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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가해 10월26일 연중 제30주일
[수원]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제1독서 탈출 22,20-26
† 제2독서 1테살 1,5ㄴ-10
† 복음 마태 22,34-40
연중 제30주일인 오늘은 시월의 마지막 주일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계명의 참뜻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으로
집약된다고 말씀하십니다. 한 해의 가장 풍성한 계절인 이 시월에 과연
얼마나 마음을 다해 주님을 향하며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였는지, 또는
자신만 돌보는 데 골몰하지는 않았는지 겸허히 돌아보면서 이 미사에
정성껏 참여합시다.
★ 탈출기는 약자 보호법을 전해 준다. 이방인을 억압해서도, 과부나 고아를
억눌러서도 안 된다. 그들이 부르짖으면 주님께서는 기꺼이 그들의
하소연을 들어주실 것이다(제1독서).
★ 바오로 사도는 테살로니카의 신자들에게 복음이 성령으로 전달되었음을
확신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이 큰 환난 속에서도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여 주님을 본받았고 그 믿음이 널리 알려졌다고 격려한다(제2독서).
★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율법의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전심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두 계명 에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집약되어 있다고
말씀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가을이 깊어 갑니다. 신학교 시절, 어느 가을의 아름다운 ‘공동체의 밤’이
생각났습니다. 그날 지도 신부님은 우리에게 사제직은 외로우면서도
고귀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미셀 콰스트 신부의 기도 시집 『삶의 모든
것』이라는 책에서 주일 저녁 모든 일과를 마치며 느끼는 본당 신부의
소회를 표현한 기도 한 편을 읽어 주셨습니다.
“주님, 오늘 밤, 저는 혼자입니다./ 성당 안의 소음도 차츰 사라지고/
모두들 제각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저도 집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나 혼자서.// 주님, 저를 보십시오./ 저는 혼자입니다./
침묵이 나를 숨 막히게 하고/ 고독이 나를 괴롭힙니다./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고/
남을 위해서 모든 것이 된다는 것이 정말 어렵습니다./
(중략) 혼자라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여러 사람 앞에 있으면서도 혼자라는 것/
세상에 혼자 있는 것, 고통과 죽음과 죄 앞에 혼자 서 있다는 것/
주님, 정말 어렵습니다 …….”
이 기도의 몇 대목을 읊조리면서, 우리 사제만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에 심어 주신 참된 사랑의 갈망을 따라가려는 모든 이를 위한 기도라는
점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사랑을 위한 삶은 때로는 이해받지 못하고,
외로우며, 지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그 사랑을 혼자 행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언제나 함께하신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고귀한 길을
포기하여 외로움을 ‘잊는’ 어리석음 대신에, 그 길을 인내함으로써 사랑
안에서 벗을 ‘얻는’ 삶을 선택할 용기를 가집니다. 이 기도의 마지막 대목이
더욱 가슴 깊이 다가옵니다.
“주님, 저 여기 있습니다. 제 몸도 제 마음도 제 영혼도, 다 여기 있습니다./
저로 하여금 주님께로 향해 가는 길이 되게 하시고/
아무것도 꺾일 것이 없는 길이 되게 하소서./ 주님, 저는 주님 앞에/
혼자 있습니다./ 이 밤의 평화 속에서.”
- 매일 미사 -
◈ [서울] 연중 제30주일
2014년 가해 10월26일 연중 제30주일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 마태오 22,34-40
10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10월에 가장 바쁜 가수가 누구인 줄 아십니까?
가수 이용이라고 합니다. 그가 부른 ‘잊혀진 계절’이라는 노래 때문입니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10월의 마지막 밤을’이라는 말로 시작되는 가사와
서정적인 멜로디가 10월이라는 계절에 잘 어울리기 때문입니다.
