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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가해 11월30일 대림 제1주일
[청주] 거룩함을 회복하라.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제1독서 이사야 63,16ㄹ-17.19ㄷㄹ; 64,2ㄴ-7
† 제2독서 1코린 1,3-9
† 복음 마르 13,33-37
오늘은 전례력으로 새로운 한 해를 여는 대림 시기의 첫날입니다. 이 대림
시기에 우리는 구세주께서 사람이 되어 오시는 강생의 신비를 준비하며
깨어 기다립니다. 우리 모두 스스로를 성찰하는 가운데 다시 오시는
주님을 기쁘게 맞이하겠다는 결심을 해야겠습니다.
★ 이사야 예언자가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는 기도를 올린다. 당신만이
우리 아버지시요 우리의 구원자시라고 고백한다(제1독서).
★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의 신자들에게 하느님에 대한 감사를 전한다.
또한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이 그들 가운데 튼튼히 자리를 잡았다고
격려한다(제2독서).
★ 예수님께서는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르니 깨어 기다리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제자들뿐 아니라 모든 이에게 해당하는 말씀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11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스산한 날씨에다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를
바라보니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라고 읊조리는
쓸쓸한 노래가 입과 귀를 맴돕니다. 그러다가 애써 찾은 도종환 시인의
‘흔들리며 피는 꽃’이라는 시에서 위안을 얻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
한 해 내내 흔들리며 살아왔을 따름이고, 그것조차 부질없이 애쓴 것
같다는 씁쓸한 마음을 이 시로 달래 봅니다. 차가운 몸이 따뜻한 차 한
잔에 천천히 녹듯이 이제 조금 편안한 마음으로 몸을 일으킬 의욕이
느껴집니다. 오늘은 11월의 마지막 날인 것만이 아니라 대림 시기의
첫날이기도 합니다. 얼마 전 오랜만에 들은 노래 하나가 다시 ‘시작하는
날’에 어울릴 것 같습니다. 가수 김동률의 ‘출발’이라는 노래의
일부분입니다.
“아주 멀리까지 가 보고 싶어/ 그곳에선 누구를 만날 수가 있을지/
아주 높이까지 오르고 싶어/ 얼마나 더 먼 곳을 바라볼 수 있을지/
작은 물병 하나/ (중략) 때 묻은 지도 가방 안에 넣고서/
언덕을 넘어 숲길을 헤치고/ 가벼운 발걸음 닿는 대로/
끝없이 이어진 길을 천천히 걸어가네.”
대림 시기는 주님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때입니다. 이 시기가 무엇보다
그분께 가는 길을 새로 놓는 때이기를, 너에게로 가는 길을 새로 놓는
때이기를, 그리고 너와 내가 우리가 될 수 있는 때이기를 희망합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거룩함을 회복하라|반신부의 복음 묵상
대림1주일 이사63,16-17.19;64,3-7 1고린1,3-9 마르13,33-37
2014년 가해 11월30일 대림 제1주일
<집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깨어 있어라.>
+ 마르 13,33-37
깨어 있어라.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간절히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우리를 구원해줄 주님을 기다리지만 실은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고 우리가 문을
열어주기를 간절히 기다리십니다. 이 시간 기다림에 대해 묵상하는 가운데
주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먼저 대림절에 관해 간략히 살펴보면, 대림절은 우리의 구세주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성탄 전 4주간을 말합니다. 우리의 구원자로 오실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고 한편으로는 마지막 날에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대림초가 4개 꽂혀 있습니다. 4개는 4주간을 뜻하지만 본래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세주, 메시아가 오심을 기다린 세월이 약4,000년이
됩니다. 그 4,000년을 4주간으로 상징화해서 네 개의 초에 불을 밝히는
것입니다. 또한 네 개의 초는 예수님께서 동서남북 온 세상의 구세주이심을
의미합니다. 초를 장식하기위해서 둥글게 만들기도 하는 데 바로 온
우주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대림환’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바탕을
녹색으로 꾸미는 것은 생명의 푸르름을 나타냅니다. 또한 색깔을 보면
어두운 자색으로 시작해서 점점 밝은 색으로 불이 밝혀지게 됩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가까이 다가오시는 기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의
마음도 맑고 또 밝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맑고 밝아진다는 것은 우리의
허물을 벗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초의 색깔과 제의 색깔이 자색인데 자색은
바로 회개와 보속의 의미를 담은 색깔입니다. 그것은 화려한 츄리를
장식하고 구유를 준비하는 것보다도 몸과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에 들도록
목욕재계 하는 것이 소중하다는 초대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면서 기다림에 걸 맞는 준비가 필요한데 그것은
무엇보다도 거룩함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죄를 고백하며 거룩함을
회복해야 하는데 사랑이 많으면 죄가 큽니다. 죄가 없다는 것은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더 큰 사랑을 베풀지 못한 죄, 봉사하면서 자만한 잘못,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남을 미워한 죄, 하느님의 일을 한다고 성당에는
열심히 하면서 가족에게 소홀한 잘못, 내 잣대로 남을 판단하고 단죄한
잘못....이사야예언자의 표현을 인용하면 “저희는 진흙, 당신은 저희를
빚으신 분, 저희는 모두 당신 손의 작품입니다”(이사64,7). 우리는
하느님이 작품입니다. 주 하느님의 작품으로서의 품위를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권고합니다.“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고 거룩하게 살도록
힘쓰십시오. 거룩해지지 않고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무도 하느님의 은총을 놓쳐 버리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십시오”
(히브12,14-15). 맑고 깨끗한 마음을 간직하는 것이 성탄을 준비하는
기초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아, 당신께서 하늘을 찢고 내려오신다면!”
