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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가해 10월20일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청주] 부자되십시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제1독서 에페 2,1-10
† 복음 루카 12,13-21
★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의 신자들에게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일깨워
준다. 그들은 모두 한때 죄를 지으며 육의 욕망에 이끌려 살아 하느님의
진노를 샀으나, 하느님께서는 크신 자비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을
살리시고 은총으로 구원하셨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탐욕을 경계하라고 가르치신다. 그러시면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드시어, 자신을 위해서만 재화를 모으고 하느님께
인색한 자의 불행한 운명에 대해 말씀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전교 주일’인 어제는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의 삶을
새겨 보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이때가 되면 예전에 본 명화 ‘미션’이
기억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모든 것을 바치는 선교사들의 삶과
죽음을 감동적으로 보여 주는 이 영화에서 느꼈던 전율과 감동이
되살아났던 것입니다.
영화 속 선교사들의 모습은 우리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그 충격
속에서 우리가 지금까지 움켜쥐려 하고 우선시하던 것들이 사실은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지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이 영화의 감동적인 음악을
작곡한 엔니오 모리코네는 작곡 전에 영화를 보았을 때의 심정을 이렇게
말합니다.
“영화를 보고 저는 충격을 받았어요. 정말 감동적이었죠. 그래서 제가 했던
말입니다. ‘제가 했다가는 다 망치겠는걸요. 그대로가 훨씬 나아요.’” 그의
심정은 아마도 많은 사람의 마음을 대변해 주었을 것입니다. 이국에서 오직
복음과 어렵고 힘든 이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바치는 삶은 종교와 민족의
경계선마저 넘는 보편적 가치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한 명의 ‘삶의 스승’이 천 명의 ‘글의 스승’보다 더 필요하다.”는 명언이
있습니다. 진정한 선교사들은 말만이 아니라 삶으로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종교와 민족이 다른 이들에게까지도 크나큰
감화를 불러일으킵니다.
우리나라에도 이 같은 훌륭한 외국 선교사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늘 복음이 가르치듯, 자신만을 위해 사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지를,
복음과 이웃을 위해 내어놓는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보여 준 우리 ‘삶의
스승’들입니다.
- 매일 미사 -
◈ [인천] 올바른 소원을 바칠수 있어야
2014년 가해 10월20일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 루카 12,13-21
한 사형수의 사형집행 전, 아무리 간 큰 사형수라고 해도 긴장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그러다보니 입안이 바짝 말라가는 것입니다. 그때
마지막으로 기도를 해 주러 온 신부님이 물었습니다.
“혹시 마지막 소원이 있습니까?”
“저는 아무런 소원도 없습니다. 딱 한 가지가 있다면, 지금 너무 입안이
바짝 말랐으니 시원한 물 한모금만 마실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부님께서 물을 줬더니 시원하게 마신 후 이렇게 말했다고 하네요.
“휴… 이제야 살 것 같다.”
사형집행을 앞 둔 사형수지만 지금 한 순간의 만족을 위한 소원을 이야기한
것이지요. 그리고 그 소원이 이루어지자 ‘살 것 같다’면서 만족의 말을
합니다. 하긴 우리의 소원이란 어쩌면 이 사형수처럼 순간의 만족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먼 훗날을 바라보는 소원, 참 행복을 위한
소원이 아닌, 순간의 만족만을 위해서 모든 것을 걸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우리 각자는 시한부 인생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 누구도 영원히 살지
못하니까요. 그런데 그 먼 훗날 주님 앞에서의 삶은 생각하지 않고, 지금
눈앞에 일에만 모든 것이 결정되는 듯 한 행동들을 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주님께 특별한 소원이 담긴 기도를 바치면 주님께서는
들어주실까요? 그렇지 않을까요? 어떤 분은 반드시 들어주신다고 합니다.
