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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가해 10월27일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수원] 신앙과 죄는 병존할 수 없다.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제1독서 에페 4,32─5,8
† 복음 루카 13,10-17
★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의 신자들에게 새 생활의 규범을 강조한다. 곧,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며 용서해야 한다. 또한 사랑받는 자녀로서
하느님을 본받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을
하느님께 향기로운 제물로 내놓으셨듯이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제1독서).
★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시던 예수님께서는 등 굽은 여자를 고쳐
주셨다. 안식일에 치유의 기적을 일으키신 것에 분개하며 이의를 제기하는
회당장을 예수님께서 강하게 꾸짖으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종교적 삶이 무엇을 바라보고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를 깊이
묵상하게 합니다.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시던 예수님께서 오랜 병고에
시달리던 여인을 가엾이 여기시고 ‘가까이 부르시어’ 치유하시자, 종교
지도자인 회당장은 예수님의 이러한 행위가 종교적 경건을 훼손했다고
분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위선자’라고 강하게 비판하십니다.
이러한 이들은 외적인 계율과 자신을 경건하게 ‘보이게 하는’ 행동에는
철저하지만 고통 받는 이들에 대한 연민과 자비의 실천에는 무심합니다.
위선의 밑바탕에는 이기적인 자기애가 자리합니다. 자신의 위선을
바라보지 못하는 종교적 실천은 자신의 명예와 이익을 보호하는 방어벽에
불과합니다. 진정한 ‘종교적 삶’은 사랑을 찾고 바라며 그 길을 걷는
삶입니다. 참된 경건은 사랑이신 하느님을 닮고 사랑을 실천하려는 굳은
의지입니다.
미국의 제임스 마틴 신부는 ‘영신 수련’에 대한 안내서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 발견하기』에서 종교적 삶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도록
초대합니다.
“하느님을 찾는다는 것은, 지극히 확고하고 결정적인 방식으로 사랑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랑에 빠지는 것보다 더 실질적인 방법도
없습니다. 우리가 사랑에 빠지면, 우리의 상상력은 사로잡히고, 자신이
하고 있던 모든 일에 영향을 미칩니다. 아침마다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일,
저녁이나 주말마다 하는 모든 일에서 비통함이나 기쁨, 감사의 감정 등을
느끼게 됩니다. 당신을 기쁨과 정으로 가득 채우거나 때로는 울게 만드는
것도 바로 사랑이 하는 일이지요. 사랑에 빠지십시오. 사랑을 지켜
나가십시오. 그러면 그것이 모든 일을 결정해 줄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하느님을
본받는 삶이라고 일깨워 줍니다. 우리의 신앙과 종교적 실천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 다시 한 번 깊이 새겨야 하겠습니다.
- 매일 미사 -
◈ [서울]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2014년 가해 10월27일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안식일일지라도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
+ 루카 13,10-17
‘전시 작전권’이란 말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미국과 동맹을 맺고 있습니다.
한반도에 전쟁 상황이 발생하면 미국이 자동으로 개입하게 되어있습니다.
전쟁에는 작전이 필요합니다. 이 작전의 권한이 한국에 있지 않고, 미국에
있다고 합니다. 한국은 아직 독자적으로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북한의 핵 위협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일본, 중국, 러시아, 북한과 같은 군사 대국들이 있습니다.
아마도 전쟁 상황이 발생하면 우리 힘으로는 상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명분을 앞세우는 분들은 ‘전시 작전권’을 돌려받아야 한다고 말을 할
것입니다. 국가란 스스로 자신을 지킬 수 있어야 비로소 국가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다른 나라에게 맡기는 국가는 없기
때문입니다. 비록 전세를 살더라도 언젠가는 자기 집을 갖는 것이 당연한
바람이듯이 한 국가는 ‘정치, 외교, 국방, 경제’적으로 스스로 독립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선택했던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명분을
앞세웠다고 하겠습니다.
실리를 앞세우는 분들은 ‘전시 작전권’을 돌려받지 않아도 된다고 말을 할
것입니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는 아직은 전시작전권을 돌려받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명분보다는 실리가 더 중요하다고 판단하는
것 같습니다. 신라는 당나라와 군사동맹을 맺어서 삼국을 통일하였습니다.
