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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가해 11월23일 그리스도왕 대축일
[청주] 최후 심판의 기준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제1독서 에제 34,11-12.15-17
† 제2독서 1코린 15,20-26.28
† 복음 마태 25,31-46
전례력으로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일인 오늘은 ‘그리스도 왕 대축일’이다.
축일명대로,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임금)이심을
기리는 날이다. 예수님께서는 정치권력을 장악하여 백성을 억누르는
임금이 아니라, 당신의 목숨까지도 희생하시며 백성을 섬기시는 메시아의
모습을 실현하셨다. 스스로 낮추심으로써 높아지신 것이다. 1925년 비오
11세 교황이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일을 ‘그리스도 왕 대축일’로 정하였다.
한국 천주교회는 1985년부터 해마다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간(올해는
오늘부터 29일까지)을 ‘성서 주간’으로 정하여, 신자들이 일상생활 중에
성경을 더욱 가까이하며 자주 읽고 묵상하기를 권장하고 있다. 하느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인 생활의 등불이기 때문이다.
오늘은 전례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주일인 그리스도 왕 대축일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왕으로 찬미합니다. 그분의 왕권은 정의와 자비가
넘치는 하느님 나라에 있습니다. 그 나라는 이미 지금 여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가 고백하듯 그리스도의 왕권은
죽음에 대한 결정적 승리로 드러날 것입니다. 주님의 권능이 우리에게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사랑의 실천으로 그리스도의 왕직에
참여하도록 결심합시다.
★ 주 하느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를 통해 당신이 좋은 목자처럼 당신의
양 떼를 보살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느님께서 몸소 양 떼를 먹이고,
누워 쉬게 하실 것이다(제1독서).
★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교회의 신자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다고 강조하며 죽은 이들의 부활에 대해 말하고
있다. 죽음이 한 사람을 통하여 왔듯이 부활도 한 사람, 곧 그리스도를
통해 온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날 것이다
(제2독서).
★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심판에 관한 광경을 말씀하신다. 가장 작은
이들에게 한 것이 당신에게 한 것이므로 그에 따라 사람들을 심판하실
것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전례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주일인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맞아 자연스레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며 신앙인으로서 하느님 나라의 백성다운 생각과
행위를 했는지 반성하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왕으로 고백하는 이에게는
이 세상에서 복음과 어긋나는 세력이나 흐름을 만날 때 그것을 이겨
내려는 굳센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이는 무엇보다도 세속적 가치관을
정화하려는 노력이 계속될 때 가능합니다.
올해 초에 나온, 주교회의 의장이신 제주교구장 강우일 주교님의
『기억하라, 연대하라』라는 책을 읽으며 우리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판단하고 실천해야 하는지 많이 배울 수 있었습니다. 한 해의 끝을
바라보는 지금, 이 책의 내용 가운데 구약의 성조사에 나오는 땅의 축복에
대한 참뜻을 다시 떠올려 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잠시 함께하는 인연이지 영구하고 절대적인 소유와
종속의 관계는 없다. 아브라함과 이사악, 야곱의 하느님께서 그들을 평생
나그네로 살도록 부르신 것은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복이 땅덩어리보다
훨씬 더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임을 깨닫게 하시려는 목적이 아니었을까?
그리하여 그들을 땅에 대한 집착과 소유욕을 초월한 자유로운 삶, 하느님께
모든 것을 의존하는 믿음의 삶으로 초대하신 것이 아니었을까?”
교회 역시 화려한 건물이나 외적 성장, 그리고 세속적 영향력을 앞세운다면
‘땅’으로 상징되는 경제적 이익과 힘 있고 기득권을 지닌 이들의 논리에
기울게 될 것입니다. 강 주교님의 성찰처럼 하느님께서 보여 주시는 ‘다른
세상’을 더 소중히 여기고 갈망하는 교회야말로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는
교회임을 우리 모두 깊이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은 몇 십 년씩 걸려서 건설한 거대한 예루살렘의 석조 성전보다
광야의 보잘것없는 먼지투성이 천막 앞에 엎드렸을 때 훨씬 더 하느님을
전심전력으로 섬기고 예배하였다. 땅도, 거기에 사람이 손으로 지어 올린
건물도 우상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복음은 인간의 손으로
새긴 우상과는 비교도 안 되게 훨씬 더 놀랍고도 숨 막히는 아름다움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새 하늘과 새 땅이다.”
- 매일 미사 -
◈ [인천]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
2014년 가해 11월23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
<사람의 아들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아 모든 민족들을 가를
것이다.>
+ 마태오 25,31-46
이런 말을 보았습니다.
“성공했을 때 감사하는 사람은 교만하지 않으며, 실패했을 때 감사하는
사람은 좌절하지 않는다.”
정말로 공감이 가는 말씀이 아닌가 싶네요. 교만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진정한 성공을 하는 사람은 없으며, 실패를 했을 때에도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은 희망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절대로 좌절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희망의 끈을 통해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인생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어쩌면 성공,
실패라는 극단적인 개념보다는 매순간에 갖게 되는 감사하는 마음이
아닐까요?
