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2014년 나해 12월17일 대림 제3주간 수요일
[수도회] 사랑으로 써 가는 내인생의 족보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신부 -
† 제1독서 창세 49,1-2.8-10
† 복음 마태 21,28-32
★ 야곱은 숨을 거두기 전에 열두 아들을 불러 그들 각자가 겪을 일을 말해
준다. 특히 유다에게는 훗날 왕권을 차지할 후손이 생길 것이라고 알려
준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다(제1독서).
★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로 마태오 복음이 시작된다. 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가 십사 대이고, 다윗부터 바빌론 유배까지가 십사 대이며,
바빌론 유배부터 예수 그리스도까지가 십사 대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추위가 심할수록 우리의 몸을 녹일 온기가 더 그립습니다. 눈이라도 내려
냉랭한 마음에 생기를 얻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겨울에는 러시아의
작가들이 자주 떠오릅니다. ‘닥터 지바고’가 썰매로 눈보라 속을 달리던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하면서 작가 파스테르나크의 ‘집에 아무도 없으리’
라는 시 한 구절을 음미합니다. “집에 아무도 없으리/ 땅거미만 머물 뿐
커튼 걷힌/ 창으로 투명하게 내비치는/ 어느 겨울날.”
이처럼 우울하고 쥐 죽은 듯한 적막에 휩싸인 겨울 한가운데 우리의
마음이, 내리는 눈을 보며 깨어날 것임을 그는 ‘눈이 온다’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눈이 온다, 눈이 온다/ 눈이 오자 모든 게 설렌다/
새하얘진 행인도/ 깜짝 놀란 초목도/ 교차로의 모퉁이도.”
설레는 마음은 우리의 눈을 뜨게 합니다. 그리고 미래의 약속을, 약속의
도달을 믿고 보게 합니다. 파스테르나크가 ‘집에 아무도 없으리’라는
시에서 노래하듯이, 아무도 없는 쓸쓸한 집에 반가운 손님이 오신 것을
문득 알아차리게 합니다. “그런데 문득 두터운 커튼이/ 홀연히 떨리면서/
정적을 헤아리는 발걸음으로/ 마치 미래처럼, 너는 들어오리.//
너는 문 앞에 나타나리/ 어느 흰옷 차림으로, 다소곳이/
눈송이로 짠 듯한 옷감으로/ 지은 옷을 입고서.”
대림 시기의 둘째 부분을 시작하는 오늘 전례에서 우리는 마태오 복음의
도입부인 예수님의 족보를 들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첫 구절에 하느님께서 베푸신 구원사의
업적과 미래의 구원 약속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이 구원의 역사에는
인간의 생각이나 계획을 넘어서는 하느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대림 시기를 지내며 성탄에 도달하는 구원을 미리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늘 깨어 있는 정신과 설레는 마음을 가진 이만이, 그리움을
아는 이만이 구원의 약속을 믿고 하느님의 섭리를 깨달을 것입니다.
- 매일 미사 -
◈ [서울] 대림 제3주간 수요일
2014년 나해 12월17일 대림 제3주간 수요일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 마태오 1,1-17
교구청에는 저와 같은 성을 지닌 분들이 두 분 더 있습니다. 저는 한양 조
씨입니다. 한양 조 씨는 나라 趙를 사용합니다. 다른 두 분은 무리 曺를
사용하신다고 합니다. 이번에 물의를 일으킨 모 항공사의 부사장은 저와
같은 나라 조를 사용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두 분께서는 자신들과는
다른 성이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우리는 같은 민족, 같은 성 씨를 가진
사람들에 대해서 동질감을 느끼곤 합니다. 특히 상대방이 커다란 업적을
세우면 같이 기뻐하게 됩니다. 그런가하면 상대방이 큰 잘못을 하면 같은
성 씨를 가진 것에 대해서 속상해 하기도 합니다. 사람은, 혼자 살기 어렵기
때문에 ‘학연, 지연, 혈연’ 과 같은 것에 의지하곤 합니다. 지금은 도시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살기 때문에 덜하지만 예전에는 이런 것들이 삶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한 자매님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자매님은 아직 신앙을 갖지
않았던 남편이 있었습니다. 남편은 가정에 충실했고, 완고한
성격이었습니다. 양심에 따라서 살기 때문에 굳이 신앙을 갖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분이었습니다. 남편은 아내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부모님께 효도를 잘 하였고, 아이들도 잘 키웠기 때문에 결혼기념일에