10월의 마지막 주일에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는 가족과 가을 여행을 떠나
보는 것도 아름다운 추억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잊고 있었던 분들이 있다면,
전화라도 해보고, 한번 찾아보면 좋겠습니다. 저도 며칠 전 우연히
군대생활을 기록했던 ‘추억록’을 보았습니다. 군복을 입고 찍었던 28년이
지난 사진들을 보았습니다. 함께 근무했던 친구들이 제대하는 저를 위해
적어주었던 글을 보니 가슴이 ‘찡’했습니다. 부는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과
그리움, 사랑은 이 가을에 잘 어울리는 한 폭의 그림 같습니다.
어머님을 모시고 고향엘 다녀왔습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을 좋아하는 것’이라고 강론을 했기 때문에,
저의 말을 실천하고 싶기도 해서, 어머님을 모시고 고향 선산을
다녀왔습니다. 어머님은 무척 좋아하셨습니다. 조금 멀고 힘은 들었지만
모처럼 어머님과 함께한 가을 여행이었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내장산 근처에 있는 5대조 할아버님의 묘소를 다녀왔습니다.
증조부 할아버지의 묘소는 고향 선산에 모셔져 있는데, 5대조 할아버지는
박해 때 순교를 했기 때문에 험한 산 속에 모셨다고 합니다. 저도 이번
여행에서 처음 5대조 할아버지의 묘소를 방문했습니다. 험한 산길을 올라,
말없이 계신 할아버님의 묘소를 보면서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모진 박해를
당했고, 순교하신 조상께서는 사제가 되어 인사를 온 후손을 보시면서
흐뭇해 하셨으리라 생각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고향 어르신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후손들이
조상들의 묘소를 찾아가서 인사를 드리는 것은 조상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조상을 찾은 후손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순교하신 조상께서는 이미 하늘나라에 계실 것이다.
우리가 그분들의 묘소를 찾는 것으로 그분들께도 도움이 되지 않지만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을 보고, 조상들은 하늘나라에서 바로 우리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때문이다.’ 저는 고향 어르신의 말씀을 들으면서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어쩌다 한번 어머님을 모시고, 고향에 찾아간 것은 그렇게 내세울 일도
아니고, 조상님들께 큰 도움이 되는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제게 신앙의 뿌리를 알 수 있도록 가르침을 주었고, 저의 영적인 성장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좋은 일을 한다고, 희생을 한다고 하였지만 결국 그
결과는 제가 하느님께 더 깊이 나아갈 수 있는 기회였던 것입니다.
고향으로 가고 오는 길에, 어머님과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제가
살아오면서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누었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바쁘다는
이유,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어머님과 깊이 있는 대화를 거의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탈출기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가난한 사람, 고아나 과부를
업신여기거나, 무시하지 마십시오. 그들에게 받을 것이 있어도 무리해서
그들의 처지가 너무 힘들지 않도록 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 과부나 고아를 돌보아 주는
것은 우리가 선행을 베푸는 것이고 그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사실
그것은 나를 하느님께로 이끌어 주는 은총의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온 마음과
생각과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십시오. 이것이 가장 큰 계명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몸처럼 여러분의 이웃을 사랑하십시오. 이것이 율법과
계명의 근본정신입니다.’
남을 위한 희생과 봉사는 자랑할 것은 아닙니다. 가난한 이를 도와주고
가진 것을 나누는 것은 생색을 낼 일도 아닙니다. 오히려 감사할 일입니다.
그러한 삶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고,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환난과 박해를 이겨낸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따른 사람들에게 큰 축복이
주어지리라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사랑하라 |반신부의 복음 묵상
연중30주일(마태22,34-40)
2014년 가해 10월26일 연중 제30주일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 마태오 22,34-40
사랑하라.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물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십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뵙고자 한다면 사랑해야 합니다. 이 시간 사랑함으로써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진리를 깨우치고 주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얻기를 기도드립니다.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구체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참되기
위해서는 그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사랑을 하려면 상처 입고, 자기를
비워야” 하기 때문입니다(마더 데레사). 다시 말하면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의 행위가 이웃사랑을 통해 드러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십시오. 어렵고 힘들지만 사랑의 절정인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며
사랑하십시오.“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의 눈이 맑아져 하느님을 뵈올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됩니다”(성 아우구스띠노). 사랑하십시오.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더 얻게 됩니다. 내방식의 사랑을
고집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사랑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인간으로 오셨듯이 우리도 눈높이 사랑을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노래 한 곡 불러드리겠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온유하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사도 바오로가 코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의 말씀을 노래했습니다.
