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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나해 12월25일 예수 성탄 대축일 낮미사
[수도회] 말구유의 사랑과 배고픔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신부 -
† 제1독서 이사 52,7-10
† 제2독서 히브 1,1-6
† 복음 요한 1,1-18
이 미사의 복음인 요한 복음의 머리말은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고 전해 줍니다. 그 말씀은 한처음에 계셨으며
하느님이셨습니다. 우리는 요한 복음의 이 말씀을 통해 더없이 심오한
강생의 신비와 만납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우리도 사람이 되신
말씀인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갈 것을 다짐합시다.
★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구원을 선포하며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의
발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노래한다. 이제 사람들은 기쁨의 환성을 올리며
하느님의 구원을 보게 될 것이다(제1독서).
★ 하느님께서는 이제 당신의 아드님을 통하여 말씀하신다.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신 그 아드님은 만물의 상속자일 뿐 아니라 그분의 강력한 말씀을
통해 만물이 지탱된다(제2독서).
★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으며,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으로서 이 세상에
오셨다(복음).
◈ 오늘의 묵상
프랑스의 작곡가 메시앙은 현대 음악의 거장 가운데 하나이자 평생
가톨릭의 신비를 탁월하게 표현한 인물입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기
직전인 1944년에 그가 작곡한 피아노 독주를 위한 연작 ‘아기 예수를
바라보는 스무 개의 시선’은 놀라운 작곡 기법만이 아니라 그의 깊은
영성이 잘 드러난 걸작입니다.
연주 차원에서나 해석 차원에서나 매우 어려운 것으로 알려진 이 곡들을
1996년 피아니스트 백건우 씨가 서울 명동성당에서 연주하여 많은 이의
감동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해하기 쉽지 않은 음악이지만 두 시간에
가까운 연주를 직접 들었을 때 받는 진한 감동은, 이 음악의 주제인 ‘강생의
신비’가 더욱 생생히 다가오게 합니다.
성탄에 대한 복음 말씀과 많은 신학자와 영성가의 영향을 받은 이 작품의
곡명들은 오늘 복음을 묵상하는 데 좋은 영감을 줍니다. 이 곡에서
표현하는, 구유의 아기 예수를 바라보는 스무 가지 방향의 시선은 결국
아기 예수님에게서 인성과 신성이 하나 되어 있다는 신앙의 진리로 초점이
모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시선’, ‘별의 시선’, ‘성모님의 시선’, ‘목자들의
시선’, ‘천사들의 시선’, ‘사랑의 교회를 향한 시선’ 같은 곡명에서 아기
예수님에 대한 사랑에 찬 눈길을 만납니다. 또한 ‘침묵의 시선’, ‘시간의
시선’, ‘십자가의 시선’, ‘기쁨의 성령의 시선’ 등의 곡명에서는 심오한
신학적 사유의 흔적을 느낄 수 있고, 작곡가 자신이 말씀을 새기고 묵상한
체험과 확신을 전하는 것 같은 곡명들도 있습니다.
유난히 아름답고 서정적인 곡명의 하나는 이렇습니다. ‘나는 잠자고 있으나
나의 심장은 깨어 있다.’ 이 곡을 들으며 뛰어난 종교 철학자이자 착한
목자였던 독일의 클라우스 헴멜레 주교의 성탄 묵상이 떠올랐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네. 말씀이 심장이 되셨네. 하느님께서 심장을
가지셨네. 하느님의 심장이 뛰시네, 수백만 인간 심장의 맥박 안에서. 이제
우리는 알게 되었네. 사람의 심장 안에 살고 계신 분이 누구신지 …….
말씀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심장 안에서 함께 숨
쉬십니다. 우리가 잠들거나 쓰러져도 그분께서는 우리 안에 사십니다.
우리를 깨워 주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시간 안에 들어오신 영원하신 분,
한처음에 하느님 곁에 계셨던 말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 매일 미사 -
◈ [서울] 예수 성탄 대축일
2014년 나해 12월25일 성탄 낮미사
제1독서
<땅끝들이 모두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52,7-10
제2독서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1,1-6
복음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18<또는 1,1-5.9-14>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땅 위에서는 마음이 착한 이에게 평화’
주님의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6부작인 ‘인류, 우리 모두의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사자보다 용맹하지
않고, 독수리보다 멀리 보지 못하고, 곰보다 힘이 세지 못하고, 말보다
빠르지 못한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놀라운 문명과 역사를 이룩하였는지를
보여주는 다큐멘터리였습니다. 인류는 ‘신화의 시대, 신학의 시대,
인문학의 시대, 공감의 시대’를 거쳐서 여기까지 왔다고 합니다. 거대한
자연의 힘 앞에 나약했던 인간은 자연재해와 다른 동물들의 위협 속에서
생존의 위협을 느끼며 살아야 했습니다. 다른 동물이 가지지 못했던
상상력을 가진 인간은 절대자인 하느님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조직을 만들었고, 하느님의 개입으로 많은 질문에 대한 답변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말과 글 그리고 도구의 사용은 인간이 가진 최대의
강점이었습니다. 이제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었고, 더 넓은 세상을 향해서 발걸음을 내 딛게 되었고, 이제 인간의
유일한 경쟁 상대는 ‘인간’이 되었습니다.
서로 다른 신의 이름으로 인류는 싸우고 정복을 하였습니다. 이제 인류는
긴 ‘신학의 시대’를 살게 됩니다. 교회, 사찰은 삶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신학의 시대에 인류는 질병, 고통, 자연재해를 하느님의 뜻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인간에게 심어주신 하느님의 모상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함께 손을 내밀기를 원하셨습니다.