얼마나 감사하면서 살고 계십니까? 미국에서 인기와 존경 그리고 돈까지
모두 가진 사람이라는 평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전 세계 1억4천만
명의 시청자를 웃고 울리는 토크쇼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오프라
윈프리입니다. 그녀의 토크쇼에서 알려지지 않은 책이 한 번 소개되면
단숨에 베스트셀러가 되고, 광우병 주제로 토크를 하면 다음날 소 값이
폭락을 하게 됩니다. 다이어트 책을 내자 전 세계 사람들이 책을
구입합니다. 이렇게 전 세계에 영향력을 미치는 오프라 윈프리가 처음부터
승승장구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녀는 미혼모의 딸로 어릴 때 할머니의 손에서 자랐으며,
사촌오빠에게 성폭행을 당해 14세에 임신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태어난
아이는 얼마 뒤에 죽게 되지요. 이로 인한 괴로움에 마약에 빠졌고 모든
의욕을 잃어 107Kg의 몸무게에 도달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랬던 그녀를 변화시킬 수 있었던 것은 감사일기라고 합니다. 하루에
다섯 가지의 감사할 일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적었다고 합니다. 이 감사의
일은 대단한 것이 아닌, 지극히 일상적인 것이었습니다.
- 오늘도 거뜬하게 잠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 유난히 눈부시고 파란 하늘을 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점심 때 맛있는 스파게티를 먹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얄미운 짓한 동료에게 화내지 않은 저의 참을성에 감사합니다.
- 좋은 책을 읽었는데, 그 책을 써준 작가에게 감사합니다.
감사를 통해 겸손해질 수 있었으며, 이런 마음이 자신을 변화시키고 결국
성공에까지 이를 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오늘은 전례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주일인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사람을 구원하러 오신 그리스도께서 왕이심을 기리는 날이지요. 그런데
그 왕은 힘으로 백성을 억누르지 않습니다. 대신 당신 목숨까지도
희생하시며 백성을 섬기는 메시아의 모습이었습니다. 스스로 낮추시는
엄청난 겸손을 보여주시지요. 어쩌면 우리가 오히려 주님 위에 있는
왕처럼 비춰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순간이 영원하지는 않습니다.
복음에 나와 있듯이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주님께서는 심판자가
되어 우리를 영원한 벌과 영원한 생명이 있는 곳으로 보낸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행해야 할 덕목이 나오지요. 바로 늘 주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겸손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처럼 내 자신을 낮추어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사랑을 실천하며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만이 주님으로부터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라는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전례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주일을 보내는 오늘, 주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을
간직했으면 합니다. 감사의 수준이 있다고 하지요. 무엇을 해줘야 감사한
‘조건부 감사’, 어떠한 이유 때문에 감사하다고 말하는 ‘때문에 감사’. 가장
높은 수준의 감사는 어떠한 상황에도 상관없이 늘 갖게 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래야 매순간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느낄 수 있으며, 주님과 함께 이웃에게 진정한 사랑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로써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도 얻게 될
것입니다.
바람이 불지 않으면 노를 저어라(윈스턴 처칠)
오프라 윈프리의 십계명
1. 남들의 호감을 얻으려 애쓰지 마라. (자기 주체성)
2.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외적인 것에 의존하지 마라. (내적인 미)
3. 일과 삶이 최대한 조화를 이루도록 노력하라. (에너지 균형)
4. 험담하는 사람들을 멀리하라. (사람과의 접근성)
5.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라. (배려와 매너)
6. 중독되는 것을 끊어라. (좋은 생활 습관)
7. 당신에 버금가는 혹은 당신보다 나은 사람들로 주위를 채우라. (인맥의 경쟁력)
8. 돈 때문에 하는 일이 아니라면 돈 생각은 아예 잊어라. (돈보다 일)
9. 당신의 권한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 주지 마라. (기회 확보 능력)
10. 포기하지 마라. (인내심)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청주] 최후심판의 기준|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11월23일 그리스도왕 대축일 (마태25,31-46)
<사람의 아들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아 모든 민족들을 가를
것이다.>
+ 마태오 25,31-46
최후심판의 기준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영원한 생명, 구원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세상의 끝 날에 있을 심판을 미리 준비하도록 안배
하셨습니다. 천상의 날을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묵상하는
가운데 은총을 입으시길 바랍니다. ‘지금을 위한 오늘’을 살고 있는지?
아니면 약속된‘내일을 위한 오늘’을 살고 있는지? 돌아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얼마 전 대학 수학능력시험이 치러졌습니다. 이제 어느 대학을 지원해야
하는지를 고민할 때입니다. 사람들은 가능한 한 서울대, 서울약대를
지원한답니다. 서울대는 서울에 있는 대학, 서울약대는 서울에서 약간
떨어진 대학이랍니다. 서울상대를 지원하는 사람도 있는데 서울에서
상당히 떨어진 대학이랍니다. 지나고 보면 서울대나 서울상대, 서울약대가
행복을 좌우하는 것은 아닌데 그게 전부인양 매달리는 모습이
안타깝습니다.
