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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가해 11월26일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청주] 믿음의 사람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제1독서 묵시 15,1-4
† 복음 루카 21,12-19
★ 마지막 일곱 재앙의 예고이다. 그리고 불이 섞인 유리 바다 위에 서 있는
승리한 이들은 수금을 들고 주님을 찬미하는 노래를 부른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박해의 때가 올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제자들은 권력자 앞에 끌려갈 것이지만, 이는 오히려 증언의 시간이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러한 때에 인내로써 생명을 얻으라고
이르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박해의 시련이 올 것이며 이러한 위기의 시기는
또한 믿음을 증언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공관 복음은
종말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종말이 ‘시간적’으로 임박하다는 관점에서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시대’에 사는 우리는 이러한 종말의
말씀을 요한 복음에 함축된 ‘실현된 종말’의 관점에서 함께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이미’ 우리 안에서 작용하는 하느님 나라의 증인으로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에서 예수님께서는 폭력과 미움이 우리를 둘러싼
가운데 죽음의 위협이 닥칠지라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인내로써 생명을
얻으라고 당부하십니다. 두려움을 이기고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헨리 나우웬 신부는 그의 유명한 저서 『상처 입은 치유자』
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신앙과 근본 자세를 성찰하며 오래된 예화 하나를
들려줍니다.
포로 한 명이 도망쳐 어떤 마을에 몸을 숨기고 있을 때, 군인들이 와서
그를 내놓지 않으면 마을은 불태우고 사람들을 죽이겠다고 말합니다.
결정해야 할 위치에 있었던 한 사제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는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게 낫다.’(루카 11,50 참조)는 성경 말씀을 언뜻
떠올리고는 그를 내주어 죽게 합니다. 그날 밤 천사가 사제에게 나타나
그의 행위가 바로 구세주를 적에게 넘겨준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제는 그것을 자신이 어떻게 알았겠느냐고 반문합니다. 이에 천사는
말합니다. “성경을 읽는 대신 단 한 번이라도 그 청년을 찾아가 그의 눈을
응시했더라면 당신은 그 사실을 알았을 텐데 …….”
도움이 절실한 이웃에 대한 사랑, 그것이야말로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갈망하고,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의 표징을 알아보는 참된 종말론적
삶의 태도일 것입니다.
- 매일 미사 -
◈ [인천] 행복은 환경에서 오지 않는다는 사실
역사 안에서 위대한 인물들은 태어날 때부터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까요?
그런 환경과 여건이 조성되어서 위대한 역사를 남겼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의 기억 속에 남는 위인들은 어렵고 힘든 삶을 이겨낸
사람들이었습니다. 몇 명의 예를 들어보지요.
영국의 시인 존 밀턴은 눈이 멀었음에도 ‘실낙원’이라는 역작을 썼습니다.
뉴턴은 절름발이였음에도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지요. 베토벤은 귀가
들리지 않은 상황에서도 불후의 명곡을 남겼습니다. 르누아르는 양손이
관절 류머티즘에 걸렸지만 아름다운 그림을 그렸습니다. 모차르트는
막대한 빚을 진 채 병마와 싸우면서도 ‘레퀴엠’의 마지막 곡과 오페라를
작곡했습니다. 슈베르트는 평생 가난에 허덕이며 32년이라는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많은 명곡을 남겼습니다. 헨델은 죽음이 가까웠음을 알리는
손발이 저림이 찾아왔을 때, 절망감과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메시아’라는
명곡을 작곡했습니다. 헬렌켈러는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삼중고를 당하면서도 인문학 박사, 법학 박사의 칭호를 받고, 한평생
장애인들을 위해 지칠 줄 모르는 봉사를 했습니다. 에디슨은 11만 번이나
실험에 실패했지만 전등, 축음기, 영화 등 발명품 3,500여 종을 개발했지요.
스타인메치는 곱사등이였지만 세계 최고의 전기공학자가 되었고, 파스칼은
폐결핵에 걸렸지만 위대한 사상가가 되었습니다.