하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외침에는‘저희가 회개할 테니 저희에게
오십시오. 저희가 당신이 늘 함께한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십시오’하는
간절함이 담겨 있습니다. 아버지 하느님께 돌아갈 수 있는 은혜가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가정에 어떤 귀한 손님이 오신다면 청소를 하고 음식을 만들기도 하며
준비할 것입니다. 기다림이 간절하면 그 기다림의 여정에 따르는 모든
수고는 기쁨일 수밖에 없습니다. 더더욱 예수님을 기다린다면 기다림이
간절한 만큼 준비에 소홀함이 없어야 합니다. 일상 안에서 손님을 모시려
할 때에도 청소를 하고 음식을 준비하고 부산을 떠는데 예수님을 모시길
원하면서 그만한 준비가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늘 깨어 있어라”(마르13,37).고 말씀하십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영적인 깨어있음을 말합니다.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부끄러워
숨었을 때 “너 어디 있느냐”(창세3,9) 찾아 나서시던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구하고자 모세를 선택하신 분이
하느님이시고(출애3장 참조)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출애13,22)
으로 이끄시며 물도 주시고(출애15,22-27) 만나와 메추라기로 배부르게
먹게 하신 분도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여인이 자기 젖먹이를 어찌
잊으랴! 어미는 혹시 잊을지 몰라도 나는 결코 너를 잊지 아니하리라”
(이사49,15).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묵시록에는“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3,20).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깨어 있을 때 우리를 위한 주 하느님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알게 되면 우리의 처신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깨어있지 않으면 우리를 찾으시는 하느님을 뵐 수 없습니다.
깨어있지 않으면 주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고, 결국 주님을 만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깨어 있으십시오. 깨어있다는 것은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으며 그것을 왜 하고 있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받는 작품으로 무엇을 하든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
정신 바짝 차리고 경계하는 마음을 늘 지녀야 합니다. 하느님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철저히 단호하게 거부되어야 합니다. 내가 너보다 더
낫다는 마음으로 거들먹거리거나 자만자족하는 태도는 그리스도의 탄생과
재림을 기다리는 자세가 아닙니다. 오히려 주 하느님의 눈으로 이웃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가운데 기쁨을 간직해야 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가운데 사랑이신 예수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은 하느님께서
주신 최고의 선물인 만큼 사랑할 기회를 결코 놓쳐서는 안 됩니다. 지금은
사랑할 때입니다.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기회가 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지금부터 후회할 일을 줄여야 하겠습니다.
믿는 이들은 과거에 매이지 않습니다. 지난 일은 하느님의 자비에
맡깁니다. 그렇다고 현세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기만 하지도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약속된 천상의 미래가 있기 때문입니다. 앞날을 보고 전진하는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현재를 모른 체하면서 미래 속에서만 산다면
비현실적인 세상에 산다는 뜻입니다. 현재는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기에
지금은 기회입니다. 이 기회를 주님의 마음에 들도록 활용해야 합니다.
미래에 대한 동경 없이 현재에만 집착하여 산다는 것은 아무런 발전도
없이 어중간한 상태에서 평범하게 산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신앙에는
어중간은 없습니다. 양다리도 없습니다. 천상을 희망하는 만큼 선물로
주어진 오늘에 충실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실 우리가 주님을 기다리기보다 주님께서 오늘도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성경 안에서 당신의 말씀을 열어주기를 기다리십니다. 감실 안에서 조배
하는 이들을 기다리시고 기도하는 이들을 보고 싶어 하시며 십자가 위에서
당신을 바라보는 이들을 기다리십니다. 고해소 안에서 큰 자비와 사랑으로
기다리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애타게 기다리시는 주님을 외롭게 해
드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거룩함으로, 깨어있음으로 주님을 만나는 한
주간을 기대합니다.“주님, 제가 당신의 구원을 기다립니다”(창세49,18).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수도회] 솔 향기 -깨어 있어라(Watch)!-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11월30일 대림 제1주일(뉴튼수도원 20일째),
이사63,16ㄹ-17.19ㄷㄹ;64,2ㄴ-7 1코린1,3-9 마르13,33-37
<집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깨어 있어라.>
+ 마르 13,33-37
솔 향기 -깨어 있어라(Watch)!-
11월28일 처음으로 오후 내내 성탄츄리 나무 파는 일을 도우며 육체노동을
했습니다. 11월 27일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 이후 여기 미국은
벌써 성탄축제가 시작된 느낌입니다. 추수감사절 다음부터 판매가
시작되면 12월22일 성탄 전 대림시기 동안 내내 약 3000그루의 성탄츄리
나무를 판매하게 됩니다.