조선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군사적인 도움을 받았습니다. 한국전쟁에서
우리는 미국주도의 유엔군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는 명분만 앞세우기에는 복잡한 것들이 분명 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명분과 실리를 모두 충족하기 위해서 또 다른 중요한
것이 있음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그러므로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놓으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우리가 용서하면 용서 받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상대방을 존중하면 또 존중 받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또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성도들에게 걸맞게, 여러분
사이에서는 불륜이나 온갖 더러움이나 탐욕은 입에 올리는 일조차 없어야
합니다. 추잡한 말이나 어리석은 말이나 상스러운 농담처럼 온당치 못한
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감사의 말만 해야 합니다.” 내가
누군가를 험담하면 나 또한 비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시기하고 질투하면 나 또한 누군가에 의해서 시기와 질투를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보내 주신 소중하고 아름다운
손님입니다. 손님은 따뜻하게 맞이해야하고, 손님은 편안하게 있다가 갈 수
있도록 배려를 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이 세상에서 잠시 머물다가
가야하는 ‘나그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관계가 없던
여인을 따뜻하게 대해주고, 치유해 주셨습니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지만 아무런 조건 없이 여인의 병을 낳게 해 주셨습니다. 명분과
실리를 모두 충족하게 하는 것은 사랑과 용서입니다.
‘끌어당김의 법칙’이란 말이 있습니다. 사랑, 희망, 믿음은 우리의 영혼을
하느님께로 이끌어 줍니다. 그러나 불평과 불만, 시기와 질투는 우리를
어둠의 세계로 끌고 갑니다. 한 바가지의 ‘마중물’은 지하에 있는 많은 물을
끌어 옵니다. 사랑과 희망, 믿음은 하느님의 축복을 온 세상에 가득하게 할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보여 주신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기타]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수도회]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10월27일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에페4,32-5,8 루카13,10-17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안식일일지라도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
+ 루카 13,10-17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영육이 건강한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아니 육신은 건강해 보여도 영혼의 불구자들은, 영혼이 병든 자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육신은 불구임에도, 육신은 병들었어도 품위를 유지하며 건강한 영혼으로
사는 이들도 많습니다.
오늘 복음의 열여덟 해 병마에 시달리던 여자와 회당장의 대조가
흥미롭습니다.
전자는 육신이 병들었지만 후자는 영혼이 병들었습니다.
전자가 육신의 불구라면 후자는 영혼의 불구입니다.
몸은 건강하여 자유로울지 몰라도 영혼은 자유롭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회당에서 가르치는 동안 그 가르침에 귀기울이고 있던 병마에
시달리던 여자는
믿음 좋은 건강한 영혼임에 분명합니다.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주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진리의 말씀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고 치유합니다.
주님께서 치유해주시는 과정이 독특합니다.
그 여자를 보시고, 가까이 부르신 후 손을 얹으시며 말씀하십니다.
말그대로 전인적 치유입니다. 바로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맘과 몸을 다해 치유하시는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주님을 만날 때 온전한 영육의 치유입니다.
'그러자 그 여자가 즉시 똑바로 일어서서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참 아름답고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하느님을 찬양하라 직립인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혼의 치유와
건강에 하느님 찬양보다 더 좋은 처방은 없습니다.
주님을 만남으로 영육의 온전한 치유와 구원을 받은 여인입니다.
반면 예수님의 병자 치유에 분개하는 회당장은 영혼이 병든 자유롭지 못한
사람임이 분명합니다.
완전히 안식일법에 매여있어 그 마음 완고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세상에 이런 완고한 마음의 불구자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병마에 시달리던
여인만 아니라 이 마음이 완고한 회당장 역시 치유의 대상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1독서의 바오로 사도가 영육의 건강에 좋은 처방을 알려줍니다.
바로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처럼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며 서로 용서하고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말은 마음의 반영입니다.
추잡한 말, 어리석은 말, 상스러운 말, 허황한 말은 입에 올리지도 말고,
감사의 말만해야 합니다.
