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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가해 11월25일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청주] 미리 준비하면 걱정할 것 없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제1독서 묵시 14,14-19
† 복음 루카 21,5-11
★ 사람의 아들 같은 분이 금관을 쓰고 낫을 들어 땅의 곡식을 수확하는
환시이다. 천사가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들여 하느님 분노의
포도 확에 던져 넣는다(제1독서).
★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두고 감탄하자 예수님께서는 그것의 파괴를
예고하시며 재난의 시작을 알려 주신다. 그리고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날
것인지에 대한 질문에 세상의 소문과 조짐에 현혹되지 말라고 이르신다
(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마지막 때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들려줍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언뜻 상반되어 보이는 두 가지 자세가 요구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말의 때가 온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라고
촉구하시며, 또한 그때가 왔음을 알린다고 하는 요란한 말과 기이한
표징들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우리는 서로 어긋나
보이지만 함께 지녀야 할 이러한 자세를 묵상하며 진정한 종말론적 삶의
두 차원을 성찰할 수 있습니다.
종말을 염두에 두고 사는 사람은 현세의 흐름과 옛 질서에 빠져 있지
않습니다. 진지하게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믿고 바라는 가운데 닥쳐오는
고난과 시험을 이겨 내려는 결연함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종말론적 삶이란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자리에 뿌리내린 삶입니다.
일상생활에 충실하며 종말론적 희망을 ‘선취’하고 풍성한 열매를 맺는
삶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세상과 우주의 완성에 관련해서만이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의 종말론적 사건이라 할 죽음에 대한 태도에서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세상과 세상에서 얻는 행복에 모든 관심을
두기보다는 죽음 뒤 주님과 마주할 영원한 행복에 더 큰 희망을 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또한 언젠가 사라질 현세의 삶이 지닌 소중함을 깊이
깨닫고 감사하며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참된 종말론적 희망은 역경과
진부함이 지배하는 일상 속에서도 우리를 더욱 생생하고 빛나게 할
것입니다.
- 매일 미사 -
◈ [인천]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
2014년 가해 11월25일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 루카 21,5-11
제2차 세계대전뿐만 아니라 한국전쟁에도 참석했었던 체스티 풀러
(Chesty Puller) 장군에 대한 유명한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한번은
아군이 적군에게 포위되어 고립되었다는 보고를 받게 됩니다. 그때 이렇게
명령을 내렸다고 하지요.
“덕분에 문제는 간단해졌다! 이제 우리는 모든 방향으로 공격할 수 있다.”
어떤 순간에도 절망을 하지 않는 모습은 과거 역사 안에서 많이
발견됩니다. 스파르타 장군 디오케네스는 적군인 페르시아 군대의 화살이
태양을 가릴 정도로 많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거 잘됐네. 덕분에 그늘에서 싸울 수 있게 되었으니.”
어떤 일이 있어도 희망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희망은 문제들을
간단하게 풀 수 있는 길을 제공하니 말입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이
희망을 자주 놓으려고 하지요. 대신 다른 것으로 그 자리를 채우려고
합니다. 절망으로... 슬픔으로... 고통으로....
주님께서 주신 소중한 선물인 이 희망이라는 자리를 다른 것으로 채워
놓으려는 어리석음을 간직해서는 안 됩니다. 아마 희망의 자리를 빼앗는
이유는 ‘걱정’이라는 걸림돌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제 성경을 읽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탈출해서 광야에서 생활할 때 만나를 먹던
장면을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이 만나는 다음날이 되면 상해버렸지요.
그날 하늘에서 떨어진 만나는 그날 안에 다 먹어야만 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하루 몫으로 충분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필요한 것 역시 하루 몫의 희망, 하루 몫의 사랑, 하루
몫의 겸손, 하루 몫의 기쁨 등이 아닐까요? 더 많이 갖고, 다른 이들과
비교하는 마음에서 걱정이 생기고 그래서 하루 몫으로 주어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날 겪는 고통과 시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루분의 고통과 시련일 뿐인데, 아직 오지도 않은
일들에 대한 걱정으로 계속된 고통과 시련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성전 파괴에 대한 말씀을 하시지요. 그러자 사람들은
“스승님, 그러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걱정되고 두려웠던
것이지요. 이에 예수님께서는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라고 하십니다. 걱정하고
두려워하면서 해야 할 것들을 못하는 우리가 되기를 원치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보다는 지금이라는 순간에 충실할 때, 이 충실함이 쌓이고
쌓여 주님께서 보시기에 가장 좋은 모습이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가족들이 서로 맺어져 하나가 되어 있다는 것이 정말 이 세상에서의 유일한
행복이다(퀴리부인).
