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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나해 12월9일 대림 제2주간 화요일
[수도회] ‘먼저’ ‘찾아 나서는’ 사랑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신부 -
† 제1독서 이사 40,1-11
† 복음 마태 18,12-14
★ 이사야 예언자는 바빌론으로 끌려가 유배 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주님의 위로를 전한다. 주 하느님께서는
목자처럼 새끼 양들을 모으시어 당신 품에 안으실 것이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되찾은 양의 비유로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를 알려 주신다.
하느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우리의 신앙은 논리 정연하게 분석할 수 있는 추상적 실재가 아닙니다.
자신의 고유한 문화와 오랜 세대를 걸쳐 형성되고 전해진 심성을 통해
하느님을 체험하고 교회의 삶을 살아온 하느님 백성이 공유하는 살아 있는
유기체입니다. 그러기에 보편적인 신학으로 다듬어진 교리만이 아니라
다양한 지역과 민족 안에서 독특하게 발전한 ‘대중 신심’은 토착화된
복음의 열매로서 신앙에 유익하며, 신앙을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데 큰
영향을 줍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에서, 대중 신심이 지닌
복음화의 힘에 대한 깊은 이해를 드러내십니다. 남미에서 오랫동안
사목하시며 만난 가난하고 소박한 이들의 신심 생활을 공감하고 분별하는
과정을 통해 체득한 지혜의 통찰이라 생각합니다. 교황님은 대중 신심을
‘하느님 백성의 자발적인 선교 활동의 참다운 표현’이라고 하시며, 이러한
‘소박한 이들의 문화에 구현된 영성’ 안에 성령께서 활동하신다고
선언하십니다. 또한 이러한 신앙의 살아 있는 실재를 판단부터 하려는
시각이 아니라 사랑하는 착한 목자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특히 가난한
이들이 어떻게 하느님을 만나고 있는지가 드러난다고 조언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신경 구절은 거의 못 외우지만 묵주 기도에 매달리며 병든 아이를
간호하는 어머니들의 강인한 믿음을 저는 생각합니다. 또한 성모 마리아의
도움을 간구하는 누추한 집 안에 켜진 촛불에서 퍼져 나가는 큰 희망을
생각해 봅니다. 또한 십자고상을 바라보는 깊은 사랑의 눈길을 생각해
봅니다”(125항).
오늘은 멕시코의 성인 요한 디다코의 축일이기도 합니다. 그가 바로
‘영원한 동정 마리아’이신 ‘과달루페의 성모님’을 만난 후안 디에고입니다.
멕시코의 토착민이었던 성인 앞에 발현하신 과달루페의 성모님은 멕시코
사람들의 신앙에 깊이 뿌리박혀 있습니다. 이는 대중 신심이 어떻게
진정한 신앙의 심성을 형성하는지를 보여 주는 탁월한 예입니다.
이 대림 시기에 우리의 신앙을 가만히 돌아봅시다. 이러한 반성은 그저
지적인 성찰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순수하고 소박하게 주님을 믿고
성모님을 따르며 교회를 사랑하는 살아 있는 ‘신심’이 내 안에 얼마나
굳건히 자리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 매일 미사 -
◈ [서울] 대림 제2주간 화요일
2014년 나해 12월9일 대림 제2주간 화요일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다.>
+ 마태오 18,12-14
혜화동 버스 정거장에서 ‘대자보’를 보았습니다. 학생들이 경제 부총리에게
쓴 글이었습니다. 학생들은 학교를 졸업하면서 학자금 대출 때문에 많은
빚을 지게 된다고 합니다. 스펙이 있어도 취업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학생들에게 일자리가 주어지지 않으면 집을 살 수도 없고, 부모님께 용돈을
드릴 수도 없고, 경제능력이 없으니 결혼을 할 수도 없고, 아이를 낳을 수도
없다고 합니다. 결국 이 나라의 미래는 희망이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학생들은 경제부총리에게 협박(?)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아이도 낳지 않을
것이고, 연금도 내지 않을 것이고, 일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일자리를 만들어주고, 정규직을 비정규직화 하지 말고, 비정규직을
정규직화 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경제의 발전, 복지의 증대, 젊은이들을