선물로 성당에 함께 가기로 하였습니다. 남편의 말을 들은 아내는 너무
기뻤고, 그날 저녁 미사를 남편과 함께 갔습니다. 그런데 그날 복음은 오늘
우리가 들었던 ‘예수님의 족보’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잘 모르는 이름이
지루하게 반복되었기 때문에 아내는 내심 걱정을 하였습니다. 모처럼
남편과 함께 성당에 왔는데 하필이면 지루한 족보이야기 나왔기
때문입니다. 미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아내는 남편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의 이야기는 전혀 뜻밖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상당히 뼈대 있는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한번 믿어
보겠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남편도 나름 뼈대 있는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자매님께서 신앙 안에서 충실하게 사셨기 때문에 남편은 지루한 족보의
이야기도 의미 있게 받아들인 것 같습니다. 함석헌 선생님도 ‘그 한사람’
이라는 글을 우리에게 남겨 주었습니다. “만리길 떠나는 날 그 한 사람이
있어서 마음이 든든하다면 좋겠습니다. 불의가 가득한 이 세상에 그 한
사람이 있기 때문에 희망을 가질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이제 곧 성탄입니다. 우리가 이웃들에게 ‘그 한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이웃들이 우리의 그런 모습을 보고, 주님을 믿고
싶다고 말하면 좋겠습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도회] 생명의 하느님 -생명 예찬-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나해 12월17일 대림 제3주간 수요일(뉴튼수도원 37일째),
창세49,1-2.8-10 마태1,1-17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 마태오 1,1-17
생명의 하느님 -생명 예찬-
생명의 하느님입니다.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입니다.
하여 많은 사람들이 사람이 만든 인조(人造) 성탄츄리가 아닌 하느님이
땅에다 8-10년 키우신 성탄츄리나무를 사다가 성탄츄리를 만듭니다.
아주 잘생긴 성탄츄리나무가 버려져 있기에 물었습니다.
"왜 이 나무 베어 놓고 안 가져 갑니까?“
"바로 꼭대기 정상에 별을 달아야 하는데, 꼭대기 머리 부분이 꺾여 나갔기
때문입니다.“
한 자매가 말하면서 카톡의 사진을 보여 줬습니다. 작년 집에 만들었던
성탄츄리 장식인데 이등변 삼각형의 나무꼴 꼭대기에 큰 별이 환히 방안을
비추고 있었습니다.
"아, 탄생하실 그리스도의 빛이군요!“
탄생하실 '생명의 빛'을 상징하는 그리스도의 별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나무 꼭대기에 별을 달기에
그 좋은 나무도 꼭대기 머리 부분이 잘려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게 됩니다.
'생명의 빛'의 탄생을 갈망하는 인류의 염원이 녹아 있는
성탄츄리나무입니다. 성탄츄리나무를 사러오는 가족의 평화로운 모습을
보는 것도 즐겁습니다.
며칠 전에도 한 가족에 눈길이 머물렀습니다.
젊은 40대 부부의 가족같은데 한 아기는 어머니 품 안에 있고 올망졸망
5섯 아이들이 부모 주변을 따르며 나무를 고르고 있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습니다. 새삼 생명의 풍요로움, 하느님의 축복을 느꼈습니다.
어제 수도원 묘지에서의 체험도 잊지 못합니다.
봄 날씨처럼 화창한 파란 하늘의 겨울 날씨였습니다.
나란히 하늘을 향해 있는 묘비들이 흡사 스물네시간 하느님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들이었습니다. 낮에는 푸른 하늘이 상징하는 하느님의 얼굴을
뵙고 밤에는 초롱초롱 빛나는 별들이 상징하는 하느님의 천사들을 보며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여기 죽은 수도형제들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새삼 하느님께는 모두가 살아있음을 깨닫습니다.
생명의 하느님입니다. 살아있는 모두가 하느님께 속해 있는 소중한
생명체들입니다. 살아있음 자체의 체험이 하느님 체험입니다.
어제 읽은 4세기 경 미사경문에 나오는 한 대목도 마음에 새롭게 와
닿았습니다.
"We entreat you, make truly alive!"(주님, 당신께 간청하오니, 우리를
'참으로 살아있게' 해주십시오!).
