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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나해 12월6일 대림 제1주간 토요일
[수도회] 가엾이 여기며 거저 건네는 삶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신부 -
† 제1독서 이사 30,19-21.23-26
† 복음 마태오 9,35―10,1.5ㄱ.6-8
★ 이사야 예언자는 곤경과 고난을 겪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님의
위로를 전하며 구원에 대한 희망을 불러일으킨다. 그들이 부르짖으면
주님께서 자비를 베푸시고 응답해 주시리라(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모든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병자들을 고쳐 주신다. 또한 제자들에게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주인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할 것을 이르신 뒤 열두
사도를 파견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대림 제1주간 토요일인 오늘은 성 니콜라오 주교의 축일이기도 합니다.
‘니콜라오 성인’ 하면 무엇보다도 인자한 모습의 ‘산타클로스’가 떠오르며
성탄절이 가까워진 느낌이 들곤 합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각인된 ‘산타
할아버지’의 모습은 19세기 이후 어린이 문학과 영화, 광고 등을 통해
형성된 것이지, 4세기 무렵 지금의 터키에 해당하는 소아시아에 살았던
니콜라오 성인과는 상관없습니다.
그럼에도 니콜라오 성인이 일찍부터 아이들의 수호자로 공경받아 왔고,
그에 관한 감동적인 전설이 많다는 점을 생각하면, 성탄절을 앞둔 시기에
맞는 그의 축일은 우연이 아닌 듯합니다. 가난한 세 자매를 구한 유명한
이야기를 포함하여 성인에 관련된 미담이나 전설은 모두 성인이 하느님의
자비를 자신의 삶으로 잘 드러냈다는 내용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에는
니콜라오 주교가 특히 어려움에 놓인 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간 인물이라는
점이 담겨 있습니다.
성인의 이러한 삶은 아기 예수님을 맞이할 성탄절을 준비하는 우리가
모범으로 삼고 배워야 하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가 전하듯, 하느님은 곤경에 빠진 이들의 부르짖음에 자비로
응답하시는 분이시기에, 아기 예수님을 맞이함은 바로 하느님의 자비를
받아 안는 것이며, 이는 또한 힘없고 가난한 이들의 편에 서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미술 평론가 웬디 베케트 수녀는 네덜란드의 헤라르트 다비트가
그린 세 폭의 제단화 ‘성 니콜라오의 세 가지 전설’에 대해 해설하면서, 이
그림이 주는 생동감과 기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묵상하고 있습니다. “이
세 폭짜리 그림에서 느끼는 기쁨은 우리가 그림을 제대로 읽어 내고 그것을
통해 화가가 느꼈던 기쁨을 찾는 데서 오는 것이다”(『웬디 수녀의 나를
사로잡은 그림들』에서). 화가의 기쁨은 다름 아니라 작고 약한 이들을
전심으로 도우면서 느낀 성인의 기쁨을 깨달은 데에서 얻었을 것입니다.
이 대림 시기에 우리 또한 단순하고 소박하게나마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돕는 데서 큰 기쁨을 느끼는 사람이 되도록 더욱 애써야겠습니다.
- 매일 미사 -
◈ [서울] 대림 제1주간 토요일
2014년 나해 12월6일 대림 제1주간 토요일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 마태오 9,35―10,1.5ㄱ.6-8
개념을 알고, 규칙을 찾으면 문제를 쉽게 풀 수 있다고 합니다. 오늘은
우리가 대림시기에 자주 접하게 되는 이사야 예언서와 신약의 시대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사상과 신학은 초대교회의 신학과
사상에 많은 영향을 미쳤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도 많은 경우에
이사야 예언자의 글을 인용하셨습니다.
