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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나해 12월13일 토요일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수도회] 거룩한 중심이동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신부 -
† 제1독서 집회 48,1-4.9-11
† 복음 마태 17,10-13
루치아 성녀는 로마 박해 시대에 이탈리아의 시칠리아 섬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생애가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루치아의 순교 사실을 전하는
5세기의 기록에서 부분적으로 전해지고 있다. 신심 깊은 부모의 영향으로
일찍 세례를 받은 그녀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딸의 신변을 염려한
어머니의 주선으로 귀족 청년과 약혼하였다. 그러나 동정을 결심하고 있던
루치아는 한사코 혼사를 거절하였다. 이에 격분한 약혼자의 고발에 따라
그녀는 결국 300년 무렵에 순교하였다. 루치아(Lucia)라는 이름은 ‘빛’
또는 ‘광명’을 뜻하는 라틴 말에서 유래되었다.
★ 집회서는 엘리야 예언자가 받은 놀라운 업적과 영광을 찬양하며 그의
삶과 그 삶의 끝에 대하여 요약하고 있다. 그는 불처럼 일어나 횃불처럼
타오른 인물이었으며, 불 소용돌이 속에서 불 마차에 태워 들어 올려졌다
(제1독서).
★ 율법 학자들을 비롯한 사람들은 메시아가 오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올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바로잡을 엘리야가
이미 왔지만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한 가운데 그를 제멋대로 다루었다고
하신다. 그제야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이 바로 엘리야임을 깨닫는다(복음).
◈ 오늘의 묵상
대림 시기의 중간 시점에 다다른 지금, 가만히 돌이켜 보면 이리저리
바쁘게 보낸 시간이 더 많습니다. 할 일을 마치지 못한 채 한 해의 마지막을
맞이하며 안달하는 마음에, 올해를 미리 마무리하는 수많은 모임에다 성탄
행사와 선물 준비가 더해져 차분한 분위기가 아니라 하루하루 조급하게
보냅니다. 그러다 보니 막상 성탄절이 눈앞이라도, 기쁘고 뿌듯한
마음보다는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앞설 때가 많습니다.
독일의 영성 작가 안드레아 슈바르츠는 대림 시기를 이처럼 허무하게
흘려보내지 않으려면, 이 시기를 성탄절을 위한 요식적인 예비 기간이
아니라 한 해 내내 지속되어야 하는 ‘대림의 삶’을 새로이 의식하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대림의 삶’이란 무엇보다 희망과 그리움의
마음이 타오르는 삶입니다. 대림 시기는 일상 중에 잊고 있었던 이러한
삶의 태도를 다시 정비하는 ‘수련’의 기간입니다. 따라서 대림 시기는
우리가 안주하거나 집착하는 삶에서 벗어나야 함을 깨우쳐 줍니다.
이러한 대림 시기에 우리의 삶은 하느님과 함께하는 ‘모험’이라는 것을
거듭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요셉 성인과 함께 베들레헴으로 길을
떠나 거기서 아기 예수님을 낳으시고, 동방 박사들이 별을 보고 길을
떠났듯이, 우리 또한 마음속에 깊은 그리움과 희망을 담고 주님을 향한
길로 ‘떠남’을 결심하게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에게서 엘리야 예언자가 다시
오리라는 예언이 이루어졌다고 선언하십니다. 세례자 요한은 엘리야
예언자처럼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그들의 마음을 타오르게 하여
모든 것을 바로잡고자 하였습니다. 이제 대림 시기가 열흘 남았습니다.
분주한 일상이지만 우리의 마음을 주님에 대한 그리움과 희망으로 다시
불타오르게 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성탄절을
기쁘게 맞이하는 데 필요한 가장 큰 준비일 것입니다.
- 매일 미사 -
◈ [서울] 대림 제2주간 토요일
2014년 나해 12월13일 토요일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엘리야가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 마태오 17,10-13
어릴 때, 위인전을 읽었습니다. ‘세종 대왕, 을지문덕, 강감찬, 이순신’과
같은 위인입니다. 위인들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백성을 위해서
많은 업적을 남기셨습니다. 나라가 위기에 직면했을 때 헌신적으로 나라를
구하였습니다. 그분들은 자신의 안위와 편리함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겸손하고 성실하며 공명정대하였습니다.