단, 내가 생각할 때에 이루어지지 않지만, 언젠가는 주님께서 원하실 때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이지요. 맞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성경 말씀을
보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많은 소원을 이야기했습니다. 배부르게
해달라고, 마귀를 쫓아달라고, 눈을 뜨게 해달라고, 벌떡 일어나 걸을 수
있게 해달라고, 심지어 포도주가 떨어졌다면서 어떻게든 해 달라는 소원도
이야기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소원에 대해 다
들어주셨습니다. 하지만 단 한 번, 거절하셨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
나오는 장면이지요.
한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라고 청합니다. 이 소원을 들어주셨습니까? 아닙니다.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라고 말씀하시면서
단호하게 거절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자기 자신만의 이익을 위한 것, 특히 자기 눈앞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이라면 거절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혹시 주님께서 거절하실 소원만을 반복해서
말하고 있으며, 그 소원을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원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올바른 소원을 바칠 수 있어야, 주님의 응답을 받을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부러워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가진
것을 부러워 한다(푸블릴리우스 시루스)
작은 차이(‘좋은생각’ 중에서)
호텔 경영자 칩 콘리가 직원들에게 각자의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 주기
위해 실험을 했다. 이틀 동안 호텔 규정에 따르지 말고 알아서 일하라고 한
것이다.
직원들은 베개를 예전처럼 정성껏 부풀리지 않고 대충 처리하는 한편,
욕조도 광이 날 정도로 닦지 않고, 수건도 가지런히 정리하지 않았다.
그렇게 이틀 동안 열정 없이 평범하게 일했다.
결과는 바로 나타났다. 예전에 비해 손님들은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잘
하지 않았다. 안내 데스크 직원들에게 룸서비스를 부탁할 때도 퉁명스럽게
말했을 뿐 아니라 아침을 먹을 때 팁도 조금만 남겼다.
실험 후 호텔에 머문 손님들에게 서비스의 질을 물었다. 그러자 한 결 같이
작은 부분들이 아쉬웠다고 답했다. 그런 작은 부분들이 훌륭한 호텔을
만드는 요소였던 것이다.
칩 콘리는 이처럼 직원의 행동이 손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깨닫게
함으로써 짧은 기간에 미국 최고의 호텔로 성장시켰다.
한 직원은 자기 일의 중요성을 깨달으며 이렇게 말했다.
“매일 여덟 시간 이상 일하고도 지치기보다 오히려 더 힘이 날 때, 당신이
옳은 결정을 했다고 느낄 겁니다. 마음이 담기지 않은 일은 당신을 지치게
만들지만 의미를 가지고 하는 일은 힘을 줍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서울]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2014년 가해 10월20일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 루카 12,13-21
며칠 전 지인의 모친 장례미사엘 함께 했습니다. 건강하시던
자매님이셨는데 지난 7월 발병하셨고, 3개월 투병 생활 중에
선종하셨습니다. “베네딕토 성인께서는 ‘죽음이 바로 옆에 있다는 심정으로
하루하루 충실하게 살아야 합니다.’라고 말씀하셨고, 소화 데레사
성녀께서는 ‘죽음은 가장 큰 축일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사셨던 자매님께서 천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시길 기도합니다.
어떤 분이 죽음에도 몇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마치 회사에
취직하는 것 같이 이야기 하였습니다. 정시모집은 정해진 수명을 다하고,
죽음에 이르는 것입니다. 수시모집은 사고와 사건으로 죽음에 이르는
것입니다. 특채는 전쟁과 질병 등으로 많은 사람이 죽음에 이르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정해진 수명을 다 누리고, 이 세상에서 건강하게 살다가, 내가
받은 것을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고,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하길 바랄
것입니다.
식당 탁자 위에서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사람들은 늘 시간이 부족하다고
말을 하면서 마치 시간이 영원한 것처럼 산다.’ 분명 우리는 우리에게
정해진 시간과 삶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끝이 예외 없이
누구에게나 주어진 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아무
준비 없이 죽음을 맞이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착실하게 다가올 죽음을
준비합니다.
