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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나해 12월11일 대림 제2주간 목요일
[수도회] 폭행을 당하고 있는 하늘 나라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신부 -
† 제1독서 이사 41,13-20
† 복음 마태 11,11-15
★ 하느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벌레와 구더기 같은 삶을 이어
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당신께서 여전히 그들의 구원자이심을 자처하시며
당신을 신뢰하라고 말씀하신다. 주님께서는 광야를 못으로, 메마른 땅을
수원지로 만드실 것이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인 세례자 요한에 관하여
말씀하신다. 그보다 더 큰 인물은 없지만,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고 이르신다. 세례자 요한마저도 신약의 시대를
온전히 깨닫지 못하였던 것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일본의 오시다 시게토 수사 신부는 그의 강의와 대담을 담은 저서
『기도하는 모습에 무(無)의 바람이 분다』에서 그리스도인의 삶과 묵상에
더욱 깊이와 간절함이 있어야 한다고 촉구합니다. 현대 사회가 세계를
점점 더 관념과 인간적 기획의 소산으로만 보는 가운데 실재가 아니라
증식하는 욕망의 신기루에 모든 것의 근거를 두려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시대의 현혹에 빠지지 않으려면 더욱더 각고의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무엇보다 ‘존재의 울림’에서 우러나오는 ‘실재의 말’이
여는 본연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실재의 말’을 찾는 것은
진심에 눈을 뜨는 것이자 본연의 존재를 경험하는 것이며, ‘존재에 대한
경외심’을 되찾는 것입니다. 수행이란 이러한 ‘실재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과정입니다. 추상적인 숫자, 형식적인 합법성, 관념의
유희가 지배하는 세계에 안주하여 경제 발전이라는 명목 아래 환경을
파괴하고 마을 공동체를 와해시키는 일을 서슴지 않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손과 발로 일하고, 이웃을 하느님
안에서 진정 살아 있는 사람으로 만나야 합니다. 또한 세계가 신비롭다는
점을 음미하며 ‘존재의 고마움’을 아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오시다 시게토 신부에 따르면, 우리가 존재에 대한 경외심과 진정성을
가질 때 비로소 인간적 지식의 교만과 욕망에 따라 지어낸 세계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지으신 그대로의 참된 세계를 만날 수 있으며, 그럴 때 비로소
우리의 일상은 ‘축복’이 됩니다.
우리는 대림 시기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을 자주 만나고 있습니다. 그가
나아간 광야는 현혹을 떨치는 자리였습니다. 그가 촉구한 회개는 참된
존재를 향해 몸과 마음을 돌이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소중한 대림
시기를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헛된 욕망에서 벗어나 복음의 빛으로 자신의
가치관과 삶의 방향을 비추어 보는 시간으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 매일 미사 -
◈ [서울] 대림 제2주간 목요일
2014년 나해 12월11일 대림 제2주간 목요일
<나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 너의 구원자이다.>
이사야 41,13-20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 마태오 11,11-15
예비 신학생들에 대한 신학교 입학 면접을 하였습니다. 학생들의
가정환경, 가치관, 건강, 사제직에 대한 신념을 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성적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학생들을 선발하는 권한은 신학교에
있기 때문입니다. 32년 전에 저는 어떻게 신학교에 입학을 했는지 정확한
기억은 없습니다. 당시에는 교구 성소국이 체계화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신학교에 가서 입학원서를 받아다가, 고등학교에 가서 작성을 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 기억에 간단한 교리에 대한 시험을 본 것 같고,
산업재해병원(지금의 평화방송 건물)에 가서 건강검진을 받았습니다.
지금은 성소국에서 신학생 입학에 대한 서류 전형과 건강검진을 하고
있습니다. 교구장님의 추천을 받아서 신학교에 입학원서를 내면
신학교에서 심사를 하고, 합격자를 발표하는 과정이 이루어집니다.
고3학생과 일반학생들 합해서 60여명이 면접을 보았고, 신학교 지원은
서울신학교와 인천신학교를 포함해서 30여명이 하게 됩니다. 지원한
학생들 모두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2015년도에 신학생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사제성소가 거의 없는 유럽과 북미 교회를 보았습니다.
사제들이 고령화 되어서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불과 50여년
전만해도 유럽과 북미에는 사제성소가 많았다고 합니다. 1000여명의 예비
신학생들이 있는 한국교회는 하느님의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예비 신학생들의 모임을 더욱
충실히 갖으려고 합니다.