한국교회는 이번에 복자위에 오르신 124위의 복자와 지난 1984년에
성인품에 오르신 103위의 성인이 있습니다.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자랑스럽고, 존경스럽습니다. 많이 배우지 못하신 분도, 나이가 어린 분도,
신분이 비천하신 분도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하여 모든 것을
바치셨습니다. 강완숙 골롬바, 정하상 바오로는 한국 천주교회의 별이
되셨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은 사제직의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신학교에 다닐 때, 교수 신부님들을 보았습니다. 그분들은 뜨거운 열정으로
신학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매일의 삶에서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제
제가 예전의 교수 신부님들과 같은 나이가 되었습니다. 과연 나는
그분들처럼 뜨거운 열정으로 후배들에게 모범을 보이는지 돌아봅니다.
나의 삶이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는지도 돌아봅니다.
오늘 성서는 신앙인들이 따라야 할 ‘이정표’와 같은 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엘리야’입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거짓 예언자와 싸워서
하느님의 영광을 보여 주었습니다. 사렙다 과부에게 기적을 베풀어서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임을 보여 주었습니다.
엘리야는 지금도 신앙 안에서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 힘과 용기를
줍니다.
주님의 성탄을 준비하는 대림시기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준비하였고,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오시는 날은 꿈꾸었습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오시면 하였을 일들을 보여주었습니다. 오늘 나는 어떤
모습으로 주님의 오심을 준비해야 하는지 돌아봅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도회] 거룩한 중심 이동/ 기경호(프란치스코)신부님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 토 마태 17,10-13(14.12.13)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17,12)
거룩한 중심 이동
엘리야는 산 채로 승천해 있다가(2열왕 2,11)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이스라엘에 다시 와서 백성을 화해시키고 열두 부족을 다시 일으켜
세우리라는 믿음이 있었다(말라 3,1. 23 참조). 율법학자들은 이런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하였다(마태 17,10). 그토록 위대한 예언자로
칭송받았던 엘리야 예언자가 먼저 와야 한다고 믿은 것은 현실적인 자기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17,11-12)고 하신다. 곧 두 번째
엘리야인 세례자 요한이 주님의 길을 준비하러 왔는데도 주님의 구원과
사랑을 알아채지 못한 채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함부로 다루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당신도 세례자 요한처럼 사람들에게 고난을 받으실 것이라고
예고하신다(17,12). 엘리야와 세례자 요한 그리고 예수님 모두
사람들에게 배척당하고 고난을 받았다. 엘리야는 횃불처럼 타오르는 불이
되어 주님의 영광과 말씀을 전했다(집회 48,1. 4).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먼저 와서 사람들에게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였다. 말씀이 사람이 되어오신 하느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사랑을 보여주시고 하느님 뜻을 전파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하여 모두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메시아가 오기를 기다렸고 하느님 말씀을 듣고 지키길 열망한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요한과 메시아를 배척하여 죽음으로 내몰아버렸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닌 명예와 권력과 재물을 이용하여 자신의 뜻대로 살면서
그것이 참 행복인양 착각에 빠져 있었다. 따라서 그와는 정반대로 자유와
행복을 위해 모든 것에서 떠나라고 가르치는 예수님의 그 말씀과 처신이
그들에게는 당연히 달가울 리 없었던 것이다.
예언자들이 전한 하느님 말씀은 이기심과 탐욕에 갇혀 있던 그들에게는
듣기 싫은 ‘불편한 진실’이었던 것이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선이 아니라
‘자기가 정해놓은 자기식의 선’이었으며, 자신들이 기다리는 메시아는
모두의 행복과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자기 이익을 채워주고
자기 문제를 해결해주는 분이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하느님의 주도권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을 하느님 위에 두고 하느님을 조정하여 자신이 필요할
때 이용하는 근원적인 착각에 빠져버렸던 것이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자! 우리는 가까이 와 계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이미 들리는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하며, 생의 시초부터 내 안에
생생하게 살아계시는 그분을 소외시킨 채 밖에서 찾곤 한다. 왜 그럴까?