위한 일자리 창출이라는 세 마리의 토끼를 잡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젊은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행복과 재물에 대한 연구를 읽었습니다. 사람들은 재물이 어느 정도
있으면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재물이 지나치게 많으면
오히려 우울하고, 행복하지 않다고 합니다. 너무 없어서 궁핍하거나
굶주리면 행복하기 어렵지만 주체할 수 없이 너무 재물이 많아도 행복하지
않다고 합니다. 미국은 50년 전보다 훨씬 부유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부의 축적을 경제 활동의 근본으로 삼았습니다. 타인에 대한
배려보다는 많이 버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부와 빈의
양극화는 더 커져갔고, 나라는 훨씬 부유해 졌지만 사람들은 예전보다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유럽은 미국보다는 부유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부의 축적을 삶의 질을 향상 시키는 쪽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어느 정도 부가 축적되면 세금으로 복지 재원을
마련하였습니다. 복지의 혜택을 충분히 받는 유럽의 국가들은 미국보다는
훨씬 행복지수가 높다고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양’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골짜기는 메워지고, 산은 깎여서
평평해진다고 말을 합니다.’ 사랑과 나눔, 겸손과 친절로 이웃의 아픔을
메워주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욕심, 교만, 이기심을 깎아 버리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또한 이는 내가 사용하고 남는 재물을 아낌없이 나누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자본주의 세계에서 복지를 확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재물의 축적보다는 삶의 질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그것은 바로 주님의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도회] ‘먼저’ ‘찾아 나서는’ 사랑/ 기경호(프란치스코)신부님
2014년 나해 12월8일 대림 제2주간 화요일 마태 18,12-14
“거친 곳은 평지가 되고, 험한 곳은 평야가 되어라.”(이사 40,4)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다.>
+ 마태오 18,12-14
‘먼저’ ‘찾아 나서는’ 사랑
주님의 성탄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성탄은 가슴으로 느끼는 것
이상으로 가장 끝자리,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 소외된 이들에게로,
오늘의 말구유에로 눈길을 돌림으로써 내 안에 참 기쁨으로
메아리치리라! 오늘 복음 말씀은 길 잃은 양의 비유말씀이다. 착한 목자는
양 백마리 가운데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선다(18,12). 그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 먼저 나서 찾게 되면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하신다는 말씀이다(18,13). 이 비유가 주는 의미를
찾아보자.
먼저 이 목자는 문제없는 아흔아홉 마리를 그대로 둔 채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아 나선다.’ 여기서 길 잃은 한 마리 양은 보잘것없는 사람이나
교회밖에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눈길은 늘
버려지거나 소외되어 생명의 위험에 처해지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먼저’
눈길이 간다. 이 눈길은 이득을 따지는 계산적인 속셈이 있는 눈길이 결코
아니다. 이 눈길은 그 누구도 하느님의 사랑에서 제외되거나 배척당하기를
바라지 않으시고 ‘모두’가 행복한 사랑의 존재가 되기를 바라시는 보편적인
사랑이다. 이 눈길은 가장 힘없고 약해보이는 자식에게 더 마음이 쓰이고
무엇이든 먼저 챙겨주고 싶은 ‘어머니다운 사랑’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혹시 나는 나만의 안위와 만족을 추구하며 주변을 보지 못한 채 살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일상을 살아가면서 어디에 ‘먼저’ 눈길을 두며 살아가는가? 내 삶에
있어서 우선적인 가치는 무엇이며 내가 바라는 으뜸가는 것은 무엇인가?
