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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가해 11월1일 모든 성인 대축일
[청주] 행복하십시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제1독서 묵시 7,2-4.9-14
† 제2독서 1요한 3,1-3
† 복음 마태 5,1-12ㄴ
오늘은 하늘 나라의 모든 성인을 기리는 대축일로, 하느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는 성인들의 모범을 본받고자 다짐하는 날이다. 특히 전례력에 축일이
별도로 지정되지 않은 성인들을 더 많이 기억하고 기리는 날이다. 동방
교회에서 먼저 시작된 이 축일은 609년 보니파시오 4세 교황 때부터 서방
교회에서도 지내게 되었다. 5월 13일에 지내던 이 축일을 9세기 중엽
오늘날의 11월 1일로 변경하였다. 교회는 이날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 뒤의 새로운 삶을 바라며 살아가도록 미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
준다. 또한 지상의 우리와 천국의 모든 성인 간의 연대성도 깨우쳐 준다.
오늘은 모든 성인 대축일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주님을 경배하고
찬미하는 구원된 이들의 빛나는 공동체를 바라보게 합니다. 우리 모두
영원한 생명과 구원의 희망을 굳게 간직하며 지상의 교회가 지닌 사명인
순례의 길을 충실히 걸을 수 있도록 간구합시다.
★ 요한 묵시록은 희고 긴 겉옷을 입고 야자나무 가지를 든 구원받은
무리의 모습을 전해 준다. 그들은, 구원은 어좌에 앉아 계신 하느님과
어린양의 것이라 외치며 하느님을 경배하고 찬미한다(제1독서).
★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허락하신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되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제2독서).
★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를 통하여 ‘참행복’에 대하여 가르치신다. 하늘
나라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의 것이며, 그들이야말로 참으로 행복한
이들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프랑스의 문학 평론가 피에르 바야르의 『나를 고백한다』라는 매우
인상적인 책이 있습니다. 저자는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나치스 같은 불의한
권력 집단에 저항한 의로운 사람들의 용기 있는 결단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묻습니다.
그가 각별히 주목하는 이들 중에는 나치스를 비판하다가 사형된, 뮌헨
대학교의 학생 셋도 있습니다. 그는 ‘혼자가 아니라는 내밀한 느낌’이
이들에게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그리고 법정에서
보여 준 그들의 모습에 대한 증언을 인용합니다. “기소당한 세 젊은이가
앉아 있었다. 아주 바른 자세로, 침착하고 고독하게 앉아 있었다. 그들은
솔직하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한 아이는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하지만 딱
한 번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말하고 쓴 것은 사실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거예요. 단지 그들은 감히 그것을 말로 표현하지 못할 뿐이죠.’”
저자는, 혼자가 아니라는 그들의 확신에 찬 감정이 단지 동시대인들만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훗날 역사 안에서 그들의 행위가 옳다는 것을 확인해
줄 이들에 대한 믿음이기도 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현재의 폭력과 불의의 권력에서 자유로운 보편적인 정의와
인간성의 공동체에 속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자는 그들이
고립감을 이겨 내고 꿋꿋이 올바른 일을 행할 수 있었던 데는 그들의
가톨릭 신앙 또한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오늘 모든 성인 대축일에 우리는 ‘모든 성인의 통공’을 생각합니다. 이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주님 안에서 현세와 내세, 지상과 천국을 포괄한 영원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이 믿음을 단지 죽은 뒤의
삶을 위한 ‘영적 구원’에만 관련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성인들의 공동체’는 그리스도인들이 지금 여기서 구체적으로 선과 정의와
애덕을 위해 투쟁하고 헌신하는 삶을 이끄는 원천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선을 행하는 이는 결코 외롭지 않으며, 정의와 평화를 위해 일하는 이는
‘이미’ 성인들의 공동체에 속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걷는
주님의 길에 ‘모든 성인’이 있기에 외롭지 않다는 것을 기뻐하면서,
성인들이 감지하고 의지했던 진리의 빛을 굳건히 따르도록 결심해야
하겠습니다.
- 매일 미사 -
◈ [서울] 모든 성인 대축일
2014년 가해 11월1일 모든 성인 대축일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 마태오 5,1-12ㄴ
11월의 첫날입니다. 11월은 꼭 저의 작은 형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큰 형은
장남이기 때문에 어른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가문을 이어갈
자손이기 때문입니다. 큰 형은 기대가 큰 만큼 행동도 바르게 하였습니다.