구원의 역사는 하느님과 인간이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인간은 내면에 감추어졌던 능력을 꽃피우기 시작합니다. ‘르네상스’는 그
출발이었습니다. 미술, 음악, 건축, 문학, 철학, 과학이 인류 앞에 놓인
문제들에 새로운 답을 주었습니다. 산업혁명은 다양한 제품의 생산을
대량화하게 되었고, 인류는 풍요로운 세상에서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부를 만들어 가게 되었습니다. 지난 50,000년 동안 있었던 인류의
증가는 지난 50년 동안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인류는 공감의 시대, 접속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공감의 시작은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사건에서 시작됩니다. 접속의 시대는 말씀이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인류의 시작부터 늘
일관되게 이어져 오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여러분이 원하는 것을
이웃에게 해 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류의 이야기의 알파요,
오메가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사랑의 시작입니다.
성탄 축하드립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도회] 성탄의 신비 -말씀이 사람이 되시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나해 12월25일. 목요일(뉴튼수도원 45일째-2)
예수 성탄 대축일 낮 미사 이사52,7-10 히브1,1-6 요한1,1-18
2014년 나해 12월25일 성탄 낮미사
제1독서
<땅끝들이 모두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52,7-10
제2독서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1,1-6
복음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18<또는 1,1-5.9-14>
성탄의 신비 -말씀이 사람이 되시다-
모두가 신비이지만 인간은 정말 신비로운 존재입니다.
인간의 신비는 그리스도의 신비, 하느님의 신비와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에
그리스도의 신비, 하느님의 신비가 풀리지 않고는 결코 해명되지 않습니다.
바로 이 세 신비를 일거에 해결해 주신 하느님의 쾌거가 예수 성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심으로 마침내 인간의 신비, 하느님의 신비는
해명되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빛이자 희망이요 생명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삶의 중심이자 목표요, 의미이자 방향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두입니다.
그리스도를 잃으면 바로 모두를 잃는 것이요
기다리는 것은 끝없는 허무와 무의미의 블랙홀, 심연입니다.
마침내 고대하던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탄생은 온 인류 가족의 영원한 축제가 되었습니다.
어제는 대림 2부(12.17-23)의 끝날이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저녁성무일도 성모의 찬가 시 ‘오 후렴’(O Antiphona)'을 노래했습니다.
매일 부를 때 마다 감동이었습니다.
"오! 임마누엘이여, 우리의 임금이시오 입법자시며 만민이 갈망하는 이요
구속자시니, 오시어, 우리를 구원하소서.
우리 주 천주여.“(12.23일 마지막 오 후렴).
마침내 하느님은 우리의 간절한 기다림에 당신 아드님을 탄생 시킴으로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셨습니다.
어제의 기다림에 대한 깨달음도 새삼스러웠습니다.
온종일 오락가락 흐렸다 비왔다 하는 어둔 날씨였습니다. 수도원 넓은
들판, 성탄츄리나무들의 모습이 기다림 그 자체로 보였습니다.
인내와 침묵 중 늘 그 자리에서 밤낮 하늘 향해 깨어 있기에 늘 향기로운
푸른 몸의 나무들이었습니다.
이렇게 10년쯤 자라야 비로소 성탄츄리나무로 봉헌됩니다.
참 거룩한 기다림, 거룩한 삶의 상징입니다.
오래 수도생활하다 보면 몸 성한 수도자들이 드뭅니다.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몸으로 항구히 정주의 삶을 사는 수도자들을 보면 그 삶 자체가
가난이요, 그대로 성인(聖人)이라는 확신과 더불어 무한한 연민을 느끼게
됩니다.
'아, 기다림은 가난이구나!‘
아무도 오지 않는 성탄츄리가게를 지키는 수사님을 보며 깨달음처럼 되뇐
말입니다. 그래도 만면엔 웃음이 가득했습니다.
가난이지만 주님을 기다리는 충만한 기쁨의 가난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런 주님께서 오늘 탄생하셨습니다.
이사야서의 다음 말씀이 우리의 기쁨을 대변합니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 위에 서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의 저 발.
평화를 선포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며 구원을 선포하는구나.
다함께 기뻐하며 환성을 올려라.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구원하셨다.
땅끝들이 모두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이사52,7-10참조)
이사야의 꿈, 우리의 꿈이, 하느님의 꿈이 마침내 예수님 성탄을 통해
실현되었습니다. 이런 주님을 꿈꾸며 기다렸던 자들이, 모신 자들이 진정
행복한 부자들입니다. 평화를 선포하며 기쁜 소식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을
지닌 사람들이요, 복음 선포의 일꾼들입니다.
오늘은 그리스도의 신비를 통한 인간 신비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첫째,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의 신비' 안에 하느님의 신비, 그리스도의 신비, 인간의 신비가
들어있습니다. 말씀이 온갖 신비를 푸는 열쇠입니다.
'말씀께서는 한 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습니다.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요한1,2-3).
'하느님께서는 아드님 그리스도를 만물의 상속자로 삼으셨을뿐만 아니라,
그분을 통하여 온 세상을 만드셨습니다.'(히브1,2ㄴ).
그러니 모든 것들의 존재이유는 하느님의 말씀인 그리스도임을 깨닫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요한1,14ㄱ).
예수님 성탄의 핵심 진리입니다.
바로 영예로운 품위의 인간의 신비가 환히 드러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바로 이게 인간의 정의입니다. 풍요롭고 존엄한
품위의 참 인간이 되기 위해 말씀 탐구는 평생과제임을 깨닫습니다.
둘째, 그리스도는 생명과 빛입니다.
하느님은 생명과 빛입니다. 말씀은 생명과 빛입니다.
이 두 진리를 확연히 깨닫게 해 주는 분이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 없는 세상은 죽음과 어둠입니다.
그리스도가 탄생하심으로 세상 죽음과 어둠은 흔적 없이 사라졌습니다.
'그 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요한1,4.9-10).
바로 생명이자 빛이신, 생명의 빛이신 그리스도를 깨달아 아는 것이
구원입니다.
