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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가해 11월3일 연중 제31주간 월요일
[청주] 작은 자비라도 비풀어야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제1독서 필리 2,1-4
† 복음 루카 14,12-14
★ 바오로 사도는 필리피 교회의 신자들에게 뜻을 같이하고 마음을
같이하기를 당부한다. 이기심과 허영심으로 일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 것만이 아니라 남의 것도 돌보기를 권고한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부유한 이웃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을
초대하라고 이르신다. 그들은 보답할 수 없기에 오히려 그들을 초대한
이가 행복할 것이며, 주님께서 보답해 주실 것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가난한 이들을 초대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는,
교회는 친한 사람들이 끼리끼리 어울리거나 부유하고 학식과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 특별히 대접받는 곳이 아니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오히려
가난한 이들이 초대받고, 아픔과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이 조건 없이
받아들여지는 삶의 자리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실천하는 데 우리가 얼마나 주저하고 굼뜨며, 오히려
변명거리를 찾기에 급급한지 잘 압니다. 그러기에 말씀을 들으며
부끄러움과 부담감이 앞섭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이 말씀에 따른 삶의
증언은 우리를 깨어나게 하면서 작은 일부터 실천할 용기를 줍니다. 지난
6월 오랜 병고 끝에 선종하신 미국 출신의 예수회 정일우 신부님이 좋은
모범입니다.
‘빈민 운동의 대부’로 불린 정 신부님은 그 어느 누구보다 이 땅의 문화와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시면서 억울하고 힘없는 이들과 늘 함께하셨습니다.
그분은 오랜 세월을 가난한 이들과 동고동락하시면서 그들 안에 참으로
복음적 삶이 살아 숨 쉰다는 사실을 체험하고 확신하셨습니다. 그러기에
교회가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것은 일방적 시혜가 아니라, 오히려 교회의
구원이고 행복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신부님의 생생한 강연을 담은 『가난살이』의 한 대목을 읽으며, 가난한
이들을 초대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또한 우리를 참된 삶과 구원으로
초대하시는 말씀이라는 점을 마음에 새깁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있는 사람들을 구원해야 돼요. 바꿔서 말씀드린다면,
‘없는 사람들은 우리 교회의 구원’이라고 저는 개인적으로 여러 번 느꼈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구원이 참인간이 되는 것이라면, 또 가난한 사람들이
제일 인간다운 사람이라면 그 사람들로부터 구원받아야지요. 우리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고, 큰 거리를 두지 않고 함께 산다면
구원받을 겁니다.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을 구원해 줄 것이라 생각하지
않고, 그 반대로 가난한 사람들이 교회를 구원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 매일 미사 -
◈ [서울] 연중 제31주간 월요일
2014년 가해 11월3일 연중 제31주간 월요일
<네 친구를 부르지 말고,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을 초대하여라.>
+ 루카 14,12-14
대통령께서 ‘에볼라’ 발생 지역에 의료진을 파견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에볼라는 치사율이 높은 질병이라고 합니다. 전염성도 높다고 합니다.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에볼라 발생 지역에 의료진을 파견하는 것은
필요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치사율이 높은 질병이고, 전염성이
높다고 하니, 파견되는 의료진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하여야 할
것입니다.