아마도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을 보기보다는 내가 보고 싶은 것만을
보려고 하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내가 듣고 싶은 것만을 들으려 하고, 내
밖의 것을 소유함으로써 행복해진다는 현세 의존적인 사고방식과 삶의
태도 때문일 것이다. 어떻게든 자신을 드러내고 인정받으려 하는 것은
눈앞의 메시아 예수님을 내치고 죽은 엘리야의 과거 영광에 애착하는
어리석은 태도인 것이다. 모든 것을 내 뜻과 자기중심적으로 보고
생각하는데서 주님께로 중심을 이동해야 하리라!
그런 삶에 젖어 있는 이들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 활동을
하는 것이다. 그런 이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은 늘 취하지도 버리지도 못하는
계륵(鷄肋)과 같을 것이 분명하다. 이 틀을 깨는 길은 말씀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성 프란치스코는 말씀을 한귀로 흘려듣는 일이 없었고 들은 것은
부단한 정열로 묵상하였다. 우리도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분과 더불어
진리와 사랑과 선을 거슬러 도전해오는 온갖 고난을 믿음 안에서
이겨내도록 하자. 거룩하신 하느님께로 내 온 존재의 중심을 옮겨
자기중심적인 틀과 행동을 버리고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기쁘게
살아가도록 하자! 대림시기는 중심이동의 시기이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수도회] 슬기로운 성인들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나해 12월13일 토요일(뉴튼수도원 33일째),
우리 연합회의 수호자 성녀 오틸리라 대축일
호세2,16-25 2코린10,17-22 마태25,1-13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엘리야가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 마태오 17,10-13
슬기로운 성인들
성인들이 몹시도 그리운 시대입니다. 성인 축일을 지낼 때 마다 '아, 이렇게
살 수도 있구나!' 생각하며 위로와 힘을 받습니다.
이어 성인의 산 햇수와 제 나이를 비교해 보며 삶을 새로이 점검해 봅니다.
우리 가톨릭의 자랑이자 긍지이며 보배가 성인들입니다.
하느님의 계시다는 가장 생생한 증거이자 우리 믿는 이들에게 영원한
희망을 주는 하느님의 경이(驚異)로운 선물이 성인들입니다.
"아, 신랑이 오신다!“
오늘 복음의 구절을 외치며 중병 중에 임종한 중세기의 독일 성녀
젤뚜르다가 생각납니다. 성인들의 임종어를 대할 때 마다 그분들의 거룩한
삶이 요약된 듯 맑은 기쁨을 맛봅니다.
오늘 대축일을 지내는 우리 연합회의 수호자 오틸리아 성녀나 기념일로
지내는 루치아 성녀 모두 가톨릭 교회 하늘에 영롱하게 빛나는 별 같은
성녀들입니다.
우리의 가톨릭 교회 하늘에 무수히 빛나는 별들 같은 성인들을 대할 때
마음도 부자가 된 듯 행복감을 느낍니다. 성인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복음의 슬기로운 처녀들처럼 슬기로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강론은 '슬기로운 성인들'에 대한 묵상입니다.
첫째, 거룩한 열정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성인들은 한결같이 주님 향한 갈망의 사람들, 그리움의 사람들, 열정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열정의 사랑이 영성생활의 원동력입니다.
열정의 사람들이 아름답습니다.
오늘 복음의 어리석은 처녀들의 영혼 등잔에는 바로 이 열정의 기름이
부족한 반면 슬기로운 처녀들의 영혼 등잔에는 열정의 기름이
가득했습니다.
아무리 젊고 재능 있고 착해도 열정의 불이 꺼지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무의욕, 무절제, 무기력, 무의미의 삶이 뒤따릅니다.
열정에서 샘솟는 희망이요 순수한 마음입니다.
영롱하게 빛을 발하며 고요히 타오르는 대림초가 상징하는 바 열정의
사람들입니다.
오늘 호세아를 통해 계시되는 한결같은 '열정의 하느님'이 감동적입니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 여자를 달래어 광야로 데리고 가서 다정히 말하리라.
나는 너를 영원히 아내로 삼으리라.