모든 생명과 빛의 근원인 참 생명과 참 빛은 그리스도 한분 뿐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와 일치될수록 '생명과 빛의 사람'으로 살 수 있습니다.
생명과 빛으로 충만한 삶을 살 때 비로소 참 인간의 실현입니다.
셋째, 그리스도는 은총과 진리의 원천입니다.
그리스도는 은총의 샘, 진리의 샘입니다.
삶은 은총의 선물이자 평생 숙제입니다.
저절로 인간이 아니라 끊임없이 은총의 샘에서, 진리의 샘에서 은총과
진리를 마셔야 살 수 있습니다. 하여 매일의 주님의 성체성사가 있습니다.
사도 요한의 감격에 벅찬 고백이 그대로 성탄 선물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요한1,14ㄴ.16-17).
인간은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저절로 인간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일치될수록 은총과 진리가 충만한 영광의 참 인간이요, 우리의
평생숙제입니다. 초월해 계시면서 온누리에 내재하신 하느님을 볼 수 있는
길은 그리스도를 통해서뿐 입니다.
넷째,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그리스도의 신비의 깊이는 측량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이시고, 또 하느님의 거울이자 하느님의 직통로입니다.
그리스도가 아니곤 하느님을 알 길이 없습니다.
히브리서의 고무적인 고백이 이를 분명히 합니다.
'아드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십니다.
그분께서 죄를 깨끗이 없애신 다음,
하늘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히브1,3).
은혜로운 고백입니다.
'세상 아무도 하느님을 본적이 없습니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
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습니다.'(요한1,18).
초월(超越)해 계시면서 온 누리에 내재(內在)하신 하느님을 알 수 있는
길은 그리스도를 통해서입니다. 그리스도와 일치될수록 우리 역시
'하느님의 성사(聖事)'로, 초월과 내재의 영원을 살 수 있습니다.
다섯째, 그리스도는 시작이며 마침입니다.
그리스도로 시작하여 그리스도로 끝나는 우주만물의 역사요 우리
인생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를 모르면 아무것도 모르는 것입니다.
우주든 개인의 삶이든 우연한 역사가 아니라 그리스도로 시작하여
그리스도로 수렴되는 역사입니다.
이런 거시적 영적 안목을 잃어버려 우물안 개구리의 삶이요 인간 품위를
훼손하는 삶입니다. 묵시록의 마지막 장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보라, 내가 곧 간다.
나의 상도 가져가서 각 사람에게 자기 행실대로 갚아 주겠다.
나는 알파요 오메가이고 시작이며 마침이다."(묵시22,12-13).
바로 약속하신 대로 성탄을 통해 우리를 찾아 오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의 행실에 따라 상도 가득 안겨 주십니다. 그러니 이런 그리스도와
일치될수록 하루하루 시작이며 마침의 종말론적 삶을 살게 됩니다.
시작이며 마침인 그리스도가 우리에겐 평화와 위로의 원천이 됩니다.
성탄의 신비가 하느님의 신비, 인간의 신비를 해명해 줍니다.
그리스도 없이는 참 인간의 실현은 불가능합니다.
그리스도를 알 때 나를 압니다. 그리스도는 내 영혼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가장 위대한 로맨스이다.'
'하느님을 추구하는 것은 가장 위대한 모험이다.'
'하느님을 만나는 것은 인간의 가장 위대한 성취이다.'
어느 수도승의 고백(공지영의 수도원 기행2권 80-81쪽)인데
하느님 대신 그리스도를 넣어도 그대로 통합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일치될수록 참 인간의 실현이요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은총입니다. 그러니 그 무엇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앞세울 수는 없습니다. 오늘 주님 성탄의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가득히
내리시길 빕니다.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신부 -
◈ [수도회] 말구유의 사랑과 배고픔/ 기경호(프란치스코)신부님
2014년 나해 12월25일 예수 성탄 대축일 밤미사 목 루카 2,1-14
“오늘 너희를 위하여 구원자가 태어나셨다.”(루카 2,11)
말구유의 사랑과 배고픔
오늘 하느님께서 연약하고 비천한 모습으로 말구유에 태어나셨다. 그분은
우리처럼 땀 흘려 일하고, 고민하고, 슬퍼하며, 고통을 겪고, 몰이해와
궁핍 중에 사심으로써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희망과
기쁨을 잃지 않고, 우정과 사랑을 나누며 살도록 가르치기 위하여 오셨다.
살맛나는 세상이 되도록 스스로 인간의 살을 취하셨다. 그러니 그분의
탄생을 기뻐하자!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은 비천하고 죄 많은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우리에 대한 그분의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의 표지이다. 우리네 현실은 더욱
어두워져 가는 것 같다. 경제적 어려움은 사람들을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으로 내몰고, 사회적 종교적 갈등은 사람들에게 불신과 체념,
절망이라는 그림자를 안기고 있다. 무엇보다도 존엄한 인간보다 돈을 더
중요시 하는 자본의 우상화는 심각하다. 연약하고 불안에 떨고 있는
우리들 앞에 그분은 가장 비천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오셨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기가 죽고 아파하고 쓸쓸해하고 외로워하는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하여 당신 친히 ‘연약함의 순종’을 통하여 사랑으로 다가오신 것이다.
하느님께서 육(肉, caro)을 취하신 참으로 거룩하고 엄청난 신비는 그분의
우리 인간에 대한 사랑의 표현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1223년 그레치오에서 성 프란치스코는 구유를 만들고 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의 신비를 온 마음을 다해 회상하고자 했다. 그때는 로마에서 천신만고
끝에 수도규칙을 인준 받은 직후였다. 그는 말했다.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아기를 기억하고 싶습니다. 아기가 겪은 불편함을 보고 싶고,
또한 아기가 어떻게 구유에 누워 있는지를 나의 눈으로 그대로 보고
싶습니다.”(1첼라노 84) 프란치스코의 원의대로 사람들은 구유를 준비했다.