우리는 한 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이렇게 '빛의 자녀'답게 살아갈 때 우리의 영육은 저절로 치유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를 치유하시어 빛의 자녀답게 살게
하십니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
(시편103,2).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신앙과 죄는 병존할 수 없다
2014년 가해 10월27일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안식일일지라도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
+ 루카 13,10-17
< 신앙과 죄는 병존할 수 없다 >
종이를 만드는 방법을 생각해봅니다. 잘은 모르지만 일단 딱딱한 나무를
부드럽게 만드는 작업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을 잘게 자르든지 삶아서
찌던지(한지를 만드는 경우) 부스러뜨리는 과정이 가장 먼저 요구됩니다.
어떤 종이를 만들던지 먼저 나무의 딱딱한 성질을 죽여 부드럽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부드러워야 무엇이든 받아들일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은 표백을 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보통은 약재를 첨가하여 나무의
고유한 색이 빠지도록 만듭니다. 대부분인 부드럽게 부수는 작업과 표백이
동시에 반복되며 여러 번 진행됩니다. 그리고 아주 희고 잘게 부서졌다면
그것들을 다시 원하는 모양의 종이로 모아서 찍어내거나 한지와 같은
경우는 채로 걸러내어 물을 빼 냅니다. 희고 부드러워져야만 워하는 종이를
만들 수 있는 단계가 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교육하시는 과정도 이와 같습니다. 당신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잘게 부수어 순종할 수 있는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만드시고 깨끗하게 하시어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 사람으로 만듭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죄를 지을 수는 없습니다. 그분을 받아들였다면
죄는 빠져나갔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죄가 있다면 아직은 그분을
받아들인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 죄를 짓는 자는
모두 그분을 뵙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 자입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죄를 저지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씨가 그 사람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느님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1요한 3,6. 8)
물론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나 대사제들도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깨끗함은 위선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남을
판단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그분을 받아들이려는 목적이 아닌 속세의
목적으로 그렇게 행동했던 것입니다.
박보영 목사님이 거지 아이들을 데려다 키울 때 다시 옛날로 돌아가려는
마음이 들면 예전에 입던 몇 년 동안 빨지 않은 옷을 입어보라고 줍니다.
그러면 그들은 과거에 자신들이 얼마나 지저분하게 살았는지를 깨닫고
다시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을 만난 사람입니다.
만나면 되돌아 갈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는 이 두 가지, ‘항상 감사하고 죄를
멀리하라’는 권고를 하는 것입니다. 바오로도 구원은 우리 행위가 아닌
믿음에서 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생기면 행위가 따르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감사와 죄가 병존할 수는 없습니다. 감사는 겸손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워싱턴 시에 있는 링컨의 기념관은 국회 의사당 맞은편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 기념관 안에 링컨의 좌상이 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조각가
죤 보그룸의 작품입니다. 그가 링컨의 좌상을 만들 때의 일화가
전해집니다.
조각가 보그룸이 땀을 흘리며 큰 바위를 두들깁니다. 그리고 매일 그
떨어지는 돌 조각들을 청소하던 아주머니가 있었습니다. 어려 날 후에 한
덩어리의 바위 속에서 훌륭한 링컨의 형상이 나왔을 때 청소하던
아주머니가 묻습니다.
“어떻게 이 돌에서 링컨의 형상이 나왔습니까?”
“이 돌 안에 링컨의 형상이 있음을 믿고 그 링컨의 형상이 아닌 모든 부분을
다 없애버렸더니 이렇게 나타났네요.”
그렇습니다. 무언가 하나가 사라지지 않으면 다른 형상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서 죄가 사라지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모습이 나타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미워하지 않으면 저것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나타났다면 죄는 다 떨어져나간 것입니다. 선과 악이
병존하는 신앙은 없습니다. 돈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성체도 사랑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신앙과 죄는 병존할 수 없음은 누구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가끔은 내가 죄를 지어도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우리 안에 생길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인천] 내 뜻이 아닌
2014년 가해 10월27일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안식일일지라도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
+ 루카 13,10-17
조금 오래된 이야기지만, 6식구를 부양해야 하는 어려움을 이기지 못해
극약을 마시고 자신의 삶을 마감했던 19살 소녀가장이 있었습니다.