이밖에도 고통과 시련을 이기고 역사에 길이 남을 위인이 되신 분들은
너무나 많습니다. 이에 대해 어떤 분은 이렇게 말씀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고통과 시련이 없었다면 더 큰 업적을 남겼을지도 모른다고요.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들에게 고통과 시련은 자신의
앞날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고통으로 인생을 이해하는 사람도 있고 고통으로 인생을 망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행복은 환경에서 오지 않는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행복해지길 원하십니다. 그런데 고통과 시련이
없다고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보다는 고통과 시련을
통해서 또 다른 전환점으로 만드는 마음가짐이 있을 때 행복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는 박해의 순간을 말씀하시지요. 그런데 그 순간이
바로 생명을 얻을 때라고 하십니다.
이 박해의 순간은 우리 삶 안에서 자주 일어납니다. 어렵고 힘든 상황,
특히 주님의 뜻을 따르기 힘든 상황에서 견디어 이겨내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갈 때 주님께서는 커다란 선물을 주십니다.
그 선물을 향해 오늘도 힘차게 살아가셨으면 합니다.
부족해야 행복을 향해 달려 갈 수 있습니다. 달려가는 그 과정이
행복이니까요(황진철).
콘래드 힐튼 이야기(호아킴 데 포사다, ‘바보 빅터’ 중에서)
힐튼 호텔의 창립자 콘래드 힐튼. 그는 장성할 때까지 글을 제대로 읽지
못했습니다. 원래는 은행 경비원이 되려고 했는데 글을 읽지 못하는
바람에 퇴짜를 맞고 호텔 벨보이가 되었습니다. 훗날 그는 회고하기를,
자신이 글을 쓰지 못했기 때문에 힐튼 호텔을 만들게 되었다고 능청을
떨었죠. 물론 성공 비결은 따로 있었습니다. ‘벨보이 시절에 나보다 일을
잘하는 사람도 많았고, 나보다 경영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자신이 호텔을 경영하게 되리라 믿은 사람은 나 혼자 뿐이었다.’
이것이 그의 성공 비결이었습니다. 콘래드 힐튼은 사람들이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를 스스로 과소평가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한
강연에서 쇠막대기를 들고 ‘이 쇠를 두들겨 말굽으로 만들면 10달러
50센트의 가치가 된다. 이것으로 못을 만들면 3,250달러의 가치가 된다.
그리고 이것을 시계의 부속품으로 만들면 250만 달러의 가치가 된다’라고
말했지요. 그는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의 재능을 부러워하지 말고 자기가 가진 재능을 발견하라. 당신의
가치는 당신 자신이 만드는 틀에 의해 결정된다.”
우리는 숫자로 가늠할 수 없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해보지도 않고
절대 자신의 능력을 재단하지 마십시오. 자신을 믿으십시오.(Be Myself!!)
스스로를 위대한 존재라고 생각하십시오. 그러면 행동도 위대하게 변할
것입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청주] 믿음의 사람|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11월26일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루카21,12-19)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 루카 21,12-19
믿음의 사람
사람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진면목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야 말로 그
사람의 크기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어려움을 처리하는 과정 안에서
진실된 모습을 보게 되고 하느님의 사람인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8장28절에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사람에게 선을 이룰 수 있게 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 선을 지향하는 사람은 곧 하느님의 사람이요,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의 눈에 드는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신부인 저도 일상생활
안에서 하느님의 사람이 아닌 상태로 지낼 때가 종종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아마 누군가 제 속을 알면 큰 실망을 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 때문에 박해와 비난을 받게 되었습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도 주님을 따라야 하지만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미리 당신의 제자들에게 위로와 힘을
주십니다. ‘박해를 당하고 감옥에 갇히게 되고….. 그 때야말로 너희가 나의
복음을 증언할 기회이다……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12-15). 박해는 그리스도를 증언할
기회라고 했지만 어디 그것이 말같이 쉬운 일입니까? 일상 안에서도
변명과 합리화시키려고 하는 마음이 얼마나 많은데…
감옥에 갇혀서 소신을 지킨다는 것은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믿는 사람은 걱정하지 않습니다. 믿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갈 때,
어떻게 답변 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주실 것이다”(루카 12,12).