그는 가난한 임금의 탄생과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 관하여 이야기하였다.
‘예수님’이나 베들레헴의 아기라는 말을 할 때에, 그의 혀는 그 감미로움에
입맛을 다시며 맛과 향기를 맛보는 듯 했다.
그레치오는 밤인데도 대낮같이 환히 밝았다. 비록 고달프고 힘들지만
성탄의 신비가 드러나는 지금 여기도 마찬가지이다. 진정한 태양,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은 더욱 밝다. 우리
가슴에 진정한 태양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레치오 구유에서 어떤 사람은
놀라운 한 환시를 보았다. 그는 어린 아기가 말구유에 생명 없이 누워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프란치스코가 다가가서 마치 잠에서 깨어나게 하듯
그 아기를 소생시키는 것을 보았다. 그렇다! 그는 자기 가슴속에서 잠자고
있던 예수님께서 깨어나심을 체험했던 것이다. 바로 오늘 밤 다시 한 번
우리의 가슴에서도 이러한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의 무관심과
이기심, 게으름에 짓눌려 죽어가던 예수님께서 다시 깨어나신 것이다.
오늘 우리를 구원하실 구세주,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셨다. 연약함 속에서
모든 생각과 행동을 선으로 향하게 하는 거룩함의 힘, 마음의 문과 가슴의
벽을 허무는 사랑의 힘이 바로 오늘 나신 아기 예수님의 선물이다.
말구유에 오신 주먹만 한 분이 우리 편이 되셨다. 시대가 어렵고 사람
관계에서 오른 고통이 적지 않아도 변함없이 기다려주시고 마음을
풀어주실 분이 오셨다. 우리는 우리의 어두움을 비추어 줄 빛을
그리워한다. 우리의 고통을 덜어줄 약을, 아픔을 어루만져주고 슬픔을
위로해 주며 고독한 우리와 함께 할 그 빛이 오늘 우리 가운데 오셨다.
이제 내 힘이 아니라 빛으로 오신 그분과 함께 일어서는 빛으로 힘을 내어
다시 앞을 보며 걸어가자.
우리는 내 안의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을 어떻게 키워야 할까? 베틀레헴
사람들은 그분께 방한 칸조차 마련해드리지 않았고(루카 2,7), ‘빵집’
베틀레헴에서 빵 한 조각 드리지 않았다. 주님은 그렇게 연약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오셨다. 성탄의 기쁨은 우리가 밥이 되어 오신 분처럼 다른
이들의 밥이 될 때 나의 기쁨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늘도
길거리에서, 어느 시장 모퉁이에서, 싸늘한 지하도에서, 북녘 땅에서
배고픔에 떨고 있다.
우리 앞에는 비어 있는 말 밥통이 놓여 있다. 사랑에 굶주린 이들의
목마름이 배어 있다. 우리는 여기에 무엇을 채울 것인가? 시련 앞에서의
용기, 미워하고 용서 못하고 지내는 옹졸한 마음 떨어내기, 사회적
약자들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어루만져드림, 육체적 정신적으로 아픔을
겪는 이들과 함께함, 서로에 대한 존중과 격려, 세속적인 것과 적당히
타협하는 어리석은 마음의 청산 등. 이런 것들로 빈 구유를 채우는
것이야말로 성탄의 참 기쁨을 사는 길이 되지 않을까? 그렇게 살아갈 때
초라한 말구유가 우리의 마음이 담긴 금빛 성작으로 바뀔 수 있으리라!
나의 가난하고 겸손 마음만이 예수님을 탄생시킬 수 있고, 나의 거룩한
행실만이 예수님을 살릴 수 있음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그리스도를 만나는 길
2014년 나해 12월24일 성탄 대축일 밤미사
< 오늘 너희를 위하여 구원자가 태어나셨다. >
복음: 루카 2,1-14
< 그리스도를 만나는 길 >
요즘 참 보기 좋은 두 쌍의 부부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한 부부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란 영화에 나오는 76년간 부부생활을 해 왔던
노부부이고, 또 다른 한 부부는 요즘 ‘힐링캠프’에 나온 기부천사 ‘션과
정혜영’ 부부입니다.
이들이 이렇게 현대인들의 마음을 울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이
부부들의 변하지 않는 사랑 때문입니다. 정혜영씨는 아이를 넷이나
키우면서도 점점 더 남편 션이 좋아진다고 말합니다. 이 남편들은 어떻게
했기에 아내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것일까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에서는 오랜 세월 함께 걸어왔던 한 노부부가
이별을 준비합니다. 마지막 할아버지가 98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을 때
할머니는 눈 내리는 추운 무덤 앞에 주저앉아서 “우리 영감 불쌍해서
어떻게 해... 생각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라며 슬피 우십니다.
밤새 기침만 하시고 힘도 다 떨어진 98세 노인이 평생 부인에게 어떻게
했기에 76년이나 함께 살았음에도 죽음을 그렇게 슬퍼하는 것일까요?
