간 살아나기를 기도하며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늘 기억하고 삶의 쇄신을 이루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내년을 준비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착한 사람, 악한사람
할 것 없이 모두를 사랑하시고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비를 내려 주십니다.
그리고 모두를 당신 구원의 잔치에 초대하십니다. 그러나 모두가 구원을
받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합당한 준비로 초대에 응한 사람이라야 잔치의
기쁨을 나누게 됩니다. 이 시간, 부르심과 응답에 관해 묵상하는 가운데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로움이 함께하시길 바랍니다.
어렸을 때‘도깨비 방망이’ 이야기를 기억합니다. ‘금 나와라 와라, 뚝딱!
은 나와라, 와라 뚝딱!’ 하고 방망이를 두드리면 원하는 것을 다 얻을 수
있다는 얘기였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방망이지만 두드리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전래동화‘요술감투’이야기도 있습니다. 그 감투를 쓰면 다른 사람이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것 역시 쓰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재능이 많아도 끄집어내어 쓰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부뚜막의 소금도
넣어야 소용이 있게 됩니다.’‘구술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좋은 마음이 있어도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2,17) 라고 했습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이런 말씀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구원에로 초대 되었지만 결코
아무나 구원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초대에 합당히 응하는 사람이라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매번 구원의 잔치가 베풀어지고 거기에 초대를
받았지만 이런저런 핑계거리가 기회를 놓치게 합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 나라를 혼인잔치의 비유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왕이
종들을 보내 초대 받은 사람들을 잔치에 불러오게 했습니다. 소와 살진
짐승도 잡아 모든 것이 넉넉하게 준비되었습니다. 그러나 초청 받은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초청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밭으로 가고 어떤 사람은 장사하러 가고 또 어떤 사람은 종들을 때려주며
귀찮게 하지 말라는 마음을 표현하기까지 했습니다(마태22,5). 다시
말하면, 자기 살기에 바빠서 남의 집 잔치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불러준
사람의 호의를 무시하고 자기의 일상에 바빠 잔칫상을 외면했습니다.
이제 처음에 초대된 사람의 빈자리를 다른 사람이 채우게 됩니다. 그런데
나중에 초대 받은 사람 중에도 예복을 입지 않아 꾸중을 듣게 됩니다.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마태22,12). 결국은 그도
바깥으로 쫓겨났습니다.
여기서 예복이란 깨끗한 마음의 준비를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주님은 잃었던 아들에게 새 옷을 입혀주심으로 방탕으로부터 벗어난 새
삶을 축복해 주십니다(루가15,22). 바오로 사도는 세례로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난 사람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었습니다”(갈라3,27).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말씀을 통해 새
삶을 요구하고 계시는데 옷의 표현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헌 옷에 기워 댄 새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진다” (마르코2,21).
묵시록7장 11절 이하를 보면 옥좌에 앉은 사람들 이야기가 나오는 데 원로
가운데 하나가 “희고 긴 겉옷을 입은 저 사람들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느냐?”하고 묻자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낸 사람들입니다. 저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만들었습니다. …..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입니다.”
22장14절에서도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빠는 이들은 행복하다.
그들은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 권한을 받고, 성문을 지나 그 도성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고 말씀하십니다. 예복은 거룩한 마음을 지니는
것입니다. “나는 주 너의 하느님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자신을
거룩하게 하여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11,44). “주님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루카1,50).
결국 초대에 응한다는 것은 그만한 마음의 준비가 따라야 하는 것이고
그렇게 하면 또 그만한 자비를 체험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상
안에서 하느님의 부름에 응답하십시오. “핑계 없는 무덤 없다”고했는데 이
핑계, 저 핑계 대지 말고 마음을 하느님께로 향하십시오.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말을 듣지 않는구나! ”(마르14,38).하신 예수님의 한탄이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합니다. 마음으로는 영적으로 풍요로워지고 주님을
체험했으면 좋겠다고 하면서도 그것을 위한 수고와 땀은 외면하는 게
현실입니다.
영적으로 풍요로워질 수 있는 미사참례, 성체조배, 기도와 찬미의 밤,
레지오 마리애, 성령기도 모임, 빈첸시오, 신심단체 모임등의 잔칫상이
차려 있어도 참석하지 않으면 그만한 은총을 체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번 성체현양대회에도 멀리 해외에서도 부산, 대구, 진주, 서울, 인천,
춘천 등 곳곳에서 오셨습니다. 그런데 본 바닥에 계신 우리 본당 신자
중에도 참석하지 못하신 분이 계십니다. 정말 은총은 풍부한데 담을 그릇이
없는 것입니다. 잔치를 준비 하고 초대하지만 역시 밭으로 가고, 장사하러
가고, 주일이나 지키면 되지 뭐 그런 것이 필요하냐? 고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야말로 ‘등잔 밑이 어둡다’는 표현이 맞습니다. 은총의 순간을
은총으로 느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성모순례지성당의 신자로서 성모님 신심이 얼마나 깊은지 점검하고,
성체대회를 거행하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신앙의 후예로써 성체께
대한 올바른 신심이 확고하게 자리매김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주일미사,
평일미사참례, 성체조배를 하는 사람이 다른 어느 본당보다 많아지기를,
묵주기도를 더 많이 봉헌하는 신자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성대하고
장엄하게 성체거동을 할 수 있음에 감사하며 더 성숙한 모습으로 다음을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사실 믿음은 무엇을 우선순위에 놓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주님을 만나고
그분의 은총을 입기를 희망하면서도 신앙모임보다는 친목단체 모임을 더
소중히 생각하고 그것을 챙깁니다. 세상의 바쁜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앞세우면 주님은 그만큼 뒷전으로
밀려나게 됩니다. 내 것을 먼저 챙기고 그 다음에 주님 것을 챙기려 한다면
도깨비 방망이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두드리지 않는, 요술감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쓸 줄 모르는, 재능이 있으면서도 쓸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마음은 있는데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게 하는 방해꾼이 있다면 그 장애물을
거두어 주십사 기도해야 합니다. 참으로 신앙생활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마태22,14).
이 말씀은 구원의 문은 모든 이에게 열려 있지만 분명코 모두가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추수 때에 알곡은 곳간에 쌓여지고,
쭉정이는 불에 태워지듯 마지막 날에 스스로가 선택한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누가 구원의 문에서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그 잔치에 들어가지 않아서 그 풍요로운 혜택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초대에 응하는 단호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행동으로 답하면
“나의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영광스럽게 베푸시는 당신의
그 풍요로움으로, 여러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필리4,19).
또한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 주시리라”(이사25,8).하신 주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일상 안에서의 부르심에 응답할 기회를 결코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이분께 희망을 걸었고 이분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이분이야말로
우리가 희망을 걸었던 주님이시다. 이분의 구원으로 우리 기뻐하고
즐거워하자. 주님의 손이 이 산위에 머무르신다."(이사25,9-10).고백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 믿음을 위하여 열심히 싸워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십시오. 그대는 많은 증인 앞에서 훌륭하게 신앙을
고백하였을 때에 영원한 생명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1디모 6,12).
성 베르나르도의 고백에 함께 하고 싶습니다.“내 행복은 오직 주님 곁에
있는 것, 내 주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일 뿐입니다.”
오늘 이렇게 함께 하시는 여러분은 선택받은 분이십니다. 선택받음을
기뻐하고, 이 상태를 잘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주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가운데 구원의 완성을 이루시길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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