혹시 나에게 잘 해주는 사람,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될 만한 사람들과의
만남에 더 많은 시간을 쏟고 공을 들이지는 않는가? 그저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들, 곧 사회적 약자들에게는 가뭄에 콩 나듯이 선심을 베푸는
것으로 신자된 도리를 다하는 것으로 스스로 만족하며 살고 있지는
않은가? 저 끝자리, 후미진 골목에서 들려오는 한숨소리와 가슴이 너무도
아파 울지도 못하는 슬픔의 저 밑바닥을 볼 수 있으려면 닫힌 마음의
대문을 열어야 한다. 사랑으로 변두리에 계신 예수님께로 눈길을 돌려야
한다. 오늘도 내 주변에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 울지도 못한 채
힘겨워하고 있음을 아는가! 나의 삶의 눈길, 영혼의 눈길의 우선순위를
분명히 하였으면 한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도록’ 하자!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그 보잘것없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도 망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찾아 나서지 않고’ 모든 것이 다
갖춰지고 아쉬울 것이 없는 교회나 수도공동체 안에 안주하지 말라고
재촉하신다. 프란치스코 교종도 ‘소외받고 고통받는 이들을 위하여
길거리로 나가라!’고 권고하신다. 고상한 영성서적의 몇 구절에 감동받고,
영화나 음악에 공감하고, 그럴싸하게 미화되고 포장된 신비를 추구하며
대단한 신앙의 경지에 이른 양 착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참으로 살아 있는 신앙, 성숙한 영성은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양 한 마리를
‘찾아나서는’ 구체적인 발걸음 안에 있음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이제
성탄도 다가오니 어려운 사람들에게 뭐 좀 베풀어야지!’ 하는 식의
피상적이고 형식적인 태도가 아니라, 소외되고 고통 중에 살아가는
소중하고 존귀한 이웃을 ‘직접 찾아나서’ 그들의 아픔이 무엇이며 왜
아파하는지 마음으로 들어주고 돈 몇 푼이 아닌 진정한 사랑을 나누었으면
한다. 하느님의 뜻은 그 누구든 제외됨이 없이 모두가 구원되는 것이다
(18,14). 우리도 착한 목자이신 주님의 모범을 따라 ‘먼저’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야’ 하겠다. 이처럼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로 향하는 몸짓이
바로 ‘거친 곳을 평지가 되게 하고’ ‘더 큰 기쁨’(마태 18,13)을 불러오게 될
것이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수도회]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느님의 말씀으로-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나해 12월9일 대림 제2주간 화요일(뉴튼수도원 29일째),
이사40,1-11 마태18,12-14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다.>
+ 마태오 18,12-14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느님의 말씀으로-
여기 사무엘 원장 신부의 부탁으로 11.18-20일 까지 이곳 형제들의 연중
피정 지도를 하면서 저 역시 피정을 했습니다. 마지막 피정이 끝나는 날
미사 중에는 여기 형제들과 함께 서원 갱신 예식도 가졌습니다.
안식년 중에도 연중 피정을 한 셈이니 하느님의 섭리에 감사합니다.
3차례 간단히 강의를 했지만 새삼 수사님들의 삶 앞에 말이 얼마나
초라하고 무력한지 통감했습니다.
삶이 받쳐주지 못하는 말은 힘이 없습니다.
예나 이제나 절박하게 와닿는 물음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입니다.
여기 미국에서 국내사정을 보면 위나 아래나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희망을 두고 싶은 사람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하느님께 희망을 두어야 살 수 있는 세상입니다.
민초(民草)들의 삶이 너무 팍팍하고 힘듭니다.
돈 없고 힘 없고 능력 없는 보통 사람들이 살기가 참 힘든 세상입니다.
아니 전반적으로 나라 전체 사람들이 나름대로 다 힘들어 합니다.
외적으론 문명의 첨단에 있지만 내적으론 부실하기 이를 데 없는,
사상누각(沙上樓閣)에 건설된 사회 같습니다.
미국에 있어도 기도를 청하는 분들의 카톡 메시지를 받습니다.
"노력하는데 되지 않아요. 장사 시작한 것이 실수한 것 같아요.
후회되고 힘들어요.
잘못 판단한 것 같아서 불안하고 마음에 평화가 없어요.“
"감기 몸살에 여러가지 부대끼는 일로 정신도 영혼도 몹시 괴롭습니다.“
악순환의 연속된 어려움 중에도 순전히 믿음으로 사는 분들의 고백입니다.