‘다미안 신부님’에 대한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누구도 가길 꺼려하는
나병 환자들이 사는 곳으로 가신 신부님의 삶을 생생하게 보여준
영화입니다. 신부님께서도 나병에 걸리셨고, 나병환자들과 친구가 되어서
하느님 품으로 가셨습니다. 그분을 ‘몰로카이의 성자’라고 합니다. 파리
외방 전교회는 한국교회에 사제들을 파견하였습니다. 당시는 박해
시대였습니다. 한국으로 파견된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가족들은 파견되는 신부님을 보면서 많이 울었다고 합니다. 말이
틀리고, 문화가 다르고, 음식이 다른 조선에 와서 많은 신부님들이 고생을
하였고, 죽음을 당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신 육화의 신비는
어쩌면 바로 그런 희생과 사랑의 표현인 것입니다. 타인을 위해서
희생하고,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신앙의 삶이기도 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당부합니다. “무슨 일이든
이기심이나 허영심으로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저마다 자기 것만 돌보지 말고 남의 것도
돌보아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좀 더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결혼을 하는 젊은이들이 하객들에게 축의금을 받으면서 그 축의금을
백혈병을 앓는 어린이들에게 기부하였다고 합니다. 부부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면서 어려운 이웃들에게 나눔을 실천하는 모습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세계의 인구가 70억 명을 넘어섰다고 합니다. 많은
어린이들이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고, 많은 장애인들이 불편한 삶을
살아가고 있고, 많은 병자들이 고통 중에 있습니다. 우리의 따뜻한 손길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아직은 많이 있습니다.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기타] 늦가을 어느 월요일 아침에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루카14,14)'
2014년 가해 11월3일 연중 제31주간 월요일 단상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루카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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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높다.
바람은 차고 세다.
성긴 가지에는
미련을 놓지 못한 녀석들이 안간힘을 쏟고 있다.
"녀석들, 그냥 놓으면 될 것을."
월요일은 좋다.
별난 삶이 되어버린 삶.
바둥거리는 녀석들처럼 바보가 되고 싶지 않아
그냥 다 내려놓고 혼자 안에 머문다.
그런데 왜 이리도 그리운 이들이 많은 걸까.
함께 할 수 있기 위해 혼자여야 하는 삶을
또다시 확인하는 하루다.
하늘이 높아서 좋고
바람이 차고 세서 좋다.
그리고 그리워할 수 있는 이들이 있어 좋다.
(2012년 늦가을 어느 월요일 아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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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께 사과 말씀을 드려야 할 듯 하네요.
개인적인 일정으로 20일까지는 글을 올리기 힘들지 않을까 싶네요.
혹시 시간이 되어서 책상에 앉을 수 있다면 묵상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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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수도회] 공선사후(公先私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11월3일 연중 제31주간 월요일,
필리2,1-4 루카14,12-14
<네 친구를 부르지 말고,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을 초대하여라.>
+ 루카 14,12-14
공선사후(公先私後)
예전 변호사 사무실을 방문했을 때 액자에 한자로 씌어져 있던
'공선사후'란 글자가 생각납니다. 공적인 일을 우선하고 사적인 일을 후에
하라는, 아마 변호사님의 좌우명인듯 했습니다.
대부분은 사적인 일을 우선하지만 간혹 공적인 일에 헌신하는 이들을
대하면 저절로 존경하는 마음이 들게 마련입니다. 비단 공인뿐 아니라
공동체 생활을 하는 일반인들도 염두에 둬야 할 금언입니다.
"그 무엇도 하느님의 일에 앞세우지 마라"
"그 무엇도 그리스도의 사랑보다 앞세우지 마라"
베네딕도 성인 역시 수도공동체 생활에 우선순위를 분명히 밝힙니다.
무엇보다 우선해야 할 것이 하느님의 일인 공동기도요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래야 공동체 삶의 중심과 질서가 확립되기 때문입니다. 저절로 사람에
대한 차별이나 무시, 판단도 사라지고 존중과 배려가 자리잡게 됩니다.
오늘 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
우선 배려해야 할 대상은 자기가 아닌 이웃이요, 이웃중에서도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이라는 것입니다. 진정 이들이 하느님을 만난 이들입니다.
하느님을 만난 사랑의 사람들은 절대 이웃을 차별하거나 판단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을 존중하고 배려하며 돌봅니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유유상종, 친구나 형제나 건강한 이들이 아닌 이런 가난하고 불우한 이들을
초대하라는, 초대에 우선순위를 두라는 말씀입니다.