건강한 사람이란(‘좋은생각’ 중에서)
독일의 정신분석학자 프리치 펄스 박사는 건강한 사람에 대한 특징을
4가지로 말한다. 첫째,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 안다.
둘째, 자신의 삶에 대해 책임을 진다. 셋째, 현실에서 도피하지 않고
도전의지를 가지고 있다. 넷째, 자기감정을 잘 다스릴 줄 안다.
이 글을 보면서 내 자신의 건강은 어떤지를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특히
정신적인 건강은 어떠하십니까? 책임회피, 도전의지 없음, 순간의 감정에
쉽게 흔들림... 요즘에 이런 분들이 더욱 더 많아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니, 제 안에도 이런 모습들이 너무나도 많았음을 반성하게 됩니다.
건강한 사람이 됩시다. 특히 정신적으로…….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청주] 미리 준비하면 걱정할 것 없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연중 34주간 화요일(루카21,5-11)
2014년 가해 11월25일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 루카 21,5-11
미리 준비하면 걱정할 것 없어
예루살렘 성전은 기구한 운명을 겪었습니다. 세 번에 걸쳐서 세워지고,
세 번 무너졌습니다. 첫 번째 성전은 가장 화려한 왕권을 누린 솔로몬 왕
때 건축되었습니다. 솔로몬이 죽고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갈라지게 되게
되었으며 남 유다는 기원전 587년 바빌론에 의해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고 성전은 무너졌으며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빌론으로 끌려가 노예살이를 하게 됩니다.
그 후 기원전 538년 바빌론을 제압한 페르시아의 키루스 황제에 의해
유배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귀환 이후 제일 먼저 성전을
재건합니다. 그러나 이 제2의 성전 또한 기원전 170년 경 시리아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의해 점령되고 맙니다. 시리아왕은 유다인을
말살하기 위하여 정책적으로 유다교를 핍박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폐허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성전 한가운데 제우스 신의 제단을 세우고
유다인들이 가장 부정하게 생각하는 돼지고기로 제사를 지내게 하였습니다.
그 후 시리아가 멸망하고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함으로써 이스라엘은 다시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로마의 헤로데
왕은 유다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예루살렘의 성을 다시 화려하게
증축합니다. 이 성전이 다시 폐허로 변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예언을
하셨는데 오늘 복음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35년경 전후이고 기원 후
70년경 성전은 또다시 로마에 의해 폐허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때
예루살렘 성만 무너진 것이 아니라 유다인들 전체가 나라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1948년 지금의 이스라엘로 정착하기까지 유다인들은
참으로 험난한 길을 걸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아직 복원되지 못하고 그 자리에는 이슬람 사원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유다교, 이슬람교, 그리스도교의 성지로써
의미깊은 땅이 되어 있습니다. 그토록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하느님께서
함께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폐허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충만하였지만 하느님을 외면하고 은총을 담을 그릇을 마련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은총을 받고도
감사하지 못하고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언제 그런 재앙을 맞게
될지 모릅니다. 깨어 준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사실 예루살렘이
스스로 돌아보고 회개의 길을 걸었더라면 멸망은 없었을 것입니다.
‘유비무환’이라는 말을 기억합니다. ‘미리 준비하면 근심할 것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종말에 앞서 겪게 될 환난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헛된 예언자가 나타나고, 자칭 ‘그리스도’라고 하는 자가 등장하며 민족과
민족,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큰 지진과 기근, 전염병이 생길 것이라
했습니다. 세상의 종말은 결국 혼란을 겪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결코 헛된
예언에 속는 일이 없도록 하고 큰 표징들에 무서워하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사실 마음이 추우면 몸도 춥고 남도 추워 보이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내가
평정을 지키고 있으면 바깥바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주님을 믿고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진대 어떤 표징이 일어나면
어떻고, 종말이 오면 어떻습니까? 그저 오늘을 그분과 함께 사는 것이
소중합니다. 주님과 함께라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깨어 준비하는 사람은
주님께서 약속한 미래를 희망할 뿐입니다. 희망하는 만큼 지금에
충실합니다.