사람은 누구나 내면 깊이에는 '참으로 살아있고 싶은(to be truly alive)'
깊은 갈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 살아있음에 대한 감격을 실감하고
생명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이들을 얼마나 될는지요.
옛 사막 수도자들도 이 살아있음의 축복을 실감하며
살기위해 하느님을 찾아 사막에 갔고 끊임없이 기도했습니다.
오늘 복음을 예수님의 기나긴 족보를 대하면서 생명의 하느님을 만납니다.
그대로 '생명의 강'을 연상시키는 족보입니다.
무려 '낳고' '낳고'로 연속되는 단어를 헤아려 보니 30회 나옵니다.
'생명의 찬가'처럼 느껴지는 족보입니다. 그러다 꼭대기의 정상에 찬란하게
빛나는 '생명의 별', 예수 그리스도로 '생명의 족보'는 끝납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마태1,16).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하느님의 수고가 대단합니다.
'낳다'에서 '태어나시다'로 바뀐 말마디의 느낌도 각별합니다.
하느님의 '생명 사랑'과 한없는 인내의 기다림을 감지합니다.
하느님께도 구원에 이르는 첩경의 길은 없음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은 온갖 부족한 생명들도 쓸모없다 버리지 않고 모두 생명의
족보에, 대열에 합류시킵니다.
의인들이 족보가, 거룩한 이들의 족보가 아니라 의인들과 죄인들, 경건한
이들과 불경한 이들, 잘난 이들과 못난 이들 등 모든 생명들을 당신 구원
역사에 합류시키는 하느님이십니다.
특히 윤리적으로나 출신성분상으로나 도저히 용납하기 힘든 네 기구한
여인들-타마르, 라합, 룻, 우리야의 아내 바세빠-의 등장도 이채롭습니다.
하느님 생명의 품, 자비의 품이 얼마나 넓은지 깨닫습니다.
마지막 절정의 여인은 마리아입니다. 인간적 눈으로 볼 때 마리아 역시
위의 네 여인들처럼 기구하기 짝이 없었던 분이었습니다.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 나셨다.“
이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셨으니,
바로 이것이 복음 중의 복음이요 하느님의 구원의 신비입니다.
마침내 야곱이 아들 유다에게 훗날 왕권을 차지할 후손이 생길 것이라는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
"왕의 지팡이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지휘봉이 다리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 하리라. 참으로 그 자리를 차지할
분이 와서 만백성이 그에게 순종하게 되리라."(창세49,10).
옛 번역이 이해가 쉽습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역시 당신 생명의 족보에
편입된 영예로운 신분임을 새롭게 확인시키십니다.
"보라, 모든 민족들의 보화가 들어오리니, 주님의 집은 영광으로 가득
차리라."(하까2,7참조).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신부 -
◈ [수도회] 사랑으로 써 가는 내 인생의 족보/
기경호(프란치스코)신부님
2014년 나해 12월17일 대림 제3주간 수요일
마태 1,1-17
“왕홀이 유다에게서 떠나지 않으리라.”(창세 49,10)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 마태오 1,1-17
사랑으로 써 가는 내 인생의 족보
오늘 창세기 말씀에서는 야곱이 유다에게 내린 축복을 통해서 만백성의
왕이 되실 분이 유다 가문에서 태어날 것을 알려준다. 그리고 복음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는 족보의 역사를 거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려준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1,1)라는 첫 문장을 통하여 예수가 아브라함의
후예요 다윗의 후예인 메시아임을 강조한다. 이 족보는 선조들에 관한
것으로서 예수님께서는 선택된 민족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이스라엘의
역사가 예수님에게서 그 의미를 얻고 정점에 이르게 됨을 말해준다.
이 족보를 보면 비정상적으로 아들을 낳은 타마르, 라합, 롯, 우리야의
아내가 예수님의 선조로 나오며 타마르 외에는 모두 이방인이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조건을 뛰어넘어 자유로이 개입하시며 누구나
구원하신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인위적으로 14대씩 삼대로 나누어
배치함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위한 구원 역사를 당신 뜻대로
이끄시며, 선택된 민족의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정점에 이른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오늘 복음의 족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사랑으로 인간에게 다가오시어 개입하시는 하느님의 구원계획이다.