그대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마음,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이 하느님을 닮은 무욕의 무사한 사랑, 순수한
사랑입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이웃에 대한 배려를 우선합니다.
"무슨 일이든 이기심이나 허영심으로 하지 마십시오.
히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저마다 자기 것만 돌보지 말고 남의 것도 돌보아 주십시오."
바오로의 평범한 말이 심금을 울립니다.
거창한 사랑이 아니라 이런 평범하면서도 중요한 사랑이 제일입니다.
순수하고 진실한 사랑, 겸손한 사랑으로 나보다도 이웃을 배려하고
돌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따뜻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이웃들이 참으로 그리운 시절입니다.
멀리서 이런 사랑을 찾을 게 아니라
가까이 만나는 이웃들을 통해 실천해야할 깨끗하고 따뜻한 사랑입니다.
"주님, 제 영혼을 당신의 평화로 지켜 주소서."
오늘 화답송 후렴입니다.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진정 공선사후 사랑의 정신으로 일하는, 또 순수하고 겸손한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우리들의 영혼을 당신 평화로 지켜주십니다.
"주님, 언제 어디서나 주님을 오롯이 사랑하여, 주님께서 약속하신 참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신부 -
◈ [인천] 남에게 무엇인가를 준다는 것은 결국은 나를 위한 것임을
2014년 가해 11월3일 연중 제31주간 월요일
<네 친구를 부르지 말고,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을 초대하여라.>
+ 루카 14,12-14
제가 본당신부로 있을 때의 일 하나가 생각납니다. 혼자서 산책을 하다가
전체 본당신자에게 어떤 특별한 이벤트를 줄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즉,
함께 기뻐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를 궁리했지요.
그리고 할머니 할아버지부터 갓난아이까지 모두 함께 할 수 있는
여름캠프를 생각했습니다. 그것도 가까운 곳이 아닌 버스를 타고 3시간
이상을 가야 하는 강원도의 캠프장을 빌려서 전체가 하는 캠프였지요.
이런 제 생각을 본당 사목회에 이야기했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 그때부터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쉽지 않았습니다. 진행을 하면서 ‘괜히 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고, 혹시라도 많은 수가 함께 하는 것이라
사고라도 나면 어떻게 할까 라는 걱정도 생겼습니다. 이렇게 몇 달에
걸쳐서 준비를 했습니다. 힘들어서 나중에 사목회 임원들 중에서 몇은
“신부님, 이런 일 다시는 하지 마세요.”라는 불평도 하시더군요.
이렇게 전체 본당신자가 강원도의 어느 캠프장에서 2박 3일 동안의 캠프를
했습니다. 저의 예상대로 신자들은 너무나도 좋아하셨습니다. “신부님,
제가 이 나이에 이런 캠프를 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너무
기뻤어요.”라고 말씀해주시는 할머니도 계셨습니다. 다음 해에도 또 이런
캠프를 해달라고 부탁도 하십니다. 이렇게 많은 분들이 기뻐하고
좋아하셨습니다. 심지어 준비하면서 함께 힘들어했던 사목회 임원들도
신자들의 좋은 평가에 너무나 기뻐하면서 다음 해에도 캠프를 하자는
말씀들을 하시더군요.
그런데 가장 기쁘고 행복했던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제 자신이었습니다.
만약 준비과정의 어려움과 경제적인 측면을 떠올리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이 낫겠지요. 하지만 제가 얻었을 행복도 없었을 것입니다.
남에게 무엇인가를 준다는 것은 결국은 나를 위한 것임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부귀영화를 얻는 것은 아니지만,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을 얻을 수 있으니까요.