‘도토리 키 재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잘나고, 똑똑하고, 능력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멋진 외모를 가진 사람, 공부를 잘 하는 사람,
부실기업을 다시 회생 시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을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다 고만고만한 능력과
재능으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동물의 세계를 보면 놀라운 능력을 가진
동물들이 많습니다. 덩치가 큰 코끼리나 코뿔소, 사나운 사자나 호랑이,
날쌘 표범과 치타, 하늘을 나는 독수리들이 있습니다. 그런 동물들도
사람들이 보면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생각을 하고,
도구를 사용하여 그런 동물들보다 더 빨리, 더 높이, 더 멀리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하늘나라에서는 세상에서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었어도, 아무리 특출한
능력을 지녔어도, 아무리 멋진 외모를 지녔어도 그것이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도, 저의 외모와 능력에 대해서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보다 키가
좀 더 컸으면 좋겠다고 생각도 했고, 참을성이 더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도 했고, 힘도 더 강했으면 좋겠다고 생각도 했고, 건강했으면 좋겠다고
생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지금 저의 모습으로 저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지금 저의 모습은 다른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저만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 안에서 살면서, 천상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면서, 우리는
세상의 기준과 세상의 잣대로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외적인 모습, 숫자, 성공 등으로 판단을 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판단해야
하는 기준은 세상의 것과는 달라야 합니다. 그것은 얼마나 사랑했는지,
얼마나 봉사했는지, 얼마나 겸손했는지, 얼마나 나누었는지를 가지고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도회] 폭행을 당하고 있는 하늘나라/ 기경호(프란치스코)신부님
2014년 나해 12월11일 대림 제2주간 목요일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이사 41,14)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 마태오 11,11-15
폭행을 당하고 있는 하늘나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 11,11)고 하신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크다.’(11,11) 이는
요한이 작음을 말하려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늘나라’ 자체로
오셨음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그렇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와 계신
하늘나라이시다. 이렇듯 인간 세상에서 제아무리 탁월하고 위대하다
하여도 이미 와 계신 예수님과는 비할 수가 없다. 지금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고 있는 이 삶의 터가 바로 이미 와 계신 하늘나라이다. 따라서
일상의 삶에서 ‘하느님을 차지하는 것’이야말로 참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우리는 이 지름길을 바로 알아차리고 제대로 가고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11,12)고
말씀하신다. 하늘나라가 폭행을 당하고 있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에 대한
성서학자들의 해석은 다양하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와 선을 선포하는
예수님의 적대자들이 백성들로 하여금 하늘나라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막고, 이미 체험한 하늘나라를 빼앗아가려 한다는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다. 하늘나라는 모두에게 거저 주어지는 사랑이요 선이며 생명이요
자유이다. 하느님의 본성이요 그분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이 이기적이고
탐욕적이며 물질적 가치와 권력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걸림돌이 될
뿐이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걸림돌은 자신이다. 자기 자신과의 소외, 자신에 대한
혐오 등은 마음의 어두움을 가져온다. 이 어두움은 삶의 모든 면에 영향을
미친다. 자아분열로 인한 영혼의 어둠 상태는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성전인
내 안의 하늘나라가 폭행당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나 자신이 탐욕에
사로잡혀 다른 이들에게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를 가로막고
빼앗지는 않는지 살펴볼 일이다. 다른 이들 안에 드러나는 은총과 선을
못마땅해 하고 시기하지는 않는지 돌아볼 일이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다음과 같이 권고한다. “누구든지 주님께서
자기 형제 안에서 말씀하시고 이루시는 선을 보고 그 형제를 시기하면,
모든 선을 말씀하시고 이루어 주시는 지극히 높으신 분 자신을 시기하는
것이기에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권고 8,3).
대인관계에서 자신도 모르게 시기하고 못마땅해 하는 바로 이런 마음의
움직임과 그로 인한 행동이 바로 하늘나라를 폭행하는 것이 된다. 언제든
다른 이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다른 이들에게서 드러나는 ‘좋음’,
‘선행’, ‘봉사’, ‘지혜로운 태도’ 등을 보며 함께 기뻐하고 감사할 일이다.