참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막막해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런 중에 오늘 다음 이사야서 40장 6-8절의 주님 말씀이 반가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모든 인간은 풀이요 그 영화는 들의 꽃과 같다.
주님의 입김이 그 위로 불어오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진정 이 백성은 풀에 지나지 않는다.
풀은 마르고 시들지만,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
대림 2주일 1독서 말씀 중 윗 부분이 통째로 빠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더욱
기뻤습니다. 예전부터 이 대목을 좋아하여 늘 되뇌었던 구절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답을 줍니다.
인생무상의 느낌과 더불어 우리를 한없이 겸허하게 하며 민초들에 대해
한없는 연민을 갖게 하는 말씀입니다.
바로 자비하신 하느님의 시각을 지니게 됩니다.
"풀은 마르고 시들지만,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
바로 이 말씀이 우리에게 무한한 희망과 힘을 줍니다.
하느님의 시각으로 세상 사람들을 보게 합니다.
인생무상의 허무에 매몰되지 않고 다시 하느님을 향해 일어서게 합니다.
겸허하게, 연민의 마음을 지니고, 하느님 주시는 희망과 믿음의 힘으로
살아가야 함을 일깨우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를 살게하는 힘입니다. 하느님 말씀의 반석위에 인생
집을 지을 때, 하느님의 말씀과 영혼이 하나될 때 영원한 삶입니다. 깊고
넓은 주님의 시야를 지닙니다. 인간에 대한 한없는 연민과 하느님 향한
끝없는 신뢰와 희망을 지닙니다. 바로 예수님이 그 모범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그 양 한 마리를 찾게 되면, 내가 진실히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바로 이게 예수님의 마음,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하느님께는 하루하루가 소중하듯이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소중합니다.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닙니다.
이런 좋은 면에서 하느님은 완벽주의자입니다.
위정자들이, 지도자들이 이런 하느님의 마음을 닮았으면 좋겠습니다.
모두가, 특히 길 잃은 민초들이 하느님께는 한없는 연민의 대상입니다.
이 모두를 깊이 깨달을 수 있도록 깊고 넓은 마음과 시야를 주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답은 단 하나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래야 인생무상(人生無常)의 허무(虛無)에 함몰(陷沒)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인간에 대해 한없는 겸허(謙虛)와 연민(憐愍)의 마음을,
하느님 향한 한없는 신뢰(信賴)와 희망(希望)을 지니게 됩니다.
여기서 샘솟는 생명이요 기쁨이며 낙관적 삶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하느님의 마음'을
지니고 '하느님의 시야'로 살게 하십니다.
"보라, 우리 하느님이 권능을 떨치며 오신다."(이사40,10참조).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위로는 동행이다
2014년 나해 12월9일 대림 제2주간 화요일
복음: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다.
마태오 18,12-14
< 위로는 동행이다 >
장래가 촉망되는 한 청년이 육군 소위로 임관되어 전방에 근무
중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부하사병의 실수로 수류탄 사고를 당해 한
쪽 팔을 잃게 되었습니다.
병원에 입원 중 대학에 다닐 때 사귀던 여자 친구가 병원으로 병문안을
온데서 그는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몇 번이나 망설이고 기회를
엿보다가 여자 친구에게 “팔이 없는 나를 지금도 좋아하느냐?” 고 떨리는
가슴을 억제하면서 물었습니다.
반신반의 하면서 묻는 질문에 여자 친구는 “나는 너의 팔을 좋아한 것이
아니고 너를 좋아했기 때문에 팔이 있고 없고는 상관하지 않는다.” 는
대답을 얻었을 때 정말로 천지를 다시 얻은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여자
친구는 그 때부터 병원 근방에 방을 얻어놓고 병원엘 드나들면서 간호에
간호를 거듭하였습니다.
그러나 여자 친구의 아버지는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평생을 한 팔이 없는
사람의 팔이 되어야 하는 딸이 마음에 걸렸던 것입니다. 그의 딸에게 그
남자를 포기하고 새 길을 찾을 것을 권유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의 딸은
아버지에게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래서는 안 되지만 만약에 아버지가 한 팔을 잃으신다면 엄마가
아버지를 떠나는 것이 옳다고 생각을 하세요?”