집을 마련하기 위해서 적금을 넣기도 합니다. 적당한 집을 찾기 위해서
이곳저곳으로 알아보기도 합니다. 컴퓨터를 사기 위해서도 이리저리
알아봅니다. 결혼을 할 때면 많은 준비를 합니다. 결혼식장, 신혼여행,
결혼사진, 초대장, 살아야 할 집, 주례자 등을 정하고 준비합니다. 세상의
일을 할 때, 우리는 빈틈없이 준비를 합니다. 그래야만 성공할 수 있고,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태중에서 아이는 죽음과 같은 과정을 거쳐서 이 세상에
탄생합니다. 아이에게 어머니의 태중은 가장 편안하고, 안락한 곳이었을
것입니다. 모든 것들이 제공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이는 10개월 이상
어머니의 태중에 머물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어머니도, 아이도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아이는 죽음과 같은 고통을 느끼면서
세상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죽음도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라는 태중에서 100년 남짓 살게 됩니다. 이 백년의 삶을
잘 준비해서 우리는 영원한 생명에로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영원히 썩지
않고, 사라지지 않는 곳에 우리의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고 하십니다.
세상의 것들은 사라지고, 좀이 생기고, 남이 와서 빼앗아 가기도 한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신뢰하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갖는 사람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곳에 보물을 쌓아두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습니다. 길이와 순서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가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갈 곳을 모르는 우리에게,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는 우리에게 가장 안전한 곳은 어디일까요? 가장
믿을 만 한 분은 누구일까요? 그렇습니다. 죽음을 이기신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를 죽음 이후에도 이끌어 주시는 하느님입니다. 세상의
곳간에 쌓아 놓는 것도 필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믿고,
따라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부자 되십시오|반신부의 복음 묵상
연중 제29주간 월요일(루카12,13-21)
2014년 가해 10월20일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 루카 12,13-21
부자 되십시오.
한 때“부자 되세요”라는 인사가 유행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부자가
되기를 바라지만 참된 부자가 되기는 쉽지 않습니다. 참 부자가 되느냐 안
되느냐는 얼마만큼 돈을 버느냐에 달려 있지 않고 얼마만큼 잘 쓰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결코 많이 가졌다고 해서 부자일 수는 없습니다. 참 부자가
되고 싶은 바람을 하느님께서 꼭 들어주시길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어떤 탐욕에도 빠져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제
아무리 부요하다 하더라도 그의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사실‘주님을 경외하며 가진 적은 것이, 불안 속의 많은
보화보다 낫습니다’(잠언15,16). ‘돈을 사랑하는 자는 돈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큰 재물을 사랑하는 자는 수확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전도5,9).
재산에 욕심이 생기면 아무리 많은 재물을 소유해도 부족합니다. 그리고
많은 재산을 가지고도 즐겁게 살 줄 모릅니다(집회14,5). 그러므로 부자가
되려고 애쓰지 말고 그런 생각마저 버리십시오(잠언23,4).
‘재물은 조금도 믿을 것이 못됩니다. 돈이 있다고 우쭐대다가는
나둥그러집니다’(하바2,5). 그러므로 ‘옳지 못한 방법으로 부자가 되는
것보다는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고 올바른 마음으로 자선을 행하는
것이 좋습니다. 황금을 쌓아두는 것보다는 자선을 행하는 것이 좋은
일입니다’(토비12,8).
사실 생명은 지상의 재물이나 넘치는 부의 산물이 아닙니다. 생명을
안배하시는 분은 오직 하느님이십니다. 현대의 의학이 발달했다고
하더라도 생명을 일시적으로 연장할 수 있을지언정 영원생명을 주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재물의 소유를 통해서 생명의 안전을 생각하는 그릇된
생각을 버려야겠습니다. 하느님을 염두에 두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했다 하더라도 결코 부자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하느님
안에서 만족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큰 부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자가
되십시오. 석가모니도 말했습니다. “만족함을 모르는 사람은 부유하더라도
가난하고, 만족함을 아는 사람은 가난하더라도 부유하다.”