셋째인 저는 막내라서 사랑을 받았습니다. 작은 잘못들은 용서를
받았습니다. 친구들과 다툼이 있어도 형들이 있어서 든든했습니다. 제
앞가림은 하는 저를 부모님께서도 기뻐하셨습니다. 작은 형은 큰 형만큼
기대를 많이 받지도 못하였습니다. 막내인 저만큼 사랑을 받지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작은 형은 다리와 같았습니다. 늘 말없이 궂은 일들을
하였습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제게 용돈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공부를
많이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10월은 풍요와 결실의 달입니다. 단풍도 아름답고, 운동을 하기에도 좋은
달입니다. 본당에서 많은 단체들이 10월 달에 야유회를 가기도 합니다.
산과 들이 무척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농촌에서는 가을걷이의 기쁨을 함께
나누기도 합니다. 풍부한 먹거리가 있는 달입니다. 12월은 한해의 끝이라서
마음이 설레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난 성탄절이 있습니다.
거리에는 성탄을 알리는 노래가 들리고, 하얀 눈이 내리기도 합니다.
방송에서는 한 해 동안 최선을 다한 사람들에게 상을 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11월은 크게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텅 빈 들판은 쓸쓸하기
마련입니다. 앙상하게 가지만 남은 나무는 외롭게 보입니다. 그러나 11월은
10월의 풍요함과 12월의 화려함을 이어주는 다리와 같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11월을 ‘위령의 달’로 정한 것 같습니다. 11월은 살아 있는 이와
세상을 떠난 이를 이어주는 다리와 같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삶도 죽음도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작은 형이 있어서 우리 가족은 더 화목할 수 있었습니다. 11월이 있어서
10월이 더 풍요롭게 보이고, 12월이 더 화려하게 보이는 것 같습니다. 지난
8월 있었던 교황 방한을 준비하면서 많은 봉사자들을 보았습니다. 시복식
미사에는 새벽 2시에 나와서 준비를 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눈에
드러나는 아름답고, 장엄한 시복식 전례는 그렇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수고하신 분들이 있었기에 가능할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나라에나 국가를 위해서 헌신한 분들을 모시는 국립묘지가 있습니다.
저는 보았습니다. 국립묘지의 중심에는 어느 나라든 예외 없이 ‘무명용사를
기리는 탑’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숭고한 희생과 죽음이 있었기에 자유와
민주를 지킬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모든 나라는 ‘무명용사’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모든 성인의 날’을 지내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친 분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밝게 비추는
신앙의 별이 되신 분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분들이 피와 땀을 흘려서
신앙을 지켰기 때문에 오늘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복음은 신앙의 별이 되는 방법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옳은 일을
하다 박해를 받으면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낙엽 지는 가을 뒤엔 반드시 눈 내리는 겨울이 오듯이 우리의 삶도 반드시
어떤 종점이 있습니다. 우리들 또한 신앙의 별이 되어서 우리 후손들에게
신앙을 물려 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11월 첫날을 보내면서 최 민순 신부님의 ‘두메 꽃’이라는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외딸고 높은 산 골짜구니에 살고 싶어라.
한 송이 꽃으로 살고 싶어라.
별 나비 그림자 비치지 않는 첩첩산중에
값없는 꽃으로 살고 싶어라.
햇님만 내님만 보신다면 평생 이대로
숨어 숨어서 피고 싶어라”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기타] 위령성월(慰靈聖月)입니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삶의 진정한 의미는
우리가 반드시 이루어야 할 최종적 희망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2014년 가해 11월1일 연중 제30주간 토요일 독서묵상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요한1서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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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열 시에 본당 묘지에서 위령미사를 봉헌하게 됩니다. 해마다
11월 1일이나 2일은 이렇게 묘지에 본당 가족들이 모여 위령미사를
봉헌합니다. 가족 묘를 하나하나 돌며 향을 피우고 성수를 뿌리고 조용히
기도를 바칩니다. 다 돌고 나면 묘지 제일 위쪽에 마련된 제대에서 미사를
봉헌합니다. 제대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탁 트인 하늘과 작은 도시의 풍경,
소리 없이 모든 것이 평화로워 보이는 그림입니다.
