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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가해 10월18일 성 루카 복음 사가 축일
[청주] 한 눈 팔지 마라.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제1독서 2티모 4,10-17ㄴ
† 복음 루카 10,1-9
전승에 따르면, 루카 복음사가는 시리아의 안티오키아(현재는 터키의
안타키아) 출신이다. 바오로 사도의 전교 여행에 함께하였던 그는 주님의
복음과 복음 선포의 상황을 기록하였다. 곧 루카 복음서와 사도행전이다.
루카는 다른 복음사가들과는 달리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관한 부분을 성모
마리아와 함께 상세하게 묘사함으로써 ‘성모 마리아를 최초로 그린
화가’라고 불리기도 한다. 또한 그의 직업이 의사였다는 전승이 있는데,
예수님의 치유의 기적들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 바오로 사도는 그가 어려움에 놓였을 때도 함께해 준 루카에 대하여
언급한다. 또한 변론 때 자신을 굳세게 해 주신 주님의 은총에 대하여
전한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일흔두 제자를 둘씩 짝지어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파견하신다. 그러시면서 제자들에게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 청하라고 이르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은 루카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루카 복음서에는 이스라엘 민족을 넘어
세상 모든 민족들에 대한 보편적 복음 선포의 신학이 잘 드러납니다. 복음을
묵상하면서 그리스도인은 모두 주님의 ‘제자’로 파견된 존재이며, ‘선교사’
라는 점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심정을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 보내는 것’ 같다고 표현하십니다. 복음 선포를
위하여 파견되는 곳에는 큰 위험과 유혹과 난관이 있을 수 있다는 마음의
준비를 시키시는 말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복음 선포의 어려움은 무엇보다도 현대 사회의
복잡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소비 사회, 낭비 사회, 잉여 사회, 하류 사회,
허기 사회, 위험 사회, 분노 사회, 감시 사회, 과로 사회, 피로 사회, 승자
독식 사회, 격차 사회, 부품 사회, 제로섬 사회, 분열 사회, 루머
사회 …….’ 한국 사회를 진단한 한 사회학 신간의 목차에 등장하는 낱말들만
보아도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 사회가 얼마나 다양한 병리 현상에
시달리는지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복잡다단한 사회에 대한 분석은 필요하지만 그러한 분석을 하면서 종종
비관적 관점이 자라나는 가운데 확신에 찬 복음 선포의 용기가 사라지곤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얽히고설킨 사회 속에서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구원의 기쁜 소식은 언제나 ‘본질’에 집중하는
가운데 하느님과의 만남에 희망을 두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지난 8월에 우리나라를 다녀가신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현대 세계의 복음 선포에 관한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에서 제시하신
통찰은, 우리가 파견된 제자로서의 삶을 어디서부터 시작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오늘날 세상의 가장 큰 위험은 온갖 극심한 소비 주의와 더불어
개인주의적 불행입니다”(2항). “저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어디에 있든 바로
이 순간 새롭게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으로 만나도록,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그분과 만나려는 마음, 날마다 끊임없이 그분을 찾으려는 열린
마음을 가지도록 권고합니다. 그 누구도 이러한 초대가 자신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3항).
- 매일 미사 -
◈ [인천] 주님만이 해답입니다.
2014년 가해 10월18일 토요일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 루카 10,1-9
괜찮은 청년 하나를 만났습니다. 여러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신학교에
들어가서 장차 사제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래서
제가 혹시 라는 마음으로 말했습니다.
“너 신학교 가라.”
이 말에 단 1초도 주저하지 않고 이렇게 말하더군요.
“신부님, 저는 외로운 것은 못 참아요.”
이 말에 사제로 산다는 것이 ‘외로운 것’인가 싶었습니다.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기 때문에 ‘외롭다’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연애를 하고
있으면서도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계속해서 애인을 바꾸는 어떤 청년이 있었습니다. 애인은 계속해서
생기는데, 사귀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친구가
물었지요.
“왜 너는 이렇게 애인을 자주 바꾸니?”
“누군가를 사귈 때 처음에는 좋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유가 없는 거야.