자! 그러면 고린도 전서 13장의 말씀에 견주어서 우리 사랑의 정도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오래 참습니다. 나는 친절합니다. 나는 시기하지 않습니다.
나는 자랑하지 않습니다. 나는 교만하지 않습니다.
나는 무례하지 않습니다. 나는 사욕을 품지 않습니다.
나는 성을 내지 않습니다. 나는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나는 불의를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보고 기뻐합니다.
나는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어떻습니까? 부족함을 알았으면 채울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22,34-40).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22,39).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따라서 우리는 사랑해야 합니다. 사실, 진정한 사랑은 이유를 묻지 않으며
이익을 따지지 않습니다. 사랑은 존재에 있습니다. 존재하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존재합니다(성 베르나르도). 일상생활 안에서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어른이든 어린이든 약한 사람이건 힘이 센
사람이건 할 것 없이 누구나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이신 주님을 알아야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신 주님,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던 주님을 만나야 비로소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4,7-8).
그러므로 하느님과의 친교가 깊으면 깊을수록 이웃을 더 많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크고 거창하게 사랑하려 하지 말고 사소하다고 생각하는 일상
안에서 사랑할 소재를 찾으시길 바랍니다. 때로는 친절로, 때로는 온유로,
밝은 미소로, 이야기를 들어 주는 것으로, 청소를 하는 것으로, 설거지를
도와주고, 환자를 방문해 주고……어떤 의견에 공감해 주는 것으로….
상대를 인정해 주고, 칭찬의 말 한마디로…….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할 기회는 너무도 많습니다. 그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지금은
사랑할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많이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을 제대로 만나고 그 만남의 기쁨도 이웃에게
전하시길 바랍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반드시 이웃 사랑을 통해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기도하지 않고서는 항구하게 사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위해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기도
하십시오.
“그분의 뜻을 알아듣기 위해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분의 뜻을 사랑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분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기도가
필요합니다”(마더 데레사). 먼저 기도 하십시오. 그리고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하고 싶은 대로 하십시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기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우선적입니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기도없는 사랑은 거짓입니다.'
2014년10월26일 연중 제 30주일 복음묵상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마르코12,2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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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첫째 계명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둘째 계명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오늘은 좀 엉뚱한 질문으로 시작해보고 싶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첫째니 둘째니 하는 순서를 두셨을까요?
그냥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으면 되지 않았을까요?
사랑에도 순서가 있다는 말일까요?
여기에는 깊은 뜻이 숨겨져 있습니다. 사랑에 순서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없다면 우리의 사랑은 빗나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은 “저는 힘든 처지의 사람들 안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라고
말하며, 자신은 미사에 참례할 필요가 없고 기도할 시간도 없으며,
그럴 시간이 있으면 한 사람에게라도 더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일을
하겠다고 합니다. 그럴 듯 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은 가장 중요한 것을 하나 잊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자신의 불완전성과 오류의 가능성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즉 선한 목적을 가지고 선한 일을 하더라도 거기에는 틀린 사랑이 있을 수
있고, 엇나간 과정과 방향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들은 하느님의 이름을 들먹이며 결국 자신의 성을 쌓기에 바쁩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이들이 쌓는 성은 모래성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우리의 어떤 사랑도 제대로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면서 이웃들과 함께 하는 것을 싫어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에 대한
거짓 사랑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면서 적극적으로 이웃의 고통에 함께
하려 하지 않는다면 그 사랑은 거짓입니다.
집착이던지, 자기과시던지 자기만족이던지 간에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대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랑이 아니며, 한계를 만나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느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우선적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랑이 조금이라도 완성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선 순위를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불완전함과 오류의 가능성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먼저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말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말은 기도하라는 말과도 통합니다.
그러니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제대로 사랑하는 방법을 배워야만 합니다.