할아버지는 젊었을 때 할머니 집에 들어와 일을 하다가 할머니가 14세 때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3년 동안 같은 방을 쓰면서도 할머니를
건들지 않았습니다. 그저 잘 때 얼굴을 쓰다듬는 것뿐이었습니다. 할머니가
17살이 되어서 할머니가 스스로 원하게 되었을 때 진정한 부부가 되었다고
합니다. 어린 신부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영화 내내 이
할아버지의 그 순수했던 사랑이 변하지 않았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할아버지에게는 오직 할머니밖에는 없습니다. 낙엽을 던지며 혹은 물을
뿌리며 장난을 치지만 꽃을 꺾어 할머니에게 건네주는 모습은 신혼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는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할아버지는 한결같이 할머니를 사랑해 오셨던 것입니다. 이
할아버지의 변함이 없는 모습을 보며 할머니는 다른 사람은 못 믿어도
할아버지만은 믿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션도 정혜영에게 마찬가지입니다. 가수와 연기자로 만나 대한민국 대표
잉꼬부부로 단 한 번도 싸운 적이 없는 부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션은
아내와 함께 10년 동안 35억을 기부하였고 지금도 더 많은 좋은 일을 하기
위해 뼈가 부서져라 달리고 있습니다. 션의 아내 정혜영씨는 매일매일
남편이 더 사랑스럽고 존경스럽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자신에 대한 사랑을
의심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션의 한결같음이 아내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고 그가 하는 모든 일에 동의를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션은
결혼을 때도 외적인 것 때문에 결혼의 참 의미가 퇴색될까봐 축의금을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비록 전셋집에 살지만 더 불쌍한
이들을 돕기 위해 모든 힘을 쏟습니다. 그에게 항상 첫째가 아내이고
둘째가 가족이며 셋째가 가난한 이들입니다. 이것을 철저히 믿게 생활하기
때문에 정혜영씨는 혼자 아이 넷을 키우며 전셋집에 살아도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단 1초도 션과 결혼한 것을 후회해 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아주 단순한 말 같지만 또한 가장 하기 힘든 일은 남편이 아내에게 믿음을
주는 것입니다. 믿음을 주기 위해서는 자신이 약속한 것을 반드시 지켜야만
합니다. 작은 약속을 안 지키는 것이 습관화되다보면 그 사람 자체에
믿음이 가지 않게 됩니다. 따라서 아내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서는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은 반드시 실현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다보면 아내의 믿음은 더 큰 사랑이 되어 남편에게 향하게 됩니다.
믿음이 없는 분위기에서는 외적인 모든 것이 다 갖추어지더라도 절대
행복할 수 없습니다.
옛날 도둑 셋이 의형제를 맺고 생사고락을 같이 하기로 맹세했습니다.
어느 날 부잣집을 털어서 큰돈을 소유하고는 서로 욕심이 생겼습니다.
한 도둑이 술을 사러 마을로 간 사이에 두 사람이 의논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저놈을 죽이고 둘이서 나누면 몫이 더 많아질 것이 아닌가? 그러나
한 도둑, 역시 생각이 있었습니다. 두 놈을 다 죽이면 모두가 내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오는 길에 술에 독을 타서 가지고 왔고, 두 도둑은 술을 사온 형제를
돌로 때려 죽였습니다. 그리고 술을 마셨습니다. 결국 하나는 돌에 맞아
죽고, 둘은 독이 든 술을 먹고 죽고 말았습니다.
남을 속여먹는 도둑이 무슨 믿음이 있겠습니까? 온 세상을 다 가진다고
하여도 도둑끼리는 믿음을 지킬 수 없어 항상 불안하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가는 사람과 사귀어야 하는데 믿음이 가는 사람을 찾으려면
당연히 그의 말에 틀림이 없는지 시험해 봐야 합니다. 믿으려면 그가 하는
말이 틀리는지 안 틀리는지 확인을 해 보아야 하는 것은 기본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관계를 맺으면서 이런 노력도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느님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천사가 목동들에게 나타나 구원자가 태어나셨다는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그러니까 천사가 나타난 것은 구세주 탄생의 표징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
표징을 알려 주는 역할을 할 뿐이고, 오히려 알려준 대로 구유에 누워계신
아기 예수님이 표징인 것입니다. 천사는 그저 말씀을 전하는 메신저일
뿐입니다. 진짜 표징은 그 천사의 말이 실제로 일어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엘리사벳이 성모님께 복되시다고 할 때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루카 1,45)
즈카리야의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천사가 말한 것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벙어리가 되는 벌을 받았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확인될 수 있는 것을 미리부터 믿지 않고 시험해 보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목동들은 천사들의 말을 믿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반신반의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천사의 말대로 아기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있는
것을 보고는 확증을 얻게 되었고 믿게 되었습니다.
우리 또한 하느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볼 때에야 믿게 되고
그분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이루어지는지 이루어지지
않는지 시험해보지도 않고 보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면 어떻게 그분께
대한 믿음에 다다를 수 있겠습니까?
션은 독실한 개신교 신자로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행복하다”라는 말을
시험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진정 주는 것이 더 행복하기에 하느님을 더
믿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천사가 나타나 마구간에 가서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를 보라고 해도 가지 않으려 하는 모습과 같을지도 모릅니다.
믿음은 말씀이 실제로 이루어지는지 이루어지지 않는지 시험해 보는
것에서 자라납니다. 성경 말씀은 마치 천사의 말처럼 우리가 그대로 해
보라고 주어진 믿음을 증가시키기 위한 도구인 것입니다. 그리고 믿게
되면 행복해집니다.
예수님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래서 고정원씨는
자신의 가족을 살해한 유영철을 자신의 양자로 삼았습니다. 정말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한다는 말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유영철로부터 피해를 입은 가족 중에 유일하게 고정원씨 가족만 정상적인
생활을 하게 되었고 용서하지 않은 이들은 그 미움 때문에 알코올 중독이나
자살 등으로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습니다. 고정원씨는 이 모든 것을 보고
그분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짐을 믿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실제로 해
보지 않으면 믿음을 증가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용서 자체를
하려는 노력을 해보지도 않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성경에서는 ‘항상 감사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영원한 불만족인 내
속의 자아, 즉, 뱀을 죽이기 위해 매일 감사한 일을 5개씩 쓰고 자라고
합니다. 물론 그 말을 따르는 이들도 있고 따르지 않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 말을 따른 분은 일하다가 손가락이 두 개 잘려나갔어도 바로 그 순간
손목이 다 잘리지 않아 감사하다는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만약 항상
감사하는 습관을 키우지 않았다면 자아가 커져서 불평하게 되고 더 안 좋은
방향으로 갔을 지도 모릅니다. 또 어떤 할머니는 판공을 주는데 당신이
지금까지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고해할 거리가 없는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하루에 3가지씩 감사한 것을 수첩에
적으면서부터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실제로 해 보고 그분의 말씀은
틀림없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게 되면 진정 믿음이 커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에서 우리가 바로 시험해 보아야 하는 것은 바로 ‘십일조’입니다.