작은 불은 바람 앞에서 쉽게 꺼지지만 큰 불은 바람 앞에서 활활 탑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이 큰 사람은 환난 앞에서 그 진가를 드러냅니다. 세상
종말에 앞선 외적인 혼란을 두려워 말고 오히려 마음 안에 평온이 없음을
염려해야 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수도회] 깨어 평범한 일상에 충실하십시오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김명준님의 사진.
2014년 가해 11월25일 연중 제34주간 화요일(뉴튼수도원 15일째),
요한묵14,14-19 루카21,5-11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 루카 21,5-11
깨어 평범한 일상에 충실하십시오.
하루하루가 구원의 날이자 심판의 날입니다.
깨어 살면 구원의 날이고 잠들어 살면 심판의 날입니다.
오늘 요한묵시록의 구원과 심판은 언젠가 있을 일이 아니라
날마다 일어나는 일로 생각하는 것이 바로 종말론적 삶입니다.
"낫을 대어 수확을 시작하십시오. 땅의 곡식이 무르익어 수확할 때가
되었습니다.“
땅의 곡식의 수확이 상징하는바 의인의 구원입니다.
과연 우리의 삶은 잘 무르익어 가는지요. 주님께서 오늘 지금 수확한다
해도 문제가 없을 정도로 무르익은 삶이겠는지요.
나이와 함께 가는 성숙이 아닙니다. 깨어 하루하루 노력하지 않으면
여전히 익지 않은 미숙한 삶일 수 있습니다.
"그 날카로운 낫을 대어 땅의 포도나무에서 포도송이들을 거두어
들이십시오. 포도가 다 익었습니다.“
천사는 땅 위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느님 분노의 큰 포도
확에 던져 버립니다. 그대로 불의한 이들의 심판을 상징합니다.
구원과 심판은 하느님이 내리시는 게 아니라 내 자신이 자초하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지금은 11월 위령성월이자 연중 34주간으로 우리의 죽음과 심판에 대해
묵상하는 연중 마지막 주간입니다. 우리의 일년 삶을 수확하는 주간입니다.
일일일생(一日一生), 일년사계(一年四季)로 내 인생을 압축할 때,
과연 나는 어느 지점에 와 있는지요. 과연 잘 익어가고 있는 내 인생인지요.
오늘 복음은 종말론적 삶을 위한 지침입니다. 어는 상황에서도 부화뇌동,
경거망동하지 않고 지금 여기의 현실에 충실할 것을 촉구합니다.
얼마 전 여기에서 어느 분께 면담고백 성사 중 드린 충고의 말씀입니다.
"깨어 평범한 일상에 충실하십시오. 그것이 치유와 구원의 길입니다.“
그렇습니다. 깨어 평범한 규칙적 일상에 충실할 때 구원입니다. 일상의
늪에 빠지지 않습니다.
또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십시오. 깨어 평범한 일상에 충실하지 않으면
타인은 물론 착각과 오해로 자신에 속는 일도 부지기수로 많습니다.
누가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하고 말하더라도 그를 따라가지
마십시오. 우리가 따라갈 분은 주님 한분 뿐입니다.
우리 삶은 외적 여정이 아니라 내 삶의 자리에서 묵묵히, 충실히, 항구히
주님을 따라가는 내적 여정의 삶입니다.
하여 깨어 제자리의 정주에 충실하는 길이 구원의 길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중심에 뿌리를 내릴 수록 평화와 안정의 삶입니다. 어디서
전쟁이나 큰 사건이 일어났다 하더라도 흔들리거나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하느님의 중심에 깊이 믿음의 뿌리를 내리지 못했을 때 두려움과
불안입니다.
바로 오늘 지금이 구원의 날이자 심판의 날입니다.
깨어 평범한 규칙적 일상에 충실하며 하느님의 중심에 깊이 뿌리 내리는
정주(定住)의 삶에 충실할 때 성숙(成熟)과 구원(救援)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깨어 '제 자리'에서 '제 정신'
으로 주어진 '제 일'에 충실함으로 구원의 날을 살게 하십니다.
"너는 죽을 때까지 충실하여라. 내가 생명의 화관을 너에게 주리라."
