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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나해 12월26일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수도회] 영 안에 끝까지 견디는 증거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신부 -
† 제1독서 사도 6,8-10; 7,54-59
† 복음 마태 10,17-22
스테파노 성인은 초대 교회의 사도들이 뽑은 부제이다. 식탁 봉사를 위한
일곱 봉사자의 하나로 뽑힌 그는 가난한 이들에게 식량을 나누어 주는
일뿐 아니라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면서 진리를
증언하는 일도 소홀히 여기지 않았다. 또한 유다인들과 벌인 논쟁에서도
“은총과 능력이 충만한 스테파노”(사도 6,8)는 지혜로운 언변으로 그들을
물리쳤다. 유다인들은 스테파노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음을 알고 그가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렸다. 결국 그는 돌에 맞아
순교함으로써 교회의 첫 순교자가 되었다.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 7,59-60).
★ 스테파노가 큰 이적과 표징들을 일으키고 성령이 충만한 지혜로
유다인들과의 논쟁에서 이기자 그들은 스테파노를 죽이려 한다. 하느님과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평화를 맛본 그는 사람들이 돌을 던져 자신을 죽이려
할 때에 이렇게 기도한다.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앞으로 그들이 박해받게 될 것이나 걱정하지
말라고 이르신다. 성령께서 함께하실 것이기 때문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은 교회의 첫 순교자 스테파노 성인을 기리는 축일입니다. 사도행전
6장과 7장은 스테파노가 ‘식탁 봉사자’로서 애덕의 임무에 헌신하며 교회가
자라나는 데 밑거름이 된 것을 알려 줍니다. 또한 그가 자신을 모함하고
박해하는 이들 앞에서 성령에 넘쳐 행한 설교를 전해 주며, 그가 순교하는
모습까지도 보여 줍니다. 특히 순교의 자리에서 보여 준 그의 모습은 깊은
감동을 불러일으키게 합니다.
스테파노는 하늘이 열리고 예수님께서 하느님 오른편에 서 계시는 모습을
보며, 그것을 사람들에게 외칩니다. 악의와 분노에 가득 찬 박해자들은
구원의 진리와 하느님의 영광을 전해 주는 이 참된 증언을 견디지 못하여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스테파노에게 달려들어 그를 성 밖으로
몰아내고서는 돌을 던집니다. 그러나 그는 순교의 순간에도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성부께 그러하셨듯이, 자신의 영을 예수님께 맡깁니다.
초기 교회의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하나인 스테파노의 활동과 설교, 순교는
그 자체로 교회의 얼굴을 드러내며 교회의 활동을 미리 보여 줍니다. 그에
관한 사도행전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증언하고
기도하며 애덕을 실천하는 교회의 본질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성탄을 기뻐하며 아기 예수님의 얼굴을 바라본 우리는 이제 성탄의
신비를 통해 교회의 신비로 건너가야 합니다. 우리는 아기 예수님께
올리는 기도가 또한 교회의 기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탄 팔일 축제를
교회와 함께 기뻐하며 십자가의 성녀 데레사 베네딕타 동정 순교자가
교회의 기도에 대해 들려주는 통찰을 음미해 봅니다.
“교회의 기도는 영원히 살아 계시는 그리스도의 기도입니다. 그 기도는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 사시는 동안 하신 기도를 원형으로 삼고 있습니다.
모든 진정한 기도는 교회의 기도입니다. 다시 말해, 모든 진정한 기도를
통해서 교회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며, 그래서 기도를 하는 주체는 교회
그 자체입니다.”
- 매일 미사 -
◈ [수도회] 오, 아름다우신 하느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나해 12월26일 금요일(뉴튼수도원 46일째)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사도6,8-10;7,54-59 마태10,17-22
2014년 나해 12월26일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제1독서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는 것이 보입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6,8-10; 7,54-59
복음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아버지의 영이시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7-22
오, 아름다우신 하느님!
오늘은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이자 성탄 8일 축제내 제2일입니다.