사랑은 그분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20130308)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수도회] 온리원(only one)의 '참 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10월26일 연중 제30주일,
탈출22,20-26 1테살1,5ㄴ-10 마태22,34-40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 마태오 22,34-40
온리원(only one)의 '참 나'
제대로 된 교육이라면 '넘버원(number one)' 사람을 만드는 교육이 아니라,
'온리원(only one)' 사람을 만드는 교육이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바도 '온리원(only one)' 사람입니다. 일일 고등학생
체험을 한 서울시 조 교육감의 인터뷰중 마지막 대목이 이채로웠습니다.
"지난 30-40년 산업화 시대의 교육 패러다임은 넘버원 교육이었다. 1등을
육성해서 1등이 잘 돼야 나라가 잘 된다는 줄세우기식으로 교육이었다.
이젠 넘버원 교육에서 온리원 교육을 실현하고 싶다.
1등이 안 되더라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능과 꿈, 끼를 마음껏 발휘해
사회에서 유능한 인재로 인증받는 '오직 한 사람' 교육이 이뤄지길 바란다."
전적으로 공감이 가는 언급입니다. 사람은 고립단절의 '혼자'가 아닌
관계속의 '더불어' 존재이지만, 유일무이한 존재입니다.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그만의 고유한 존엄한 품위의, 마땅히 존중받아져야
할 온리원(only one) 인간입니다.
오늘은 '온리원'의 '참 나'란 주제로 두 물음을 중심으로 그 묵상을 나눕니다.
첫째, '나는 누구인가?'하는 물음입니다.
나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이게 우리 믿는 이들의 신원이자 정의입니다.
내가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하느님은 내 존엄한 품위의 근거입니다.
하느님 없이는 아무리 물어도 나를 알 수 없습니다.
온리원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해야 하고, 하느님과 끊임없는 대화의 기도를 해야 합니다.
하여 우리 각자를 향한 주님의 엄중한 명령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입니다.
갈림없는 마음, 전존재로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하느님
아닌 우상숭배가 얼마나 큰 죄요 어리석은 일인지 깨닫게 됩니다.
바로 하느님은 물론 나에 대한 모독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큰 환난 속에서도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여,
우리와 주님을 본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상들을 버리고 하느님께 돌아서서 살아계신 참 하느님을 섬기게 된
테살로니카 신도들에 기뻐하는 바오로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할수록 더욱 기도하게 되고 세상 우상들로부터 자유로워져
온리원, 참 나의 실현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로 살기위해 자발적
하느님 사랑과 사랑의 표현인 기도는 필수입니다.
둘째, '나는 어디에 있으며, 무엇을 해야 하는가?'하는 물음입니다.
나는 하느님과 너의 이웃사이에 있습니다. 여기가 나의 제자리입니다.
바로 여기 제자리로 끊임없이 돌아오는게 회개입니다.
하느님과 나와 너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느님-나-너'는 구별할 수는 있어도 분리할 수 없는 공동운명체입니다.
하여 하느님 사랑의 첫째 계명에 이은 두 번째 계명입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바로 둘째로 큰 계명입니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이 달렸습니다.
하느님 사랑의 진정성은 이웃 사랑을 통해 드러납니다.
"너희는 이방인을 억압하거나 학대해서는 안 된다.
너희는 어떤 과부나 고아도 억눌러서는 안 된다. 너희 곁에 사는 가난한
이에게 돈을 꾸어주었으면 채권자처럼 행세해서도 안 되고, 이자를
물려서도 안 된다. 나는 자비하다."
오늘날도 여전히 유효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자비하신 하느님은 이방인,
과부, 고아, 가난한 이들을 각별히 사랑하십니다.
바로 내자리는 하느님과 이웃 사이에 있고,
여기서 내가 할 일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뿐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제자리에서 항구히 사랑을 실천할 때 온리원, '참 나'의 실현입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하여 하느님과 끊임없는 대화의 기도입니다.
나는 어디에 있습니까? 하느님과 이웃사이에 있습니다.