약 한 달 정도 성탄 츄리 나무 '솔 향기'에 젖어 살게 되었습니다.
10월 한달간 배를 수확하는 요셉수도원과의 비교도 재미있습니다.
광활한 대지위에 키워낸 8년생 쯤 되는 사철 푸른 소나무 비슷한 성탄츄리
나무들이 흡사 사막의 수도승들 같습니다.
"뉴튼수도원 수사님들에게서는 솔 향기가 납니다.“
덕담을 나누며 크게 웃었습니다. 깨어 있을 때 솔 향기의 영혼입니다.
성탄츄리 나무의 향기가 참 은은하고 깊어 정신을 맑게 합니다.
늘 하늘 향해 있는 푸르른 모습들이 마치 늘 깨어 기도하는 사막의
수도승들 같습니다. 부부나 가족이 함께 기쁨 가득한 모습으로 마음에
드는 나무를 베어와 사가는 모습들이 그대로 축제의 분위기입니다.
'아, 미국에는 가정이 살아 있구나!
건강한 가정들이다. 꿈과 낭만이 있다. 아, 이것이 미국의 힘이구나!‘
언뜻 스친 생각입니다.
이렇게 주님 탄생을 기다리며 대림시기 내내 푸른 성탄츄리 나무를 보며
깨어 살게 될 축복 받은 여기 미국의 소박한 가정들입니다.
청순(淸純)한 향기를 발하는 성탄츄리 나무들이 상징하는바 대림시기를
맞는 우리 믿는 이들입니다. 깨어 살 때 여기 뉴튼수도원의 성탄 츄리
나무들처럼 푸르른 영혼에 향기 그윽한 그리스도의 솔 향기입니다.
그러니 늘 깨어 있으십시오.
오늘은 '깨어있는 삶'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첫째, 늘 하느님을 기억하는 삶입니다.
주 하느님만이 우리의 아버지시고, 예로부터 주님 이름은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주 하느님은 우리 삶의 중심이자 의미요, 우리의 방향이자 목표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모두입니다.
늘 이런 하느님을 생각할 때 하느님을 닮아 푸르른 영혼에 그리스도의
그윽한 솔 향기입니다. 그러니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찾고 사랑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을 없습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깨어 살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오십니다. 대림시기 내내 우리는
이런 하느님을 기다립니다. 기다림의 기쁨이 우리를 깨어있게 합니다.
언제나 기다릴 주님이 계시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복인지요.
대림시기뿐 아니라 매일, 매 순간, 늘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이시요, 늘
깨어 있어야 주님을 기쁘게 맞이합니다.
이사야의 통회와 하느님의 도래를 갈망하는 깨어 있는 모습이 심금을
울립니다.
"어찌하여 저희 마음이 굳어져 당신을 경외할 줄 모르게 만드십니까?
당신 종들을 생각하시어 돌아오소서.
아, 당신께서 하늘을 찢고 내려 오신다면! 저희는 모두 나뭇잎처럼 시들어,
저희 죄악이 바람처럼 저희를 휩쓸어 갔습니다.
당신 이름 부르는 자 없고, 당신을 붙잡으려고 움직이는 자도 없습니다.“
흡사 오늘날 많이도 하느님을 잊고 살았던 우리의 통회 기도같습니다.
다음 이사야의 고백은 우리 모두의 고백입니다.
"주님, 당신은 저희 아버지십니다.
저희는 진흙, 당신은 저희를 빚으신 분, 저희는 모두 당신의 작품입니다.“
이렇게 늘 하느님을 주님이자 아버지로 사랑하여 고백할 때 깨어 있는
푸르른 영혼에 그리스도의 솔 향기입니다.
둘째, 늘 감사하는 삶입니다.
깨어 있음은 기도요 기쁨이요 감사입니다.
영혼이 잠들어 있을 때 기도도 기쁨도 감사도 실종입니다.
감사로 깨어 있는 영혼이 진정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총을 생각하여 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감사하기로 하면 끝이 없습니다.
모두가 감사요 은총입니다.
오늘 코린토 신자들에 대해 감사할 것을 권하는 바오로의 말씀은 그대로
우리에게 해당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느 모로나 풍요로워졌습니다.