내가 아닌 남을 위한 행동 자체는 의미 없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행복을
위해서 또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반드시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오늘 복음을 통해서 내가 받을 이익을
생각하지 말고, 오히려 가난하고 소외받은 이들을 위해서 잔치를 베풀어야
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얻을 이익을 바라보면서 선행을 베풀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그
사람을 온전히 사랑하는 마음에서 행하는 행동 하나가 오히려 내 마음에
더 큰 행복을 자리 잡게 만들 수 있음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특히 오늘
복음에 나오듯이, 우리가 행한 사랑의 실천에 대한 보답을 주님께서 직접
해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사랑의 실천에 인색하지 않은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가지를 쳐 주고 받침대로 받쳐 준 나무는 곧게 잘 자라지만, 내버려 두면
아무렇게나 자란다. 사람도 이와 같아서 남이 자신의 잘못을 지적해 주는
말을 잘 듣고 고치는 사람은 그만큼 발전한다(공자).
이시형의 ‘인생내공’ 중에서
돈, 시간, 친구, 취미, 건강. 이 다섯 가지 부자가 되어야 한다.
첫째 ‘돈 부자’는 돈을 얼마나 가졌느냐가 아니고 얼마나 쓰느냐에 달려
있다.
둘째 ‘시간 부자’. 쓸데없는 일에 낭비하며 쫓기는 시간 가난뱅이가 되지
말고, 시간 부자가 되어라.
셋째 ‘친구 부자’. 친구가 많은 사람은 인생 후반이 넉넉한 진짜 부자다.
넷째 ‘취미 부자’는 늘 생기 넘친다. 즐길 수 있는 일이 있어 나날이 설레기
때문이다.
다섯째 ‘건강 부자’. 건강이 빈곤하면 위의 모든 것이 무의미해진다. 특히
다리부터 튼튼해야 된다. 나이 들면 여행을 가도, 멋진 풍경이나 훌륭한
예술품보다 의자부터 먼저 눈에 띈다. 일찍부터 건강 자산을 쌓아 나가도록
하라.
여기에 다음의 ‘일곱 가지 쾌’가 갖추어진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①괘식 ②쾌면 ③쾌변 ④쾌뇨 ⑤쾌한(땀) ⑥쾌성 ⑦쾌정(精)
유쾌하고 즐겁게 잘 먹고, 잘 자고, 변도 잘 보고, 소변도 잘 보고, 시원하게
땀도 잘 흘려야 되고, 목소리도 카랑카랑하며 맑고 밝아야 하고,
정력적이어야 된다는 의미다.
어떠세요? 부자십니까? 그냥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부자가 아닌, 스스로
느낄 수 있는 그리고 행복한 부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청주] 작은 자비라도 베풀어야|반신부의 복음 묵상
연중 31주간 월요일 (루카14,12-14)
2014년 가해 11월3일 연중 제31주간 월요일
<네 친구를 부르지 말고,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을 초대하여라.>
+ 루카 14,12-14
작은 자비라도 베풀어야
“성인의 무심한 은혜는 보답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성인은
자기가 은혜를 베풀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보답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잘 안됩니다. 내가 베푼 것은 꼭 기억하고 남이
나에게 베푼 것은 곧 잊어버리고 맙니다. ‘베푼 것은 모래위에 새기고 받은
것은 돌판에 새기라.’했지만 그 반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예
보답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잔치를 베풀 때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행복하다”
(루카14,14)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지금 당장 보답을 받지 못하지만
우리가 베푸는 하나하나는 하느님께 바치는 좋은 예물이 됩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좋은 분을 만났습니다. 그분은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고 행려자들을 위해 무료급식을 하는 분이셨습니다. 본당에서도 한 달에
두 번 봉사활동을 가지만 그들을 돕는다는 것보다 함께하는 기쁨이 더
컸습니다. 매번 정성껏 마련한 150인 분의 음식이 모자람이 없다는 것도
하느님의 안배였습니다. 행려자들 앞에서 목사님은 열심히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지만 저는 그런 용기를 갖지 못했습니다. 기회가 좋든 나쁘든 구애
없이 말씀을 선포한 바오로 사도의 열정을 생각했습니다. 그저 음식을
전해주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위신 체면에 매여 있는 저를
보았습니다. 어찌 되었든 화려한 잔칫상을 뒤로하고 그들과 함께하는
분들은 행복합니다. 그들의 수고와 땀으로 천국의 곳간이 가득 채워질
것입니다.