그 말에 아버지도 딸의 뜻을 거역할 수 없어서 그 남자와 사귀는 것을
허락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뒤 그는 제대하여 한 팔이 없는 것만큼 더 큰
노력을 하여 린스와 샴푸를 합친 효과를 내는 하나로를 개발했고 20세부터
80세까지 사용할 수 있는 2080 치약을 개발하고, 영상통화를 가능하게 한
앱을 개발하는 등의 업적을 세워 통신사의 부사장이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조서환 前 ktf부사장, 前 애경산업 이사, 현재 세라젬헬스앤뷰티
대표 조서환씨의 이야기입니다.
[출처: 흐뭇한 실화(조서환)|작성자 새능아래]
조서환시의 아내는 미래의 자신의 남편에게 가장 큰 위로와 힘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어떠한 처지가 되던 ‘함께 있어준다는 믿음’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구약에서 예언된 이름이 바로 ‘임마누엘’, 즉,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라는 것이었음이, 그분이 이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이 세상에 위로를 주러 오시는 분이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메시아의 도래하심을 예언합니다.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 너희의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 예루살렘에게 다정히 말하여라. 이제 복역 기간이 끝나고 죗값이
치러졌으며, 자기의 모든 죄악에 대하여 주님 손에서 갑절의 벌을
받았다고 외쳐라.”
주님을 만난 이들은 그분께서 우리와 같은 처지가 되시어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이끄시기 위해 오셨음을 믿고 위로를 받습니다.
우리 또한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싶으면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 하시며 영원한 생명의 희망을 주셨던 것처럼 해야 합니다.
위로가 되기 위해서는 첫 째 같은 처지가 되어 함께 머물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은 처지가 되시어 우리와 함께
하신 것과 같습니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은 스코틀랜드의 성 앤드류 대학 총장 튤록 부부와
가까이 지냈었습니다. 그런데 튤록 부인이 남편을 잃고 홀로 되었을 때
빅토리아 여왕이 갑자기 방문하였습니다. 놀라서 일어서려는 튤록
부인에게 빅토리아 여왕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어나지 마세요. 나는 오늘 여왕의 신분으로 당신을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남편 잃은 여자가 남편 잃은 여자에게 찾아온 거예요.”
1861년, 빅토리아 여왕의 부군 알버트 공이 별세하여 여왕 또한 과부가
되었던 것입니다. 만약 빅토리아 여왕도 과부가 아니었다면 튤록 부인에게
그만한 위로는 주지 못했을 것입니다. 만약 하느님께서 하늘에만 계시며
우리 처지를 위로하려 하셨다면 큰 위로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가난한
이를 위로하려면 가난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위로에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무작정 같은 처지만 되는 것이 위로는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와 동행하시며 우리를 하늘나라로 이끄셨습니다. 즉, 희망을 주지
않는 위로는 위로가 아닌 것입니다. 함께 동행 하며 이것이 끝이 아님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오래 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어느 축구선수가 교통사고로 더 이상
축구화를 신을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어떤 누구도 평생의 꿈을
포기해야 하는 그를 위로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 간호사가 그에게
기타를 하나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는 기타를 받아들였고 새로운 희망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이후로 사람들은 그를 축구 선수가 아닌 가수 홀리오
이글레시아스로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위로는 함께 하며 이끄는 것입니다. 즉, 하늘나라를 향해
‘동행’하는 것입니다. 마치 토비트서에서 토비야를 이끌어 주었던 가브리엘
천사처럼 우리 또한 누군가의 동행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의
동행으로 오신 그리스도처럼 우리 또한 세상 사람들의 이웃이 되고
위로자가 될 수 있어야겠습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인천] 주님께서는 이 작은이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2014년 나해 12월9일 대림 제2주간 화요일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다.>
+ 마태오 18,12-14
50년생 나무 한 그루의 가치는 얼마나 될까요? 물론 나무의 종류에 따라서
가치가 달라진다고 할 수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50년생 이상의 나무 한
그루의 가치는 자그마치 1억 5천만 원 이상이라고 합니다. 우선 이
나무에서 나오는 산소의 가격이 3천만 원, 물 4천만 원, 그리고 대기오염
제거를 하는데 비는 8천만 원으로 총 1억 5천만 원의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나무 한 그루도 소홀히 볼 수가 없지요? 너무나
쉽게 보는 나무이기에 그 가치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들은 가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부족한 존재이면서
너무나 쉽게 판단하고 또 자기의 기준에만 맞춰서 단죄했던 것은
아니었는가 라는 반성을 해봅니다. 작게 보이는 것 역시 커다란 가치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작은 것도 소홀히 하지 않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는 어떤 물질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내가
만나는 사람에 대해서는 더욱 더 우리가 신경 쓰고 소홀히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사실 그 만남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릅니다.