저 멀리에는 어렴풋이 후지산(富士山)의 정상이 보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지금 이 시간에는 미사를 준비하기 위해, 가족들이 모여 묘지 주변의
잡초를 뽑으며 주변을 정리하고들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미사를 봉헌한 후, 모두가 환한 얼굴로 단체사진을 찍을 것입니다.
위령성월(慰靈聖月)입니다. 언젠가 말씀 드렸듯이, 우리의 삶이란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성숙한 삶의 내용을 이루어낼 수 없게 되어있습니다.
생로병사라는 간단한 도식에 대한 막연한 이해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다가올 죽음에 대한 묵상과 현재의 삶에 대한 관조가 없이는 우리는 그저
흘러가는 삶을 살다가 준비 없이 죽음을 맞이하게 될 공산이 크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나와 덧없이 살다가 덧없이 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 아닙니다.
바른 의미를 찾아 열심히 보람된 기억을 남기면서, 절대적 희망을 품고
마무리해야 하는 여행길입니다. 부지불식간이란 표현이 실감날 정도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빨리 흘러갑니다. 그 빠른 시간은, 귀하게 여기는
마음들에게만 희망을 허락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요한1서는 그 희망을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1서 3,2)
다시 찾아온 위령성월, 갈길 재촉하는 가을을 바라보며, 반드시 생각해야만
할 것들을 무게를 실어 짚어보는 시간을 가져보았으면 합니다.
사랑하는 가족들, 벗들, 그 밖의 관계들 속의 나.
지금 좇고 있는 것과 나.
진정 희망해야 할 것과 나.
그리고
하느님과 나를 생각하는 시간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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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수도회] 희망성월, 성인성월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11월1일 토요일 모든 성인 대축일,
요한 묵7,2-4.9-14 1요한3,1-3 마태5,1-12ㄴ
2014년 가해 11월1일 모든 성인 대축일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 마태오 5,1-12ㄴ
희망성월, 성인성월
오늘은 11월 위령성월의 첫날이자 모든 성인 대축일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성인을 통해
위령성월의 첫날을 활짝 열어 11월을 희망성월, 성인성월로 만드셨습니다.
성인들은 우리의 희망이자 기쁨이신 하느님이 환히 드러납니다.
성인들은 공경하라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성인이 되라 있습니다.
우리 삶의 목표가 있다면 성인이 되는 것 하나 뿐입니다.
우리 모두 성인이 되라 불림 받고 있습니다.
누가 성인입니까?
첫째,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가 성인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 이것이 우리 삶의 모두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열렬한 사랑은 성덕의 잣대입니다.
요한이 환시 중에 본 성인들에 대한 원로의 설명이 의미심장합니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다.
저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
하느님을 사랑했기에 큰 환난을 겪어 낸 성인들입니다.
삶의 고난을 기쁨으로 승화시킨 성인들의 하느님 사랑입니다.
고난을 피해 성인이 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고난과 시련을 사랑으로 이겨낼 때 정화되어 성인입니다.
그러니 성인이 되는 것은 평생과정입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할 때 저절로 찬미, 감사기도입니다.
기도는 숨통입니다. 살기위해, 영혼이 살기위해 기도입니다.
가을은 기도의 계절입니다.
기도하라 있는 순교자 성월 9월, 묵주기도 성월 10월, 위령성월 11월입니다.
집중적으로 기도하라 있는 위령성월입니다.
기도할 때 삶의 허무는 삶의 충만이 됩니다.
둘째, 하느님을 희망하는 이가 성인입니다.
우리의 궁극의 희망은 하느님뿐입니다.
하느님을 희망하는 이는 하느님을 찾습니다.
하느님을 희망하는 이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우리의 신원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자녀답게 사는 이가 성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 요한 사도의 이 고백이 우리의 복된 희망이자 운명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여 그분께 희망을 둘 때 그리스도처럼 순결한 영혼의 성인입니다.
그러니 그분께 이런 희망을 둔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처럼
우리도 순결하게 합니다.
셋째, 행복하게 사는 이가 성인입니다.
한 번뿐이 없는 삶,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행복하게 사는 것은 우리의 권리이자 책임입니다.
성인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사실 이렇게 살아있음이 행복입니다.
잘 들여다 보면 행복의 요소를 다 갖추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돈이, 물질이 우리를 행복하게 못합니다.
주님의 행복선언이 참 통쾌합니다. 참 행복의 소재를 밝힙니다.