공동체 또한 걸림돌이 되어 하늘나라를 폭행하는 터가 될 수 있다. 우리
각자가 공동체 안에 이미 와 계신 예수님을 삶의 기준으로 삼지 않고
뒷전으로 팽개쳐버릴 때, 하늘나라는 폭행당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공동체가 성령 안에서 서로 일치하고 희생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가 꿈꾸는 이상적인
공동체를 우리 힘으로 추구하기보다는 공동체 안에 이미 현존하는
하늘나라를 보고, 예수님을 통해 주어지고 있는 하느님의 선과 지혜와
자비를 한마음으로 키워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우리 가운데서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는 하늘나라에 대한 폭행의 움직임은
겨울 아침의 차가운 공기를 뚫고 매섭게 도전해온다. 우리 모두 끈질기고
강렬한 도전 앞에서 투명한 시선으로 ‘하늘나라를 살기 위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 열고 듣고 곰곰히 되새기며, 온 마음과 정성과 혼을 다해
살아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많이 생각하고 많이 바라보는 만큼 그분을
닮게 되고 이미 와 있는 하늘나라의 신비가 꿈이 아닌 생생한 삶의
체험이요 선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오늘도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이사 41,14) 하시는 주님께 의탁하며 불의와 무관심과
시기 질투, 탐욕의 끈을 내려놓음으로써 그 좋은 하늘나라를 기쁨 중에
받아들이자!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수도회] 긍정과 격려의 하느님 -믿는대로 되리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나해 12월11일 대림 제2주간 목요일(뉴튼수도원 31일째)
이사41,13-20 마태11,11-15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이사 41,14)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 마태오 11,11-15
긍정과 격려의 하느님 -믿는대로 되리라-
긍정과 격려의 하느님이십니다. 질책과 꾸중보다는 위로와 격려,
비관과 향수(Nostalgia)보다는 낙관과 비전의 하느님이십니다.
얼마 전(12.5일자 복음) 뒤늦게야 강론에 삽입했던 구절이 생각납니다.
"너희가 믿는대로 되어라“(마태9,29ㄴ).
읽는 순간 '믿는대로 되리라.'라는 말마디가 생각나 덧 붙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믿는 대로 됩니다.
얼마나 긍정적인지요. 믿음이 있을 때는 긍정적 낙관적 삶이지만 믿음이
없을 때는 부정적 비관적 삶으로 변질됩니다.
어제는 잔뜩 흐린 날씨에 간혹 진눈개비 내리는 어둡고 무거운
날이었습니다. 성탄 츄리 판매하는 일터에 들렸다가 밝은 얼굴로 손님도
없는 빈 자리를 지키는 수도형제가 고마웠습니다.
'아, 기다림의 가난, 기다림의 기쁨이구나.
비움의 가난 자리가 기쁨으로 충만해 지는 기다림의 대림시기이구나.
무엇을 잘 하는 것(to do)도 좋지만 그냥 제자리에 존재하는 것(to be)
만으로도 만족하고 감사한 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도 자유로워졌습니다.
예수님과 예언자들은 모두 하느님을 닮아 이렇게 평생 긍정과 격려의
사람으로 사셨습니다.
여기 수도형제가 대화중 무심코 한 말도 저에겐 귀한 교훈이었습니다.
"나이든 선배들이 짜증 내거나 화내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선배들이 자주 짜증내고 화내면 정말 싫어요. 너그럽게 웃으며 웬만한
일에도 '괜찮아!' 격려해 주셨으면 정말 좋고 힘이 나겠어요.“
듣는 순간 '웬만하면, 아니 앞으로는 절대로,
무조건 짜증내거나 화내는 일은 없어야 겠다' 다짐했습니다.
'나이들면 입은 닫고 지갑은 열라'는 우스개 말도 생각났습니다.
믿는 대로 됩니다. 좀 부족하고 잘 못 됐어도 '괜찮다' '그럴수 있지!' '그게
현실이지!' 생각하며 너그럽게 받아들임이 백배 좋습니다. 여덟 잘하고,
둘 잘못하면 그냥 둘은 덮어두고 잘하는 면을 집중적으로 부각하고
격려함이 또 백백 낫습니다. 둘을 지적하고 책하면 자존감에 상처만 줄 뿐
잘 교정되지도 않고 관계만 불편해 집니다. 잘하는 여덟가지만 손상을 입고
마음도 위축됩니다. 너 나 할 것 없이 장점과 단점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부족함과 한계를 지닌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하여 분도 성인도 형제들의 약점을 지적하여 고치려하지 말고, '지극한
인내로 참아 견디라' 합니다. 방관이나 무관심이 아니라, 때가 될 때까지
그냥 기다리는, 내버려 두는 무관심의 관심입니다.