어떠한 말에서나 어떠한 지식에서나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이 여러분 가운데에 튼튼히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어떠한 은사도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로 바오로가 말하는 우리의 부요한 모습입니다.
얼마나 고무적인 말씀인지요.
우리는 우리가 내적으로 얼마나 부요한지 자신에 대해 너무 모릅니다.
이런 내외적 부요함에 대한 자각이 깨어 있게 하고 열렬히 주님을 사랑하며
주님이 나타나시길 고대하게 합니다.
매일 이런 은총에 감사하며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는 복된 미사시간입니다.
셋째, 늘 맡겨진 제 일에 충실한 삶입니다.
깨어 있는 영혼들은 늘 제 자리에서 제 때에 제 일을 합니다.
유비무환, 언제든 주님이 오셔도 맞을 준비가 되어 있는 영혼들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도 단 하나 '깨어 있어라(Watch)!'는 것입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주님이 언제 돌아올지, 저녁일지, 한 밤중일지,
닭이 울 때일지, 새벽일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주님이 갑자기 돌아와 너희가 잠자는 것을 보는 일이 없게 하여라.“
'집주인'을 '주님'으로 바꾸니 더 실감이 납니다.
육신은 잠들어도 영혼은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오매불망 사랑하는 이들이 그러합니다. 사시사철, 밤낮으로 늘
푸른 성탄츄리 나무들이 그대로 깨어있는 영혼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의 간곡한 마지막 당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깨어있어라!“
주님이 언제 오시든 깨어 주님을 맞이하는 주님의 종들은 행복합니다.
대림 1주일, 주님은 우리 모두 깨어 살 것을 촉구하십니다.
깨어 기도하며,
1-늘 하느님 아버지를 기억할 것을,
2-늘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할 것을,
3-늘 제 때, 제 자리에서 제 일에 충실할 것을 당부하십니다.
깨어 살 때 그리스도의 청순한 솔 향기입니다.
이 거룩한 대림 1주일 미사시간, 우리 모두 깨어 기다리다가 오시는 주님을
찬미와 감사의 기쁨으로 맞이하는 복된 시간입니다.
"하느님, 저희를 다시 일으켜 주소서. 당신 얼굴을 비추소서. 저희가
구원되리이다."(시편80,4).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 -
◈ [서울] 대림 제1주일
2014년 가해 11월30일 대림 제1주일
<집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깨어 있어라.>
+ 마르 13,33-37
오늘은 서울 대교구 교구장이신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님의 축일입니다.
추기경님께서 영육 간에 건강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서울 대교구는
100만 명이 넘는 신자가 있고, 성직자는 800명이 넘습니다. 본당은
200개가 넘고, 가톨릭 대학교, 동성고등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성모병원이 있습니다. 평화방송과 평화신문을 통해서 복음 선교를 하고
있습니다. 사무장, 사무원 그리고 각 기관에서 근무하는 분들은 몇 만 명은
될 것 같습니다. 해외로 파견된 선교사도 있고, 유학을 가서 공부하는
사제도 있습니다. 군종교구에 파견된 사제도 있습니다. 이 거대한 조직을
책임지고 운영하는 분이 바로 추기경이십니다. 서울 대교구라는 배가
하느님의 나라를 향해서 힘차게 노를 저을 수 있도록 추기경님을 중심으로
교구의 모든 구성원들이 함께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대림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주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은 정말 중요한 시간입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4주 동안 2000년 전에 우리를 위해서 오셨던 예수님의 삶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 주님께서 앞으로 우리들의 삶을 이끌어 주시도록 지금 나의
행동과 나의 말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버스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사랑하는 연인과의 약속을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것이라면
그 준비와 마음 자세로 특별해야 할 것입니다.
대림은 주님을 기다리는 시기라고 할 수 있지만 우리와 함께 현존하시는
주님을 체험하는 시기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는 둘이나 셋이
모인 곳에 나도 함께 있겠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세상 끝까지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미사 때 성체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현존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불감증 때문에, 우리의 욕심 때문에 어쩌면 늘 우리 곁에
오시는 주님을 애써 모른 체하고 해마다 성탄절을 기다리면서 대림을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주님은 늘 우리 곁에 계셨는데
우리는 애써 대림절을 지내면서 다른 330일은 주님께서 우리 곁에 계시지
않는 것처럼 사는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는 집에 고상을 걸어 놓고 있습니다. 어떤 집은 화장실에도 고상을
걸어 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의 집에 주님께서 현존하고
계십니까! 주님이 계시는데 부부싸움을 하고, 아이들을 때리고, 큰소리가
나고, 주님 보시기에 합당하지 않은 일들을 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 집에는 없다고 생각하며 사는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주님의 현존을 삶으로 드러냈던 베드로 아저씨의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고물을 모아 파는 베드로 아저씨가 교리를 받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베드로 아저씨는 배움도 적고, 가진 것도 적었지만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을 삶으로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우리 집, 식구로 알고, 하루에
천 원씩 준비해서 한 달 후 교무금으로 냈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었기에 금 수저를 준비했고, 주님의 밥을 늘 퍼서 놓았습니다. 작은 방에
지성소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예수님 자리, 금 수저, 방석을 준비했습니다.