바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자비로운 사람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 행복한 성인들입니다.
하느님이, 하늘나라가 이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만으로 행복한 이가 성인이요, 하느님만으로 행복하기에 세상
것들로부터 초연한 자유를 누리는 성인입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성인들은 물론 우리 모두를 향한 결론 같은 오늘의 복음 말씀입니다.
오늘은 모든 성인 대축일입니다.
우리 모두 성인이 되라 불림 받고 있습니다. 자, 우리 모두 성인이 됩시다.
성인이 되고 싶은 청정욕은 얼마든지 좋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의 하느님 사랑과 희망의 성덕을 북돋아
주시며 참 행복을 선사하십니다.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신부 -
◈ [인천] 하느님의 일은 하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를 갖습니다.
2014년 가해 11월1일 모든 성인 대축일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 마태오 5,1-12ㄴ
어느 책에서 본 인상적인 글귀입니다.
“실패했다. 앞의 두 글자를 보지 마십시오. 뒤의 두 글자를 보십시오.
했다는 것만으로도 박수 받을 일입니다.”
‘실패했다’라는 단어를 보면서 우리는 앞의 두 글자인 ‘실패’로 모든 것을
판단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뒤의 두 글자를 보라고 합니다. ‘했다’라는 두
글자만으로도 의미가 있으며 했다는 그 자체로 충분히 박수 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지요.
사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생각하고 세상의 기준을 내세워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의 행동 자체를 멈추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어제 서울에서 교육을 마치고 전철을 타고 인천으로 내려오는
중이었습니다. 교육 마치고 내려오는 시간이 퇴근 시간이라 전철 안은
정말로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떤 좌석 앞에는 사람들이
거의 없는 것입니다. 저는 얼른 그 자리 앞으로 가서 섰습니다. 그 자리는
술 한 잔을 걸치셨는지 얼굴이 뻘겋고 또 오랫동안 노숙 생활을 하셨는지
꼬질꼬질한 옷을 입고 냄새도 어느 정도 풍기는 분이 앉아계셨습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이 복잡한 상황에서도 이 앞을 피했던 것이지요. 아무튼
약간의 냄새는 났지만 그래도 편하게 서서 갈 수 있었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 때, 제 옆에 어떤 할머니 한 분이 서 계시더군요.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틈에서 상당히 힘들어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누구도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 것입니다. 스마트폰으로 무엇인가를 열심히 보고
있거나, 또 눈을 감고만 있더군요. 제가 아무리 봐도 자리를 양보할 사람이
없어 보여서 ‘할머니가 잘못 섰구나.’ 싶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노숙자로
보이는 분이 “할머니, 여기 앉으세요.”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저는 이분만큼은 양보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저의 선입견이었지요. 좋은
일은 외모와 상관없음을, 또 경제적인 부분과도 관계없음을 그리고 그 밖의
많은 조건들도 좋은 일을 하는데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했다”라는 사실 하나인 것입니다.
오늘은 하늘 나라의 모든 성인을 기리는 모든 성인 대축일입니다. 즉,
하느님과 함께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성인들의 모범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그 모습을 본받고자 다짐하는 날인 것입니다. 성인들의 모범은 무엇일까요?
어떠한 상황과 조건에 관계에 관계없이 하느님의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 ‘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쁘게 받아주셨다는
것이지요.
지금 우리는 ‘했다’는 행동 앞에 붙을 수 있는 많은 조건들을 바라보면서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하느님의 일은 하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를 갖습니다.
먼저 안아줘 보세요. 나무든 사람이든 먼저 안아주면 그도 나를 따뜻하게
안아줄 것입니다(도종환).
우리의 목표를 확실히 세웁시다.
종이비행기를 만들어서 날려 보라고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멋지게
만들어 던지지요. 그런데 그 비행기가 날아가는 모습이 다 제각각입니다.
앞으로 쭉 나가는 비행기가 있는 반면, 한 바퀴 돌아서 다시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는 비행기도 있습니다.