나를 너무 구속하는 것 같고... 그래서 결국은 헤어지지. 그런데 혼자
지내다보면 너무 외로워서 금방 또 다른 누군가를 사귀게 되더라고.”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하지요. 결혼은 판단력 부족, 이혼은 인내력 부족,
재혼은 기억력 부족이라고요……. 그런데 정말로 친구나 애인을 사귄다고
해서 외롭지 않을까요? 그 안에서 또 다른 외로움을 겪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상대방이 나를 이해해주지 못한다고 외로워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그렇다면 외롭기 때문에 사제가 될 수 없다는 청년의 말은 옳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외롭지 않기 위해서는 어쩌면 사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왜냐하면 나를 이해해주시고 나와 언제나 함께 하시는 주님을 더욱 더
느끼게 되고 그래서 외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을 맞이해서 복음은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라는 예수님 말씀을 전해줍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따르는
일꾼이 적다는 것이지요.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는 주님을 따른다는 것에
커다란 두려움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또한 외로울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것으로 외로움을 극복하려는 어리석음을 우리는 많이 간직합니다.
또한 돈과 명예를 추구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행복할 것이라는 착각도
갖지요. 그러나 더 많은 것을 얻고 더 높은 곳을 올라가도 외로움은 극복될
수 없습니다. 또 다른 욕심과 이기심이 더 큰 외로움을 내게 주기
때문이지요.
결국 주님만이 해답입니다. 주님만이 나의 모든 외로움을 극복해주고 참
행복의 길로 인도해주십니다. 어디에서 행복을 찾고 있었는가를 다시금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자기가 얼마나 자주 타인을 오해하는가를 자각하고 있다면 누구도 남들
앞에서 함부로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괴테).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세요.
이 세상에 실패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사업을 시작하시는
분에게 “혹시 실패할 것을 예상하고 사업하시는 것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아마 뺨 맞을 것입니다. 성공을 위해 사업 하는 것이지, 실패를 꿈꾸면서
사업을 하는 사람은 당연히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절대로 실패하지 않는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도전하지 않는 것입니다.
일본 심리 상담가인 에토 노부유키는 20년 이상을 기업의 현장에서 많은
상담을 하면서 뛰어난 인물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 공통점은 ‘엄청나게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패해도
좌절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실패를 원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실패했다고 해서 좌절할 필요도 없습니다.
도전했다는 것 그 자체로 충분히 가치가 있는 것이며, 또한 성공에 더
가까이 다가섰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언제나 희망의
메시지를 주십니다. 나는 혼자가 아니라, 전지전능하신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항상 힘을 내어 살아야 할 것입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서울]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2014년 가해 10월18일 토요일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 루카 10,1-9
오늘은 루가 복음 사가의 축일입니다. 루가 복음에서 나오는 ‘마리아의
노래, 즈가리야의 노래, 예수님의 사명, 착한 사마리아 사람, 돌아온 탕자,
자캐오, 엠마오로 가는 제자’의 이야기는 모두 십자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 십자가를 받아들이면 축복과 은총, 사랑과 기쁨이 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길의 끝은 부활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사도들은 죽음의 길도 감사하면서
받아들였습니다. 오늘 나의 삶에 주어지는 ‘십자가’ 그것은 바로 은총의 길,
구원의 길입니다.
복음화 학교 공동체와 함께 용문 청소년 수련장엘 다녀왔습니다.
양근성지에 가서 기도를 하고, 수련장에서 식사를 하였습니다. 물안개가
피어나는 한강을 보았고, 가을걷이가 한창인 들판을 보았습니다. 이제
조금씩 단풍이 드는 산을 바라보았습니다. 씨앗을 품은 코스모스가 바람에
흔들렸습니다. 본다는 것, 볼 수 있다는 것은 커다란 축복입니다. 이 가을,
잠시 도시를 떠나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아름다운 자연을 보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또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책을 통해서, 공부를 통해서 보는 것입니다. 경제의 흐름, 정치 상황, 문화와
예술을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식의 눈입니다. 소설을 읽으면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가을, 한편의 시를
읽으면 좋겠습니다. 이 해인 수녀님의 가을편지는 어떨까요?