과연 나는 사제관에 주님이 계시다는 것을 얼마나 믿고 있는가를 생각하니
베드로 아저씨를 도저히 따라 갈 수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100프로 믿고 금 수저까지 준비한 베드로 아저씨에게 존경을 드렸습니다.
기다림이란 무엇인가 생각합니다.
1) 어떤 약속을 의식하고 기다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2) 기다림은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능동적입니다.
3) 기다리는 사람은 인내하는 사람입니다.
4) 기다림은 함께 하는 행동입니다.
2015년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왜 오셨는지, 무엇을 하셨는지, 무엇을
주셨는지 생각하면서, 주님의 오심을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성실하면 깨어있는 것
2014년 가해 11월30일 대림 제1주일
<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지켜라 >
복음: 마르코 13,33-37
< 성실하면 깨어있는 것 >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이셨던 앵베르 주교는 서양인으로서 음식과
생활풍습이 맞지 않는 상황 속에서 그리고,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순교의 칼날 앞에서 겪는 어려움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나는 몹시 지쳐있다. 새벽 2시에 일어나 2시와 3시 사이에 성사를 주고 ...
12시 가까이 되어야 밥을 먹게 되는데 영양가라고는 하나도 없다. 너무
허기가 지고 지쳐서 쓰러지려 하면 70세가 넘은 노인이 100리 길을
걸어와서 또 ‘고해성사를 달라’ 그런다. 어찌 내가 고해성사를 주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건조한 기온과 침대도 없는 맨바닥에 덮을 담요도
없이 자야 하는 내 몸은 견딜 수 없이 춥고 고통스럽다. 그러니 내가 이런
나의 삶을 끝내주려 하는 칼날을 무서워하지 않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엥베르 주교님의 이 편지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그의 ‘성실함’입니다.
그리고 그의 성실함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것은 빨리 주님이 오시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성실하게 일하기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에 이 일을
계속하는 것이나 아니면 그냥 순교의 칼을 받는 것이나 큰 차이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의 주제인 ‘깨어있음’과 가장 가까운 모습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엇에 성실해야 할까요? 바로 하느님을 기쁘게 하는 일에
성실해야합니다. 일을 맡기고 가신 주인께 성실해야 합니다. 주인이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이웃에게 쉼 없이 민감하고 성실하는 것입니다.
개구리를 물에 넣고 조금씩 물을 끓이면 개구리는 민감하지 못하여 자신이
익어버리는데도 물 밖으로 뛰쳐나오지 않고 죽어버린다고 합니다.
깨어있지 못하다는 말은 그만큼 민감하지 못하다는 말과 같습니다. 물건을
어디에 두었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물건을 둘 때 정신을 다른
곳에 팔고 있었기 때문에 기억이 나지 않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잠을 자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술이 떨어졌음을 가장 먼저 눈치
채고 당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아셨습니다. 이는 성모님이 깨어
계셨다는 말입니다. 깨어있는 사람은 민감하여 지금 이 순간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를 살피고 행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힘든
삶이겠습니까? 그래서 깨어있는 사람들은 삶이 힘들어서 빨리 잠을 잘
시간이 오기만을 기다립니다. 이렇듯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깨어있는
사람은 가장 잠을 자는 것을 기대합니다. 깨어있는 사람들의 삶은 너무나
투쟁과 같아서 쉴 수 있는 시간만을 바랄 뿐입니다. 지금 당장 주님께서
데려가시기만을 바랍니다. 이런 삶이 진정한 깨어있는 삶인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 때처럼 준비하고 있지 못하다가 갑자기 마지막 날이
들이닥치면 더 이상 되 돌이킬 수 없으니 항상 깨어 준비하고 있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앵베르 주교님은 조선교구에서 사목하시면서 삶과 죽음 모두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지금 당장 죽어서 그리스도께 가는
것이 더 좋기는 하지만 또한 살아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도
이익이라고 말합니다(필립 1,21-26). 성실하게 그분이 우리에게 맡겨준
직무를 수행하는 것이 깨어있음입니다. 깨어있는 것은 고통스럽습니다.
노아가 배를 만들 때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일하는 것만이
나중에 죽음의 홍수가 우리를 덮칠 때 우리를 구원해 줄 방주가 될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의 새 책이 발간되었습니다.
2014~2015년 나해 주일 대축일 복음 묵상집입니다.
구입은 하상출판사(031-243-1880 begin_of_the_skype_highlighting
무료 end_of_the_skype_highlighting)로 문의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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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아, 왜 우느냐?'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기타] "깨어 있어라"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복음 정신을 사는 것입니다.'