일상 안에서 시험공부를 열심히 한 사람은 시험이 두렵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실력을 점검하고 발휘할 기회가 됩니다. 그러나 공부하지
않은 사람은 두려움을 갖게 마련입니다.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최후 심판을 맞이하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최후 심판은 개인적으로는
죽음이라는 이 지상 삶의 마감입니다. 믿는 이들에게 죽음은 천상의 길을
걷기 위해 세상의 험한 곳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심판의 기준을 알려 주셨기에 그 기준에 따라 준비하면 그 날이
기다려지고 기대가 됩니다. 그러나 준비하지 못하면 두려움과 공포 속에
그 날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합니다.“사람은 단 한번 죽게 마련이고 그 뒤에는
심판이 이어지듯이”(히브리9,27).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서야 합니다. 그래서 저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이 몸으로 한
일에 따라 갚음을 받게 됩니다”(2고린5,10). “심판 날에 모든 것이
드러나기 때문에 저마다 한 일도 명백해질 것입니다. 그날은 불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저마다 한 일이 어떤 것인지 그 불이 가려낼 것입니다”
(1고린3,13).
로마서 2장6절에서 8절에는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 꾸준히 선행을 하면서 영광과 명예와 불멸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그러나 이기심에 사로잡혀 진리를
거스르고 불의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진노와 격분이 쏟아집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13,50).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분명하고 단호한 선언이자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약속입니다. 결국 모든 사람이 다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 심판대 앞에서의 판결기준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물론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려는 것이다”(요한3,16-17).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25,40).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굶주린 사람들, 병든 이, 감옥에 갇힌 이들, 헐벗은 이들 등 보잘것없는
이들에게 어떻게 했느냐가 심판의 잣대입니다. 그들에게 한 것이 곧
예수님께 한 것입니다. 한 마디로 복음의 선포와 고통을 받고 있는 이웃에
대한 자비와 사랑의 실천이 심판의 기준입니다.
하느님의 판결은 명확합니다.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흑이냐
백이냐 둘 중에 하나입니다. 어중간은 없습니다. 양다리 걸치기는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심판의 기준을 안 만큼 그에 맞는 삶을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답을 알려주었는데도 준비하지 않고는 엉뚱하게 하느님을
원망하는 어리석음은 범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구둣방을 하는 할아버지 한 분이 계셨습니다. 이분은 자기는 살만큼
살았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간절한 소망이 있었습니다.
죽기 전에 꼭 예수님을 한 번 뵙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 기도했습니다.
열심히 기도한 덕분인지 예수님이 꿈에 나타나셨습니다. 너무너무
기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한 말씀하시는 거예요. “내가 내일 너를
찾아갈 테니 그리 알아라.” 할아버지는 너무너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했어요. 이른 아침부터 쓸고 닦고 부산하게 예수님 맞을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눈이 빠지게 기다렸어요. 그런데 하루가 다 가도록
오신다던 예수님은 오지 않고 거지가 동량 나왔고,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도 지나가고, 굶주린 어린아이도 문밖에 쪼그리고 앉아있었고 몇몇
손님이 다녀갔어요.
기다리다 지친 할아버지는 그러면 그렇지 나 같은 보잘 것 없는 노인에게
오실리가 있나? 개꿈 이었나보네 하며 실망했어요. 그날 밤 지쳐 잠이
들었는데 예수님이 또 나타나신 거예요. 예수님을 보자 할아버지가 대뜸
소리를 질렀어요. 오신다고 해 놓으시곤 왜 오지 않으셨습니까? 예수님도
거짓말하십니까?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그러셨어요. 무슨 소리냐? 내가
오늘 세 번이나 너를 찾았는데. 한번은 거지의 모습으로, 한번은 소경의
모습으로, 한번은 굶주린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말이다.
사실,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이를 스쳐 지나가지 말고 관심과 사랑으로 만나시길 바랍니다. 베푸는 삶,
사랑의 삶이 심판의 잣대임을 잊지 말고 기회를 놓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만나게 되는 모든 이는 나를 영원한 생명에로 인도하는 도구가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깨어 사랑을 실천할 때입니다.
부자는 꿈에 도둑을 만난답니다. 많이 가졌으니 잃으면 어쩌나 하고 늘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은 꿈에 은인을 만난답니다.
도움을 줄 사람을 간절히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욕심 많은 자는 꿈에
거지를 만납니다. 그리고 마음비운 사람은 꿈에 신선을 만난답니다.
마음을 비우면 그 안에 주님이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
하느님의 나라. 낙원을 꿈꾸고 기다리지만 그 낙원은 바로 지금 여기에,
우리 손 안에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 영원을 살아야 훗날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천상은 어느 날 갑자기 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삶의 자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사랑을 사십시오.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께서 나를 위해서 보내준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고 그를 기꺼이
받아들이십시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삶이 끝날 때 우리는 사랑으로 심판
받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종말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종말은 파멸이 아니라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마지막
날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기쁨과 희망으로 기다립니다. 희망의
기다림이 있는 만큼 삶의 자리에서 모두를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우선적으로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을 사랑으로 감싸 안으십시오.
그리하면 자신을 가지고 심판 날을 맞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1요한 4,16-17). 사랑에 사랑을 더하는 가운데 주님과 하나가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왕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신 분이고(요한1,14)
그분에게는 은총과 진리가 충만 하였습니다. 당신을 낮추어 몸소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며 섬김의 본을 보여주시고 (요한13,15 ). 겸손과 봉사의
왕이 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하시며(요한13,34) 사랑의 새 계명을 주셨고,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당하면서도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루카23,34).하고 기도하시며 용서의 왕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것, 심지어 목숨까지 내놓으시며
우리를 위한 사랑에 자신을 바쳤습니다. 그야말로 사랑의 왕이십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 사랑의 왕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많이 많이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수도회] '사랑의 왕'이신 그리스도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11월23일 주일(뉴튼수도원 13일째) 그리스도왕 대축일,
에제34,11-12.15-17 1코린15,20-26.28 마태25,31-46
<사람의 아들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아 모든 민족들을 가를
것이다.>
+ 마태오 25,31-46
'사랑의 왕'이신 그리스도
"주님이 영원한 왕으로 앉으셨네.