계속되는 성탄 축제입니다.
어제의 아름다우신 하느님 체험을 잊지 못합니다.
성탄 밤미사(한국시간 25일 오전 11시)가 거행되는 성전에서
주님의 성탄을 통해 체험한 아름다운 하느님에 감동했습니다.
1.
영어와 한국어가 번갈아 계속되는 여러편의 성가에서
'어, 한국 요셉수도원에서는 한국어만 쓰시던 하느님이
여기 미국 뉴튼수도원에서는 영어와 한국어 2개국어를 쓰시네'
순간 깨달은 하느님의 아름다움입니다.
1절 영어에 이은 2절 한국어, 3절 영어에 이은 4절 한국어 성가의 조화가
너무 아름다웠고 즉시 연상된 하느님의 아름다움이었습니다.
다음 은은히 흐르듯 이어지는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성가를 상상하시면
곧 이해될 것입니다.
-Silent night, holy night, All is calm
고요한 밤, 거룩한 밤, 만상이 잠든 밤-
한국과 미국과의 일치를 상징하는 성가에 감동의 눈물이 났고, 양국의
일치의 선봉에 서있는 뉴튼수도원의 위대하고 거룩한 사명에 감사했습니다.
여기 참석했던 착실한 교포형제들의 미국 자랑도 잊지 못합니다.
1)자유롭다. 2)유행이 없다, 3)직업에 귀천이 없다. 3)포용성과 다양성을
존중한다. 4)'있는 자'일수록 겸손하다.
겉 모습을 봐서는 부자인지 가난한 자인지 구별할 수 없다.
모두 우리가 결핍하고 있는 부러운 덕목들입니다.
2.
전례의 아름다움을 통해 하느님의 아름다움에 감동했습니다.
요셉수도원의 전례도 아름답지만 뉴튼수도원의 전례 역시 나름대로
아름다웠습니다. 하얀 성의(聖衣)를 입은 수도자들이 흡사 주님의 천사와
같았고 전례 전체의 분위기도 그대로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반영하는
듯했습니다. 아름다운 전례 분위기를 숨쉬며 살아가는 베네딕도 수도회
수도승들입니다.
3.
여기서 잘 키워 낸, 아기자기하게 장식된 성전 내의 성탄 츄리나무의
아름다움에 감동했습니다. 전례 분위기를 아름답게 하는데 크게 기여한,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반영하는 무수한 별들(?) 반짝이는 성탄츄리나무였고,
카톡으로 찍어 고마운 분들께 '성탄 축하카드'를 전송했고,
성탄 밤미사는 이분들 모두를 위해 봉헌했습니다.
4.
제 식탁에 놓인 꽃꽂이와 꽃꽂이를 한 부원장 마티아 수사님 마음의
아름다움에 감동했습니다. 대림촛불 4개가 빛나던 주님을 '기다리던
자리'가 '꽃자리'로 바뀌었습니다.
꽃으로 탄생하여 우리에게 오신 아름다운 주님에 또 감동했습니다.
5.
한국 장충동 수도원에 있을 때, 친절하게 대해 줬던 바르나바 수사님이
산티야고 50일 순례후 돌아와 보니 보이지 않아 많이 서운했는데
뉴튼수도원에 갔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뉴튼 수도원에 와보니 수사님은
기쁘고 씩씩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아, 죽음도 이와 같겠구나. 한국에선 보이지 않아도 뉴튼수도원에 살고
있듯이 지금 눈엔 보이지 않아도 하늘나라에서는 살고 있겠고 언젠가
이승을 떠나 가면 만나겠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니 이 또한 저에겐
아름다운 하느님 체험입니다.
6.
여기 미국시간과 한국시간의 비교를 통해서도 '영원한 현재'의 아름다운
하느님께 감동합니다. 뉴튼수도원에서 '성탄 밤미사'를 드리는 12.24일
밤 9시, 한국은 12.25일 오전 11시로 '성탄 대축일 낮미사'가 거행되는
시간이고, 여기서 성탄 낮미사를 드리는 시간 12.25일 10:30분은 한국시간
12.26일 00:30분입니다.