이제 믿음을 지닌 제자들은 인간적인 말재주와 인간적인 지혜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과 지혜로 말하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4장13절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최고 의회에서 증언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의회 의원들은“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을 보고 또 이들이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임을 알아차리고 놀라워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6장10절에도 스테파노와 논쟁을 벌이는데 “그의
말에서 드러나는 지혜와 성령에 대항할 수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최고 의회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모두 스테파노를 유심히 바라보았는데,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처럼 보였다”(사도행전6,15)고 했습니다.
그야말로 믿음을 간직하고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로움인지를
체험하려면 주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사람으로 서있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혹 지금
힘들더라도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21,16)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위안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어려움 속에서 진정한 나의
모습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야고1,12). 이런저런 소리와
압력이 오더라도 흔들리지 마십시오. 사랑합니다.
@@ 작은 용기는 시련 앞에서 쉽게 사라지지만
큰 용기는 시련 앞에서 더 강해진다.
작은 불은 바람 앞에서 쉽게 꺼지지만
큰불은 바람 앞에서 더 활활 탄다. @@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수도회] 생명의 화관 -하느님의 승리-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11월26일 연중 제34주간 수요일(뉴튼수도원 16일째),
요한묵15,1-4 루카21,12-19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 루카 21,12-19
생명의 화관 -하느님의 승리-
'하느님의 승리'입니다. 말만 들어도 고무적이요 기분이 좋습니다.
모든 시간은 하느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결국은 하느님의 승리요 믿는 이들의 승리입니다.
삶의 영적 전쟁에 승리한, 믿는 이들마다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인
'생명의 화관'입니다. 하느님의 승리를 상징하는 생명의 화관입니다.
사람 눈엔 실패요 패배 같아도 하느님 눈엔 성공이요 승리입니다.
바로 하느님을 충실히 믿는 이들의 삶이 그러합니다.
저는 제 주변 곳곳에서 믿음으로 승리의 삶을 사는 분들을 봅니다.
바로 하느님의 승리를 상징하는 믿음의 용사들이요 장부들입니다.
특히 남자분들보다는 '믿음의 여장부'들이 많습니다.
그러니 세상 그 무엇도, 그 누구도 두려워할 것은 없습니다.
결코 세상이 하느님을, 믿는 이들을 이길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1독서 요한 묵시록이 하느님의 승리를, 믿는 이들의 승리를
상징하는 감동적인 장면을, 우리의 영원한 비전을 보여줍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 주께서 하시는 일은 크고도 놀랍사오며,
만민의 왕이시여 당신의 길은 바르고 참된 길이니이다.
주여, 당신을 경외하지 않을자 누구이오며
당신의 이름을 찬양하지 않을 자 누구오리까
당신만이 홀로 거룩하시나이다. 당신의 심판이 공정하게 내려졌으니
모든 민족이 당신 앞에 와 경배하리이다.“(묵시록5,3-4).
하느님의 수금을 들고 하느님의 종 모세와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는
세상 영적전쟁에 승리한 이들이요, 우리 미래의 모습입니다.
바로 우리 수도자들이 천상의 승리한 성인들과 함께 매주 화요일 저녁
성무일도 때마다 감격에 겨워 흥겹게 부르는 찬미가입니다. 이런 승리의
노래를, 찬미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특권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믿음을, 사기를 북돋워주는 은혜로운 찬미가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은 온갖 시련과 역경 중에 있는 우리 모두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세상의 온갖 적대적인 세력도 우리에게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친히, 늘 우리 믿는 이들의
방패와 배경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문자 그대로 취할
것이 아니니 믿는 이들은 그 나름대로 신체적 고통을 겪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말씀은 세상 그 누구, 그 무엇도 우리 믿는 이들의
'내적 온전성과 전인성(an inner intergrity and wholeness)'을
전혀 손상시키거나 파괴할 수 없음에 대한 상징적 표현입니다.
실제 성인들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두렵고 무서운 것은 안에서 망가지거나
무너지는 것인데 성인들은 내적으로 아주 온전했습니다.