2014년 가해 11월30일 대림 제1주일 복음묵상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깨어 있어라.”
(마르코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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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Catholic)이란 그리스어 까톨리꼬스(καθολικ?ς)에서 온 말로,
‘일반적’, ‘보편적’이라는 뜻을 지닌 형용사입니다. 따라서 가톨릭 교회라
하면, 보편된 교회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결코 스스로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계층을 위한 차별화된 교회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보편이라는 말은 쉽게 말해서 모든 이에게 통한다는 뜻이지요.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라는 문장이 눈에서 떠나지를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란 예외가 없음을 말합니다. 적어도 그리스도를 모르거나,
그분의 가르침을 모르고 살아가는 이들이 없게 하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분을 전함에 있어서, 그 어떤 구별이나 차별도 두지 말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모두에게 두루 통하기 위해서는 전하는 이들의 삶이
아름다워야 한다는 뜻도 품고 있습니다.
2000년의 역사를 가진 가톨릭 교회는 참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오늘에
이르렀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역사에 오류를 남긴 일도 적지 않았고,
형제들을 갈라지게 한 것도 커다란 아픔이었습니다. 물론 아픔 속에 뒤를
돌아다 볼 수 있었고, 뼈저린 참회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은총이기도
하였습니다. 여기서 오류라 함은 그리스도가 중심이 아닌, 인간의 욕망이
중심이 되어 저질러진 과오를 뜻합니다. 복음정신을 외면하면 반드시
잘못된 길을 걸을 수밖에 없음을 교회의 역사는 증명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교회 모습을 봅니다.
반성하고 개선해야 할 부분은 항상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정말 잘 살고 있는 사람들도 있고, 누가 보아도 엉터리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잘 이루어진 시스템도 있을 것이고, 잘못 만들어진
시스템도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교회도, 교회의 모든
구성원도 늘 깨어 있어야 한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깨어있다는 말은 그저 눈을 뜨고 있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마음이 복음정신으로 무장됨을 의미합니다.
가톨릭 신자로서 가톨릭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교회가 움직이고 있는지,
그 구성원들이 제대로 살고 있는지를 항상 살펴볼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편견과 차별, 독선과 폭력적 권위, 권력과 부의 추구가 있지는
않은지 항상 경계하며 살펴보아야 합니다.
교회가 흔들릴 때는 늘 하느님께서는 특별한 목자들을 보내셨습니다.
아마도 지금의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도 그런 분이 아니실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분께서 보이신 말씀과 행동은 사실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모두 복음이 말하고 있는 것이고, 신자라면 당연히 받아들이고
살아야 할 내용들입니다. 하지만 그분께서 하시는 말씀과 행동에 많은
이들이 감동과 회심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은, 그만큼 당연한 것들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반증일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은 보편적인 것을 말합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름다움을 느끼고 감동할 수 있는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그리고 그 신도들이 복음을 벗어나려 한다면, 그것은 정말 말도
안 되는 거짓을 살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 명심했으면 좋겠습니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수도회] 사랑을 기다리는 사랑/ 기경호(프란치스코)신부님
대림 1주일(나) 마르 13,33-37(14.11.30)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마르 13,33)
2014년 가해 11월30일 대림 제1주일
<집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깨어 있어라.>
+ 마르 13,33-37
사랑을 기다리는 사랑
대림시기는 현재를 살아가면서 ‘삶 안에서’, ‘삶을 통하여’, 종말에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때이다. 대림절은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함께 기억하고 묵상하며 기다리는 시기이다. 대림은 기쁨과
희망의 때요, 자비와 구원, 평화와 화해의 때이며, 따라서 경건한 마음으로
찬미와 감사를 드려야 하는 때이다.
우리는 수많은 기다림 속에 살아간다. 기다림은 가슴 설레게 하는가 하면
두려움과 고통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오늘 복음은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기
위해 깨어 지키라(13,33)고 가르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잠든 채 태어나고
잠든 채 살며, 잠 속에서 혼인하고 잠 속에서 자녀를 낳으며, 깨어나 본
적이라곤 없이 잠 속에서 죽는다. 잠든다는 것은 사고방식, 생활방식, 생활
습관이 어둠이 싸여 있다는 것, 헛된 세속적인 것에만 매달려 있음을
말한다. 이런 상태에서 주님이 오실 때 우리는 복음서가 말하는 심판에서
사람의 아들의 손길을 기대할 수 없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세속적인
것에 눈이 멀었기에 주님이 오시는 것을 보지도 못하고, 손과 발, 입과 귀가
묶여 있기 때문에 주님의 배려를 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좋다.’(Ens est bonum) 그러나 슬프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잠들어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좋다는 것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이 원하고 자기에게 유익한 것만 좋다고 여기는 경우가 많다. 좋음의
총체가 바로 우리가 추구하는 구원이다. 이 구원의 선물을 알아차리려면
우리는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 깨어 있음은 곧, 나는 누구이고 어디에
있으며, 지금은 어느 때이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 죄악과 실패, 상처와
고통에 담긴 의미를 알아차려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나는 잠든 채
비참하고 연약하고 죄인인 나, 하느님을 추방해버린 나임을 겸손되이
인정하고 그분 없이는 살 수 없음을 자각하고 그분을 갈망해야 한다.