하느님께 시간은 절대적이 아니라 상대적이요, '영원한 현재'만 있음을
깨달으니 저에겐 이 또한 영원히 아름다운 하느님 체험입니다.
7.
조촐하고 품위있는 아름다운 성탄 밤미사후 20여명 정도, 한 가족같이
떡국을 먹으며 친교를 나누던 따뜻하고 아늑한 모습도 아름다웠습니다.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반영하는 평화로운 분위기의 감동 또한 잊지
못합니다.
지난 성탄 밤은 하느님의 아름다움에 내내 감동했던,
하느님의 아름다움으로 영혼이 깨끗이 샤워했던 거룩한 밤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아름다움의 원천이십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의 이런
아름다움의 체험은 그대로 아름다운 하느님 체험으로 직결됩니다.
이런 아름다움에 대한 감동이 샘솟는 활력의 원천이 됩니다. 값싼
낭만(romanticism)이나 감상(sentimentality)과는 전혀 차원이 다릅니다.
이런 아름다운 하느님 체험이 우리를 감동케 하고 정화(淨化)하고
성화(聖化)합니다. 굳센 믿음의 자양분의 되어 위기와 고난의 순간에
놀라운 힘을 발휘하게 합니다. 오늘 순교한 스테파노가 그 모범입니다.
'그 무렵 은총과 능력이 충만한 스테파노는 백성 가운데에서 큰 이적과
표징들을 일으켰다'
은총과 능력이 충만한 모습은 그대로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반영하는
믿음을 드러냅니다. 필시 평범한 일상에서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깊이
체험했던 스테파노임이 분명합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 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아름답게 살았기에 하느님은 스테파노에게 아름다운 환시를 선사하십니다.
스테파노를 영접하기 위해 하늘 문을 활짝 연 아름다운 하느님이십니다.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스테파노의 아름다운 이 임종어 안에 스테파노의 아름다운 삶이 요약되어
있습니다. 하여 예수님은 당신의 성탄 축일 다음 날을 스테파노의 천상
탄일로 점지해주셨습니다. 우리 눈에 순교축일이지 하느님 눈에
천상탄일입니다. 이런 하느님의 아름다움 체험이 끊임없이 축적될 때
굳건한 순교적 믿음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10,22).
무지에 눈이 가려 아름다운 주님의 이름을 몰라 믿는 이들을 미워하고
박해하는 사람들입니다.
제 좋아하는 시편성무일도의 한 구절도 생각납니다.
"주님을 찬미하라 좋으신 하느님을, 그 이름 노래하라 꽃다우신 이름을"
(시편134,3).
온갖 시련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견뎌 구원 받을 수 있는 믿음의
원천은 아름다운 이름의 하느님뿐입니다.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체험할수록 증대되는 믿음의 힘, 낙관적 인생입니다.
마침내 천상병 시인의 '귀천(歸天)'과 같은 시도 탄생됩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반영하는
미사전례입니다. 주님은 성 스테파노 축일의 아름다운 미사전례은총으로
우리 모두의 믿음을 굳건히 해 주시고 아름다운 삶을 살게 해 주십니다.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신부 -
◈ [수도회] 영 안에 끝까지 견디는 증거/ 기경호(프란치스코)신부님
2014년 나해 12월26일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금
마태 10,17-22(14.12.26)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주십시오."(사도7,59)
영 안에 끝까지 견디는 증거
교회는 성탄 대축일 바로 다음 날 첫 순교자 성 스테파노의 죽음을
기억한다. 사도들에 의해 뽑힌 부제였던 성 스테파노는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식량을 분배하는 일을 하였다. 은총과 능력이
충만한 스테파노는 성령의 힘을 가득히 받아 백성들 앞에서 큰 이적과
표징들을 일으켰다(사도 6,8). 그는 과거에 예수를 죽이기로 결정했던 최고
회의에서 다시 예수님을 힘차게 증언한다. 스테파노는 자신이 선포하는
이적과 표징들을 반대하는 이들에게 개인적인 감정이나 불만을 토로한
것이 아니라 그저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증언했을 뿐이었다.