가끔 유유상종이라는 말을 떠올립니다. 같은 무리끼리 서로 왕래하며
사귄다는 뜻입니다. 그야말로 끼리끼리 입니다. 마음이 통하는 사람끼리만
모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믿는 이들은
그것을 극복해야 합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뿐 아니라 부족하고 허물이
많은 사람과도 함께 해야 합니다. 그들의 상처를 싸매주고 필요를 채워줄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런 내색도 없이 그리고 요구도 없이 하느님을
바라보며 모두를 품어주기를 주님께서는 기대하십니다. 끼리끼리가
아니라 소외된 이를 먼저 챙김으로써 하느님을 차지하는 행복을 누려야
하겠습니다. “작은 자비라도 베풀면 세상은 덜 냉랭해지고, 한결 따뜻하고
올바르게 될 것입니다. 자비는 주님께서 베푸시는 가장 강한 메시지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에 자신을 맡기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너무 깊어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교황 프란치스코).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2014년 가해 11월3일 연중 제31주간 월요일
< 네 친구를 부르지 말고,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을 초대하여라. >
복음: 루카 14,12-14
<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
지금 개봉 중인 영화 ‘나를 찾아줘’를 보았습니다. 계속 추리를 하게
만들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았습니다. 하버드대를 나온 수재이고
유명한 작가인 한 아내가 갑자기 사라졌는데 알고 보니 남편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모든 것을 꾸며놓고 자신은 살짝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알고 보니 남편은 결혼한 지 6개월 뒤부터 어린
여학생과 외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워낙 유명한 작가였기 때문이 이
이야기가 방송을 타고 나가고 이 남편이 직장을 잃고 다른 여자까지 생겨
아내의 재산을 탐내서 아내를 살해하고 시체를 유기한 쪽으로 결론이
지어져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반전이 생깁니다. 아내는 남편이 완벽해지기를 바라는
여인이었습니다. 자신은 다른 누구보다 더 완벽하게 행복해야만 하는데
약간 수준이 모자란 시골출신 남편이 자신의 수준을 따라오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물론 남편은 그런 아내 밑에서 아내의 비위를 맞추며 숨죽이듯
살아왔었지만 너무 힘이 들어 결혼하자마자 바로 이혼을 생각했지만
완벽을 추구하는 아내에게 이혼은 말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아내에게 외도하는 모습이 들키게 되어 분노를 참을 수 없게 된 아내가
자신에게 이런 모멸감을 준 남편이 사형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모든
일을 꾸몄던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가 나타나지 않으면 사형을 당할 처지에 처하게 되자 TV쇼에서
거짓으로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말하게 되고 그 방송을 본 아내는
마음을 바꾸어 남편에게 돌아가기 위해 지금까지 돈줄을 대주고 있었던
자신에게 빠졌던 한 남자를 살해하고 남편에게 돌아옵니다. 그리고는
납치되었다가 탈출한 것처럼 꾸며서 모든 사건이 종결됩니다. 남편은 그런
아내를 다시 떠났다가는 전 세계에서 미움 받는 남자가 되고 아내는 뱃속의
아기를 빌미로 남편을 잡아놓습니다. 남편은 살인까지 한 아내를
무서워하며 어쩔 수 없이 계속 함께 살아간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아내는 말합니다.
“나는 당신에게 돌아오기 위해 살인까지 했어요. 당신은 나를 위해 무엇을
해 주었죠?”
사랑하면 상대가 나보다 더 커 보여야 합니다. 커 보인다는 것은 나에게
많은 것을 해 주어서 지금 모습으로도 충분히 감사하다는 뜻입니다.