(묵시2,10).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 -
◈ [서울]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2014년 가해 11월25일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 루카 21,5-11
이번 주 일정표를 보았습니다. 일정표는 ‘핸드폰, 숙소의 탁상 캘린더,
사무실의 캘린더와 보드 판’에 기록해 놓습니다. 요즘은 많은 분들이
일정표를 핸드폰에 저장해 놓습니다. 주일에는 성가 소비녀회에서 레지오
단원들을 위한 ‘성사론’ 강의가 있습니다. 월요일에는 옹기장학회 회원들을
위한 강의가 있습니다. 화요일에는 수원교구 노인대학 학생들을 위한
강의가 있습니다. 목요일에는 여의도 성당에서 레지오 단원들을 위한
강의가 있습니다. 주 중에 지인들과의 만남이 있고, 제가 함께 하는
단체들과의 모임도 있습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평화신문에 연재하던
복음묵상이 끝난 것입니다.
지난 1년간 일정표에 기록된 일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 올해는 교황 방한
준비 모임이 많았습니다. 식사 약속, 강의, 미사, 운동, 여행 등과 같은
일정들이 많았습니다. 주어진 일들이 잘 마쳐졌을 때는 감사를 드립니다.
부족함이 있을 때는 다음에는 더 잘하려는 다짐을 합니다. 어떤 일들은
생각지 못한 결과를 얻기도 합니다. 어떤 일들은 기대한 것만큼 성과를
얻지 못하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건강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느님께서
제게 맡겨진 일을 준비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른 삶을
살 수도 있었겠지만 미사와 성사를 집전할 수 있는 사제직을 허락해
주심에도 감사를 드립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이른 새벽을 볼 수 있는 것은 커다란 축복입니다. 그것은
매일 부활하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어둠이 걷히고 새벽빛이 밝아오는
것을 보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이른 아침에 1시간을 기도하는
것은 하루를 풍요롭게 살 수 있는 밑거름이 되는 것입니다. 어둠이 아무런
조건 없이 아침에게 자리를 내어 주는 것을 봅니다. 기꺼이 비울 수만
있다면, 나눌 수 만 있다면 하루의 끝이 아쉬울 것 없습니다. 삶의 끝도
걱정될 것이 없습니다. 빈손으로 왔으니, 빈손으로 가는 것도 감사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제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아직 오지 않은
걱정 때문에 지금 기쁜 마음을 날려 버리지 마십시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별로 없으니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다만
오늘을 충실하게 살라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이미 지나간 과거로
기억 될 것입니다. 오늘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로 남게 될 것입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구원은 장기적인 목표가 있는 이들에게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11월25일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 낫을 대어 수확을 시작하십시오>
복음: 루카 21,5-11
< 구원은 장기적인 목표가 있는 이들에게 >
중앙대 경영학과 위정현 교수가 ‘한국이 노벨상을 못 받는 이유’란 글을
썼습니다. 물론 한 사람의 분석이 전적으로 옳을 수는 없을지라도 일리가
있어 소개합니다.