지금이 바로 은총과 사랑의 순간임을 알아차려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어둠의 행실을 버리고 빛의 무기를 갖추어야 한다.
깨어 있는 사람이란 자기 책임을 의식하고 있는 사람이다. 늘 하느님 앞에
있음을 깨달아 마치 마지막 순간을 살듯이 최선을 다하고 하느님 앞에
책임을 져야 한다. 오시는 주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실생활과는 동떨어져
미래를 응시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가 처한 지금 이 시각은
실생활에서 책임을 지고 이용하라고 주어져 있다. 더 나아가 깨어 있다는
것은 주님의 진실에, 그분의 요청과 부르심에 그리고 매 순간 살아야 할
그분의 말씀에 완전히 열려 있음을 뜻한다. 이렇게 우리가 자신을 온전히
개방할 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삶 깊이 찾아오시어 함께 하시게 된다.
다른 한편 우리는 오시는 주님이 누구이신가를 분명히 알고 기다려야 할
것이다. 오시는 분은 사랑이시기에 우리는 그 사랑을 기다린다. 그러나
우리의 하느님에 대한 사랑보다 더한 목마름으로 그분은 우리를
기다리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리라! 그분은 우리의 사랑을, 우리의
다시 태어남을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간절히 우리를
기다리시는 주님을 맞아들이기 위해 그분의 말씀을 경청하고 침묵 가운데
그분의 사랑을 호흡하는 기도에 잠기도록 하자.
뿐만 아니라 기다림을 잘 준비하려면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회개가 불가피하다. 시선과 마음을 하느님께 돌려 예수님의 온유하고
연민에 찬 마음으로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지금 이때
우리가 해야 할 준비이다. 주님을 만나기 위하여 우리 모두 떠나자. 지금의
삶의 자리에서 떠나며, 나를 비우자. 그리고 침묵 중에 듣자. 겨울 대지의
침묵 아니 새 창조의 소리, 하느님의 음성이 담긴 대지의 함성에 귀
기울이자.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미치도록 사랑하며 깨어
준비하자!
우리 믿는 이들은 시작도 끝도 주님 손에 달린 카이로스의 시간을 살아간다.
새로운 전례주년을 시작하며 서로를 축복하고 깨어 자신을 살피며 더욱 더
사랑으로 뜨거워져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한해가 되도록 마음을 모으도록
하자!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수도회] interior intimo meo[단상]
2014년 가해 11월30일 대림 제1주일
제1독서
<아, 주님께서 하늘을 찢고 내려오신다면!>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63,16ㄹ-17.19ㄷㄹ; 64,2ㄴ-7
제2독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1,3-9
복음
<집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깨어 있어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33-37
대림 제1주일(2014년 11월 30일) interior intimo meo
비가 오는 대림시기의 첫날입니다. 몸살 기운이 있어 힘들게 일어나서
새벽기도를 바쳤습니다. 아직도 날은 어둡습니다. 주님은 대림시기의 첫
말씀으로 “깨어있어라”고 하십니다. 깨어있음은 무엇일까요? 빛이 있을
때만 우린 깨어있을 수 있습니다. 빛이 없으면 어둠 속에 잠겨 잠속에
빠집니다. 가장 어두운 곳은 바깥 세상일 수 있지만 실상 우리 내면입니다.
빛이 오길 갈망하는 곳은 다른 곳이 아닌 우리 내면입니다.
우리 내면은 무엇으로 되어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우리 몸은 수많은
세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세포 하나는 수많은 것으로 만들어져 있지요.
세포 중심에는 세포핵이 있고, 또 그 안에는 엄청난 유전자 정보가 담겨
있습니다. 또 그 안에는 원자가 있고 원자 중심에는 원자핵이 있고 또
그안에는 중성자, 양성자가 있고 또 그 안에는 ‘쿼크’같은 물질인지 아닌지
잘 모르는 입자가 있습니다. 또 그 안에는 또 다른 무엇이 있겠지요.
현재까지 무엇이 우리 몸을 이루고 있는 가장 작은 단위의 것인지
모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고백합니다. “하느님은 내게는 나의
가장 깊은 내면보다 더 내면적(interior intimo meo)이시다.” 이 고백을
물질적으로 표현하면 나를 이루고 있는 가장 작은 입자보다 더 안에 계시는
분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대림시기는 빛이 오시길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아니, 이미 오셨습니다.
이미 우리 안에 계시지만 우린 어둠 때문에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대림시기는 우리 내면보다 더 내면적인 분을 깨닫는 시기입니다.