이 또한 긍정적 사랑의 발로이자 지혜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마태11,11).
바로 이것이 예수님은 물론 당시 제자들, 그리고 우리의 건강한 확신이자
자부심입니다. 얼마나 긍정적이고 고무적인 격려의 말씀인지요.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지만, 이미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하늘나라를 살고 있는 너희는
아무리 작더라도 그분 세례자 요한 보다 크다'는 속내가 함축된 주님의
대담한, 자존감을 드높여 주는 말씀입니다.
전혀 기죽거나 위축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귀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11,15).
말마디 안에 함축된 주님의 깊은 뜻을 마음의 귀로 들으라는 것입니다.
이사야를 통한 하느님의 말씀은 또 얼마나 고무적인지요.
"나 주님이 너의 하느님, 내가 네 손을 붙잡아 주고 있다.
나는 너에게 말한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이사41,13).
우리의 두려움과 불안을 불식시키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늘 나의 손을 붙잡아 주고 계신 주님이신데 무엇을 두려워합니까?
더불어 생각나는 시편의 고백입니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시편27,1).
하느님의 빛나는 비전의 희망 앞에 저절로 사라지는 두려움과 불안입니다.
주님은 과거를 향한 향수(Nostalgia)가 아닌 미래의 빛나는 약속된
비전으로 우리의 눈길을, 발길을 돌리게 하십니다.
"나는 벌거숭이산들 위에 강물이, 골짜기들 가운데에 샘물이 솟아나게
하리라. 광야를 못으로, 메마른 땅을 수원지로 만들리라.“(이사41,18).
긍정과 비전의 하느님이자 이런 하느님을 닮은 이사야 예언자요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믿는대로, 비전대로 됩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을 닮은 긍정과
격려, 비전의 사람으로 변모시켜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구원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는 내 사람이다."
(이사43,1참조).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살면서 두려움이나 걱정이 생겨난다면
2014년 나해 12월11일 대림 제2주간 목요일
<나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 너의 구원자이다.>
이사야 41,13-20
<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
복음: 마태오 11,11-15
< 살면서 두려움이나 걱정이 생겨난다면 >
어린 여자 아이가 슬픈 표정으로 말합니다.
“아빠가 그러는데 돼지를 키우는 건 돼지고기를 먹기 위해서래.”
이젠 울먹이며 말합니다.
“닭을 키우는 건 닭고기를 먹기 위해서래.”
급기야 울음을 터뜨리며 말합니다.
“그럼 아빠가 날 키우는 건.... ”
누군가 SNS를 통하여 보내온 이야기입니다. 말도 안 돼는 이야기지만
‘아이라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왜냐하면 저도 부모님을
의심해 본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매일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고 하시니
농담처럼 생각하더라도 진짜 섭섭한 일이 벌어지면 ‘내가 진짜 주워온
아이 맞구나’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초등학교 때 학교에서 크레파스를 꼭 사 오라고 했는데 그 가격이
200원이었습니다. 저는 어머니에게 200원을 달라고 매우 졸랐지만
어머니는 매몰차게 빈손으로 보내버리셨습니다. 학교에서 남의 것을 얻어
쓰며 간신히 하루를 버틴 후 집으로 돌아오니 엄청난 음식이 차려져
있었습니다. 그 날이 할머니 기일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차리려면 족히
몇 만 원은 들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아들에게는 200원을 안 주어
학교에서 혼나게 만들고 이미 돌아가셔 음식을 먹지도 못하는 처지가 되신
분에게는 그런 음식상을 차려주는 것을 보니, ‘어머니가 아닌 것이
확실하구나’라는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얼마나 슬펐는지요. 세상에 결국 나밖에 없고 어떤 다리인지는 모르나
진짜 어머니를 찾아 나서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다리가 어디냐고
물어보았는데 어머니는 웃으실 뿐 가르쳐주지 않으셨습니다.