현재 전 세계 인구는 72억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만나고 있는
한 사람은 72억 명 중의 한 사람인 것입니다. 평생 가도 도저히 만날 수
없는 사람을 만나게 된 귀한 인연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만남을 소홀히
하시겠습니까? 당장 눈앞의 이익만을 생각하면서 그 귀한 인연을 걷어차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됩니다. 내게 이익을 주는 사람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그 대상 전체가 내가 받아들이고 함께
걸어야 할 소중한 파트너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의 바로 앞에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10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를 통해 오늘 복음의
잃어버린 양의 비유에 등장하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 작은이라고 불리는
보잘 것 없는 사람임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작은이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더 많은 사랑을 가지고 어떻게든 찾기 위해
노력하십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따른다고 말하는 우리들은 이런 이들을
어떻게 생각하며, 이들을 위한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을까요?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그들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어떤 행동을 하고 있습니까?
내가 만나는 작은 사람 역시 주님의 사랑을 받는 소중한 존재임을
기억하면서, 좋은 만남, 행복한 만남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하루를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나 역시 주님으로부터 구원의 손길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실을 말하는데 두사람이 필요하다. 한명은 말하는 사람이요 한명은 듣는
사람이다(H.D.도로우).
침묵으로 상대를 압도하라.
오늘은 유머 하나 전해 드립니다.
식사 후 누나와 엄마는 설거지를 하고, 아빠와 아들은 TV를 보는데 갑자기
쨍그랑 소리가 났습니다. 정적 속에서 아빠가 아들에게 말했지요.
“누가 접시를 깼는지 보고 와!”
“그것도 몰라? 엄마잖아.”
“어떻게 아니?”
“엄마가 아무 말도 안 하잖아.”
침묵이 강력한 진실이 될 수도 있네요. 그리고 또 한 가지, 남에 대해서는
관대하고 자기에게는 엄격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서울] 지갑을 잃어버렸다면 일 난 거지요.
지감을 잃어버렸다면 일 난 거지요.
잊어버리는 것과 잃어버리는 것과는 매우 다른 거지만 혼동할 때도
있습니다. 옛날 알던 사람들의 이름은 종종 잊을 때가 있지만 잃어버리면
안 좋지요. 지갑을 어디다 놨는지 잊어버린 건 다행이지만 잃어버리면 일
나는 거고요.
잊어버린 거라도 찾도록 노력해야지 그대로 지나면 아예 잃어버리게
됩니다. 어제가 저의 서품43주년인데 잊고 지내기 일쑤이고 생일도
그렇습니다. 잊은 건 봐줄 수 있지만 사제의 마음이나 직분을 잃으면 안
되지요.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오 18,14)”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청주] 예수님의 셈법|반신부의 복음 묵상
대림2주간 화요일 (마태18,12-14)
2014년 나해 12월9일 대림 제2주간 화요일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다.>
마태오 18,12-14
예수님의 셈법
한 생을 내 마음에 드는 사람만을 만나면서 살 수는 없습니다. 분에
넘치도록 좋은 사람도 있지만 기대와는 다른 사람, 전혀 예기치 않은
사람도 만나게 됩니다. 때로는 골치덩이를 만나서 아파하기도 합니다.