정의와 공정으로써 신의와 자비로써 진실로써 너를 아내로 삼으리라.
그러면 네가 주님을 알게 되리라.“(호세2,16.21-22).
여자와 아내가 상징하는바 열정의 사랑이 식어버린, 열정의 불이 꺼져버린
이스라엘 사람들이요 오늘의 우리들입니다.
이런 열정의 하느님을 닮을 때 슬기로운 성인들입니다.
바오로가 그 모범입니다.
"나는 하느님의 열정을 가지고 여러분을 위하여 열정을 다하고 있습니다."
(2코린11,2ㄱ).
하느님은 '열정의 샘'입니다.
이런 하느님을 깊이 사랑할 수록 열정의 사람들이 됩니다.
둘째, 주님 안에서 자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식 자랑이나 내 자랑이나 아내 자랑은 팔불출에 속한다지만 남 판단하며
죄짓는 것보다 백배 낫습니다.
어리석다 조롱은 받은 지얼정 단죄는 받지 않습니다.
이런 자랑보다는 주님 안에서 자랑하는 것이 영성생활에 큰 유익이 됩니다.
진정 영성가들은 '자랑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자랑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자랑하지 않고는 못 견디는 사람들입니다.
성인들로 말하면 모두가 자랑의 사람들입니다. 바로 하느님 자랑입니다.
제 주특기도 하느님 자랑입니다.
이 강론도 결국은 하느님 자랑입니다. 기분 좋고 기쁨을 가득 선사해 주는,
해서 좋고 받아 좋은 하느님 자랑입니다.
'하느님 그대의 자랑이듯, 그대 하느님의 자랑이어라', 바로 하느님이
성인들 각자에 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여 하는, 사심 없는 모든 자랑은 그대로 주님 안에서
자랑하는 것이 됩니다. 바오로의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자랑하려는 자는 주님 안에서 자랑해야 합니다. 인정을 받는 사람은
스스로 자신을 내세우는 자가 아니라 주님께서 내세워 주시는
사람입니다." (2코린10,17-18).
주님은 당신 안에서 자랑하는 자를 인정해 주시며 내세워 주십니다.
셋째, 주님을 기다리며 깨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영롱하게 빛을 발하는 대림촛불이 바로 깨어 주님을 기다리는 영혼들의
기쁨을 상징합니다. 참 기쁨이자 희망은 주님을 기다리는 데 있습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기쁨을 능가할 수 있는 기쁨은 세상 아무데도 없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희망할 때 저절로 깨어 기도하게 되고 기다리게 됩니다.
정적인 기다림이 아니라 역동적 기쁨의 기다림입니다.
영어로 시편을 노래하다 보면 주님을 '기다리다(wait)'는 단어가 참 많이도
나옵니다. 대림시기는 온통 주님 '오시다(come)'에 '기다리다(wait)'는
단어입니다.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는 기다림의 영성, 만남의 영성이 대림의 영성이자
우리의 평생 영성임을 깨닫습니다.
성인들은 대부분 오늘 복음의 슬기로운 처녀들처럼 깨어 주님을 기다리다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듯 거룩한 임종을 맞이한 분들입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오늘 이 시간'이 바로 '그 날 그 시간'입니다. '언제나' 깨어 있어 '오늘 이
시간'에 우리는 우리를 찾아 오시는 주님을 맞이합니다.
이 셋을 지니면 우리도 슬기로운 성인이 됩니다.
뉴튼수도원에도 이렇게 사는 여러분의 수사님들을 보면 힘이 납니다.
우리 모두 성인이 되라 불림 받은 거룩한 인생입니다. 진정 주님을 닮아
하느님이 바라시는 고유의 '참나(眞我)'가 될 때 슬기로운 성인들입니다.
1 열정의 사람들이 되십시오.
2 주님 안에서 자랑하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3 늘 깨어 있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우리 모두 깨어 기다리다 주님을 맞이하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샘솟는 열정의 사랑을 선사하십니다.
"하느님, 저희를 다시 일으켜 주소서. 당신 얼굴을 비추소서. 저희가
구원되리이다." (시편80,4).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 -
◈ [수원] 요셉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성령의 불
2014년 나해 12월13일 대림 제2주간 토요일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엘리야가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 마태오 17,10-13
성령의 불
구세군 118년 역사상 개인으로 최고의 헌금을 내 화제가 된 분이 있습니다.