우선 그는 지난 12일 유럽우주국이 혜성 위에 탐사선을 착륙시킨 사건을
소개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냐면 그 화성과 목성 사이에 있는
혜성이 움직이는 속도는 초속 18km라고 합니다. 총알의 속도가 초속
1km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총알의 속도보다 18배나 빠르게 움직이는
물체에 탐사로봇을 올려놓는 엄청난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탐사선이 지구를 떠났던 것은 2004년이었다고 합니다. 무려
10년 5개월 동안 유럽우주국은 13억 유로(1조8000억 원)을 투자하며
인내심 있게 기다려왔던 것입니다. 이게 무슨 이익을 줄 수 있는지는
몰라도 유럽은 이 무모한 도전을 위해 인내심을 가지고 투자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국은 10년 전에 어떤 장기 프로젝트를 시작했을까요? 지금
우리나라의 가장 큰 문제는 아기를 낳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때 이미
아기 많이 낳기 운동에 전력을 기울였어야 하지 않을까요?그러나 우리는
순간적인 이익창출에만 집중하며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일본은 많은 노벨상 수상자들을 배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하나 빼고는 수상자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아이큐도 세계에서 가장 높고 고등학교 때까지는 학교 성적이
전 세계의 탑을 유지하는데도 그 이후엔 어떤 좋은 결과도 나오고 있지
못합니다. 이번 일본에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3명의 교수 중 아카사키
이사무는 올해 85세라고 합니다. 그가 마쓰시타 연구소 시절인 1973년부터
청색 발광다이오드(LED) 개발을 시작했으니 40년 만에 성과를 인정받은
셈입니다. 아카사키 교수는 수상자 발표 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연구를
시작할 때 20세기 중에는 못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연구를 그만두는
사람도 많았지만 나는 조금도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위정현 교수는 위 두 사례의 공통점이 ‘길고 긴 장기프로젝트’라고
말합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도 장기적으로 포기하지 않을 수 있다면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 우리나라의 연구 평가 척도는 이공계라면
SCI, 문과계열 교수라면 SSCI라는 미국 민간회사의 논문집에 논문이
얼마나 여러 개 실리느냐로 결정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인정받기 위해
논문집에 논문이 실리게 하기 위해 대량의 단기적인 논문만을 써 내기
때문에 커다란 목표를 잡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아카사키 교수는 젊은
연구자들에게 “유행하는 연구에 매달리지 말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라면 좀처럼 결과가
나오지 않아도 계속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은 우리의 시각을 근시안으로 만들어버려 지금 현재
이익만 바라보고 멀리는 바라보지 않게 만들어버립니다. 지금 당장 먹고
사는 것이 중요하지 죽음이나 영혼구원에 대해서는 신경 쓸 여지가
없습니다. 남들이 학원을 보내니 나도 보내야 하고 남들이 대학을 보내니
나도 보내야 하며 남들이 결혼을 시키니 나도 시켜야합니다. 단기적인
성과만 생각하며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 세상인 것입니다. 이런 식이라면
구원받는 이들은 정말 많지 않을 것입니다. 외국의 교육들은 이미 멀리
내다보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구구단도 글도 일찍 가르치지 않습니다.
아이들에게 조금은 늦더라도 흥미를 유발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고등학교
때까지 구구단을 외우지 못해도 나중에는 위대한 수학자로 태어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실생활에 아무 쓸모도 없는 미적분을 모든 학생이
공식을 대입해 풀어야만 대학에 들어가는 시스템이 되어버렸습니다.
오늘 독서는 마지막 날 심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름 위에 앉으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다 익은 곡식들을 추수하십니다.
그 곡식이 다 익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마지막 때까지 우리가 거룩한
사람이 될 때까지 기다리고 계셨음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이 기다리시는
것은 우리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하리만큼 거룩해지는 것인데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잘 사는 것만 생각하다가 시간을 허비한다면 그분의
기다림도 한계에 다다를 것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 추수꾼은 다 익어버린 포도송이들을 거두어 ‘하느님
분노의 확’에다 던져 넣습니다. 그동안 참고 기다려온 그 인내가 끝나는
시간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때까지 완전해지지 않은 것들은 이
분노의 확에서 나오는 피처럼 그렇게 짓밟혀지게 될 것이란 뜻입니다.
선인을 구하는 시간이 악인이 벌 받는 시간입니다. 노아가 구출되는
시간이 모든 인간이 파멸하는 시간이었고, 롯과 가족들이 소돔 땅을
빠져나오는 시간이 소돔이 유황불로 멸망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진노는 점점 더 차오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이
세상에서 잘 살기만을 바라며 장기적으로 무엇을 목표로 힘을 쏟아 부어야
하는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영혼구원을 위해 전력을 다 해도
모자라는 시간인데 어쩌면 우리는 단기적인 세상에서의 기쁨만을 추구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더 이상 기다려 주시지 않을 시간이 바로 오늘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영혼구원을 위해 목표를 세워놓고 매일
합당한 투자를 하고 있습니까? 세례자 요한도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보다 크지 못하다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황당한 계획을
세워야 하겠습니까? 세례자 요한보다도 더 거룩한 사람이 되기 위한
목표를 세우고 끊임없이 달려야합니다. 바오로 서간에서 마지막 날이 바로
임박한 것처럼 말하고 있는 이유는 영혼구원을 위해 달려야 하는 지금
이시간이 너무도 절박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부터라도 이 세상
단기적인 것들에 정신을 빼앗기지 말고 마지막 때가 되었을 때 기쁘게
수확될 수 있도록 모두가 하늘나라 성인이 되기 위한 목표를 세우고
그것만을 바라보며 열심히 달려갑시다.
