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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가해 11월5일 연중 제31주간 수요일
[청주] 모든 것을 버림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제1독서 필리 2,12-18
† 복음 루카 14,25-33
★ 바오로 사도는 필리피 교회의 신자들에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힘쓰며, 뒤틀린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라고 권고한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자신이 순교에 이르기까지 기꺼이
헌신할 것이라는 각오를 밝힌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당신의 제자가 되려면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따라야 한다고 이르신다. 또한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당신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제대로 깨닫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이러한 어려운 작업을 피하지
말라고 촉구하십니다. 도시 빈민들의 벗이요 형제로서 평생을 살았던
제정구 바오로 씨(1944-1999년)가 이 말씀을 묵상한 글을 뒤늦게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지난 3일의 묵상에서 언급했던 ‘빈민 운동의 대부’
정일우 신부님과 함께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일한 그는, 정치에 입문한
뒤에도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는 양심으로 활동해 ‘깨끗하고 정직한
일꾼’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이러한 제정구 씨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그것에 장애가 되는 것을
철저하게 버리는 길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르는
길을 찾고자 하는 묵상 중에도 세상살이에 대한 생각의 소용돌이 속에
사로잡혀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러면서 묵상에서든 실생활에서든
이런 것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일을 하고자 자신을 내어놓도록
결심할 때만이 예수님을 제대로 따를 수 있고, 이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제정구 씨는 더 나아가 주님의 일을 하는 데 투신하는 사람도 그
일의 성공을 추구하며 사실은 ‘자아’를 만족시키는 차원에 머물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실 뿐 아니라 십자가가 ‘자기 소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시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의 묵상 글 일부를 옮겨 봅니다.
“누구든지 자기 소유(‘나’ 또는 나의 그 ‘무엇’)를 모두 버리지 않는 사람,
즉 가난을 받아들이고 가난을 향해 자신을 활짝 열지 않는 사람은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이제야 비로소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져야 할
제 십자가의 의미가 밝혀진다. 즉 가난을 향해 자기 자신을 활짝 열 때 제
십자가를 질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가난을 받아들이지 않는 상태에서 제
십자가랍시고 짊어진 것은 ‘나의 그 무엇’일 뿐이다. 그러므로 나의 그
무엇이 없을 때 나에게 채워지는 것은 주님의 연민의 정이요, 이 연민의 정
때문에 질 수밖에 없는 모든 짐이 비로소 내 십자가가 되는 것이다”
(『경향잡지』 1986년 9월 호에서).
- 매일 미사 -
◈ [서울] 연중 제31주간 수요일
2014년 가해 11월5일 연중 제31주간 수요일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 루카 14,25-33
어릴 때, 교과서에 읽었던 이야기입니다. 동네에 마당이 넓은 집을 가진
아저씨가 있었습니다. 동네 아이들은 그 아저씨의 집에서 놀곤
하였습니다. 아저씨는 아이들이 마당에서 노는 것을 싫어 하셨습니다.
그래서 마당에 담장을 높게 쌓았습니다. 아이들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아저씨의 집은 늘 추운 겨울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
동네 아이가 담을 넘어 와서 놀았고, 그 아이가 놀던 곳은 따뜻한 기운이
남았습니다. 아저씨는 담장을 헐었고, 아이들이 다시금 마당에서 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저씨의 집은 다시 봄이 찾아왔다는 이야기입니다.
제목은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 이야기의 줄거리는 늘 제 마음에
남았습니다.
외국 여행을 갔을 때의 일입니다. 엘리베이터의 층을 눌렀는데 작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순간 당황하였는데 옆에 있던 외국인이 친절하게 알려
주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방 카드를 엘리베이터에 대야만 층수를
누를 수 있었습니다. 제가 갈 수 있는 곳은 제 방과 식당 그리고 일층
로비였습니다. 다른 층은 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보안 때문에 그런
것 같았습니다. 새로 지은 교구청 건물도 6층 이상은 출입증이 있어야
합니다. 출입증이 없는 내방객은 2층에서 출입증을 받아야 합니다.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소통이라는 측면에서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교구청을 방문하시는 분들은 조금 불편하시더라도 2층에서 출입증을
받으셨으면 합니다.