1120억을 기부한 맥도널드 창업주 부인 조안 크록 여사였습니다. 그녀는
“매년 크리스마스 때면 산타클로스 복장으로 구세군을 위해 모금하던
남편을 대신해 돈을 전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녀의 남편 크록은 원래
종이컵 행상을 하였습니다. 그는 종이컵을 팔아 모은 돈으로 시카고에서
햄버거와 감자튀김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빵이 가장 맛있게 익는
온도와 고기를 가장 부드럽게 익히는 법 등을 꼼꼼하게 메모를 했습니다.
이 연구를 토대로 1955년 맥도널드사를 설립해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시켰습니다. 그 때 나이 52세 때였습니다. 맥도날드는 현재 자산 가치
3백 30조원으로 114개국에 24,500개의 매장을 두고 햄버거를 팔고
있습니다.
중년의 고개를 넘어 창업을 한 그의 성공 비결은 무엇일까요?
맥도널드사의 경영철학은 열정과 경험이라고 합니다. 크록은 직원들에게
“사업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박사학위가 아니라 ‘열정’이다. 음식을 직접
만들고 배달한 사람만이 회사의 중역이 될 수 있다”고 늘 말하곤 했다고
합니다. 능력도 중요하지만 열정이 능력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맥도날드는 밤 11시에 문을 닫지만 점원들은 새벽 2시가 넘어야
퇴근한다고 합니다. 모든 기계를 뜯어서 소독하고 재조립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고객을 감동시키기 위한 정열로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프레드 터너 회장은 창업주 밑에서 빵을 굽던 사람이었고, 에드 렌시
사장은 음식을 나르던 점원이라고 합니다. 공통점은 그들의 일에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독서에서는 엘리아에 대해 짤막하게 소개합니다. 그런데 엘리야라
하면 특이하게 ‘불’이란 단어가 자주 떠오릅니다. 그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제단을 사르고 바알 사제들을 죽였으며, 또한 하늘에 오를 때도 불마차를
타고 올라갔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집회서에서는 이 불처럼 일어선 엘리야가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 굶주림을 불러들이고, 또 자신의 ‘열정’으로 그 수를 감소시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열정으로 이 세상을 회개시키고 정화하여 “주님의
분노가 터지기 전에 그것을 진정시키고,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되돌렸으며, 야곱의 자파들을 재건하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엘리야가 하느님을 맞을 길을 미리 준비하러 보내진 세례자
요한과 비견되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우리 누구나가 이젠 성령의
열정으로 다른 이들의 마음을 정화하여 하느님의 성전이 되도록 준비하는
임무가 주어진 것입니다. 성령 자체가 바로 우리를 태우는 열정이기
때문입니다.
어제 눈이 오는데 특강이 있어서 차를 몰고 나갔습니다. 신호등에 서 있을
때는 창문에 눈이 많이 쌓이더니 달리기 시작하니까 눈이 창문에 내려앉지
못하고 위로 다 날려가 버렸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멈추어서면 정말 많은 유혹과 죄들이 우리를 더 이상
못 움직이게 우리 안에 자리를 잡습니다. 그러나 목표를 위해 열정적으로
달리는 사람은 그런 죄와 무기력이 내려앉을 기회를 주지 않는 것입니다.
잭 런던이라는 미국의 소설가가 이런 글을 썼다고 합니다.
“먼지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재가 되리라! 마르고 썩은 채 숨 막혀
죽기보다는 차라리 찬란하게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완전히 불타
없어지리라. 활기 없이 영원불멸한 행성이 되기보다는 차라리 원자
하나까지 장엄하게 빛나며 타오르는 멋진 별똥별이 되리라.”