우리는 다소 생경하고 지루한 듯 느껴지는 이 긴 족보를 통하여 무엇을
되새길 것인가? 이 족보가 말해주는 첫째가는 중요한 사실은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당신을 찾기에 앞서 우리에게 사랑으로 다가오시고 당신이
누구이신지 알려주시고 조건 없는 사랑으로 초대하셨다는 점이다. 이
족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누가 누구의 선조이고 후손인가 하는 역사적
사실(史實)이 아니라 인생 여정은 바로 구원의 역사요 그 역사의 매순간
하느님 친히 사랑으로 개입하신다는 사실이다. 그렇다! 우리 인생은
역사다. 그 역사는 사랑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사랑의 하느님
때문에 의미 있으며, 사랑을 향해가는 사랑의 역사이다. 바로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내 인생의 지나온 발자욱을 돌아보며 매순간 사랑으로
개입하셨던 하느님께 깊이 감사드리자! 그리고 날마다 숨 쉬는 순간마다
사랑으로 함께해주시는 그분의 손길을 생생하게 의식하며 살아가자!
어디 그뿐인가! 족보에 새겨진 사랑의 역사, 구원의 역사는 하느님께서
주관하시기에 우리의 한계와 영혼의 어두움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구원의 역사이다. 족보에 포함되어 있는 비정상적인 관계 속에서
후손을 낳은 여인들, 선택받지 못한 외국인들, 가문을 더럽힌 이들을 보라!
인간의 역사는 인간의 죄로 기우는 경향으로 인하여 늘 더럽혀진 역사요
어둠의 역사이다. 그러나 그 역사를 품어 재창조를 이루어내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의 역사이다. 이 족보는 '의미 없는 조상 명부'가 아니라
모두를 사랑으로 품고도 남음이 있는 하느님의 '또 다른 사랑의 구유'임을
깊이 새기도록 하자!
나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동료 인간들의 죄스런 모습, 과거의 상처, 불의,
비참한 삶의 현실을 품어 사랑으로 토해내는 삶을 살아왔는가? 내
인생사가 바로 하느님 사랑의 역사에 일치하는 구원의 역사였다고 할 수
있는가? 이제부터라도 내 인생사 한걸음 한걸음이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나의 신앙고백이요 하느님의 사랑의 역사, 구원의 족보가 되어야 하리라!
아울러 더불어 살아가는 형제 자매들을 바라보며 그들의 삶의 여정에 함께
하신 하느님을 보고 감사하여야 할 것이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내가 축복하면 그분이 축복하신다
2014년 나해 12월17일 대림 제3주간 수요일
<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
복음: 마태오 1,1-17
< 내가 축복하면 그분이 축복하신다 >
앤소니 드 맬로 신부님의 글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가게 주인이 자기 스승에게 찾아가서는 맞은편에 큰 연쇄점이 생겨서
자기는 망하게 생겼다고 했습니다. 자기 가정이 10년 동안 지켜 온 가게를
잃어버린다면 자기는 다른 기술도 없으니 파멸할 것이라고 걱정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그 가게 지인의 스승은 이렇게 충고를 했습니다.
“그 연쇄점 주인을 두려워한다면, 그를 증오하게 될 것이고, 그 증오가
자네가 파멸하는 원인이 될 걸세.”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매일 아침 가게 앞에 나가서 자네 가게를 축복하고, 돌아서서 길 건너
연쇄점도 축복하게.”
“아니, 경쟁자이자 파괴자를 축복하라고요?”
“자네가 그에게 축복하는 것은 무엇이든 자네에게 좋게 되돌아올 걸세.
자네가 그에게 바라는 악은 무엇이든 자네를 멸망시킬 걸세.”
여섯 달 후에 그 식료품 가게 주인은 자기 스승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걱정과 근심만 했다면 정말로 가게를 닫아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선생님 말씀대로 했더니 지금은 그 연쇄점까지 맡고 있으며 어느 때보다도
경기가 좋습니다.”