주님이 당신 백성에게 강복하여 평화를 주시리라"(시편29,10-11).
주님은 우리 '사랑의 왕'이십니다.
주님은 바로 우리 '삶의 중심이자 모두'란 고백입니다.
피라미드 같은 구조의 '위에서' 군림하는 전제자, 독재자 왕이 아니라
평면 중심의 '아래'에 낮게 자리잡고 계시면서
우리 모두를 섬기시는 평화와 기쁨, 온유와 겸손의 왕이십니다.
다음 미사경문의 감사송을 통해 왕이신 주님께서 다스리는 나라의 성격이
잘 드러납니다.
"만물을 친히 다스리시어, 그 영원한 나라를 지극히 높으신 아버지께
바치셨나이다. 그 나라는 진리와 생명의 나라요 거룩함과 은총의
나라이며, 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나라이옵니다“
지상에 살지만 이미 이런 주님의 나라를 살려고 노력하는 우리들입니다.
과연 바오로가 고백하는 대로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신(1코린15,28ㄴ)' 주님의 나라입니다.
바로 이 나라는 저 세상에서가 아닌 지금 여기에서 살아야 할 우리의
비전이자 현실입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해 주십사 기도할 뿐 아니라
지금 여기서 주님을 왕으로 모시고 아버지의 나라를 살아야 하는
우리들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참 목자이자 왕이십니다.
에제키엘서를 통해 주님의 이런 모습이 잘 드러납니다.
"캄캄한 구름의 날에, 흩어진 그 모든 것에서 내 양 떼를 구해 내겠다.
내가 몸소 내 양 떼를 먹이고, 내가 몸소 그들을 누워 쉬게 하겠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잃어버린 양은 찾아 내고 흩어진 양은 도로 데려오며,
부러진 양은 싸매 주고 아픈 것은 원기를 북돋아 주겠다.“
오늘날 여기에 속하지 않을 자 몇이나 되겠는지요?
주님이 아니고 이런 참 목자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런지요? 거리마다
병들고 상처입은, 또 길 잃어 버린 주님의 양들로 넘치는 현실같습니다.
주님을 왕으로 모신 이들은 주님을 닮아 적극적으로 주님을 돕습니다.
주님의 뜻에 따라 사랑을 실천함으로 지금 여기에 주님의 나라를 도래하게
합니다. 왕이신 주님의 최후심판의 잣대도 사랑임이 분명히 들어납니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 하여라.“
이미 지상에서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이들은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이며 이며 준비된 나라를 앞당겨 사는 이들입니다.
과연 누가 복 받은 의인들입니까? 다음 복음 대목에서 잘 들어납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추상적 사랑이 아니라 구체적 실천의 사랑이 심판의 잣대임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왕이신 주님은 이 곤궁 중에 있는 이들에 대한 사랑의 실천이
그대로 구원이요 당신께 대한 사랑임을 밝힙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곤궁 중에 있는 이들을 돕는 것이 바로 왕이신 당신을 돕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곤궁 중에 있는 당신의 양들과 당신을 동일시하는 왕이신
주님이십니다.
겸손한 사랑의 절정입니다.
주님을 왕이자 목자로 모신 이들은 주님의 일에 헌신할 수 뿐이 없습니다.
이런 사랑의 실천만이 주님을 만나는 길이요 주님의 나라를 사는 길입니다.
-북한의 결핵환자 치료를 지원해 온 유진벨 재단의 이사로 2003년부터
활동하고 있는 메리놀 외방선교회의 함제도 신부(81세)는 올해 10월까지
무려 57번째 북한을 방문했다 합니다. 유진벨 재단은 북한 보건성과
협력해 평양시, 남포시, 평안남북도, 황해남북도 지역에서 결핵 퇴치를
위한 의약품, 의료물품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목자인 신부님의 고백입니다.
"우리가 북한의 환자들을 만나고 치료하는 것도 인권 신장에 기여하는
일입니다. 인도주의적 지원은 더 필요합니다.
예수는 고통 받는 사람들 가운데 계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고통 받는 사람들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고통 받는 사람이 가장 약할 때 교회가 곁에 있어야 합니다.
고통 받는 사람과 만나며 평화롭게 대화하면 민족 화해도 저절로 됩니다.
접촉하고 이야기해야 서로 관심도 가질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무관심'입니다.
우리 남한이 북한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기도해야 하고 사랑을 실천해야 하지요.
물질적 도움뿐만 아니라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고통에는 중립이 없다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그대로 사랑의 왕이자 목자이신 주님을 닮아 사랑을 실천하는 노 사제의
지칠줄 모르는 열정이 놀랍고 감동스럽습니다. 바로 이런 작은 사랑의
실천을 통해 동토(凍土)인 북한에도 서서히 펼쳐지는 주님의 나라요,
바로 이런 사랑의 실천만이 평화통일의 지름길임을 깨닫습니다.