이번에는 바닥에 동그란 원을 그린 뒤에 다시 종이비행기를 만들어 이
원으로 들어오게끔 던져 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멋진 비행기를
만들 필요는 없다고 말합니다. 비행기처럼 생기지 않아도 그저 이 원
안으로만 들어오면 상을 주겠다고 하지요. 그러면 어떻게 만들까요? 원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비행기를 제작하기 시작합니다. 아니 비행기의
모양도 아닙니다. 손으로 꾹꾹 눌러서 둥근 종이 공을 만드는 사람이 있는
반면, 또 딱지 모양으로 만들어 원 안으로 던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멋진
비행기로는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던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목표가 생기면 이 목표를 위해서 만들어가는 모양도 달라집니다.
우리에게도 목표가 있지요. 하느님 나라라는 목표. 그런데 우리들은 그저
겉으로만 멋지게 보이는데 주목하는 것 같습니다. 화려한 옷을 입고,
사람들의 칭찬을 받으려고만 하지요. 그것보다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중요한데 말입니다.
우리의 목표를 다시금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나의 생각과 행동이
과연 그 목표에 도달할 수 있도록 만들고 있는지도 반성해 보았으면 합니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겉모습보다는 예쁘고 사랑 가득한 마음과 그 실천이
우리의 목표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성인의 길, 어렵지 않습니다!
2014년 가해 11월1일 모든 성인 대축일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 마태오 5,1-12ㄴ
성인(聖人)의 길, 어렵지 않습니다!
10월의 마지막 밤을 맞아 오늘 저희 살레시오회 관구관에서는 참으로 의미
있는 행사를 한 가지 거행했습니다. 내년이면 탄생 200주년을 맞이하는
‘돈 보스코 성인의 밤.’ 이 뜻 은 자리에 함께하신 특별한 신부님이 계셨는데
살레시오회의 전설 원선오 신부님이십니다.
이탈리아 출신 선교사로써 20여 년간 한국에서의 선교사 생활을 끝내고
“이제 많이 성장한 한국보다는 더 자신을 필요로 하는 아프리카로
가야겠다.”며 홀연히 또 다른 세상으로 날아가신 신부님이십니다. 음악적
재능도 출중하시어 ‘엠마우스’ ‘좋기도 좋을시고’ 등의 주옥같은 성가들을
직접 작사·작곡하신 분이십니다. 그분께서 마치도 유언 같은 말씀을 한국
신자들에게 남기셨는데, 다들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이제 저는 한국 살레시오회에 마지막 인사를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지상에서 다시 더는 만날 수 없을 것이지만, 천상에서 한국 살레시오회를
위해 기도 드릴 것입니다. 어쨌듯 마지막 숨까지 돈 보스코처럼 계속
일합시다.”
참으로 훌륭하신 선배들 덕분에 오늘날 한국 살레시오회가 계속 성장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 살레시오회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선배 신부님이 또
한분 계십니다. 지금은 작고하셨지만 한국 땅에 첫발을 내딛은 첫
살레시오 회원으로 이탈리아 출신 마 마르텔리 신부님이십니다.
마신부님과 함께 사셨던 살레시오 회원들, 살레시오 중고등학교에서 함께
학교에서 동고동락했던 선생님들, 제자들로부터 전해들은 마신부님에 대한
이미지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었습니다. 후덕함, 뛰어난 유머감각,
낙천성, 호탕함, 소탈함, 서민적, 따뜻함...
곰곰이 생각해보니 마신부님께서 지니고 계셨던 이런 이미지들은 바로
우리 스승이신 돈 보스코께서 지니고 계셨던 이미지였고, 특별히 오늘날
이 시대가 절실히 요구하는 그런 이미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분들의 마음속에 아직도 마신부님은 다정한 아버지처럼, 마음씨 좋은
친구처럼 남아있습니다.한 선생님께서는 이런 추억을 간직하고 계셨습니다.
“평교사였던 제가 그분을 윗사람이라고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그분은 자주
손수 맛있는 커피를 타서 제게 서빙을 하셨습니다.”
한 졸업생은 이렇게 마신부님을 기억합니다. “등굣길에 비를 만났습니다.
급한 김에 가방을 머리에 쓰고 땅만 바라보며 비를 맞으며 급히 학교로
달려가던 나는 누군가 교문에서 내 손에 우산을 건네주는 것을 알았습니다.
고개를 들자, 파란 눈의 마신부님이 계셨습니다. 그리곤 당신은 비를
맞으며 내 손에 우산을 건네주는 것이었습니다. 어서 가라는 손짓과 따뜻한
미소를 평생 잊을 수가 없습니다.”