유대인들이 나서서 그와 논쟁을 벌였으나 그의 지혜와 성령에 대항할 수가
없었다(사도6,10). 그러자 그들은 화가 치밀어 이를 갈았다(사도 7,54).
뿐만 아니라 그들은 성령이 충만하여 예수님을 보라는 스테파노의 말에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아버렸다(사도 7,55-57). 그러자 그들은 스테파노가
하느님을 모독했다고 거짓 소문을 퍼뜨려 결국 돌로 쳐 죽였다(사도 7,58).
성경을 일관하는 큰 흐름 가운데 하나는 선과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성령의
작용이며, 또 다른 하나는 하느님께서 주신 순수본성, 참 자아로부터
멀어져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움직임이다. 이 둘 사이는 늘 긴장과
대립이 있고, 여기에 구원과 멸망, 영원한 생명과 비참한 죽음의 갈림길이
있다. 스테파노는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하느님을 선포하였고 예수님처럼
자신의 생명을 내놓으면서까지 하느님의 선 안에 머물렀고 사랑이신
하느님을 증거하였다.
그러나 자신에 갇혀 자기 유익만을 얻고자하는 이들은 하느님의 선과
사랑,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나눔과 공유는 늘 걸림돌이었고 자기 뜻에
어긋나는 방향이었다. 그래서 논쟁을 해보았으나 성령에 충만한
스테파노를 당할 수 없었던 유대인들은 크게 분노하여 이를 갈았고 결국
스테파노를 죽여버리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스테파노의 죽음을 통하여
결국은 그들 스스로의 어둠과 수치를 폭로한 셈이었다. 스테파노를
죽이려고 그들이 들었던 돌은 자신들의 영혼을 죽음으로 내몰아버린
결정적 증거가 되었다.
우리 자신들의 삶을 돌아보자! 우리는 어떤 때 왜 화를 내는가? 결국 자기
뜻과의 싸움이요, 자기 것을 포기하지 못하는 “소유없이”(sine proprio)의
영성을 망각했을 때 화를 내는 것이다. 화를 내는 것은 내 안에 사랑이
결핍되어 나에게 관심을 더 가져달라는 표시이며, 하느님 뜻보다는 나의
뜻대로 살고싶은 자기 의지의 표현이다. 애정 결핍의 표지라면 하느님의
사랑을 더욱 갈망하고 그 사랑 안에 머물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반면에 내
뜻대로 되지 않음에 대한 분노라면 하느님의 큰 뜻을 따라 그 안에서, 그
뜻을 위하여 내 뜻을 찾아가도록 질서를 분명히 해야 한다.
어떤 경우이든 그것은 모든 선, 으뜸 선이시고 자비이신 하느님을 거부하는
것이다. 일상의 삶에서 이런 거부와 부정, 무질서가 갈등과 혼란, 폭력을
부르고 결국은 죽음의 문화를 만드는 것이다. 혹시 나도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고와 행동을 통해 죽음의 상황을 만드는데 한몫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일이다.
성 스테파노 순교자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 했는가? 그는 어정쩡한
타협을 하지 않았다. 그는 하느님의 생명과 영을 죽이지 않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돌을 던질 때에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주십시오.”(사도 7,59) 하고 기도하였다. 그렇다!
죽음의 문화를 극복하기 위한 하느님의 방법은 폭력이나 보복이 아니라
‘사랑의 죽음’이요 ‘조건 없는 사랑의 수용’이다. 스테파노는 죽음의
상황에서도 끝까지 주님을 버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성령의
이끄심에 순응하였고, 영원히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이신 하느님을
확고히 믿었기 때문이다.
