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맹의 「유리(羑里)에 가면」감상 / 허연
유리(羑里)에 가면
노태맹
그대 유리에 너무 오래 갇혀 있었지
먼지처럼 가볍게 만나
부서지는 햇살처럼 살자던 그대의 소식 다시 오지 않고
유리에 가면 그대 만날 수 있을까,
봄이 오는 창가에 앉아 오늘은
대나무 쪼개어 그대 만나는 점도 쳐보았지.
유리 기억 닿는 곳마다 찔러오던 그 시퍼런 댓바람,
피는 피하자고 그는 유리로 떠나고
들풀에 허리 묶고 우리 그때 바람에 흔들리며 울었었지,
배고픈 우리 아이들
바닷가로 몰려가 모래성 쌓고
빛나는 태양 끌어 묻어 다독다독 배불렸었고,
그래, 지금도 유리에 가면 그대 만날 수 있을까.
우리는 이제 아프지 않고 절망하지도 않아
물마른 강가에 앉아 있다던 그대와
맑은 물이 되어 만날 수도 있을 텐데.
어쩌면 그대는 유리를 떠나고
유리엔 우리가 살아서
오늘은 그대가 우리를 만나러 오는
시퍼런 강이 되기도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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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리(羑里): 삼천백여년 전 은(殷)의 폭군 주왕(紂王)이 문왕(文王)을 가둔 감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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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창이다. 이 시에서 `유리`는 삼천 년 전 중국 은나라의 폭군 주왕이 문왕을 가두었던 감옥이다. 문왕은 이곳에서 유교 사상의 한 축인 주역의 기반을 완성한다. `유리`는 감옥이라는 현실의 상징이자 진리와 해탈의 상징으로 쓰였다.
시인이 왜 `유리`라는 지명을 가져다 사랑 노래를 완성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만큼 멀리서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사랑이었는지, 아니면 해탈이 필요할 만큼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사랑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먼지처럼 가볍게 만나 부서지는 햇살처럼 살자던" 그대의 소식을 기다리다 세월은 흘렀다. 울면서 기다리지만 `유리`는 너무나 멀다. 아니 찾아간다고 해도 그대를 만날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 그저 가슴을 두드릴 뿐이다.
언젠가 그대가 `시퍼런 강`으로 나를 찾아오는 날이 있기를 기다릴 뿐이다. 묻고 싶다. 유리에 가면 그대를 만날 수 있는지?
허연 (시인· 매일경제 문화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