이사야서는 내용을 보아도 성서 전체와 닮은 점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선
전반부 39장은 구약의 내용과 마찬가지로 주로 심판의 내용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사야서 전체에 나오는 유대인들의 죄목을 보면 너무나
많습니다. 포도주와 독주에 취해 비틀거리는 모습(이사28:7), 예언자라
하면서 이상을 그릇되게 푸는 모습, 재판관이라 하면서 판결을 그릇되게
하는 모습, 관리라 하면서 뇌물을 일삼는 모습, 하느님을 경외한다고
하면서 마음은 멀리 떠나 있는 모습(이사29:13).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기도 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사야 1장 18절에서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씀으로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얼마나 희망적인 말입니까? 죄로 짓눌린 인간에게 이보다 더
위로의 말이 어디 있겠습니까? 주홍같이 붉은 죄를 눈과 같이 희게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후반 27장은 신약의 복음과 같이 하느님의 은혜의 말씀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더구나 신약이 세례 요한의 외침으로 시작되는데
후반부의 시작인 40장은 세례 요한의 등장을 예언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는 광야에서 주님의 길을 닦아라.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사막에 길을
곧게 내어라."(이사40:3)
더구나 이사야서가 기원전 740년경에 쓰여진 책인데 예언된 내용이
신약시대에 세례 요한과 예수님에 의해서 정확히 실현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광야에서 외치는 자인 세례 요한의 이야기는
물론 메시아의 예언이 담겨있는 7장, 9장, 11장, 그리고 53장의 내용은
너무나 생생합니다. 먼저 7장에서는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라고 했는데 이 본문이 마태복음
1장 23절에서 그대로 인용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으로 그 예언이
실현된 것입니다.
9장에서는 "요르단 건너편과 이민족들의 지역이 영화롭게 되리이다.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칩니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공생활을 시작할 것을
예언한 것으로 실제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다. 마태복음 4장
16-17절에서 역시 그대로 인용되고 있다.
11장에서는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리라. 그 위에 지혜와 슬기의 영, 경륜과 용맹의 영 지식의 영과 주님을
경외함이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이새의 후손인 요셉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비둘기 같은 성령이
강림하심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수난을 예언하고 있는 53장은 너무나 유명합니다.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낳았다. 우리는 모두 양 떼처럼 길을 잃고 저마다 제 길을 따라갔지만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악이 그에게 떨어지게 하셨다."(이사53:5-6)
뿐만 아니라 61장 1절에서는 예수님의 사명을 예언한 것인데 예수님이 이
말씀을 직접 인용하심으로써 자신이 그 예언을 실현하고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희망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우리는 이런 말씀을 확인하면서 또한
앞으로 될 일들을 예언하신 말씀에도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지금까지
이루어진 말씀이우연이 아니라면 앞으로 이루어질 말씀들도 우연이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도회] 가엾이 여기며 거저 건네는 삶/ 기경호(프란치스코)신부님
2014년 나해 12월6일 대림 제1주간 토요일
마태 9,35-10,1.5ㄱ.6-8(14.12.6)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
가엾이 여기며 거저 건네는 삶
대림 첫 주간의 마지막 날이다. 주변을 둘러보면 그리 달라진 것도 크게
달라질 것 같아 보이지도 않는다. 내 자신이 변하고 새롭게 보기로
다짐하여 영의 눈을 뜨지 않고서는 말이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위로와 희망을 주는 말씀을 전해준다.
“너희는 다시 울지 않아도 되리라. 네가 부르짖으면 그분께서 반드시
너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들으시는 대로 너희에게 응답하시리라.”
(30,19-20) 우리네 연약하고 보잘것없는 영성생활도 인생살이도 혼자
잘났다고 제아무리 용을 써봐도 별로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러나 우리
인생길에 함께 계셔주시고 자비를 베풀어주시는 하느님, ‘비록 곤경의
빵과 고난의 물을 주시지만, 숨어계시지 않고’(30,20) 늘 동반해주시는
주님 때문에 살아갈 의미가 있고 희망이 있지 않겠는가!
우리 삶의 위로와 희망이신 주님은 우리가 어떤 처지에 살아가든 모두의
주님이시다. 우리의 ‘아빠’이신 그분으로 인하여 우리는 우주적인 가족이요
하느님의 형제 자매들이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 보편적이며 한없는
사랑으로 모두를 사랑하셨고, 하느님의 자비를 보여주셨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마태 9,35)
그분은 장소에 제한을 두지 않으시고 ‘모든 고을’과 ‘모든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모두’를 고쳐 주셨다. 그렇다! 하느님을 품은 이들의 사랑은
한이 없으신 하느님처럼 모두를 품을 줄 알아야 한다. 이렇게 품어야 하는
까닭은 서로가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이다. 하느님의
사랑이 설 자리가 없고 이기심과 탐욕이 서로를 가를 때 보이지 않는
폭력과 지배의 악순환이 시작된다. 내가 지닌 그 무엇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 때문에’ 지음 받은 태초의 그 아름다움과 순수함으로 ‘모두’를
품도록 하자!