오래 전의 이야기 입니다. 가족은 물론 친지가 없는 할머니 한 분이
계셨습니다. 작은 아파트에 계셨는데 본당 수녀님께서 틈틈이 방문하여
청소도 해드리고 말벗도 해주시곤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수녀님께서 할머니를 책임질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아파트를 처분해서 양로원에 들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혹 마음
상할까봐 조심스레 할머니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할머니께서는
양로원에 들어가면 당신의 재산을 다 잃는다고 생각 하셨습니다. 하는 수
없이 생각을 접고 할머니를 열심히 챙겼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수녀님은
홀로 돌아가신 할머니를 발견하고 뒷수습을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연고자가 없는 관계로 이러저러한 조사 끝에 동사무소를 통해서
쓸쓸히 장례를 치렀습니다. 할머니에게는 아파트가 생명이나
다름없었겠지만 그 아파트를 잘 활용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재물을 모으려거든 “재물을 하늘에 쌓아 두십시오”
(마태6,20). 안전은 오직 하느님 안에만 있습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으로
‘목숨’을 지키려는 사람은 하루살이의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바라보는 삶은 영원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오늘 하루가 영원한 하느님
나라와 결속되는 날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기타]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수도회] 관계의 문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10월20일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에페2,1-10 루카12,13-21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 루카 12,13-21
관계의 문
오늘은 '관계의 문'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사람은 관계를 떠나선 살 수 없습니다.
관계를 통해 형성되는 삶의 꼴입니다.
그러니 '사람은 관계다' 정의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관계를 맺는데 중요한 것이 눈과 귀입니다.
잘 보고 잘 들어야 원활한 관계를 맺을 수 있고, 활짝 열린 관계의 문을
지닌 자유인으로 살 수 있습니다.
마음 따라 보는 눈이요, 마음 따라 듣는 귀입니다.
마음의 눈, 마음의 귀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마음 가난한 겸손한 이들이, 마음 깨끗한 순수한 이들이 진정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활짝 열린 마음의 눈, 마음의 귀를 지닌 사람들이자 활짝
열린 관계의 문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재산에 달려있지 않다."
바로 경계해야 할 바 탐욕입니다. 마음의 눈을, 마음의 귀를 막아 버리는
탐욕이요, 관계의 문을 차단시키는 탐욕입니다.
이성도, 지성도 탐욕 앞에서는 무력합니다.
식욕이, 성욕이, 물욕이, 의욕이 문제가 아니라 탐욕이, 과욕이 문제입니다.
오늘 복음의 부유한 사람이 좋은 본보기입니다.
그대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런 부자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완전히 탐욕으로 차단된 관계의 문이요,
탐욕으로 마음의 눈도, 마음의 귀도 닫힌 모습입니다.
자기 안에 폐쇠된, 자기 감옥에 갇힌 수인의 모습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자기와의 관계, 모두 실종입니다.
"자, 네가 여러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이건 대화가 아니라 독백입니다.
평생 하느님과 대화의 기도는 물론 이웃과의 대화도 부재했음이 분명합니다.
자기를 지으신 하느님을 잊을 때 누구나 탐욕의 포로가 될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복음의 부자뿐 아니라 탐욕에 물든, 죽음을 까맣게 잊고 지내는 우리
모두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탐욕에 대한 참 좋은 처방은 하느님의 은총을 자각하는 것이요, 하느님
사랑으로 그 탐욕의 욕망을 전환시키는 것입니다. 이래야 세상 풍조에
따라, 육의 욕망에 이끌려 육과 감각이 원하는 것을 따라 살지 않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참 은혜롭습니다.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 줍니다.
복음의 부자가 완전히 잊어버린 은총의 차원입니다.
"자비가 풍성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잘못을 저질렀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바로 세례성사 은총이요, 이를 통해 탐욕도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바로 우리의 구원은 하느님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닫혀있는 완결된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께 열려있는 미완의 존재,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된 미완의 작품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탐욕을 순화시켜 주시고 당신 작품인 우리를 완성에로 이끌어 주십니다.
"너희는 알아라, 주님은 하느님이시다.