다시는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그 사람이 다 못된 사람은 아닙니다. 그도 누군가의
마음에 들고 사랑받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던
그런 사람들과 뒤섞여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니 마음이 깊고 넓지 않고서는
화병이 나기도 합니다. 마음을 키워서 미운 놈에게 떡 하나 더 주어야
하겠습니다.
되찾은 양의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하다는
것을 일깨워 주십니다. 길을 잃은 것이 자신의 부주의 탓이든, 경솔함의
탓이든, 아니면 남의 탓이든 상관없이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이가 있다면
그를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든,
골치덩이든 그도 누군가의 사랑을 받는 사람입니다. 더더욱 하느님께서
귀하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18,14).하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셈법은 우리의 셈법과 다릅니다. 한번 길을 잃고 헤매는 양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니, 길을 잃었던 자신을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가슴
졸이고 속을 태웁니까. 누군가 한시라도 빨리 나타나 안내해 주기를
소망하지 않습니까?
골치덩이일수록 큰 사랑을 가진 사람이 필요합니다. 보기 싫은 사람일수록
예수님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어려운 문제일수록 주님께서 주시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좌절하고 구원에서 멀어지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길 잃고 방황하는 이를 외면하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는 그를 구원하는 도구로 바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살다 보면 내가 길 잃은 양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니, 지금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이가 바로 나 일수도 있습니다.
가정이든 직장이든 어떤 공동체이든 골치덩이는 있게 마련이고 따라서
서로를 소중히 인정해 주는 노력이 요청되고 있습니다. 외면하고 싶은 그
사람은 나에게 더 큰 사랑을 실천할 기회를 줍니다. 되찾은 양으로
말미암아 누리는 기쁨을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잃은 양을 찾는
마음이 가득한 곳에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때론 내가 바로 길 잃은 양이라는 것을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고 예쁜 놈 매 한 번 더 때리랬다.”는 옛 말을
기억하며 더 큰 사랑의 요구를 일깨웁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너희의 하느님께서 여기에 계시다.”
2014년 나해 12월10일 대림 제2주간 화요일(이사야서 40장 1~11절)
“거친 곳은 평지가 되고, 험한 곳은 평야가 되어라.”(이사 40,4)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다.>
+ 마태오 18,12-14
가끔 신자들과 함께 하면서 ‘신부인 내가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신자분의 차를 탔는데 차를 굉장히 거칠게 운전하는
겁니다. 대우해 달라는 건 아니지만, 몸이 이쪽 저쪽으로 심하게 쏠리면서
이동할 때면, ‘나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구나.. 나를 짐짝처럼 여기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마치 옆에 신부가 없는 것처럼..
행동하신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죠.
그리고 아주 예전에 보좌 신부일 때 청년들이랑 술을 먹은 적이 있습니다.
먹는 중에 예전에 성당을 다녔던 냉담하는 친구가 함께 자리를 했었는데요.
보통은 성당에서 술 따를 때에 신부님을 먼저 주고 다른 사람을 주곤
하는데, 이 친구는 신부보다는 나이가 많은 형님들을 먼저 챙기더라고요.
그걸 처음 본 순간에 문득 ‘신부가 없는 듯한..’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래도 본당 신부인데 내가 있는 듯이 행동해 주면 안 되나..’ 하며 서운한
감정을 느낄 때가 있는데요. 독서를 읽으면서 ‘하느님도 그러한 마음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느님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에 실망하고 서운해 하지 않으실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예를 들면 성당에 들어와서 하느님이 없는 것처럼 기도도 하지 않고,
일주일 만에 만난 분들과만 요란하게 떠드는 겁니다. 또 하느님이 나와
함께 하시지 않는 것처럼 계명을 지키지 않고 불의한 일을 저지르는
겁니다. 또 하느님이 없는 것처럼 삶의 의미와 목적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욕심만 부리며 살아가는 거죠. 그런 사람을 옆에서 보는 하느님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내가 옆에 있는데도 저러네..’ 하면서 실망하고 서운해
하지 않으실까요?