우리 사회의 화두는 ‘소통’이라고 합니다. ‘계층, 지역, 이념, 학벌,
세대’간의 벽을 허물어야 한다고 합니다. 벽을 허무는 것은 많이 가진
사람, 많이 배운 사람, 높은 직책에 있는 사람, 기득권을 가진 사람이 먼저
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은 그런 벽을 허물기 위해서
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은 소통이었습니다. 죄인들, 가난한 이들,
아픈 이들, 장애인들과 함께 하셨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첫째가 되려는 이들은 꼴찌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우리가 세상의 법에 순응하기 보다는 하느님의 뜻에 더
순응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순종하도록 권고하고 있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순종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때로 희생과 아픔이 있어도, 사랑하는 가족들을 만날 수 없어도,
비판과 비난을 받는다고 해도, 참된 진실과 정의를 위해서 주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신앙은 은총을 받는 것이지만, 신앙은 받은 은총을 이웃들에게 나누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의 실천입니다. 신앙은 나와 나의 가족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우리 모두는 한 형제요 자매라는 연대의식을 키워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나의 십자가는 타인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위령성월’입니다. 우리보다 앞서 세상을 떠난 분들을 위해서 기도하며,
우리들 또한 언젠가 주님의 품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도록
주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따라야 하겠습니다.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도회] 부러움, 부끄러움, 간절함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11월5일 연중 제31주간 수요일,
필리2,12-18 루카14,25-33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 루카 14,25-33
부러움, 부끄러움, 간절함
믿는 이들의 삶은 평범한 듯하나 비범한 삶입니다.
'평범의 비범'이라 함이 맞을 겁니다.
며칠 전 어느 시인의 신문 칼럼 일부입니다.
-나이 마흔쯤 되니 좋은 것은 살아온 날과 살아갈 날들이 한 시야에
들어온다는 것이다. 과거와 미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이 나의
과거이자 미래임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는 것. 이런 안목은 나이 들지
않고는 가질 수 없는 시간의 선물이니
시간 속으로 전진하는 몸과 마음에 축복있으라.-
평범한듯하나 비범한 삶입니다.
이런 삶을 대할 때는 부러움과 더불어 부끄러운 생각도 듭니다. 나이
마흔까지 깨어 치열한 전사(戰士)의 삶을 살고 있는 분임이 분명합니다.
나이 예순이 넘어도 이런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한 이들도 부지기수일
것입니다. 마침 신문 같은 면, '생각줍기' 란의 글귀와 삽화가 어울렸습니다.
-볼 수도 만질 수도 없기에 간절함이다. 간절함은 그리움과 기다림까지
더한 바람의 최대값이다.-
이런 간절함이, 간절한 사랑이 있어 치열한 전사의 삶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 말씀도 참 간절합니다.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참으로 비범한, 간절한 삶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대로 내 믿음의 삶을 비춰주는 거울입니다.
1.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2.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3.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일체의 감상과 낭만이 배제된 치열하고 간절한 제자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과연 내 '사랑'과 '십자가', '버림'은 어느 상태에 있는지 자문하게 됩니다.
1독서에서 바오로의 충고 역시 간절합니다.
1.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힘쓰십시오.
2.무슨 일이든 투덜거리거나 따지지 말고 하십시오.
3.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니십시오.
4.기뻐하십시오.
오늘 우리에게 주는, 우리의 삶을 거울처럼 비춰주는,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그러나 간절한 원의를 갖게 하는 말씀입니다.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 중 다음 대목도 저에겐 충격이었습니다.
-범용(凡庸)한 신부는 추하다. 나쁜 신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니 그보다도 나쁜 신부는 범용한 신부다.
나쁜 신부는 괴물이다.
기형(畸形)은 공동척도로는 도저히 잴 수 없는 것이다.
괴물에 대한 천주의 계획을 누가 알 수 있겠는가?
괴물은 무엇에 소용되는가?
그렇게도 놀랄만한 실총(失寵)의 초자연적 의미는 무엇인가?