"화내지 말라. 화내면 무조건 진다. 끝까지 살아남는 자가 이긴다.“
예전 형님의 충고 말씀이 생각납니다. 바꿔 말해 화내거나 비관하지 말고,
끝까지 믿음으로 인내하는 자가 승리한다는, 생명을 얻는 다는 오늘 복음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
다음 어제에 이은 복음 환호송, 묵시록의 주님 말씀도 이와 일치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너는 죽을 때까지 충실하여라.
내가 생명의 화관을 너에게 주리라.“(묵시록2,10).
주님은 평범한 일상에 충실한 우리 모두에게,
매일 미사때 마다 미리 앞당겨 '생명의 화관'을 선사하십니다.
아무도 우리를 해칠 수 없는, 하느님의 승리의 표지가 생명의 화관입니다.
"우리는 실컷 먹고 배불렀네.
주님이 우리의 바람을 채워 주셨네.
우리의 바람을 저버리지 않으셨네."(시편78,29-30).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 -
◈ [서울]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2014년 가해 11월26일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 루카 21,12-19
이제 우리는 곧 대림시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대림은 ‘기다림’입니다. 저는
오늘 기다림에 대해서 몇 가지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1988년 저는 군 제대를 하였고, 본당에서 학생들에게 예비자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아이들 중에 한명은 취직을 하였고, 첫 월급을 타서 제게
저녁을 사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약속을 하였습니다. 약속을 한 날
저는 천마산엘 갔었습니다. 천마산엘 갔다 오는 길에 약속이 생각났습니다.
저녁 10시가 넘어서 약속 장소엘 갔는데 그 친구는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핸드폰도, 삐삐도 없던 때였습니다. 저를 믿고
기다려준 그 친구가 고마웠고, 오랜 시간 기다리게 했던 그 친구에게 무척
미안했습니다. 사제가 된 이후 저를 기다려 주신 분들이 많았습니다. 어떤
분은 제가 외국에 나갈 때 공항에 데려다 주시기도 했습니다. 제가
한잔하고 싶으면 기꺼이 술친구가 되 주시기도 하였습니다. 제가 전화를
드리면 언제가 기쁜 마음으로 함께 해 주셨습니다. 그분들이 기다려
주시고, 함께 해 주신 것은 저를 아끼고,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성격이 급하기 때문에 잘 기다리지 못하는 편입니다. 상대방이 5분만
늦으면 가슴에서 열불이 나고, 나를 무시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캐나다에 살 때입니다. 추운 겨울날 저는 이사를 가기로 했습니다.
아는 분이 제 짐을 옮겨 주시기로 했습니다. 그분은 사정이 생겨서 30분
늦었습니다. 저는 30분을 참지 못하고 짐을 옮겨 버렸습니다. 나중에
그분과 화해는 했지만 외국에서 한동안 외롭게 지내야 했습니다. 상대방이
늦게 된 이유를 먼저 생각하지 않고, 저 자신의 체면과 자존심을 먼저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체면과 자존심을 생각하지 않으시고
52년 동안 저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제가 넘어지면 일어나기를 기다려
주시고, 제가 그릇된 길을 걸어가면 회개하기를 기다려 주시고, 참된
신앙의 길을 갈 수 있도록 기다려 주십니다.
지난 8월 14일에 교황님께서 한국을 방문하셨습니다. 저는 방한
준비위원회 영성신심분과를 맡아서 교황님을 기다렸습니다.
기다림은 먼가를 의식하는 것입니다. 교황님께서 오시지 않으면 저는
8월 14일을 굳이 기다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모든 기다림은 의식과 약속이
있기 마련입니다. 월급날을 기다리는 것도, 제대를 기다리는 것도,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는 것도 모두 의식이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의식이 없다면 기다림은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들판의 꽃도, 산의
바위도, 하늘의 새도 그냥 있는 것입니다. 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대림시기는 우리에게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기다림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입니다. 교황님의 방한을 준비하면서 많은
회의를 하였습니다. ‘방한 준비위원회, 서울 방한 준비위원회,
영성신심분과’에서 회의를 하였습니다. 회의를 통해서 방향을 정하고,
예산을 짜고, 진행과정을 검토하고, 업무를 나누었습니다. 저는 방한 전에
해야 할 일들을 기획하였고, 방한 후에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였습니다.