결국은 이분이 참으로 나의 어머니인지를 더 시험해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분이 나에게 하는 행동 하나하나를 관찰해서 과연 어머니가
맞는지 아닌지 결정을 내려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이 나에게
주시는 모든 사랑과 희생은 어머니가 확실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했습니다. 그때 마음이 얼마나 평화로웠는지요. 어머니가 당신은 배고파도
먹지 않고 가져다주시던 참으로 받았던 빵과 우유, 삼겹살을 해 놓으시고
한 첨도 못 드셨던 것들, 또 손이 다 부르트도록 빨래를 하시던 모습 등은
저의 마음을 평화롭게 했습니다. 어머니가 아니면 누구도 그런 희생을
보여줄 수 없다는 것을 아이들도 다 알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이 나의 하느님이시고 아버지가
돼 주심을 믿는다면 더 이상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그분이 참 아버지시라는 것을 믿지 못하기에 두렵고 불안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음의 평화는 그분을 참으로 나의 주님으로 받아들일 때에만
나에게 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구멍이 뚫린 손을
내밀이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인사하시는 것입니다. 죽음을
이기신 분께서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증거를 보여주시기에 그
죽음과 부활을 믿으면 자연적으로 우리 안에 평화가 찾아와 걱정과 근심과
두려움이 일시에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는 사람에게는 미래에 대한 걱정이나 두려움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 자체가 하느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입니다.
걱정과 두려움은 부모님일 잃은 아이들이 험난한 세상 앞에서 느끼는
감정입니다. 이사야는 주님께서 함께 해 주시니 절대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나 주님이 너의 하느님, 내가 네 오른손을 붙잡아 주고 있다. 나는 너에게
말한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다르게 말하면, 만약 두려워한다면 주님께서 우리 손을 잡아주고 계심을
믿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두려움은 삶을 망칩니다. 허우적대기 때문입니다. 물에 빠졌을 때 그
사람을 구하려면 그의 허우적대는 손에 잡히지 말아야합니다. 그 두려움의
힘이 너무나 커서 구하러 간 사람까지도 함께 끌고 들어갈 수 있습니다.
베드로도 물 위를 걷다가 두려움 때문에 물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자신을
걷게 해 주시는 분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는다면 두려움에 걸려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물에 빠졌더라도 그분을 바라보면 동시에 그분이
내미시는 손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왼손도 아니고 오른손을
붙잡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언제나 손을 내밀고 또 손을 잡아주시는
분이 있는데 어떻게 그 손을 보면서 계속 두려움에 떨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 어떤 것에도 두려워하지 말고 어떤 어려움이 와도
걱정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 부모로서 우리와 함께 해 주시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가 할 도리는 걱정근심을 내려놓고 그분을 온전히 믿고 손을
잡는 것뿐입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인천] 이기심과 욕심으로 하늘 나라는 폭행당하고 있습니다.
2014년 나해 12월11일 대림 제2주간 목요일
<나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 너의 구원자이다.>
이사야 41,13-20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 마태오 11,11-15
말을 함부로 하기에 수도생활에 커다란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했던 어떤
수도회의 수도원장은 수도자들에게 거룩한 수도생활을 위한다는 이유로
말을 하지 못하게 했지요. 하지만 영원히 말을 하지 못하게는 할 수 없기에,
2년에 한 번 그것도 딱 두 마디의 말만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 수도원에 입회한 어떤 수도자가 처음으로 2년으로 채우고 두 마디의
말을 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습니다. 그는 원장을 찾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침대, 딱딱하다.”
그리고 수도자는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가 침묵을 지켰습니다. 또 다시
2년의 세월이 흘렀고 두 마디의 말을 할 수 있는 자격을 얻은 수도자는
원장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식사, 맛없다.”
다시 2년의 시간이 지난 뒤, 이 수도자는 자신의 모든 짐을 꾸려 들고 원장
앞에 나타나서 말했습니다.
“나, 간다.”
수도원의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떠나는 그의 등에 대고 수도원장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그럴 줄 알았네. 2년간 참았다가 할 수 있는 귀중한 두 마디의 말을
그대는 모두 불평과 불만을 말하는데 써 버리지 않았나? 그러니 견딜 수가
없지.”
내게 단 두 마디의 말밖에 할 수 없다면 과연 어떤 말을 하겠습니까?