축복을 받는 방법은 축복하는 삶을 사는 것밖에 없습니다. 주는 대로 받는
것이 이치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야곱은 자신의 열두 아들들을 불러 축복해줍니다. 특히
오늘 부분은 유다에 대한 축복입니다. 유다는 모든 형제들 중 가장 큰
축복을 받습니다. 유다는 어린 사자와 같아서 누구도 감히 그를 건드리지
못하고 다른 형제들도 그를 찬양하며 유다의 지파에서 모든 민족들을
다스릴 왕이 날 것임이 예언됩니다. 메시아의 탄생에 대한 예언인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는 도대체 어떤 일을 했기에 다른 형제들보다도 훨씬 큰
축복을 받게 되는 것일까요?
유다는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동생 요셉은 유다를 비롯한 형들에 의해 이집트로 팔려 와서
우여곡절 끝이 이집트 재상이 됩니다. 몇 년 동안 지속되는 흉년 때문에
야곱은 유다를 비롯한 그의 아들들을 이집트로 보냅니다. 요셉은 그들을
알아보지만 그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요셉은 그동안에 쌓인 원망을 풀어내기 위해 자신의 형제들을
괴롭힙니다. 처음엔 그의 유일한 모계 혈육인 막내 벤야민을 데려오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벤야민의 부대에 자신의 은잔을 넣습니다. 그리고
훔쳐가는 것으로 모함하여 벤야민을 종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그때 유다가
나서서 막네 벤야민 대신 자신이 종이 되겠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벤야민의 유일한 혈육인 요셉이 짐승의 밥이 되어 죽은 줄 알고 있는데,
벤아민까지 이집트의 종이 되어버리면 그 충격으로 더 이상 살 수 없음을
잘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유다만큼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린 형제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헤아리는 마음이 곧 형제를 위해
희생하는 행동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이것을 보자 요셉도 원한이 풀려
오열하며 자신이 동생임을 밝히고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옵니다. 이렇게
희생으로 아버지와 자녀들, 또 형제들 사이를 이어준 유다에게 아버지가
그만큼 큰 축복을 주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마음은 당신의 모습대로 만든 인간들이 구원을 받지 못하고 모두
지옥으로 가는 것을 보고 찢어질듯 아프셨습니다. 그런데 당신의
아드님께서 인간들 대신 그 죗값을 치르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부활의 영광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축복을 많이 받는 길은 아주
단순합니다. 그 축복을 주실 수 있는 분의 마음에 드는 길입니다. 그분이
기뻐하는 일만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가장 기뻐하는 일은 영혼이
구원되는 것입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 바로 축복을 주는 일입니다.
이웃을 축복할 줄 모르는 사람은 아버지의 마음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느님께 가장 축복을 받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목숨을 걸고 전하는 이들인 것입니다. 많이 준만큼 많이 받는 것이
축복입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인천] 하느님께 온전히 묻혀 있는 삶을
2014년 나해 12월17일 대림 제3주간 수요일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 마태오 1,1-17
벌써 10년 전이네요. 제가 갑곶성지에 있을 때가 생각납니다. 성지 전담
신부로 처음 갔었기 때문에 그때에는 저 혼자 모든 것을 다해야 하는
상황이었지요. 어수선한 성지의 모습, 그래서 할 일이 너무나도 많은
성지였기 때문에 항상 바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떤
분께서 성지가 예뻤으면 좋겠다고 하면서 벚나무 20그루를 기증하셨습니다.
감사히 벚나무를 받았고, 저는 그 벚나무를 심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바쁘다보니 벚나무 심을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다행히 생명력이 워낙
좋다고 말씀하셔서 저는 우선 급한 일부터 먼저 하고서 벚나무를 심을
계획을 세웠지요.
하지만 문제가 생겼습니다. 하루 이틀 뒤로 미루다보니 벚나무를 심어야
한다는 것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살짝만 묻어 두고 방치했던 것이지요.
이런 상태로 일주일이 지난 뒤에 벚나무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일을
하다가 우연히 벚나무를 봤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글쎄 4~5그루가 말라
비틀어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아주 늦지 않아서 땅을 파고
묻어서 모든 나무를 살렸지만 조금만 늦었더라면 기증하신 분의 성의를
저버릴 수밖에 없었지요.