사랑의 왕이자 목자이신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를 당신 사랑과 생명으로 충만케 하시어 당신 '사랑의 일꾼'으로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시편23,1).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 -
◈ [서울] 그리스도 왕 대축일
2014년 가해 11월23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
<사람의 아들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아 모든 민족들을 가를
것이다.>
+ 마태오 25,31-46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시면서 사람의 아들이 되셨습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만나면서 새로운 세상을 보았고, 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참된 행복을
느꼈고, 하느님 앞에 모든 이가 한 형제요 자매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라면 몸이 아픈 병자들도, 장애인으로 태어나 멸시를 받았던
사람들도, 죄인이라 손가락질을 받던 사람들도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축복임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렇게 아픈 것도, 장애인이 된
것도, 멸시를 받던 것도, 죄인처럼 살아야 했던 것도 모두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드러내기 위한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분의 삶이
파격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사람의 아들로 태어난
것 자체가 파격입니다. 왼 뺨을 때리면 오른 뺨을 내어주라는 말, 친구가
오리를 가자면 십리까지도 가주라는 말,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다는 말,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 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는 말은 바로 파격입니다. 가난한 사람, 굶주린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나 때문에 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말은 이해 할 수 없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세상은 그렇게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키케로는 사람들의 여섯 가지 잘못을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첫째, 남을 깎아 내리면 자신이 올라간다고 착각하는 사람. 둘째, 어떤
일을 자신이 이 할 수 없으니까 불가능한 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 셋째,
바꾸거나 고칠 수 없는 일로 걱정하는 사람. 넷째, 대중의 잘못된 편견을
생각 없이 따르는 사람. 다섯째, 생각의 발전과 진보를 무시하며 독서와
공부를 하지 않는 사람. 여섯째, 다른 사람에게 자기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라고 강요하는 사람입니다.
오늘의 성서말씀은 ‘그리스도 왕’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양은 찾아내고 흩어진 양은 도로 데려오며, 부러진 양은 싸매
주고 아픈 것은 원기를 북돋아 주겠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자상하고
따뜻한 왕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하고, 굶주리고, 헐벗은 이들이 바로
왕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권세와 모든 권력과 권능을 파멸시키시고 나서
나라를 하느님 아버지께 넘겨 드리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파멸되어야
하는 원수는 죽음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섬기는 왕이었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던 예수님께서,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셨던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긴 참된 왕’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늘 날 교회를 생각합니다.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인을 생각합니다.
교회는, 신앙인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는지 생각합니다.
지금 아프고, 굶주리고, 가난한 이들의 친구가 되어주는 교회와 신앙인들은
바로 예수님을 친구로, 예수님을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주는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가, 신앙인들이 이기심과 욕심 때문에
지금 가난한 이들, 굶주린 이들, 병든 이들을 외면하고 그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무늬만 교회요, 겉모습만 신자일 뿐입니다.
인생은 풀잎 끝에 맺혀있는 이슬방울 같다고 하였습니다.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이면 말라버리는 들꽃과 같다고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고통의
바다에서 외로이 떠있는 작은 배와 같다고도 하였습니다.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주님과 함께 지내면 풀잎 끝에 맺혀있는
이슬방울도 아름다운 보석으로 변하게 됩니다. 저녁이면 말라버리는
들꽃도 천상의 향기를 갖게 됩니다. 고통의 바다에 떠있는 작은 배도
목적지를 향해서 힘차게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전례력으로 우리는 한 해를 마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부족하고 나약하기
때문에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걸어온 올 한해를 돌아 볼 수는 있습니다. 나의 발자국이 누구와 함께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가난 한이, 병든 이, 굶주린 이와 함께한
발자국이었다면 그것은 바로 주님과 함께한 삶이었고, 그 길은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2014년 가해 11월23일 주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
<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
복음: 마태 25,31-46
<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
G. 로핑크는 그의 책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에서 인도에서 보내온
선교소식을 하나 인용합니다.
“방갈로레에 있는 실베푸라라는 시골의 본당신부는 선교정신이 투철한
사제다. 독일 돈으로 그는 자동차를 한 대 사서, 본당 일이 끝난 저녁이면
이웃 마을들을 찾아 다닌다. 장터에 차를 세워놓고 어린이들과 쉬는
농부들을 모아들여 영화를 보여주거나(그의 자동차에는 영사기가
장치되어 있다) 간단한 마술을 연출한다. 그러고는 그리스도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어느 날 저녁, 힌두교도인 한 노인이 일어서서 말했다:
‘신부님,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신부님의 말씀 잘 들었습니다. 듣고
있노라니 흥미 있고 정말 경외심이 일어나는군요. 우리는 그리스도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둘도 없는 인간으로 또 신으로 존경합니다. 그럴
시간이 있고 너무 피곤하지 않을 적에는 성경도 즐겨 읽습니다. 하지만,
감히 말씀드리겠는데, 그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 신자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신부님 본당의 신자들이 어디 우리가 모르는 사람들입니까?
그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우리가 몰라요? 저들에게도 옥신각신
반목질시하고, 술 퍼먹고 주정부리고, 거짓말하고, 그런 일이 좀 많습니까?