범용한 신부는 슬프게도 거개가 감상가(感傷家)다.-
비단 신부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위의 주님의 충고를, 바오로의 충고를 거울삼아 간절히 사는 길뿐입니다.
부러움과 부끄러움은 간절함으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의 부러움과 부끄러움을 당신 향한
간절한 사랑으로 바꿔주십니다.
"하느님, 제 영혼이 당신을 그리나이다.
제 영혼이 하느님을,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하나이다.
당신은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니다." (시편42,3;27,1ㄱ).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신부 -
◈ [인천] 이 세상에 별처럼
2014년 가해 11월5일 연중 제31주간 수요일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 루카 14,25-33
‘죽음을 정복한 사나이’라고 매스컴을 통해서 알려진 스턴트맨이 있습니다.
왜 그런 애칭이 붙었느냐면 글쎄 54미터 높이의 나이아가라 폭포를 한
번도 아닌 세 번이나 떨어져 내려 살았기 때문이지요. 이 스턴트맨은 어떤
상황에서도 죽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어떻게
보면 어이가 없습니다. 글쎄 뉴욕 시내를 걷다가 한 꼬마가 먹다 버린
바나나 껍질에 미끄러져 뇌진탕으로 사망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강철
같은 사나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역시 연약한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부족하고 나약한 존재인 우리 인간들은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지금의 자기 상황에 자신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삶이
영원할 것이라는 생각도 버려야 합니다. 대신 하느님의 보호 없이는
절대로 이 세상을 살 수 없음을 기억하면서 이 세상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에 집중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미국 제35대 대통령인 존 에프 케네디는 사람은 누구나 죽을 때 다음과
같은 4가지 역사적인 질문을 받게 된다고 말했지요.
첫째, 당신은 진정 용감하게 살았는가?
둘째, 당신은 얼마나 지혜로운 삶을 살았는가?
셋째, 당신은 매일 매일 성실하게 살았는가?
넷째, 당신은 무엇에 당신 자신을 헌신했는가?
죽음 앞에 서 있는 내 자신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내게 위의 네 가지
질문을 던져보십시오. 어떤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죽음 앞에 서면 이
세상에서 내가 욕심을 부려서 모으려고 했던 모든 부귀영화가 다 필요
없음을 깨닫습니다. 많은 재물과 높은 지위와 권력 등은 주님 앞에서는
모두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세상의 것들을 가지고서
당신을 따르라고 하지 않습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이렇게 단호하게 말씀하시면서 세상의 일이 아닌 주님의 일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물론 그 과정 안에서 어렵고 힘든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할 일이 생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제자로서 얻게 될 영원한 생명이라는 보상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크기에 세상의 가치를 멀리할 수 있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 용기와 결단을 통해 주님과 함께 참
기쁨의 순간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셨듯이,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것입니다.
사랑이란 하나를 주고 하나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둘을 주고 하나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아홉을 주고도 미처 주지 못한 하나를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브라운).
할 수 없어! 할 수 있어!!
요즘 프로야구 포스트 시즌 중입니다. 프로야구를 보면서 예전 초등학생
시절에 1년 정도 야구선수를 했던 때가 생각납니다. 그때가 초등학교
3학년 때였으니 제대로 한다는 것이 말이 안 되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감독님께서 종종 최고 학년인 6학년 형들이 공을 던지고 이제 막 들어온
3학년인 저희들이 타석에 들어가도록 하셨습니다. 2~3년 이상을 야구한
형들의 공을 어떻게 신입인 저희들이 칠 수 있었겠습니까? 공이 너무
빨라서 그 공에 맞으면 어떻게 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서 눈을 감고
무작정 배트를 휘둘렀던 기억이 있네요. 그때 감독님께서 이런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너희들은 ‘6학년이 던지니까 나는 저 공을 칠 수 없어!’라고 생각을 해서
치지 못한 거야. 만약 같은 학년 친구가 던지고 있다는 생각으로 타석에
들어섰다면 분명히 근사한 안타를 만들어냈을 거다.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너희들의 의욕을 꺾어놓은 것이지. ‘할 수 있다’는 생각이 ‘하고 싶다’는
의욕을 만들어 놓는다.”