하여 하느님과 아웃사이의 제자리에 끊임없이 돌아오는 회개입니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느님과 이웃을 온 마음과 몸으로 끊임없이 사랑해야 합니다.
온리원 인간으로 살 수 있기위해 끊임없이 묻고 찾아야 할 답은 기도,
회개, 사랑 이 셋뿐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하느님의 자녀로서 온리원
(only one)의 '참 나'를 살 수 있게 하십니다.
"저의 힘이신 주님, 당신을 사랑하나이다.
주님은 저의 반석, 저의 산성, 저의 구원자시옵니다."(시편18,2-3ㄱ).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2014년 가해 10월26일 연중 제30주일
<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
복음: 마태오 22,34-40
<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
저는 본당 신부를 2년 4개월이라는 아주 짧은 시간동안만 경험해
보았습니다. 교적 인원은 약 4천 명이었고 주일 미사에는 1200명 내외가
나왔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2년 4개월이란 시간이 짧다는 것을 느낀 이유는
성당을 떠나올 때 아직도 얼굴이 익숙하지 않은 분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한 사람이 많은 사람을 대하다보니 그런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었고 혹
보이던 분이 보이지 않게 되면 ‘사정이 있겠지...’하며 넘겨버리기
일쑤였습니다. 한 가족을 챙기는 것도 힘든데 어찌 그 많은 신자들을
일일이 다 챙길 수 있겠습니까? 사실 그런 핑계로 더 관심을 가져야 하는
분들에게까지도 더 다가가지 못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가깝게 지낸다고 하는 분이 병원에 한 달 가까이
입원하고 있어도 연락 한 번 못 드리고 한 번도 찾아보지 못했고, 큰 결심을
하여 찾아보려 했더니 어제 퇴원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가족을 비롯하여 저와 가까이 지내는 분들일수록 저에게 섭섭함을 많이
느끼는 것 같습니다. 이럴 때는 또 ‘한 사람도 만족시키기 어려운데, 어떻게
이 많은 사람들에게 다 잘 해 줄 수 있는가?’라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습니다.
결국 이렇게 진정으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사랑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런 갈등을 하고 있을 즈음, 유투브에서 박보영 목사님의 간증을 들으며
반성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말씀에서처럼 우리가 지켜야 하는
가장 큰 계명이 하느님사랑과 이웃사랑인데 참으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감리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아버지와 장로들의 다툼 등을 보면서 또
아버지로부터 많은 상처를 받으면서 하느님은 절대 있을 수 없다고 믿었고
더군다나 목사가 되지 않기 위해서 공부를 죽도록 해서 의사가 되었고
결혼을 하여 부유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렸고 사랑스러운 아들까지 있었던
많은 이들에게 부러움을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심장병에 걸려 죽을 날만 기다리다가 하느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고
또 기적적으로 죽음이 임박했을 때마다 심장과 간의 두 번의 치유를 받고는
구토를 할 때까지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봉헌하고 싶은 마음이 치솟아 올랐습니다. 그 많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아들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자 아들까지
버리고 하느님을 전하는데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2년 동안 혼자 성경을 읽으며 공부하고 아주 작은 집을 얻어 교회를
열었습니다. 그러나 워낙 말이 어눌하고 그 교회가 있는 곳이 우범지역이라
1년 동안 단 한 명의 신자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가끔 비가 오면 우유를
판매하는 아주머니가 아이들을 데리고 올 때가 있었습니다. 다른 교회에
다니시는 분인데 약간 정신이 정상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너무
고마운 마음에 비 오는 날만 기다렸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설교를 들어줄
사람이 1년 만에 나타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자매님은 설교에는
관심이 없었고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조용히 시키느라고 소리만 질렀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너무나 감사해서 매일 창문을 열고 그 자매만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 자매는 올 때마다 우유와 요구르트를 가져왔다고 합니다. 굶은 날이 더