상대가 무언가 변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 그 내면에는 ‘내가
당신에 비해 아까운 사람이지’라는 생각이 숨어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더
해 주고 있고 자신이 손해 본다고 생각하니 상대에게 변화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결혼 전에는 자신을 사랑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가,
결혼한 후에는 조금 더 살을 뺐으면, 조금 더 일찍 들어왔으면, 술담배를
끊었으면, 시댁에 조금 더 잘 했으면 등의 온갖 요구를 하게 됩니다.
상대가 나의 수준에 맞추기 위해서는 그 정도는 바뀌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대접을 받으며 살아야 하는 사람은 숨이 막혀 죽을 지경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가 남편이라면 주위에서 자신에게 순종적이고
자신을 존중해주는 사람을 만나면 쉽게 자신을 인정해 주는 사람에게
빠지게 됩니다. 물론 이 사실이 그런 아내에게 알려지면 아내는 참을 수가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당신에게 해 준 게 얼만데...”라며 분노를
터뜨리기 때문입니다. 물론 신의를 저버리는 일을 하면 안 됩니다. 그러나
겉모습이 다는 아닌 것입니다. 바리사이는 항상 자신은 정당한데 합당한
대접을 받지 못한다고 불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부부관계에서도 이런
바리사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바로 자신이 더 해 주었다고 생각하여 항상
더 받아야 한다고 불평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 중,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란 말이 참으로 중요한 말입니다. 인간관계에서 그리고 하느님
앞에서도 결코 내가 커져서는 안 됩니다.
내가 하느님께 무언가 드린다고 착각하면서 하느님께 이것 해 줘야 하는
거 아닌지요, 저것 해 줘야 하는 것 아닌지요 하며 요구하게 된다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는 아닙니다. 하느님은 이미 우리를 위해 당신
생명을 바치셨습니다. 더 이상 얼마나 더 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잘 살거나 못 살거나 하는 것은 하느님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그저 그분은 당신의 피로 우리가 구원되는 것만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것 해 주세요, 저것 해 주세요 하며 요구만
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나를 섬기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관계는 내가 자꾸 낮아져서 남을 자신보다 높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에게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변해달라고
요구하기보다는 항상 부족한 우리의 곁에 있어 주셔서 감사하다는 마음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세상 거래공식과 하늘 거래공식
세상 거래공식과 하늘 거래공식
조건부로 사는 우리, 내가 해 주면 나도 받아야 되는 걸로 생각합니다.
그런 공식으로 거래하며 살기에 부모 자식, 부부, 형제들 까지 그리합니다.
이웃에게 잘 해주면서도 손해 보지 않으려하기에 각박해지는 세상이 되지요.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행복8단 기도방법 등 많은 걸 가르치셨고,
이어 마태오 복음의 6장 3절에서는 자선하는 방법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루카 14,13~14)”
- 서울 대 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수도회] 기도의 잔치[단상]
제1독서
<같은 생각을 이루어, 나의 기쁨을 완전하게 해 주십시오.>
▥ 사도 바오로의 필리피서 말씀입니다. 2,1-4
복음
<네 친구를 부르지 말고,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을 초대하여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12-14
연중 제31주간 월요일(2014년 11월 03일) 기도의 잔치
얼마 전 교황님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영감을 받아 트윗에 이렇게
쓰셨습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보답할 수 없는 이들에게 우리가
좋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저 멀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 속에도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영적 잔치를
차릴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기도의 잔치입니다. 우리 마음의 기도에
우리의 기도가 필요한, 그러나 보답할 수 없는 이들을 초대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기도의 잔치에 그들을 초대하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 자신이
깨어 살펴야 합니다, 누가 우리의 기도가 필요한 사람인지를 깨어 살펴야
합니다. 우린 기도의 식탁에 보잘 것 없는 음식만을 차리지만 우리의
겸손한 기도를 주님은 기꺼이 또 힘있게 들어주십니다. 지금 우리의
기도가 필요한 이들이 누구입니까?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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