예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9,36-37) 하느님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은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다. 어떤 이유로든 우리는
정신적으로 상처받고 육신적으로 고통 받으며 일상의 어려움을 겪으며
살아간다. 사실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이 무엇을 해주어서가 아니라 ‘그저
곁에 있어줌’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얼마나 힘을 얻고 살아가는가! 그렇지
않다면 얼마나 고독할지. 예수님께서는 고통과 어려움 중에 살아가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이 가엾이 여기는 마음은 내 앞에
나와 거리를 두고 있는 대상화된 사람에 대한 피상적인 태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가엾이 여기다’란 말의 그리스어 원어인 ‘스플랑크니스테’
에서 알 수 있듯 이 말은 상대방의 존재 깊이 들어가 온전히 하나되고
동화되어 그 인격이 되어 함께 느끼고 아파하는 그런 마음이다. 온갖
고통을 겪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완전히 품어 나의 아픔으로 토해낼 수
있는 절절한 사랑이다! 이제부터라도 남의 아픔을‘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
나의 것’으로 삼자!
서로에 대한 이런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절실한 때이다. 그런 마음은 나
살기에 바쁜 일상을 적어도 가끔씩이라도 멈추어 고통과 어려움 중에 있는
이들과 함께 하며,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을 기쁜 마음으로 되돌리는
것으로 표현해야 할 것이다. 서로를 지극한 사랑의 눈길로 품으며 가엾은
마음으로 차별 없는 하느님의 한 형제자매가 되고 위로와 희망이 되기
위하여 자신을 건네야 하리라!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10,8) 하고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수도회] 연민(compassion)의 공동체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나해 12월6일 대림 제1주간 토요일(뉴튼수도원 26일째),
이사30,19-21.23-26 마태9,35-10,1.5ㄱ.6-8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 마태오 9,35―10,1.5ㄱ.6-8
연민(compassion)의 공동체
연민의 사랑이 제일입니다.
착한 목자 주님의 사랑은 대자대비(大慈大悲), 연민의 사랑입니다.
불쌍히 여기고, 측은히 여기고, 가엾이 여기는 한량없는 사랑입니다.
이런 주님께 바치는 우리의 참 좋은 기도가 자비송입니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오늘은 몇가지 묵상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첫째, 하느님 내려주신 '첫 눈' 같은 강론입니다.
자고 났을 때 밤 사이 내린 첫 눈을 보면 태고의 순수를 대하듯 동심으로
돌아갑니다. 여기 뉴튼수도원에 온 이튿 날, 밤사이 내린 첫 눈에 마음
설레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매 해 내리는 첫 눈처럼, 매일 첫 눈 같은 첫
날을 살게 하는 강론을 생각합니다.
한국은 여기 미국보다 꼭 14시간이 빠릅니다. 12.6일의 강론을 쓰는 지금
미국시간은 12.5일 금요일 새벽3시로 한국은 12.5일 오후 5시입니다.
이 강론을 12.5일 10시(미국시간)에 인터넷 요셉수도원 홈페이지에 올리면
한국시간은 12.6일 00시가 됩니다. 그러니 12월6일 한국에 있는 분들은
새벽에 일어나면 첫 눈 같은 강론을 대할 수 있습니다.
아, 눈 떳을 때 첫 눈의 감동처럼 첫 날을 여는 첫 눈 같은 강론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둘째, 매일 어머니가 지어주셨던 따뜻한 아침 밥 같은 강론입니다.
예전 어머니는 일년 열 두 달 매일 새벽마다 제일 일찍 일어나 따뜻한
아침밥을 지어주셨습니다. 아무리 추운 겨울 날에도 새벽같이 일어나 추운
부엌에서 솥이 걸린 아궁이에 불을 때어 밥을 해주셨습니다.
철이 난 지금에서야 어머니의 아침 밥은 그대로 '사랑 밥'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지금도 그리운 어머니의 아침 밥입니다.