또 다른 선생님의 마신부님에 대한 기억입니다. “나는 마신부님이 화를
내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분은 한 번도 ‘안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평소 마신부님께서 자주 하셨던 말씀이 있었습니다. “나는 꼭 한국 땅에서
살다가 한국 땅에 묻히겠습니다.” 그분의 한국 사랑을 엿볼 수 있습니다.
많은 졸업생들의 뇌리 속에 강렬하게 남아있는 마신부님의 모습이
있습니다. 당시 살레시오학교는 다른 학교와 차별화된 것이 하나 있었는데,
수세식화장실이었습니다. 익숙하지 않던 스타일이라 아무리 설명해도 자주
변기가 막혔습니다. 마신부님은 교장이셨지만 틈만 나면 막힌 변기를 뚫고
또 뚫으셨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학교 정문에 서서 따뜻한 미소로
맞아주시던 마신부님을 잊지 못합니다.
“마신부님, 감사드립니다. 그 힘겨웠던 시절 이 땅의 가난한 청소년들의
영혼 구원을 위해 입국하셨음을 감사드립니다. 갖은 역경 속에서도 한국
땅에 살레시오회의 기틀을 다지셨음에 감사드립니다.어려울수록 호탕한
웃음으로 주변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주셨던 마신부님, 감사드립니다. 저희
후배들에게 돈 보스코의 아들로서 나아갈 이정표를 세워주셨으니
감사드립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부족한 저희 후배들입니다. 천국에서
저희를 지켜봐주시고 도와주시고 함께 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마 신부님, 보여주신 그 모든 것에 감사드립니다.”
오늘 모든 성인들의 대축일입니다. 성인(聖人)! 하면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우리 범인(凡人)들과는 너무 동떨어진 별세계에서 살았던
사람으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분들의 삶을 우리와 종이 한 장 차이였습니다. 마치도
원선오 신부님, 마신부님과 비슷합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많은 결점을
지니고 계셨지만 우리보다 한 번 더 웃어준 사람이 성인(聖人)입니다.
우리보다 3분 정도 더 인내한 사람들이 성인입니다.
성인의 길, 어렵게 보이지만 사실 그리 어려운 길이 절대로 아닙니다.
힘들어도 ‘그러려니!’ 하고 크게 마음먹는 사람이 성인입니다. 여기 저기
쑤시고 아파도 ‘나이 들면 다 그렇지!’하고 인내하는 사람이 성인입니다.
매사가 꼬이고 꼬이더라도 ‘인간 세상 다 그렇지!’ 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바로 성인입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청주] 행복하십시오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11월1일 모든 성인 대축일 (마태5,1-12)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 마태오 5,1-12ㄴ
행복하십시오!
교회가 어떤 사람을‘성인’으로 선포하는 것은‘성인들의 생애에서 드러나는
은총의 위대한 업적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미하고 감사함으로써 간접적으로
하느님을 흠숭하고, 성인들의 거룩한 생애나 업적을 일부라도 본 받도록
신자들을 격려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이미 하느님과 일치하여 영생에
참여하고 있는 성인들이 아직 현세에서 구원의 길을 순례하는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께 전구하여 주기를 청원하기 위한 것입니다’(정하권). 다시
말하면 현세를 살고 있는 우리의 영적도움을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성인들의 삶의 모범을 우리가 살아감으로써 성인들과 함께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성인을 올바로 공경한다는
것은 외적 행사의 복잡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행하는 사랑의 깊이에
있는 것입니다. 가경자 알베리오네는 “날마다 쉬지 않고 조금씩 주님께로
발길을 옮기는 것, 이것이 성인이 되는 비결입니다.”“그리스도를 닮고자
노력하지 않는 한 결코 성인이 될 수 없습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자
앙투안 슈브리에도 성인의 길을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님에 대한
앎이 모든 것의 열쇠입니다. 하느님과 예수그리스도님을 아는 것, 바로
그것만이 성인의 길을 걷는 신앙인의 목표요, 지름길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됩니다.”라고
말씀하시며 “사랑하는 이웃, 친구, 가족이기에 잘못된 점, 고쳤으면 하는
점을 알려 주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며, 분명 누군가는 해야 할 몫입니다.