그것만큼은 하느님도 시험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거짓말을 하지
않거나 이웃을 자신처럼 여기고 내어주는 삶 등 너무도 많습니다. 이런
것을 살아가면서 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을 만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도 천사의 말처럼 그리스도를 만났던 목동들처럼, 성경의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를 만나 기쁨에 가득 찼으면 좋겠습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인천] 낮아질대로 낮아져서
2014년 나해 12월25일 성탄 낮미사
제1독서
<땅끝들이 모두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52,7-10
제2독서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1,1-6
복음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18<또는 1,1-5.9-14>
아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예수님의 기쁜
성탄을 어떻게 맞이하셨는지요? 가족들과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내신 분들도
계실 테고, 또 어떤 분은 성탄자정미사에 참석하셔서 거룩한 시간을 보내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또 친구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서 기쁜
성탄을 맞이하신 분도 계시겠지요. 아무튼 어렵고 힘든 일이 있다
하더라도 잠시 잊고 예수님 성탄의 기쁨을 충만히 느끼는 오늘이 되길
바랍니다.
며칠 전, 저희 교구는 사제인사이동 발표가 났습니다. 이 발표에는 제
이름도 들어가 있었지요. 5년 동안 성소국장으로 지낸 시간이 참 빠르게
지나갔다는 생각과 함께 지금까지의 삶을 다시금 되돌아봅니다. 부족한
부분들이 떠오르면서 많은 반성을 하게 되네요.
사람들은 제게 부지런하고 성실하다고 하지만, 사실 스스로를 바라보는 제
모습을 그렇게 부지런하지도 또 성실하지도 못한 것 같습니다. 단순히
‘새벽 묵상 글’을 오랫동안 써왔다는 것뿐 그리고 남들보다 조금 일찍
일어난다는 것 외에는 다른 부분에서 부지런한 모습도 그리고 성실한
모습도 간직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그것만 해도 대단하다고 이야기해
주셨고 저 역시 은근히 ‘이것만 해도 어디냐? 이 정도면 충분해.’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니 별 것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갓 태어난 아기를 생각해보십시오. 이 아기는 하루 종일 잠만 잡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루 종일 잠만 잔다고 해서 아기를 게으르다고 말합니까?
또 반대로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새벽잠이 거의 없으시지요. 그런데 이렇게
새벽잠이 없어 일찍 일어나시는 것을 부지런하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기 때에는 잠을 자면서 성장이 되며,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이미 성장이 멈췄고 활동량이 적어 잠이 없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갓 태어난 아기의 수준은 아니지요. 중년의 시기에 들어선 지금,
저는 잠만 자고 게으름을 피울 시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당연히
열정적으로 활동해야 하고, 특히 주님의 뜻을 깨닫고 실천할 수 있는데
최선을 다할 시기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런 위치에 있으면서도 몇 가지
지금 하고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면 커다란 착각이고, 자신의
임무에 충실하지 못한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어젯밤에 이 땅에 오신 아기 예수님도 분명히 잠만 잤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잠만 자는 모습에 계속 머무르시지 않습니다. 나이 서른이 되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공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십니다.
하느님께서도 낮아질 대로 낮아져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마치시고 다시 하늘
나라로 가셨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해야 할까요? ‘이 정도면 되었어’
라는 안일한 마음은 벗어 던지고, 대신 지금의 자리에서 주님의 일을
하는데 최선을 다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런 우리가 되라고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오늘 오셨습니다.
사랑이란 서로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둘이서 똑같은 방향을 내다보는
것이라고 인생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생텍쥐페리).
집중의 힘(‘좋은생각’ 중에서)
미국 메이저리그의 마지막 4할 타자로 불리는 테드 윌리엄스. 그는 1941년
메이저리그에서 타율 4할 6리라는 전설적인 기록을 달성했다. 야구에서는
3할도 훌륭한 기록이라고 하는데 4할의 타격은 신의 경지라고 불릴 만큼
어려운 것이다. 70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4할대 타자가 나오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비결을 궁금해하자 그는 ‘타격의 과학’에서 이렇게 밝혔다.
“먼저 셀(Cell, 작은 방) 하나를 야구공 한 개 정도의 크기라 치면,
스트라이크 존을 77개의 셀로 나눕니다. 다음으로 77개의 셀 가운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세 개 반’의 셀에 공이 들어올 때 타격합니다.”
테드 윌리엄스는 자신이 가장 잘 칠 수 있는 코스에 들어오는 공에
집중했던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아무 공에나 방망이를 휘두르고 있지 않은가? 이제는
삶에서 공 세 개 반의 ‘최상의 셀’을 파악해 그곳에 집중해 보자.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내용 같아서 그대로 옮겨 보았습니다. 할 수 없는
것에 집중해서 더 큰 아픔을 간직하게 되는 것보다는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해서 가능성을 더욱 더 활짝 여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서울] 바로 이분이 참 빛, 만물 생성의 힘
2014년 나해 12월25일 성탄 낮미사
제1독서
<땅끝들이 모두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52,7-10
제2독서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1,1-6
복음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18<또는 1,1-5.9-14>
바로 이분이 참 빛, 만물 생성의 힘
한창 일할 나이면 모두 바쁩니다. 나름대로 분야별 박사같은 기분입니다.
자신의 부족은 적은 수입이 문제지 더 배울 다른 문제는 잘 모릅니다.
지성 이성 감성 그리고 나는 무엇인지에 무관하며 그간 배운 게 답니다.
바쁜 세월 지나 안정되고 한계를 느끼고 주변에서 죽어들 가면 다르지요.