새벽마다 누구나 먹을 수 있는 사랑 가득 담긴 따뜻한 아침밥 같은
하느님의 말씀 밥, 사랑 밥 강론이 되길 바라며 새벽 일찍 올립니다.
셋째, 여기 뉴튼수도원에서 산책 중 자주 방문하는 수도원 묘지입니다.
수도원에는 두 개의 공동체가 있습니다. 하나는 '산' 수도형제들의
공동체요, 하나는 '죽은' 수도형제들의 수도원 묘지 공동체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가 살아있습니다. 두 공동체 역시 '죽어서 사는'
공동체라는 데는 일치합니다. 삶과 죽음을 넘어 하느님 앞에 영원한 삶을
살고 있는 '죽은 형제들'과 '산 형제들'입니다.
하여 묘지를 방문할 때 마다 고요한 평화와 위로를 맛보며, 더불어 살고
있는 수도형제들에 대한 깊은 연민의 사랑을 갖게 됩니다. 잘 살고 못
살고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고 그저 살아 주는 자체가 고맙습니다.
나름대로 힘겹게, 힘껏 자기 한계와 약함이란 십자가의 짐을 지고 살아가는
도반인 수도형제들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제일 기뻐하시는 것은 당신을
닮은 연민의 사랑이요, 잘 살고 못 살고는 하느님 눈엔 도토리
키재기일뿐입니다.
열정 없다 판단하거나 지적하는 교만보다는 존중과 배려, 사랑과 감사의
마음으로 서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함께 살아가는 연민의 사랑,
수도공동체가 제일입니다.
사부 성 베네딕도 역시 그의 수도규칙에서 '형제들의 약점을 지극한
인내로 끝까지 참아 견디라'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은 이런 사랑의 공동체를 축복하십니다.
다음 이사야의 아름다운 비전은 이런 연민의 사랑 공동체를 통해
실현됩니다. 대림시기 우리가 주님께 바라는 은총입니다.
"주님께서 당신 백성의 상처를 싸매 주시고,
당신의 매를 맞아 터진 곳을 낫게 해 주시는 날,
달빛은 햇빛처럼 되고, 햇빛은 일곱 배나 밝아져,
이레 동안의 빛을 한데 모은 듯 하리라.“(이사30,26).
연민의 사랑은 치유자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연민의 사랑이 서로를
치유하여 햇빛 사랑 환한 은총의 공동체를 만들어 줍니다. 하느님 연민의
사랑은 오늘 복음의 착한 목자 예수님을 통해 완전히 실현됩니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였기 때문이다.“(마태9,36).
예나 이제나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는 이들은
여전합니다. 가엾어 하는 연민의 사랑이 바로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어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게
하십니다.
새삼 연민의 사랑이 모든 치유의 원천임을 깨닫습니다.
착한 목자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당신 연민의 사랑으로 우리
모두의 허약함을 치유해 주시고 '사랑의 치유자'로 세상에 파견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9,8ㄷ).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 -
◈ [청주] 무상의 은총을 나눠라|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나해 12월6일 대림 제1주간 토요일(마태9,35-10,1.6-8)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 마태오 9,35―10,1.5ㄱ.6-8
무상의 은총을 나눠라.
일을 줄이면 줄어들고 일을 늘리면 늘어납니다. 그런데 어떤 일을 줄이고
또 어떤 일을 늘려야 하는가는 너무도 자명합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늘리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줄여야 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보다
해야 되는 일을 먼저 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렇지 못합니다.
주님의 일은 줄이고 내 일을 많이 해야 합니다 그래야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가정도 화목하고 신앙생활도 제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을 잘 챙기는 사람이 내 일에도 충실하게 됩니다. 내 일을
앞세우고 내 일에 매이면 주님의 일을 소홀히 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일을 소홀히 한다면 아무리 좋은 일을 많이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일이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마태9,37)고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돌봐줘야 할 사람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는 말씀입니다.
더더욱 잘 돌 볼 수 있는 준비가 된 사람이 없으니 가슴 아픈 일입니다.