“주님, 우리 세포 하나하나에 당신 빛을 비추어주시어, 우리 내면보다 더
내면적이신 당신을 깨닫게 하소서.”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 -
◈ [수도회] 기다림의 미학
2014년 가해 11월30일 대림 제1주일
<집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깨어 있어라.>
+ 마르 13,33-37
기다림의 미학
오랜 세월 ‘빨리빨리!’ 문화에 젖어 살다보니 너그러움, 여유, 유유자적,
은근함, 결국 기다림의 영성, 기다림의 미학이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 안에서도 기다림이 부족합니다. 어떤 지향을 두고
열렬히 간구하고 또 실제적인 삶 안에서도 최선의 노력을 다했으면 이제
여유를 갖고 하느님의 때, 하느님의 시간을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는
‘빠름’을 원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바름’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프란츠 카프카의 말입니다. “인간에게 큰 죄가 두 가지 있는데 다른 죄들도
모두 여기에서 나옵니다. 조급함과 게으름이 그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때 정말 한 3분만 참았더라면!’하는 교도소 수감자들 제가
한둘 만난 게 아닙니다. 이미 깨져버린 사랑, 이미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린 인연들의 원인을 추적해보면 결국 기다릴 줄 모르는
조급함이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은 대단하십니다. 인내의 달인이셨습니다. 성격 급한
저 같았으면 30년 동안 나자렛에서의 숨은 세월을 못 참고 폭발했을
것입니다. 대체 이 아까운 시간 다 흘러가고 언제 공생활 시작할거냐고
하느님께 따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묵묵히 아버지께서
신호를 보내실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사사건건 트집 잡고
늘어지는 적대자들, 저 같았으면 한번 싹쓸이를 하던지 판을 뒤집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때가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에집트 땅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입국하기까지 40년 세월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반대로 하느님께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에서 돌아서 정화와 쇄신작업을 거치기까지 기다리셨습니다.
결국 우리도 때를 기다리지만 하느님께서도 때를 기다리십니다.
대림시기의 첫날 우리들 기다림의 색깔에 대해서 묵상해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기다림의 색조는 따뜻한 파스텔 톤입니다. 평생을
기다려왔던 주님을 뵙는 기쁨과 설렘, 그리움과 기대로 가득 찬 희망의
기다림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기다림은 내 중심이 아니라 하느님 중심의
너그러운 기다림이어야 합니다. 결국 내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기다림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성취되기를 고대하는 영적인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기다려야 하는지에 대해 아주 구체적인 행동강령을
우리에게 지침으로 내려주셨습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집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저녁일지, 한밤중일지, 닭이 울 때일지,새벽일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마르코 복음 13장 35절)
많은 경우 우리는 외칩니다. 왜 빨리 하느님께서 내 이 큰 고통, 깊은
슬픔에 개입하지 않으시는지?이 비정하고 사악한 세상을 왜 빨리 깔끔히
정리하지 않으시는지? 왜 저 악인들이 떵떵거리며 살도록 마냥
놔두시는지...
하느님은 우리처럼 일희일비하지 않으십니다. 몇 사람만 바라보지
않으십니다. 인류 전체를 바라보십니다. 그래서 동작이 느리십니다. 대신
크고 여유로운 걸음을 걸으십니다. 우리 죄인들이 충분히 스스로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할 시간을 주기 위해 아주 천천히 시험지를 걷으십니다.
탕자의 비유에 등장하시는 아버지처럼 오늘도 하느님께서는 둘째 아들인
우리들을 기다리십니다.기다리는 아버지의 사랑으로 덮을 수 없는 악은
없으며 그분의 은혜에 필적할 만한 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지은 죄가 진홍빛처럼 붉다 하여도 그분 크신 자비 앞에 눈처럼
녹아버립니다. “참된 신앙은 두려움의 집에서 걸어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오래 전부터 기다리고 계시는 아버지 사랑의 집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헨리 나우웬)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사람이려면 언제나 정신도 있어야지요.
2014년 가해 11월30일 대림 제1주일
<집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깨어 있어라.>
+ 마르 13,33-37
사람이려면 언제나 정신도 있어야지요.
‘정신 차려!’‘너 정신 나갔니?’‘정신없네.’라는 말을 아주 잘 합니다.
정신의 신은 귀신 신(神)자입니다. 영(靈)이며 혼(魂)이며 ‘자기’입니다.
사람에게 혼이 없다고 하면 신(神)이 없는 육신(肉身)뿐이라는 말입니다.
육신은 고기뿐인 몸이라는 것이므로 사람이려면 언제나 정신도 있어야지요.
정신은 잠을 자지 않습니다. 정신은 육체와 달리 혼의 원리를 따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점에서 인간이라면 언제나 깨어 있으라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깨어 있어라.
(마르코 13,37)”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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