그때의 감독님 말씀이 지금을 살고 있는 요즘에도 생생히 생각납니다.
특히 부정적인 생각이 들 때, 다른 방향으로 생각할 수 있는 전환점을
만들어 주는 것 같습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청주] 모든 것을 버림|반신부의 복음 묵상
연중 31주간 수요일(루카14,25-33)
2014년 가해 11월5일 연중 제31주간 수요일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 루카 14,25-33
모든 것을 버림
서로의 의견은 다를 수 있고 그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 ‘다르다’는 것이
서로 ‘틀리다’는 것으로 인식되어 서로 등을 돌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그래서 부모와 ‘의견이 틀리다’는 이유로 집을 뛰쳐나가기도
합니다. 이때 우리는 그가 ‘가출’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똑같이 집을 나간
행위이지만 어떤 뜻을 품고 구도의 길을 걷겠다고 나가면 ‘출가’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은 그야말로 ‘출가’의 길입니다. 집착을 버리지
않고서는 갈 수 없는 길입니다. 단순히 집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모두를 내려놓고 떠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다른 여러 유대관계를 뒤로하고 모든 것에 앞서 주님을
첫째자리에 모셔야 합니다. 하느님은 가족보다 중요하며 온갖 인간적인
권리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인맥에 매이게 되면 자유를 잃고 주님의 뜻을 행하는데 있어서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주님께 집중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사랑이신 주님께서 다음 일을 안배하십니다. 제자들의
삶은 인간적인 욕망들, 삶에 대한 자연적 갈망, 더 많이 소유하고 지배하고
싶은 마음들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나비는 번데기의 껍질을 벗어야
합니다. 사람도 새로운 존재, 새 생명으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탯줄을
잘라야 합니다. 이제까지 살아온 어머니의 품을 떠나야 합니다. 우왕좌왕,
양다리 걸치기, 어중간은 있을 수 없습니다.
가출한 사람은 온갖 것에 마음을 쓰며 궁리합니다. 그야말로 잔머리
굴립니다. 그러나 출가한 사람은 지금 당장은 집을 버린 것 같지만 결코
집안을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주님을 따르는데 어찌 사랑을
외면하고 자기 실속만 챙기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출가한 사람을
존경하고 우러러 봅니다. 어떻게 그 어려운 길을 가시게 되었느냐고
묻습니다. 참 훌륭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작 자기 자신의 출가의 삶은
관심이 부족합니다. 훌륭하다고 한 그 길에 자기 자신이나 자녀는
예외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미사 후 복사들에게 축복기도를 해 주면서 '미래의 신부님'이라고
불러 줍니다. 기쁘게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지만 어떤 복사는 당당하게
말합니다. '저는 아닙니다. 제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합니다.' 육적인 대를
잇는 것도 중요하지만 영적인 사도, 제자의 삶을 이어가는 것이 더
시급하고 중요하다는 것을 언젠가 생각하겠지요? 기도해 주십시오.
하느님께 모든 것을 다 드리는 데는 어떠한 합리적 타협도 있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만을 갈망하기 까지는 쉽지 않은 길입니다. 그래서
기도가 더 필요합니다.
제자의 길에 신중함이 있어야 하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에는 단호한 결단과
응답이 요구됩니다. 내 삶이 끊임없는 ‘출가’이기를 희망하며 자녀들에게도
큰 뜻을 품고 하느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는 출가의 삶에 눈뜨기를
기도합니다. 출가하는 자녀가 많아지길 기도하며 그 길에 은총이 충만하길
빕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믿음의 제물 위에 부어지는 포도주
2014년 가해 11월5일 연중 제31주간 수요일
<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복음: 루카 14,25-33
< 믿음의 제물 위에 부어지는 포도주 >
북한과 중국 선교로 널리 알려진 이사악 목사님의 간증 동영상에 북한에서
순교한 신앙인들에 대한 이런 증언이 나옵니다. 1972년 김일성의 명으로
도로를 신축하던 중 산을 깎는 과정에서 구멍이 하나 발견되었고 그 안에
숨어살던 수십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발견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
이들은 무려 19년 동안 한 명의 목사님과 함께 굴속에 숨어 신앙생활을
하며 몰래 살아왔던 것입니다.