주님의 일꾼은 바로 우리 자신이고 일꾼으로서의 역할을 잘하려면 그만한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을 읽고 미사참례를 하면서 영적자산을
축적해 놓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우리를 도구삼아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적극적으로 협력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혹 그 역할을 할 수 없다면 그런 일꾼을 보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기를 권합니다.
`주님께서는 마지막 날 심판자로써 다시 오실 것인데 그 때 구원에서
제외되는 사람이 없도록 일깨울 협력자를 필요로 합니다. 성직자, 선교사,
수도자들이 많이 양성되고 배출될 수 있도록 마음을 모았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협력을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할 일을
다른 이에게 미룰 것이 아니라 내가 일꾼이 되어서 “수확할 것은 많은데”
하시며 걱정하시는 주님의 근심을 덜어드려야 하겠습니다.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 매 순간 나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음을 잊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 그분께서
무상으로 주신 은총이고 나는 그것을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할 뿐입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마태10,8).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메시아를 만난 사람의 특징
2014년 나해 12월6일 대림 제1주간 토요일
<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
복음: 마태오 9,35-10,1.5ㄱ.6-8
< 메시아를 만난 사람의 특징 >
누군가 물건을 파는 한 할머니가 갈림길에서 공중으로 막대기를 던지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 번만이 아니라 계속 던지고 있었습니다. 길을
가던 행인이 왜 막대기를 던지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이건, 어느 길로 가야 물건이 잘 팔릴 가를 점치는 거라우.”
“근데 한 번이면 되지 왜 계속 던져요?”
“어, 내가 가고 싶은 방향이 나올 때까지 던지는 거야.”
“아... 네... ”
저도 결정을 내렸다 바꾸었다 하는 적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저는 책을
내지 않는 것으로 결정을 내리고 살았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나
부처님이나 소크라테스, 혹은 공자와 같은 위대한 스승들은 책을 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아우구스티노와 토마스 아퀴나스 같으신
분들은 또한 책을 쓰심으로써 주님의 도구가 되신 분들이기에 ‘책을 내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습니다. 그러나 또한 성당에 특강을 와서 책을 파시는
모습이 썩 좋게 보이지는 않아서 ‘글이 아닌 삶으로 보여주는 게 맞는 것
같다’라고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이렇게 오락가락 하며 살던 중에 하느님의 목소리는 전혀 신경 쓰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주교님께서 여러 차례 책을 내보라는
권유가 하느님께서 원하신다는 것임을 느끼게 되어 용기를 내게 된
것입니다. 결국 나의 생각으로는 온전한 결정을 내릴 수 없고 항상
주님께서 일러주시는 길이 어떤 길인지에 정신을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만났다면 그분이 보이고 그분의
목소리가 들리고 또 그분 때문에 영향을 받아야만 정상인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바꾸려 하지 않고 계속 막대기만 던지고 있다면 그 막대기는
그 사람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도 주님께서 오시면 더 이상 판단에 혼란이 없을 것이라고
이사야는 예언합니다. 왜냐하면 나를 이끄시는 분을 직접 눈으로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의 스승이신 그분께서는 더 이상 숨어 계시지 않으리니, 너희 눈이
너희의 스승을 뵙게 되리라.”
또한 매 결정의 순간에 등 뒤에서 당신께서 결정을 내리시어 알려주실
것이라 말합니다.
“그리고 너희가 오른쪽으로 돌거나 왼쪽으로 돌 때, 뒤에서 ‘이것이
바른길이니 이리로 가거라.’ 하시는 말씀을 너희 귀로 듣게 되리라.”
그렇습니다. 주님을 만났다면 주님을 보며 주님의 목소리를 들으며 사는
것이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살아가면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주저하는 이유는 그 말씀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내 뜻대로 결정하려는
교만이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헨리 뉴웬 신부님은 당신의 책, ‘마음의 문을 열고’에서 우리 자신의
아집이 주위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게 한다는 비유적인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정신과 의사에게 한 부인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들어오자마자
발작을 하면서 기물을 파괴하고 혈기를 부렸습니다. 간호사 두 사람을
불러서 가까스로 진정을 시킨 후에 진료를 시작하려던 의사는 환자가 오른
손 주먹을 꽉 쥐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손을 펴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펼 수가 없어서 간호사의 도움을 받아서 손가락을 하나 둘 펴기
시작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새끼손가락을 펴니까 딸그랑 하고 밑에
떨어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퍼렇게 녹이 슨 1센트짜리
동전이었습니다.