긍정의 말입니까? 부정의 말입니까? 곰곰이 묵상을 해보면 나의 말 중에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말이 많았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말들을
통해 다른 이들에게 아픔과 상처도 많이 주었고, 또 저 스스로 깨닫지
못한채 주었던 아픔과 상처도 상당히 많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주님께는 어떤가요? 죄로 물든 나의 생각과 행동으로 인해 주님께도
커다란 아픔과 상처를 전달하고 있는 우리들인 것입니다. 죄라는 흉측한
무기로 주님을 끊임없이 폭행하고 있는 우리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는 주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하늘 나라가 이미 왔지요. 하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하지요. 세례자 요한의 경고도 또 주님의 말씀도
따르지 않기에 완성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완성을 방해하는 온갖 죄악으로
인해 폭행을 당해 이리 부서지고, 저리 부서지고 있습니다.
이미 왔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늘 나라. 그런데 그 나라는 계속해서
완성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불충함, 주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모습,
또 한 가지는 과거 이스라엘 사람들이 주님의 길을 가는 것을 방해했던
종교지도자들처럼 다른 이들을 잘못된 길로 이끄는 이기심과 욕심으로
하늘 나라는 폭행당하고 있습니다.
내 삶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갖은 폭행을 떠올립니다. 말과 행동, 그리고
마음으로 짓고 있는 죄 등등.... 그러한 폭행들이 사라져 갈 때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는 완성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한 결같이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많은 죄를 덮어
줍니다.(1베드 4,8)
abcdefghijklmnopqrstuvwxyz
다음은 1960년에 ‘내셔널 라이브러리 위크’라는 잡지에 실린 독특한
광고입니다.
“‘abcdefghijklmnopqrstuvwxyz’ 공공 도서관에서는 이 글자들을 배열해서
여러분을 울리고, 웃기고, 사랑하게 하고, 증오하게 하고, 호기심을 갖게
하고, 고민하게 하고, 이해할 수 있게 합니다. 이 스물여섯 개의 작은
기호는 놀라운 일을 합니다. 셰익스피어의 손에서 그것들은 ‘햄릿’이
되었습니다. 마크 트웨인은 그것들을 ‘허클베리핀의 모험’으로 엮었습니다.
제임스 조이스는 그것들을 ‘율리시스’로 짜 넣었습니다. 에드워드 기번은
그것들을 ‘로마제국쇠망사’로 만들었습니다. 존 밀턴은 그것들을 ‘실락원’
으로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글자. 이 글자들의 배열을 통해서 사람에게 큰 힘을
주기도 하고, 아픔을 줄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이 글자들의 배열을 어떻게 하고 있을까요?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를
줄 수 있는 글자들의 배열을 하고 있나요? 최악의 글자 배열이 아닌,
최고의 글자 배열을 할 수 있는 오늘을 만들어 보세요.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서울] 사람들은 세상 안에서만 서로 비교
2014년 나해 12월11일 대림 제2주간 목요일
<나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 너의 구원자이다.>
이사야 41,13-20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 마태오 11,11-15
사람들은 세상 안에서만 서로 비교
(1살, 100살, 1000살):영원무궁은 결국 값은 유한:무한입니다.
(밉다, 곱다, 절세미인):영원세상도 결국 그 값은 유한:무한이고요,
(적다, 많다, 셈불가):영원무량도 결국은 유한:무한일 수밖에요.
그게 바로 이 세상과 영원세상, 육과 영의 관계 공식이라 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세상 안에서만 서로 비교하지 영원과는 비교 안 하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진리위해 목숨 바친 큰 예언자를 영원세상과 비교했네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마태오 11,11)”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청주] 하늘을 차지하라|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나해 12월11일 대림 제2주간 목요일(마태11,11-15)
<나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 너의 구원자이다.>
이사야 41,13-20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 마태오 11,11-15
하늘을 차지하라.
훌륭한 사람은 누구인가? 겸손한 사람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자신의 몫을 다하는 사람, 그리고는 생색내지 않고 하늘을 우러러보는
사람입니다. 구약시대의 마지막 인물로 얘기하는 세례자 요한이 그런
인물입니다. 요한은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는 그의 임무에 있어서 위대한
인물일 뿐 아니라 인간으로서도 위대한 인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 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
(마태11,11)고 선언하였습니다. 당대의 어느 누구 보다도 뛰어난 사람,
과거에 있었던 수많은 하느님의 사람보다 더 뛰어난 인물로 요한을 칭찬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 나라에 있는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마태11,11).