성탄의 기쁨, 그 무엇보다 고귀하고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으며 양보할
수 없는 예수님의 탄생은 스테파노처럼 자신의 영을 주님께 맡겨 드리면서
인내하고 조건 없이 받아들일 때, 영원한 생명, 항구한 기쁨으로 이어져갈
수 있는 것이다. 신앙인의 삶은 “예수님 때문에”(마태 10,18),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10,22) 끌려가고 미움을 받고 죽음에 처해지기도 한다.
오늘도 인간을 위한 ‘사랑의 죽음’을 각오하고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가장 사람다울 수 있도록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견디는”
(10,22) 영원한 탄생의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순교자의 후손들
2014년 나해 12월26일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아버지의 영이시다. >
독서: 마태오 10,17-22
< 순교자의 후손들 >
기쁜 성탄 보내셨나요? 성탄 다음에 첫 순교자 스테파노의 축일이 오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바로 예수님은
순교하시기 위해 태어나셨다는 것입니다.
2011년 9월 순교자 성월을 맞아 가톨릭 신문에 실린 ‘현대의 순교
이야기’는 바로 지금이 그 어느 때보다 더 혹독한 순교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난 2000년 동안 신앙 때문에 목숨을 잃은 사람은 7000만 명을
헤아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중 65%에 해당하는 4550만 명이 20세기에
희생된 것으로 집계되었습니다. <20세기의 가톨릭 순교자들>의 저자
로버트 로열은 그런 면에서 20세기는 그리스도교 순교 역사 안에서 ‘가장
어두운 시기 중 하나’라고 밝히고 있고, 이탈리아의 저널리스트 안토니오
소치 역시 저서 <새 순교자>를 통해 “20세기는 그리스도교 순교사에
있어서 가장 충격적인 시기였다”고 말했습니다.
20세기 들어와 이른바 이 같은 ‘새 순교자’들이 대거 나타나게 된 것은 두
차례 걸친 세계대전, 그리고 공산주의, 나치즘, 독재정치, 다양한 배경의
내전 발생 등이 그 원인이라고 합니다.
오늘날에도 그리스도교인들에 대한 박해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인
복합적 요인들이 결합되면서 더욱 교묘하고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2003년 발표된 ‘도움이 필요한 구호’ 이탈리아지부 보고에
따르면 2002년의 경우 한 해 동안 전 세계에서 1000명 가까운
그리스도인이 신앙 때문에 살해됐다고 합니다. 특히 콜롬비아에서는
2002년 한 해에만 127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살해되는 비극적인 상황을
보였습니다. 특히 중동과 아시아에서는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할 것 없이
여기저기서 가톨릭신자라는 이유만으로 살인, 강간, 방화 등의 범죄가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렇다면 순교가 일어나는 것은 그만큼 성령의 역할이 강력해 졌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약해졌기 때문일까요? 오늘 첫 순교자인 스테파노의
경우를 보면 성령님의 역할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그 사람은 순교로 향할
수밖에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독서를 잘 읽어보면 스테파노를 순교하게 한 장본인은 스테파노
자신도 아닌, 그에게 돌을 던진 유다인들도 아닌 바로 성령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스테파노에게 지혜를 불어넣어 주시어 유다인들이
그에게 반박할 수 없도록 하여 화가 나게 만드셨고 또 그들의 분노가
들끓는 가운데 하느님과 아드님의 모습까지 보여주시면서 결국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가셨습니다. 성령을 받은 이들의 운명은 다름 아닌 순교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도 그러하셨고 성령님을 받은 사도들도
그러하였습니다. 순교자의 길은 성령님을 받은 모든 이들이 가야하는
길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런 글을 인용하며 순교나 희생이 진리를 위해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주장하기도합니다.
“... 순교자들의 죽음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불행이었다. 순교는 무수한
사람들의 마음을 몹시 현혹시켜 왔다. 자기 생명을 진리의 증거로
바쳤다는 그 사실만으로 진리의 가치를 조금이라도 더 높였던 사람이
있었던가? 이 오류의 유혹은 그 매력이 매우 강하다.”