신문배달과 부근 약국에서 하루 12시간씩 일하면서 가장을 부양하며
열심히 살았던 소녀가장이 왜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까요? 사실 가난 한
가지 이유만으로 목숨을 끊지는 않는다고 하지요. 자신의 어렵고 힘든 삶,
그러나 그 누구도 자기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극단적인
선택을 했던 것입니다. 즉, 이 소녀에게는 주위의 격려가 필요했습니다.
또한 사랑받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응원도 필요했던 것이지요.
지금의 시대는 점점 더 외로움 속에서 살 수밖에 없는 세상처럼 보입니다.
개인주의와 황금만능주의가 판을 치면서 자기만 잘되면 그만이라는 생각과
물질이 최고라는 생각이 삶의 한 가운데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서
소외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특히 우리나라에서 보이는 높은
자살률을 통해서 우리는 쉽게 깨닫게 됩니다.
과연 주님께서는 이러한 우리 사회의 모습을 보시고 기뻐하실까요? 참 잘
살고 있다면서 세상 창조를 하시면서 하셨던 ‘보시니 참 좋았다.’라는
말씀을 반복하실까요?
그렇지 않을 것 같습니다. 따라서 지금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릴 행동들을 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분노를 살 수밖에 없는 모습을 보여드려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분노하시는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여덟
해 동안 ‘병마’에 시달린 여자를 고쳐주시지요. 그런데 마침 고쳐주신 날이
안식일이었던 것입니다. 고쳐줬다는 사실에 회당장은 일주일 중에 맘껏
고칠 수 있는 다른 날을 놔두고 하필이면 안식일에 치료행위를 하면서
반대를 하고 있습니다.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 속에서 힘들어 했을 여인의 아픔을 떠올려
보십시오. 육체적인 아픔뿐만 아니라, 병에 걸린 것을 죄의 결과라고
말했던 당시의 관습을 생각할 때 항상 ‘죄인’이라는 평을 받아야 했던
정신적인 아픔도 상당했을 것입니다. 이런 여인을 비롯해서 아파하는 모든
사람들을 안식일이라고 해서 그냥 놔둬서는 안 된다는 것이 예수님의
입장입니다. 그러나 회당장은 ‘안식’이라는 말을 영적으로가 아니라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그 사랑에 감사하면서
하느님의 날로 지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쉬셨으니 우리도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한다는 문자적으로만 이해하고 해석한 것입니다.
내 뜻이 아닌, 주님의 뜻에 집중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이익이 아닌, 사랑이 넘치는 곳이 되도록 노력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이 땅은 그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주님께서 보시기에
참 좋은 나라가 될 것입니다.
일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큰 행운보다는, 날마다 일어나는 소소한
편안함과 기쁨에서 행복은 더 많이 찾을 수 있다(벤자민 프랭클린).
삶과 사랑은 서로 이해하는 것(정용철, ‘초록이야기’ 중에서)
아무도 삶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누구나 삶을 이해 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며 성숙해 가는 것은 서로의 삶을 알아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삶을 이해해 가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삶을 이해하는 사람만이 글을 쓸 수 있고 좋은 물건을 만들 수
있으며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삶을 이해하는 사람은.. 인간의 연약함을 알기에 누군가의 잘못을 진심으로
용서할 수 있습니다.
인생의 아픔을 알기에 누군가의 아픔을 진심으로 슬퍼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 대한 희망을 끝까지 버리지 않습니다.
사랑도 그렇습니다.
사랑이란, 서로를 아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이해하는 것입니다.
서로가 이해하는 것이 삶과 사랑이라는 것. 이 아침에 크게 와 닿는
말씀이네요.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서울] 하늘나라의 긴급 구조대는 대기 중입니다.
2014년 가해 10월27일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안식일일지라도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
+ 루카 13,10-17
하늘나라의 긴급 구조대는 대기 중입니다.
119 구급, 긴급전화가 주말이면 안 되고 18:00시 이후는 안 되나요?
병원 응급실도 마찬가지로 그런가요? 물론 아닙니다. 언제나 가능합니다.
목숨이 걸린 위급한 상황이면 모든 걸 예외로 대하는 현실을 잘 알지요.
그런데 목숨과 무관한데도 목숨 내놓고 죽을 각오로 덤비는 건 왜 인가요?
몸매 만들기, 돈 벌기, 출마유세, 시험보기 등등 그런 종류에다 말입니다.