그 사람들이라고 우리보다 낫게 살고 있달 것 없지요.’ 실베푸라의
본당신부에게서 들은 이야기이다.”
[G. 로핑크,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분도 1993, 238-239]
오늘은 한 해의 마지막 주일이고 그리스도왕 대축일로써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날에 심판자로 와서 우리를 심판하시게 되는 때를 미리 묵상하며
준비하는 날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날 양과 염소를 나누어 양은
천국으로 염소는 영원히 벌 받는 곳으로 보내겠다고 하십니다.
구원받은 양들은 가장 가난한 이들에게 많은 일을 해 주었지만 그 일들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억지로 해 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엄마가 아이 기저귀 갈아준 숫자를 세고 있고 밥을 해 준 가격을
따지고 있겠습니까? 내가 해 준 선행을 기억한다는 것은 참 사랑으로 한
것이 아닌 다른 이기적인 목적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선행은 자기도
모르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디 태양이 우리에게 많은 일을 해 주고
있다고 그 보상을 원합니까? 자기가 뜨거운 게 좋으니 그렇게 타고 있는
것이고 우리는 그 혜택을 볼 뿐입니다.
내가 하는 일이 선행인지는 모르더라도 교회에 속한 이들은 삶 자체가
세상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어쨌거나 구원받는 이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가난하고 불쌍한 이들을 예수님처럼 대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돈을 좋아하여 불쌍한 이들을 돕지 못한다면
구원에서는 일단 제외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위에 가난한
사람들이 있는데도 끝까지 부자로 남아있는 이들은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는 것처럼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불가능하게 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신국론’에서 세상과 교회를 ‘치비따스 떼레나
(Civitas terrena: 지상국)’ 그리고 ‘치비따스 데이(Civitas dei: 신국)’로
지극히 대비되는 나라로 분리함으로써 하느님백성이 이 세상의백성과
서로 반대되는 색깔을 지닌 ‘대조사회’로 여겼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글들을 잠깐 인용합니다.
“‘지상국’은 신들을 마음대로 만들어내는데, ‘신국’은 참 하느님에 의하여
만들어진다. ‘지상국’에서는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는 사랑이 지배하는데,
‘신국’에서는 자기 자신에게서 나아가는 사랑이 지배한다. ‘지상국’은
다툼과 전쟁이 사무쳐 있고 거기서는 평화란 이차적으로만 가능한, 즉
전쟁을 통하여 달성되는 지극해 깨뜨려지기 쉬운 평화일 따름인데,
‘신국’은 반면에 영원한 참평화가 있다. ‘지상국’은 지배권을 탐하는데,
‘신국’에는 겸손과 돌봄과 순종만이 존재한다.”
[G. 로핑크,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분도 1993, 300]
다시 말하면 세상은 각자가 만들어낸 하느님을 섬깁니다. 돈을 섬기고
명예나 성공이나 애정 등을 섬깁니다. 이것들이 자신들이 만들어 낸
신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백성은 오직 주님의 명령대로만 살 뿐입니다.
또 세상은 먼저 자신의 이익부터 챙기지만 하느님나라 백성은 이웃의
이익부터 먼저 챙깁니다. 또 세상은 서로 경쟁하여 이겨서 평화를
얻으려하지만 하늘나라 백성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는 것
하나만으로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평화를 누립니다. 세상은 권력을
탐하여 서로 높아지고 서로 많이 가지려고 하지만 하느님나라 백성은
겸손한 모습으로 하느님께 순종하여 이웃을 돌보는 이들이라는 뜻입니다.
가끔은 아우구스티누스가 플라톤적 이원론을 물려받아 종교를 지나치게
이원론으로 만들어버렸다고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천국과 지옥이
대조되는 것처럼 하느님나라와 이 세상과 대조되어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아 구별된 이들의 모임입니다. 다시
말하면 구별되지 않으면 망하고 만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노아를 부르십니다. 평생 배를 만들도록 하십니다. 어마하게 큰
배를 육지에서 만듭니다. 세상에서 바보취급을 받게 하십니다. 그러나
홍수로 세상을 뒤덮어버리심으로써 그렇게 세상과 구분되는 삶을
살아야만 구원될 수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마지막 날에도 이와 같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잘 살고 있는 아브라함을 부르십니다. 그래서 자신의 민족들과
떼어놓습니다. 아브라함은 영문도 모르고 알지도 못하는 이국땅으로 길을
떠납니다. 이것이 부르심입니다. 응답하지 않으면 그래서 구별되지 않으면
거기와 함께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또한 롯을 부릅니다. 롯이 나오자 소돔은 불바다가 되었습니다.
나오기는 하지만 아직도 그 세상에 미련이 남아있는 롯의 아내는
소금기둥이 되어버려 다시는 주님의 말씀을 따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끝나버리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과 하느님나라와의 사이에서
미온적인 반응을 보이는 이들의 미래입니다.
세상의 모든 역사가 그렇습니다. 뜨겁거나 차거나입니다.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던 라오디케이아 교회를 나무라셨습니다. 우리는 선택해야합니다.