[출처: F.니체, <어떻게 살 것인가>, 해누리 p191]
정말 순교는 진리를 드러내는데 아무런 가치가 없는 의미 없는 희생일까요?
순교를 함으로써 그 가해자들의 잘못이 드러나고 반면 순교자가 지닌
진리가 드러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아벨이 죽음으로써 카인의 잘못이
드러나고 아벨의 제물이 옳았음이 드러나지 않았나요? 사실 진리는 순교
없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가장 소중한 생명을 위해 바칠 수 있는 그 가치는
참 진리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라틴어의 ‘순교’, 'martyrium'은 희랍어의
‘증언, 증거’란 말의 ‘martyrion’에서 온 것입니다. 즉 옛날 사람들도
순교만이 증거의 길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당신은 진리를 증언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그것 때문에 이렇게 잡혀 와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된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가신 분도
성령님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성령께서 오시면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게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요한 16,13). 진정 하느님을
증거하는 것은 우리가 아닌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이십니다(1요한 5,6).
성령님께서는 우리 목숨으로 하느님을 증거하도록 우리를 죽음으로
내모시는 분인 것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죽음으로, 혹은 순교로 향하지
않는 이는 아직 성령을 통한 진리를 깨우치지 못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역사가 반복되는 이유는 큰 틀이 변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당신 성령의 힘으로 세상을 구하려 하시지만 세상은 그 성령의
힘을 따르는 이를 미워합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구하시려는 마음이
변하지 않듯, 세상도 하느님으로부터 구원받는 것을 절대 원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그 옛날에 순교하셨던 것처럼 지금도 순교자가 나오는 것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아니 더 많은 순교자가 나올 것입니다. 그만큼
세상의 힘도 강력해지고 그 세상을 구하시려는 하느님의 작용도 커지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과 세상과의 싸움이 점점 더 치열해 질 것입니다.
그런데 이 치열한 진리와 거짓, 성령과 세상의 싸움 속에서 우리는 어떤
투쟁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스테파노에게 돌을 던졌던 이들도 사실은
하느님을 섬긴다고 믿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스테파노에게
돌을 던짐으로써 성령의 원수임이 드러났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두드러지게 세상과 맞서 순교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세상에 속해있다는
증거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힘으로 세상과 싸워 이겨야하는
그리스도와 스테파노의 후손들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토요일은 연수가 있어서 묵상이 없겠습니다 ^^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인천]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2014년 나해 12월26일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제1독서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는 것이 보입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6,8-10; 7,54-59
복음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아버지의 영이시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7-22
컴퓨터를 켜면 ‘어떤 메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라는 생각을 가지고
제일 먼저 메일 박스를 확인합니다. E-Mail이 보편화되지 않았던
시대에는 우편함을 늘 확인했지만, 이제는 우편함으로 들어오는
우편물보다는 E-Mail이 일상화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아무튼 그리운
사람에게 메일이 오지는 않았는지, 새로운 소식이 온 것은 아닌지 라는
부푼 기대와 설렘으로 손가락을 열심히 움직여서 메일함을 확인합니다.
열 몇 개의 메일이 오기는 했지만 저를 반기는 메일은 솔직히 거의
없습니다. 제목만 봐도 그냥 지워야 할 메일이 대다수이지요.
‘편안한 대화와 이성 친구를 만날 수 있는 곳’, ‘집에서 손쉽게 할 수 있는
카지노 대박’, ‘여성 앞에서 자신감을 찾으세요’, ‘당신을 위해 이 글을
씁니다’ 등등.... 달콤한 유혹으로 자신을 클릭해달라고 하지만, 저를 위한
것이 아닌 단순한 스팸메일이기에 클릭보다는 곧바로 휴지통으로
보내버립니다. 기대와 설렘이 실망으로 변해지는 순간이지요. 이렇게 제게
필요한 메일은 전체 메일 중에 거의 5% 정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컴퓨터를 켤 때마다 메일 박스를 반드시 확인합니다. 왜냐하면
그래도 5%는 꼭 읽어야 하는 메일이기 때문이지요. 그리운 친구나 반가운
지인의 메일이 들어올 수도 있고, 저에게 중요한 정보를 주는 메일이 전체
메일의 5%를 담당하기 때문입니다.