당시 그런 불법 집회를 하면 즉결 처분을 할 수 있어서 그들은 모두 그
자리에서 순교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 위해
아이들부터 부모가 보는 앞에서 목을 매달아 죽였습니다. 그때 간수가
아이가 밟고 있던 의자를 건드려 아이는 목에 걸린 줄에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손이 아직 묶이지 않은 상태여서 손으로 목의 줄을 잡고
발버둥을 쳤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를 보며 울부짖자 어머니는 “예수님
만나러 가는 거야, 괜찮아”라며 소리 질렀습니다. 그리고 “간수 아저씨
용서해라”라고 당부하였습니다. 그러자 두 손으로 목에 걸린 줄을 잡고
있던 아이가 알아들었다는 듯이 쥐고 있던 손을 놓고 뒤로 열중쉬어
자세를 하고 조용히 죽어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목사님을 처형해야 했는데 그냥 죽이면 안 된다고 하며
길에 눕혀놓고 길바닥을 다지는 둥근 쇠바퀴가 달린 차로 발서부터
머리까지 천천히 밀어서 죽였다고 합니다. 무릎까지 바퀴가 지나갈 때는
매우 고통스럽게 소리를 질렀는데 무릎 위를 넘어서자 찬송을 불렀다고
합니다. 아마도 하느님께서 고통을 덜어주셨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세상
많은 곳에서는 믿음을 위해 목숨을 내놓은 수많은 참 신앙인들이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는 모든 신자들이 허물없는 사람, 순결한 사람,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기를 바란다고 하면서, 그들의 믿음을
위해서라면 그 제물 위에 부어지는 포도주가 되겠다고 말합니다.
“내가 설령 하느님께 올리는 포도주가 되어 여러분이 봉헌하는 믿음의
제물 위에 부어진다 하여도, 나는 기뻐할 것입니다.”
구약에서 제물을 바칠 때 그 위에 포도주나 물이나 기름 등을 붓는 예식이
있었습니다. 제물을 더욱 값있게 하기 위한 의미일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바칠 수 있는 믿음의 제물 중 가장 값진 것은 우리 자신의
생명입니다. 바오로는 그렇게 바쳐지는 제물들 위해 자신이 포도주가 되어
부어지기를 바라고 그것을 기쁘게 여긴다고 말합니다. 사실 누군가의
희생이 없다면 우리 안에 믿음이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우리 믿음을
키워주는 씨는 그리스도의 피이고 또 증거자들의 피입니다. 우리가 부모의
사랑을 먹고 자라는 것처럼, 우리 믿음도 누군가의 희생을 먹고 자랍니다.
우리가 참 제물이 되어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
위에 반드시 누군가의 피가 뿌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북한에서 그렇게 순교하신 분들도 한 목사님의 그 피에 의해서 완전한
믿음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그 한 분의 피를 통해 그리스도의 피까지
믿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신자들을 키우는 사제의 역할은 신자들 위에
자신의 피를 쏟아서 그 피를 거름삼아 믿음이 자라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물론 신자들도 자신들의 피로 믿음이 없는 이 세상의 거름이 되어야합니다.
피는 자기희생입니다. 내 것을 먼저 챙기려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하는
선교는 누구에게도 좋은 것을 꽃피게 할 수 없습니다. 신앙은
그리스도께서 피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쏟으신 것처럼 우리 자신 안에
아무 것도 남겨놓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부자는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가지고 있는 만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피로 우리가 여기까지 왔다면 이젠
우리의 피로 누군가를 우리가 있는 자리까지 이끌어 올 수 있어야겠습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포기하라는 겁니다.
2014년 가해 11월5일 연중 제31주간 수요일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 루카 14,25-33
포기하라는 겁니다.
입대하려면 개인 사복이나 사물을 모두 포기하고 얼마간 지내야 합니다.
회사에 취직하면 자신의 시간이나 다른 하던 일을 전부 포기해야 합니다.