하늘나라의 긴급 구조대는 죄인을 구하려고 언제나 대기 중이라는 걸 압시다.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도 자기 소나 나귀를 구유에서 풀어 물을 먹이러 끌고 가지 않느냐?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사탄이 무려 열여덟 해 동안이나
묶어 놓았는데,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
(루카 13,15~!6)”
- 서울 대 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청주] 사람이 짐승만도 못하냐?|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10월27일 연중 제30주간 월요일(루카13,10-17)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안식일일지라도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
+ 루카 13,10-17
사람이 짐승만도 못하냐?
선한 것은 선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마음이 비딱한 사람은
아무리 선한 것이라도 트집을 잡게 됩니다. 그는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의 행동을 취합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의견이나 행동을
갖다 붙입니다. 본당 생활을 하다보면 전혀 사실과는 다른, 진실과는
거리가 있는 자기 생각을 사실처럼, 진실처럼 얘기하는 이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권위 있는 가르침도 고집을 더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마에 시달리는 여자에게 손을 얹어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러자 회당장이 분개하여 군중에게 말했습니다.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됩니다.”그러나 그는 아마도 자기가 병에 걸렸으면 자기
위치를 내세우며 병을 낫게 해 달라고 매달렸을 것입니다. 자기 병은
중하고 남의 병은 하찮게 여길 사람입니다. 그가 마음을 열어 주님의
능력을 받아들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실 안식일 법은 훌륭한 법입니다. 원래 안식일 제도는 사람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가져다주는, 쉬게 하고 안식을 취하게 하는 제도였습니다. 그것을
지키는 일은 장려할 일입니다. 그러던 안식일 제도가 사람을 짓누르는
짐으로 변해 병자를 치유하는 일까지 금해 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짐을 벗겨 주십니다. ‘자기소나 나귀는 안식일에도 구유에서 풀어 물을
먹이면서 일생동안 병마에 시달린 이는 안식일이라 하여 풀어줄 수 없단
말이냐?’ 한마디로 ‘사람이 짐승만도 못하냐?’고 하셨습니다.
모든 법이 그렇듯이 법은 어디까지나 법입니다. 그 법이 인간 위에서
인간을 지배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어떤 법이 인간 위에 군림한다면 그
법은 마땅히 거부 되어야 합니다. 법은 인간을 위한 것이고 사람이
희망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낙태 반대운동을 하고 사형제도 철폐를
주장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 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을 어느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법을 함부로 무시해서도 안 되지만 인간의
존엄을 해친다든지 이웃 사랑을 규제 하려한다면 그 법은 존재의 의미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율법을 알면서도 안식일에 드러내 놓고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안식일은 은총의 날이요, 삶의 멍에로부터 해방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규범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규범은 하느님의
법 앞에서 자유로워야 합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으로 율법을
해석하고 인간의 전통에 집착하면 인간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과 연민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망신을 당하게 됩니다. 따라서 내가
아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은 온갖 규범과
판례를 뛰어 넘습니다. 내가 잘한다고 하는 것이 그만 다른 사람을 옭아맬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마음을 바로 해야 하겠습니다. 주일미사참례를
의무이기 때문에, 계명을 지키기 위해 참례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요?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수도회] 하느님의 아들딸[단상]
2014년 가해 10월27일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제1독서
<그리스도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 4,32─5,8
복음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안식일일지라도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10-17
연중 제30주간 월요일(2014년 10월 27일) 하느님의 아들딸
오늘 복음에서 허리가 굽은 여인이 예수님께 치유를 받습니다. 허리가 굽어
있다는 것은 막혀 있다는 말입니다. 허리는 하늘을 향해 서 있어야 합니다.
하늘과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온전한 삶을 영위할 수 없습니다.
선하신 예수님은 우리의 막힌 데를 뚫어주십니다.
혹시 망상이나 의심이나 시기심 등 악한 생각과, 불안이나 우울함이나
의기소침 등 좋지 않은 감정이 우리를 지배하지는 않습니까? 이러한
생각들은 우리를 하느님과 이웃에게 갈라놓습니다. 우리 마음에 주님을
모시고 주님께 청합시다. 막힌 곳을 뚫어주소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느님의 자유로운 아들딸들입니다.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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