아무리 주위에서 설득을 하더라도 정신이 다른 곳에 꽂혀있으면 들리지가
않고 보이지도 않습니다. 즉, 주님을 만나는 이들은 주님의 목소리를 들을
뿐 아니라 그 목소리가 들리면 바로 행동에 옮길 수 있는 준비가 된 이들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는 바로 가난한 이들에게 재산을
나누어주겠다고 결심한 자캐오와 같은 이들에게만 구원이 오는 것입니다.
사막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비둘기를 손에 묶어 들고 다니는 이들이
있다고 합니다. 비둘기들은 귀소본능이 너무나 강해 집으로 향하는 방향을
정확히 압니다. 그래서 길이 명확하지 않을 때는 비둘기를 날려보는
것입니다. 그 비둘기가 가는 방향이 집이 있는 방향인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성령의 목소리가 항상 함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목소리를 들으려면 나의 판단은 틀릴 가능성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겸손하게 인정해야만 합니다. 그런 이들에게만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심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미워하지 말라고 한다면 원수까지도 사랑할 결심을
하고 겉옷만이 아니라 속옷까지 가난한 이들을 위해 바로 내어줄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을 때, 이사야서가 말하는 메시아를 만날 준비가 된 사람인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는 길을 가다가 신발도 지니지 말라는 성경말씀이 문득 생각나
바로 신발을 벗어 던져버렸습니다. 이렇게 말씀에 완전히 순종할 결심이
되지 않았다면 그분은 항상 나에게서 멀리 계실 수밖에 없습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인천] 완벽하게 나아갈수 있는
2014년 나해 12월6일 대림 제1주간 토요일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 마태오 9,35―10,1.5ㄱ.6-8
안녕하십니까? 일주일 동안 ‘새벽을 열며’ 묵상 글을 올리지
않다가 다시 묵상 글을 쓰려고 하니 왠지 낯설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14년
째 묵상 글을 쭉 써오다가 딱 일주일 쉬었을 뿐인데도 다시 묵상 글 쓰는
것이 힘드네요. 그만큼 몸이 편함에 금방 익숙해지나 봅니다. 아무튼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으니 묵상 글을 비롯해서 저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으로 살아갈 것을 다짐하여 봅니다. 참, 미얀마에서는 무척이나
행복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오랜만에 동창신부를 만나서 함께 미사도
봉헌하고, 여행도 하면서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네요. 아마 새벽님들께서
많이 기도해주시고 염려해주셨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감사의 마음으로 오랜만에 새벽 묵상 글을 올립니다.
완전식품이란 것이 있습니다. 우유나 달걀 같이 건강상 필요로 하는
영양소를 거의 다 갖춘 단독식품을 완전식품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연히 인터넷에서 ‘우유는 완전식품이 아니다.’라는 논리를 펼친 글을
하나 보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우유가 국이나 찌개를 대신 할 수 없고,
또 술안주를 대신할 수도 없으며, 술을 마신 다음 날 아침에 해장국을
대신할 수도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분이 주장하는
완전식품은 무엇일까요? 바로 이 모든 것들을 다 할 수 있는 ‘라면’이라고
주장하네요.
정말로 완전식품이 라면 같기도 합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다 적합한
음식이니까요. 하지만 그 누구도 완전식품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상황에서 선호하는 음식이기는 하지만, 건강에는 그리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 안에서 가장 완벽한 분은 누구십니까? 하느님이십니다. 따라서
하느님 말씀은 가장 완벽한 말씀으로 우리가 반드시 믿고 따라야 하지요.