95%가 쓸데없는 메일이지만 그 5% 때문에 반드시 확인하는 저를
쓸데없는 행동을 한다고 그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 5%의 저를
위한 메일이 95%의 쓸데없는 메일을 상세하고도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문득 신앙도 이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신앙생활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으시지요. 보이지 않는 하느님, 또 내게 어떤 말도
해주지 않으시는 하느님. 일상 삶을 살면서 영향을 크게 주지 않는
신앙인데 굳이 간직해야 하느냐고 말씀하십니다. 먹고 사는 것이
중요하니까 그 모든 것을 다 한 뒤에야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하십니다.
하지만 5%의 저를 위한 메일 때문에 메일함을 여는 것처럼, 우리 삶
안에서 크게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 같은 그 신앙 덕분에 희망을 간직하며
기쁘게 살아가신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오늘 우리는 교회의 첫 번째 순교자로 존경을 받는 성 스테파노 축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성인께서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주님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을 반대하는
어떤 말과 행동에 대해 굴복하지 않으셨지요. 그리고 결국 돌에 맞아
순교를 하십니다. 스테파노와 같은 순교자가 날 것을 예상하셨는지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우리의 신앙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내 삶 안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지 않는다고 신앙을 접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끝까지
간직하고 그분께 굳은 희망을 간직할 때 구원이라는 큰 선물을 받습니다.
잡초는 그 가치가 아직 알려지지 않은 풀이다(에머슨).
지휘관이 될 수 없는 이유
칭기즈 칸은 아무리 싸워도 지치지 않는 용맹한 자기 부하 예순베이에
대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예순베이는 아무리 싸워도 지칠 줄 모른다. 그는 모든 사람이 자기 같은
줄 안다. 자기만큼 못하면 화를 낸다. 그런 사람은 지휘관이 될 수 없다.
군대를 통솔하려면 병사들과 똑같이 갈증을 느끼며 피곤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나약한 인간의 몸을 취해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알게 됩니다.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오신 주님, 우리를 이해하고 더 사랑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서울] 하늘진리는 끝까지 견디는 길밖에
2014년 나해 12월26일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제1독서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는 것이 보입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6,8-10; 7,54-59
복음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아버지의 영이시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7-22
하늘진리는 끝까지 견디는 길밖에
친구도 가족도 부부도 마음이나 생각이 서로 다르면 점점 미워합니다.
누구를 미워하는 이유를 물어보면 결국 서로 진리가 다르다는 겁니다.
십인십색이라지만 이것은 물질세상의 당연한 서로 다른 특징 때문입니다.
불변하는 하늘의 진리는 변화무쌍한 세상주장과 힘겨루기를 안 합니다.
그러니 세상의 황금만능이란 힘이 하늘진리를 쉽게 밀어버리고 말지요.
하늘진리는 끝까지 견디는 길밖에 없다고 주님은 미리 알려주신 겁니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오 10,22)”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청주] 끝까지 견디는 이|반신부의 복음 묵상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마태10,17-22)
2014년 나해 12월26일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제1독서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는 것이 보입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6,8-10; 7,54-59
복음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아버지의 영이시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7-22
끝까지 견디는 이
성 치뿌리아노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 존재 자체는 희망과 믿음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희망과 믿음이 그 열매를 맺으려면 인내가
있어야 합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주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10,22). 그러나 막상 어려움이
닥치면 인내한다는 것이 너무 어렵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의 결점에도
불구하고 항상 참아주시고 용서해 주시는데 나는 다른 사람에게 쉽게 화를
내고 미워하기도 합니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라는 것은 그저
구호에 불과합니다. 오히려 공격을 공격으로, 모욕을 모욕으로 갚아야
속이 후련합니다. 내 자신이 용서 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남을 쉽게 그리고 엄하게 판단하면서도 자신에게는 한없이 관대합니다.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된다.”는 사실을 잊고 삽니다.