그제야 인생의 참 빛, 대자연 생성, 인류 진행에 관심 두고 찾아 나서지요.
요한사도는 이 문제에 대해 간략하게 알리며 세상은 이를 몰랐었다 합니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요한 1,9~10)”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수도회] 거룩한 예물 / 성탄대축일
2014년 나해 12월25일 성탄 대축일 낮미사
제1독서
<땅끝들이 모두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52,7-10
제2독서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1,1-6
복음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18<또는 1,1-5.9-14>
거룩한 예물
“정녕 말씀이 ‘살’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당신 ‘장막’을 치셨습니다”
(요한 1,14).
Celtic Woman이라는 여성 그룹이 부르는 ‘O Holy night’라는 성가가
컴퓨터에서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목소리가 참 좋습니다. 정말
감미롭습니다. 제 마음도 성가 소리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달려갑니다.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났나요? 창조주 하느님이 우리처럼 작은 피조물이
되시어 당신 거처를 우리 가운데 마련하셨습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이
놀라운 신비를 강조하기 위해서 ‘살’이라는 그리스어 단어를 사용합니다.
우리가 직접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살덩어리, 곧 물질로 오셨음을
말합니다. 저 멀리 계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와 온전히 하나가 되시는
이 땅의 하느님을 우리는 느낄 수 있습니다.
이제 베들레헴은 저 멀리 이스라엘 땅에 있지 않습니다. 내가 있는 이곳에
있습니다. 우선 우리 마음에, 그리고 우리 공동체와 우리 집에 당신 거처를
정하셨고 이미 살고 계십니다. 또한 잊지 않고 기억합니다, 세월호에서
영문도 모른 채 죽어야만 했던 우리 아이들 하나하나가 아기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살고 있음을. 아파하는 힘들어 하는 눈물 흘리는 이들의
마음에 아기 예수님은 태어나셨습니다. 거룩한 날, 주님께 달려가 우리의
관심과 사랑을 예물로 드립시다.
성탄을 축하드려요 ^^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 -
◈ [청주] 성탄의 의미|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나해 12월25일 성탄 낮미사 (요한 1,1-5.9-14)
제1독서
<땅끝들이 모두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52,7-10
제2독서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1,1-6
복음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18<또는 1,1-5.9-14>
성탄의 의미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많이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사랑하시기에 당신의 아들을 인간의
모습으로 보내 주셨습니다.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예수아기는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구세주이십니다. 구세주께서
주시는 기쁨과 평화가 여러분과 가정에, 온 누리에 함께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성탄은 우리를 구원하러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역사 속으로 들어온
뜻 깊은 날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께서 나를 위해서 내 앞에 오신
날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하필이면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사람이
사는 집에는 방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가난한 사람의 힘이 되고
위로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성장하면서도 목수인 아버지 요셉과 함께
일하심으로써 사람들의 노고와 땀, 보람을 몸소 체험하심으로써 위로와
격려를 주십니다. 그리고 끝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한 이들에 의해 십자가에
처형되었습니다. 총독은 그분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다고 말하면서도
사형선고를 내리고 손을 씻었습니다. 그분은 세상의 죄악을 짊어지고
죽으셨으나 부활을 통해 죽음을 이기셨고 사랑의 승리를 보여주셨습니다.
이렇게 부활하시어 영원히 사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오신 날이 바로 오늘 예수님이 탄생하신 날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탄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사람이 되고 예수님과
함께 영원한 삶을 사는 새사람으로 이 성탄축일에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내 마음 안에서 거듭 거듭 태어나시도록 마음의 방을
내 드려야 하겠습니다. 성탄은 단순히 과거 사건이 아니라 오늘도 끊임없이
새롭게 태어날 소명을 확인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날, 마더데레사 수녀님께서 길을 지나시다가 한 어린이의 고름을
만지며 치료하고 있을 때 함께 살고 있던 분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수녀님,
수녀님은 잘사는 사람이나 편안하게 살아가는 사람,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볼 때 질투나 시기심이 생기지 않나요? 수녀님은 정말 이런 삶에
만족하십니까?
그랬더니 수녀님께서 “허리를 굽히고 섬기는 사람에게는 위를 쳐다볼 수
있는 시간이 없습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수녀님은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9,35).는
주님의 삶을 이미 살고 계셨습니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마태20,28). 하신 말씀이 가슴 안에 살아있었습니다.
진정으로 자신을 낮추지 않고는 주님을 만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당시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 율법학자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끝내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메시아가 탄생하면
당연히 자신들을 찾아와서 메시아임을 증명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잘난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잘 믿고, 교리도 많이 알고
그래서 주님이 다시 오실 때는 자신 만만하게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들에겐 아는 게 병이었습니다.
헤로데 왕은 권력의 욕심에 사로잡혀 있었기에 처음부터 자기가 아닌 다른
왕이 태어난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입으로는 나중에
동방박사들에게 경배하겠다고 했을 뿐 마음으로는 이미 아기를 죽여
없애버렸습니다. 이는 누구든지 나보다 더 낫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마음의 소유자입니다. 학식이나 인물, 돈을 잘 번다든지 인기가 높다든지
칭찬을 더 받든 나 보다 더 나은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삶을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시기와 질투, 정말 이것도 큰 병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고유한
달란트를 가지고 그것을 활용하기도 힘든 데 말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날 수 있는 분은 데레사 수녀님처럼 허리를 굽히는
사람입니다. 허리를 굽혀야 하고 말구유로 내려오신 밥통 안에서 ‘나는 네
밥이야’ 하고 자신을 아낌없이 내놓는 예수님의 마음을 간직하는 사람만이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필리2,5).
주님께서는 높은 데가 아니고 낮은 데에 계십니다. 우리가 이런 분을
생각하면 거기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아니 거기에 이미 와
계십니다. 혹 우리가 이미 와 계신 분을 만나지 못하는 것은 내 마음의 문이
아직 그분에게 향하고 있지 못한 까닭입니다. 우리 마음을 그분께로
돌려야 하겠습니다. 자기중심에서 하느님 중심에로 돌리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야 합니다. 그분과 함께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분의 눈으로 보고 그분의 마음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5,12).