상본, 자료집, 책자를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기다리면서 성탄
판공을 준비합니다. 교무금도 정리합니다. 자선을 하고, 기도를 합니다.
기다림은 혼자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함께 기다리는 것입니다. 만일 저
혼자 교황님의 방한을 준비하였다면 무척 외롭고 힘들었을 것입니다.
정부와 서울시가 함께 하였습니다. 타 교구에서도 함께 하였습니다. 저희
분과에서도 성직자, 수도자, 신자 분들이 함께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탄생도 함께 기다린 분들이 많았습니다. ‘마리아, 요셉, 즈가리야,
엘리사벳, 안나, 시메온’이 있었습니다. ‘동방박사와 목동’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혼자 인 것 같지만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기다림은 ‘인내’가 필요합니다. 꽃 한 송이 피는데도 많은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자료집들은 많은 수정작업이 있었습니다. 내용을 편집하기도
했고, 크기를 조절하기도 했고, 가격을 정하기도 했습니다. 성서는 ‘인내’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의 말씀에 대해
제자들의 물음에 설명하시는 예수님께서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을 맺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루가 8:15) 세상의 끝 날의 징조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참고 견디면 생명을 얻을 것이다.”(루가 21:19)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기뻐합니다. 고통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를 낳고
그러한 끈기는 희망을 낳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로마 5:3-4) 성서 말씀은 모두
우리에게 교훈을 주려고 기록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서에서 인내를
배우고 격려를 받아서 희망을 가지게 됩니다. 아무쪼록 인내와 격려를
주시는 하느님께서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의 뜻을 따라 모두 한 마음이
되어 다 같이 한 목소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을
찬미하도록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로마 15: 3 -5) 여러분의 믿음의
활동과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꾸준한 희망을
하느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하고 있습니다.(데살 전 1:3)
주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인도하셔서 하느님을 사랑하게 해 주시고
그리스도의 인내를 본받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데살 후 3:5) 하느님의
일꾼인 그대는 이런 것들을 멀리하고 정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시오. (디모 전 6:11) 여러분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느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입니다.(히브 10:36)
그러나 인내하는 사람은 감히 하느님의 약속이 있는 그 곳에 머물고자
합니다. 인내하는 삶이란 현재를 능동적으로 살면서 하느님의 약속이 있는
곳에서 기다리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다림은 수동적인 것이
아닙니다. 어머니가 태중에 자라고 있는 아이에게 영양분을 공급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기다림의 사람들은 항상 깨어 있어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샘에서 물을 마시는 목마른 사슴처럼
말씀을 경청해야 합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새 책이 발간되었습니다.
2014~2015년 나해 주일 대축일 복음 묵상집입니다.
구입은 하상출판사(031-243-1880 begin_of_the_skype_highligh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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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진리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2014년 가해 11월26일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21,19)
루카 21,12-19
진리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신체가 완전치 못하다고 병신, 가난해서 병신, 못생겨서 병신이라고요?
외형, 물질, 시각적인 것들로 사람을 간단히 평가하는 버릇에 물들었습니다.
점수로 한줄 세우기 실력 연고에 줄 대기 같은 외형에 급급하면 말입니다.
현인의 가르침 지성인의 자성의 소리가 없는 것도 아닌데 왜 막나갈까요?
단순하게 보거나 사람의 생명가치로 보거나 존재가치를 보아야 정상이지요.
삶의 근본 틀을 무너트렸다 해도 진리는 절대로 무너지지 않습니다.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너희를 넘겨 더러는 죽이기까지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6~19)”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 [기타]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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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수도회] 영원 생명으로 건너가는 디딤돌/ 기경호(프란치스코)신부님
2014년 가해 11월26일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루카 21,12-19(14.11.26)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21,19)
루카 21,12-19
영원 생명으로 건너가는 디딤돌
흔적 없이 꼬리를 내리는 석양빛처럼, 구르는 낙엽에 영원을 담고 설레며
겨울을 부르는 해 끝! 임의 사랑에 목말라 생명의 봄을 찾아가는 길목에서
흐트러진 영혼 쓰러내리며 임을 바라본다. 가을이 겨울을 따라가고 겨울은
또 그렇게 봄을 그리워하듯 우리네 영성생활도 임 향한 그리움 안고 그렇게
영글어 가리라!