그리스도는 세상에 오셔서 마치 미사 때 바쳐지는 향처럼 당신 자신을
성령의 불로 태워 하느님의 분노를 가라앉히시고 이 세상을
구해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사셨다면 우리 또한 촛불처럼 우리
자신을 태워 세상의 빛이 되어야만 인생이 완성되도록 창조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이 있고 그분이 우리 삶의 모델이라고 믿는다면
우리는 지금 그분처럼 불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불에 타면 뜨겁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오시면 하느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분 때문에 하지 않을 수 없을 때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영국 런던에 위치한 메트로폴리탄 교회는 스펄전 목사가 목회하던
교회였습니다. 1866년에 소속 성도가 4천3백66명으로 그 당시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하루는 스펄전 목사가 신도들에게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을 향해서 가슴이 뜨거운 사람, 12명만
있다면 이 런던의 삭막하고 고독한 환경을 기쁨이 충만한 곳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나 4천3백66명이 있다고 할지라도 전부가 다 미지근한
성도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다시 오실 때 믿음을 찾아볼 수가 있겠느냐고 하셨듯이
마지막 날이 가까워질수록 참된 신앙은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엘리야와 같이 성령의 불로 우리 자신을 불살라야 겠습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인천] 겸손한 사람은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2014년 나해 12월13일 대림 제2주간 토요일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엘리야가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 마태오 17,10-13
파울로 코엘료의 ‘아크라 문서’라는 책에서 본 내용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저는 땀 흘려 밭에 물을 대고 농사를 지을
것입니다. 그것이 창조주를 찬양하는 저만의 방식이니까요.”
그때 악마가 다가와 달콤하게 속삭였다. “네가 하는 일은 저 바위를
언덕배기까지 계속 밀고 올라가는 것과 같아. 언덕배기에 올라가면 바위는
다시 언덕 아래로 굴러 내려간다고.”
악마의 말이 옳다고 여긴 사람들이 말했다. “삶이란 똑같은 일을
되풀이하는 게 전부구나.”
악마의 말이 옳지 않다고 여긴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그
바위를 사랑할 겁니다. 꼭대기까지 밀고 올라가는 동안 늘 사랑하는 바위
곁에 있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행복과 불행을 결정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실제로 부정적인 말만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또한 자신의
주장만이 옳다면서 다른 이들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도 상당히 많다는
것을 자주 체험하게 됩니다. 문제는 잘못된 말과 행동을 보면서 스스로를
반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그 말과 행동을 그대로
본받고 또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것이지요.
겸손한 사람은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부족함과
나약함을 알기에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며, 사랑의 마음으로 경청합니다.
그리고 이런 열린 마음이 행복의 길로 우리를 인도해 줄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종교지도자들은 고집이 참 셌던 것 같습니다. 자신들이
세운 율법의 기준을 내세우면서 다른 이는 틀리고, 자기는 맞다는 생각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특히 말라키 예언자를 따르는 바리사이들의 전통은 엘리야가
종말 전에 온다고 주장했었거든요. 그들은 엘리야가 와서 먼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며 모든 것을 예전의
상태로 돌려놓는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이 엘리야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토록 기다렸던 그리스도 일리가 없다는 것이지요. 즉,
‘이자가 그리스도라면, 엘리야가 먼저 왔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흔들리지 않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주장은 실제로 무지한 군중
사이에게 퍼져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했습니다.
사실 예수님 말씀처럼 엘리야는 이미 왔습니다. 물론 성경에 등장하는
엘리야가 그대로 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대신 예수님을 미리 철저하게
준비했던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의 몫을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성경을 철자대로만 믿었기에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불행의 길에
들어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역시 그럴 수 있습니다. 겸손하고 열린 마음을 갖지 못한다면, 또한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토록 원하는 행복의
주인공이 아닌, 제발 내게 없기만을 바라는 불행의 주인공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 앞에서 움츠러 들지 않고 대담하게 뚫고 나갈 결심을 굳힌다면 우리를
가로막는 장애물 대부분은 사라질 것이다(오리슨 스웨트 마든).
야자열매(‘사랑 밭 새벽편지’ 중에서)
여름날 강가의 우거진 숲 속에서 토끼들이 한가롭게 낮잠을 자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풍덩! 하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를 들은 토끼들은 걸음아
날 살려라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를 본 여우는 생각했다.
'저렇게 허겁지겁 도망치는 걸 보니 무서운 짐승이라도 쫓아오고 있나보다.'