그런데 하느님의 말씀을 따른다고 해서 지금 당장 옷이나 먹을 것이
생길까요? 또 하늘에서 보석이 뚝 떨어지고,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을 수
있는 높은 지위를 얻을 수 있을까요? 하느님 말씀을 따른다고 해서 곧바로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물론 언젠가 이루어질 수는 있겠지만,
지금 내가 원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런데 위의 모든
것들을 이룰 수 있게 하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돈’입니다. 그렇다면 돈이
완벽할까요? 순간의 만족을 가져올 수 있지만 참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기
때문에 완벽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순간의 만족이 아닌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완벽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 가장 완벽하고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목자 없는 양들처럼 기가 꺾여 있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을 가지십니다. 왜냐하면 참 가르침 얻지 못해 하느님
나라를 느끼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완벽하신 하느님과 함께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완벽함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지금의 우리를 보시고 여전히 주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을 가지실 것 같습니다. 따라서 세상의 기준 안에서 완벽함을
찾는 것이 아닌, 영원한 행복의 관점에서 완벽하신 하느님을 발견하고 함께
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인도를 잘 할 수 있는 주님의
일꾼들이 많아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삶 안에서
하루빨리 완벽한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란 자녀에게 사소한 것을 주어 아이를 행복하게 만들도록 만들어진
존재다(오그든 내쉬).
반을 남긴 스테이크(인터넷에서 퍼온 글)
유명한 대기업의 어느 회장이 이름난 식당으로 손님들을 초대했다. 여섯
명의 일행은 똑같이 스테이크를 주문했다. 식사가 거의 끝날 즈음 회장이
수행원에게 일렀다.
“이 스테이크를 요리한 주방장을 모셔오게, 매니저가 아닌 주방장이어야
하네.”
수행원은 회장이 스테이크를 절반밖에 먹지 않은 것을 보고 그 다음에
일어날 일을 걱정하며 주방장에게 회장의 말을 전했다. 부름을 받은
주방장은 몹시 긴장했다. 자신을 찾는 손님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스테이크에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떨리는 목소리로 주방장이 물었다.
“아니오. 당신은 정말 훌륭한 요리사요. 오늘 스테이크는 맛이 아주
좋았소.”
이렇게 운을 뗀 회장은 말을 이었다.
“다만 내 나이가 이미 여든이라 입맛이 예전 같지 않다오. 그래서 오늘은
반밖에 먹을 수 없었소. 내가 당신을 보자고 한 것은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오. 반밖에 먹지 않은 스테이크가 주방으로 들어가면 당신이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아서 말이오. 나는 내가 스테이크를 남긴 것이 당신의 요리
솜씨가 나빠서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다오.”
“경영의 신”으로 추앙받는 일본 마쓰시타 전기(현재의 Panasonic)의
창업자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이야기다. 그가 평소 자기가 만나는 사람들을
얼마나 존중했는가를 잘 보여주는 일화이다.
사람을 존중하고 소홀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께도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지금 나는 만나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을까요? 이 세상 안에 계신
또 다른 하느님을 만난다는 생각을 한다면 절대로 소홀히 할 수 없는
소중한 분들이십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고마움
2014년 나해 12월6일 대림 제1주간 토요일[단상]
제1독서
<네가 부르짖으면 주님께서 반드시 자비를 베푸시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30,19-21.23-26
복음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35―10,1.5ㄱ.6-8
대림 제1주간 토요일(2014년 12월 06일) 고마움
우리 수도자들도 인간인지라 수도원에 살면서도 섭섭한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해주었는데 은혜를 모르다니…” 이 감정은 우리의
기가 꺽어버립니다.살고자 하는 의욕을 사라지게 만듭니다. 오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주님의 이 말씀은 우리를
향한 칼입니다. 댓가를 바라고 무엇을 주면 그것은 주는 것이 아니라
‘거래’하는 것입니다.
깊이 생각해 보면, 실상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주기 전에 이미 받았기에 줄
수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주님이 형제들을 통해서 베풀어주셨기에
우리는 무엇을 줄 수 있습니다. 오늘 아침 어느 연로한 선배 신부님이 제
방에 오셔서 제 어깨를 두드리며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무슨
공로가 있어서 이렇게 뜨뜻한 곳에서 호강하며 살 수 있었겠냐. 고마워!”
이 말씀에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아, 이것이 수도 삶의 완성이구나’ 하는
깨달음을 그 신부님이 주셨습니다. ‘고맙다’는 그 말 안에 모든 것이 담겨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주님께 고마움을 느껴야지 우리는 충만히 살 수
있고, 곧 우리 삶이 다른 이를 위한 선물이 됩니다. 고마움을 느끼는
사람이 있는 곳에 하늘 나라는 가까이 옵니다.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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