예언자들, 깨달은 사람들은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그래서 살아 있는 것들과 대화를 할 수 있었습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평생 가난한 이들의 친구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를 수 있었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대지를 적시고, 많은 열매를 맺기 마련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하느님을 믿고 알아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그 보다 더 큰
축복은 없을 것입니다. 이 가을, 하느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피정을 해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또 다른 시선들이 있습니다. 많이 배운 것으로 남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욕심과 탐욕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나보다 못한 사람은 무시하고,
나보다 잘난 사람은 질투하는 사람은 세상을 독선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욕망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소박한 가정의 참된 행복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이 가을, 우리는 어떤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을까요?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한 눈 팔지 마라|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10월18일 토요일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루가10,1-9)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 루카 10,1-9
한 눈 팔지 마라.
고등학교를 다닐 때 자취생활을 하였습니다. 신부가 된 후에도 특수사목에
종사하다 보니 자취 아닌 자취생활을 할 때가 많았습니다. 안타까웠는지
많은 분들이 맛있는 반찬도 해 주시고, 곰국도 끓여 주셨고 좋아하는
미역국도 준비해 주셨습니다. 참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가끔 냉장고에 있는
국을 꺼내보면 국물에 기름이 엉겨있었습니다. 따뜻하게 데우면 기름이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사랑도 마찬가지 입니다. 사랑이 뜨거울 땐 상대방의 단점이 보이지
않습니다. 콩깍지가 씌웠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식으면 상대편의
단점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잔소리가 시작됩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열정도 그렇습니다. 뜨거운 열정이 있을 땐 미사참례를
자주하고 기도시간도 많이 챙기며 성경도 읽고 활동도 적극적입니다.
열정이 식으면 내 것 먼저 챙기고, 하느님의 몫을 뒤로 밀치게 됩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 다하고 그 다음에 하느님의 것을 챙기려 하니까 찜찜하기도
합니다. 사랑의 열정을 다시 일으켜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일흔두 명의 제자를 뽑아 파견하시면서 분부한 말씀을
기억합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 주머니도 여행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루가10,3).
이 말씀은 온전한 투신을 위해서는 한 눈 팔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선교사명을 받았으면 그것에 충실해야지 돈 주머니나 식량자루, 다른 어떤
것에도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장황하고 의례적인 인사에
허비할 틈도 주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리떼 가운데’보내는 것처럼
안쓰러운 마음이 있지만 내 사랑이 그 안에 함께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으면 엉뚱한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듯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요한15,9-10).
일상 안에서도 내 본업이 무엇이고 그것에 충실하고 있는가? 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혹 다른 부업에 마음을 더 쏟는 것은 아닌지…….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어머니는 어머니로서 그리고 자녀는 자녀로서의
본분이 있고 윗사람은 윗사람으로서 아랫사람은 아랫사람으로서의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직장에서도 각기 자기의 위치가 있습니다. 사실
근본을 잃으면 모든 것을 다 잃은 것입니다. 한 눈 팔지 말고 각자의 본분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나 혼자만의 구원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웃을 구원해야 할
소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루카10,2).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 일꾼이 바로 우리 자신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사실 온 세상이 우리의 활동 무대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주저하지 말고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의 부르짖음이 우리 안에
숨겨지지 않도록 우리는 능력에 따라 하느님 나라를 이웃에게 전해야
합니다. 선교의 사명은 우리 모두의 의무입니다.
기왕이면 돈 주머니도 여행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않은 채 더욱이 길에서
인사하느라 지체함도 없이 오로지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또 그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일꾼이 나오길 희망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가 있어야 말씀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는 한,
잘난 사람에게나 못난 사람에게나 가난한 이에게나 부자에게나 모든
계층과 연령의 모든 사람에게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하느님의 온갖 뜻을
꾸준히 전파하도록 합시다!” (성 그레고리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기타] 늘 죽어야 산다는 진리를 깨달으시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당신은 왜 그리도 많은 색깔들 중에 검은 색의 옷을 택하였소?