나무는 땅에 묻혀 있어야 살 수 있습니다. 그것도 살짝 묻혀 있는 것이
아니라,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땅을 파고 묻혀 있어야 하며 동시에 적당한
물도 필요합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봄에 아름다운 벚꽃을 피울 수
없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우리 역시 하느님께 온전히 묻혀 있어야 함을
묵상하게 됩니다. 겉으로만 신앙인인 것처럼 살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굳건한 믿음으로 어떤 위협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우리가 되어야
하느님의 뜻에 맞게 이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족보가 등장합니다. 아담으로부터 시작하는
루카 복음의 족보와는 다르게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는 족보를 보면서
다음 한 가지를 깨닫게 됩니다. 즉, 하느님 아버지께 철저하게 매달렸던
사람은 어렵고 힘든 삶 안에서도 기쁨과 행복을 간직할 수 있었고, 고통과
시련도 거뜬하게 이겨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믿음을 저버리고 세상의 기준으로만 살았던 사람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을 수도 없었고 실제의 삶에서도 힘들게 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까지 이르는 족보를 보면서 우리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역사의 사실을 통해 하느님께 충실한 사람만이
참 행복을 누렸음을 떠올리면서 우리도 하느님께 온전히 묻혀 있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역사 안에서 계속해서 비추고 있는 하느님의 축복과 행복을 과연
우리는 누리고 있을까요? 혹시 온갖 불평과 불만으로 하느님께 점점
멀어져서 축복과 행복을 남의 것으로만 만들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사랑이란 하나를 주고 하나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둘을 주고 하나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아홉을 주고도 미처 주지 못한 하나를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브라운)
어떤 사람이 작은 나무를 심었는데 나무가 자라지 않자 빨리 자라게 하려고
나무에 도르래를 설치했다. 그가 힘을 가하자 이제 막 흙 속에 자리를 잡고
나무에 영양분을 공급했던 뿌리가 뽑혀 올라와 나무는 시들어 죽고 말았다.
나무는 서서히 성장해야 한다. 모든 것은 한 그루 나무와 같다. 크건 작건
꽃들이 여기저기 피어 있는 아름다운 정원을 갖고자 하는 이는 허리를
굽혀서 땅을 파야만 한다. 소망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서 극히
적은 까닭에 우리가 원하는 가치 있는 것은 무엇이건 일함으로써 얻어야
한다.
당신이 어떤 것을 추구하는가 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비밀이
여기 쉬고 있기에 당신은 끊임없이 흙을 파야 한다. 결실이나 아름다운
장미를 얻기 위하여....
너무나 성급한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빠른 결과를 원하는 우리의 성급함에
이룰 수 있는 것도 놓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꾸준한 우리 그리고
성실한 우리가 될 때에 하느님의 커다란 섭리와 은총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청주]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나해 12월17일 대림 제3주간 수요일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 마태오 1,1-17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집안에 있는 족보를 보면 여자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출가외인’이라는 생각이 담겨있나 봅니다.
그리고는 나이에 상관없이 아저씨뻘이니 형님뻘이니 하며 ‘촌수’를 따지곤
했습니다. 누가 출세하면 그것을 가문의 영광으로 생각하며 호들갑을 떨고
먼 친척도 그때는 아주 가까운 것처럼 느끼며 자랑했습니다. 족보에는
좋은 것은 크게 드러내고 나쁜 것은 감추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미 그리스도의 족보에 여인이 등장했고 부족함도 있는
그대로 적었습니다. 훌륭한 사람이라고 여겨지지 않은 사람도 부끄럼 없이
올라 있습니다. 형에게 간계를 부려 장자권을 빼앗은 야곱을 비롯하여
시아버지 유다와 동침하여 자식을 낳은 타마르, 창녀로써 적군과 내통한
이방인 라합, 그리고 젊은 과부로 보아즈를 유혹했던 이방인인 룻, 자기
남편을 죽인 다윗의 자식을 낳은 우리야의 아내 바쎄바 입니다. 감추고
싶은 죄인들이 등장함은 의미가 큽니다. 메시아의 가계가 끊어지지 않도록
기묘한 방법으로 대를 이어가셨다고 할 수 있고, 또한 의인과 죄인의
장벽이 무너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죄를 묻지 않으시고
믿음을 묻고 계십니다.
룻을 등장시킴으로써 유다인만의 메시아가 아니라 이방인의 메시아도
된다는 것을 일깨워 주고 계십니다. 결국 예수님은 모든 이에게 구원을
주시려 인간역사 안에 오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약하고 죄스런 인간을
통하여 일하십니다. 그렇다면 계속 이어지는 족보의 끝에 나의 이름도
기록될 것입니다. 기왕이면 내로라하는 인물이 아니더라도 죄인으로
기록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아니 회개한 죄인으로 기록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선언하셨습니다.“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루카10,20).