요셉 신부님의 새 책이 발간되었습니다.
2014~2015년 나해 주일 대축일 복음 묵상집입니다.
구입은 하상출판사(031-243-1880 begin_of_the_skype_highlighting
무료 end_of_the_skype_highlighting)로 문의하시면 됩니다
^-^
'여인아, 왜 우느냐?'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구원은 영원세상의 행복자
2014년 가해 11월25일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 루카 21,5-11
구원은 영원세상의 행복자
갑자기 큰돈이 생기면 뭐라 하지요? ‘어이쿠 이젠 살았다.’하겠지요?
대박, 재벌의 유산, 로또, 등이 자기를 살리는 줄로만 아는 사람 많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살리는 건 재물이라며 돈을 보고 열심히 따라갑니다..
그러니 세상구원이라며 재물을 따르고 예수님의 구세주 의미는 뒷전이지요.
그들은 자기 재산에 비하면 구원(救援)은 9원(九圓)일 뿐이라 하겠지요.
재산은 세상에서 쳐주지만 구원은 영원세상의 행복자로 쳐주는 겁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루카 21,8)”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 [기타] ‘육화론적(肉化論的) 신앙’과 ‘종말론적(終末論的) 신앙’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신앙은 하느님과 사람 모두를 얻는 길이어야 합니다.'
2014년 가해 11월25일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루카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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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에는 ‘육화론적(肉化論的) 신앙’과 ‘종말론적(終末論的) 신앙’이
있습니다.
육화론적 신앙이란 하느님께서 스스로 사람의 몸을 취하셔서 세상에
오셨고,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옳은 것인지를 당신 삶과 죽음으로
몸소 보여주셨다는 것이 중심이 되는 신앙을 말합니다. 인간에 대한 당신의
사랑 때문에, 당신 스스로를 인간이 지닌 똑같은 한계 안으로
들여놓으시고 삶의 길을 가르쳐주셨다는 것을 믿는 신앙인 것이지요.
(요한3,16-17)
따라서, 육화론적 신앙이란 사람이 되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구체적인
삶의 길을 배우고 실천하는 신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 쓰러져 있는
사람을 만난다면, 먼저 그 쓰러져 있는 사람을 위해 무엇인가를 행동하는
신앙을 뜻합니다. 한마디로 사람들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신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마태오25,40)
종말론적 신앙이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삶의 끝을 의식하는 신앙입니다.
삶과 죽음을 하나의 눈으로 보고 이해하며, 시간을 영원의 개념으로
받아들이고, 삶과 죽음의 의미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시각으로
이해하려는 신앙입니다. 결국, 우리가 가야만 하는 길을 의식하며, 무엇을
위해 우리가 살아야 하는 것인지를 깨닫는 신앙을 말합니다. 따라서
종말론적 신앙은 기도하는 신앙이며, 무엇보다도 ‘하느님과 나’라는 일대일
관계가 강조되는 신앙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민족들이 사람의 아들 앞으로 모일
터인데,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 그렇게
하여 양들은 자기 오른쪽에, 염소들은 왼쪽에 세울 것이다."
(마태오25,31-33)
이 두 신앙은 서로 다른 세계를 뜻하지 않습니다.
분명 한 몸을 이루고 있습니다. 영성 신학자들은 이 두 신앙의 관계를
십자가로 표현합니다. 가로축을 육화론적 신앙, 즉 양 옆에 사람이 있고 그
한 가운데 성자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세로축을 종말론적 신앙, 즉 축 위에
성부께서 계시고 축 아래에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역시 한 가운데 성자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이렇게 하나의 십자가를 만듭니다. 그림이
그려지십니까?
균형과 조화가 요구됩니다.
어느 한 쪽으로 지나치게 기울어지면 둘 다 잃게 되어 있습니다. 육화론적
신앙이 빗나가지 않기 위해서는 하느님과 나와의 올바른 관계 즉 종말론적
신앙이 전제됩니다. 종말론적 신앙이 건강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삶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실천, 즉 육화론적 신앙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두 신앙 사이에는 순서가 분명 존재합니다.