오늘 복음은 신앙 때문에 박해와 고통을 받게 될 우리에게 주는 위로와
희망의 말씀이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알려주는 징조가 나타나기 전에
제자들은 더 심한 박해를 받을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유다인과 이방인으로부터 박해를 받아 회당과 감옥에 넘겨지고 임금들과
총독들에게 끌려 갈 것이다(21,12)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생존을 위해
몸부림친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인간은 살아가려고 애쓰면 애쓰는
그만큼 몸과 마음과 영혼, 지성과 감성과 의지 사이에 틈이 벌어진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주신 순수한 자신이 분열되어 상처와 어두움을 지니며
스스로 고통을 겪는다. 우리는 관계 속에 살아가면서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진 자신의 상처와 어두움을 다른 이들에게 투사함으로써 고통을 준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하느님의 뜻과 진리와 사랑과 선에서 멀어져
살아가는 이들로부터 박해와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다.
예수님 때문에 미움과 오해를 받고 박해 받는 삶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실존이다. 예수님께서는 박해와 고통을 받게 될 제자들에게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21,130 하고 말씀하신다. 영원히
살아계신 하느님 때문에 그리스도교는 희망의 종교이다. 고통과 시련,
온갖 어려움과 극도의 슬픔, 병, 심지어 죽음마저도 절망과 포기의 계기가
아니요 끝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눈에 아무런 의미도 없어 보이는 것들
안에 숨어계신 의미이신 하느님을 드러내는 것이다. 아무 가치도 없어
보이는 계기들을 통하여 살아계신 하느님의 구원을 읽어내는 ‘영의
독서’이다. 인간의 눈에 절망적으로 보이는 삶의 단편들 안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더’ 다시 시작할 수 있음을 다른 이들에게 확인시켜주는
증거의 계기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박해도 고통도 하느님 계획의
일부이며, 주님을 증언할 기회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는 고통과 시련,
병고, 실패, 무의미 체험 등을 통하여 하느님을 증거하고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주고’(21,15), 미움을 받고 죽임을 당하게 되더라고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21,18-19) 하고
말씀하신다. 이 얼마나 큰 위로와 희망의 말씀인가! 인간의 미움이나 증오,
악의, 박해 등 그 어떤 것도 하느님께서 지으신 영혼을 어쩌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 어떤 순간에도 하느님께서는 함께 해주시는 분이시며, 우리가
주님의 사랑과 선 안에 머무는 한 그분은 늘 우리 편이 되어주시어
보호해주시기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현세의 그 어떤 것을
잃는다 해도, 미움을 받고 육체적 고통을 받는다 해도 하느님의 뜻 안에
머무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사는 것이며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다. 선은
선을 부르지만 악은 악에게로 돌아가 스스로 파멸의 길을 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또 고통도 시련도 없고 미움이나 오해도 받지 않는 상태에서야
누군들 못살겠는가!