많았던 때여서 정말 잘 받아먹었는데 그때마다 배가 아프고 설사를
했습니다. 유통기간이 지나 곽이 부풀어 터지기 일보직전의 것들을
가져다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그것을 받아먹지 않으면 그 자매가
실망하여 나오지 않을까봐 그 앞에서 마셔보이고는 그 자매가 떠나면 바로
들어가 손을 넣어 다 토해 내야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의 설교를
들어줄 양이 하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였고 감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옆에 또 자그마한 교회가 하나 생겼고 창립 1주년 행사를 하는데
한복을 입고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이 부러워서 쳐다보는데 그 자매가 그
교회에서 봉사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다시 양이 없는 목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또 얼마간 혼자서 예배를 드리다가 얼어 죽을 것만 같아서 누군가
재개발 될 때까지 들어와 살라고 하는 11평짜리 아파트로 갔습니다. 그
아파트는 이미 사람들이 다 떠나가 아무도 살지 않는 곳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방에 불이 켜 있더랍니다. 문을 열고 살짝 보니 본드를 불어 눈이 다
풀려버린 깡패 아이들이 칼로 여기저기 다 찢어놓고 돈 같은 것을 찾고
있었습니다. 이 목사님은 얼른 뛰어 들어가 문을 잠갔습니다. 너무 기뻤다고
합니다. 자신의 양떼가 될 아이들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본드를 흡입하여
판단력이 흐려진 아이들은 칼로 목사님을 찌르려고 했는데 목사님은 잠시
뒤에 찌르라고 말하면서 본드에 취한 아이들에게 복음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쌀 한 줌으로 밥을 해
먹이고는 교회에 오라고 하고 돌려보냈습니다. 그렇게 첫 신자들이 생긴
것이고 그 깡패들과 거지아이들과 함께 7년 동안을 살게 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도 먹을 것이 없는데 그 아이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었겠습니까? 아이들은 다시 나가서 도둑질을 했고 그 때마다 목사님은
자신의 아이들에게 털린 집을 찾아다니며 죄송하다고 빌었습니다. 아이들
제발 감옥에 보내지 말라고 빈 것입니다. 그렇게 온갖 모욕을 당하는
목사님을 보면서도 아이들은 바뀌지 않더랍니다.
어느 날 목사님은 쇠파이프를 하나 준비해 아이들을 기다렸습니다.
아이들이 또 도둑질을 하고 돌아오자 한 아이를 엎드려뻗쳐 시켰습니다.
워낙 온순하기만 한 목사님이라 아이들은 장난을 치는 줄 알았습니다.
목사님은 자신이 가진 온 힘을 다해 아이를 한 대 때렸습니다. 아이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는 목사님이 아이들에게 쇠파이프를 쥐어주며
이렇게 세게 자신을 때리지 않는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고 하면서
아이들보고 자신을 차례대로 때리라고 하였습니다. 아이들은 울면서
목사님을 때렸고 한 아이가 잘못 때려 목사님은 꼬리뼈를 다쳐 지금도 혼자
일어서기 힘들 지경이라고 합니다.
그 때 이후로는 아이들이 굶으면 굶었지 나쁜 짓은 안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말하기를 다른 사람들은 다 위선적으로 자신들에게 잘
대해 주다가도 막상 집에 들어가면 지갑이나 귀중품부터 감추기
일쑤랍니다. 그래서 어른들을 믿지 않았는데 이 목사님의 사랑을 그 때서야
믿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참 사랑은 이렇게 목숨을 내어놓을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을 읽을 때 저는 보통 ‘사랑해야지!’라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즘 더 다가오는 부분은 바로 사랑하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 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이라고 다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의 모습과 박 목사님의 사랑과는 분명 차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어떻게 다 만족스럽게 해 줄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경험으로 내가 아무리 목숨을 바쳐 열심히 하려고
해도 그 사람이 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는 단 한 사람도 만족시킬
수 없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십니다. 모든 사람을 완벽하게 사랑하는 방법은 태양과
같아야 하고 물과 같아야합니다. 태양처럼 뜨겁게 타오르면 모든 사람이
나의 사랑을 완전히 받게 됩니다. 물처럼 태양에게 내 자신을 맡기면
알아서 세상이 적셔집니다.