가톨릭 신자가 되려면 비 그리스도 적인 과거의 생활은 포기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새로운 환경으로 가려면 거기에 걸맞게 정리를 해야 당연합니다.
세상에서 하늘나라로 가는 문턱인 죽음 앞에서 버릴 게 뭔지 절로 압니다.
오직 육신만을 위해 산다면 영원세상에서 살 영혼위한 준비는 언제하나요.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13)”
- 서울 대 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수도회] 하늘의 별처럼 빛나십시오!
2014년 가해 11월5일 연중 제31주간 수요일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 루카 14,25-33
하늘의 별처럼 빛나십시오!
바닷가 피정 집에서 밤 프로그램을 할 때였습니다. 잠시 짬을 내어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올려다본 하늘은 감탄사가 저절로 터져 나올 정도로
환상적이었습니다. 각자 나름대로 총총히 자리를 잡고 광활한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고 있는 별무리는 참으로 빛나고 순결해보였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을 향해 바오로 사도가 던진 불멸의 권고 말씀이 저절로
떠올랐습니다.
“무든 일이든 투덜거리거나 따지지 말고 하십시오. 그리하여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에서 허물없는 사람, 순결한 사람,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십시오.”(필리피 2장 14~15절)
바오로 사도의 필력이 참으로 대단합니다. 그분께서는 그리스도인이 어떤
방식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해서 너무나 명쾌하고 아름다운
표현으로 권고하고 계십니다.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나는 사람들.”
이방인의 사도로 유명한 바오로였습니다. 복음 선포를 위한 그분의 신앙
여정을 정말이지 영웅적이었습니다. 그는 때로 혈혈단신으로, 때로 갖은
멸시와 문전 박대를 당하면서, 때로 믿었던 사람들의 철저한 배반을
겪으면서 이교도 지방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 갖은 고생을 다
겪었습니다.
가끔씩 저도 잡신들을 섬기는 사람들, 사이비 종교나 우상숭배에 빠진
사람들의 추태를 보았습니다.그들의 기괴한 신앙행위는 소름조차 끼치게
만듭니다. 언젠가 한밤중에 셀 수도 없이 많은 굿당들이 자리 잡고 있는
남도의 한 명산 뒷자락을 홀로 걸은 적이 있습니다. 마침 한 굿집에서
요란스럽게 굿을 하고 있더군요. 징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기괴한 음성...
거짓말 하나 안보태서 모든 머리카락이 자동으로 솟구치더군요.
갖은 우상숭배에 젖어 살던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던 바오로 사도
역시 별의별 광경을 다 봤을 것입니다. 때로 그리스도교 세례를 받았지만
너무 깊이 사이비 종교에 빠져들었던 사람들이 다시금 일탈하는 모습도
봤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들이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끼치는
악영향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을 것입니다.
바오로는 자칫 잘못하다가 애써 일궈놓은 교회 공동체가 다시금 원상
복귀되어 집단으로 멸망의 길을 걸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위기감도
느꼈을 것입니다. 이런 바오로 사도였기에 그리스도교 공동체 구성원들을
향해 던지는 권고말씀이 때로 쌍날칼처럼 날카롭습니다. 때로 너무 그
말씀이 너무 신랄하고 구체적이어서 몸 둘 바를 모를 정도입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의 권고 말씀의 결론은 항상 따뜻함입니다. 부드럽게
신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그리고 늘 사랑과 희망의 메시지로 마무리
짓습니다.
바오로 사도 권고 말씀 가운데 “투덜거리거나 따지지 말라.”는 말씀이
참으로 마음에 와 닿습니다.불평불만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해왔습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도 출애굽 이후 광야생활을 할 때 모세를 향해
심한 불평불만을 터트린 바 있습니다.
불평불만의 결과는 하느님의 진노로 연결되었고 마침내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쓸데없는 불평불만,근거도 없는 불평불만, 극단적
이기주의에서 출발한 불평불만처럼 공동체를 힘들게 하는 요소도
없습니다. 불평불만은 하느님께 대한 불신앙과 불순명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합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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