세상인지 하느님나라인지, 염소의 삶인지 양의 삶인지 확실히
결정해야합니다. 구원은 결코 편하게 오지 않습니다. ‘좁은길’이란 힘든
삶을 선택한 사람들이 가는 구원의 길입니다. 가시밭길이여서 큰 결심을
하지 않으면 다시 편한 길을 원하게 됩니다. 지금은 결단이 필요한
때입니다.
1985년 11월 14일, 전재용 선장이 이끄는 참치 원양 어선 ‘광명 87호’는
1년 동안의 조업을 마치고 부산항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남중국해를
지날 무렵 SOS를 외치는 조그만 난파선을 발견하게 됩니다. 난파선
위에는 96명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정도로 서로 엉겨있었습니다.
어선 회사로 전화해 보니 상관하지 말고 그냥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전 선장은 그들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3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상태로 표류하던 베트남인들이었습니다. 전 선장은
회사의 방침을 어기고 그들을 끌어올립니다. 선원 25명이 도착할 때까지
먹을 10일치 식량밖에 없었지만 그것들을 96명과 함께 나누어 먹습니다.
그리고 음식이 떨어지자 걱정하지 말라고 합니다. 참치 잡은 것이 많이
있으니 그것을 먹으며 버티면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여성과 아이들에게
먼저 선원들의 침실을 배정하고 노환자와 병자들은 선장실에서 치료를 해
주었습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게 된 것은 당시 부산에 도착하여 난민소에서 1년 반을
수용되어 있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간호사가 된 피터누엔이 19년 만에
전재용 선장을 찾으면서부터였습니다.
수소문 끝에 전 선장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전 선장은 그 일로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회사에서 퇴사 통지를 받았고 그 이후에도 어떤 해운
회사에서도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가난한
양식업자로 통영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될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자신이 한 생동에 대해 단 한 번도
후회해 본 일이 없다고 적었습니다.
전 선장은 2004년 8월, 자신이 구조해 준 많은 베트남 인들의 환영을
받으며 미국 공항에 도착하게 됩니다. 우리도 전 선장처럼 이웃에게 우리
자신을 내어주는 세상과는 대조되는 삶을 살았을 때야만 그들이 천국에서
우리를 맞아줄 것입니다.
베트남 난민들이 직접 ‘UN난센상’에 전재용 선장을 추천하였을 때 선장은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본인은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 참으로 양이었음이 증명된
것입니다. 사실 그 배를 보고 25척의 배가 그냥 지나쳤었습니다. 광명
87호가 26번째 배였고 전 선장은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란 마음으로 자신의
모든 명예와 부를 포기하며 그들을 구했던 것입니다. 이런 대조적인 삶을
살지 않았다면 우리가 구원받아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와 같은
삶이 바로 교회이고 신국의 백성인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의 새 책이 발간되었습니다.
2014~2015년 나해 주일 대축일 복음 묵상집입니다.
구입은 하상출판사(031-243-1880)로 문의하시면 됩니다. ^-^
'여인아, 왜 우느냐?'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작고 가벼운 편을 눌러준 사람
2014년 가해 11월23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
<사람의 아들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아 모든 민족들을 가를
것이다.>
+ 마태오 25,31-46
작고 가벼운 편을 눌러준 사람
시소를 타려면 양쪽의 무게가 같아야 올라가고 내려가고 재미있습니다.
재미있게 시소를 타며 미소 짓고 행복해 하는 걸 보면 누구나 기분 좋습니다.
하늘의 임금님도 세상 사람들이 서로 그렇게 기분 좋기를 바라십니다.
한쪽이 무겁게 눌러 버리고 버티면 가벼운 한쪽은 못 내려와 무섭지요.
그러면 하늘의 임금님은 작고 가벼운 편을 누가 눌러주길 바라십니다.
하늘의 임금님은 작고 가벼운 편을 눌러준 사람을 잘했다 하실 수밖에요.
“그러면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오 25,40)”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 [기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내일을 위한 시간은 오늘밖에 없습니다.'
2014년 가해 11월23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 복음묵상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루카23,43) (오늘 복음으로 선택된 마태오 복음(25,31-46)이 아닌, 작년
그리스도 왕 대축일 복음으로 선택된 루카 복음(23,35ㄴ-43), 예수님과
십자가형에 처해진 두 죄인들과의 대화에 대한 묵상입니다.)
---
...
그리스도 왕 대축일입니다.
성서를 열고 해당 복음말씀을 묵상합니다.
초라하다 못해 비참해 보이는 삼라만상의 왕이신 그리스도.
당신께서 말씀하시는 왕의 모습이 이런 것임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단 한 가지만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섬기는 일입니다.
그분께서 그리도 강조하셨던 왕다운 모습이란 결국 섬기는 모습이었습니다.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마태오20,28)
왠지 모르지만,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자꾸 눈에 들어오는 대상은
주인공이신 예수님이 아닙니다.
함께 십자가에 죽음을 맞이한 두 죄인의 모습입니다.
한 사람은 예수를 저주하고 조롱하고 욕설을 퍼붓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저주를 퍼붓는 이를 나무라면서 예수님께 자신을 부탁합니다.
상상의 나래를 펴보기 시작합니다.
두 사람의 죄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누가 보아도 처참한 마무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삶 모두 상처투성이가 아니었을까요?
한 사람은 상처로 시작해서 상처로 끝을 맺는 것이고,
한 사람은 마지막에 상처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은총을 입습니다.