하지만 그 어던 미사여구에 완벽한 논리로 조언을 한다 하더라도 그 안에
진심으로 상대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것은 그저 난도질이자
뒷담화일 뿐입니다. 더욱이 당사자가 없는 곳에서 그 사람에 대해 말하는
것은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요.”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 모두는 혈육으로나 육정으로나 욕망으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것(1요한 1,12-13)이기에 성인입니다.
시편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행복합니다. 당신께서 뽑아 가까이
오도록 하신 이! 그는 당신의 뜰 안에 머물리이다. 저희도 당신 집의 좋은
것을, 거룩한 당신 궁전의 좋은 것을 누리리이다”(시편 65,4). 그러나 그
성인의 거룩함을 잃어가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거룩함을 잘 간수하여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복음은 8가지 행복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행복은
현세생활에 근거를 두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모상대로 창조하시고 이 세상에 현존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현세는 마침내 얻어야 할 진정한 천상행복의 연장입니다.
우리는 약속된 미래, 영원한 생명의 수혜자로 뽑혔기에 지금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가난해서가 아니라 하늘나라가 우리의
것이기에 행복합니다. 슬퍼함이 행복이 아니라 위로를 받음이 행복입니다.
땅을 차지할 것이기에 행복하고 만족할 것을 기대하니 행복하고 자비를
입게 되고 하느님을 뵙게 되니 행복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되고
하늘나라가 우리의 것이니 행복하고 큰 상이 하늘에 마련되어 있으니
참으로 행복합니다. 그러므로 그 큰 행복을 지금 여기서부터 누리고
간수하고 지키시기 바랍니다.
행복은 천상의 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뵈려고 애쓰고,
하느님을 잃을까 두려워하고,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함을 안타까워
할 때가 행복의 순간입니다”(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그리고 “행복한
사람이란 하느님에 대한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을 자신 안에
모신 사람입니다”(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따라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알되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불행하며, 이 모든 것을 모르나
하느님을 아는 사람들은 참으로 행복합니다”(성 아우구스띠노). 주님의
뜻을 행함으로써 행복하십시오. 사랑합니다.
1.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음의
가난은 모든 것을 하느님께 희망을 두기에 그에게 온전히 의탁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할 것이기에
행복합니다.
2.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슬퍼할 줄 아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이웃의 고통에 동참하고 자기의 죄에 애통해 할 줄 아는 사람이기에
행복합니다.
3.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 온유하다는 것은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상황, 처지, 여건에 흔들림 없이 평상심을 유지할 줄 아는 사람, 자제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4.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진선미를 갈망하며 천상
것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5. 행복하여라,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 자비는 사랑입니다. 애간장을 녹이는
안타까움을 간직하며 이웃을 용서하고 사랑을 베푸는 사람, 이웃의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사람입니다.
6.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주님은 ‘내가 완전한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고 하셨습니다. 거룩함을 지닌 사람, 죄에 물들지
않은 맑은 영혼을 지닌 사람은 행복합니다.
7.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고 하셨습니다. 외형적인 평온에 앞서 내 마음 속에
있는 욕심과 무질서, 불의와 미움을 거두고 화해를 전해주며 갈라진 사람을
맺어주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8.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선한 일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시기와 질투, 모욕과 중상이 있기 마련입니다. 사도들은 주님
때문에 모욕을 당하는 것을 특권으로 생각하고 기뻐하였습니다(사도5,41).
어떠한 처지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깨끗해짐이란
2014년 가해 11월1일 모든 성인 대축일
<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
복음: 마태오 5,1-12ㄴ
< 깨끗해짐이란 >
체코 ‘다리’란 영화가 있습니다. 아버지와 어린 아들의 이야기입니다.
아버지는 배가 지나가면 다리를 올리고 기차가 지나가면 다리를 내리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기차가 신호를 위반한 채 달려옵니다.
아들이 이것을 먼저 발견하고 아버지를 부르지만 아버지는 대답이
없습니다. 아들은 자신이 다리 위로 올라가 수동으로 그 다리를 내려 보려
하지만 힘에 부쳐 그만 다리 밑으로 떨어졌습니다. 아버지가 이것을
목격합니다. 다리를 내리지 않으면 기차 안의 모든 사람이 죽게 되고
다리를 내리면 아들이 죽게 됩니다. 아버지는 주저주저 하다가 결국
아들을 죽이고 기차 안의 모든 사람이 아들 위로 지나가게 합니다.