여우는 토끼 뒤를 따라 달렸다. 이를 본 노루도 따라서 달렸다. 사슴도,
기린도, 늑대도, 코끼리도. 온갖 동물들이 겁에 질렸다. 한참 달리던
동물들은 이윽고 숨이 차서 잠시 멈춰 섰다. 이때 맨 끝에서 달리던
코끼리가 물었다.
"얘들아, 너희들은 지금 왜 뛰어 갔던 거야?"
"모르겠어, 난 늑대가 뛰기에 따라 뛰고 있어."
"난 기린이 뛰길래.."
그러자 맨 앞에 있던 토끼들이 말했다.
"우리가 자고 있는데 큰 소리를 들었어. 그래서 무서워서 도망쳤지."
몇 마리의 동물들이 토끼들이 자고 있던 현장으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무서운 동물은커녕 강가로 떨어진 야자열매가 보였다.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에 걱정하고, 쓸데없는 것들에 집착하고 있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조금만 더 주위를 둘러보고, 조금만 더 지금의 현실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올바른 판단, 그리고 올바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으니까요.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빛이신 그리스도 성녀 오틸리아 대축일
2014년 나해 12월13일 토요일
제1독서
<엘리야가 다시 오리라.>
▥ 집회서의 말씀입니다. 48,1-4.9-11
복음
<엘리야가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7,10-13
성녀 오틸리아 대축일 (2014년 12월 13일 토요일) 빛이신 그리스도
지난 번 예레미아스 총재 아빠스님이 정기 시찰 차 우리 수도원을
방문하셨습니다. 그렇게 바쁜데도 일부러 시간을 내어 유기서원자,
수련자, 청지원자 등 수련원 소속 형제들 전체와 만나셨습니다. 이
자리에서 아빠스님은 우리 젊은 형제들에게 “우리 오틸리아 연합회의
모또를 아냐고?” 물으셨습니다. 대답을 못하고 있느니까, 우리 수도원
입구에 세워져 있는 수도원 안내판에 적혀 있는 문구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안으로는 수도승, 밖으로는 사도’
(intus monachus, foris apostolus)라는 문구입니다. 이 문장이 우리
연합회의 모토, 정신으로 알고 있는데 잘못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모또는 베네딕도 성인이 하신 말씀도, 우리 오틸리아 연합회을 창설한
암라인 신부님도 하신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이 말을 북유럽의 사도,
혹은 스칸디나비아의 선교사로 존경을 받고 있는 ...베네딕도회원인
안스가리옷 성인이 하신 말씀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아스
아빠스님은 이 정보도 틀린 정보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안스가리옷
성인은 9세기에 사셨던 분입니다. 성인이 865년 선종하신 후 거의 몇
백년이 지난 후 후대의 익명의 저자가 안스가리옷 성인의 일대기를
쎴습니다. 이 책에서 익명의 저자가 쓴 문장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안으로는 수도승, 밖으로는 사도’라는 이 문구는 ‘잊어버려라’, 이 말은
‘버려라’는 말씀도 아주 강하게 하셨습니다. 우리 연합회의 정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오틸리아 연합회의 모또는 ‘Lumen Caecis’, 곧 ‘눈먼 이들에게
빛을!!!’입니다. 사실 수도자의 삶 따로, 사도의 삶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수도원 안에 있으면 수도자요, 수도원 밖에 있으면 사도도
아닙니다. 수도승과 사도(선교사)는 한 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두 가지 삶의 형태에서 갈등을 느낍니다. 또 서로 대립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둘은 오직 빛 안에만이 통합됩니다. 하나가 됩니다.