늘 죽어야 산다는 진리를 깨달으시오.(金雄烈 신부)
2014년 가해 10월18일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루카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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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월에 올렸던 묵상입니다. 저도 다시 읽어보며 마음을 다시 한 번
다져봅니다.)
십 년이라는 시간의 신학교 생활, 그 안에는 몇 차례의 힘든 고비를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저에게도 여러 번의 힘든 시간이 있었습니다.
신학과 3학년 때로 기억합니다. 순수함과 제법 잘 돌아가는 논리적인
머리로 인해서, 사제로서 살아간다는 의미에 대해 극도로 부정적인
생각으로 치달릴 때였던 것 같습니다. 하여간 여러 가지 어려움이
복합적으로 다가와 힘들어했던 시간이었습니다.
모든 의욕을 잃고 방에 처박혀있던 일들이 생각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느닷없이 큰 형 토마스 신부가 밥 한끼 같이 하자고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혜화동 로터리에 있는 삼겹살 집을 갔지요.
그냥 궁금해서 왔다는 형의 말에 그저 괜찮다고 답하면서 소주 잔을 주고
받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헤어질 무렵 형이 용돈과 함께 편지 한 장을 내 손에 쥐어주더군요.
헤어진 후, 방에 들어가 형이 준 편지를 읽었습니다. 지금도 편지지의
질감과 필체까지 기억하고 있는 형의 글이 눈에 생생합니다.
“당신은 왜 그리도 많은 색깔들 중에 검은 색의 옷을 택하였소!
늘 죽어야 산다는 진리를 깨달으시오.”
삼십 년이 흐른 지금도 힘이 들 때는 형이 주고 간 몇 자 안 되는 그 말을
떠올립니다. 돌아보면, 셀 수도 없는 힘든 시간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건강하게 고뇌하고 있을 많은 후배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수도회]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10월18일 토요일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2티모4,10-17ㄴ 루카10,1-9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 루카 10,1-9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국내든 국외든 성지를 방문할 때마다 감지하는 것은 평화입니다.
평화로운 분위기가 마음을 위로하고 치유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발현하실 때, '평화가 너희와 함께' 우선
선사하신 것도 평화였습니다.
새삼 인류 최상의 가치가 평화임을 깨닫습니다.
미사 중 제가 좋아하는 부분 역시 영성체 예식중, 주님의 기도와 빵나눔
사이에 위치해 있는 '평화예식'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교회(와 남북한 모두)를 평화롭게 하시고 하나되게 하소서"
저는 미사경문중, 가능하면 괄호 안의 문구를 꼭 넣어 읽으며 남북한의
평화통일을 기원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평화의 인사를 나누십시오."
"평화를 빕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최고의 선물이 평화요, 우리가 이웃에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 역시 평화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제자 일흔두명을
파견하시면서 평화를 선물할 것을 명하십니다.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하고 말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너희의 평화'라는 대목에서 '평화의 사람'으로서의 제자들의 특징이
드러납니다.
무소유의 텅 빈 충만에서 흘러나오는 주님의 평화임을 깨닫습니다.
이어 주님은 평화에 걸맞는, 민폐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조언을 주십니다.
즉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대로 먹고,
이 집 저 집 옮겨 다니면서 분심을 줌으로 평화를 깨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래야 제자들을 통한 주님의 평화가 병자들을 치유하고,
사람들은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했음을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성인들이 당신 나라의 영광을 알리나이다."
화답송 후렴처럼, 옛날이나 지금이나 주님의 사람들인 성인들은 평화를
선사함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알립니다.
1독서의 바오로를 통해 감지되는 것 역시 주님의 평화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굳세게 해 주셨습니다. 나를
통하여 복음 선포가 완수되고 모든 민족들이 그것을 듣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바오로의 고백을 통해 주님이 함께 계실 때 우리 존재자체는 주님의 평화가
됨을 깨닫습니다. 하여 바오로는 자기를 저버린 이들이 불리하게 셈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바로 주님의 평화가 바오로의 마음을 굳세게, 또 관대하게
변모시켰음을 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당신의 평화로 우리 모두를 충만케 하시고
너그럽고 자비로운 사람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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