이러한 우리의 삶에 스테파노는 깨우침을 줍니다. 사람들은 스테파노와
논쟁을 벌였는데 그의 말에서 드러나는 지혜와 성령에 대해 대항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마음에 화가 치밀어 그에게 이를 갈았고
마침내 그를 성 밖으로 몰아내고서는 그에게 돌을 던졌습니다. 사실 이를
갈고 돌을 던지는 이는 바로 나보다 잘난 꼴을 인정하지 못하는 우리
자신입니다. 시기와 질투심이 가득한 나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돌을 던질 때에 스테파노는,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7,59-60).하고 외쳤습니다.
스테파노는 하느님 안에 머물러 있었기에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의연할 수
있었고 오히려 자기를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믿음
안에 있는 사람은 어떤 처지에서든지 주님을 증거 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저 기회가 좋든 그렇지 않든 주님을 전할 뿐입니다.
스테파노는 그 몫을 해냈습니다. 참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언제 어디서나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님을 증거 할 수 있고 자신을 처벌하는 자에게
용서를 베풀 수 있습니다.
성 에드워드는 “나는 비록 두 팔이 잘리고 두 눈을 빼앗기더라도 복수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자기를 못 박은 원수를 위해
기도하시고 용서하기를 하느님 아버지께 청하지 않았습니까?” 라고
말하였습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십자가위의 죽음 앞에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하고 기도 하였습니다. 정말 용서하고 인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 있는 사람은 할 수 있습니다. 믿음 안에 있는 사람은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 같은 양순함”(마태10,16)으로,
강한 것을 부드러움으로 이깁니다.
박해와 모욕을 끝까지 견디라고요? 불가능하게 여겨집니다. 그러나 이미
주님께서 모범을 보여 주셨고 스테파노가 그 길을 따랐습니다. 많은 성인
성녀들의 삶이 그 가능성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그러니 인내심을 잃어버릴
때 기억하십시오! 죽음 앞에 서 계신 예수님을, 그리고 스테파노와
에드워드…성인성녀들을! 그리고 특별히 나의 결점과 허물에도 불구하고
참아 주시는 하느님을 말입니다. 끝까지 견디십시오! 구원이 여러분의
것입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수도회] 천상 탄일
2014년 나해 12월26일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제1독서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는 것이 보입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6,8-10; 7,54-59
복음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아버지의 영이시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7-22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2014년 12월 26일)
천상 탄일
오늘은 스테파노 성인의 ‘Dies natalis’(생일)입니다. 이 땅의 탄생이
아니라, 하늘 탄생을 경축합니다. 우리의 진정한 생일은 이 땅에 태어난
날이 아닙니다. 하늘에 태어난 날이 진짜 생일입니다. 땅에 태어난 날은
어떻게 보면 우리 각자의 죽음이 태어난 날이기도 합니다. 태어난 그
순간부터 생명은 점점 줄어들고 죽음은 점차 늘어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작은 아기로 이 땅에 태어나 죽음을 향해 내려가셨지만 성
스테파노는 큰 사람으로 하늘에서 태어나 영원한 생명을 향해
올라갔습니다. 하느님이 땅의 밑바닥까지 내려오심으로, 사람은
하늘끝까지 올라갑니다. 우리의 참 생일을 오늘, 아니 매일 경축합시다.
날마다 즐깁시다. 스테파노 성인이 ‘개천’(開天)을 본 것처럼 우리도 우리
머리 위로 하늘이 열려 있는 것을 순간순간 느끼도록 합시다. 하늘이 열려
있는 것을 보는 사람은 이 땅을 살면서도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깊이 사는
사람입니다.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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