믿음으로 의롭게 된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역대 이스라엘 왕 가운데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다윗의 자손으로 태어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 그분 마음에 드는 아들(마태3,17)로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기
위해 기름부음 받은 자요, 주님의 영을 받은 이(루카4,18) 입니다. 이제
그분의 자녀가 그분의 일을 해야 할 때입니다. 그분의 족보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기에 앞서 그분 마음에 드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다른 모든
이가 허물과 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자비로 거룩함에 동참하였다면
성모님은 그야말로 순결함자체로 주님의 영광을 드러냈습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엑 신부 -
◈ [서울] 족보 있는 우리도 세례 받으면
2014년 나해 12월17일 대림 제3주간 수요일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 마태오 1,1-17
족보 있는 우리도 세례 받으면
요새는 족보를 모르거나 없는 경우도 있지만 그래도 거의가 있습니다.
시작하신 이는 누구라고 유명하다는 사람부터 시작되더군요.
아무튼 정상적인 인물이란 뜻을 부여하는 족보라고 봅니다.
예수님도 이스라엘 민족 중의 한 사람이라는 점을 마태오는 강조합니다.
그래서 확실한 인간이며 확실한 신이라고 예수님을 알리려는 거지요.
족보 있는 인간인 우리도 영세 받으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거고요.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마태오 1,1)”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수도회] 하느님의 족보에서는 아무 것도 빼지 마라!
김찬선(레오나르도)신부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하느님의 족보에서는 아무 것도 빼지 마라!
어떻게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닌 우리에게는 별로 관심도 없는
이스라엘의 족보를 마태오복음은 길게 그리고 정성들여 들려줍니다.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쓰인 복음이기에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래서일까요, 마태오복음은 이방인을 위해 쓰인 루카복음과 달리
예수 그리스도를 아브라함의 아들이요, 다윗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이는 루카복음이 하느님의 아들, 아담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과 비교되지요.
이것은 꽤나 큰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해야 마땅하고, 인간의 조상도 아브라함이 아니라
아담이라 해야 마땅치 않을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찌 한 족속만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진정 하느님의 아들이요, 인류의 조상, 아담의 아들이지요.
그래서 이것을 우리가 비딱한 눈으로 보면 문제시할 수도 있겠지만
순수한 신앙의 눈으로 보면 여기서도 우리는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거고,
마태오복음도 바로 이런 의미로 족보를 실었을 것입니다.
어떤 의미입니까?
우리말에 <계속 그렇게 살면 족보에서 빼버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집안의 망나니나 말썽꾸러기에게 하는 말이고,
실제로 집안의 명예를 실추시킨 사람의 경우 족보에서 빼버립니다.
그러나 마태오복음의 족보는 그런 조상들을 족보에서 빼지 않고,
그대로 다 올려놓았습니다. 인간의 족보라면 그리고 자기 가문을 자랑하기
위한 족보라면 부끄러운 조상의 역사를 숨기거나 지워버렸을 텐데
하느님의 족보이기에 오히려 그대로 둔 것입니다.
결코 조상들이 잘나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 가문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가문에 대한 하느님의 약속 때문에 태어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구약을 보면 그의 자손이 별과 같이 많아질 것이라고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하시고, 다윗에게는 그 집안을 일으켜
세우고 그 왕좌를 영원히 튼튼히 하리라고 약속을 하셨지요.
그러기에 마태오복음의 족보란 자랑스러움의 족보가 아니라 부끄러움의
족보이며 인간 승리의 기록이 아니라 하느님 승리의 기록입니다.
이새의 썩은 둥치에서 햇순이 솟아나게 하시고,
이방 여인들을 통해서라도 가문을 이어가시며,
그 많은 조상들의 죄와 허물에도 불구하고
약속을 지키시는 하느님의 구원 역사를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마태오복음은 진실한 인간의 족보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부끄러움을 숨긴 아담의 족보가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감추지 않은 다윗의 족보이며
하느님 앞에서 죄지은 인간들의 진실을 그대로 드러내는 족보이지요.
우리의 죄에도 약속에 성실하신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절입니다.
- 작은 형제회 김찬선(레오나르도)신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