그분이 우리를 지으셨으니 우리는 그분의 것,
그분의 백성, 그분 목장의 양 떼라네." (시편100,3).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행복하기 위해 아직 무엇이 부족하다고 믿는다면
2014년 가해 10월20일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
복음: 루카 12,13-21
< 행복하기 위해 아직 무엇이 부족하다고 믿는다면 >
늙은 죄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평생 감옥을 전전하면서 늙었고 가족이나
친척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늙은 죄수는 감옥 들창 밖에 날아온
참새 한 마리와 사귀게 됩니다. 그는 마른 빵조각을 떼어두었다가 참새에게
나누어주곤 했습니다. 참새도 늙은 죄수와 친하게 되자 창문을 열면 감방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참새는 늙은 죄수가 손바닥으로 내미는 빵부스러기를
쪼아 먹으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늙은 죄수에게는 칠십 평생에 처음으로
생기 찬 나날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모든 지상의 행복이 다 그렇듯이 그에게도 행복한 날들이 오래
지속될 수 없었습니다. 늙은 죄수가 바다 깊숙한 섬으로 이감되게 된
것입니다. 며칠을 두고 생각한 노인은 결국 참새를 데려가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작업하러 밖으로 나갈 때마다 나무개비와 철사부스러기를 주워 와서
조그만 조롱을 만들었습니다.
드디어 이감되는 날이 되어서 배를 타려는 노인은 허술한 조롱을 가슴에
품고 참새를 소중히 보호했습니다. 그러나 우악스러운 죄수들이 밀고
당기는 혼잡 속에서 노인의 허술한 조롱은 부서져버렸습니다. 놀란 참새가
푸르르 날아올랐지만 이내 수면으로 떨어져버렸습니다. 그것은 참새가
달아날까봐 노인이 참새의 꼬리를 잘라버렸기 때문입니다.
“아아! 저 참새를 건져줘요!”
그러나 우렁차게 울리는 뱃고동 소리가 늙은 죄수의 비통한 부르짖음을
삼켜 버리는 가운데 배는 항구를 빠져 미끄러졌습니다.
이것은 프랑스 소설가 피에르 로티의 ‘늙은 죄수의 사랑’이란 작품의
줄거리입니다. 늙은 죄수에게 참새는 아름다운 새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고 오직 사랑의 대상이었지만, 그것을 소유하려고 했을 때 결국 그
사랑은 사라져버린다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행복을 추구합니다. 이는 하느님도 그러하십니다. 하느님은
당신 자신들 안에서의 사랑으로 행복하신 분들입니다. 인간이 필요해서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태초의 인간도 행복을 추구하였습니다. 하느님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행복이 오로지 하느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미 충분히 주어졌다고 여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힘으로 부족한 행복을 더 채워 넣으려 했습니다. 이것이 하느님께
불순종하게 하는 영에게 끌려 육의 욕망을 추구했던 것입니다. 육의 욕망은
소유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하는데 그래서 손을 뻗어서는 안 되는
나무열매에까지 손을 뻗은 것입니다.
그 후에도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행복을 추구하려는 마음은 계속됩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에 의지하지 못하고 스스로 자신들의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 몸을 가립니다. 그러나 인간의
부끄러움은 우리의 행위가 아닌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그분의 피로 죄를
씻고 그분의 옷을 입음으로써만 가려질 수 있습니다. 바오로는 이것을 계속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공부를 잘 해야 하고 좋은
직장을 가져야 하고 결혼해야 하고 자녀가 잘 돼야 하고 돈이 많아야 하고
인정받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 등을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살아갑니다.
파랑새는 이미 내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걸 믿지 못하면 영원히 내 안에
내가 생기기 전부터 존재하는 참 행복을 맛볼 수 없습니다.