얼마나 고단한 삶들이었을까요?
그들의 어머니의 마음은 얼마나 쓰리고 아팠을까요? 죽음에 대한
명분이라도 그럴 듯 했으면 슬픔이 조금이라도 희석이라도 되었을 텐데
말입니다. 죽는 순간까지 이 두 사람의 몰골은 인간쓰레기로 사람들의
눈에 들어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죽음을 앞 둔 세 인물의 거래는 십자가 위에서 진행됩니다.
한 사람은 모든 것을 저주하며 어둠으로 끝날 것을 선택하고, 한 사람은
해방의 삶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에 대한 보증은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몰골이 말이 아닌 예수라는 인물이 서고 있습니다.
여기서 두 가지를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하나는 마음이라는 것에
대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선택이라는 유한성에 대해서입니다.
먼저 마음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두 사람의 삶이 비슷한
처지였을지 몰라도, 마지막 선택하는 모습을 보면, 두 사람이 이해한
각자의 삶에는 차이가 있지 않았을까를 짐작해봅니다.
하루아침에 회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는 회개라는 것은 두려움이 아닌 사랑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즉, 죄에 늘 넘어지는 삶이지만 이 죄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마음이
평상시 회개한 강도에게 있지 않았었을까요? 반대로 예수님을 죽는
순간까지 모욕했던 강도는 자신이 걸어왔던 삶 자체가 어둠이었고, 그
어둠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그저 상처에 머문 인생이 아니었을까요?
한 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미래를 생각하고자 할 때는 현재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현재를 잘 가꾸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비록 허물투성이고
상처투성이의 모습이라도 그 모습을 제대로 볼 수만 있다면, 우리에게
희망은 늘 열려있을 것이고 길을 찾을 수 있으리라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회개라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님을
이해해야 합니다.
두 번째, 선택은 늘 주어지는 것 같지마는 결국 마지막 선택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삶 속에서 숱한 선택에 의해 희비가 엇갈리기도 하지만, 그러한
과정 속의 선택은 어쩌면 마지막 선택을 위한 연습일지도 모릅니다.
루카가 전하는 십자가 위에서 두 강도와 예수님과의 거래가 역사적
사실이라고 가정한다면, 그 얼마나 찰나적인 선택이었습니까?
다시 첫 번째 이야기의 내용과 연결이 됩니다. 마지막 선택이 제대로 되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평상시의 자신의 마음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제대로 보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렇습니다. 이는 주사위 놀이가 아닌 분명 선택입니다.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을 우리는 희망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선택을
위한 준비는 이 순간에도 이루어져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내일을 위한 시간은 오늘밖에 없습니다.
---
(마태오 복음과 마르코 복음은 두 사람이 강도라고 전하고 있고, 오늘
우리가 주일복음으로 대하고 있는 루카 복음서의 내용과는 달리 두 사람
모두 예수님을 모욕하였다고 전합니다. 물론 요한 복음서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형을 당한 두 사람이 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교회전승은 마태오 복음서와 마르코 복음서보다는 루카 복음서를 선택한
느낌이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두 사람 중 오른 쪽에 있었던 사람(右盜)
이 회개한 사람이고 왼쪽에 있었던 사람(左盜)이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예수님을 저주한 사람이라고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도 있다. 사실
역사성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저 보다 개연적일
것이라는 것이 있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을 받으실 때 그 양쪽에는 두
사람의 죄수들이 있었다는 사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20131124)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수도회] 둘째 죽음 준비[단상]
2014년 가해 11월23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
제1독서
<너희 나의 양 떼야, 나 이제 양과 양 사이의 시비를 가리겠다.>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34,11-12.15-17
제2독서
<그리스도께서는 나라를 하느님 아버지께 넘겨 드리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15,20-26.28
복음
<사람의 아들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아 모든 민족들을 가를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5,31-46
그리스도 왕 대축일(2014년 11월 23일) 둘째 죽음 준비
우리는 첫째 죽음만 압니다. 육신적 죽음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겐 둘째
죽음도 있습니다. 주님 앞에 설 때입니다. 최후 심판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 재판정에 서야 합니다. 첫째 죽음에만 신경쓰는 나머지 온갖 힘을 다해
육신 건강만 챙기려 합니다. 과연 둘째 죽음에도 첫째 죽음처럼 준비를 잘
하고 신경 쓰고 있습니까.
둘째 죽음을 잘 준비하는 지혜를 오늘 복음에서 가르쳐줍니다. 우리가 이
땅에 숨을 쉬고 살 때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는 것”
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작은 이들’과 당신을 동일시하십니다.
십자가에서 주님은 가장 작은 이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가장 작은
이들이란 지금 헐벗고 굶주리고 떠돌고 갇혀 있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복음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예수님은 참으로 현실적인 분이라는 점입니다. 뜬 구름 잡는
이야기를 하시는 분이 아니라 구체적 현실 안에서 복음을 살도록 우리를
끊임없이 자극하십니다. 여기에 우리의 핑계는 있을 자리가 없습니다.
누가 우리 가운데 우리 사회에서 가장 작은 이들인지는 자명합니다.
그들에게 우리의 손을 내밀 때 우리는 둘째 죽음을 잘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들을 외면하면 우리는 영원한 죽음의 나락에 떨어집니다.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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