그리스도라는 유일한 빛 안에서 수도자는 곧 사도입니다. 그리스도의 빛이
없으면 수도승으로도 사도로서도 살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빛에서만이
우리는 참 베네딕도 회원으로 살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대림시기, 빛이신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빛이 진정 필요한 사람은 눈 먼이들입니다. 눈먼 이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무엇보다 먼저 우리 자신임을, 내 자신임을 겸손히
고백합니다. 우리 각자의 내면에 빛 자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시길 또
오셔도 영원히 머무시길 간절히 염원해야 합니다. 또 우리가 모여 있는
이 공동체에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시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살 때만 우리는 복음의 빛을 우리 삶과 활동을
통해서 전달할 수 있습니다. 좁게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바로 이 지역
사회에, 넓게는 교회와 이 세상 전체를 비출 수 있습니다. 수도원은 절대로
외로이 따로 떨어져 있는 섬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는 기도생활도
활동생활도 모두 다른 이들을 위한 것입니다. 전적으로 남을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지하실에나 뒷박 밑에 놓지 않고 등경 위에 얹어 놓아
들어오는 사람들이 그 빛을 보게 합니다.”
복음의 빛 앞에는 어떠한 핑게도 있을 자리가 없습니다. 자원이 없다, 돈이
없다, 사람이 없다, 여력이 없다는 핑게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우리의
미약한 정성, 우리의 작은 노력, 우리의 가냘픈 기도만 있으면, 다른 모든
것은 빛이신 그분께서 마련해 주십니다. 사실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또
공동체적으로 우리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은 그분이 채워주신다는 진리를
매일 체험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인간적 한계를 넘어 끊임없이 하느님께 대한 절대적 신뢰로 나아갑시다.
빛이신 그리스도께로 나아갑시다.
“빛이신 주 예수님, 어서 오소서. 당신 빛으로 저희와 세상을 밝게
비추소서.”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 -
◈ [청주]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나해 12월13일 토요일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엘리야가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 마태오 17,10-13
오시기로 되어있는 분
유다인들은 메시아가 오기에 앞서 그가 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전령이요 선구자로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마지막
예언서인 말라기서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말라3,23-24). 이 본문은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들의 신앙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엘리야가 ‘이미 왔는데도’그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름은 다르지만
세례자 요한이 바로 메시아에 앞서 오게 되어 있는 엘리야인데 그를 몰라
본 것입니다.
루카복음 1장16절은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할 것이다. 그는 또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의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여,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하고 천사의 이야기를 전함으로써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예고했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요한1,23)라고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그는 마침내 하느님나라를 위해 백성들을 준비시킨 마지막 때의
예언자로서 엘리야의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시대의
표징을 알아보지 못하고 요한을 제멋대로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헤로데는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음에도 헤로디아의 딸에게 헛된
맹세를 하여 결국 요한의 목을 베도록 명하였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그의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다”(마르6,26). 그러나 헤로데만이
그를 죽였는가? 생각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잘못은 모두에게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요한의 외침을 따르기를 거부하고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헤로디아는 헤로데 동생인 필리포스의 아내 입니다. 그러나 헤로데와
혼인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러 차례 말했습니다. 이것을 알고 있는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 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고
했나봅니다. 사실 헤로디아의 마음이 우리 안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길을 거부하고 내 마음대로 하려는 욕심과 똥고집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마음을 바꾸지 못한다면 우리도 요한을 죽인 공범자가 되고
맙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시대의 징표를 읽고 마음을 하느님께로 돌려야
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언자도 메시아도 결코 만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도 고난을 받을 것이다” (마태17,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언자 엘리야의 역할을 한 요한을 알아보지
못했고 결국 메시아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를 죽인
그들이 결국은 예수님까지도 십자가에 못 박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사악하기보다도 자기 안에 갇힌 무지의 탓이 크다 할 것입니다.
물론 요한의 죽음이 단순히 한 왕의 방자한 변덕과 경솔한 맹세의 결과가
아니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요한12,24)
메시아적인 구원의 죽음이었지만 이것을 받아들이기 까지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제자들이 반드시 배워야 할 삶이었습니다.
따라서 죽음을 통해 새로운 생명이 온다는 진리를 알면, 주님을 따름에
있어 고통의 길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막연히 내가 그려놓은
주님을 기다리지 말고 주님께서 어떤 모습으로 오시든지 제대로 알아볼 수
있도록 깨어있어야 하겠습니다. “오, 주님! 저는 당신을 몰랐나이다. 다만
지상의 일들을 알고 맛보려 했나이다. 주 하느님! 모든 것을 바꾸어 주시어
당신 안에 편히 쉬게 하소서”(십자가의 성 요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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