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매일의 성탄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사랑에 굶주려 그대를 바라보십니다.
친절에 목말라 그분은 그대에게 구걸하십니다.
충절에 헐벗어 그분은 그대에게 희망을 겁니다.
그대 안에 머물 집이 없어 그분은 간청하십니다
그대는 그 한 사람이 되어줄 수 있겠습니까? - 마더 데레사-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님이 되어서 세상을 밝게 비추고
기쁨과 평화를 나누어 주시길 희망합니다. 우리의 이웃이 여러분을 만난
것이 참 기쁨이 되고 큰 복이 라는 것을 알게 되도록 그에 걸 맞는 삶을
봉헌하시길 바랍니다. 내 삶의 자리에 예수님을 낳아드리는 매일의 성탄을
이루시길 기도드리며 다시 한 번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청주]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나해 12월24일 성탄 대축일 밤 미사(루카2,2-14)
제1독서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9,1-6
제2독서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티토서 말씀입니다. 2,11-14
복음
<오늘 너희를 위하여 구원자가 태어나셨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14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셨습니다.
성탄을 함께 기뻐하며 주님께서 베푸시는 사랑과 평화가 온 세상과 여러분
안에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서로 인사하시겠습니다. 축하의 인사를!
성탄 축제를 준비하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동안에 노력했던
정성과 수고와 땀에 대해서 하느님께서 넘치도록 갚아주실 것입니다.
고해성사를 통해 맑은 영혼을 간직하게 되었고 특별강론에 귀 기울이면서
영적양식을 충만이 채웠습니다. 지역어르신을 위한 사랑의 점심나누기에
마음을 모았고. 어린이들과 더불어 사랑의 축제를 준비하셨습니다. 모두가
한마음, 한 뜻이 되어 하느님을 찬미하고 서로의 친교와 일치, 실천하는
사랑을 위해 노력한 순간들이 주님을 잘 낳아드리고자 애쓴 모습이고
그러기에 그만큼 주님께서 기뻐하셨으리라 확신합니다. 앞으로도 매사에
열성과 정성으로, 사랑으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빛으로 오셨습니다. 맑고 밝은 빛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우리의 어둠을 몰아내고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뻐하십시오. 맑고
거룩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은 기뻐하십시오. 그리고 어둠에 사로잡힌
사람도 기뻐하십시오. 주님께서 당신의 빛으로 비추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신 나머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당신의 외아들을 내어 주셨습니다.(요한3,16) 그리고 성탄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을 보고 만질 수 있도록 구체적으로 드러내준 날입니다. 이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볼 수 있도록 해주는
빛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성탄은 아낌없이 내어주는 ‘사랑과 나눔’의
부르심이며 요청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메마른 곳에 사랑을 전하고,
위로가 필요한 곳에는 위로를 주며, 용기를 잃은 이에게는 격려를 해 주는
성탄절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4,12) 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2독서를 보면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어, 우리를 불의에서 해방시키시고
또 깨끗이 하시어, 선행에 열성을 기울이는 당신 소유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바로
인간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여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시기 바랍니다. 한번 불러볼까요? 예수님!
예수님! 이 이름에는 무슨 뜻을 담고 있지요? “하느님께서는 구원이시다.”
‘예수’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여호수아’를 그리스어로 옮긴 것으로
‘하느님께서는 구원이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이름은
우리를 구원하는 이름입니다. 따라서 많이, 자주 부르십시오.
그런데 그 구원자 예수님께서는 어디서 태어나셨느냐? 복음을 보면
“그들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였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방이 없었다는 것에 마음을 둔다면 그분께 내어드릴 방이
없었던 것이지 방은 얼마든지 있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가난하고 비천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지만 이런 핑계, 저런
핑계로 주님을 외면할 때가 많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분이 구세주요, 나를 구원하실 왕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렇게 문전
박대하였을까요?
결국 그분은 구유에 뉘여 졌습니다. 그리고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눕혀진
아기의 모습이 그분의 생애를 말없이 일러주고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구유는 밥통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있어야 하는 것은 밥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바로 밥으로 오셨습니다. 밥은 자기를 완전히 내어
주어서 다른 이의 영양이 됩니다. 자기는 죽고 남을 살립니다. 그리고
우리는 밥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밥이 되셨고 오늘도 미사 안에서 성체 성사를 통해서 그 밥을
끊임없이 주십니다. 공짜로 주십니다. 그러나 밥상이 주어져도 매일같이
그 밥을 먹는 사람은 많지 않으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이사야서 1장 3절에 보면 “소도 제 임자를 알고 나귀도 제 주인이 놓아준
구유를 알건만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구나.”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철없이 구는 구나)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상기시켜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바로 주님께서 구유에 뉘여 졌다는 것은 이 말씀을
상기시켜 주는 겁니다. 구세주로 오신 그리스도, 빛으로 오신 왕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구나! 안타까운 마음을 일깨워줍니다.
천사가 목자들에게 나타나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하고 주님의 탄생에
대한 기쁜 소식을 선포하고 마침내 수많은 하늘의 군대가 하느님을
찬양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찬양했다는 것은 결국 하느님의 백성이 주님의
구유를 알아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야말로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되었습니다.”(필리2,6-12)
그러므로 귀한 아기 예수님께서 가장 낮고 천한 마구간 구유에 누우신
이유를 새롭게 일깨우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밥이 되어주신 예수님을
기억하며 모든이에게 모든 것,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필요가
되어주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구세주 탄생의 기쁨을 함께하며 다시 한번 축하 드리고 매일 매순간
우리의 마음 안에 구세주 예수님을 모셔 드리고 또 낳아드리기를
희망합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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