예전에 이런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어떤 공동체 안에 스승이
사랑하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그것 때문에 스승이 사랑하는
제자를 시기했었는데요. 하루는 다른 제자들이 스승에게 ‘왜 저 제자만
사랑하시는 겁니까..’ 하고 물었더니, 사랑하는 제자를 포함해서 제자들에게
이런 일을 시켰다고 합니다. ‘내가 주는 새를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 가지고
가서 죽여 가지고 오너라...’ 다른 제자들은 그 말에 금방 새를 죽여 가지고
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스승이 사랑하는 제자는 한 참 만에 돌아왔는데,
새도 죽이지 못했다고 하죠. 그래서 스승이 왜 새를 죽이지 못했냐고
물어보니까, 제자가 하는 말이 ‘저는 하느님이 아니 계신 곳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는 뉘앙스의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그것이 스승이 제자를
사랑했던 이유인데요.
그 제자와 같이 ‘하느님이 아니 계신 곳이 없다고 느끼는 것..’ 그것이 우리
신앙인들의 삶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하느님이 없는 것처럼 내
맘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함께 하심을 느끼며 살아가는
겁니다. 그럼 말과 행동이 달라질 텐데요. 아마도 하느님께서는 그런
모습을 기뻐하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대림 시기에
우리가 서로에게 상기시킬 일 가운데 하나가 다음과 같은 말씀이겠죠.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라. 유다의 성읍들에게 “너희의 하느님께서 여기에
계시다.” 하고 말하여라.
오늘 하루, 하느님께서 지금 여기에 우리와 함께 하심을 삶으로 보여주고
증거 해 봅시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본당 할머니 가운데 유명한 아이돌 가수 친할머니가 있다.
누군가 그 이야기를 듣고 나에게
‘할머니한테 말해서 손녀를 본당에 초대하면 어떨까요?’ 했는데,
올 일도 없겠지만, 와도 어르신만 계신 본당에..
아마 아무도 모를 거다..^^;
- 인천교구 대부동 성당 김기현 세례자 요한 신부 -
◈ [수도회] 조직의 논리,공동체의 논리
2014년 나해 12월9일 대림 제2주간 화요일
제1독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로하신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40,1-11
복음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12-14
대림 제2주간 화요일(2014년 12월 09일) 조직의 논리, 공동체의 논리
참 춥습니다. 아침 공기가 참 찹니다. 어제는 눈이 와서 참 포근했는데
말입니다. 밖은 차지만 우리 마음만은 차가워지면 안되겠지요. 주님은
오늘 복음에서 따뜻한 마음을 드러내보이십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에
대한 당신의 마음을 표현하십니다. 다수보다는 소수를 위하는 그 마음은
우리 머리로서는 절대로 이해불가능한 것 같기도 합니다.
우린 공동체를 강조합니다. 공동체의 일에 무게 중심을 두고 지냅니다.
옳바른 삶의 방식이죠.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단체와 공동체를 혼동합니다.
단체는 머리 중심으로 가시적인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루어진
조직입니다. 그러나 공동체는 마음을 중심으로 삶 자체의 성장을 위해
존재하는 모임입니다. ...‘조직의 쓴 맛’이라는 말이 있지요. 조직은 한
사람을 죽입니다. 그러나 공동체는 한 사람을 살립니다. 조직과 단체는
무게 중심을 이익과 목적과 성과, 그리고 일에만 둡니다. 그러나 공동체는
무게 중심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두고 그 사람의 성장을 위해 노력합니다.
다른 모든 것은 성장을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한 마리 길 잃은
양 안에서 공동체를 보십니다. 이 사람을 살리면 다른 사람도 함께
살아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논리, 복음의 논리, 우리가 속한 공동체의
논리입니다.
오늘 수도원 공동체 미사는 ‘김예은’ 양을 위해 봉헌했습니다. 지난
12월 2일부터 매일 수도회별로 돌아가며 ‘세월호 희생자와 실종자
304명을 기억하는 미사’가 봉헌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참 공동체로
성장하려면 소외된 소수의 사람, 지금 눈물 흘리는 사람들을 살려야
합니다. 그들이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일 수 있습니다. 세월호를 잊으면
우리는 죽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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