신앙인이라면 기도 없이 올바른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첫째 계명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이고, 둘째가 네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라 강조하셨던 것입니다. (마태오22,34-40)
우리의 신앙이 건강해서 아름다웠으면 좋겠습니다. 어느 한쪽으로
지나치게 치우쳐져서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는, 그래서 자신의 영혼을
파멸시키는 그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수도회] 허상에 현혹되지 않는 삶/ 기경호(프란치스코)신부님
2014년 가해 11월25일 연중 34주간 화요일 루카 21,5-11(14.11.25)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허상에 현혹되지 않는 삶
기원전 19년 대 헤로데가 증개축에 들어간 예루살렘 성전은 예수님 시대에
완전히 새로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 성전은 건축 자재나 건물 장식물로
쓰일 ‘자원 예물’(2마카2,13)과 “아름다운 돌”(21,5)로 건축하였다. 예물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헤로데 왕이 바친 황금포도나무였는데
포도송이만 해도 한 사람만큼의 부피였다(유다 전기 V 4,4). 돌 하나의
길이가 약 12.5미터, 높이 4미터, 폭이 5미터 정도였다(유다 고사 XV 11,3)
고 한다. 이 모습을 본 사람들이 경탄하였다(21,5). 이에 예수께서는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21,6) 하고 말씀하셨다.
예루살렘 성전은 유다인들에게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존재의 구심점’이었다. 이 성전이 파괴되어버릴
것이라는 말은 그야말로 청천벽력과 같은 선언이다. 이 참변은 루카
복음사가의 관점으로 보면 종말의 전조가 아니라 역사적 비극이었다. 내
삶을 보자. 내가 이룬 성공적 결과들, 부와 권세, 명예, 튼튼한 인맥 등
우리 눈에 보이는 그 어떤 것도 영원한 것이 없다. 그것은 나의 모든 것을
만족시켜주며 영원히 내 곁에 있을 것 같지만 그러한 것들은 한순간에
사라져버릴 것이다. 우리가 죽음의 순간을 모르거늘 찰나에 스쳐가고
먼지에 지나지 않는 생의 물질적이고 현상적인 것들에 집착하며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디 그뿐인가! 우리네 삶은 건강할 때가 있으면 아플 때가 있고, 기쁠
때가 있으면 슬플 때가 있으며, 올 때가 있으면 갈 때가 있지 않은가?
화려한 성전이 파괴되듯 우리네 삶에서도 매일 아무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기대어 살아가는 많은 것들도 순식간에 사라져버릴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리라! 누구든 우리 존재의 뿌리요 모든 것이신 영원하신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 왜냐하면 영이 아니고서는 영이신 하느님을 보지도
만날 수도 없으며, 하느님을 뵙지 못한다면 내가 지닌 모든 것은 헛된
장식품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그런 참변이 언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묻자(21,7),
예수께서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고,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하는 이들을 뒤 따라가지 말라고 하신다(21,8). 펠릭스
총독시대에도 이집트에서 온 한 열광가가 자기의 음성이 예루살렘 성벽을
무너뜨린다고 자랑하며 약 3만명을 모았다(유다 전기 Ⅱ 13,5). 우리는
살아가면서 갑작스런 실패,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질병, 중대한 선택,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일 등을 겪는다. 우리는 이런 일들을 당할 때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아니 어디에 매달리는가?
기도생활을 꽤나 열심히 하는 사람, 오랫동안 성경공부를 하던 사람, 교회
안에서 각종 활동을 헌신적으로 하던 이들조차도 때로는 그런 일을 겪으면
하느님이 아닌 다른 곳에서 해답을 찾으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경우가
많다. 하느님의 말씀이 아니라 세상의 소리, 경험이 많다는 이들의 소리,
땀 흘리지 않고 단기간에 큰 수익을 올린다는 선전 등 허상을 찾아
매달리는 모습은 무엇을 말하는가? 화려한 성전의 아름다움에 감탄만
하며 거짓 예언자를 따르고 우상을 좇고 있다면 그보다 더한 비극이 어디
있을까?
예수께서는 이어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21,9) 하신다. 그렇다! 영원하신 분 안으로 들어갈 때 우리네 삶은
영원성을 지닌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 그 어떤 일이 닥쳐와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저버리고 세상적인 것들에 현혹되지 말고 마음의 중심을
영혼의 중심을 잃지 말아야 하리라!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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