그리고는 지나가는 기차를 보며 원망 섞인 눈빛으로 울부짖습니다. 당신들
때문에 내 아들이 죽었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기차에 탄 사람들은 창
밖에서 울부짖는 아버지를 보지 못합니다. 각자의 일에 바쁩니다. 다만
마약을 하기 위해 화장실로 들어온 한 여인만이 그 아버지의 우는 모습을
봅니다. 왜 우는지는 모르지만 왠지 그 아버지의 희생 때문에 자신들이
살아있는 것을 느낍니다. 그 슬프고 원망 섞인 눈으로 울부짖는 아버지의
아픔을 보며 마약을 복용할 수는 없습니다. 그녀는 마약을 끊고 결혼하여
아기를 낳습니다. 아들을 잃고 슬픔에 잠겨있는 아버지는 귀여운 아기와
함께 걷고 있는 그 여인을 길거리에서 또 만나게 됩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희생으로 이 고귀한 생명들이 살 수 있었음에 감사하며 그 상처를 치유
받습니다.
깨끗함이란 무언가를 거부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더러운 것에
성수를 뿌리거나 죄를 멀리하는 것만으로 깨끗하여졌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바리사이들도 죄를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회칠한 무덤이라 불렸습니다. 항상 깨끗했지만 속이
문제였습니다. 깨끗함이란 더러운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더러운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안이 이미 거룩한 것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어두운 방이 어둠을 거부한다고 깨끗해지지
않습니다. 빛이 밝혀지면 어둠은 저절로 사라집니다. 빛과 어두움이
공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늘나라엔 그리스도의 피로 자신의 두루마리를 빨아
깨끗해진 이들이 사는 곳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그 사람들의
가슴에 떨어져 그 마음에서 어둠을 몰아내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깨끗해지는 것은 나의 힘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의 힘인 것입니다. 어둠이
사라지는 것은 나의 노력이 아니라 내 안에 빛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깨끗해짐의 신비를 ‘아벨의 희생’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벨을 죽이는 것은 카인입니다. 선과 악이, 빛과 어둠이 공존할 수가
없습니다. 악이 선을 죽였습니다. 그 아벨의 피가 땅에 뿌려졌습니다. 땅은
우리 마음을 상징합니다. 그 마음에선 깨끗한 피가 울부짖습니다. 이제
우리가 우리 자신의 하느님이 되어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안에 있는
악이 그렇게 선을 죽이는데도 그 피가 계속 악에 의해서 짓밟히게 할 것인지
아니면 그 피의 울부짖음을 보아서라도 악을 내어 쫓을 것인지 말입니다.
하느님은 땅에서 아벨의 피가 울부짖자 카인을 그 땅에서 쫓아버렸습니다.
이것이 정화이고 깨끗해짐입니다.
우리 자신 안에 있는 악 때문에 그리스도의 피가 내 마음에 뿌려진 것을
믿는다면 어찌 그 악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있겠습니까? 내 안에서
울부짖는 그리스도의 피 때문에 그것에 상반되는 것들은 더 이상 그 땅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더 이상 그분의 피가 악에 의해 짓밟히게
만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깨끗하게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죄 때문에 피를 흘리신 그분의 고통을
보아야 합니다. 느껴야합니다. 믿어야합니다. 믿기만 한다면 더 이상 그
슬픔과 사랑을 보면서 그분이 내 안에서 더 이상 죄에 짓밟히게 만들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받아들였다면 더 이상 죄는 지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아는 사람은 죄를 짓지 않습니다. 이렇게 깨끗해진
사람이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행복한 사람들이고 성인들인 것입니다.
주교관의 물건을 훔쳐 달아나던 장발장은 경찰들에게 잡힙니다. 그러나
주교님이 그 물건들은 그냥 준 것이라고 말해 주었기 때문에 장발장은 크게
뉘우치고 회개하게 됩니다. 주교님을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분을
받아들이면 죄는 나가줘야 합니다. 이것이 깨끗해짐입니다. 장발장이
깨끗해지기 위해 유일하게 필요했던 것은 주교님의 피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피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아야하겠지만, 그것보다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이 우리에게 어떠한 가치인지 인식하여 뜨거운
감사의 눈물을 흘리는 것이 먼저가 되어야합니다. 내 안에서 그분이 어떠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계신지를 보아야합니다. 그분의 슬픈 눈을 보면 더
이상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빛이 내 안에 들어오면 어둠은 저절로
사라지는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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