내가 이웃을 위해 내 힘으로 무언가를 하려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님께서 내 안에서 충만히 거하시게 하기 위해 내 마음을
어린이의 깨끗한 마음처럼 만들어 하느님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박보영 목사님은 아이들이 인터넷을 하지 못하게 하다가 단 몇 분 야한
영화를 보게 되었는데 그것이 너무 죄스러워서 온 신도들이 보는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울며 사죄하였다고 합니다. 그분의 사랑은 그 깨끗함을 통해
활동하시는 성령의 열매였던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무언가 구체적인 사랑의 행위를 해 주시지는
않으셨지만 성령으로 그리스도를 품고 그 구원을 세상에 전해주셨기
때문에 결국 우리 각자에게 모든 것을 해 주신 셈이 되었습니다. 우리 또한
각자에게 무엇을 해 주는 것에 집중하기 보다는 우리 자신이 완전한 사랑이
되는 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저 그분의 손에 우리 자신을 맡겨
필요한 곳에 쓰이게 하면 그만입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것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보고나서가 아니었습니다. 성령께서
임하시고부터였습니다. 성모님처럼 깨끗한 마음을 지녀 우리 안에
성령님께서 충만히 거하시게 해야겠습니다. 완전한 사랑이 되어야겠습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인천] 내가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계명은?
2014년 가해 10월26일 연중 제30주일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 마태오 22,34-40
먼저 이틀 동안 성소국 연수 다녀오느라 새벽 묵상 글을 쓰지 못했음에도
새벽 카페를 지켜주심에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여러분의
기도와 염려 덕분에 좋은 만남과 좋은 시간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그럼
오랜만에 새벽 묵상 글 시작합니다.
어떤 자매님께서 이웃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새로 이사 온 자기 집
맞은편 자매님 성격이 고약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새로 이사 온
자매님께서 ‘말을 거칠게 한다.’, ‘사람을 무시한다.’ 등등의 말을 듣다보니
화가 나는 것입니다. ‘새로 이사 왔으면 동네 분위기 맞춰서 살 것이지
자기가 뭐라고 주인행세를 하는 거야.’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기회가 되면 따끔하게 말을 하리라 다짐했습니다.
그런 일은 멀지 않은 시간 안에 이 자매님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습니다.
동네 공원을 산책하다가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이 자매님은 처음부터 강하게
말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렇게 이야기했지요.
“자매님이 새로 이사 온 바로 고약하다는 분이세요?”
이 말을 들은 자매님은 무슨 말인가 하더니만 ‘아~ 알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웃으며 말합니다.
“아, 동네 사람들이 말하는 고약한 자매님이요? 그 자매님은 제가 아니고요.
제집 맞은편에 사는 자매님이래요. 성격이 보통 고약한 것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결국 누구를 두고 하는 말일까요? 동네 사람들은 자기를 두고도 고약한
사람이라는 평을 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도 이야기의 주인공이
자기는 아니라는 생각을 갖고 누군가를 혼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 역시 다른 사람들의 부정적인 말을 듣는 사람인데 말이지요.
어쩌면 우리 모두가 다 똑같습니다. 나는 옳고 정의롭다고 생각하지만,
나의 그 옳고 정의로움으로 인해 아픔을 겪는 누군가가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그 옳고 정의로움을 보면서 수군대며 '고약한 사람'이라고 말할 지도
모릅니다. 이런 점들을 볼 때 우리에게는 남을 판단하고 단죄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보다 먼저 되어야 하는 것은 사랑의 실천입니다. 사랑만이
주님의 뜻을 이 땅에 완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가장 중요한 계명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명쾌하게 답변하십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이 점을 생각하고
실천하면 다른 계명들도 저절로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봉사할 수 있고, 사랑하기 때문에 나눌 수 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정의를 외치며, 사랑하기 때문에 용서할 수 있습니다.
내가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오늘 제1독서에서
말하듯이 과부나 고아처럼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다면 ‘분노를 터뜨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분노를 사는 행동이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우리의 희망을 구체화시킬 수 있었으면 합니다.