오늘 독서에서도 바오로는 자신들도 육의 욕망에 이끌려 살면서 육의
감각이 원하는 것을 따라 살았다고 합니다. 이는 공중을 다스리는 지배자,
곧 순종하지 않게 하는 영을 따랐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내
스스로의 행위로 행복을 추구하려고 하는 것이 하느님의 진노를 살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진노란 그분과의 관계단절로 그치게
되는 은총의 선물을 말합니다. 바오로는 그러면서 우리 구원이, 곧 우리
행복이 우리의 노력이 아닌 그리스도를 믿어 받아들임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임을 재차 밝히고, 그렇게 그분을 받아들이면 선한 행위가 저절로 나오게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양을 치는 목동이 눈 내리는 어느 겨울밤 한 무리의 양떼를 몰고 눈을 피해
한 동굴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때 마침 그 동굴 속에는 야생의 살찐
양들이 한 떼 들어와 눈을 피하고 있었습니다. 이 목동은 의외의 사태에
회심의 미소를 띠며 동굴 속에 이미 들어와 있는 살찐 야생의 양들을 제
것으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목동은 자기의 양을 버려두고 야생의 양떼들에게 열심히 건초를
먹였습니다. 눈이 날리던 겨울이 지나고 눈이 멎자 건초를 실컷 얻어먹고
기운이 팔팔해진 야생의 양떼들은 건초를 얻어먹은데 대한 인사말
한마디도 없이 쏜살같이 동굴을 빠져나가 들과 숲으로 달아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야심을 가지고 정성을 쏟았던 목동으로서는 이만 저만한
손해가 아니었고 실망도 컸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또 있었습니다. 추위에 떨며 동굴 속에서 야생의 양들
때문에 건초조차 제대로 얻어먹지 못한 다른 양들이 모두 굶어 죽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지금 바로 이 순간에 우리가 행복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주고
계십니다. 그저 믿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행복은 이미 우리 안에 다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믿지 못하고 이 육의 욕망을 쫓게 된다면 내
안에 있는 행복은 굶어 죽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의 행복은 절대 나를
만족시킬 수 없고 더 공허함과 배고픔만을 준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얼마나 하느님이 주시는 행복을 믿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정신없이 헛된 노력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냥 멈추고 받아들이십시오. 바로 그 순간 눈물이 나오고 행복해질
것입니다. 감사의 눈물이 쏟아지지 않으면 아직 믿고 받아들인 것은
아닙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인생손해 보지 않으려면
2014년 가해 10월20일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 루카 12,13-21
인생손해 보지 않으려면
죽는 날까지 살기위해서는 돈 벌고 먹고 살아야 하는 것 확실합니다.
그런데 죽는 날이 언제인지 몰라서 일단 늦게 잡아놓고 살 준비만 합니다.
그러나 확실한 건 자기가 생각한 것보다 죽음은 빨라 온다는데요?
죽음 후에 이사 가서 영원히 사는 게 확실하다면 현재 삶은 어찌 되나요.
세상 삶은 속은 게 확실한 거지요. 그러니 안 속으려면 믿어야 하고요.
인생손해 보지 않으려면 하느님 나라를 우선 믿고 대비하는 게 안전합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루카 12,21)”
- 서울 대 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수도회] 아직도 배고프다[단상]
2014년 가해 10월20일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 2,1-10
복음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13-21
연중 제29주간 월요일(2014년 10월 20일) 아직도 배고프다.
여러 사람들이 방송매체에서 “나는 아직도 배고프다!”고 했습니다. 경쟁
사회에서 늘 배고프기 마련이지요. 먹어도 먹어도 허기지기에 먹을거리를
찾는 싸움에 뛰어듭니다. 자리, 재물, 사람, 능력에 정력을 쏟아 붓습니다.
아무리 이겨도 쌓아도 모아도 헛된 일임을 머리로는 알지만 몸은
그쪽으로만 가고 있습니다.
마음이 욕심과 욕망으로 꽉 차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오늘 “온갖 탐욕을
경계하고 주의하라” 하십니다. ‘텅빈 충만’이란 말이 있듯이 마음을 비워
주님으로 채우는 사람만이 탐욕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만이
하느님의 넉넉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충만히 살 수 있습니다.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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