세상 끝날에 대한 진정한 준비는 바로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거룩한
복음을 실행하며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복음을 실행하는 것은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이며, 다가오는 무의미 체험, 고통과 시련, 병고, 다른
이들로부터 받는 미움과 박해가 하느님의 계획의 일부임을 깨달아
‘인내로이 견디어내며’ 감사하는 것이다. 고통은 사랑과 희망을 향해 가는
디딤돌인 것을!!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수도회] 주님의 자존심[단상]
2014년 가해 11월26일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제1독서
<그들은 모세와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 요한 묵시록의 말씀입니다. 15,1-4
복음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12-19
연중 제34주간 수요일(2014년 11월 26일) 주님의 자존심
우린 살면서 ‘사소한 것에 목숨 바치지 마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들, 지나가는 말들, 다른 의견들 때문에
맘이 상해 어쩔 줄 모르는 사람을 많이 봅니다. 또 이런 것 때문에 인간
관계가 틀어지고 단체의 계획이 엉뚱한 방향으로 가거나 실패하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들 가운데는 우리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혼자 끙끙 앓고
감정을 다스리지 못합니다. 자존심이 상합니다. 두 손 두 발 다 놓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런 속좁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이름 때문에
너희를 임금들과 총독들 앞으로 끌고 갈 것이다.” 이 말씀은 우리를
정신차리게 합니다. 또 우리 자신한테 묻게 만듭니다. ‘과연 나는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이렇게 고민하고 있는가?’ 예수님의 이름은 안중에도 없고
오직 내 자신의 이름 때문일 경우가 태반입니다. 참으로 이기적인 우리
자신을 다시금 보게 됩니다. 우리 이름이 망가진다 하더라도 죽지는
않습니다. 다 지나갑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서 내
자신이 사는가 입니다. 주님의 이름 때문에 우리 자신이 고민한다면 그
자체가 순교이며 증언입니다. 참으로 위대한 것에 목숨을 바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 앞에는 그 어떤 것도 사소한 것들이 됩니다. 우리 자존심이
아니라 주님의 자존심을 살리는 삶이면 좋겠습니다.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 -
◈ [수도회] 아름다운 영적 성전 하나
2014년 가해 11월26일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 루카 21,12-19
아름다운 영적 성전 하나
사람들이 경탄하던 그 예루살렘 성전은 기원전 20년 전부터 기원 후
63년까지 건축이 계속되었는데, 얼마나 화려했던지 고대 세계의 7대
경이로운 건축물 가운데 하나로 손꼽을 정도였습니다. 성전 외벽을 장식한
하얀 대리석은 건물의 품위를 한껏 들여 높였으며, 성전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장식된 황금 포도넝쿨은 얼마나 광채를 발하던지 사람들의 입을
다물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당시 이런 말이 사람들 사이에 오갈 정도였습니다. “영광 가득한
예루살렘을 순례하지 못한 사람은 일생에 아무런 기쁨도 누리지 못한
사람이다. 아름답게 장식된 예루살렘 성전을 보지 못한 사람은 예루살렘을
아직 보지 못한 사람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의 이런 감탄사 앞에 비운의 예언으로
답하십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루카 복음 21장 6절)
예수님 앞에서 휘황찬란한 대리석 건물이나 값진 장식품들은 도무지
흥미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이런 외적인 성전보다는 살아있는 성전,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성전, 영원히 파괴되지 않을 영적 성전이 더
중요했습니다.
사실 예루살렘 성전의 위풍당당한 벽들은 튼튼한 기초 위에 세워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벽들은 마치 자연 그대로의 바위 혹은 성채처럼
견고해 보였습니다. 얼마나 정성들여 성전을 건립했던지 우람한 외형은
영원히 버티고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 성전은 오래가지 않아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아직까지
재건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토록 화려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그
대단했던 위용도 이젠 하나의 웃음거리로 전락해 버린 지가 오래입니다.
결국 인간의 손으로 세워지는 영원한 성전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월의 야속한 흐름 앞에 위대한 인간의 업적은 조금씩 허물어져갑니다.
모든 것은 한번 일어났다가 사라져갑니다. 이러한 지상 사물의 몰락과
유한성은 하느님의 영원성을 상기시킵니다.
인간이 행하는 모든 일이 지니는 한 가지 공통점은 유한성입니다. 오늘은
영원할 것 같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어느새 흔들리고 쇠락하고 파괴되기
시작합니다. 오늘의 이 평화가 영원히 지속될 것 같지만 어느새 여기저기서
전쟁이 시작되며 파괴와 살상이 뒤따릅니다. 이만큼 과학이 발달했으니
이제 전염병 따위는 없을 거라 공언했지만 또 다른 상상도 못했던
전염병들이 인류를 위협합니다.
그래서 더욱 필요한 것이 세속적이고 외적인 변화나 충격에 조금의 영향도
받지 않는 영원한 영적 성전을 우리 안에 건설하는 것입니다. 결국 나를
비우고 그 비워진 자리에 하느님께서 굳건히 자리하시면 아름다운 영적
성전 하나가 건설되는 것입니다. 변화무쌍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이
세상을 초월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우리 안에 불멸의 성전 하나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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