군자가 예절이 없으면 역적이 되고, 소인이 예절이 없으면 도적이 된다
(명심보감)
걱정해 보다(‘좋은생각’ 중에서)
옛날 어느 마을에 안락한 생활을 하는 농부가 있었다. 그가 편안히 지내는
것은 첫째, 부지런히 일한 덕택이고 둘째, 걱정 없이 하루를 보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주위 사람 모두 날씨가 어떻고, 경제가 어떠며, 심지어
세계정세가 어떻다느니 하면서 걱정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농부는 세상 사람이 다 걱정을 하는 모양인데 자신만 안 하면 손해를 볼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하루 종일 걱정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우선 농사를 떠올렸다. ‘올해 흉작이면 어떻게 하나?’하고 생각했다. 그럼
큰일이었다. ‘대풍작이면?’ 값이 떨어질 게 뻔했다. ‘비가 안 오고
가문다면?’ 당연히 추수할 것이 없을 터였다. ‘비가 너무 많이 온다면?’
홍수에 작물이 몽땅 떠내려갈 것이다. ‘병으로 일을 못하게 되면?’ 역시
힘들 수밖에 없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걱정거리만 늘었다.
다음 날, 농부는 이웃에게 자기가 깨달은 것을 말했다.
“내가 하루 종일 걱정해 봤는데 무엇 하나 좋은 일이 없더구만. 그래서 난
걱정은 하지 않기로 했다네.”
걱정해봐야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삶. 걱정 없이
편안한 삶을 사는 비결입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서울] 사람이 알아야할 기본 노선
2014년 가해 10월26일 연중 제30주일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 마태오 22,34-40
사람이 알아야할 기본 노선
하늘아래서 사람들이 지녀야할 기본자세가 무엇인지 아는 건 중요합니다.
또 사람들이 서로 지녀야할 기본자세도 어떤 것인지 알아야 되겠지요.
그래서 잘 살 길을 정리해 모두에게 알려주고 그대로 살면 좋겠습니다.
이런 노선을 벗어나 별다르게 산다면 그는 이방인일 수밖에 없겠지요.
사람이 알아야할 기본적 상대는 자연과 사람 외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런 기본이 율법의 정신이라고 깨우쳐주신 분이 예수님이시랍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마태오 22,37~39)”
- 서울 대 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수도회] 선한 영의 속삭임[단상]
2014년 가해 10월26일 연중 제30주일
제1독서
<너희가 과부와 고아를 억누른다면 나는 분노를 터뜨릴 것이다.>
▥ 탈출기의 말씀입니다. 22,20-26
제2독서
<여러분은 우상들을 버리고 돌아서서, 하느님을 섬기며 하느님의 아드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테살로니카 1서 말씀입니다. 1,5ㄴ-10
복음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2,34-40
연중 제30주일(2014년 10월 26일) 선한 영의 속삭임
이탈리아 친구가 페복에 이런 말을 적었습니다.“Essere buono non
è sinonimo di essere idiota, essere buono è una virtù che gli idioti
non comprendono.” 우리 말로 하면, “착하게 된다는 것은 바보가 된다는
것의 동의어가 아니다. 착함은 바보들은 이해할 수 없는 덕행이다”입니다.
이것은 사랑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실상 우리는 현실에서 사랑을 선택하기에 두려워 합니다. 망설이고
고민합니다. 사랑하면 마치 우리 자신이 덜떨이진 멍청이 바보가 되는 것
같은 느낌을 강하게 받습니다. 또한 남들이 우리를 손가락질 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불안한 감정과 편협한 시각은 우리 자신을 사랑에
투신 못하게 하는 악한 영의 유혹일 수 있습니다. 선한 영은 인간적인
불안한 감정을 넘어 굳건하고 평화로운 마음으로 이끕니다. 사랑은
하느님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를 사랑의 사람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하느님의 선한 영에게 우리 자신을 맡겨드립시다. 성령의 사랑스런
속삭임에 우리 마음의 귀를 활짝 엽시다.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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