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요한은 이미 앞으로 일어날 일을 말하며 새로운 시대를 살기
시작하였지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 시대가 성취되고 완성되어 거기에
속한 사람은 은총 속에 구원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은 신약의 사람들은 아무리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사람이라도, 구약의
어떠한 위대한 예언자보다 더 높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가
그만큼 크다는 말씀입니다. 나같이 부족한 사람이 구약의 위대한
예언자보다도 더 크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다 주님의 덕분입니다.
주님께 감사드릴 뿐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메세아가 오실 것을 예언하면서 이미 미래를 준비한
인물이기에 구약의 마지막 인물이기도 하지만 새 시대의 인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마태11,12).하신 것을 보면 세례자 요한 때부터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현존하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 예언의 시대는 끝이 나고 완성의
시대가 온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진리를 외치다가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고 목이
베어졌습니다. 폭행을 당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마귀들의 힘을
빌어 일한다고 비난 받기도 하였으며 사람들은 언덕 위에서 밀어 떨어뜨려
죽이려 하였으며 적대자들의 공격을 받아야 했습니다. 요한과 예수님께서
하느님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였으나 결국은 처참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사실들이 하느님 나라가 폭행을 당한 모습입니다.
유혹사화를 보면 사탄은 모든 것을 노립니다. 빵으로, 명예로, 부귀영화를
주겠다는 정치적인 유혹으로 적대자들의 뒤에 숨어서 하느님의 통치권을
빼앗으려 하며 그 자리에 자신의 권력을 구축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어둠의 세력은 오늘도 여전히 있습니다. 생명의 존엄함을 우습게
여기고 성을 상품화하며 물질만능주의의 노예가 되도록 만드는
세상입니다. 진리를 추구하기보다는 개인의 유익을 위해서 거짓을
합리화하는 권력에 물들어 가고 있습니다. 재물 때문에, 명예 때문에
불의를 선택하기도 합니다. 권력의 힘이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고 통제하며
기득권 유지를 위해 폭력을 행사하기도 합니다. 술과 도박 때문에
패가망신을 하고 권력에 집착하다가 제 명대로 못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정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는 세상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세상에 빛이 되어야 합니다. 하늘나라를 방해하는 세력의
유혹에 결코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의 뜻을
선택하는데 주저함이 없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폭력의
힘이 크다 하더라도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라고 분명하게 대답함으로써 하늘나라를 지켜야합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예수님께서“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15,5).
고 하셨습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수도회] 하늘의 사고방식
2014년 나해 12월11일 대림 제2주간 목요일
제1독서
<나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 너의 구원자이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41,13-20
복음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11-15
대림 제2주간 목요일(2014년 12월 11일)
하늘의 사고방식
우리는 하루를 살아도 하늘 나라의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이
나라의 삶을 살려면 그 나라의 사고방식으로 살아야 하지요. 예수님은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와 이 세상의 사고방식은 이처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우리의 염원과는 달리 비교와 경쟁의 현실에 몸받고 있는
우리에겐 늘 고민으로 다가옵니다. 솔직히 말해서, 남보다는 한발 앞서야
속이 풀리고 남보다 조금이라도 위에 있어야 마음이 편합니다.
우리 수도원에는 성품을 받은 성직수사들과 평수사들이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다 수도자들이지요. 하는 일에 약간 차이점이 있긴 합니다.
그런데 신자들이 피정이나 상담을 하러 수도원에 찾아오면 만나는 이들이
대부분 성직수사들입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신부님...’만 찾죠. 인간적으로
보면 수도원에서도 높낮이가 있는 듯 보일 수 있습니다. 우리 평수사님들은
정말 복음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분들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바를 묵묵히(그렇다고 갈등이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수행합니다. 하늘나라의 삶을 마음에 품지 않으면 정말
어려운 삶입니다. 존경합니다.
우리 가운데는 이 땅에서 살면서도 하늘나라를 미리 앞당겨 사는 분들이
많이 숨어 있습니다. 우리가 그 분들 가운데 하나가 되도록 오늘 그런
생각으로 살면 좋겠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다는 아니지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참으로 염원하면 그런 삶을 살 수 있습니다.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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